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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에 실린글

연합뉴스

월간 전라도 닷컴

오페라 하우스 개관 기념작

 

 

                                                        글모음에 대하여                    홈페이지 관리자 문병달

문익점 선조는 목은(이색) 포은(정몽주)과 함께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셨으나
반대세력을 암살하고 왕을 죽인후  왕위를 찬탈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고려사를 기록하면서 반대세력은 역적으로 몰거나, 공적을 줄이는 등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도 모자라서 세월이 흐를수록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왜곡은 확대되었건만 글자에 메달린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①"문익점 면화시배지" 는 "목면시배유지"로 명칭이 부당하게 변경되었고,
② 역사의 수수께기란 책은 목화는 금수품이 아니며 문익점은 덕흥군에 붙어 반역하였고,
    월남 귀양 사실은 후손들이 날조한 것이라는 등으로 흥미를 유발하여 판매부수를 올리고,
③물래를 발명한 문래선조(14세)와 직조기를 발명한 문영선조(14세)를 일부 사전에서 정천익의    후손인  정문래, 정문영이라고 기록되었어도 아무런 의의 제기 없이 팔리고 있습니다
사과와 시정을 요구하고 실행되지 않으면 판매가처분 등의 소송도 불사해야 하건만
일회성 분노로 끝을 맺는 종사관련자들과 후손들(저도 포함)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조상의 제사를 잘 모시면 종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종인들이 계십니다.
후손들에게 종사를 가르치고 종사를 연구하도록 지원하여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교수들의 연구를 지원 하여 많은 자료들이 발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목화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글들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저자님께 일일이 허락 받지 못하고 글을 올린점 양해있으시기 바랍니다.


충선공의 국민사랑의 정신을 펼치기 위하여 부산종친회와 충선공파 종회의 협조로 부산의 주말농장에서 2002년부터 목화를 재배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전국에 목화씨앗을 보급하는 일을 하면서
목화에 대한 자료들을 올리고 있으며 여러분의 목화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일가 님들께서도 좋은 글이 있으시면 일가들고 함께 보시도록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햇솜                          (김여화 님)

오후 내내 햇솜을 얻기 위해 미영 씨를 까발리느라고 손톱이 아팠다. 근년에 들어서 귀하디귀한 이 목화, 혹은 솜꽃, 우리 동네서는 미영이라고 하는 솜꽃을 따 와 솜에서 씨를 분리하는 특별한 행운을 얻었다. 어린시절 시암골에가면 골짜기 사래 긴 밭은 해마다 목화를 심었다. 물론 우리 밭은 아니지만 밭근처에 외할머니 산소가 있기에 그 골짜기는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할머니의 유언이 외손자들 보고 싶으니 날마다 보내라고 하셨던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시암골에 놀러가기를 즐겼다. 거기에 가면 꾸지뽕 열매라든가 겨울에도 고염이나 돌감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봄이면 칡순이나, 찔래순이 자라서 우리들의 주전부리가 많았던 탓도 있다.
목화는 그 잎이 넓고 꽃잎도 크다. 연한 빛의 노란 꽃이 수정이 되면 보라색이나 분홍으로 변한다고 들었다. 꽃이 지고나면 맺히는 것이 다래인데 이 다래가 영글어 이런 가을쯤이면 저절로 갈라져서 흰 솜을 물고 있는 것이다. 열매가 삭과이기 때문에 자연 벌어지는 탓이다. 아욱과라해서 그런지 이파리도 거의 아욱 잎과 비슷한데 예전에는 목화를 소중히 여겨서 다래를 따 먹는걸 막기 위해 밭에서 지키기도 하였다. 열이 한 도둑을 못 지킨다 했듯이 우리는 곧잘 이 다래를 따먹기 위해 시암골을 찾곤 했다.
  거의 잊혀졌던 목화를 본 것은 10여 년 전 순천 낙안읍성에서 음식축제가 처음으로 열리던 때다. 그곳 초가집 울 가에 목화가 피어있고 서숙 등이 어린시절 보았던 고향동네마냥 익어가던 가을날이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우리 손으로 목화를 심기는 사십 여 년 전이니 요즘에야 누가 목화를 심어 딸 시집보낸다고 애지중지 하는 이 없다. 오히려 근년에는 목화를 잊혀지는 옛 고향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관상용으로 가꾸는 자치단체가 생겨났다. 우리 동네도 예외는 아니다. 그곳 면장님이 타 군에 가서 어렵게 목화씨를 구해 와서 면내에 도로주변 화단에 모종을 심고 가정에 나누어 주어서 올해 첫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면사무소 근처에는 잘 가꾸어져 실하게 자라고 다래도 크고 따라서 하얀 솜이 크게 벌어 있었지만 메마른 산길 도로가에 심은 것은 비료를 주지 않아서 아주 매 말라 겨우 한두 개의 다래를 달고 겨우 하나 둘씩 솜꽃을 피웠다. 서리가 온 요즘에도 아직 덜 익은 다래가 붙어있는가하면 오래전에 피어 솜이 빠져 있는 것도 더러 있다. 씨를 구하기 위해 주머니에 따다가 사무실서 미영 씨를 발기는데 그게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제법 손톱이 아플 정도로 말이다. 마흔 살 정도의 사람에게 다래를 보여주며 아느냐고 했더니 어릴 적에 따먹었노라고 대답했는데 하지만 이제 서른정도의 사람들은 다래가 뭔가요? 미영이요? 목화? 반문하기에 설명해 주는 것을 포기했다.
  지난여름 장마가 끝나고 시집올 때 해왔던 목화솜 이불을 뜯어 세탁기에 돌렸다. 예전부터 솜을 빨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30년 만에 빠는 이불솜은 많이 때가 끼었다. 그래도 세탁기가 저절로 빨아주니 예전보다는 얼마나 쉬운가? 겨울에 틈나면 솜을 틀기위해 다 말려서 싸매 두었다. 솜을 뜯어보니 요로 사용했던 건 아이들 키울 때 더러 오줌을 쌌기 때문에 제빛이 아니지만 덮는 이불은 빨아 말리니 햇솜처럼 뽀얀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친정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면서 이불솜을 넣을 때 요는 가운데 조금 값이 헐한 솜을 넣어서 늘 그게 마음이 아팠노라고 하셨는데 과연 빨아보니 다르긴 다르다.
  요 솜은 여러 차례 빨았지만 뽀얗게 되질 않는 것이다. 오늘 도로가에 가서 목화씨를 받기위해 몇 송이 주머니에 따가지고 들어와 씨를 발기는데 그것이 쉽질 않다. 목화씨를 원나라에서 가져온 문익점 선생은 붓두껍에 숨겨 가져오셨다는데   예전 같으면 씨아로 돌리면 금세 하련만 씨아가 있을 리 만무다. 면사무소도 씨를 받기위해 진작 목화를 딴 걸로 알지만 너무 적은 이걸 가지고 씨아를 빌리러 갈 수 도 없다. 몇 시간 동안 씨를 발기는데 미영씨알이 제법 많다. 한 송이는 사각으로 터져 각마다 조각이 네 개가 있고 하나마다 씨는 다섯 개씩 그것도 거의 같은 형태로 씨가 박혀있다. 그러니 한 송이에 씨가 스무 개씩 든 셈이다. 작은 방석 한 개 쯤의 솜이 모이고 씨는 한 움큼이 된다. 까만빛의 씨는 마치 쥐똥같기도 하고 기름을 짜면 면실유가 될 것이다. 그 햇솜은 만져보니 지난번 빨았던 이불솜처럼 뽀얗고 부드럽다. 여러 사람이 햇솜을 만져보며 신기해하는데 문득 어린시절 이 목화를 씨아로 돌려 씨를 빼내고 마당에 멍석을 펼쳐놓고 활시위로 튕기던 어른들 생각이 난다.
   물레질을 하고 솜에서 무명실을 빼던 할머니는 생각나지만 어떻게 했던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씨를 빼고 그 솜을 놓고 활시위를 통통 튕기면 솜은 요즘의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참으로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일이다.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활시위를 튕기고 나면 더불어 머리에 솜을 하얗게 이고 계셨다. 한 송이를 펴서 부풀리면 제법 커다란 솜뭉치가 되는데 햇솜은 참 귀히 여기던 것이다. 과년한 딸을 둔 집에서는 목화를 심고 햇솜을 장만하여 둥실둥실 커다란 뭉텅이로 두었다가 혼인날이 잡히면 동네사람들을 불러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이불을 만들며 덕담을 하던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햇솜은 가볍고 보드랍기는 물론 그 빛도 희다. 볼에 닿으면 포근함이 더없이 고왔다.
  목화밭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곳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에 나처럼 다래를 따먹다가 들켜 혼났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목화에 얽힌 사연은 많다. 목화는 나무도 있다지만 우리가 심는 것은 거의 한해살이풀로 꽃이 접시꽃이나 무궁화처럼 생긴 것도 탐스럽고 꽃받침이 세 개가 있어 분홍빛을 내고 꽃은 희지만 노란빛에 가깝게 피었다가 보라색 또는 분홍색이 되어 진 다음 파란 다래가 달린다. 들척지근한 그 맛은 생과일이 흔치않던 시절에 참으로 좋았다. 다래는 쇨수록 솜이 되어가기 때문에 질기다. 그러기에 연한 것만 골라서 따야했다. 다래를 따내면 그만큼 솜이 적어지니 자연 어른들은 지청구를 하셨다. 다래를 먹으면 말하자면 솜을 먹게 되는 것이다. 햇솜의 보드라운 감촉만큼이나 떫으면서도 달던 다래맛, 내년에는 내 집 울 가에 심어 바라보아야겠다. 목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햇솜을 만들어 쿠션 좋은 방석도 만들어야지…….
  빨아두었던 솜을 틀면 그것도 햇솜처럼 깨끗하고 보드라운데 이제는 내가 늙을 때까지 햇솜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는 누가 그 솜을 간직해 주려는지.

                                                          목화[木花]                          문학철님

하늘에는 목화송이 같은 구름덩이 점점이 희고 /  교정 화단엔 꼿꼿이 허리 세운 일곱 그루 목화
굵지 않은 줄기에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도타운 잎 /  꽃 피어날 자리마다 불꽃같은 잎사귀 세장이
피어날 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다가 다섯 잎 꽃잎을 /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풀어낸다. /
풀려나온 노란색 분홍색 꽃잎사귀 속에는 /  꽃술이 노란방망이로 솟아 있다. /
큰누님 시집가기 두어 해 전부터 이불솜 할 거라고 /  밭 한 자락에 목화 심어 가꾸시던 아버지/
목화 다래 따서 단물 빨아먹고 버린 것 보시고 /  혼을 내시더니 그 누님 시집가서 셋째가 대학 2학년/
아버지 가신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목화 다래를 지금도 따서 씹어보면/
달짝지근하던 옛날의 단물이 입안에 돌까 /  이제는 화단에서 화초로만 자라는 목화/
그래도 목화는 꽃 지우고 다래 키우고 /  다시 꽃피워 하얗게 눈부신 솜꽃 피워낸다. /
저 솜꽃 거두어 씨받아 작은 텃밭 가득 피워내어/  목화 다래 따서 단물 삼키면/ 아버지 목소리 들을 수 있을까 /
노란 목화꽃이 갑자기 흐릿해져 눈 들어 하늘 보니/ 가득하던 목화송이가 엷은 이불솜처럼 퍼진다.


                목화다래가 먹고 싶은 이유(소설가 문순태님의 된장에 실린글)

[지난겨울 척수종양수술을 받고 나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누워 있을 때 뜬금없이 다래가 먹고 싶었다. 배고팠던 유년시절 목화밭에서 어른들 몰래 따 먹었던 다래가 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가 지금가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배고팠던 시절의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열한 살 때 6.25를 만난 나는 누구보다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궁핍의 그 시절, 배가 고팠던 아이들에게 다래는 가장 맛있는 간식거리였다. 가을걷이 전, 산에는 오디, 구지뽕열매, 머루, 으름, 산다래, 딸기 등이 익고 있었지만 아이들로서는 산에 오르는 일이 쉽지가 않아, 목화밭으로 숨어들곤 했다. 목화밭에서는 실컷 다래를 따 먹을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밭고랑에 저절로 열린 주먹만한 개똥참외도 차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목화를 재배했다. 초가을이면 밭에 우북하게 눈이 쌓인 것처럼 목화가 하얗게 피어 온통 순백의 세상을 이루었다. 목화는 단풍이 들 무렵 백색이나 담황색 혹은 홍색으로 피지만 우리 마을에서 재배한 것은 모두가 흰 꽃을 피웠다.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흰 꽃이 지면 다래가 열리고 그것이 익으면 스스로 찢어지고 벌어져, 다시 흰 목화송이가 꽃처럼 피어나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는 목화 다래는 꽃이 지고 나서 갓 맺은 열매다. 그 맛은 육질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으며 달큼하고 상큼하다. 너무 익은 다래는 수분이 없고 섬유질로 가득 차 솜 씹는 것과 같다. 특별히 주전부리할 것이 없는 터라, 아이들은 즐겨 덜 익은 목화 다래를 따 먹곤 했다. 다래를 여남은 개 따 먹고 나서 샘물을 퍼마시면 한바탕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제법 요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극성스럽게 다래를 따 먹는 바람에 목화농사를 걱정한 어른들은 “다래를 따 먹으면 문둥이가 된다”면서 한사코 말렸다. 나는 어느 날 학교에 갔다 도시락도 못 먹고 허기져서 털레털레 돌아오다가 비석거리 참봉네 목화밭에 들어가 실컷 다래를 따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어른들 말처럼 정말 내가 문둥이가 되면 어쩌나 하고 잠을 못 이룬 채 콩닥거리는 가슴 부여안고 끙끙댔던 적이 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나서도 다래가 먹고 싶은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케이크며 바나나 등 아무리 맛있는 것을 다 먹어 봐도 자꾸만 꿈틀거리는 기억속의 그 상큼한 다래 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면서부터 굶주렸던 시절에 먹었던 입맛이 되살아나면서 그것들이 다시 먹고 싶어진다. 찔레도 꺽어 먹고 싶고 송기도 벗겨 먹고 싶다.

앞으로 나는 목화 다래 같은 소설을 쓰고자 한다.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바나나, 머스크멜론, 망고, 파파야 같은 과일보다는 본디 우리 땅에서 열매 맺은 토종 과일의 맛을 느끼고 싶다. 머루, 다래, 으름, 오디, 산딸기 같은 열매 맛을 통해 궁핍했던 고통의 세월과 가물가물한 무채색의 추억을 꼼꼼히 되작거려보고 싶다. 아직도 이 땅의 산에는 우리가 굶주렸을 때 즐겨 따 먹었던 산열매들이 찢어지게 열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별로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무 배가 부르고 입맛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면서도 담박(淡泊)한 옛 맛을 통해, 자꾸 희미해져가는 내 삶의 근원을 찾아가려한다. 맛이 자극적인 외래과일보다는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자리 잡은 토종 열매의 은근한 맛을 한껏 느끼며 변질되어버린 우리의 오롯한 본디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목화 다래를 배부르게 따 먹고 문둥이가 되면 어쩌나 하고 잠 못 이루었던 시절처럼 늘 불안하다. 분명 무엇을 잘못 먹었기 때문이라라

                          오페라 하우스 개관 기념작 ‘목화’

세계적인 섬유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며
대구시립오페라단에서는 개관기념작 ‘목화’(대본 김일영, 작곡 이영조) 연습이 한창이다. ‘목화’는 3막 2장의 창작 오페라인데 1999년 6월에 기초 자료 조사에 들어가 올해 3월에 작곡과 대본이 완료됐다. ‘목화’는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 이야기를 소재로 해 섬유 도시인 대구가 밀라노와 같이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1막에는 이탈리아 밀라노를 배경으로 유학간 패션 디자이너 문추백이 등장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문익점 이야기를 떠올리며, 2막은 과거 원나라를 배경으로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는 과정과 그 때문에 처형위기에 몰리나 그를 좋아했던 향아가 대신 처형당하며, 그녀가 후세에 추백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할 것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이뤄진다. 3막에는 밀라노에서 귀국한 문추백이 대구의 패션쇼 무대에서 패션디자이너로 각광받는 내용이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합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목화의 감독인 김완준 씨는 “개관기념 오페라 ‘목화’의 관람자는 관람 신청 접수를 받은 후 추첨해 초대할 것이다. 무료로 오페라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관람신청은 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며, 문의는 대구시립오페라단(전화 : 623-5859)으로 하면 된다. ‘목화’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첫 공연이며 8월 7, 8, 9일 1일 1회씩 공연될 예정이다.

안/무/의/도 : 대구에 사는 무용가로 언제부터인지 지역의 순원산업인 섬유와 연계된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춤은 종합예술이다.  춤을 추는 무용수, 의상,음악, 조명, 무대미술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관객은 찬사를 보낸다.
의상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들은 천의 질감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무용가들에게 항상 무대배경으로, 소품으로 각광을 받아온 천이라는 소재느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그러나 이제 그것이 표현해야 할 중심이고 보면 오히려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막막한 감도 없지 않다.  진부하지 않게 천을 어떻게 표현 할 것이며,천이 생산되는 기계적인 장면을 인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작/품/줄/거/리
프롤로그 문익점을 생각함
목화 생산을 위해 목화씨를 뿌리기에 앞서, 농부들이 풍요를 바라는 제를 올리듯이 땅의 여신은 씨앗을 품을 준비를 한다. 여신은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씨앗을 품는 대지를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게 만든다. 문익점의 혼이 목화의 화신처럼 나타나고, 여신은 대지의 힘을 그에게로 옮겨 준다.

제1막 목화씨 뿌려지다.
목화의 화신은 온 땅에 기운을 돋우고, 목화 생산을 위해 문익점은 어렵게 구해온 씨를 뿌린다. 목화재배의 성공으로 백성들은 삶의 윤택함을 누린다. 그 자손들이 물레를 만들고, 기계 이용은 목화생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제2막 섬유의 닻을 올리다.
대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섬유공업을 시작하고, 그 발판은 서문시장의 부흥과 함께 섬유산업을 양말공장의 발달로 이어져, 섬유산업은 활기를 찾는다.  달구벌의 경제를 발달시키는 초석이 된 섬유는 그 산업의 부침으로 경제를 움직이지만여전히 희망으로 남는다.

제3막 밀라노프로젝트로 희망을 갖다.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밀어닥친 경제의 한파는 그회생의 계기를 밀라노프로젝트에서 찾는다.  염색과 패션, 섬유에서 진일보한 산업계획은 달구벌의 꿈이다. 섬유산업의 메카로 다시 일어설 달구벌, 그 위용을 세계에 알려 보자.

                         北 목화재배 선두주자 삼지강 협동농장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황해남도 재령군의 삼지강협동농장은 북한에서 목화재배로 유명한 농장이다.
    7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시기 목화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공예작업반을 가진 단위는 전국적으로 여기밖에  없었다"며  삼지강협동농장의 올해 목화 생산목표는 1정보(3천평)당 1t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신문에 따르면 북한의 각지 협동농장은 최근 목화 솜에 대한 수요를 자체  해결하기 위해 재배 면적을 확대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본보기 단위'인  삼지강협동농장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농장은 몇 해 전까지 전국의 농장에 목화 종자를 보내줬으며 지금은  황해남도 농장에 종자를 공급하고 있다.
목화생산에 필요한 기술강습도 진행돼 각지에서 농장 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양순(40) 작업반장은 올해로 고(故) 김일성 주석과 그의 부인 김정숙,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농장을 방문한 지 60돌을 맞는다며 "정보당 1t 이상의 목화를 생산해 본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은 목화에서 천연 솜을 얻고 옷감 및 공업용 섬유로 널리 쓰일 뿐만 아니라 고급 종이, 기름, 사료용 찌꺼기까지 얻을 수 있다며 재배를 권장하고 있다.

전래동화

장차 왕자를 도와 나라를 잘 이끌 지혜로운 왕자비를 찾고 있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한 끝에 왕자비를 뽑게 되었습니다.   어여쁜 소녀들이 임금님 앞에 나왔습니다.
임금님이 물었습니다.  "꽃 중에 어떤 꽃이 제일이라 생각하는고."   장미, 모란, 국화 등등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린 소녀가 목화꽃이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어린 소녀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목화는 예쁜 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무명을 주기 때문이옵니다."

임금님이 소녀들에게 두 번째 질문을 냈습니다.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인지 아느뇨."
역시 대답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장 어린 소녀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보릿고개라고 생각하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녀의 입에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오자 임금님은 정말 기뻤답니다.  보릿고개란 요즈음에는 없지만, 예전에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는 채 여물지 않아 굶주리던 사람이 많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를 냈습니다.  오, 이제 비가 덜 오는군. 모두들 궁궐 지붕의 기왓골이 몇 개인지 알아 오너라."
소녀들은 우르르 나가 세기 시작했지만 세다가 잊어버리고  또 다시 세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소녀는 임금님께 나아가  기왓골이 모두 백 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어떻게 그리 빨리 셀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네, 처마 밑의 기왓골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자국을 세어  보았나이다."  

이제 네 번째 문제입니다.  "저기 강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황소의 무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꼬? "
황소를 죽여서 고기를 달아 본다는 소녀, 큰 저울을 만든다는 소녀 등등 갖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임금님은 어린 소녀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어린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배에 황소를 실어서 강물이 뱃전에 차오른 곳에 표를 한 후 황소를 내려 놓습니다."  "호오, 그래서." 
"배에 돌을 실어서 방금 표한 곳까지 물이 차오르도록 돌을 싣습니다.  그 돌의 무게가 황소의 무게가 될 것입니다."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며 어린 소녀를 왕자비로 택했습니다. 나중에 그 소녀는 훌륭한 왕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가도가도    한없는   목화꽃                 -월간전라도닷컴-

곡성군 겸면천 뚝방길

이 꽃이 목화꽃이란다! "얼매나 반가운가 몰라, 얼매나 고마운가 몰라" 겸면천 제방길 따라 끝모르게 이어진 목화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은 그 꽃 만나 반갑다는 말을 노래가락처럼 하신다.  
"이 꽃을 어디서 볼 것이여. 인자 영 잊어뿐 줄 알았네" 그저 꽃 한 가지 다시 보게 된 흐뭇함만은 아닐 터이다. "꽃만 이쁘가니. 흑허니 솜이 달리믄 그것이 더 볼만허네."
'목화' 하면 누구나 문익점이라는 이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갔던 그이가  어렵사리 붓대롱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그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때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목화 몇 송이를 땄더라는 그 장면까지 실감나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오늘날로 치면 '국제종자스파이'인 셈이나 그의 공로는 훗날 조식이라는 선비로부터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받을 정도로 칭송되었다. '외유'중에도 그 나라 사람들 입성이 반반한 것을 보고는 헐벗은 백성을 생각한 공무원이니 그만한 치하를 들어 마땅한 일일 터이다.

종자만 들여왔다고 옷이 될 일인가. 재배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으나 3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 온 나라에 목화씨가 퍼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이의 집념이다. 게다가 목화에서 씨를 없애고 실을 뽑는 것을 궁리하다 마침내 장인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원나라 승려에게서 씨 빼는 '씨아'와 실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아내 베를 짤 수 있게 한 것도 그이의 공이라 한다.

혹은, 실을 뽑는 도구를 실제로 만든 사람은 사실 문익점이 아니라 그의 아들 문래여서 그 도구가  '물레'이고, 그 손자 문영이 베를 짜는 법을 고안해 내서 그 베가 '무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몸을 감싸는 옷이 돼 온 귀한 농작물이 바로 이 목화다.
그러나 목화는 1970년대 이후 값싼  수입 원면과 화학섬유에 밀려나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 1980년대 이후에는 목화밭을 구경하기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다.
"옷만 해 입었가니. 이불 맨들어서 따숩게 덮기도 허고..." 딸 시집보낼 작정이 서면 밭귀퉁이에 꼭 심어 거뒀다는 그 '미영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래 덮다가도 투둑투둑 두들겨서 햇볕에 말리거나 다시 타 주면 새 솜처럼 보송보송해지는,요샛사람들 좋아하는 '천연솜'이다.

"이것을 또 묵기도 솔찬히 묵었네. '미영다래' 묵을라고 침께나 생켰제." 목화꽃 지고 나면서 달리는 게  다래다. '떨떠름허기도 하고 달큼허기도 한' 그 맛이 무어 그리 맛났을까만,  끼니 잇기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눈으로 드는 호사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더 귀했을 법도 하다. 그 귀한 꽃길이 십리나 이어진다.
꽃을 머금은 불꽃 모양의 초록 이파리, 이제 막 피어난 하얀 꽃, 피어난 지 좀 지나 연분홍꽃, 더 지난 건 진분홍꽃,
시드는 빛마저 고운 자줏빛꽃... 가도가도 한없이 계속되는 목화꽃길을 걷는다.  속으로 채곡채곡 덕을 품은 사람을 만나는 듯한 꽃길이다.  
이 꽃들 지면서  다래 달리고, 다시 거기에 하얀 솜꽃들 피어날 것이니 다시 찾아올 기약을 해보는 꽃길이다.

 

                             대구에 거는 희망

                                            이호림(도서출판 인간과자연사 발행인)

우리는 누구도 더 이상 타인일 수 없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눈은 지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눈이 냉혹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주체의 자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첫머리부터 ‘타인의 눈’을 언급한 이유는 대구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필자 자신의 자의식 탓일 것이다.
필자는 서울사람이면서도 대구에 자주 드나들면서 대구에 대해 이미 남다른 애정을 느끼고 있기에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이웃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출판사 관계 등의 일로 대구 시민들을 많이 접촉하면서 서울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과는 다른 대구인들 만의 정서적 공감대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에 역사적 기여를 한 것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그들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색평론」의 새 문화 심기

그러나 필자 역시 얼마간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출판인이기에 “대구를 보면 녹색평론사만 보인다”(박광숙)는 조금은 과장된 표현조차도 무엇에 앞서 출판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95퍼센트 이상의 출판사들이 상업적 편의를 위해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데, 녹색평론사는 대구에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의 생태환경과 관련된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아무리 작은 출판사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협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출판사가 대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 이익과 무관한 잡지(녹색평론)를 86호까지 내놓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이 출판사는 뜻 깊은 단행본들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예컨대 ‘오래된 미래’는 성자들의 나라 티베트의 생활방식을 통해 세계화에 따른 개발지상주의의 반작용과 그 폐해를 되돌아보게 했다. 이처럼 녹색평론사는 중앙의 문화독식과 편식증에서 벗어나 척박했던 지방문화를 일깨우면서, 양질의 문화를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통의 대구답게 피어나고 있는 이러한 희망의 싹들을 돌이켜보면서 필자는 대구 시민들에게 의견 삼아 몇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요즘 대구 문화의 허파 구실을 해온 ‘(주)제일서적’이 빈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괴로운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제일서적’은 지금 36년여의 소중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활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난관은 경제적 불황과 관련된 도서 구입 감소,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 등의 지역진출, 전자매체를 통한 값싼 오락물 등의 범람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외적 요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제일서적’의 안이한 경영과 독자관리의 부실도 이러한 화를 자초한 요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일서적의 현재의 처지는 필자가 은연 중 이 지역에 대한 유감이 싹트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기도하다. 대구의 문화가 피폐해지다 못해 이제는 불모에 가까운 도시가 되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의 발전은 해당 지역에 뿌리내린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이 얼마나 건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며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문화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지속성은 그 자체로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문화를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이는 문화의 산업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에 더없이 중요하다.


지역에 만연한 불합리를 거둬들이자

이런 점에서 필자는 대구 시민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 어떤 상태인지 늘 궁금했다. 필자가 돌아본 대구 시내 중심부는 서울 못지않게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해묵은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이 가운데 늘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정치 이야기인데, 사안을 조리 있게 파고들기보다는 모든 잘못은 상대에게만 있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필자 나름의 결론은, 대구 시민들의 정치적 염원과는 사뭇 다르게 지역이 얻은 실질 소득은 아무것도 없는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토해내는 불만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옛 정치권력에 대한 향수와 만성적인 심리적 의존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민정서를 쉽게 알 수 있는 곳은 대중교통과 대중음식점 등이다. 필자가 대구를 6개월 여 드나든 기간 동안 이용했던 대중교통은 철도와 고속버스였다. 철도는 국가 기간산업인 동시에 국민을 위한 서비스 업종이다. 그렇다면 대구 시민과 외지인들을 위해서 현재 시설을 현대화시킨 대구역에 KTX를 정차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필자가 대구를 드나들 때마다 아쉽게 느끼는 대목이다. 서울역이나 대전역, 부산역을 기억하는 방문자라면, 지금의 동대구역을 빠져나올 때 느끼게 되는 다소의 황량함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다. 대구시민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외지인은 긴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 역 출구를 막 벗어났을 때는 그 도시 특유의 정서와 힘을 감회와 함께 느끼고자 한다. 지역을 맡아 행정하시는 분들은 이와 같은 점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자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홍보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속버스에 대해서도 다른 도시와는 다른 어색함이 느껴진다. 시내 노선버스와는 분명 다르므로 고속도로 인근에 터미널을 갖추고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가고자 하는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서울이 그렇고 부산 등 다른 도시들도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다. 그런데 대구의 고속버스 운영 실태는 어떠한가? 고속버스가 이웃해 있는 동대구 인터체인지로 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동대구 터미널에서 일단 출발하면 서부 정류장으로 가서 손님을 한 차례 더 태우고 서대구 인터체인지를 통하여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얼핏 보면 지역민에 대한 편의를 고려한 듯하지만, 지하철이 개통되기 전과 후는 다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도시를 관할하는 대구시의 전근대적이며 소아병적 불합리 행정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대구 북부 지역에 한해서는 서대구 터미널을 이용하는 것이 고속도로 진입 등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또 하나 내세우는 이유이지만, 이것도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할  고속버스의 일차적 기능을 무시한 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교통 체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대도시의 도심을 30여 분 이상 지체시켜가며 관통해도 되는 것인지 즈음에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관계자에게서 이 불합리한 처사가 지역 국회의원의 공약 사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를 듣고 필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구 시정(市政)은 어디로 간 것이며, 이는 지역이기주의에 개인이기주의가 더해진 대구 지역만이 갖는 불합리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무기력증과 그에 따른 거칠음

방문자들은 대중음식점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상한 광경에 부딪치게 된다. 주문한 밥과 반찬들이 쟁반에 담긴 그대로인 채 식탁에 놓여진다. 대구의 식당들 가운데 열에 여섯, 일곱은 이런 식으로 손님을 대접한다. 그런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셀프서비스나 쉬운 상차림 등으로 보아 고개 끄덕이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요즘 이 지역에 알게 모르게 만연되어 있는 총체적 불만과 착종된 사회적 무기력증이 그런 식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제나 근본과 도리를 따질 줄 아는 대구 사람들이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보이는 그런 모습은 예의는 고사하고 성의 없는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방문자들은 그것을 불친절로 여기고 당연히 모욕감으로 느끼거나 불쾌해질 수밖에 없다.

각 나라와 지역들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래서 방문자들에게 자기네의 고유풍속을 있는 그대로 정성과 친절을 다해 보여준다. 우리가 문화의 진수를 맛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대접을 받았을 때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만 보아도, 예전의 대구는 분명히 그들 나름의 삶의 기품과 예의가 남달랐다.

필자가 대구에서 겪은 불합리한 현상과 이상한 광경을 먼저 이야기한 것도 대구의 전통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 데에서 비롯된 반사 심리일 수도 있다. 대구에 불어 닥친 이 같은 달갑지 않은 변화의 바람에는 분명히 어떤 원인이 있을 터이고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언젠가부터 싹터온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를 일소하고, 대구 지역 특유의 품격과 가치를 복원시키는 일이 무엇에 앞서 시급하다.


문익점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을 기리자!

대구가 속해 있는 영남지방은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본산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중심이 되어온 곳이다. 특히 대구는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의 중심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이 꽃핀 곳이다. 이런 점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을 만한 역사적 인물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이 아닐까 싶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문익점 선생은 최초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하신 분이다. 목화는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특히 대구 시민들은 그분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왜 그런지는 대구 경제가 제일 좋았던 시절이 언제쯤이었고, 그 때의 중심 경제재는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대구에 있는 동안 문익점 선생과 섬유공업도시와의 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대구시민의 모습은 지역에 실사구시 정신을 일깨우고, 경제적 바탕을 마련해준 분에대한 도리가 아니며, 지금까지 대구시차원의 기려드리는 제전 하나 없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은인에 대한 배은망덕한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또한 대구시민들의 근본을 놓고 볼 때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섬유산업도시로 입지를 굳힌 대구는 지금 패션의 중심지로 도약하려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문익점 선생과 목화, 그리고 대구의 섬유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인조섬유가 범람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자연섬유’라는 점에서 목화가 차지하는 상징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국내에서는 섬유산업을 낙후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편견에 불과하다. 세상이 아무리 IT산업 등 첨단산업의 고부가 가치를 선호한다고는 해도 섬유산업에 기초한 패션산업이 죽었다거나 줄어들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인간은 의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섬유산업은 대한민국 판 산업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산업적 입지를 최초로 닦은 역사성을 띠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구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본산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은 삼성그룹도 ‘삼성전자’ 이전에 ‘제일모직’과 ‘제일합섬’ 등을 바탕으로 오늘의 입지를 굳혔다. 삼성그룹의 ‘제일합섬’과 마산의 ‘한일합섬’ 등이 1977년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을 당시의 주역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국가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은 영남지방, 그중에도 대구의 섬유산업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의 IT산업 등으로 성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익점 선생은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먼 기원 속에 홀로 우뚝하신 분이다. 이런 점에서 문익점 선생의 탄생지이자 최초의 목화시배지인 경남 산청 지방의 지역민과 이를 산업으로 일군 대구시민들은 자부심을 한껏 누려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대구는 국내 세 번째 큰 도시로서 자부심을 누려도 좋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무력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통계로 보면, 이 지역의 다양한 산업들은 명목상의 나열일 뿐 경제적 동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인근에서 발전한 구미에 비해서도 저만치 뒤떨어져 있다.

2005년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구미는 국내 총 수출고의 10퍼센트 이상인 3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시 차원의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는 같은 기간 내 34억 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기초 경제단위의 희망수치가 한자리 수 미만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다가는 지방화 시대의 재정 자립도는 고사하고 현 대구시의 원대한 청사진과도 크게 다르게, 중앙정부에 의존하여 꾀죄죄한 시정을 펼칠 수밖에 없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무력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필자는 한마디로 대구 시민들이 시민 모두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야심만을 앞세운 몇몇 분들의 허황됨과 급조된 정치논리에 현혹되고, 이에 휩쓸리게 되다보니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이 주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 까닭에 70년대 우리나라와 대구의 경제를 선도하며 경제개발의 과실을 맛보게 했던 섬유공업을, 이후 적절한 연구와 개발을 제때에 할 수 없었던 잘못된 환경이 급기야는 섬유산업을 사양 산업으로 전락시킨 결과가 되지 않았는가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감히 한 말씀 더 드리고자 한다. 이즘 대하는 대구 시민은 내면적 실체보다는 외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유구한 전통에서 쌓여진 지역의 근본은 제쳐두고 필요 이상으로 패거리 현실정치에 민감하다 보니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역민 특유의 화끈함이 긍정적 에너지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근래 대구에는 이상하게도 여러 유형의 대형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한때는 돌이키고 싶지도 않은 최대의 지하철 참사도 겪었다. 그때 우리 국민은 대구 시민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서민들의 생활 터전인 서문시장이 화재로 인해 참담한 몰골을 드러내 놓고 있다.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서민들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중앙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이 시급히 세워져야겠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지역안정이나 시민들의 정서에 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민심이 불안해지다보니 말씨와 행동도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대구는 전통적 대도시답지 않게 치부가 계속 불거지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더 이상의 불상사는 용납될 수 없기에, 하루속히 그 근본원인을 찾아내서 사전에 예방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문익점 선생의 나라사랑이 왜 서울이나 광주, 부산이 아닌 이 대구 지역에서 싹터서 한국경제의 텃밭을 일구어내게 되었는지, 이차에 대구시민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구 시민은 이 텃밭의 경제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가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절절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재도약의 계기가 발견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정치권력에 대한 관심은 잠시 접어두고 지역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지역 경제를 살려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그 동안 이 지역 민심을 토대로 정치적으로 득세한 분들의 처세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지역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다는 정치 명분을 내세웠지만 애쓴 것과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지역사회 전반을 끝 간대 없이 추락시켜 놓았다. 대구지역이 면면히 쌓아온 올곧은 전통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은 것이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즉흥적이거나 어설프게 다루면 후에는 후유증이 거세게 돋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후유증의 무거운 짐은 지역을 지키게 마련인 지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마련이다. 현재 우리 모두가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모든 책임을 밖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먼저 지역의 기존 정치인들과 이에 편승해왔던 또 다른 분들의 자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역민들은 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대구의 경제가 더없이 어려운 이때,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전통에 뿌리내린 대구만의 정신을 되찾자

지금도 늦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대구가 소중히 지켜온 전통적 가치를 복원시켜야 한다. 문익점 선생을 이 지역의 실사구시 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무미건조하고 책임감을 결여한 정치과잉 등의 들뜬 정서를 타파하고, 널리 퍼져 있는 패배주의적 치기와 자학적 불신을 거둬들여야 한다. 문익점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함께 민족 자주사상 운동의 상징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을 대구의 양대 정신으로 삼아 이를 대구만이 지닌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체험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공간, 즉 ‘섬유박물관’이나 ‘문익점기념관’ 등의 문화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와 함께 섬유산업의 연구와 개발을 통한 재건 의지를 종횡으로 다지고, 이를 발전시켜 나갈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면, 머지않아 대구와 대구 시민에게 잠재되어 있는 특유의 열정은 활기차게 되살아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구는 밀라노 못지않은 세계적인 섬유산업과 패션의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산업발전과 대구의 섬유산업이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새삼 깊이 인식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 지역이 담당했던 선도적 역할을 너끈하게 인정하고 지원 방안을 충분하게 논의해야 한다. 우선은 지역의 자존심을 지켜 주어야 한다. 다음은 섬유공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특별 예산을 편성하여 육성하는 일이다.

정부는 7년여 년 전 대구시가 시민의 염원을 담아 기획했던 ‘밀라노 프로젝트’를 지역만의 관심사로 방치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실천과제로 삼아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향후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지금의 IT산업, 기계 산업 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서는 세계적으로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의식주를 우선으로 하는 전통산업이 필요하며, 바로 여기에 안성맞춤인 것이 섬유산업인 것이다.

정부는 대도시 대구가 경제적으로 슬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에 미치는 악 영향이 어떤 것일지에 대하여서도 심사숙고하고 이를 조기에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에 관한 한 대구는 결코 변방이 될 수 없음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삼성그룹은 “밀라노 프로젝트‘에 동참해야 한다

삼성그룹은 이 지역에서 입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지역경제를 북돋우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것은 ‘밀라노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계열기업을 지역에 진출시키는 일이다.

밀라노의 섬유산업 성장 역사는 올해로 900여 년에 이르며 발전해 왔다. 대구의 섬유산업 성장 역사 또한 머지않아 700년에 이르게 된다. 삼성그룹은 대구에서 ‘삼성상회(삼성물산)’로 출발하여 섬유 전문 업체인 ‘제일모직’, ‘제일합섬’ 등을 세웠고 1970년 대 전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전폭적인 혜택을 입었다. 즉 대구 섬유산업의 발전역사는 곧 삼성그룹이 오늘의 터전을 일군 성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섬유산업이 명맥을 이어가며 발전을 거듭하려면 정부와 대구 시 그리고 삼성그룹 3자 간의 특별한 협력이 따로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기업일수록 연고하는 지역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섬유산업에 관한 한 밀라노 같은 역사적인 도시의 후광이 기업 활동의 신뢰기반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와 같은 도시의 전통은 한나라의 지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해진다면, 우선은 이 지역의 전통적 기풍이 회복되고 그간의 허망한 삶과 불안정한 정서도 극복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바탕 위에서 대구의 경제와 문화는 다시 한 번 날개를 펼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대구를 통하여 비로소 문익점 선생님의 목화씨앗 도래와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대구 경제가 살아야만 대한민국의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다.



대구를 상징하는 꽃은 목화여야 하는 것을

아울러 지역을 상징하는 꽃도 눈부시게 피었다가 맥없이 뚝뚝 떨어져버리는 지금의 목련이 아니라 목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선정 기준이 단순히 꽂이 예뻐서가 아니라 지역과 상관하여 역사성 등에서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먼저여야 하기 때문이다. 목화는 꽃도 볼 만할뿐더러 산업에 대한 상징성에서도 이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영조 때,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비로 책봉된 것도 그런 까닭에 연유했다. 무슨 꽃을 좋아하느냐 하는 영조의 물음에 목화를 좋아한다고 대답한 혜경궁 홍씨는 “왜 좋아하느냐”고 재차 묻는 임금님께 “꽃도 완상할 만하고 백성들의 의복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목화에 대한 생각, 백성에 대한 생각, 이는 오늘날 대구에서도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대구 시민의 안식처이자 문화공간인 ‘제일서적’이 살아나는 데에 대구 시민의 몫이 크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대구 시민 여러분은 서점이야말로 해당지역의 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 그리고 서점과 그에 따른 공간은 소유관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대구 시민 모두의 자산이요 힘이라는 사실을 헤아려주시기 바란다.

그것이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향토서점이라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서점이 즐비했던 지난날의 중앙로와 동성로는 이제는 빈자의 거리로 내몰려 허전한 거리가 되고 말았다. 마치 그 모습이 오늘 대구의 총체적인 실상을 보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문익점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과 영남지역의 위대한 문화적 전통과 자주독립정신이 대구에서부터 되살아나 대한민국 전체로 힘차게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대구와 대구 시민들의 발전과 행복을 빈다. <끝>

 

큰애기들의 목화 따는 노동요

'한 나무에 꽃이 두 번 피는 것이 뭔가?' '열매 맺은 뒤에 꽃 피는 것이 무엇일까?' , 꽃 중에 제일 아름다운 꽃은 뭐지?' 이들 수수께끼의 답은 모두 목화이다. 꽃의 모양보다 따뜻한 입성과 솜이불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화이므로 목화가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목화나무에 꽃이 두 번 핀다는 말은 목화꽃과 함께 목화 자체도 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목화 열매가 달리기 전에 연분홍색 목화꽃이 핀 다음에 열매가 열리는데, 이 열매를 흔히 다래라고 한다. 다래가 단단하게 익으면 마침내 터져서 목화가 피는 것이다. 물론 이 목화는 꽃이 아니고 열매의 씨앗이다. 그러나 열매가 벌어져서 흰 무명이 꽃처럼 피어나므로 면화(棉花) 또는 목화(木花)라고 하며 한결같이 꽃으로 인식한다. 목화 따는 노래를 들어보자.

광 넓고 사래 진 밭에   목화 따는 저 큰 아가    목화는 내 따서 주마    나에 품에 잠들어라
잠들기는 어렵지 않소    목화 따기가 늦어가요


경남 진양 사는 이필수 아주머니 소리다. 10월이 되면 목화나무에 열린 다래가 무르익어서 알밤 터지듯이 하나 둘 터지면 목화 따는 일이 시작된다. 일은 힘들지 않으나 허리를 굽혀서 오랫동안 해야 하는 탓에 아주 지루하다. 노래처럼 폭도 넓고 이랑도 긴 밭에서 목화 따는 일은 더욱 따분하다. 목화 따 는 일은 으레 처녀들의 몫이다. 길 가던 총각이 목화를 따 줄 터이니 자기 품에 잠들어라고 유혹을 하자, 처녀는 잠들기 어렵지 않지만 목화 따는 일이 늦는다고 거절한다. 완곡하면서도 명분 있는 거절이다

사래 지고 장찬 밭에    목화 따는 저 처녀야    부이 부이 내 따 주까   송이 송이 내 따 주까
내사 싫소 내사 싫소    길로 가는 선비거든     길만 보고 갈 탓이지    내 집 물어 뭐하시오
내 집일라 오실라만     구름 서산 넘어서서     안개 서산 내 집이오


예천 사는 최수연 할머니 소리다. 이 노래에서는 '부이 부이' 내 따 주까 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목화는 꽃이나 다름없으므로 꽃을 헤아리듯 '송이 송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런데 '부이 부이'는 뭔 말일까. 삶은 감자가 타박해서 마치 분말가루가 일어나듯 하는 것을 두고 흔히 '부(분)이' 난다고 한다. 흰 빛을 내는 채색도 분이라고 한다. '부이 부이'도 이와 같이 목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흰 빛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이다. 최수연 할머니는 "목화를 따기 싫어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를 따 주겠다는 선비를 마다하며 '길 가는 선비거든 길 이나 가라'고 충고한다. 앞의 노래와 달리 목화를 따 주겠다고만 했지 자기 품에 잠들기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를 거절한다. 길가는 선비가 뜻 없이 공연히 목화를 따 줄 일이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따라서 꼭 찾아오려면 구름 서산 넘고 안개 서산 넘어서 자기 집으로 오란다. 구름 서산도 알 수 없는데 다시 안개 서산을 넘어서 오라니 그것은 이 세상 주소가 아니라 딴 세상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구름 서산이나 안개 서산에 길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길 가는 선비가 목화 따는 처녀를 넘보는 일은 곧 길 아닌 곳을 가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시적인 은유라 할 수 있다.

하늘에다 목화 갈아    목화 따러 누랑 가꼬    정생원네 맏딸애기    수영도령 둘이 감세

진양 사는 김상기 할머니 소리다. '하늘에 목화를 갈아 목화 따러 누구랑 갈까?' 마치 천상 선녀나 되는 듯 하다. 푸른 가을 하늘에 흰 목화가 핀 양상은 솜털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것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운 광경이다. 따라서 목화 따러 가는 일이 지루하고 따분한 일터에 가는 길이 아니라 즐거운 산책이자 발걸음도 가벼운 나들이 길이다. 그러므로 정생원의 맏딸애기는 목화 따러 누구랑 갈까 하고 헤아리다가 마침내 수영 도령과 둘이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수영 도령은 물론 평소에 사모하던 총각일 터이다. 그렇다면 목화 따러 가는 길이 가슴 설레는 데이트 코스나 다름없다.

빈터에는 목화 심어   송이송이 따낼 적에   좋은 송이 따로 모아   부모 의복 장만하고
서리 맞이 마구 따서   우리 몸에 놓아 입세


예천 사는 전성분 할머니 소리다. 목화 따는 일이 혼자 감당하는 따분한 노동인가 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님과 더불어 하는 꿈같은 나들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화 농사의 실상은 이처럼 두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분한 노동도 아니고 사랑하는 님과 데이트도 아니다. 목화가 입성을 장만하는 가장 긴요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중한 생업의 하나일 따름이다. 따라서 목화를 따는 마음도 다르다. 그저 이것저것 마구 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일찍 맺어 크게 벌어진 좋은 목화송이와, 제대로 여물기도 전에 서리를 맞아 채 벌어지지도 못한 목화송이를 분별해서 따고 가려서 모은다. 그래서 좋은 송이로 가려 낸 양질의 목화로는 부모님 의복을 장만해 드리고 서리맞이로 설익은 목화에서 따낸 질 낮은 목화로는 우리 옷에 놓아 입자고 한다. 목화는 무명실을 뽑는 원료이자 솜의 재료이기도 하다. 목화 따는 일을 고역이나 나들이와 같이 엉뚱하게 인식하지 않고 그 본질을 제대로 포착하여 분별 있게 하는 사람은 심성도 착하다. 목화를 어떻게 가려서 따고 가려 딴 목화를 누구의 입성으로 장만하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결코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박노해(시인)

꽃은 단 한 번 핀다는 데
꽃시절이 험해서
채 피지 못하는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한 생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 몸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 피워가는 꽃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슬프도록 환한 목화 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세상이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앙상히 뼈마디로 메말라가며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그대 따스하라.

 

열 알의 목화씨(독후감)

서울수유초등학교  5의4 권주희

고려의 충신,문익점!
햇살 한줄기 따깝게 비추는 여름,시원한 옷을 입고,선풍기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여름을 보내는 요즘과는 다르게 좋지 않은 옷을 입으며 여름을 보냈던 옛날이 궁금해 옷감의 변화를 가져왔던 문익점 선생님의 위인전을 읽어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으셨던 문익점 선생님께서는 충숙왕 16년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때만해도 고려가 원나라에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왜 우리 나라는 많은 세월을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는지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문익점 선생님께서는 어렸을때부터 효자였다고 한다.위인전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거의 효자였는데 생각해보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런 마음도 들었다.
 앞으로는 꼭 잘해드려야지…
 또한 문익점 선생님은 과묵하고,착한 성품으로 집안일도 잘하고,공부도 잘하여 31세 때 과거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나섰고,서장관으로 중국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드디어 목화씨를 가져오시나보다!’
하는 생각에 숨을 죽이고 아주아주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도망을 간 취유의 모함으로 귀양을 가시게 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이익을 나라의 이익보다 중요시 여겨 나라의 충신을 귀양보내다니…
 거기에다 원나라 황제는 자기의 부하 혹은 자기 나라의 신하도 아닌데,왜 다른 나라 신하를 귀양보내는지 억울하기만 했다.자기 나라는 부패하고 자신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다니 지도자로서 알맞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원나라 황제가 작은 나라라해서 한 나라의 신하를 그렇게 대하니 왕으로써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목화씨 15알을 붓두껍 속에 넣어 아슬아슬하게 국경을 빠져나와 우리 나라의 옷감을 한층 더 좋게 발전시키고,원나라 스님으로 인해 무명철을 짜는 일까지 이루신 문익점 선생님이 정말 자랑스러워마음이 뿌듯했다.
 이글을 읽는 동안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문익점 선생님의 지혜에 감탄하고,나라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벼슬에 미련이 없고,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백성만을 생각하는 강직한 성격을 가진 효자 문익점 선생님을 보며 오늘날의 정치가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민교류의 큰별 문익점   (2005년. 3. 15 한겨레신문 16면)

 

- 널리 백성을 따습게 할지니 -

얼마전 한 정당인이 동료 의원이 외국에서 들고 온 자그마한 선물용 포장쌀 샘플을 소개하면서 의원 저마다가 ‘문익점이 되어 달라’고 독려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받아들일 만한 외국의 좋은 아이디어로서 그것이 바로 ‘현장정치’라는 것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간에, 600여년 전에 살고 간 문익점이 오늘 우리들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직감케 한다.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서 추모를 뜻하는 사당 수가 많기로는 최영 장군과 충선공 문익점이 쌍벽을 이루며, 국가에서 사당을 짓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주요 부조묘의 주인공도 문익점이다. 그만큼 문익점은 우리겨레의 사랑과 모심을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받는 위인이다.


고려말 문반으로 관직 진출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문반 출신으로 여러가지 관력을 거치면서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에 자의반타의반 휘말려 부침을 거듭하다 보니 그에 관한 기록이나 평가에는 이론이나 왜곡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 전설적 요소마저도 끼어있다. 충절이나 효심, 학문도 출중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부민(富民)정신에서 오는 목화씨의 반입이다. 그 옛날 몇 알의 목화씨를 들여다가 우리겨레의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목면공’, ‘문화영웅’으로서의 그의 교류사적 업적은 커다란 현실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문익점’이 필요한 것이다.

고려 말엽의 문신이며 학자인 문익점은 1328년(혹은 1329년, 1331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낙향한 선비의 둘째로 태어나 열살 때 대유학자 이곡의 문하생이 되었다. 20살 때 시경만을 가르치는 국립학당 격인 경덕재에 들어갔고, 23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향시에 급제했으며, 33살 때는 공민왕이 새로 지은 궁궐인 신경에서 실시한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 벼슬은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김해부사록이다. 이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순유박사로, 그리고는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핵심기관인 사간원의 좌정언에 발탁되었다. 재사에 따르는 승승장구의 관력이다.


‘충절 행적’ 기록마다 엇갈려

이 무렵 공민왕이 실시한 국권회복 정책과 친원파 숙청으로 인해 고려와 원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원나라 순제는 일방적으로 그에게 내린 인수를 철회하고 26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한다. 이에 공민왕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해결을 시도했으나, 원은 사절단마다 매양 억류해버린다. 그래서 왕은 다시 1363년 3월과 4월에 사절단을 각각 파견하면서 문익점에게 문서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 직책을 맡겼는데, 어느 사절단에 속했는가 하는 기록부터가 엇갈리면서 그의 원나라에서의 활동과 귀국 시기 및 목화씨 재래 등에 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있다. 예컨대, <고려사>에는 그가 덕흥군에 아부했다가 덕흥군쪽이 패하자 1364년에 ‘득목면종(得木綿種)’, 즉 ‘목면 종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했다고 하며, 조선조의 <태조실록>에는 원에서 돌아올 때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1464년에 편찬한 <가장(家狀)>을 비롯해 남평문씨의 가전을 집대성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1819년)에는 이와 정반대의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고 하면서 원제와 덕흥군쪽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내 지킨다. 그러자 원제는 42일간 구류했다가 그래도 불복하니 남방인 교지(운남)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원 유배 귀국길에 목화씨 반입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가 조선조의 건국에 제동을 건 고려인들의 행적을 폄하했던 경향이나, 문익점이 귀국 후 처벌되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도 충신의 예우를 받은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덕흥군 아부설’은 일종의 낭설로 판단된다. 이렇게 문익점의 3년간 귀양살이 여부가 기록에 따라 다르며, 따라서 원으로부터의 귀국 연대도 3년간의 차이(1334년과 1337년)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이 금지되어 목화씨 10개를 붓뚜껑 속에 감추고 들어왔다는 기록은 사적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 그의 절절한 애국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가공 윤색한 전설적 일화라고 짐작된다. 2세기 경 중국 공주가 누에씨를 모자솜 속에 감추어 호탄(현 신쟝 위구르자치주)에 전해주고,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신부가 인도 북부로부터 역시 누에씨를 지팡이 속에 숨겨 몰래 로마로 반출했다는 유사 일화도 있으니, 굳이 허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그밖에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반출금지품인가 아닌가와 선비로서 밀반출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등 이러저러한 시비 거리도 있다.

1398년(혹은 1400년)에 70살을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문익점은 생전에 나라가 진흥하지 못하고 성인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한 세가지 점이 걱정된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으로 지어 불렀다. 바로 이러한 우국충정의 일념에 불탔기에 그 숱한 사람이 원나라를 오가면서도 무심했던 목화를 그만이 눈여겨 보고 헐벗은 백성들의 옷감을 마련코자 씨를 구해가지고 와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면화 재배에 전념해 결국 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생활·문화·산업 혁명적 변화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의 전래와 재배 및 목면의 생산은 우리나라 직물사 뿐만 아니라, 산업구도나 생활문화에도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 제작의 단초를 열었으며, 탈지면은 지혈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되었다. 내구성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전래와 그 생산물인 목면은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우리겨레의 생활영역을 전례 없이 넓히고 풍부화시켰으며, 사화발전 전반에서 가위 혁명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래서 퇴계 이황은 그의 목면 전래를 통해 이 나라의 의관문물을 일신시켰다고 하고, 남명 조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라는 시를 지어 칭송했으며, 우암 송시열도 “이전의 사람도 문공(문익점)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도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이후의 이후에도 역시 문공 같은 이는 없을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적이 지대한만큼 국가의 포상도 성대했다. 고려조 우왕 때에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고, 조선 정종 때는 그가 세상을 뜨자 묘사를 짓게 했으며, 태종 때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 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부민후(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했다. 실로 문익점이야말로 문명교류사에서 보기드물게 목화씨의 수용과 무명의 전파란 장거로 국민을 복되게한 부민교류의 큰별이다.


일본은 전파 100년만에 재배

목면 전파에서 특기할 것은 조선의 목면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15세기 초 조선 태종 때부터 ‘청목면’이란 이름의 목면이 일본사신에 대한 하사품 중에 포함되기 시작하다가 20년도 채 못되어서는 하사품 중에서 주종을 이루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앞을 다투어 매해 수천 필씩 조선의 면포를 무역해갔다. 17세기 초 에도시대에 출간된 일본 최고의 농서인 <청량기(淸良記)> 등 사적에 의하면, 일본은 ‘오닌의 난’(1470~1480년)을 비롯한 전란이 발발하여 군복 같은 옷감 수요가 급증하자 해금정책을 취하고 있는 중국 명나라와의 거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를 들여가게 됐으며, 우리보다 약 100년 후에 단작작물로 목화재배를 시작했다. 요컨대 교류사에서 보면, 일본의 면직업은 문익점에 의한 간접전파의 결과물이다. 그러던 일본의 면직업은 우리를 앞질러 근대화를 선도한 산업으로 도약했다. 조선조의 면업장려정책으로 인해 17세기 중엽까지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면작이 이루어지고,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직포를 하사할 정도로 면업이 발달하고 그 질이 높았으나, 그 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면업은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만 머뭇거리다가, 급기야 망국과 더불어 조락하고야 말았다. 뼈저린 역사의 교훈이다.              정수일 교수

 

文益漸의 생애와 木綿 傳來 事蹟의 검토

                文致昌  辯 「家狀」의 내용을 중심으로 -김해영교수 (경상대학교)

머리말
    1. 문치창의 가장과 삼우당실기        1)문치창의 가장
    2. 가장의 발견과 상우당실기의 편간
    3. 가장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      1) 출생과 생장   2) 원 사신과 덕흥군 사건    3) 재원 행적과 목면종의 전래
맺음말

머리말
익점은 경상도 강성(현 산청군 단성) 출신으로 고려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목면 종자를 가져와 이를 전파시킨 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가져온 10 餘枚의 목면 종자가 그의 고향에서 기적적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됨으로서 이후 목면 재배법은 같은 시기에 새로이 습득하게 된 직조 기술과 함께 온나라에 전파되었다.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진 목면업은 농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고 의생활을 비롯해서 생활 문화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울러 조선왕조의 경제 정책과 수취 양식, 유통 질서 등 국가 경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목면 종자의 전래가 초래한 여러 국가적 공헌은 이후 문익점에게 그 공적이 돌아가게 되었다 목면의 보급에 따른 공적에 대해서 일찍이 秋江 南孝溫은, "한 집안으 로 말미암아 고을이 혜택을 입게되고, 한 고을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혜택을 입게 되었으며, 만세토록 천지와 더불어 무궁히 그 혜택이 끼칠 것이다‥‥
그 깊고도 높은 공적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세에 '木綿公'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목면의 전래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공적임은 말할 나위 없다.

한편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면,그는 道學의 창명과 덕행 및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金宗直을 비롯해서 鄭汝昌, 金宏弼, 曺植, 李滉, 宋時烈 등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그가 끼친 '衣被生民之功'을 찬양하는 한편, 그의 道學과 德行 忠節을 더불어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1)

문익점의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 나라가 3백년 전 이래 衣冠 文物이 및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江城君이 목면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이 강성군 보다 훌륭할 수는 없다"라는 극찬을아끼지 않았다.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과 남평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간에는 그의 생졸 연대와 在元 기간, 그리고 목면 종자의 전래 및 재배 시기와 관련되는 사실 관계의 기술에 있어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서 그의 재원시 행적과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있어서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해 『고려사』열전과 『삼우당실기』는 서로 상반되는 기술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주로 남평문씨 문중에서 발행한 『삼우당실기가 참고되고 있다. 필자는 『삼우당실기』를 중심으로 문익점의 행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家狀」을 주목하게 되었다.
2)
이 「家狀」은 무슨 까닭에
서인지 오랫동안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1808년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본고는 문치창의 「家狀」을 중심으로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서 몇 가지 의문되는부분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그의 생졸 년월과 재원시 행적 및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 등이 본 연구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문치창이 「家狀」을 찬술(1464년 찬)하게 된 배경과 「家狀」 발견(1808년 발견)을 전후로 해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는 변모 등애 대해서 밝히고자 하였다. 3)

1. 문치창의 가장과 삼우당 실기
  1)문치창의 가장

가장(家狀)은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세조 10년(1464)에 문익점의 행적을 기록므로 정리한 것이다 그가 이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은 이 보다 앞서 세조 7년4)-론1) 겨울 선조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三從兄과 같이 서울에서 丹城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4)
그는 이 때 宗家에 들러 선대에 남긴 遣蹟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가 종가에서 본 것은 병오년(1426)의 화재로 타고 남은 나머지 가운데
일부로서, 그나마 당시 화재를 면한 것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그는 이대로 방치해서는 세월이 흐르면 더욱 없어질 것으로 판단하여 주위에서 선조의 행적과 관련있는 자료들을 찾아 모으고, 그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참고해서 이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한다. 5)

  따라서 家狀의 기록 내용 가운데는 문치창 자신의 판단과 추정이 개입됨으로서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사실 관계를 잘못 기록할 수가 있다고 본다. 물론 문치창은 문익점의 증손이기에 증조 문익점의 행적과 관련해서 집안에 전승되어 오는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지만 그가 이 때 단성을 방문한 것은 일찍이 전에 없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는 세조 7년(1461) 당시 문치창이 단성에 이르러선조 삼우당의 유적지를 보면서 감회에 젖어 쓴 詩와 함께 詩序가 남아 있는데,6)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사년(1461) 겨울 나는 서울로부터 龜城에 이르러7) 도중에 선조께서 사신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기를, "저 나무는 우리들의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고, 저 언덕 저 흐르는 강은 또한 우리의 선생께서 낚시질하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고삐를 놓핀 방황하여 눈을 들어 산하를 둘러보니 오래된 나무는 가지가 적어 엉성하고 찬물 흐르는 강은 눈을 내뿜는 듯하여 나를 위해서 감회를 돕는 것 같았다. 8)
그리고 고을 사람들은 다 선조를 존경하여 우러러 칭송하기를, "선생의 공은 다만 한 고을이 힘입은 바가 아니라, 한 나라가 힘입은 바이고, 다만 한나라가 힘입은 바일 뿐만 아니라 만세가 힘입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9) 선조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문치창으로 하여금 증조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 보존해야겠다는결심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삼우당실기』 속에 실려있는 「家狀」이라고 하겠다.
 

문치창은 문익점의 증손으로서, 문익점의 장자 중용(中庸)의 손자이고, 부는 승손(承孫)이다.
祖 中庸은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공적에 대한 음덕으로 태종조에 사헌부감찰의 벼슬에 특배되었고,
10)
그 뒤 사간원 정언의 벼슬을 거쳤음이 확인되는 만큼,11) 태종조에 관도에 오른 이후로는 상당 기간 고향을 떠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치창의 父 承孫도, 『남평문씨족보』에 따르면 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戶曺佐郎에 이르렀으며 문치창 역시 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감찰의 벼슬을 거쳤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런 만큼 문치창이 家狀을 짓게 된 계기가 된 세조 7년의 단성 방문은 그로서는 전에 없었던 경험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家狀」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순조8년(1808)에 남평문씨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海島에 살고 있는 문익점의후손으로부터 뜻밖에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12)
현재 文益漸이 남긴 遺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가 순조 19년(1819년)인데, 이 초간본 삼우당실기의 발행은 바로「家狀」의 발견이 이를 촉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우당실기』는 문익점의 제 18세손 文桂恒의 주도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삼우당실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가장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문계항의 다음 설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삼우선생이 내게는 17대조이시다, 돌아가신지 400여년에 세대가 綿遠하고 宗祠屢乏하였다. 선생이 지으신 詩文과 疏章이 적지 않았겠지만 처음에는 집안의 화재로 잃고 다음에는 병화로 소진되어 탕연히 전해지는 것이 없었고 중간에 수록한 것으로 단지 '家傳' 한 본이 있었으니 대개 天順 甲申에 감찰공 致昌이 지은것이나 이 또한 잃어버렸다 이후 전하는 것은 특별히 각 집안에서 기록한 약간의 私乘 뿐이었다 지난 병술년에 단성의 사림 朴思微가 찬한 행적기 한 권은 道川院蹟으로 인해 만든 것이고 또 무신년에 冠山에 사는 宗丈 泳光 씨가 간행한 공신록은 여러 집안에 소장된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도답襲巾衍한 문자일 따름이어서 大義가 궐약하고 錯亂된 것이 파다하며 또 년월과 시대가 상호 거릇되어 뒷날 의혹을 일으킬 곳이 심하였다. 지난 무진 여름에 다행이 족보를 간행하는 일로 인해서 이른바 「家傳」 한 卷을 얻었으니 바로 天順 8년에 遺集한 것이었다. 나는 곧 손을 씻고 책을 펼치니 훤하게 마음의 눈이 열리었다 이로부터 어리석고 식견이 좁은 줄도 모르고 외람된 생각을 품기를, 지금까지 선조의 행적에 관해서 잘못 되었던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다 . .이에 선조의 행적에 관한 여러 이름있는 글과 諸賢이 남긴 문집을 열심히 찾아보고, 비록 한마디 말이나 짤막한 글도 증거와 신빙성이 있으면 애써 한군데로 모았다.
13)
즉 문계항은 문치창이 지은 家狀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면서 그 동안 그가 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가졌던 여러 의문이 풀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급기야 그간에 잘못 알려져 있던 문익점의 행적을 바로 잡아 고치는 일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계항의 주도로 이루어진 『삼우당실기』의 초간은 이렇듯 「家狀의 발견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家狀」에 나타난 문익점의 행적에관한 기술이 현전 『삼우당실기』의 삼우당 행적에 관한 내용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우당실기』는 家狀 발견 이전에 있어서 알려져 있었던문익점의 행적에 관해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 잡은 결과물이기도 하므로 이에대해서는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 「家狀」의 발견과 『三憂堂責記』의 編刊
앞서 보았듯이, 『삼우당실기』는 초간 당초부터 「家狀」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행적이 중심이 되어 편간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삼우당실기』는 문익점 후손가에서 그 이전에 편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과는 차이를 지닌다고 할수 있다.
삼우당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여러 글들을 모아 정리하려는 노력은 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나며,
이는 주로 문익점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에 대하여 賜額을청원하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문치창이 가장을 지은 이래 오랫동안문익점의 행적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기록정리 작업도 없었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 「行蹟記」라는 것이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행적기」가 만들어지는 숙종 34년은 단성 유림이 朴恒泰를 疏首로 해서 道川書院의 사액을 청원하던 해였다
14) 그러므로 이 때의 「행적기」는 도천서원의 청액을 위한 근거 자료의 확보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15)

  그 뒤 영조 42년(1766)에 단성 도천서원의 원임으로 있던 朴思微의 주도로 『忠宣公行蹟記』가 편찬되었는데, 당시 박사징이 쓴 「忠宣公行蹟記序」에는 『충선공행적기』의 편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에 행적기가 있었던가 없었던가는 이제 들어 알지 못하나 지난 무자년(1708)에 고을의 父老들이 여러 명현이 기록해 놓은 몇 가지 글을 대강 써서책자로 만들었으나 갑신년(1764) 가을에 業廳이 화재를 입어 재가되었다. 국조 역대왕의 포증은 국승에 실려있는 것으로서 기록하고 혹 고려사에』 베끼고 혹은 선현들의 기록한 것을 모은다든가 또는 문씨족보와 승람에 실려있는 것 중에서 채택해서 모아 『忠宣公行蹟記』라 이름하였다‥‥16)
즉 이 때의 『충선공행적기』는 「家狀」의 존재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당시관찬 사서에 나타나는 (國朝列聖衰贈)과 (高麗史) (先師所記) (文氏譜書) (勝覽所栽)를 참고로 하여 문익점의 행적을 정리 기술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충선공행적기』 이후 『삼우당실기』에 앞서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물로서 현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 12년(1788)에 文泳光이 편한 『功行錄』이다. 17) 이 
공행록』은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전승 내용이나 관련 자료를 다 양하게 수습하여 편집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삼우당실기』가 나오기 이전에 있어서 당시까지 알려진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기록의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는 『공행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행록』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문익점이 즐거한 시기를 우왕 9년(홍무 16년 계해, 1383)에 비정한 자료를 많이 수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서 추정하건대 현전 『삼우당실기』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정종 2년(1400년)으로 하게 된 것은 바로 「家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壽간의 발견은 무엇보다도 문익점의 사망 시기를 고려말이 아닌 조선왕조 개국 이후였다고 하는 사실을 드러 냈다는 점이 무엇보다 주목된다.

   『공행록』에서 문익점의 졸년을 우왕 9년에 비정한 것으로는 "강성군 충선공 부민후 삼우당선생"이라는18) 제하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고, 또 영조 48년(1772)에 李漏가 찬한 (神進碑銘 倂序)와 정조 9년(1785)에 黃景源이 찬한 "묘비명 병서"의 졸년 기사가 그러하다 이들 모두 문익점이 홍무 16년 계해(1383, 우왕 9년)에 병으로 졸하며, 이 때 조정에서 특별히 예장을 명하고 효자비를 세워 정려하였다는 것이다.

  『공행록』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이 언급되어 있는 모든 기록이 이처럼 흥무 16년으로 나타난다면 당시에는 문익점이 조선 개국 이전에 졸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셈이다. 문익점의 졸년이 조선 왕조의 개국에 수년이나 앞선 우왕 9년(1383)이 아니라, 조선 왕조 개국 후 수년이 경과한 정종 2년(1400)이라는 「家狀」의 기록은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의 기본 줄거리를 새롭게 살펴보게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李漏가 찬한 문익점의 (神道碑銘)이나 황경원이 찬한 문익점의 묘비명 가운데 문익점의 졸년과 관련된 내용은 그 후 고쳐 바로잡지 않으면 안되었고,그러한 이정 작업의 흔적은 현전 『삼우당실기』에 실제로 남아 있기도 하다. 19)

이 밖에 (江城君忠宣公富民候三憂堂文先生)에는 그가 使行으로 入元한 시기를 甲辰(1364)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당시 원으로 가는 사행에는 德興君이 上使, 문익점이 副使, 崔擺가 從事官이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여,20) 『삼우당실기,와 비교해서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음도 엿볼 수 있다. 
1870년 『三憂堂實記』의 編次를 보면 (世系) (年報) (文) (衰典) (經述) (追錄)의 여섯 편에 序文과 跳文이 붙어있다 21) 이를 1766딘 박사휘가 편한-충선공행적기』와 1788년 문영강이 집록한 『공행록』과 비교해 보면, 『삼우당실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모는 삼우당의 생애에 대한 '年報'가 비로소 나타나고, 연보의 내용이 충실을 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삼운당의 생애에 대한 연보가 충실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雰냐의 발견으로발미 암은 것 이 었다

 

ll. 「家狀」 所載 文益漸의 行蹟

1) 出生과 仕覆
...아들 中庸은 아비의 喪을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고, 이어서 어미의 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시묘하였으며, 상을 마친 뒤에는 그대로 晉陽에 숨어 있다.
25)라고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태종 원년 당시는 이미 문익점이 사거한지 적어도 수년이 경과되었음이 확인되고, 따라서 그의 졸년은 「家狀」에 나타난 것처럼定宗 2년(1400)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문익점의 생애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의 하나는 그가 태조 7년에 사망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그의 사망시 나이는 70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익점의 출생년은 1328년(충숙왕 15년)이 된다. 그런데 그의 과거 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고려조의 科擧事蹟에 따르면 문익점은 공민왕 9년(1360) 당시 년30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에서 역산하면 「家狀」에 나타난 대로 고려 충혜왕원년(1331년) 신미 출생 기록에 합치한다. 26)
따라서 현재로서는 문익점이 즐년당시 년 70이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공민왕 9년 그가 과거에급제할 당시 나이 30이라는 前朝 科擧事蹟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어느 한기록이 잘못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27)

  「家狀」의 출생년도가 「前朝科擧事蹟」의 기록에 부합하는 것은 문치창이 「가장을 찬할 당시 그가 종가에 소장된 문서 가운데 방목이나 교지(홍패)같은 것을 참고하여 선조의 출생 연대를 추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家狀」에 나타난 그의 졸년이 문치창이 추정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그의 추정 근거는, 「家狀」에 나타나고있듯이, " 定宗 2년에 禮葬을 명하고 祭田을 하사하고 墓祠을 세우도록 하였다"라 는28) 사실과 어떤 관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9)

「家狀」의 기록이 官濯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30) 문익점의 생애는 주로 그의 재원시 행적이나 귀국 시기 및 목면 시배 시점 등을 두고 관련 기록간에 상위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와 관련해서 그의 관력에 대해서도 『實錄』과 같은 官撰기록과 「家狀」의 내용 간에는 상위한 내용이 없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그의 관력의 대체를 살피기 위해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 기사에서 해당 내용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左司議大夫 문익점이 卒하였다. 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으로 아버지 文淑宣은 과거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諄兪博士로써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使 左侍中 李公遂의 書狀官으로 원에 같다‥‥ 洪武 乙卵年에‥‥ 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左司護大夫에 이르렀다가졸하니, 나이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 江城君을 贈하였다.
31)
이상 (졸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관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익점은 공민왕 경자년에 급제한 후 처음 金海府 司錄에 임명되고, 계묘년 左正言에 승진되어 원에가기 직전에는 순유박사였고, 원에서 귀국한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며, 그 뒤 목면 보급에 따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洪武 을묘년에 典儀注簿에 제배되며, 그 후여러 벼슬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런데 「家狀」에 따르면, 문익점은 사행 이전 시기인 신축년에 藝文館 直講, 임인년에 承奉郎, 계묘년에 사간원좌정언에 이르고 이 때 언관으로 상당한 명성을얻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원에서 귀국하는 해인 1367년에는 中顯大夫 藝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直拜되나, 휴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이해 겨울에成均館 學官에 선발되며, 다음해인 1368년 겨울에는 禮文館提學 兼成均館司成이된다. 기유년 가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행하고 喪制를 다한 뒤에도 병으로 거동을 못하다가 그가 다시 벼슬에 오르는 것은 계축년(1373)으로 나타나고 이 때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에 제수되나, 이해 겨울 정몽주 등과 함께 北元 使臣의 접견을 항의하는 소를 올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淸適郡守로 좌천되었다. 그 후 왜구의 침략과 모친상을 겪은 뒤, 무진년(1388) 가을에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兼서연동지사를 제수받았으나, 다음 해 昌王 2년(1389) 8월에 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恭讓王 2년(1390) 8월에 다시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書筵同知事 兼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는 것을 끝으로 이해 11월에 신병으로사임을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2003년 5월 30일 경상대에서 발표

표2 太祖實錄』 卒記와 「家狀」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官歷

 년도

    家狀

  實錄

        綜合

  1360

  及第

及第 金海府司錄

  及第. 金海府司祿

  1361

  藝文館 直講

 

  禮文館 直講

  1362

  承奉郎

 

  承奉郎

  1363

  좌정언

순유박사 좌정언

  순유박사 좌정언

1363 ~ 1367

在 元

1367

中顯大夫藝文館提學兼知製敎

 

  中顯大夫藝文館提學兼知製敎

1368 

中顯大夫藝文館堤學成均館司成

 

中顯犬夫藝文館提學兼成埼館司成

1368 ~ 1373

在 江城

1373 

中顯大夫左代言右文館提學兼知製敎

 

中顯大夫左代言文館提學知製敎

(冬) 淸道郡守

 

(冬) 淸道郡守

1375

 

  典儀主簿

典儀主簿

1375 ~ 1388

강성현에 머무름

 1388 

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書達同知事

 (官至)左司講大夫

가장과 같음

 1390

左司議犬夫右文館提學兼成均館大成

 

가장과 같음

 

『실록』 졸기와 『실기』의 가장에 나타나는 문익점의 관력을 비교 열거하고, 이를 종합하여 표로 나타내면 위의 (표 1)과 같다. 이상 『실록』과 「家狀」에 나타난그의 관력을 고찰하건대 양 기록간에 모순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문치창의「家狀」이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에 나타난 그의 관력과 모순없이 종합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이 家乘 혹은 家藏 文書를 토대로 작성했던 것이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이 점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사실 관계의 확인에 있어서 가장이 신뢰할만한 자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2) 元 使行과 德興君 事件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가 사행으로 元都에 간 시기와그 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의하면, 그가使行으로 元에 간 시기는 공민왕 12년(1363)으로, 당시 그는 左正言에 승진되어 計稟使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원에 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실록』에는 이처럼 그가 원에 간 시기가 공민왕 12년이고, 또 그가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 자격으로 갔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지만, 후대에 기술된 그의 행적에 관한 여러 기록에는 흔히 그가 원에 간 시기를 갑진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며32) 그가 서장관의 자격으로 간 사실도 분명히 명기한 경우도 그다지 찾아지지않는다. 33)

  한편 『高麗史』의 문익점 열전에 따르면, 이 때의 사행에서 문익점은 德興君 측에붙어서 원에 머무르다가 덕흥군이 패함으로 인하여 귀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34) 이 때문에 그가 원도에 머문 기간과 귀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그가 원으로 갈 무렵에 진행되고 있었던 공민왕의 폐위와 덕홍군 옹립 사건의 시간적 추이와 국내측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것은 元 順帝 22년(1362) 12월이었다. 35) 이 사실은 곧 바로 고려에 소문으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며, 공민왕은 이 소문을 접하자 朝臣들 가운데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을 것에 대비하여 吏部尙書 洪師範을 西北面體○使로 삼아 진위 여부를 조사케 하는 등 즉각적인 조처를 강구하게 된다 36) 한편 당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해 있던 福州(安東) 행재소를 떠나 개경으로의 환도를 서둘러, 이듬해 공민왕 12년 1월에는 청주에 이르고, 2월에는 다시 청주를 출발하여 이 달에 개경 興王寺에 이르러 백관으로부터 환도의 하례를 받고 이 곳을 임시 어궁으로 정한다. 37)  贊成使 李公遂 일행이 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개경 환도 직후인 공민왕12년 3월이었다 38) 이 때 이공수 일행의 사행은, 그 동안 홍건적의 난으로 불가피복주(안동)에 까지 피난하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그로 인하여 그 사이 원 조정과의 정상적인 사절 왕래가 불가능하였던 사정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행으로서, 이 때의 表文에는 공민왕 폐위의 부당성 등을 호소하는 내용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당시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에 책봉한 사실을 이미소문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면상의 사행 목적 이외에 원도에서의 동정을살피려는 의도가 수반되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하튼 공민왕의 폐위와 덕흥군의 고려 국왕 책봉에 항변하는 내용을 전달하기위린 사철단은 3월의 이공수 일행이 아니라 이 해 4월에 파견된 密直商議 洪淳 同知營直司事 李壽林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이었다. 39)

이 때의 사절단은 바로 前月윤3월에 있었던 金庸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파견된 사절단이기도 하였다.  소위 '與王寺의 變'으로 일컬어지는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고려 국왕에 책봉한 원제의 명에 내응한 고려측 附元 세력의 준동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시해로까지 이어질번했던 이 때의 책동은 崔瑩 등 무장 세력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한 직후 공민왕이 원에 파견한 흥순 등의 사절단은 성격상 앞서 이공수 등의 사절단과는 달랐다.
즉 이 때의 사절단은 원에서 공민왕 폐위하고 덕흥군을 옹립하려는 책동의 부당성을 직접 적이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사절단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의 사절단이 원의 御史臺, 中書省, ○事院 등에 百官 ○老의 뜻이라고 하여 보내진 항변서의 내용을 보면, 공민왕의 폐위 결정은 元都에 있는 고려의 不送한 무리들이
조장한 허망한 말을 元朝가 그대로 따른 것이니 이들 흉도들을 강력히 처벌하여 報功去○의 의지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문익점이 원도에 간 것이 『실록』에 나타난대로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였다면 당시 그의 사행 목적은 개경 환도 이후 그간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과의 외교적 교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정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高麗史』에 의하면 공민왕 12년 3월에 원에 간 이공수의 서장관은 문익점이 아닌 林璞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40)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태조실록』의기록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家狀」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갔다는 사실은 나타나고 있으나, 어떤 어떤 사 행단의 일원으로 갔는지를 명기하고 있지 않다. 「家狀」의 내웅 중에는 그가 이공수 를 만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공수는 문익점 보다 앞서 원도 에 왔다고 기술하고 있고, 당시 그는 원으로부터 태상경의 관직을 받고 있었다고 한 다. 41)

또한 가장에는 그가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이에 앞서 국가에 틈이 많았으니, 서로는 紅賊, 남으로는 왜구가 걱정거리였다 또한 元朝로 부터 見責을 받아 앞서 원에 들어간 모든 사신이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또 봄이 다 가도록 正朔의 ○赦를 행하지 않았고 출국한 사신은 돌아오지를 않으니, 안밖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하고 두려워 마음을 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을 다시 보내어 사정을 아뢰어 원제의 마음을 깨치케하는 일을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윈으로 가는 것을 꺼했은나 선생은 서장관으로 원나라로 갔다 42)

 

이 「家狀」의 내용에 의하면 그의 사행단은, 원에 들어간 많은 사신이 돌아오지못하고, 또 봄이 다 가도록 매년 천자의 正朔 때 관례적으로 행하는 ○赦의 조칙이이르지 않아, 안밖으로 소식이 끊기어 의심과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려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본국 사정을 알려 원제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의 사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에 따른 사행은 앞서 이공수 일단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흥순,이수림 사행단의 사행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흥순, 이수림 일행이 원의 御史臺나 中書省 등에 올린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小邦이 賊을 평정하고 길을 통한 뒤에 獻○ 賀正 謝恩 賀聖節 등의 使者가 서로 이어졌으나 아직 한 사람도 본국으로돌아온 자가 없고, 또 봄이 다가는데도 正朔의 ○賜가 없고 출국한 사신이 이르지않으니..."라고 하는 내웅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43) 
따라서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서가 아니라, 덕흥군의 국내측 내응 세력을 일망 타진한 뒤에 출발한 사행단의 일원으로 갔다면, 『고려사』 열전에 나타난것처럼 "사신을 받들어 원에 감으로 인해 머물러 덕흥군에 붙었다(奉使如元 因留附德興君)"라고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44)

 

                                     3) 在元 行跡과 木綿種의 齋來
가장은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에 대해서 상세한 내웅을 담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그의 재원시 행적과 관련하여 『고려사』나 『실록』의 기사와 상충되는 부분이 바로 그가 귀국한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귀국 시기는 바로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과 체류 기간 등에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선 「家狀」에 나타나는 그의 재원시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익점은 처음 원으로부터 禮部侍郎이란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한다. 45) 당시는 元帝가 이미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명한 시기였으므로 元都에 이른 사신들은 대부분 덕흥군으로부터 僞書와 僞官 등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위서나 위관은 덕흥군 측에 협력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덕흥군 즉위 후의 관직 보장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家狀에 따르면 문익점은 원도에 이른 처음 元帝는 그를 예부시랑에 제수하였는데, 이는 덕흥군으로부터 받은 僞官이 아닌 원조의 관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던 중 자신의 이름을 趙可達이라고 하는 자가 찾아와 그를 은근히 유혹했으나이를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뒤에 알고보니 그가 이 때 만났던 조가달이라는 자가바로 덕흥군이었다고 한다. 46)

  그가 덕흥군의 제의를 거절하자 다음에는 원제가 황제의 위세로서 덕흥군을 따를것을 종용하였는데 이 또한 문익점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당시 원제가 강압적으로 덕흥군에 가담토록 종용한 것에 대해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는두 군주가 없다"는 말을 즉각적으로 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문익점의 충절을 드러낼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때 문익점은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42일 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구류를 당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 역신 崔濡는 그가 덕흥군 측에 붙었다는 첫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  그 뒤 원제가, 덕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회유하기 위해 구류에서 풀어 다 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僞書와 認帖 및 誘書 수십여 장을 불에 태우는 등 元帝의 명을 거역하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서 이해 11월에 교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유배지에 도착하기는 이듬해(1364) 2월이었고, 병오년(1366) 9월 귀양살이에서 풀릴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가 귀양살이 하는 곳에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 원근에서 사람들이 샘물을 길어 가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는가 하면, 이 밖에 귀양살이 중에 達成貴라는 고상한 사람과 상종하여 雲南 지방의 풍물을 많이 알게 되어 손수 『雲南風土集』이라는 책 을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목면씨를 얻게 되는 것은 이 때 귀양살이에서 풀려 원도로 귀환하는 도중 밭 가운데 핀 목면화를 보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다음 해(1367) 정월에 그가 元都 에 이르자 원제는 그를 다시 예부시랑 어사대부에 임명하였으나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올라 2월에 송경에 도착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공민왕은 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곧바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家狀」에 따르면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鄭天益과 함께 목면 종자를 심게 되는 것은 정미년(1397) 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원에서 귀국한 해를 갑진년이라고 명기하고 있고,
고려사열전에는 "덕흥군이 폐하자 귀국하였다"라고 하여 역시 갑진년에 귀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鮮初의 官撰 史書에 나타난 그의 귀국 연대는 가장에 나타나는 그의 귀국 시기와 3년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47)

  그런데 그의 元에서의 3년간 유배 사실에 대해서는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서도 일찍이 이를 의문시 한 경우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그가 갑진에 귀국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다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에 있다 48) 만약 이를 따르게 되면 그가 원에 가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은 나머지 목면 종자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다소 극적인 그의 행적은 자동적으로 부인되게 되며, 또 이와 관련해서 고려사에 기술된 "奉使如元 因留附德與君"이라는 불명예스런 행적이 기정사실화 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 경우 목면 종자의 취득 과정도 달리 설명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의 갑진년 귀국을 타당시하는 견해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목면 재배가 북경에 까지 파급되었고, 따라서 당시 목면 종자를 구하는 일은 강남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북경 근교에서도 쉽게 이를 구할 수 있었다고한다
49)

  그근나 문익점이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장에만 기술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후 불과 4년이 지난 태종 1년에 권근이 문익점의 장자 文中庸을 서용할 것을 상서하는 내용 가운데, "故간의대부 文益漸이 처음 강남으로 들어가 목면 종자 수매를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50)
그의 원에서의 체류 기간을 논외로 하면 일단 그가 元都를 떠나 강남으로 갔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 밖에 현전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과 세조 정축년(1457)의 賜墓祭文이 보이는 바, 여기에도 그의 南荒유배 사실이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1) 특히 다음에서 보듯 세종 경신년(1440)의 賜墓祭文에 언급되고 있는 문익점의 재원시 행적은 문치창의 「가장에 나타난 재원 행적과 정확히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다 「家狀」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을 신뢰케 한다.
공민왕을 섬긴 신하로 곧은 절개 버리지 않았었네 중국 諫院에서 僞書를 불에태우고 말은 天潢을 움직이게 하였네. 귀양살이 3년을 하였지만 그 의로운 기운은 펄펄도 하였지 몰래 좋은 씨앗 구해서는 고려 서울 개성으로 돌아왔고 무명베의 利를 끼쳐 우리 백성 옷 입혀 주었네.52)

위 제문은 그의 사후 불과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문익점의 공적을 집약적으로기린 내용으로, 諫院에서 僞書을 불에 태우고 3년의 귀양살이를 했다는 내용은 문치창의 가장에 나타난 문익점의 재원 행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에 기술된 '謫南荒' 사실을 신뢰할만한 기록임을 확신케 한다.

 

                                     맺 음 말
본고는 문익점의 증손 文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撰한 『三憂堂實記』 所載의「家狀」이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임을 밝히고, 이를 줌심으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시기 등, 그의 생애와 행적에서 주로 의문시되는 내웅에 대해 관련 자료를 비교 검토한 글이다. 본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文益漸이 남긴 遣文을 포함해서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는 삼우당실기는 그 초간 연대에서 나타나듯이 가장의의 발견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실제 현전 『삼우당실기』 연보의 내용은 실기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만큼 가장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자료라고 할 수 있다.

  「家狀」의 발견은 그 이전까지 잘못 알려졌거나 분명하지 않은 문익점의 행적을 많은 부분 바로 잡기도 하였다. 『삼우당실기』에 앞서 문익점의 행적을 輯錄한 『功行錄』을 살펴보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문익점이 원에 사행한 시기나 목적, 그의 졸년 등이 잘못 기술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가 甲辰年에 正使 德興君의 副使로서 원에 갔던 것으로 기술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가장의 발견 이전만 하더라도 문익점의 행적은 사실 관계의 기술에 현격한 오류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가장」은 문익점의 행적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중요하면서도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가장」에 기술된 문익점의 생졸 년월 그의 재원시 행적 및 그가 목면 종자를 전래한 시기에 대해 본고에서 검토한 바는 다음과 같다. 
문익점의 출생 년도는 가장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卒年은 조선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 문익점이 정종 2년에 졸했다는 가장의 기록도 잘못된 것으로, 태조실록 졸기에 나타난대로 그가 태조 7년(1398)에 졸했음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를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의 졸년은 한동안 우왕 9년(1383)으로 잘못 알려져 묘갈명 등에 그렇게 새겨지기도 하였고, 가장 발견 이후에는 정종 2년(1400)으로 오랫동안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가장의 기록이 官撰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비교해서 아주 자세한 부분은
문익점의 官歷에 관련된 내용이다. 「家狀」은 문익점의 관력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실록등의 관찬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과 상충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가장이 관찬 기록물과는 달리 家乘 혹은 家藏 文書를 토대로 작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 점에서 문익점의 행적에 관한 사실관계의 기술에 있어서 가장이 중요하고도 신뢰할만한 자료임이 확인된다. 

 

문익점의 행적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의 在元時 행적과 관련된 부분이다.
가장을 통해서 볼 때, 문익점은 계묘년 3월의 이공수 일행으로서가 아니라 이 해 4월에 파견된 洪淳 일행으로 원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계묘년 4월의 홍순일행은, 덕흥군의 국내측 내응 세력을 일망 타진한 뒤에 출발한 사행으로서,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은 문익점의 재원 3년의 행적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사열전이나 태조실록에는 그가 사행으로 원에 들어간 이듬 해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어 그의 재원 3년의 행적은 그 사실 여부가 의문시 되고 있다.
태조실록과 같은 관찬 기록물에 나타난 기록을 근거없이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원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겪었다는 사실은 비단 가장에서만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조를 통하여 줄곧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원에서의 3년간 유배 생활에 대해서는 일단 이를 사실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그 진위 여부가 확인, 검토되어야 한다고 본다

주석문 내용

 

 1

1.현재 文益漸을 향사하는 서원과 사우로는 道川書院(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을 비롯해서 長淵書院(전남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楮山書院(전북 김제군 공덕명 회룡리), 江城書院(전남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 鳳岡書院(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동), 不조廟(전남 보성군 미륵면 도개리), 忠宣公 別廟(경북 울진면 화성리), 光東影堂(전남 광주시 서석동) 등을 들 수  있다

2

2. 문치창이 쓴 文益漸의 行蹟에 관한 기록을 庚午刊(1870) 삼우당실기에는 이를 '事寶本紀'로  題하였고, 庚于刊(1900) 『三憂堂실기』에는 이를 '家傳'으로 題하였다. 최근 간행된 『南平文氏  大同譜』에 이를 '家狀'이라고 표현한 곳이 보이는 데, 본고에서는 '家狀'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아 이를 따랐다. 문치창이 쓴 「家狀」은 지금도 南平文氏 문중의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니-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지은 문익점의 행   적에 찬한 기록이 지금껏 보존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이를 후손 文桂恒이 1808년에 발   견하였다고 하므로, 이후 「寮熱」의 보존 문제는 이 시점부터가 문제일 것이다. 그 사이 별다른  분실 사유가 없다면 누군가에 의해 보관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3) 문익점의 생애와 행적을 다룬 중요 논저는 다음과 같다.

   ⊙承承濟, 「李朝 綿業의 辰開過정」, ⊙『李병도박사華甲記念論叢』, --朝閣, 1956. 
  ⊙朴性植, 「麗末鮮初의 木綿業에 대하여」, 『大邱史學』 17, 1979.   ⊙李載浩, 「乙支文德과 木綿의 異論에 관한 일고찰」 『韓國史硏究』 39, 1982.   ⊙崔永好, 「高麗末 慶尙道地의 木綿 보급과 그 주도세력」, 『考古歷史學志』 5,6합집, 1990.   ⊙金畿俊. 「文益漸과 木綿씨 傳播의 歷史的 背景」,『문익점과 무명문화』, 1991.   ⊙吳主煥, 『山淸鄕上史』, 山淸문화원, 1995.

4

4) 文致창이 丹城에 온 것과 관련해서는 『삼우당실기』(庚子刊, 1900), 世系源流에 "救端宗 禍謫龜城"이라 하였고, 『南平文氏大同譜』(1995년)에는, "世祖元年 丙子에 柳秀藩 李曾碩 具致明과  터불어 魯山君을 구하려다 화가 鞠刑에 廷至하였으나 충신의 후예로써 龜城으로 俱蒙宥謫하여 江城君 事寶本龍를 지으시다"라고 하여, 龜械(丹城의 별칭)은 그의 유배지였으며, 家狀(=  江城君 事寶本紀)은 이 때의 유배 생활 증에 지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5

三憂堂實記』 卷2, 附錄, 家傳, "去辛巳冬 與三從兄某 自京師 展省先墓于珍城 入宗家 遍閱先世  遺蹟 丙午외之餘 存者亦頗放失 余於是又懼其愈久而愈失 不顧잠踰 左右搜輯 참互見聞 記若   千言 以侯後之繼述者得焉"

6

6) 경오刊 『三憂堂實記』의 諸賢詩詞(『道川院蹟』, 誇賢詞章과 同)와 庚于刊 『삼우당실기』, 諸賢詩章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7

凉國與地勝覽』에 龜城, 珍城은 丹城의 別名으로 나타난다

8

『삼우당實記』 卷2, 附錄, 諸賢詩章.

9

삼우당실기 卷2, 消錄, 諸賢詩章. 문익점의 공적에 대한 이러한 칭송은 거의 동시기에 지은  南孝溫의 「木綿花記」에도 보인다(『三憂堂실記』 卷2, 附錄, 木綿花記)

10

太宗賓錄』 卷1, 원년 윤3월 庚寅, "擢文中庸爲司憲監察 崔海山軍器注簿 참贊權近上書曰 故諫議大夫文益漸 初入江南  ○木○種子數매○來 送於晋陽村舍 始織木○進上 是故木○之興  始於晉陽 由此廣布-國 凡民上下 皆得以衣之 是皆益漸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早○ 其予中庸 遭父喪 廬墓三年 ○遭母喪 又廬於墓三年 終制○隱於晋陽 勤謹孝廉 可用之士也 故知門下府事崔茂宣始劑火藥能制海○實有功於國家其予海山亦宜敍用 從之"

11

『태종실록』 권5, 3년 2월 己未 및 『태종실록 권5, 3년 3월 庚辰. 『삼우당실기』와 『남평문씨  족보』에는 그가 正言을 거친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12

『삼우당실기(1900) 권6 年譜, "世祖8年 家傳成 曾孫監察致昌撰 中間見○ 純祖戊辰 文氏修譜  時 得於後孫之在海島者

13

三憂堂실기』(1900) 舊跋(文桂恒), "三憂堂先生 於桂恒爲十七代祖也 旣歿之四百餘年 世代綿遠  宗嗣屢乏 先生所著詩文及疏章 不爲不多 初火于家 再燼于兵 蕩然無傳 而中間收錄 只有家傳-- 本盖天順甲申 監察公致昌所撰 而亦且遣逸 伊後所傳 特各家所記若于私乘而已‥‥去戊辰夏 幸因譜書之刊役 得所謂家傳一卷 卽天順八年之遣輯者也 桂恒卽관手開卷 瞭焉如○心目 自是不覺愚

 

○  濫生○意 留心於革謬歸正之域 冬長興宗老就光氏 枉駕立雪 而於亦先獲志者也 於是竭探諸名  勝述作 ○諸賢遣集 雖片言雙字 有足以徵信者 則幷力鳩集...

 14

삼우당實記』 권5, 附錄, 道川書院請額練

15

문익점을 향사하는 일반 祠字와는 달리 書院으로 賜額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공적을  증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에 쓰여진 문익점에 행적에 판한 기록은 그의 목면 전  래의 공적 보다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6

『三憂堂責記』 권1, 舊序, "前古行蹟有無 今未聞知 而越在戊子歲 鄕父老略記名賢所銳二三條 以成  卷○矣 甲申秋 幽奠廳火變 盡人灰燼 不○適以冒添院任 漑然于先生行蹟○而傳 旁求可○  則前朝事 其誰詳錄也 與同任都命嵩朴思權 순求左右 國朝列聖褒贈 以國乘所載錄之 業謄麗史所裁 或輯先師所記  及文氏譜書勝覽所載中 採而集之 忘某孤陋 以成卷帙 辛或免識者之초諦耶 謹以  序次如右 名日忠宣公行蹟記" 

17

필자가 본고를 준비하면서 검토한 『功行錄』은 현채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자료 가은  데 『江城君事實錄』(筆寫本)이라고 되어 있는 책자이다. 이 책의 말미에 文泳光의 발문인 '충선공功行錄跋이 있어 이 것이 공행록을 필사해 둔 것으로 보아 본고에서는 이를 『공행록』으로 추정 하였다.

18

이는 누가 썼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문영광의 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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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찬한 신도비명 병서는 홍무 16년 계해 공이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3이었다.신우가 명하여 단성 갈로산 向酉의 자리에 예장을 명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윌 정종대왕께서 강성군에 추봉하고..."를

<실기>에서는 "...얼마 뒤 고려가 망하니 공은 두문불출하였다. 庚辰에  공이 졸하니 향년 70이었다. 본조에 이르러 우리 정종대왕께서 공을 ‥‥禮葬하도록 명하고로  고치고, 그렇게 고친 근거를 <신도비명 병서>의 말미에 부기하기를 " 本草에 이르기를 公卒未幾 高麗革命"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이미 돌아가신 뒤라면 어찌 두문동에 참여하실 것이며  또 어째서 테조가 누차 테종에게 안부를 물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黃景源이 撰한 墓誌銘 井序는, "홍무 16년 계해 2월 초8일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3이었다. 辛禑가 갈로개산에 예장하라고 명하고 비석을 세워 정려하였다. "로 되어 있는 것을

실기(1870)에서는 "흥무 16년 계해에는 비석을 세워 정려하다. 건문 2년 경진 2월 초 8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 70이었다. 공정대왕이‥‥ 예장을 명하셨다"라고 하고 이령게 고친 근거로 <묘지명 병서> 말미 "본고에서는 계해 2월 8일에 병으로 졸하신 것으로 잘못 말하였으므로 고쳐서 바로 잡기를 청하였으나 간행된 刊集 중에는 미쳐 고치지 못하였다"라고 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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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군사실록, 강성군창선공부민후삼우문선생 "至正甲辰 以左司議 奉使入元 士使德興君 副使公也 從事崔濡 譜于元帝 謀廢恭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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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아직 초간본 『삼우당실기』를 보지 못하였다. 庚午刊 『三憂堂實記』(1870)의 편차와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世系 年報 遺文 詩六首 포褒典: 世宗朝賜墓祭文 世祖朝賜墓祭文 正祖朝賜額江城祠祭文   正祖朝賜額道川書院祭文 太宗朝傳敎 世宗朝傳敎 世祖朝傳敎 中宗朝傳敎 宣祖朝傳敎(庚午, 甲午) 景宗朝傳敎 英祖朝傳敎(丁卯 戊寅 丙戌 戊子) 正祖朝傳敎(甲辰 丁未) 敍述: 高麗사列傳  行狀 事實本記 神도碑銘 墓謁銘 孝子碑閣記 墓祠記 孝子碑閣重修記 丹城健院記 行蹟記序 淵源錄 盛德齋記 江城祠圖記 大庇齋記 道川書院重修記 杏壇記 木綿花記 諸賢詩詞 道川書院春秋香祝文 江城祠春執香祝文 月川祠合享告由由文 江城祠賜額告由祝文 道川書院賂額告由祝文 諸書考訂 附(請立祠疏 道川書院請額疏 江城祠請額上言 道川書院請復額上言 請復不조疏 請從享文廟疏)

追錄: 忠肅公事實附(忠肅公事實別祿 고려사열전 東史纂要(抄, 詩三首附) 史臣論(徐四佳  詩一首附) 李眉수論(만詞一章 附) 金借畢齋詩(三首) 고간院記(唐人詩一首附) 跋

이 庚午刊 『三憂堂실기』 가운데 敍述篇의 附篇과 追錄篇을 제외한 나머지 世系, 年譜, 遣文,   褒典, 敍述篇의 내용이 『삼우당실기』 초간본의 내용을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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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에 문익점의 생년 및 졸년시 월일이 모두 2월 8일로 되어있는 것에서 그의 생졸연월일은 어떤 기준에 따라 추산하여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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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의 출생 연도는 前朝 科擧事蹟(그는 공민왕 9년 정목주 임박 등과 등과 同榜及第함)에 辛未生이란 사실이 기제되어 있어 「家狀」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생월일이 2월 8일로 나타나는 것은 「家狀」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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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1925~1929년(4년간)에 걸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을 4분의1로 축소하여 "이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30부 한정판으로 출판하였으나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가 국내에는 7, 8부 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그것도 몇곳의 도서관에 秘藏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 후 1995년~1959년(4년간)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백산본을 8  분의 1로 축소하여 "조선왕조실록으로 표제하여 영인 출판하였으니, 『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를 접할 수 있기는 이 때에 비롯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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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卷1 원년 윤3월 庚寅, "참찬權近상서왈 고 간의대부 문익점 初入江南○木면種子數枚 ○來

送於晉陽村舍 是織木면進上 是故木면之興 始於晉陽 由 此廣布一國 凡民上下○得以衣之  是○익점之所賜也 大有功德於民 而不食其報○ 其子中庸 遭父喪 廬墓三年 ○遭母喪 又廬於墓三年 終制○隱於晉陽"

 

26

家狀에서 문익점의 생년을 충혜왕 원년에 비정한 첫은 '前朝과거事蹟'을 참고했던 것으로  추정 된다.

27

문익점이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것은 태조실록 졸기에도 명기되고있다. 따라서 문익점은 고려 충혜왕 원년(1331)에 태어나 태조 7년(1398)에 졸하였고 당시 향년 68세  였다고 한다면 모순이 없겠으나,함부로 단정할 것은 못된다

28

삼우당실기 권2, 부록, 家傳, "庚辰二月八日 終于第命葬於珍城縣治 之西五里갈로개산向酉之原 賜祭典 健廟祠 置守○四人 給復二=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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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문익점의 묘역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삼우당 後孫 文龍鎬씨에 의해 발견된 지석에는 建文 2年 6月 일자로 考 좌사의문씨와 ○부인周氏와 합영한 사실과 주씨부인 소생의 두 아들 중용과 중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로 보아 건문 2년(1440)은 문익점과 부인주씨의 합영이 이루어진 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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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家狀」에 문익점의 관력이 상세히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家藏 文書 가운데 敎旨  類와 같은 문서는 집집마다 비교적 잘 보관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文致昌이 「家  狀」을 찬술할 당시에도 그의 선조 文益漸에게 내려진 교지류의 家藏 문서는 많이 남아있었는  듯하며, 그가 이를 참고할 수 있음으로해서 「家狀」에 문익점의 관력에 대한 내용은 상세히 기  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는 「家狀」이 신뢰할 수 있는 자료임을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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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卷14, 7년 6월 T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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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元 使行 시기를 甲辰年으로 기록한 것으로는 李滉의 孝子碑閭記를 비롯해서 「家狀」 발견 이전에 찬술된 碑銘 등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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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 '書狀官'으로 갔음이 명기된 경우는 태조실록, 문익점 졸기와 曺植의 '廟祠記' 정도에  서 만 확인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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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卷111, 列傳24, 文益漸

35

『元史』 권46, 本紀 順帝, 22년 12월, "帝以○廢高麗王伯顔帖木兒 立塔思帖木兒爲王 國人上書   言舊王不當廢 新王不當立之故 初 皇后奇氏宗族在高麗 待籠○橫‥‥高麗王遂盡殺奇氏族 皇房謂   大子曰 爾年已長 何不爲我報○‥‥‥

36

高麗史』 권40, 세가 공양왕 11년 12월 癸酉

37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정월 壬寅 및 2월 乙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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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3월 壬寅

39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4월 甲寅

40

吳主煥, 『山淸향토사 p.120

41

삼우당실기 권2 부록 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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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 권2, 附錄, 家傳, "先是 國家多○ 西憂紅賊 南患왜구 又見責於元朝 凡前入刻使  臣 一不東還 且春盡而朔不○敎 出而使不至 外內斷絶 疑懼未定 故更使啓稟 ○悟帝心 人皆危之   莫肯行 先生以書狀官如元

43

高麗史』 권40, 世家, 공민왕 12년 4월 甲寅

44

그의 사행 시기와 목적을 두고 볼 때도 그가 덕흥군측에 가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지만, 이 밖에 고려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면서도 그가 덕흥군 측에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으며, 『태조실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덕흥군과 관련된 그의 행적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덕흥군 측에 가담한 인물로 문익점과 함께 거명되고 있는 金添壽  柳仁雨 康之衍 黃順 安復從 奇叔倫 등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 가운데 金添壽와 黃順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유인우 康之衍 安復從은 덕흥군 측에 실제로 가담하여 공민왕 13년  1월 崔溜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할 때 동행하였다가 잡혀서 죽음을 당하였다. 奇叔倫은   공민왕 20년 8월 에 辛頓의 당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가 죽임을 당한 사정이 덕흥군에 부역한 것과는 관계가 없어 기숙운의 경우도 덕흥군과의 관련 여부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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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문익점이 元에서 받은 禮部侍郎의 관직은 德興君으로부터 받은 僞官이 아니라 元의 벼  슬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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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에 의하면 당시 문익점이 덕흥군 쪽에 가담했다는 허위의 사실이 유로되었음이 주목된다 혹 이 때문에 그가 덕흥군에 가담했던 것으로 고려에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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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檢植, 앞의 글에서는 문익점이 南荒에 유배된 사실을 江南 지방에 유람한 것으로 간주하면  목면 종자의 입수 경위가 수긍이 된다고 하여, 그가 공민왕 13년(갑진년) 9월에 귀국, 이듬해에 목면씨를 진양에서 파종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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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性植, 金成俊, 吳主煥의 앞의 글들이 모두 태조실록의 갑진 귀국설을 취하고 있다.

49

金成俊,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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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권1, 1년 윤3월, "權近上書曰 고 간의대부文益漸 初人江南 覓木棉종자수매 ○來 送於진양村舍 始織木棉進上 是故 木棉之興 始於晋陽"

51

삼우당실기 권3, 附錄, 世宗朝賜墓祭文 및 世祖朝御製賜墓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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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上書, "臣事恭懲 不貳其貞 焚書諫院 言動天潢 旅食三載 義氣縱橫 潛求嘉種 乃還松京 綿布  之利 衣我群生"

 

영원한 계레의 은인이 된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삶

정순태(시사월간 win 편집위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저항한 고려충신이면서도 조선왕조로부터 추앙을 받고 백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던 인물 -.
황금을 돌같이 여기며 외적과 1백번싸워 전승불패의 기록에 빛나는 최영,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단심가로 유명한 정몽주도 민중들로부터 이사람 처럼 지속적으로 추모받지는 못했다
그는 누구일까? 고려사에서는 이 인물의 공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지 몇자로 소홀하게 적고 있다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면의 종자를 얻어와서 그 장인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했다.
처음엔 배양하는 기술을 알지 못한지라 거진 말라죽고 단지 한줄기 만이 살아나 3년만에 드디어 크게 번식했다.

                               한민족의 행동반경 넓힌 무명문화
 우리 민족의 의(衣) 주(住) 생활을 혁명적으로 진보시킨 목화씨 전래자, 바로 문익점이다.
당시 원나라의 해외유출 금지품이던 목화씨 그 씨앗 10개를 그는 붓두껍속에 넣어 귀국했다. 그것들중 하나가 꽃을 피우고 직조기술을 진보시켜 이 땅의 무명문화가 일어난 것이다
문익점의 이전 우리 민중들의 의생활은 비참했다 예컨데 고려사 공민황 13년 1월 임오일 조(條)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군졸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도롱이를 몸에 두르고 지내었다.... 죽은 시체가 길에 잇대어있었다. 대오를 떠난 군졸등이 길에 밀려다니며 걸식했고 그들의 얼굴은 파리했다. 당시 여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북면(함경도)으로 출정했던 고려 군인들의 참상이었다. 무명베(면포)가 생산되지 않았던 시절, 우리 민중들은 삼베나 갈(칡넝쿨)포로 옷을 해 입었다. 비단과 모시같은 것은 귀족용이었다. 삼베나 칡넝쿨로 만든 옷으로 겨울을 나기는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대개는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민죽의 행동반경이 몹시 옹색했다는 얘기다
무명베가 생산된 이후 비로소 한민족의 의관이 그럴 듯 해졌다. 또 솜으로 누빈 이불속에서 편안히 잠을 자게 된 이후에야 생활의 리듬과 활력을 누릴 수 있었다. 백의민족, 이것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위생생활의 혁명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흰 무명옷을 입게 되니까 더러움을 타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그러다 보니 방안에 도배를 해야만 했다.
목화재배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가을철에 목화를 수확해 놓으면 겨울철 농한기에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 베틀에 올릴 수 있었다. 겨울철 유휴노동력의 활용, 이것은 국력신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드기어 베틀일 잘하는 며느리가 시집오면 논밭을 산다는 애기가 나돌게 된다
밭작물인 목화의 재배가 늘어가자 국내의 경지면적이 급속히 늘어난다 고려말 국가 장악의 경지가 50만결에 불과했으나 조선 건국초기(1404)에는 거의 두배인 93만결로 늘어났다. 이같은 경지면적의 배증은 사전정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면화등 밭작물 재배면적이 급중했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까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도 문익점의 공적에 무심할 수가 없었다.
태종은 그의 즉위연도인 1400년 문익점이 나이 70세로 별세하자 참지정부사(정2품) 충선공으로 추증했다. 태종이라면 고려 멸망 직전 정몽주를 쇠몽치로 쳐 죽이는 등 고려 충신들에게 무자비 했던 이성계의 제5자 방원 바로그다.
태종을 이은 세종은 역시 명군이었다. 6진개척으로 국토를 확창하면서 남쪽지방의 농민들을 계속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특히 목화재배지역의 전국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14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는 전국 토지결 수는 건국초(1404)의 두배인 1,719,860결에 달했다
세종은 사후 40년이된 문익점에게 조선왕조가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품계인 대광보국승록대부 정1품 영의정을 추증했다 그의 봉작도 부민후로 높여졌다.
문익점이 목화씨 전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성종17년(1486)께는 왜인이 수입해간 면포가 연간 50만필에 달했다.(김병하, 조선조 전기의 직물생산과 대일수출 경희대 논문집)
왜인들이 얼마나 조선제 면포에 집착했는지는 현 일본 최고 인기작가 시바로타로의 최신작 이나라의 모양(문예춘추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조선무역에서 일본은 조선의 면포를 좋아했다 일본에서 면은 귀중품으로서, 그후 도요토미 시대에서도 봉건영주들의 사치품중 하나였다.
토요토미라면 1592년 임진왜란을 도발한 당시 일본의 집권자. 과대망상가였던 그가 왜 7년전쟁을 도발했는지 아직도 그 진정한 이유가 모호한데, 도발이유중의 하나는 그들이 사치품이던 조선의 면포가 탐이 나서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면화종자를 얻고 재배법, 직조기술을 배워 간 것은 16세기 중엽이었으나 일반 서민에게 면포가 널리 보급된 것은 17세기 말 부터였다
우리나라 면업사는 대체로 세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여말 선초에 해당되는 14~16세기의 성장,발전기간이며, 2단계는 임진왜란이후 17~18세기의 정체,성숙기로 볼 수 있고 3단계는 19세기 이후의 쇠퇴기다. 따라서 임진홰란 발방당시인 선조때는 면화산업이 최고로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15세기 후반기 이후에는 면포가 단순한 상품이라기 보다는 현물화폐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동전은 주선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했다. 쌀도 중요한 현물화폐이긴 했지만 갖고 다니기에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특히 여행자들은 면포를 등짐으로 지고 다니면서 술,밥값과 숙박비 등으로 셈을 쳐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면포가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는 운창지(雲窓誌)에 잘 기록되어 있다. 경상감사 김수가 왜적방어용 성을 쌓으면서 규격에 맞는 돌 5개를 가져온 백성들에게 면포 1필씩 지급했다.
더욱 절묘한 애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의병들 중에서도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의령 출신 곽재우다
왜적들은 붉은색 옷을 입은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며 몸시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궅이 홍의를 입었던 것일까. 당시 조선민가에선 면포와 솜으로 이불을 만들었다. 이불의 바닥쪽은 검은색, 위쪽은 붉은색 면포였다. 흰생이불은 때가 잘뭍어 염색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 의병들도 군복이 필요했다. 곽재우장군의 아이디어가 또한 발군이었다. 이불을 띁어서 장교급은 붉은색, 군졸들은 검정색 군복을 지어 입게한 것이다.

                                          이색과 정치적 운명 함께한 배경
문익점은 충혜왕 원년(1331) 경상도 강성현 사월리(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언(정4품)을 지낸 숙선과 함안조씨 사이의 4형제중 둘째였다. 여덟살에 학당에 들었고 열산살 때 한주(韓州 ;현재 충남서천)에 낙향해 있던 대유학자 이곡(李穀)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것이 그후 문익점의 벼슬길을 파란만장 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곡의 아들이 바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줄기차게 견제했던 대문장가 이색(李穡)이었기 때문이다. 문익점은 세 살 위인 이색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
문익점은 20세에 경덕재에 들어갔다. 겅덕재는 시경 한가지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국립학당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23세때 정동성향시에 급제했다 정동성향시는 (元)이 고려에다 설치한 종동행중서성 주관의 향시였다. 이어 30세대 문익점은 신경동당시에 응시 급제자 33인중 제 7등으로 뽑혔다. 공민왕 9년 개경 근교의 백악에다 궁궐을 짓고 그곳을 신경이라고 했는데 신경동당시는 신경에서 실시한 제술과(製述科)였다.
공민왕 9년 11월 25일 신경동당시에서 제 1등은 그때 나이 24세엿던 정몽주엿다. 문익점과 동방급제한 사람들 중 정몽주 이외에도 문익점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둘이있다. 바로 제2등 급제자 임박과 제9등 급제자 이정이다 임박은 공민왕 12년(1363) 덕흥군사건의 해결을 위해 원에 파견되었던 계문사 이공수를 따라갔던 서장이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같은 고려사열전에서 문익점에 대해서도 정언이 되매 사명을 받들어 원에 갔다가 유(留)하여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운운의 기사가 있다. 그래서 이공수를 수행했던 서장관이 문익점이냐 임박이냐는 역사적 의문이 생겼고 이 문제는 아직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덕흥군은 원나라가 한때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 기도했던 제 26대충선왕(1308~1313)의 서자다. 덕흥군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문익점의 벼슬길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목화씨 전래의 시기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므로 뒤에서 재론 하기로 한다

동방급제자들중 또한사람인 이정은 이성계의 경제 제1참모인 조준과함께 문익점의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다. 다음은 고려사 문익점전에 기록된 관련기사 "그때에 간관 이정등이 사전(私田은 불가하다 하여 다시 상서하여 다투므로 익점이 이색.이림 우현보에게 부의하여 병을 칭탁하고 서명하지 아니한 채 익일에 바로 서녕네 나아가니 대사헌 조준이 탄핵하기를 ... "  위의 기사는 이성계 파에서 조선왕조 개국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전제개혁에 문익점이 반대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때문에 문익점의 벼슬길이 막혀 버렸다. 이 대목도 그의 인물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부분, 역시 글의 흐름상 뒤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신경당동시에 급제한 문익점의 첫보직은 김해부사록이었다 사록이라면 지금의 부군수에 해당하는 정8품의 외직 썩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순유박사로 발탁된다. 순유박사라면 유교교육을 관장하는 성균관의 종7품 벼슬. 문익점의 벼슬은 거듭 올라 33세에 사간원의 좌정언에 이르렀다 사간원이라면 황에게 간(諫)하는 것을 업무로 삼는 봉건왕조의 핵심기관이며 좌정언은 이기관의 정6품이다. 이무렵 고려와 원사이엔 일대 사건이 벌어져 관계가 몸시 험악해 졌다. 원나라가 공민왕에게 내린 인수를 회수하고 충선왕의 셋째아들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버린 것이다. 이같은 원의 행동은 공민왕이 1356년 친원파로서 악행을 일삼았던 기철일당에게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원나라가 설치했던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 구토회복 정책을 감행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덕흥군에게 아부했다는 고려사의 기록
기철은 원 순제의 세자를 낳은 기황후의 친정오빠였다. 원은 기철의 목을 벤 고려의 처사에 분노했다. 때마침 고려 출신의 최유가 원나라 조정에 붙어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옹립하고 본국에 대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 모의에는 원의 승상인 삭사감 고려출신의 내시관 박불화 등이 가담 기황후와 원순제를 움직였다. 공민왕은 원 순제에게 헌첩사, 하정사, 하성절사 등 사절단을 파견 문제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원 조정은 고려의 사절단 중 한사람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 12년 3월 찬성사(정이품) 이공수를 정사, 허강을 부사로 하는 계품사를 워나라에 파견했다. 이때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수행한 인물에 대해 임박설과 문익점설이 있다.
서장관이라면 사신들 중 문서기록 및 그 처리에 관한 일을 맡는 핵심적 포스트로 장사, 부사에 이은 랭킹 3
위의 직이다. 누가 계품사의 서장관이었느냐는 문제를 놓고 그때 서장관이 2인 이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공민왕 12년 3월의 서장관은 임박, 동년 4월의 서장관은 문익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사 공민왕 12년 4월 갑인일 조(條)에는 밀직상의 홍순, 동지밀직사 이수림을 원나라에 보내어 배고간기로서를 원나라의 어사대에 제출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든 이공수. 임박 등은 목숨을 걸고 공민왕을 변호했던 반면 문익점은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와 관련 고려사 문익점전에는 덕흥군에게 아부하였으나 덕흥군이 핍(貶)함에 미쳐 이에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서 돌아와서...라고 쓰여있다

위의 잛은 구절이 두가지 중요한 시비를 낳고 있다. 과연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붙었는지에 관한 의문과 그의 귀국 연도에 관한 엇갈린 해석의 문제제 고려사의 기록은 문익점이 남긴 시문과 후인의 평가 남평문씨의 가전등을 묶어 편찬된 삼우당실기의 내용과는 정면배치된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덕흥군을지지하라고 원나라에서 부여한 벼슬을 끝내 거부 원순제의 노여움을 받아 덕흥군의 집에 42일간 구류를 당한 끝에 교지(베트남 하노이)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래서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고려사에 의하면 정사 이공수가 귀국한 1364년 10월 일 터이고 실기에 의하면 1367년의 일이다. 문익점의 귀국연도는 바로 목화씨의 전래년도가 언제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조선조에 완성된 고려사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개국에 저항한 고려 왕가 및 충신들을 깍아내린 대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실기는 남평문씨 후손들이 편찬한 것으로 선조미화의 의심이 간다는 점에서 모두 그 신뢰도가 100% 확보되기 어렵다. 덕흥군 옹립사건은 결국 고려측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최유는 원의 요동병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포위, 한 때 군세를 떨쳤으나 1664년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여 원나라로 도주했다. 요동군이 패하자 원의 대 고려정책은 180도로 돌아섰다. 원순제는 덕흥군을 귀양에 처하고 최유는 고려로 쫓아 보냈다. 원에서 덕흥군측에 가담했던 최유와 그 추종자들도 고려로 묶여와 참수되었다. 그때 문익점이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실기에 의하면 그때 문익점은 교지의 귀양지에서 운남풍토집을 저술했다고 되어있다. 이책은 서명만 전해지고 있다.

                          목화씨의 전래 연도의 1364년설과 1367년설
그렇다면 문익점은 공민왕을 배신한 역신이 아니라 충신이다. 조선조 태종이 전교에서도 문익점은 고려충신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대목 등으로 미루어 보면 문익점이 교지로 이양을 갔거나 적어도 강남지방을 어떤 이유에서든 여행했다는 얘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이와 관련 경상대 한국사 교수 박성식는 당시 목화(1년생 초면) 재배기술로 미뤄보면 북위 38도 이북에서의 목화재배는 어려웠다고 전제 문익점이 북위 40도가 넘는 북경(당시대도)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목화씨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기에 따르면 문익점은 37세 때인 1367년 2월 귀국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덕흥군을 지지 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문익점을 폄한 고려사에서도 귀국 직후 파직의 흔적은 없다. 5년만에 귀국했으므로 노부모를 공양하겠다는 명분으로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문익점의 환로(벼슬길)에는 공백기간이 많다, 중국에서3년간 귀양살이 한 데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씩 시묘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375년 공민왕이 침실에서 측근들에게 피살되었다. 공민왕은 국권회복등 볼 만한 치적이 많았으나 왕후 노국공주가 요절한 후 성질이 돌변했다. 말기에는 자제위란 미소년집단을 곁에 두고 남색에 빠지는가 하면 자신의 비들을 총신과 교접하도록 하는 등 괴상한 짓에 빠져 들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고려판 10.26사건이었다

우왕원년(45세)에 문익점은 전의주부를 제수받고 다시벼슬길에 나섰다. 정의주부는 국가의 제사와 벼슬아치의 시호에 관한 일을 맡는 정의사의 정 6품관이다. 곧이어 문익점은 배원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청도현령으로 좌천당했다. 함게 상소한 정몽주도 언양현령으로 쫓겨갔다. 우왕 즉위에 공을 세워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 등이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섰는데 문익점, 정몽주 등의 원의 사신을 축출하라고 청원하다가 탄핵을 받았던 것이다(실기)
문익점은 청도현령에 재직중이던 우왕 2년 겨울 모친 함안조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 중 왜구가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문익점만 홀로 묘를 지켰다. 이에 왜구들도 감탄 勿害孝子(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철수 마을 전체가 왜구이 분탕질을 면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문익점은 왜구 토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로차 문익점을 찾아가 만났다. 이성계는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 아들 방원(후의 태종)에게 문익점은 의로운 선비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왕9년 동북면병마사이던 이성계는 문익점의 효행을 표창하라고 왕에게 청원했다(실기)
지금 상제(喪制)가 무너지고 느저러져서 이름있는 사대부라 할지라도 다 백일에 탈상을 하는데 익점만은 부모의 묘를 지킴에 슬퍼하는 예를 갖추어 극진히 하여 바다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효도에 대해서 감복케한 자취가 있습니다. 풍속을 도탑게 하하고  세상사람들을 교화시킨 그이 아름다운 행실은 마땅히 표창하는 명이 있어야 하옵니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의 주청에 따라 문익접이 고향마을에 효자리라는 이름을 내리고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무렵 그는 몇간의 초옥을 지어 현판에다 삼우당(三憂堂)이라고 써 붙이고 삼우거사라 칭했다. 왕국이 떨치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여 자신이 도가 확립되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 아호에 담긴 뜻이다.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조민수의 쿠테다(위화도회군)로 8도도통사 최영이 참수되고 우왕은 강화도로 쫒겨갔다. 우왕의 아들 창앙이 대통을 이었다. 이때 신흥세력 이성계와 구가세족인 조민수의 견해가 엇갈렸다.파워게임을 벌인끝에 창왕옹립을 주장한 조민수측이 이색의 지원으로 일단 승리했다.
이에 이성계파의 반격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창왕즉위 다음달 이성계의 심복인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려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수상직에 있던 조민수가 전제개혁을 막으려 했다. 이에 조민수는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갔다. 이어 이색이 문하시중이 되고 이성계가 부수상격인 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실제에 있어서는 군사상 정치상의 최고권력을 장악했다. 이로부터 이성계 중심의 신흥군벌 세력은 구세력을 배제하여 고려정국은 그 일파의 독무대가 된다. 바로 그무렵(창왕 원년 가을) 58세의 문익점은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에 제수되었다. 왕을 곁에서 보좌 의견을 피력하는 종3품의 포스트였다.

                                  이성계 대두 막기위해 전제개혁 반대
창왕2년(1389) 강화로 귀양갔던 우왕의 복의모의가 드러났다. 이성계 일파는 창왕의 아버지 우왕이 원래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고 꾸며 창왕도 왕자리에서 몰아내고 공민왕의 먼 일가이며 이성계 자신의 인척이기도 했던 왕요를 세월 공양왕으로 삼았다. 바로 공양왕 원년에 문익점은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조정에 쫓겨났다. 이때 탄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익점은 본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몸으로 진주의 구석땅에서 몸소 밭을 갈았습니다 전하께서 현량으로서 불러 간대부를 주어 좌우에 두고 좋은 물음의 상대로 삼으시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충언을 올리고 치도를 개진하고 성치를 보좌하여야 하는데도... 허리를 굽히고 손을 맞잡고 오직 지당하다고만 하였습니다. 근일 동사랑 오사충, 이서는 각자 상소하여 시사를 극언하는데 익점은 가진 녹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또 상사랑이 연명상소하여 전제를 극론하는데, 익점은 권세에 아부하고 병을 칭탁하여 출근하지도 않아 그 의론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마땅히 그 직위를 삭탈하여 전야에 쫓아내 언책에 있으면서도 말하지 아니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구구절절 대단한 인신공격이며 모략이었다. 문익점은 쫓겨났다. 이때는 이색. 이림. 우현보 등 고려충신들도 모두 탄핵되어 귀양을 갔다 이림은 창황의 장인이었고 우현보는 우황의 복위기도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미 우왕,창황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색과 이성계와의 관계는 매우 흥미있는 대목이 많다 원래 두사람의정책노선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은 우왕 초기 부패한 집권세력이었던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을 제거하는 데에선 최영,정도전,조준 정몽주는 학자 출신의 관료로서 사전 정이를 강력히 주장하는 논리를 전개했다. 구세력이 대농장을 없애고 사전을 정리하여 공전을 늘림으로서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또한 대외관계에서도 신흥 명에 접근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와 이색계열은 속셈과 목표가 서로 달랐다 이색계열의 목표는 고려왕조의 부흥이었던 반면 이성계일파의 속셈은 역성혁명이었다. 따라서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조준,정도전 주도의 전제개혁을 반대한 것은 고려 충신으로는 당연한 행위였다.
이성계파는 반대파의 리더 이색을 귀양에 처하기는 했지만 죽음으로 몰아 넣지는 못했다. 이색의 명망이 국내외 적으로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색의 지모도 대단했다. 문하시중 이색이 창왕시절 왕의 입조 교섭차 명나라로 들어가면서 굳이 이성계의 아들 방원을 서장관으로 수행시킨 것은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그의 부재 중에 쿠대타를 할 수 없도록 방원을 인질삼아 데려간 것이었다.
또한 창왕의 입조교섭에 성공했다면 이성계의 야망을 꺾어 고려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색이 추진한 입조교섭은 그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명태조 주원장의 거절로 실패했다.
이색과 이성계의 인간적 맞대결도 볼 만했다. 귀양지를 전전하다 돌아온 이색과 이성계의 대면이 그 하이라이트다.
이색은 이성계의 집에 불쑥 찾아갔다. 이성계는 이색을 상좌에 모시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술잔을 올렸다.
이색은 선 채로 술잔을 기울인후 이성계의 집을 곧장떠났다. 이색의 기백이 드러난 이 대목을 고려사에서는 무례한 짓으로 표현했다. 이 무렵이면 이성계의 위력은 이미 왕을 앞질러 있었다.
어떻든 이색 계열의 문익점이 생명을 부지한 것만해도 다행이이었다.공양왕 2년 8월 낙향했던 문익점이 다시 상경 전직에 복귀했다가 3개월후 다시 사임했다, 거리에서 문익점의낙향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서 문공은 조정을 떠나는데 외로운 정공은 어찌할 것인고 하는 탄식이 나돌았다고 한다 정공이란 정몽주를 가리킨 것이다(실기)

전제개혁을 둘러싼 시비가 불꽃을 튀겼을 때 정몽주의 태도가 대단히 절묘했다. 창왕 원년(1388) 7월 조준의 사전개혁안을 도당에서 논의케 되었는데 "시중 이색이 '가벼이 구법을 고치는 것이 불가하다' 하매 이림. 우현보. 변안렬과 권근.유백년 등은 이색의 의견에 찬동하고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가담하였으며 정몽주는 양편에서 미결의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정몽주는 용의주도했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것은 공양왕 4년(1392)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자마자 정몽주의 전광석화를 방불케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정몽주는 재빨리 간관 김진양 등에게 "먼저 이성계의 우익을 잘라 버리고 그런 뒤에 이성계를 도모하자"고 했다. 그래서 조준. 정도전을 비롯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의 직첩과 공권이 몰수당하고 특히 조준. 정도전 등은 원지에 유배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벽란도에 옮겨져 치료중이었는데, 이방원이 달려와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고했다. 이에 이성계는 야밤에 교군을 타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은 장사들과 모의, 정몽주를 제거하려 하니 이원계(성계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문관답지 않게 담대호탕했다. 정몽주는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빙자, 찾아갔다. 돌아오던 길에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이방원 수하의 자객 45명에게 쇠뭉치로 얻어맞고 절명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곧이어 고려 멸망에 연결되나 "만고충신"의 이름을 남기게 했고, 그후 8년을 더 살아 70세에 병사한 문익점은 명철보신의 길을 따르면서 무명문화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김시습.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식. 이황. 이지함. 김장생. 이수광. 송시열 등 조선조 일류 인물들은 모두 문익점을 기리는 시문이나 비문을 썼다. 특히 송시열은 문익점을 안향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이라고 흠모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으로부터 정조까지 문익점의 공적에 감사하는 왕의 전교만 해도 14회에 이른다.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청원하는 선비들의 상소만 해도 4번이나 올라갔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문익점을 문묘에 모시는 것만은 끝내 거부했다. 유교국가의 선비들로서는 공자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것이 지상.지고의 영광이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는 문익점이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그의 공로가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소득 1만달러 시대의 주춧돌 쌓은 사람
문제는 문묘 배향을 거부한 이유에 있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금지사항인 목화씨를 반입시킨 것이 선비로서 떳떳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그 이유였다. 왜냐하면 목화씨를 문익점이 붓두껍 속에 숨겨온 것이 아니고 무심코 소맷자락 속에 넣어왔다는 등의 "문익점을 위한 변호"(?)까지 대두되어 논란을 밎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조선왕조의 한계였다. 알맹이 없는 명분주의가 실용주의를 눌러버린 꼴이다. 그런 상황에서 면업은 조선왕조의 하대로 갈수록 위축되었다. 면직산업은 가내수공업에 머물렀던 것이다. 근대적 산업혁명을 추동하는 지도력도 없었다. 봉건왕조의 수탈체제로 인해 면직물의 질적 향상에도 소홀했다.

그럼에도 우리 여성들의 길쌈솜씨는 체화되어 대를 이어 전승한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 여성들의 길쌈솜씨를 근대적 공장제 산업에 동원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20세기 초 일본 자본주의의 견인차는 관서지방의 방직산업. 이 때문에 우리 여성들은 무수히 오사카 등지의 방직공장 여공으로 끌려갔고, 이것이 또 오늘날 70만 재일동포의 모태가 되었다.
8.15해방 후 한국의 목화재배는 세계시장을 지배해온 미국산 면포에 밀렸고, 이제 국내에선 시배지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명맥조차 끊어졌다. 고임금 체제 속에서 목화 재배는 상업성도 없다. 한여름의 흰색, 붉은색, 노랑색, 분홍색 목화꽃, 그리고 들판을 뒤덮었던 초가을의 흰색 목화송이는 추억속의 정경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문익점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 여성들에게 체화된 면직산업은 개발연대 한국의 도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0-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1등공신은 수입면을 가공한 섬유산업이었고, 그 주역은 우리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인이 1인당 소득 1만달러를 구가할 수 있게 된 주춧돌을 문익점이 쌓았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역사에 가려진 산청의 큰인물 고려충신 삼우당 선생

-산청문화원장 권재우(權載旴)-

                                                           머 리 말
역사의 고장 이 곳 산청은 옛부터 위대한 분이 많으므로 선비의 고장이라고 일컬어 오고 있습니다.
선비는 먼저 학식과 되망을 갖추어야 하고 아는 것을 몸소실천하며 예절에는 실수나 과오롤 저질러서는 아니되고 자신에게는 추상(秋露) 같이 엄하면서도 남
을 용서할줄알고 가난하게 살아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며 옳은 일을 위해서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바른말을 하다가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가는 것을 오히려 큰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산청에는 일찍부터 이러한 기풍(氣風)0| 조성되어있다.
고려말엽에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당시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경(元京)에서 덕홍군(德興君)으| 모반(謀反)에 불응(不應)하여 운남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가 원나라에서 당시 엄하게 유출(流出)을 막는 목화씨를 붓대롱속에 넣어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온 백성에게 따스한 솜 옷을 입게 하여 주었는데 그것은 국민을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大義)와 소이(小利)를 분명히 구분하여 행한것이었다.
또한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행(孝行)이 뛰어나서 포악한 왜구마저
도 선생의 효심에 감동되어 한고을이 병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내고장 위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자손만대에 바르게 전하여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산청의 고유전통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곳의 역사를 가꾸는 것입
니다.
우리가 전국 어디를 가둔지 산청에 산다고 하면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으며 또 속으로 어깨를 추스리게 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거나 또 알더라도 흔히 경관이 아름다워서 물맑고 산 높은 지리산이 있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산청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하겠다.

오늘날 여러 사가(史家)들이 이곳 산청을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중엽(朝解中葉)에 남명조식(南冥曺植)선생은 이곳 지라산을 찾아 덕산
에 자리잡고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뒷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도포자락을 걷어올리고 장검(長劍)을 뽑아들고 이 강토를 지켰다.
그리고 덕계오건(德溪吳健)선생은 청염강직으로 일관하여 국가
의 비정을 바로잡고 그 정신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구한만(舊韓末) 면우 각종석 선생은 빼았긴 국권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평화회의에 보내고 일본경찰의 고초를 격다가 옥고로 돌아가셨다.
이러한 정신이 온
고을에 팽배하여 이어져왔다. 고려조정에서 삼우당문익점선생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바른말을 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곳 산청 단성고을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시고 오직 목화재배에만 정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뒤 이성계(太祖)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불러도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 뒤 이성계 조정에서 만들어 낸 태조실록과 고려사 열전에 충신을 역으로 몰아 문선생의 기록들이 잘못되게 전하여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두 사서(史書)에 의하여 그 빛을 잃고 있으니 우리 산청의 큰 인물 이신 삼우당선생의 절의(節義)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을 재발굴하여 그 분의 인간상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삼는 바입니다.
산청문화원 이사 권재우 삼가씀

                                         역사에 가려진 삼우당 문익점선생
삼우(三憂)는 세가지 근심과 걱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호를 삼우라하셨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나라가 진홍(振興)하지 옷함을 걱정하며,
둘째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
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셋째는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삼우란 호
의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蕭王) 원년(辛未) 1331년 2월 8일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충정공(忠貞公) 문숙선의 둘째 아들로 문벌높은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터 올바른 가정 교육을 받았으며 일찍이 학문의 길에 올라 가정이곡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그 자제 삼은(三隱)의 한사람이었던 목은이색(牧隱李穡)과 동문으로 함께 정동향시
에 합격하였고 계속 학문에 정진하여 그 뒤에 또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선생 과 같이 신경동당시(新京東堂試)에 급제하는 등 올바른 윤리관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높은 교육이 근본(根本)이 되어 당시에 세상이 기울어져도 휩쓸리지 않고 오직 바른자세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불 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뿌러지듯이 과도기의 정치혼란을 만나 숫한 역경속에서 일생을 얼룩지게 살아오셨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朝蘇)이 서면서
도덕 정치가 폐쇄되고 세력정치를 주도함에 따라 당시 많은 중신(重臣)들이 함몰되었고 그 세도에 굽히지 않았던 문익점선생은 조선조의 사서(史書)에 유린되어 정의(正義)로웠 던 선생의 위업이 왜곡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태조실록(太祖實錄) 고려사(高麗史) 열전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태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7년 6월충에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졸(卒)하다. 갑진년(甲辰年)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씨앗 반(半)을 본 고을사람 전객령(典客令)으로 치사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드니 오직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가뜰에 씨를 따니 백여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씨를 향리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자신이 심은 것은 번영하지 아니하였다.
충국의 충 홍원이 천익의 집에 머무르면서 인하여 실뽑고 베짜는 기술을 가
르쳐주어 천익의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한필을 만드니 마을에 전하여 십년이 못되어온 나라에 퍼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흥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서 전의주부를 삼았다.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는데 이는 목면 유래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
0|다. 그 근거는

첫째, 목면 배양년도를 갑진년이라고 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선생의 년보
(年譜)와 사실기(事寶記) 효자 비각기, 묘비 등 여러고증에 의하면 계묘년에 순유박사로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승진하여 이공수(李公送)와 같이 사신으로 원조(元朝)에 들어가서 그 부당성을 간하다 순제(順帝)의 미움을 사서 갑진년에는 원나라의 운남성(雲南)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삼추(三秋)의 세월을 보내고 귀향하였는데 그때가 정미년(丁未年)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갑진년 목화시배(木花始培)설은 날조 된 것으로 보아진다.

둘째, 목화 천익 배양설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있는 것은
3년 동안 귀양살이에서 풀
려 죽음을 무릅쓰고 오직 내 조국의 헐벗은 백성을 생각하여 소중히 감추어서 가지고 온 몇알에 불과한 그 귀중한 것을 남에게 부탁하여 심게하였다는 것이 공감 할수 없는 것이며 더욱이나 일가 친척과 부모형제가 번창하게 한곳에 살고 있었는테도 타인에게 부탁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설령 사실이 그렇다면 그처럼 가까운 사이에 네것 내것을 가려 재배공적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천익이 심은 것이 살아서 3년을 가종하여 정미년 봄에 향리사람들에게 씨를 나누어 주었는데......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번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사실이라고 할수 있을 것인가?
또 목면의 가공기술까지 정천익
이 모두 창조하였다... 라고 하여 물레와 무명베의 유래를 무색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물레를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 래(萊)라는 사람이였으므로 그 이름을 인용하여 실뽑는 기구를 문래(文萊)라고 하였는데 와전되어 물레라고 하며 또한 베짜는 기구는 래의 동생 영(英)이 개발하여 문영(文英) 틀이라 하였으며 베 이름 또한 문영베라고 하였는데 무영베로 불러지다가 와전되어 무명베라고 불러지고 있다라고 선생의 실기에 적고있다

셋째, 이사실(목면가공기술보급)이 알려지니 익점(益漸)을 불러 전의주부로 삼았다.. 내용은
정천익과 그 여종까지 공로를 기록하면서(천익과 그 여종에게는 아무런 대우를 보이지 않고) 익점에게 벼슬을 주었다.. 라는 것은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있으며 문익점선생에게 전의주부를 주었다는 것은 선생의 품위를 크게 위축시킨 것이다. 그 당시 전의주부는 종7품의 하급관리로서 선생의 초기 관직인 좌정언 정6품에도 못미치고 있으며 그때 우왕원년에 선생은 충현대부 좌대언우문관제학 정3품에 보임되셨...
이상은 태조실록에 관한 것이며

  다음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본다.
고려사열전 문익점편 “문익점은 진주 감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使命)을 밭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德興君)에 부(附)하였다가 덕흉군이 패(敗)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 죽고 한 포기만 살아 삼년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뽑는 기구와 실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
※ 공양왕원년(1389) 이성계 시중(待中)의 무리들이 추진하고 있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조준(趙浚) 이정(李靖) 등이 강행을 시도하고 사전(私田) 불가론(不可論)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라안은 매우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선생께서는 이색, 이, 우현보틀에게 장차의 나라일을 염려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그들의 계혁에 서명을 거부하고 다음날 서연(書筵;임금을 모신 회의장)으로 나가니 대사헌으로
있던 조준이 선생을·탄핵{彈劾)하기 시작하였다. 탄핵골자는 문억점은 본시 무명인사로서 시골에서 밭갈이를 하였는데 그런데도 전하(殿下)께서는 현량(賢良)0|라 불러 간의대부로 제수하사 좌우에 있게 하시고 충략하고..... 왕의 결에서 성치를 보좌해야 할것임에도 충직한 모양만 꾸미고 간정(정치의 옳고 그름)하는 절개가 없으며 근일같이 주상을 모시고 있는 동료 오사충(吳思忠), 이서(李舒) 상소하여 전제에 찬동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익점은 가진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바 없고 그 의논에도 참여하지 아니하고 대중의 비방을 피하여 자기 안전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이는 왕과 사림이 기대하는 뜻을 져버리는 행위로서 마땅히 간직을 물러나야 할것이라고 하여 어린 왕이 그들의 뜻을 따라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선생의 인품을 흐리게 하였는데 이 모두가 날조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수 있다.


첫째, 덕흥군에 부하였다는 것이 왜곡된 것이다.
선생은 원나라에가서 원제(元帝)로 부
터 덕홍군에 따르라는 명을 받고 바르지 못한 덕홍군의 뒤를 따를수 없다는 글(奏對)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미천한 소신이 외람되게 천자님께 글을 올리나이다. 신은 이제까지 원통합을 품고 마음이 답답합을 참지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 비록 적은 나라 소신이라고 바르지 못한 일을 보고도 어찌모르는척 할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데 거짓을
꾸며 남을 헐뜯고 죄없는 군주를 물러나게 함은 정당한 일이 못 되오니 이들의 야망을 버리게 하옵소서. 저의 나라 왕은(恭民王) 이제까지 선정울 베풀어 왔던바 아무런 잘못이 없나이다. 소신은 정의롭지 못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들과 같은 하늘아래 있다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죽어 지하에서 백이숙제와 같이 머물지라도 사대부의 자존의식은 버릴수 없나이다.
이상과 같은 글을 올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선생은 또한 덕흥군의 정치업무 문서 수십통을 소각하였으므로 그 모략을 저지하였던 대담성을 나타내었는데 그러한 큰 뜻뜰 무시하고 덕흥군에 아부하였다고 한 것은 충신을 역으로 몰아 역사의 오점을 남긴 것이다.

둘째, 선생은 좌사의 시학으로서 상서하여 위학하는 도를 논하니 그때에 조준 간관 이정 등이 사전(사유농지법)은 불가하다고 다투므로..... 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다음 이어지는 글에는 익점은 갖인 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전제개혁)의논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글이 일관성이 없으며
또 록울 잃을까 걱정하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와는 달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으므로 록을 잃게 된 것이다. 속임수로 글을 꾸며 사서(史홈)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 것이다

셋째, 전제깨혁안은 마치 조준이 창안한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 토지제도가 물란하여 백성들이 소작권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과도한 조세를 바쳐야 함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이 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감안하여 토지제도롤 개혁해야 한다
는 여론이 여러신하들로부터 거론되어 왔던바 그 당시에 국가에 공적이 두터웠던 선생이 구국정신으로서 시무론(시급한정책) 8조를 상소하였는데 그것율 한번 살펴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건학당(建學堂), 치향교(置鄕校), 입묘주(立
朝主), 혁호복(革胡服), 정기강(整紀網), 박세렴(薄租敏), 건의창(建義倉), 설수침(設水砧) 등인데 이중에서도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하고 수로를 개척하여 물자 운반을 쉽게하고
각 고을에는 창고를 지어 흉년에 대비케하고, 5부에 학당을 세우고 작은 고을에도 향교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에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토지사전제도와 문교진흥정책의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시무론8조는 신세력들의 저지로 모두 이룩
되지 못했고 이성계의 조언에 따라 구상된 조준의 전제개혁안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모든 토지를 복구적인 국유정신에서 재편성하는 것으로 구세력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환원하여 새로운 규정에 의하여 재편성하게 되므로 고려 왕조의 최후를 종결하려는 의미와 동시에 신세력을 확장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때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하였던 사람은 문익점, 이색, 우현보, 변안열, 권근, 유백유 등 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반듯이 그 서열에 들어야할 문익점선생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역사가 잘못된 기록을 남기케 한 것이다.

, 아.... 선생께선 무엇을 위하여 몰아치는 태풍에도 휩쓸리지 않았을까? 고려조 기개가 그토록 중요하였을까?
오늘에 와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는 깊은 마음속을 몇사람
이나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로 조선조의 사서에 선생의 위업이 유린되고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개탄하여 저명하신 퇴계(退溪) 이황(李愰
)선생께서는 문선생의 효자 비각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조준(趙浚)이 한순간에 억지로 험담을 꾸민 말이 어떻게 공(公)을 더럽힐수가 있으랴. 그로 인하여 선생의 절의가 더 한츰 빛나게 되었는데 세상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잘 모를까 염려가 되도다” 하셨다.
, 가선대부, 이조참판 이미(李彈)선생께서도 문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조준의 견식이 선생의 숨은 뜻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여 이에 반문으로 그릇된 말을 만들어 선생을 탄핵하여 물러가게 하였으데...... 그 후에 태종대왕이 선생의 뜻을 기리어 공에
게 벼슬을 추증하고 세종대왕이 다시 영의정과 부민후(富民候)를 가증하셨으며 그 자손들을 돌보아 출세하는데 특혜를 내리셨으며 이문순공황 퇴계선생은 선생의 효자비에 기록하고 조문정공식(南莫曺植)선생이 공의 묘사기를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가 역사를 전하는 뜻이 높음을 근거한 것이다. 선생은 목면으로 나라의 커다란 공을 세우셨지만 학문에 있어서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서적이 왔을 때 이를 침착하고 세밀하게 추구하여 그 깊은 뜻을 깨달아 이땅에 전할수 있었으니 하늘이 도와 진실된 일을 내린 것이다

아,아......문공(文公)이시여 교양의 시작이였도다. 보이지 않는 그 혜택이 무궁토록 흐르지로다.
모든 합생(合生)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어찌 가히 있게 할 것인가? 라는 글을
쓰셨고 또 선생과 소년시절부터 동문으로 사귀어 온 목은 이색은 대사성의 직위에 있을 때 사성이였던 선생에게 치하한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문공(文公)은 목
면으로 큰공을 이룩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도 역학을 창명하였고 효제와 성리학으로 삼한의 과습을 세거(洗去)하여 어두웠던 천도(天道)가 밝아졌으니 가히 동방도학(東方道)의 종(宗)이 된다“라고 하셨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사후서에 선생에게 드리는 글
에는 내가 문충선공의 공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남명조식, 퇴계이황, 일두정여창,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모제 김안국, 사제 김정국·, 추강 남효온 등 여러현인의 문집을 보았으므로 문선생의 공로가 막대 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목면의 공뿐만 아니라 유가(儒家) 유교의 학문에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문성공 안유(안향으로 전해짐)와 문충선공 두 현인께서 우리나라에 유도를 계승하여 전해왔는데 그 덕의 깊은 뜻을 격양가
(노래제목)의 한구절에 임금님 힘이 어찌 미칠것인가? 라고 했다.
안문(安文) 두 어진 분
의 덕택으로 고려가 되놈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씨 왕조가 지위를 존엄케 할 수 있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큰 뜻을 이룩하셨도다. , 아..... 문공의 절개와 의리 조출한 풍격이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도.. 하시며 시로서 다음과 같은 발씀을 하셨다.
전의 사람도 문공과 같은이 없었고 후의 사람으로서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뒤의 뒤에도 역시 문공과 같은 이는 없을것다.
내뒤의 뒷사람들이 선생에 대하여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글을 남기노라
.
이와같이 간곡한 글로서 선생의 위업을 극찬하
셨다.

근세에 와서는 영특하고 현명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목화시배지에 사적비를 건립하게 하였으며 그때에 박대통령께서 내린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
귀 선조 강성군 충선공 삼우당선생을 기념하는 비가 이제 강성(단성)의 옛고율에 우
뚝솟았으니 실로 국가의 춘추를 미루어 보거나 교지의 한낱 종자롤 생각하면 이는 우리 생민(生民)0| 모두 다 축하롤 올려야 할것이요. 라고 하셨고
또 사단법인 진주문화원
에서는 향토의 얼을 캐는 시리즈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제1집은 남명조식선생에 이어 제2집에는 삼우당 문익점선생편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에 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이창호(李昌鎬) 문화원장께서 발문을 쓰시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반론(反)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우리겨레 불망(不忘)의 공덕을 세운
위대한 선인(先人)0|다. 충략하고......

당시 공민왕의 사신으로 원(元)나라에간 사람이 어찌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던가.. 또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국하였다 되어있는데.. 이를테면 모반(謀反)의 대역죄(大逆罪)를 저질렀던 사람이 어찌 다시 공민왕 치하로 귀국할수 있었으며 또 귀국한 즉시로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 및 높은 관직에 임명될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해서 덕흥군이 어떤 인붙인지 살펴보았다.

덕흥군은 고려충선왕의 서자로서 이름은 탑사첩목아이며 어머니는 궁인인데 출궁하여 백문거집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 있었으며 원나라 황제께 아부하여 고려에 많은 해를 끼쳤으며 고려의 왕이 될려고 곰민왕13년에는 최유와 함께 군사일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침입하였다가 안우경, 최영장군 등에게 참패를 당하고돌아갔다로 되어 있는데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황제가 덕흥군을 따르라는 것을 반대하다가 남방으로 귀양갔던 것이다. 그런 것을 뒷날 이태조 4년에 꾸민 고려사 열전에 유부 덕흥군이라는 허위의 말을 써 넣어 오늘의 흔선을 빚게 한 것인데 그 원인은 선생께서 이씨 왕조의 혁명을 지지했거나 또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여 벼슬에 나갔으면 이런 곡필(曲筆)을 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미루어 선생께서 덕흥군 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이태조(이성계)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건만 같이 여조(麗朝)에서 벼슬을 살았을 때 충신불사이군(忠톰不事二君)으로 끝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절개(節槪)를 지켜낸 사실(事實)을 들고 싶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의 업적이 역사에 왜곡된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러나 사서(史書)에 의존하는 오늘의 학자들이 영남의 인물지를 발간하면서 가장 제일 먼저 앞서열에 모셔야할 문선생을 일천명의 서열에도 들지 않게 하고 있으니 우리는 놀라지 않을수 없으며 목면유래 또한 정천익공적설이 가시화되면서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역사유적의 하나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있는 이 나라 대통령이 지정한 사적제108호 문익점선생면화시배지명칭도 고려사 및 태조실록 기록에 맞추어 문익점선생 이름을 빼고 그냥 목면시배지로 지정한다고 문화재청에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홍직박사는 몇 년전에 국사대사전을 만들면서 목화유래에 대하여 실뽑는 기구 문레와 베짜는 기구 베틀을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인 문래와 문영인데 이 두분을 정전익의 아들과 손자라고 오도하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두 사서에 가려서 그빛을 잃고 있으니 이는 오늘의 사회를 다스리는 지성인들의 책임으로서 하루속히 역사에 왜곡된 실체를 밝혀 사리에 맞도록 역사가 전해지도록 해야 할것이며 아울러 사서에 가려져 은폐되고 왜곡되어있는 고려조 출신이시며 우리산청의 큰 인물이신 삼우당선생의 절의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과 인간상을 재발굴하여 그분의 정신과 얼을 후세(後世) 사람들이 본밭게 해야할 것이다.

참고문헌 : 삼우당실기, 삼우당선생 연보, 효자비각기 신도비문, 고려사열전, 태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진주의인물

 

원나라에서남황 (월남지방)으로 귀양살이 가면서 남긴 시문
이젠 이내 얼굴 대하기 어려울걸세   낯선 거친 먼 땅에서 살수 있을까
하늘이 감동하여 혹시라도 말머리에 뿔-나면  그대는 알아라 내 살아온줄을
눈물이 쓸쓸한 비를 가려  만리남항길 아득하도다
사람들아 의심말라 나는 신염있어   젊은 기운 태산과도 같도다
빨리 가자고 수레군 재촉하지 말어라   내마음 고향갔다 아직 오지 않았다
가을달이 뜰 때 그대곁을 떠나   거친땅에 가고 있네
봄바람 불 때 다시 만나서
한번 웃어 볼때를 기다려 주소서

 

 

문익점의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경상대학교 교수

                                                                  1 . 머 리 말
고려말 삼우당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 나라에 번식식시킨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 상당한 영항를 미쳤다 조선시대의여러 지식인들도 지적했듯이 그것은 당시의 의관문물을 크게 바꾸었다. 그래서 후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에 대한 칭송이 줄을 이었다.

그동안 문익점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 지긴 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글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1)
그것도 그가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앗을 가져와 우리나라에 퍼뜨린 과정에 집중하거나 그의 정치적 행적에 관한 것을 주로 언급한 것이있다.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문익점의 행적에 대해 평가하거나 그에 대한 현창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번의 학술대회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파 과정 및 그것이 우리 사회와 인근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의 행적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시도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서 필자는 조선왕조 전시대에 걸쳐 당시 지식인들이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현창하려고 했던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문익점이 세상을 떠난 후 후대의 인물들이 문익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 왔던가 하는 것과 국가 및 관에서는 문익점에 대해 어떤 褒典을 베풀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려고 한다.
다음에는 문익점에 대한 현창을 위해 자손들과 지역 사림들이 어떤 활동을 해 왔는가를 실기간행과 증보, 서원 건립?청액운동과 문묘종사운동, 부조묘 복구운동 등을 통해 살펴보고, 지역 사림들증에서도 특히 문익점의 고향인 단성의 사림들이 별였던 적극적인 활동의 내용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실기조차 없어서 조선시대 내내 문익점과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만 당시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뿐이지 그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가 없어서 그에 대한 존승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포전이나 후대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에는 자손과 인근 사림들이 그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일정한 기여를 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가 주자료로 이용한 것은 1900년에 편찬된 『三憂堂實記』이다 이 실기가 나오기까지 문익점과 관련된 문헌은 여러 차례 증보되면서 이름도 『忠宣公行蹟記』(1766), 『江城君事實錄』(1788)에서 1818년부터는 『삼우당실기』로 바뀌고 1870년에는『道川院蹟』도 만들어졌다.필자는 이중 『강성군사실록』과 『도천원적』도 참조하였다. 2)
이외에 19세기 중반 도천서원에 간여하였던 李邦儉(1798-1865)의 『道淵端言』 과 1640년에 만들어진 李時○(1588-1663)의 『雲窓誌』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1.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삼우당 문익점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역대 여러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중에 退溪 李滉混이 평가했던 부분을 장황하긴 하지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江城諦 남쪽에 있는 培養山里는 전 왕조 때 사의대부였던 文公이 살던 옛터이다.
마을 가운데에는 효자비가 있는데, 洪武 16년(1383)에 조정에서 공의 효행을 기려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원래 공이 모친상을 당해 산간에 있었는데,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여 지나는 곳마다 무참하게 짓밟아서 인민들이 도망하여 숨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홀로 상복을 입고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며 맹세코 그자리를 떠나지 않으니, 적들도 감탄하여 효자라 칭하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모친의 영전이 참화를 면할 수 있었다

 

②공의 功이라 하는 것은, 至正 甲辰年에 공이 일찍이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나라의 일로 남방의 거친 곳으로 귀양갔다가 풀려 돌아오면서, 길에서 목면 씨앗을 입수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함이 급하기에 가져오는 것을 금지함을 무릅쓰고 주머니에 넣어와 온 나라에 번식시켜 만세토록 길이 덕을 입혔으니,
이것이 公의 공인 것이다. ---이것이 나라 안에 가득히 퍼져 유통된 것은 결국 그 공이 五穀六財와 같은 것이니, 三韓의 많은 백성이 파리해지고 어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衣冠文物을 환하게 일신시켰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 왕조가 추가로 은덕의 명을 내린것은 헛된 은전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다.


③그리고 공의 효성은 생사의 갈림길에 임해 나타났었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것이다. 이런즉 공이 만년에 병을 칭하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곧 또한 일찍이 고려를구해낼 수 없음을 알아보았던 것이었으므로 미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중간에 비록 일차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조가 바뀌기 전이었는데 趙俊이 일시적으로 남의 흠을 잡는 말을 한 것이 어떻게 공을 더럽힐 수가 있었으랴. 내가 염려하는 것은 공의 큰 절개가 이에서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3) ②의 부분에서는 문익점의 목면전래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즉 면포가 우리 사회에 퍼진 것은 오곡을 경작하는 법과 토,금,석 화,피, 초 와 같은 기물의 재료를 다루는 법이 처음 창안된 것과 같은 공헌을 하였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백성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극찬하고 있다.

①과 ③의 부분에서는 그가 솔선하여 유교적 기본덕목의 하나인 효행과 왕조에 대한 절의를 실천했다고 하며 도학적 입장에서의 그의 공헌을 칭송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황은 趙浚이 문익점을 탄핵했던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조준이 일시적으르 문익점을 헐뜯은 말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절의에 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익점은 공양왕 때에 간쟁을 맡은 사의대부로 있으면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던 온건개혁파 즉 목은 이색 등과 연대하여 과격한 사전개혁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런 입장은 곧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결국 그 일원인 조준의 탄핵을받아 그는 파직되었던 것이다. 4)

  새 왕조가 개창된 직후에도 문익점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다만 목면 전래라는 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이 워낙 심대했기 때문에, 이 부분의 업적이 일부 논자들에 의해 계속 제기되면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은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이 강화되고 전왕조 고려에 대한 충절의 행적을 남긴 인물들을 중시하는 사림파들이 발언권을 점차 강화해 나가는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문익점의 충절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황의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에 정계와 사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우암 宋時烈도 문익점의 목면 전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后稷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또 程子, 朱子가 죽은 후 우리 동방의 安裕와 문익점 두 현인이 그 도를 잘 전수하였으니 두 분 이 아니었으면 우리 등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 찬하였다. 5)

  이외에도 조선시대 많은 유명 인물들이 詩章을 통해 그의 목면 전래의 공적과 충효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그 예로는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南智, 傭齋 成俔(1439-1504), 梅月堂 金時習(1435-1493), 점필제 金宗直(1431-1492), 정여창(1450-1504), 寒暄堂 김굉필(1454-1504), 梅溪 曺偉(1454-1503), 慕齋 金安國(1478-1543), 思齋 金正國(1485-1541), 文山 柳洵(1441-1517), 南冥 曺植, 비隱 이규보 율곡 이황(1536-1584), 土亭 李之函(1517-1578), 沙溪 金長生(1548-1631), 秋浦 黃愼(1562-1617), 竹林 卓中, 芝峯 이지광(1563-1628), 學沙 金應祖(1587-1677), 판윤 姜世晃(1713-1791), 승지 兪恒柱, 승지 姜연, 단성현감 채○일蒙腐一, 진사 朴정원 등을 들 수 있다. 6)

 

                                     2. 국가 및 관의 褒典

국가로부터의 포전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여묘살이했던 효행이 알려지자 우왕 9년(1383)에 조정에서는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최인복을 보내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다. 7)
그러나 이 당시에는 비각을 외우지 않아 오랫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같다. 權潗(1569-1633, 호 ?翁)의 '孝子碑閣重修記'에 의하면 비를 세우던 당시에 비각도 세운 것으로 보고 있지만,
8)
그 이전에 쓰여진 이황의 '효자비각기에는 명종18년(1563)에 와서 당시 단성현감 안전이 이런 상테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금을 모아 비각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9)
그 이후 임진왜란으로인해 비각이 소실되자 광해 15년(1623) 당시 단성현감이던 이원길이 앞장서 효자비각을 중건하였다.
10)

또 조선왕조에 들어와 정종 2년(1400)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間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 4인을 두어 묘를 지키게 하고 復戶 2결을 내려주었다. 11)
이로부터 150여년 이후인 명종 16년(1561)에도 문익점의 증손녀 문씨가 감사에게 청원해서 묘사를 중건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문씨의 손자 李源이주도하고 수령 成遵이 협력하여 묘사와 제전을 늘렸다. 이때 묘사 기문을 쓴 사람은 南冥 曺植이었다. 12)

  문익점에 대한 贈職과 封君 등의 조치도 이루어진다. 태종 원년(1401)에 와서는藝丈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했다. 그리고 문익점에 대한 不조廟를 세우게 하여 祭田 100결과 奴婢 70구를 하사하고 복호도 내려주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候로 봉하였으며, 南智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 13)

  이후 역대 왕들은 문익점에 대해 賜祭文을 내리고,14)
또 십여 차례에 걸쳐 傳敎를 내려 자손에 대해서는 특별히 채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와 일반 군역에 충정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계속 지켜지게 하였다. 15)

  세조 7년(1461)에 오면 국가의 명에 의해 문익점의 고향인 丹城脚에 祠宇도 건립된다16)
후대에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이 올린 上言에는 태종때 서원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아마 부조묘를 서원으로 잘못 착각한 것 같다 강성군, 부민후로 봉한 시기도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과 차이가 있다.
17) 
사실 태종 10년(1410)에 사간원에서 문익점을 위한 사우 건립을 요청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결과, 이미 여러 가지 포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우 건립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이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18)

 

문익점 사우의 건립이 조정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세조 2년(1456)에 가서였다. 이때 집현전 직제학 梁誠之가 목면을 전래한 문익점과 화포제작에 공헌한 崔茂宣의 사우를 각각의 관향에 건립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향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19)

 그러나 이 도천서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어 제향이 시작된 것은 국가의 승인을 받은지 몇 년 지난 1461년이었다. 처음 사우를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건립장소를 선정하거나 단성 사림, 문익점 자손의 재정적 협조 등을 조직하고 구체적으로 사우를 건립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도천서원은 사림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고 이건되면서 서원 사액 또는 복액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원래 국가의 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액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임란 이후 소진된 도천서원을 복구한 이후 단성지역 사림들은 점차 다른 사액서원과 마찬가지로 도천서원에도 사액이 내려져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언급하듯이 숙종 34년(1708) 朴恒泰를 비롯한사림들이 상소해 사액을 청하는 등, 청액운동이 여러 차례 전개되었고 마침내 정조11년(1787)에 도천서원이 사액되었다

  도천서원과 관련하여 碧溪影堂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삼우당실기』의 연보에는중종 6년(1511)에 벽계영당이 咸陽에 세워지고, 명종 22년(1567)에 가서 사액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20)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사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丹城違院記'를 섰던 박사휘(1689-1776, 호 ?窩)에 의하면, 正德年間(1506-1526)에 단성현에 벽계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근거 자료가 없어 확인할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익점 후손 문희석의 기록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서원이戒湯 碧溪에 있다고 되어 있고 文允明의 上言 중에는21)
문익점의 行狀이 함앙의 벽계서원에 있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잘못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박사휘는 단성현이 함양에 속해 있던 적이 있어서 그런 언급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22)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I5세 때인 忠목王 元年(1345)에 '함양의 碧溪山堂에서독서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어 함양에 서원이 건립된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박사휘가 살았을 때나 지금 현재에도 함양에는 '벽계'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다. 반면에 단성에는 벽계라는 곳이 있다. 李時○의 『雲窓誌』에 의하면, 이곳에는문익점의 조카였던 文可學의 독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23)
이로 보아 이곳은 문익점과도 관련있는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따라서 박사휘가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곳에 문익점의 사우가 세워졌다가 뒤에 도천으로 옮겨져 중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추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중에 사액된 곳으로 전라도 장흥의 江城祠를 들수 있다. 강성사는 원래 月川祠라 불리고 있었고, 문익점의 9세손인 楓菴 文緯世(1534-1600)를 제향하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운 사우였다. 24)
문위세는 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25)
그런데 영조 9년(1732)에 월천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배려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문익점이 추가로 제향되면서 이름도 강성사로 바뀐 것 같다. 26)
이 서원도 전라도유생들의 상소가 제기되면서 정조 9년(1785)에 사액이 내려졌다.
27)

 

자손과 사림의 현창활동
1. 실기 간행과 증보

이러한 국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관련 지역의 사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림들은 문익점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문익점이 어떤 인들인가를 알리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의 문집이나 실기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문익점과 관련된 문적은 대부분 유실되있다.
文可學 사건 이후 자손들이 단성에서 다른곳으로 흩어져버리고 단성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과 부조묘를 모시는 사손의 대가 오랫동안 끊긴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 임진왜란 등 병화로 인한 소실도 그 한 원인이었다

  다만 증손 사헌부 감찰 致昌이 세조 10년(1464)에 지은 家傳(事責本記)28)가 있었지만, 이것도 도중에 유실되어 버리고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29)
  이보다 악 250년 이후인 숙종 34년(1708)에 고향인 단성에서 향부로들이 명현들이 기록해 놓은 문익점 관련 글들을 토대로 行蹟記를 만들었으나, 이것도 영조 40년(1764)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766년에 도천서원 원임을 맡고있던 朴思徽(박사휘) 등 단성 사림들이 다시 '忠宣公行蹟記'를 만들었다. 역대 왕들의 褒贈으로 관찬사서 및 고려사에 실려 있는 것, 선현들이 기록해 놓은 것, 文氏族譜, 勝覽 등에 실려 있는 것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30) 
도천서원 사액 직후인 정조 12년(1788)에는 장흥의 강성사에서도 후손 泳光이 주도하여 『忠宣公功行錄』(江城君事實錄)을 간행하였다.
31)
여러 가문에 소장된 문익점과 관련된 글을 모아 편집하였는데, 강성사에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江城祠圖와 문위세의 행장도 추가했다. 그러나 행적기나 공행록은 모두 얼마 안 되는 자료를 토대로 편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들의 시기와 연월이 다르고 내용이잘못된 것이 많았다. 32)

 그 이후 순조 8년(1808) 족보간행 때 文致昌이 1464년에 찬집한 家傳이 유실되었다가 섬에 살던 후손에게서 발견되었다. 33) 이를 계기로 17대손인 桂恒 등이 본격적으로 관련 문적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1817년에 서울에서 공사서적을 참조하고 차이가 나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삼우당실기』를 편집하였다 당시의 명망가였던 金庭堅, 洪永燮, 吳羽常, 閔泰鏞 등을 찾아가 편차를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하고 예조판서 金義淳, 공조판서 洪義浩 등에게는 서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818년 겨울 하동에서 인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종결하였다. 이 작업에는 계항뿐만 아니라 관산의 泳光, 만성의 鍾九, 장흥의 達祖, 하동의 翊謨 등 각지의 문중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34)

  이 실기에는 남평문씨의 世系, 문익점의 年譜, 문치창이 지은 家傳, 列朝褒典, 각祠院의 事蹟 및 諸公敍述 등이 수록되는 등,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35)
1827년에도 경기도 安城에서 실기를 다시 발간하였지만, 고친 것은 없고 문중 내에 널리 배포하기 위해 편찬한 것 같다. 36)

  이후 철종 2년(1851)에 가서도 계항의 아들로서 문익점의 사손이 된 秉烈이 京中에서 실기 증보 간행을 주도하였다. 이 실기에는 海奎律髓集에 실려 있는 忠宣公詞律 三首와 여러 선현의 吟詠 및 輓章 등이 추가되있다. 이것은 계항이 후에 수습한 것으로 미처 실리지 못했던 것이있다. 37)

 

1870년에 와서도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단성현 신안의 문익점 묘각에서 문씨 대동보를 발간하는데, 이때 실기도 새로 중간하였고, 『道川院蹟』도 만들었다. 이때 간행된 실기도 1851년에 인쇄된 실기와 체제가 거의 동일하고, 일부만 약간 증보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남평문씨의 上系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한 것과 金自粹(1351-1413)의 『桑村集』에 실려 있던 시가 추가된 것이 그것이다. 38)
도천원적을 간행한 것은 『삼우당실기』에는 도천서원의 내력이 소략하기 때문에   내력에 관련된 글을 많이 실어 도천서원을 좀더 체계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삼우당실기』에 실려 있던 글중 상당 부분은 목차에 나열하면서 실기에 실려 있다고 註記만 하고 내용은 아예 싣지 않았다. 39) 
현재 각 가문과 각종 도서관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실기는 1900년에 다시 단성의 新安思齋에서 후손들이 단성사림과 협력하에 중간한 것이다.
40) 이것은 기존의 삼우당실기와 천원적에 실린 글을 모두 모으고 일부를 수정해서 아예 새로운 체계로 발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편차와 규례에서 순서가 잘못된 것과 문자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연보에서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추가하였다 가전에 수록되어 있던 庚午封事 元朝奏對 부분을 빼내어 별도로 싣고, 포은 정몽주와의 聯名疏, 목은 이색등과의 贈別詩 등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단성의 명망가였던 明湖 權雲煥(1853-1918) 厚山 李道復(1862-1938)등으로부터 검교받았고, 松沙 鄭時林 勿齋(老栢軒) 鄭載圭 定(1843-1911) 등에게서 서문이나 발문을 받았다. 41)

 

                       2. 서원 건립, 청액운동과 문묘종사 운동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도천서원을 세우도록 명령했고 강성사에 대해서도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켜 주었는데, 이렇게 되면 서원의 지위가 그만큼 강화되고 관의 지원도 일정 정도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서 이렇게 인정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문익점이 남긴 공헌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손과 지역 사림들의 문익점을 위한 끊임없는 현창 노력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도천서원의 예를 통해서 보면 잘 알 수 있다.

  도천서원은 세조의 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 사액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임란으로 중건한 이후 액자가 불타버리고 사사로운 액자를 걸어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우 중에서도 등급이 낮고 관의 지원도 별로 없는 지방의 鄕賢祠와마찬가지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42)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숙종 34년(1708) 단성의 朴恒.泰를 비롯한 경상도 유생 300여명이 연명해서 사액을 요구하는 상소를 을렸다.
43)그러나 당시는 서원의 신설이나 사액의 금지조처를 강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왕이 예조에 논의할 것을 명령했으나 담당 부서에서 동의를 하지 않아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44)

  그 뒤 정조 8년(1784)에 오면 전라도에 사는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장흥의 강성사에 대한 사액을 요구하였고, 이어 이듬해에는 전라도 유생 金相樞 등 600여명이 상소해 강성사가 사액되었다. 45)
강성사가 사액되자 곧 이어 정조 11년(1787) 도천서원 복액운동이 일어났다 李亨復을 비롯한 경기, 경상, 전라의 3도 유생 600여명이 상소해서 도천서원의 액자를 복구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결국 조정에서는 액자를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46)
서원을 창립한 이후에는 해당 선현에 대한 奉祀와 사림의 교육장소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여러 가지 규칙과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적절한 운영을 해 나가야 했다 이는 결국 자손과 인근 지역 사림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원의 건물이 노후화되어 새로 짓거나 고쳐야 했다.
도천서원도 1461년 문익점이 공부하던 별채 三憂堂이 있던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47)
여러 번 중건되고 이건된다. 그런데 서원의 위치가 좀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명종 19년(1564)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광해 4년(1612)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13년(1672)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48)

이후에도 중건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1744,1770, 1797, 1805, 1865년으로 이런 중건과 이건과정에서는 자손과 인근 사림이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49)

  그런데 문익점을 모신 서원은 도천서원, 강성사 외에 여러 곳이 있었다. 황해도 松禾縣의 三峰書院, 전라도 昌平縣의 雲山書院, 경상도 義城縣의 봉강書院이 그것이다. 이중에는 문익점의 자손이 많이 모여 살고 있으면서 그곳에 거주했던 다른 조상과 함께 문익점을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건립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창평현 사림들이 문익점의 손자인 越川君 文彬(?~1413)이 유배되었던 곳이라 하여 雲山書院을 세웠는데, 1859년 이곳에 문익점과 손자 장연백 文萊를 추가로 제향하였다. 50) 문빈은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월천군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51)
담양, 창평에는 문빈의 자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文致龍(1746-1814, 호 雲齋)과 文天壽(1736-1810, 호 梅堂) 등이 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52)  1864년에는 의성 사림들이 문익점 손자 承魯가 수령으로 와 있으면서 晩川洞에사묘를 세웠던 것을 기려 그곳에 鳳崗書院을 건립하였다. 53) 이곳은 문익점이 이 고을에 처음 목면을 확산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고 손자인 승로가 의령현감으로 와서 기념지로 가꾸어 놓은 곳인데, 문씨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54) 
실기에는 이보다 시기가 훨씬 앞서서 인조 22년(1644)에도 황해도 유생들이 송화현 桃源 三峰山 밑에 삼봉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55) 실기의 연보에는 문익점이 송화현에 은거했던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 그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정황도 알 수 없다. 좀더 다른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볼 여지가 남는다
자손과 사림들이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세기말경부터는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해 나갔다. 정조 16년(1792)에는 생원 李福를 소수로 하는 다수의 유생들이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다. 상소문을 지은 魏伯珪(1727-1798, 호 存齋 또는 桂巷, 전라도 장흥 출신)가 문익점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며 내세운 논리를 들어보면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문익점이 처음으로 목면을 전파함에 가죽옷과 갈포옷을 입었던 풍속이 크게 변해서 우리의 관대의 풍속이 이루어졌고 백성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공을 논한다면 마땅히 주나라의 후직과 더불어 사당에 모셔져야 하고 팔도의 백성들이 가가호호에서 제사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제사 지내는 곳은 다만 단성의 도천서원과 장흥의 강성사 두곳뿐이니 삼백 고을의 인심이 그 누가 문묘에 제향되는 반열에 이르도록 노력해서 경모하는 정성을 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56)

그들은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으나 국가의 금지정책으로 인해 결국 왕에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57) 그 이후 한동안 문묘종사운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자 시기가 분명치 않지만, 1870년을 전후해서 다시 청무운동이 시작된다. 즉 鄭在慶, 朴尙台(1838-1900, 호 鶴山)를 비롯한 사림들이 상소를 올려 문익점의 문묘 배향을 요구했으나 이를 불허하는 왕의 비답이 내려졌다.58)
그 뒤에도 洪在誠과 朴齋晩 등을 중심으로 한 3차 상소와 金健秀와 沈宜肅 등의 4차 상소가 이어졌지만, 번거룹게 하지말라는 비답이 내려졌을 뿐이었고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59)


                             3. 부조묘 복구 운동

문익점의 부조묘가 설치되어 있는 단성에는 그의 손자, 증손대에는 자손들이 별로 살고 있지 않았고 단성 이외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男歸女家 현상 등으로 인해 인구 이동이 활발하여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벼슬살이로 인해 서울 근처에 거주하는 현상도 많았다.
문익점의 자손도 마찬가지였고, 봉사손인 종손 이외에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런데 문익점의 자손이 단성에 많이 살지 않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文可學 사건으로 인한 단성 이탈현상이 그것이다. 문가학은 문익점의 동생 益夏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태종때에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2년(1402) 진주 출신인 예문관 직제학 鄭以吾가 진주에 사는 문가학이 비를내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하여 왕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러들여 시험하였는데 그가 치제를 하자 과연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항상 神衆經을 외워 도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한다.
60)

그 이후에도 테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 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61) 후에 효험이별로 없자 내쳐서 開城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이후 이곳에서 생원 金천, 주부任聘, 생원 趙方輝, 부정 曺漢生, 소윤 金亮 등 여러 사람과 공모하여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太宗實錄』에 나와 있는 내용을보면 다음과 같다

妖淡人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 崔有慶에게명해 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李叔蕃 ?尹祗, 형조 판서 金希善, 사헌 집의 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
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별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金천에게 말하기를, '이제 佛法은 쇠잔하고 流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神衆經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 있고, 天兵과 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하니, 김천이 그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任聘 ? 생원 趙方輝 ? 전 부정 趙漢生 ? 전 소윤 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 사직 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 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 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니, 黃喜가 아뢰기를, '한놈의 문가학은 미친 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발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62)

이 사건은 중대한 모반사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63) 결국 문가학과 일부 핵심 연루자가 처형당하고, 문가학의 어린 자식도 교살되었다. 64)

 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의 친족들이 연좌되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한해를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던 朴苞와 문가학 등의 친족들은 제외되었다. 65) 

원래 모반죄를 저지르면 당사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와 형제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 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방계로 조카 및 백숙부 등도 연좌되어 먼곳에 유배되었다.
66) 문익점의 자손들은 이 연좌제의 직접적인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그들에게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문익점 자손중에도 그 영향을 받아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익점의 손자 文承孫이 '從叔(문가학)의 처형으로 화가 종족에 미쳐 여기저기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는데 공은 溟洲로 들어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는 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정황은 17세기 중반 李時○에 의해서 편찬된 『雲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운창지』에는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가학이 젊었을 적에 淨趣庵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여 사람을 흘리고 있어 이를 잡아 죽이려 하자 여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둔갑술이 적힌 비결을 제공하였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궁궐 내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문가학은 죽임을 당하고 단성현에는 그 자손들이 살 수 없도록 모두 바닷가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지금 東萊府에 거주하는 문씨들이 그들이다.
67) 
이런 상황에서도 문익점의 4대 장손인 光瑞는 큰 피해를 받지 않고 단성에서 살고 있었다. 문익점의 공훈에 대한 국가의 은전이 상당하고 그에 대한 부조묘나 묘사에 대한 봉사를 맡아야 하는 장손이므로 국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광서에게는 서자 彦國 이외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부 박천군수李鶴(여주이씨)의 아들 李承宗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여주이씨는 단성에서 세거하지 않고 서울 인근으로 이거해 버렸다.
68)

 서자인 언국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문중 내에서는 광서의 조부 善仝의 동생인 義仝의 증손 世華를 사손으로 삼았다가 다시 문익점의 제2자 中誠의 5대손인 善昌을 사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단성에 거주하지 않고 경기도 楊州 또는 長湍에 거주하였고 선창의 증손인 彦祥 때에 가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사손이 끊겼다. 69)
그 이후 오랫동안 사손이 끊겨 있다가 19세기에 가서야 중성의 지파 자손중에 桂恒의 아들 秉烈이 부조묘의 제향을 책임지는 사손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이때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손들이 여러 차례 사림을 움직여 부조묘 복구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1730년경에 자손들이 상언을 올려 부조묘의 복구를 요구했지만 상신들이 그대로 덮어두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고 정조대에 와서 장령 李燮이 또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70)
그 뒤 정조 20년(1796)에 다시 장령 朱重翁이 상소를 을려 부조묘 문제를 제 기 하였다.
71)

이때에도 국가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자손들의 부조묘 복구운동은 계속되었을 것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헌종 7년(1841) 문중 내에서 병렬을 사손으로 인정하는 회의를 거쳐 완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호남, 영남, 호서 등 각 지역에 를어져 살고 있던 삼우당 자손의 대표들이참여한 것 같다. 72) 그리고 1844년에는 관의 허락을 받으려고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연명해서 예조에 상서를 올렀다 부조묘의 사손으로 병렬을 세우고자 했으나 감히사사로이할 수 없어 허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73)
1854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유생들이 나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가로부터 다시 부조묘의 계승봉사를 인정받게 된 것 같다.
74)

  그런데 이 당시까지는 부조묘가 단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사손이 있는 전라도 보성으로 옮겨야 했다. 국가가 인정하는 부조묘를 옮기는 데는 관의 여러 가지 도움이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관찰사에게 상서를 올려 경유하는 고을의 관아로 하여금 옮기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75)


                    4, 단성 사림의 적극적 참여

지금까지 언급해 왔듯이 문익점에 대한 현창운동에는 자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사림들이 참여해 왔다.
그중에서도 단성현의 사림의 참여는 가장 적극적이었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단성현은 원래 작은 고을로서 고려 말까지만 해도강성현과 단계현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강성현은 진주에, 단계현은 합천에 속해있었다. 그러다가 공양왕 때에 수령이 파견되면서 두 고을이 합쳐져 단성현이 되었. 것이다. 76)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단성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성 출신의 인물은 진주 출신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준이 문익점을 탄핵하는 내용에서도 문익점을 진주출신으로 보고 있고, 문가학이 천거될 때도 진주 출신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77)
이런 고을이었기 때문에 문익점과 같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이 고을 사림으로서는 대단히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가학 사건 이후 단성에는 문익점의 자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사손으로서 단성을 지키고 있던 문광서가 여주이씨를 양자로 들인 것이라든지, 조선중기 문익점의 증손녀로서 합천이씨 季通과 결흔한 문씨가 묘사 중건에 앞장셨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성에서의 문익점과 관련된 서원, 묘사 등의 관리 및 문익점에 대한 현창 작업은 합천이씨 등 외손들과 단성의 사림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양마을에 정착한 합천이씨가 외손으로서 문익점을 현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淸香堂 李源의 역할은 『운창지』에 도 잘 나타나 있다. 78)
그는 효자비각을 건립하는 것과 이를 기념하는 기문을 당시 명사에게오청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79)

  딘성의 다른 가문의 사림도 고향 출신인 문익점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느끼고 도천서원의 운영과 중건뿐만 아니라 청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단성에서는 사액서원으로서 내세울 만한 서원은 도천서원 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천서원도 1461년 도천 위에 세워진 이후 여러 번 중건되 고 이건되었다. 서원의 위치가 충 낮은 곳에 있어 수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1564년에 1리 정도 위쪽에 이건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진되자 1612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중건하였다가 1672년에 현손 光瑞가 살던 유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그때마다 단성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증건하고 관아에 지원을 요청할 때도 적극적이었다. 80) 이후에도 1744, 1770,1797, 1805, 1865년에 중건되었는데

합천이, 성주이, 안동권, 진주유씨 등 단성의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중건의 실질적인 직임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81)

 이중 1865년에 도천서원의 원임으로서 서원 중건을 주도했던 李邦儉의 道端述言에는 당시 서원중수과정에서 단성 사림들이 활동했던 여러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즉 1864년 7월에 도천서원에 비가 새어 여러 가지 집물이 젖고 일부 서까래가 기울고 창과 벽이 일부 무너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자, 이방검은 단성 사림 각 가문에 통지하여 다른 서원의 향사 모임 때 논의하고 전달하여 서원 중수 방향을 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82)

  이런 과정을 거쳐 1865년에는 講堂과 酒庫를 중수하였고 그후 西齋, 典廳, 庫舍등도 새로 세우고 사당의 수리도 시급해서 위패를 강당에 임시로 봉안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여 다시 단성 사림의 각 가문 대표들에게 회의소집을 알리고 있다. 83) 이에 드는 비용 부족 때문에 인근 고을에 통문을 돌려 각 고을 사림들의 도움도 요청하였고84) 각 고을에 사는 문익점 자손에게도 자금 모금을 요청했다. 85) 그러나 일부고을의 문씨들이 협조하지 않거나 자금모금을 맡은 일부 인사가 자금을 보내지 않은 등 문제가 생기자,86) 진주, 하동, 곤양 사림들과 연대해서 이에 대한 징계를 관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87)

 

단성 사림들은 문익점의 위패 환봉시에는 관의 경제적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88)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708년 박항태 등 단성 사림이 도천서원 청액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사액서원이 된 후에는 權思國 등 단성 사림들이 도천서원에 대한 면세운동도 전개하여 관의 지원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89)  이외에도 문익점을 현창하기 위한 방법으로 1708년과 1766년에는 단성 사림들이 行蹟記를 만들기도 하였고 자손들과 함께 실기와 도천원적 편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0) 물론 도천서원이 사액된 후 배향되어 있던 東溪 權濤의 위패 처리로 단성 사림들이 반발하는 등 한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단성 사림들은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91)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에도 단성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중반 청무 상소문을 朴尙台가 지었다든지, 이 당시에 이방검 등이 도천서원을 증심으로 각 사림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활동을 했던 것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92)


                                          맺 음 말

이상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익점이 남긴 행적에 대해 후대의 유명 인사들의 칭송은 줄을 이었다
이황은 문 익점이 목면전래를 통해 일국의 衣冠文物을 새롭게 일신시켰다고 하고 효행과 절의 를 통해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송시열도 문익점의 목면 전 래의 사실을 들어 그는 동방의 후직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안유와 문익점 두 분이아니었으면 우리 동방은 오랑캐 문화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문익점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그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켰기 때문에 국가의 포전은 성대했다. 우왕 9년에 조정에서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에 효자비를 세우게 하였고, 후에는 비각도 세워졌다. 정종 2년 문익점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祭圖을 내리고 墓祠를 건립하게 함과 동시에 守塚과 復戶를 내려주었다. 그가 조선왕조에 와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종 원년에는 藝文館 提學을 증직하고 江城君으로 봉하였으며 시호를 忠宣이라 하였으며. 그에 대한 不조廟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 22년(1440)에는 영의정을 추가해 증직하고 富民侯 봉하였으며, 세조 7년에는 고향인 단성에 사우도 건립된다. 그리고 후대에 가떤 이 도천서원과 함께 전라도 장흥에세위진 강성사에 사액이 내려진다.

이처럼 극가의 은전과 후대의 유명 인물의 평가가 많이 나을 수 있있던 것은 문익점이 끼친 공헌과 행적으로 보아 당연하였지만, 그의 자손들과 단성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바림들이 그를 현창하기 위해 노력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자손과 사럼들은 문익점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실기를 간행하고 증보하었다. 그리하여 잘못 알려진 부분을 고치고, 소략한 부분은 보충하였다. 그가 제향된 도천서원을 알리기 위해 『도천원적』도 편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도천서원을 중건해서 운영하고 사액을 받아내기 위한 운동도 여러 차례 전개하였다 단성의 도천서원 및 장흥의 강성사 이외에 황해도 송화현의 삼봉서원, 전라도 창평현의 운산서원, 경상도 의성현의 봉강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자손과 사림들은 더 나아가 문익점을 문묘에 배향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문가학 사건 등으로 자손들의 단성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부조묘 제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있다.  이런 현창운동에는 어느 지역 사림보다도 단성 사림의 열정이 켰다 문익점이 단성 출신이어서 더욱 더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천서원 건립, 증건, 운영뿐만 아니라 사액운동, 문묘종사운동 등 여러 운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실기의 편찬과 『도천원적』 편찬에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같이 논지를 정리하여 보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실기나 기타 자료가 지니고 있는 한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그 하나이다 이 부분은 좀더 시간을 두고 치밀한 분석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단성뿐만 아니라 문씨들이 사는 다른 지역의 자료들도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좀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해 나갈 필요성도 느꼈다. 자료가 많이 발굴된다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1

 그동안 문익점과 관련하여 연구한 글들을 보면  김성준의 글이 있고 나머지는 소개하는 글이다
김성준, 문익점과 목면전래이 역사적 배경 동방학지(연대 국학연구원 77.78,79합집 1993
김희덕 문익점 목면문화의 문명의 동점 역대인물한국사3 신화출판사 1979
이이화, 「문익점: 의류혁명을 일으킨 풍운아」 『이야기인물한국사』 1, 1993.
장도빈, 『한국의 혼』 경학사, 1998.    李장희, 『讀史餘錄』 경인문화사, 2001.
이은직저 정흥준 역 한국사명인전 1, 일빛 1997

2

강성군 사실록은 필사본으로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도천원적은 도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3

이황 퇴계집 권 42 기 전조고좌사의대부문공효자비각기

4

高露定節要』 권34, 공양왕 원년: 諦官李竣等 以私田不可復 上書爭之 左司議文益漸 附牆琳玄寶 移病不書名 翌日徑赴書筵 趙浚劾日 益漸本以遺逸 努耕晋○ 以賢良拜諫大夫 置之左右 以資淸問 誠宜   進盡忠言 敷陳治道 以補聖治 而依違苟容 無諫爭之節 ○○束手 唯唯諾諾 頃者 同舍郎吳思忠李舒 各自上疎 極言時事 益漸持祿患失 無一語及之 又同舍郎 聯名上疏 極論田制 益漸依○權勢 稱病不與 自以爲得計 上累識下知人之明 下負士林期待之望 是宜削其官爵 放歸山下 以爲有言責 而不言者之戒也   卽罷益漸.

5

宋子大全』 績拾遺 권1 跋 書 三憂堂文公遺事後: 忠宣公 亦吾東方一后稷也---安文成公裕 文忠宣公   亦龍相承 吾道燦然復明 夫德深 則人莫能識 擊壞之語日 帝力何有 天功莫○ 地德難測 程朱旣沒 惟我   東方安文二賢 能得其傳 ○安文二賢 吾東方 ○未免涉於○虜之行矣

6

삼우당실기(1900) 권2 諸賢詩章 참조

7

도천원지 권1 行蹟記 말미에 旅碑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안렴사 여극인과 고성군사 崔복린이 이를 세우는데 간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8

삼우당실기(1900) 권2 孝予碑閣重修記(權潗, 天啓癸亥(1623)): 洪武癸亥 命立閣 而嘉靖癸亥重立庇之 退溪李先生 記其事

 9

李混, 『退溪集』 권42 記 前朝故右司議大夫文公孝子碑閣記: 江城縣之南 培養山里者 前朝故司議大夫   文公之舊居也 里之中有孝子碑 洪武十六年癸亥 朝命旌公之孝行者也---獨碑之立 如彼其久也 無所庇陰 今懸監安侯○行春而適見之 旣下馬  致敬而詢得其詳 慨然日 先賢之懿行如彼 先王之激賞又如此 而   碑顧露處 ○乃守土者之責也 ○命工楊鳩 相度立一閣以覆之---前後具事跡 而請識與記者 源也 而前之   識墓祠者 爲方丈山人曹植也 後之紀碑閣者 退溪老人李滉也 記閣之歲 則가정四二年之癸亥 後於立   碑之癸亥一百八十有一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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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 권5 年譜: 明宗18年 重建孝子碑閣(縣졸○안전 鳩財重健 文純公李滉記之 萬曆丁酉 碑閣毁于倭○張 天啓癸亥(1623) 縣○李元吉重健 博士權潗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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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 家傳(증손 司憲府監察 致昌, 天順 8년(1464)): 庚辰(1400)二月八日 終于第---賜  祭田健墓祠 置守塚四人 給復二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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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 권6 年譜: 明宗16年 重建墓祠(時宗孫光瑞無后 諸孫散居他鄕 先生曾孫女令人文氏  時居本鄕 狀訴于道伯 鳩財重健 文正公曺植記之 壬戌(1562)令人孫淸香堂李源 以令人狀議于鄕老  增難祠舍及祭田 懸○成遵 又以公田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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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家傳(文致昌): 辛巳(1401)冬太宗大王 贈嘉靖大夫參知議政府事知經筵事兼藝文館  提學弘文館春秋館事 賜竭忠補國啓運純誠佐翊澤重廣利貞貞○功臣匿 封江城君 휘忠宣 立不부조廟 賜祭田 100결 노비70인 旌其門給復戶 有子孫錄用優恤 萬世不革之典事 庚申(1却0)世宗大王特命 加秩大광보국숭록대부議政府領議政 封富民候 ○于元功 命政承南智 接察嶺南 賜祭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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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권3의 역대왕의 賜祭文 참조.   

 15

三憂堂實記』(1900) 권3 列聖朝傳敎에 의하면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경종, 영조, 정조에 걸쳐 십여 차례 전교가 내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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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世祖 7年 命違祠享之 賜額道川祠 遣禮官致祭 先時丙子 直提學梁誠之 상소請建祠 上徒之 命結財健祠 於是嶺南儒生 ○健于道川之上 卽先生別○講道之址也 祠成賜額致  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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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실록 권20, 9년 9월 辛亥: 禮曺以全羅道儒生金相樞等上言啓言 益漸奉使入元 以恭懲昏暴 將  欲廢立 則爭不奉紹 遂○劒南 三載始還 中朝潛取木綿 敎人織造 其利於民如此 恭靖大玉 念其衣民大功 追退封延城君 太宗朝命立書院 世祖朝追封富民候 贈謙忠宣 增置祠田脚. 이 당시의 자손, 사림들의 생각이 그러했기 매문에 이들이 작성한 행적기나 공행록에도 잘못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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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실록 권19, 10년 4월 甲辰: 사간원條陳時務八事 議政府○議以聞---其六日 人之所賴以生者 衣食而已 吾東方 始知桑麻 而不知木綿之爲何物也 간의대부文益漸 奉使中原 得種而還 以惠吾民 上自卿士 下至庶人. 上衣下裳 皆以此爲之 其有功於民 可謂犬矣 故國家已擧褒賞之與 追崇爵秩 可謂稱○  然○之於古 凡有功於--道者 皆設祠堂 而祀之 況有功於一國者予乎 顯構祠堂於貫鄕 給祭而祀之  以示盛朝崇德報功之意 議得 己曾褒衰賞 其構祠堂給祭田 姑且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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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실록 권3, 2년 3월 T酉.梁誠之, 「訥齋集』 권2 奏議 便宜二十四事
一. 文崔立祠 ○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 則祀之 能禦大患 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 奉使留元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未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元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陳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信於二人鄕貫 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罪錄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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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 (1900) 권6 年譜: 中宗6年 碧溪影堂成---明宗22年 賜額碧溪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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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平文成大同譜』에 의하면 文熙預은 善昌의 사촌 孝昌의 제2자이고, 文允明은 가전을 쓴 문치창  의 손자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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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 권4 丹城健院記(朴思徵): 立院年紀 基址世代○遠 屢經兵○ 未克詳知 然古老流傳   正德年間 本脚有碧溪書院云 而無籍難○(此本影堂 恐後爲書院) 就○先生後孫文熙碩所錄 先生書院   在咸陽碧溪 又考文允明上言中 先生行狀在咸陽碧溪書院 其說果○流傳 然今○咸陽山水 無碧溪爲號 但其郡治差殊無乃 本縣古兪屬咸陽而然耶 本縣有碧溪山 且本縣古今以來 無表著名賢 而獨有先生 則古   必有祠 先生書院似在本縣碧溪 而旣無詳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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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窓誌 「都山4八坊考證 3 耳谷; 可學在幼學時 自課爲學 其讀書堂基址 在於碧溪溪上之山腰 時或  讀書於淨趣之庵.(『운창집』 권2 丹城誌에는 독서당이 벽계에 있었다는 언급이 삭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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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緯世, 『풍암實記』 강성사圖記: 長興府北 有楓庵書院 풍암文公휘緯世 爲退溪先生高弟---崇禎甲申(1644) -道章甫之慕仰 久而愈切 乃○院字於月川之上---至英廟壬子 章甫輩以爲公(문익점)難己設祠   其忠孝犬節 種綿奇勳 難家祀戶享 難酬其功德 遂復合享於楓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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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래, 풍암 문위세의 생애와 의병활동」풍암 문위세 學術調査(全索文化財硏究院) 2002, 8-2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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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川院蹟』 권1 年譜: 壬子(1732) 追享于長興月川祠(卽先生九世孫풍암緯世所享之院也 湖南儒生 因  館學通章 以先生追享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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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川院蹟』 권1 年譜: 乙巳(1785) 賜額江城祠 遣禮官致祭(卽月川祠也 因湖南儒生上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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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870년의 삼우당실기에는 '事責本記'였으나, 1900년의 삼우당실기에는 '家傳이라 수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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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권6 年譜: 世祖8년 家傳成(曾孫감찰공 致昌撰 中間見○ 純祖戊辰 文氏修譜時 得於   後孫之左在海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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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川院蹟』 권1 행적기序(朴思徵): 前古行蹟有無 今未聞知 雨越在戊子(1708)歲 鄕父老略記名賢所錄   23條 以成卷帙矣 甲申(1764)秋 因奠廳火變 盡入灰○ 不○適以雷添院任 慨然于先生行蹟泯而不傳  旁求可○ 則前朝事 其證詳錄也 與同任都命○朴思權 ○求左右 國朝列聖褒贈 以國乘所載緣之 戒謄麗 史所載 或輯先師所記 及文氏譜書勝覽所載中 採而集之 忘其孤陋 以成卷機 幸或免識者之說耶 謹以序   次如右 名日 忠宣公行蹟記.(崇福三丙戌刊 揭于道川書院講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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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江城君事實錄』이라고 되어 있지만, 말미 발문에는 '忠宣公功行錄跋'이라 해서 충선공공   행록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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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寶記』(1500) 舊跋(文桂恒): 去丙戌 丹城士林朴思徵 纂行蹟記一卷 因道川院蹟而爲之者也 又戊申 冠山宗丈泳光氏 刊功行錄 行于世 輯諸家所藏雨成之者也
然皆是○襲巾衍文字耳 其間大義所○궐  頗多錯亂 且年月時代 互相○○차 以起後惑者甚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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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實記(1900) 권6 년보 세조8년 가전만듬(증손 감찰공치창찬 중간견○ 순조무진 문씨수보시 得於後孫之在海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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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憂堂實記(1900) 舊跋(文桂恒): 三憂堂先生---旣歿之四百餘年 世代綿遠 宗嗣屢乏 先生所著詩文

及疏章 不爲不多 初火宇家 再○于兵 蕩然無傳 而中問收錄 只有家傳一本 ○天順甲申 감찰공 치창所  撰 而亦且遣逸 伊所傳 特各家所若干私乘而已---去戊辰夏 幸因譜書之刊役 得所謂家傳一卷 卽天順八年之遺輯者也 桂恒卽관手開卷 瞭焉如○心目 自是不覺愚陋 濫生潛意 留心於革謬歸之城 冬長興宗老就光氏 枉駕立雪 而於亦先獲志者也 於是○探諸名勝述作 ○諸賢遺集 雖片言雙字 有足以徵信者 則幷力鳩集 大小經紀于有年於此 歲丁丑秋 期會于京中 廣搜公私書籍 反覆折哀 正其差謬 ○成一部  屢謁於光山金丈允秋庭堅 南陽洪永燮 海州吳羽常 驪興鬪泰鏞諸君子 得以訖 校正編次之工 次謁證當  世之達尊好古大人 敬受○首之文 而附之○○氏 越明年戊寅孟冬 始印于嶺之河上 己卯之春工訖 ○是役也 永光氏幹其事 安城鍾九 長興達祖 河東翊謨諸宗 贊其功 至於衰輯正誤之工 桂恒亦不政辭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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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舊序(洪義浩, 1818): 今先生之○孫就光桂恒 哀輯世系年譜家傳本記 列朝褒典 祠  院事蹟 及諸公敍述 博○旁搜 ○次成編 合爲一部實記 將付○○氏 壽其傳 而來徵義浩 以○卷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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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此實記 我先考去戊寅 始印于嶺之河東 且丁亥重刊於畿之安城一  依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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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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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우당실기(1900)舊跋(文秉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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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원적 서발(경오(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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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우당실기(1900) 권5 遵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 曾於龍蛇兵翼之後 廟宇毁破 恩額旅濕 萬   潛了-于 道內多士重潛舍字于舊祉 難鉛舊號灌道川 而딨難 私揭舊額 便同據祠 見漏官享 此乃兵革之餘   닐未造之致也---而士氣未振 復額之擧 遠今遷就 古之國賢 今同揮賢 昔之官享 今爲私享 章甫缺歎   닌 不瞭言 雨獨不爲盛世之次典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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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院蹟』 권2 道川書院請額疏(載春曺文案 肅宗戊子(1708)春) 慶尙適儒生朴恒泰等百餘人노疏.꾸'1 ?근麥堂寶記』(1900) 권5 道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 業於肅廟朝戊子 嶺南儒生朴恒泰 流誇額   래밖틀EB 士氣不振 至于今 辯未延額 孤負聖朝之厚典 不勝暖惜之至 船令禮曺裏處 而該충端循尙未擧行.45) F,3)1:院蹟』 권2 責城祠請額고言(쵸宗乙已(1785)): 全羅道儒生金相權等六百餘人 右謹啓.   '臺堂寶쳔』(1900) 권5 狂城치請額疏(소수 金桐權)' 二字恩額 尙未宣下 在朝家崇報之典 雖是未造  之擧 在온林想望之地 自切仰蠻之沈 玆將公議聯名 仰鑛於法鷺之前--- 批日 下該曺素處事 禮曺刻書   金履素潤懲炯---事當依所請施行--- 批日 特爲許施 遣曺致祭(1--月-聞禮 成禮曺鄧繼친).45) 1'述川院蹟』 권2 道川書院請復額上言(追宗T未)): 京畿慶尙全羅三道儒生幼學臣李亨復等六百餘人.    F憂堂寶記』건900) 권5 道川書院請復額疏(소수 李亨復)도 참조.


47i -遷堂實記』 권6 年譜에는 福王 9년(1383) 가을에 '三憂堂成(堂在脚東集賢山下悟理洞道川之上 先  生嘗愛其川漏野峻 至是構芽數緣 乃焉其循日三憂)'라고 되어 있다.

,精) F프憂堂寶記』(1900) 권6 年譜: 世祖7年 命違祠享之 賂額遵川祠 遣禮官致祭---於是嶺甫儒生 辯遷子  通川之 1?. 卽先生別聖講道之逃也 祠成賜額致祭. 광해 4년(1612) 重違道川祠(先時裏埼甲子(1564) 羚城   1:林 以院基卑下有水患 移違于差上一里之地 萬曆臺辰 院字燈于兵製 其後二十~-年壬子春 生員李穀  率辯人 狂諦伯而韓閣 重遼祠於道川之別聖 顯宗壬子 移違于先生業孫光瑞所潛之地).49) F프憂量責記』(1900) 권4 道川書院』ㅁi宇臺修記(李鳳興(1735-1810), 崇福三T巳(1797)): 榮任司方臺修   役 余잘慰其勞 禽던 此院卽吾鄕先父老出入之所 子之堂叔公 甲子(1744)重修 子亦修于庚寅(1770) 其   後小小之修 非止一崙 而俱無記蹟 恐欠狀寶 船今之役 而子童』識之.   『三憂堂責記r(1900) 권4 適川書院重修記(柳泣龍(1753-1821), 崇福三乙丑(1805)): 院在賢山西道水   --- 今道川 卽儒狀達以宗孫遣찬침 辯구天順辛巳(1461) 移于壽請甲子 毁于萬曆壬辰 越庚申(1620)重   建--- 及今年 先生後孫 同辭合財 旣修墓及閭 又日 先祠不理 子孫之遇 遂委之工 船壞革宇飜眞覆 權   適李漢童戒 朴啓 근權一錄潤色之.

   「道川院蹟』 권2 道川書院重修퍽(李邦儉, 乙丑(1865)): 吾鄕先父老 昔倣祭찬之義 始創廟宇 遷臺而턴   視之 旣疏擧蒙額也 更惰廟貌 以需萎培之慕 星霜造蠻 風雨磨淋 瓦類核朽 傾頭之歎 已有年所 鄕議未   造 徒抱證惟客獲之心矣 適於甲子秋 因其享禮 會議修資---辯定修繕之役.30) 『道川院蹟』 권1 年譜: 크未(1歸9) 洋享于昌平雲山書院(士林因館學通章 以先生孫越川君浴諦居之脚   建祠 持辛先生及先孫長端伯菜焉).

핀) 『太宗實錄』 권26, 13년 7월 14일(辛卯)조에는 그가 죽자 태종은 3일간 정사를 폐함과 동시에 致祭   하게 하고 平翼이라는 시흐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if) '남평문씨대동보』에 의하면 文天壽는 '與從伯雲齋公 共扶宗事 辯立雲LIJ書院 前肩周幹'라고 기록되   있고, 文致龍은 '追先效力 辯立雲山書院'고 되어 있다.

33) "근憂堂賞記』(19脚) 권6 年譜: 今上元年 遂鳳纖書院(院在義城脚 先生長孫承魯 嘗守是邦 立祠廟於   驛齋晩川洞 今上甲子 士林設經臺 於是爲鳳獨書院).

54) "綿花記』 (규12076) 忠宣公三憂堂文先生木絲遺田表(金道和): 此故忠宣公三憂堂文先生始播木絲之遣   締崙---公之調孫承魯 適蔽是邦 又相土而廣其殖 使祖烈益影 則其繼世之功 亦足以有辭矣 於呼 信程   端播面穀 以救黎民之阻飢 而周請頌培程之功日 克配彼天 夫衣食一原也---公之高孫有環編田而居者日   煥河永永程福永 行過其辯 輪有情湯之心 將伐石而表其圈 與本脚士林諸公 誇謀協同 讀余記其事.) 『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仁祖22年 建三峰書院(海西儒生 遂祠子役希脚桃源三峰山 以先生柱  履之地也).

56) F프臺堂實記』(1900) 권5 請從享文廟疏(製疏 生員驚伯達).

i7) F通川院蹟』 권2 請從글文廟流(檢巷 誘伯達):---(疏首 生員李福 掌議 幼學鄧仁宅 色掌 幼學朴明漢,羅  準愼 寫疏 生員金吉湖 奉流 幼學朴景時 讀流 幼學白時煥 正宗군予(1792) 奉疏入京 以邦禁不得進達).刻)':憂堂責記』(1900) 권5 請從추文廟再流(製流 朴尙合 疏首 鄭在慶): 伏惟念忠宣公臣文益漸 탄代難   遠 其遵學功德 炳人耳目 흐萬古而不濕者也---獨其配食聖庶 尙未暇擧者 晝爲聖깐之欠典 올類之慨歎   넌 批日 崇敬所以衛遵 沈固不待雨等之言 而隆庶事體至重 有不可遼許 其各知恣 退修學業.) 『 ÷臺堂實記』(1900) 권5 請從文廟疏(製疏 朴齋晩 疏首 幼學洪在誠): 批點 崇賢尊道 何待調等之   而所陳之末可遷允 以其事體之至愼至重也 霜等知恣 退修學業.)(請從享文廟關流(製疏 沈宜肅 疏首   各健秀): 伏見聖批 則以其事體之至愼至重 而尙新從享之敎 切輿情之齋潑 犬旋德禮賢化道所先念功   簡勞零 #=務德 乃沐明 沒而漏者---批聞 省疏具恣 前此已有批論 兩等亦飾事體之至臺 又何煩瀉 諒   患遇去.

쓿)) 『詰實錄』 권4, 2년 7월 漢寅: 初藝文館直提學鄭以吾 薦晋陽人文可學 有術能致雨 上使內官焉之   乘訓借至 上日 聞汝能致雨 爲予--薄焉 於是可學齋戒 自期三日 必得雨 至期雨 上使人命可學ET 更   致齋若何 可學詰關日 乘訓急來 誠敬未足 請更致齋於松林寺 翼日可學設閑脚 今日亥時始雨 明日大雨

출哀時果雨 翼歸雨 款乃賜끌學米及次--- 是以人多感焉 間某術則締 非予之所能爲也---又H 我自  少 倂誦神衆經 得眞道矣 凡生所굘願欲 皆在吾術中 其容珠常 崙遺忘?況憶者然.건) 『宗實錄』 권5, 3년 4월 癸讀 命文글탈 淸齋于松林寺 禮雨

   『太宗實錄』 권7, 4년 5월 辛讀' 출雨于宗廟社程嶽海濃名ㄴU大川 及瑞格殷 審理露獄 張値窮즈 液絡  埋潛 』使文 클學祈兩

   "宗實錄』 권9, 5년 5월 壬寅: 禮雨于宗廟찼程脚壇名iIJ大川 上以久旱 不御殷誇政 日益恐修崙  文可學駱H 臣人淸齋辯雨必得 士從之 系有小雨 然딨輕應而已.

(j그 ?宗賓綠』 권12, 6년 11월 辛未: 捕淡人文끌뿌 及其黨與 囚于巡禁司獄 命參贊議政府著崔츱트 爲  委常 與兼判義勇巡禁러事李就蓄尹視 刑舊刻書金希善 司憲執義崔府等轉之 글學晋州人 粗習太-算法  點謂前飾雨暇之徵 國人精有信之者 上召試之 拜書雲 視脚久而無效 斥埼之 居開城留後司 證誘愚民  密謂生員金藏幽 今佛法衰殘 天文屢變 吾誦神衆經入神 能役使鬼物 天兵神兵 不難致也 若得人兵 則  大多可擧也 藏然之 與前率常注薄任聘 生員趙方輝 前副正曺漢生 前少캇金亮等 皆信附之 遂謀作亂  任聘之母雲副司直趙民 知業謀以곰 捕可學及其黨 勳之 上謂群臣R 予謂學 爲讀狂者 天兵神兵 吾  能설꼰 此非狂者之言予 黃喜啓日 -可學雖譯.狂 其從之者 豈盡然牙 上謂轉獄官圖 今以굴學之故 無  뷰之人被囚者多 宜速分辨.

63) 『戈宗責錄』 권12, 6년 11월 辛米조 참조.

梨) 『太宗責緣』 권12, 6년 12월 庚子: 樣文可學任聘金亮金藏趙方輝曺漢生等于市 可學之子乳 亦處讀 初   글學等課逆 約事成之後 推可學爲主 藏爲左相 聘爲右相 方輝爲二相 漢生爲西北面都巡間使 夜會報恩   寺役開 告于諸佛神視 共拜可學爲君 使聘製敎書二道 買鉛鐵 造御印議政席印兵蓄鏡馬印奉使印等四類  謀使漢生 先至平壤爲內應 可學等 淡俱至平壤 可學僞稱都體奈使 藏僞稱都鎭撫 以十二月二十一日 殺   都巡問使 因起兵爲亂 旣定計 聘反自疑 問計於趙黑 民陽許之 遂以首告 獄成 可學等妻拏 皆連坐 獨  春聘之妻子兄弟 以趙長首告也.

65) 『世宗實錄』 권36, 9년 6월 減辰: 上憂旱 召左議政黃喜 右讀政孟思誠等諸大臣謂日 今觀禮曺救旱條   件 皆已行之事--- 緣坐之人 豈無露辯 然此先王所重 不可輕易施行---於是下敎 朴舊文可學金藏趙方   輝外 某餘犯罪緣坐人等 洋皆放送 在前外方屬賤親子 亦令外方 從便識燥還給者 一百十/)人放還 竹   處李賀權約.『世宗責錄』 권59, 17년 8월 乙巳: 傳旨吏兵暫 逆賊朴舊及文可學同黨外 他餘犯不忠人等緣坐者 際子   孫外 兄弟叔姪等 宜還職燥 是日還給李繼等十三人職濫.

66) 김영범, 「連坐側의 역사적 전개와 그 意味網-朝鮮時代를 중심으로」 『한국샤회사연구회논문집』 24,   문학과 지성사, 1990, 331면

67) 『雲窓誌』 「都山八妨考證」 3. 耳谷; 江城君益漸鄕弟文科及第益夏新 『之基也 益(夏: 첨자?)有二子 fl   可庸,可學 皆爲逸才 兆弟皆登文科 可庸爲學論 可學爲內輪 學在幼學時 自課爲學 其讀書堂基逃 在  於碧溪 溪上志山腰 時戒讀書於淨趣之腐---其後公與其兄可庸 皆豊第 遊於京師 其內輸時 不勝其?術  之所崇 化爲飛烏 入於禁中 有若赤鳳之端入燕樓닌 事覺補捉 以採術無道 腰新於市 努無遣種於木諦   而皆流讀於海曲 今東菜府文氏謄者 是也.

58) 『雲窓詰』 「悟理八妨考證」 8. 靜太; 古文化驛監文光瑞之基 光瑞乃江城君之剛世孫 無子 取妹夫博川   郡守李嗚之子承宗 養而爲子 承宗自三歲 寄養於文氏 長於斯 達於斯 官至黃州牧使 辛函年通經爲脚者   是也---文氏子孫 則散而之四方 其長子孫之在於丹城 而奉祀者 遂絶祀於光瑞 其業派之流末者 只有承  請起雲仁會德會焉 今江城君祠字 在於是埼者 以其有子孫之基 卽基之士而습祠焉.59)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完文: 右完議事 先祖忠宣公子行五長季 而大宗 文  化公證光瑞 不幸無調 先祖不視廟 傳奉于次長義城公講世華 又無調 移奉于第그子派宗孫鳳닌公證善昌  彦祥氏 値壬辰兵火 沒入灰據 至今未復 不祿香火 不廢而自絶.

70) 『三憂堂實記』(1900) 권5 請復不廟疏(장령 李燮): 第以世代玄遠 屢經兵翼 派讀散落 宗嬌絶統 祀禮  之鬪 不知在於何時 而往在先朝庚成(1730?) 因其後孫之上言 特診不히之盛典 訓功報本之命 讀然於絲  綜之間 特下議啓之命 而其時相臣 飾爲捕置 至今爲盛代之開典---臣請令該曺議啓 以卒先之遺志焉.71) 『三憂堂實記』(1900) 권5 請復不淋廟再疏(장령 朱重翁, 正宗丙辰 8월일): 違我先朝戊寅(1758) 御春塘臺  指示雲幕 而下敎于入持大臣日 文氏之功大矣 因命訪其奉祀孫錄用 而因循未果 我嚴下御極以後 累下致  祭之命 而賜額兩院 前後恩典 慕以加矣---惟是爲我國之人 故雖不得與論於農聾之祀 而其廟之不誤 已有  聖朝之特恩 而今其後孫零替 無以奉香火 其在思其功尙其人之道 誠爲羚側 惟我殷下 特加存佛之典.


72)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完文(道光21년 辛丑 10월17일): 右完議事---不香   火 不廢而自絶 嗚呼痛哉 惟我誇派 散離各遵 自中世有意美遂者久矣---何幸린肩氏 慨然於此 先發온  癩渡不히之議者 윤有年矣 今因墓産之會 在不勝退慕 象讀論同 」遵先世移宗之例 乃以次長派故學生   柱之幼學秉烈 凉爲摘長孫 期於圖復.

7)) ,? ÷憂垈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해석본) 권2 上書(甲辰(1844)7월일): 慶尙適激禮幼學文틴터 全羅  道寶城文桂 忠淸道洪州文時完等 謹齋沐百拜士書于大宗伯閣下---.

긴) 7臺堂實話』(1900) 권5 請復不廟三疏(忠淸慶尙全羅三道儒生上言, 疏首 任輦白. 哲군甲寅(1854)   ÷月歸 鄧承旨李源明入啓): 批日 該曺裏處 禮曺判書金補根 回啓日---今沈齋讀 不無依據 公儀所   存 恐當許施不視之典 事體重大 臣曺不敢讀便 令廟堂素處 何如.

7 「-÷憂堂文益漸先生遺事』(1996, 영인 해석본) 권2 上書(丙辰(1856) 9월 일). 寶城幼學文秉烈 綾州文   忍燃 長興文墓德등 謹齋沐上폴于巡相閣下 伏以生等先祖狂城潛流之類 在於慶尙道冷城 今將移安于   木速寶城地.

7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지, 丹城驛 違置沿革: 江城蘇 本新羅關支郡 景德王改關城 高麗改江城脚 後   復隆爲郡 顯宗屬晋州 恭讓王置監務 本朝恭請王朝 以橋需永善之漢珍辯來合 號珍城脚 世宗朝漢珍 還

은巨辯 丹漢脚---恭讓조還屬城 木朝딴宗朝 採兩脚奈 改今名 爲添監.77: 「麗史飾要』 권34, 恭讓골 元年: 趙凌刻脚 益漸本以遺逸 努耕晋鄧 以賢良拜諦犬未.   "꾼實緣』 권4, 2년 7월 庚寅' 初藝文館逐提學鄭以言 蘿晋陽人文可學 有術能致雨) -雲窓誌』 「元堂八翁考證」 8. 培養ㄴ14: 其後李成之居是妨者 其先江陽人也 尙書左崔射農芽之ㄴ代孫  늘參軍李季通者 姿及第文諒幕之女 來家焉 災?子孫之居者 雖無所芽華 世有謹助之士 有H源自號淪辯   行壇著 出入退溪甫冥兩先生之門 使狂城君行義功德 布場於-國 使兒責走卒 無不飾者 皆出於源.」 字濕, 『退溪集』 권42 記 前朝敎左司讀大夫文公孝子碑關記: 前後具事跡 而請識與記者 源也 而前之  識壞祠者 爲方丈山人曺植也 後之記碑關者 退溪老人李混也.

   --÷憂堂實記』(1900) 권6 年譜. 壬戌(1562)令人孫淸香堂李源 以令人狀議于親老 增置祠舍及祭類 脚  惰成遵 又以公羅益之.

00) 『프憂堂寶記』(1900) 권6 年譜 光海4年(1612) 重建道川祠(先時慕請甲子(1554) 丹城士林 以院基卑

有水患 移遂于差上-里之地 萬曆美辰 院宇燈于兵誤 其後二十一年壬子春 生員李誤率脚人 狀訴方伯  而啓聞 臺建祠字於遵川之別聖 顯宗壬子 移遷于先生玄孫光瑞所居之地.81) 앞의 주?) 참조

82) 李邦儉, 『道端述』 권9 道川書院通本脚各面各門中文(甲子(1864)7월17일); 到今秋享分辯之日 會席   定 騷雨業 第其庶床無乾 冠衣盡淡 一舍類陽 檀精如傾 窓壁欲類---卽定重修之議 霜伏惟在家禽   君子 其在--室順聲之應 想必無異同李否---伏願自各院享祀時 回論而可否之 以爲敦事完事之地.83) 李邦儉, 『道訓述言』 권9 道川書院通本辯文(乙丑); 右文爲奉告事 本院講堂酒庫之重修 幾至誌役 諦齋   典廳庫崙之新創 繼로營始 而기宇修蒼 第一時急 權奉講室 在所不已---在家崇尊當任諸員 不可不合席   對同.

84) 李儉, 『道烈述言』 권9 道川書院通列邑文(已修而未通卽止,乙丑); 生等怪恐憂恩 初不量力 忽成重辯之   議 驗奔相役 役至强半 而告流無由 將爲奈何 本添難逐戶出力 所收之數 斗小零星 本孫雖極力辯誠 所排   之美 計遲入手 憶無物不誠 不誠無物---如是略略排定 伏感禽君子 特以尊賢衛道之誠 刻恩報德之義.8i) 李邦僚, 『道端遠言』 권9 道川書院通陳川蛇洞文; 犬書院崇奉之道 一則子孫也 一則儒林也 凡於遷臺   芽苾之禮 以爲先之誠而修飾之 以尊賢之心而潤色之 而況莫重重修之盛擧予---各地本孫 其孰不?涉狹   助 而獨尊執事.

86) 李却儉, 『道測述言』 권9 遵川書院通南海校中文(乙丑:1865). 素目 등 참조.87) 李邦儉, 『道端述言』 권뜰 裏目; 又裏日---本孫宗錢所排六新兩段 計不入手 而就中南海源川文氏 自以   大先生培孫 漢拒憐惡 落落無分錢顧助之意云兩 則世豈有如許添先忘祖之孫牙---丹晋是河之民 收錢諸   有司 以樹治之意 齋狀仰擴於城主法庭是予脚 民等亦不無擴惡徵習之心 特以移文 捉繼之由 蒸敢仰素.88) 李邦儉, 『道端述』 권9 素目, 又棄本偉呂候重燮日---濫當急先還安 故以今月三十日定日是如 第伏

念國學書院享祀時 祭需官封之禮 談爲軸舊遵行是予則 今此遷奉時 祭物亦爲依前規處分 未知何加.89) 1道111院蹟』 권2 禮曺免稅關文(純祖T丑(1817)十-月): 湯曺爲相考事 請望啓內 丹城遊川書院儒生權   導國等望單內 本院卽江城君忠宣公文先生妥靈之所也 賜額書院三結촙土免稅 乃是國典所載 而先朝T   本院復額之後 以有土三結免稅출 堂曺望營 俱得題 而使本官査報 非止一再 而尙未接例施行者 今   汚 ÷十年之久 榮以法例 大是欠典---到卽査實啓聞 以爲依例免稅之地 宜當向事 關.90) A#通川院蹟』 序(丹城驛監鄭基永): 公之雲鉛 返設刊譜之役 事그竣功將誇 本添院有司李文儉李辯範 洋   徐以實蹟一규 鐘於粹而壽其傳 屬余以徵信之文 謂以適慕院任爲是之努.   『憂堂實記』(1900) 後識(손 宅鎬, 庚子(1900)): 不肖與族人浩懼 奉賞記而得檢校於丹城斯文權雲煥李   遼讓兩公 朝夕聚首理會---今노庚子春 設役於蘆山 而至秋斷手 若終始致幹者 李斯文鎭洙之力居多焉.91) ?錄』(완계서원 소장, 앞부분 상단 부분이 마별되어 있음)에 의하면 1644년 권도가 서거한지 5년   후인 1648년 진사 崔綱등이 봉장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25년 후인 1672년 최경 등이 다   도천서원에 병향할 것을 요구하는 정문을 관에 올려 도천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그 뒤 1700년   피를 주향하는 서원이 필요하여 그의 위패를 杜陵서원에 옮겨 봉안하였다가 서원신설을 금하는 법   령에 걸려 훼철되었다. 그러다가 1732년에 단성 사림들이 논의하여 다시 도천서원에 배향하는 것으   펄 하였다. 그런데 1787년 흐남에 사는 문익점 자손들이 도천서원에 관여하는 사림들에게는 논의하   지 않고 도천서원 청액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사액을 받아내었으나, 그것은 문익점에게만 해   당되었기 때문에 권도의 위폐는 졸지에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다. 이 때문에 단성지역 내의 사림  틀 사이에 상당한 분란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동계의 위폐는 두룽서원이 있던 곳에 淸溪書院  이라는 이름의 서원이 세워지고 그곳에 봉안되게 된다.

92) 李邦儉(1798-1865), 『道測述言』 권7 道川書院通遵內文; 惟我忠宣公文先生---眞環東土 百世炳宗   果列聖朝屢降恩典 然而尙未得一番誇庶者 雖愚夫愚婦 莫不藍借 而況즘冠儒服儒者 其孰無抑驚慨恨于  中予 先生之本孫亨鎭 忠信誠責人也 今幸議及館儒 說涉千里 顧玆平日款慕之餘 烏得不業動哉 據所謂   公論所在 時代自有者 此也 玆以發文 伏雇禽君子 一心定議 齋聲叫關 以幸斯文之地.

 

영호남 곳곳에 큰덕 기리는 유적들

 - 역사의 인물탐구 집중기획의 내용- 시사월간 win 기자 김일곤

문익점의 유적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민족의 기림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공덕이 온 나라 안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와 그를 도와 목화의 재배와 보급에 힘쓴 장인 정천익이 사적을 찾아보았다.

96년 개관될 목면시배지 기념관
지리산 자락이 길 게 뻗다가 남강을 만나 멈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 문익점이 태어난 고향이자 목화를 처음 재배한 목면시배지다, 사적 108호로 건립됐고 88년부터는 기념관 건립을 비롯한 사적정비사업이 시작돼 8년째 진행중이다. 3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중 200여평의 전시관은 이미 건물이 세워져 단청작업만 남았다. 그러나 예산지원이 원활치 못해 당초 93년 완공예정이었던 것이 96년 개관으로 늦춰졌다.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병태(李炳泰.85)옹은 선생의 생가터가 있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마을회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1백평 남짓한 집터에 아담한 기와집이 단정하게 들어앉아 있다. 넓은 앞마당에는 갖가지 채소를 심어 가꾸는 텃밭이 있다. 다른 쪽에는 감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한창 농사철이라 어른들은 들에 나가고 꼬마들만 방학이라 집을 지키고 있다 낯선 손을 맞는다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이 집은 사월리 529번지로 현재 이병미(李炳美)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물론 집은 옛집이 아니고 당시 문익점의 자취 또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나지막한 동산을 등지고 산간치고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집터는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이란 느낌을 주었다.
생가터 이웃에는 문익점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현재 산청군 보호수로 지정(1982)돼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10년 정도로 아직도 왕성하게 잎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원 뿌리가 한동안 죽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되살아나 후손들이 단을 쌓고 해마다 섣달 그믐이면 제를 올린다.
문익점 생가가 있는 배양마을에 현재는 문씨 일족이 한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외손인 합천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이 합천이씨들의 세거지로 변하게 된 것은 문씨들이 후대에 이곳에서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은 선생의 외손가인 합천이씨들이 지켜왔다. 이병태옹의 말이다.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 신도비
문익점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병능 산청문화원장은 문익점후손들이 기림보다 후학들의 기림을 더 받았다 이는 선생이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한다. 고 말한다.
문익점은 목화의 전래자로서 뿐만 아니라 훗일 우암송시열의 말처럼 안향과 더불어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다. 문익점의 서원등이 훼손될 때마다 사림들이 상소하여 상소하여 이를 중수하는 정성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주에서 원지를 거쳐 산청읍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문익점선생 목면사적지에는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과 신도비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신안면 신안마을에 속한다. 신안면에 사는 24대손 문병운씨는 마을 안 월성초등(교장 하대규)에서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씨는 이학교에 삼우당 교실이 있다며 돌아보기를 청했다. 한때 전교생이 500여명에 달했던 이 학교는 여느 농촌학교과 마찬가지로 학생이 50명 정도로 줄어든 미니학교다. 방학중이기는 하지만 운동장에는 동네 꼬마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만 요란했다.
72년에 처음 문을 연 삼우당교실에는 문익점 선생과 조선왕조의 대유학자로 이지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기른 남명소직 선생의 행적등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목화의 실물 목화씨를 빼는 씨아 물레 베틀 등 무명천을 짜기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이 실물대의 작업인형과 함깨 재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삼우당교실을 둘러본 후에 바로 이웃해 있는 도천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천서원은 문익점 사후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원래 문익점이 말년에 은거했던 도천가에 지었던 것인데 중간에 소실되는 바람에 중건하며넛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도천은 지금도 도내라 불리는 곳으로 집현산 아래 양천강가를 말한다. 도천서원에는 문익점의 영정이 있다. 당초 문익점의 영정은 영남의선비들이 중종6년(1511)에 두벌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벌은 도천서원에 한벌은 선생이 어릴 때 글을 읽었던 벽계서원에 모셨는데 임진왜란때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 도천서원과 장흥 강성서원, 광주의 광동영당 등에 모시고 있는 영정은 모두 그 후의 모작이다.
서원 왼편 산자락에는 선생의 묘소가 있다. 경호강 너머로 지리산 주봉을 바라보며 서향한 묘소는 첫째부인 팔계주씨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묘비를 단장하면서 새로 세운 석물들이 오래된 석물들과 나란히 서있다
문익점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합천 이씨 일족의 묘소 세 기가 자리하고 있다. 맨 아래쪽에는 이퇴계, 조남명과 동갑친구인 청향당 이원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청향당은 문익점의 손녀인 문씨 부인의 손자로서 도천 서원의 중수에 공이 컸다. 배양 마을과 마찬가지로 외손인 합천 이씨가 170여년간 외손봉사를 한 적이 있어 문익점의 묘소 아래쪽에 이들의 묘소가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도비각사적지 입구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는 순조 34년(1834)에 경기도 강화도 앞바다에서 캐낸 돌을 옮겨와 글을 새겨 세운 것이다. 목화가 한민족 모두에게 혜택을 준 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운반길에 자리한 각 고을의 수령과 보부상들이 모두 나서서 3년여에 걸쳐 등짐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신도비는 원래 종 2품관 이상의 무덤 앞에다 그의 공적을 기려 세우는 것이다.

목화의재배와 전파에 공헌한 정천익의 추적할 길 없는 생애
신도비에는 문익점과 함 께 장인인 정천익의 기여도 언급하고 있다.진양 정씨 집안에서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라 정천익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조선시대에도 진주사람들은 도천서원과 연락을 하며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 때문에 서열을 정하기 어려워 도천서원에 함께 향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그러다가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국사편찬위원회와 비서실 등에 지시하여 진양 정씨 문중의 청원에 대한 사실 조사를 명하고 그에따라 유방백세 라는 휘호를 내렸다.
산청에서 취재 도중 우연히 만난 정현택씨(남명학연구원 이사)는 진양 정씨 문중의 24대 종손. 마침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에서 성균관 한림원 학생들의 하계 수업이 있어 이곳 일을 맡아보고 있는 그도 산청에 머물고 있었다. 정씨는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평 문씨 문중이 시배지 기념비를 세우면서 모든 공을 문익점에게 돌리고 정천익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죠. 시정을 약속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 따로 비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겁니다.
청계서원은 원래 진양군 대평면에 있었으나 진양호 건설로 수몰지구가 되어 진주성내 현위치로 옮겨온 뒤 정천익의 사적비도 세워졌다. 양 가문의 감정대립은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양 가문 출신 정치인들에 의해 중재되어 현재는 서로 인정을 하고 있는 상태다.
정천익인 단성현 소남에서 태어나 배양마을로 이사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양마을에서 지리산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감나무와 고택으로 유명한 남사마을이 있고 그에 조금 못미처 관정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타난다. 진양정씨 일족이 아직 지키고 있는 이 마을에서 만난 정태은옹은 기자에게 마을의 내력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옛날 우리 조상분 중에 관정이란 아호를 쓰는 분을 따라 관정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게 6백년 전의 일이다. 정천익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그 후 배양으로 이사가서 살았다. 때문에 목화시배지는 현재의 배양마을이 맞다" 정옹은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정천익이 문익점의 어린 시절 천자문 선생이었으며 나중에 사위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고 말했다. 지금 관정마을은 논이 많지만 과거에는 마을 입구의 논도 모두 밭이었다.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마을 앞길이 있는 곳에 둑을 쌓아 물길을 내는 바람에 그 좋던 우물마저 말라 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다. 정옹은 관정리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초 관정 선생이 이곳에 자리잡은 후로 쭉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전에 진양 대평쪽으로 옮겨갔다. 관정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백여년 전이었다. 돌아와서 마을을 복구하는데 옛날에 밭이었던 저 앞 논에서 정자만 남아있는 비석토막을 발견했다고 한다. 분명 집안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 논들을 전부 뒤엎다시키 했지만 결국 본체는 찾지 못했다.
이로 보아 관정마을이 진양정씨들의 역대 세거지였으나 병랸을 비해 일족이 이동하는 바람에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천익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문익점전의 일부 기사 외엔 그가 지었다는 한시 한 구만 전해오는 이유도 설명된다. 진양 정씨 문중에서 펴낸 청계지를 보면 정천익과 문익점간에 화답한 한시 한구가 남아있다.
"세상일 어지러워 돌아보면 무엇하리 / 대와 솔 푸른 그늘 뜨락에 가득한데
/ 바람에 그윽한 뜻을 맡겨두고 사느니"(정천익)

"산 이내 물에 어려 갈매기 하얀 날래 / 숨어서 사는 이 몸 뉘 있어 날아주리
/ 골짜리 깊숙한 숲속 드높은 뜻 기르네"(문익점)
옹서간 화답한 시의 세계는 얼마나 높고 맑은가.
취재도중 만난 한 사람은 남평문씨와 진양 정씨 가문의 분쟁을 한마디로 "의식이 아직 씨족사회에 머무르고 있다"고 평했다. 전국에 산재한 문익점의 사적은 수없이 많지만 특히 전라도 지역은 면포의 최대산지였던 관계로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발길을 돌려 전남 장흥의 강성서원으로 향했다.
장흥읍의 입구격인 유치면에서 월천을 건너자 동네 아낙들이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다. 우람한 은행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강성서원에는 홍색 관복을 입은 문익점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이 영정은 복식과 관모가 당시의 관작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정을 모신 숭덕사 문 옆에는 문익점비로 잘못 알려진 문암 문위세의 신도비도 서 있다.

온 나라에 두루 미친 목화의 공덕
강성서원은 숙종 28년(1702)에 창건되어 정조 9년(1785)에 사액되었다. 3백5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이는 문익점의 13대손 문천우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취재진의 발걸음이 지체되는 바람에 하루종을 서원 앞 정자에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 있던 문태열옹을 마을회관 앞 정자 위에서 만났다.
"원래 강성서원에 모셨던 분은 풍암 선생이다. 그 분은 퇴계 선생은 제자인데 퇴계 선생이 유독 그분에게만 병서를 주어 익히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창의해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나라에서 파주목사를 제수했지만 병을 핑계하고 은거했다. 그런데 문익점 선생을 합향하게 되면서 후에 사액받게 되었다"
문옹은 조상인 문익점이 "유학자요 충신이며 효자이면서 목화로 온 백성을 따뜻하게 입힌 겨레의 은인"이라며 이야기를 푸러나갔다. 문묘에 배향하기 위해 사림이 상소를 올린 대목에서는 "아무리 그 공덕이 커도 선비가 할 일은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서 끝내 배향은 못했지"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선비가 할 일 가운데 백성을 편안케 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을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보성에는 문익점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부조묘란 영원히 폐지하지 못하는 사당으로 태종의 명에 따라 처음 세워졌으나(태종원년인 1400년) 후사가 이어지지 못해 제사가 끊기는 등 여러차례 우여곡절을 겪다가 철종 5년(1854)에 보성의 도개리에 다시 세워졌다.

의성목화시배지
경북지방도 전라도지방과 더불어 목화의 대량생산지였다. 경북 의성에는 한말 융희3년(1909)에 세운 "충선공 삼우당 문선생 목면유전표비"가 금성면 제오리에 있고 일제시대에 세운 "충선공 부민후 강성군 삼우당 문익점 선생 면작기념비"가 금성면 대리에 있다.
"이 지방의 구전으로는 조선 태종때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고을살이 하러 왔을 때 문익점이 손자를 보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의성의 토질이 금주성과 비슷한 것 보고 목화를 재배했다고 한다. 의성문화원 이중헌원장이 굳이 구전이란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이를 고증하기 위해 국조방목 등 자료를 검토해봤으나 문승로가 과거에 합격했거나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을 찾지 못한 때문이란 것이다. 문승로의 동생이 등과했으나 의성지방에 고을살이 한 적은 없었다. 이 이야기는 교남지와 의성승감 등에도 기록돼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세운 "면작기념비" 이후에 엮어 진 것들이라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목면유전표비의 바로 곁에 노인회관을 짓고 주변도 시멘트로 발라 볼품없이 됐지만 이 고장에서 면화재배가 성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의성군 금성면 대리에 있는 일제시대 때 세운 면작기념비는 그 내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 조선 태종 때 그의(문익점의) 손자 승로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밭자리에 기념비를 건립했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의 현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지 않은 내용을 그대로 비에 새긴 경위를 이원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의성은 예부터 면화의 생산량이 국내 으뜸가는 곳이었다. 이 비가 세워진 1935년은 중일전쟁 도발을 앞두고 일제의 면화공출독촉이 심해지던 때였다. 결국 이 비 건립에 참여한 인사들이 일본인들과 이 지역의 친일파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면화공출을 독려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문익점의 유적지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확인한 문익점 제향서원만 13곳에 이른다. 우리 역사상 인물 중 후세 바람들에 의해 널리 추모되기로는 모시는 사당 등으로 따져볼 때 문익점 선생과 최영 장군이 쌍벽을 이룬다.
최영은 고려말 외적과의 전투에서 전승을 기록한 명장이자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만주 옛땅을 회복하려다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간 민족의 영웅으로 특히 남,서해안지역에 그를 모시는 당집이 많다. 그런 최영과 더불어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이 많다는 사실은 그가 민중들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두텁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정의 역사

동정이란 한복의 목이 닿는 부분에 덧 붙이는 좁은 백색천의 테두리를 말합니다.
동정을 달 게 된 유래는 .
세종원년 기해년 강성군 문익점 할아버지의 목면으로 인하여 이룩된 산업의 혁명과, 외화획득의 공로, 의류혁명의 위대한 공덕을 이 세상에 영원히 기념하는 뜻으로 세종임금이 특별히 만조백관을 모아 조야에서 명하기를 "이나라 백성이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덕인고로 동정을 달아 기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색깔있는 동정을 달지 못하게 하고 흰 동정만 달 게 한 것은 문익점 선생의 사후였기 때문에 영원히 상복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고려 후기 들어온 면화 600년 넘게 '옷감의 제왕'

 

지금은 겨울철이 되면 여러 가지 원료로 만든 갖가지 따뜻한 겨울옷이 나오지만, 전통적으로 겨울옷의 대명사는 무명으로 만든 솜을 넣은 솜옷이었다.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후반인 고려 공민왕 때였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 황제의 명을 거역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던 문익점이 면화를 발견하고 귀국할 때 씨를 갖고 들어온 것이다.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면화를 재배했다. 면화 재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 지방 전체로 확대됐다. 고려의 뒤를 이어 들어선 조선 정부는 면화 재배를 적극 장려했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적극적으로 개간한 세종 때부터는 북쪽 지방에도 면화의 재배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부와 남부 지방은 물론 평안도 등 북부 지방 일부에서도 면화 재배가 활성화됐다.

사람들은 면화로 무명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면화의 털로는 솜을 지어 사용했다. 그 이전에 평민들이 주로 입었던 것은 삼베옷이었다. 명주나 모시옷도 있었지만,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서민들이 입기에는 너무 비쌌다. 더구나 삼베는 속옷으로 입기에는 거칠었으며, 겨울에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무명옷이 등장한 것은 의생활에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에 힘입어 15세기 중반부터는 기존의 삼베나 모시 등을 대신해 무명옷이 사람들의 주요 의복이 됐다. 평민들은 여름에는 홑겹으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봄과 가을에는 두 겹이나 세 겹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었다. 겨울에는 옷 속에 솜을 넣어 입었다. 무명옷은 이전의 옷에 비해 훨씬 따뜻해서 웬만한 추위에도 견딜 수 있었다. 면화는 옷을 만드는 원료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면화로 만든 옷감은 세금을 납부하거나 물건을 매매하는 데 이용됐다. 쌀, 돈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주요 수단이었던 것이다.

농가에서는 농사일이 없을 때 부업으로 면화로 옷감을 짰다. 조선 후기 들어 면화로 옷감을 짜는 수공업은 농촌사회에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외국산 면제품이 들어오자 국내 농촌의 면직업과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일제 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 생산되는 면화도 우리나라 재래종에서 방직공업에 적합한 서양의 대륙면으로 바뀌어 갔다. 1930년대 일제는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일본의 병참기지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공업 원료 증산정책으로 남면북양정책을 폈다. 남쪽에서는 면화의 생산을 늘려 면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북쪽에서는 양을 키워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들어옴에 따라 무명옷은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갔다. 이불에 사용되던 솜도 나일론 계통인 가볍고 따뜻한 캐시밀론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다가 나일론 옷이 몸에 해롭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면화를 원료로 하는 제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곡성군 검면 목화채험장

솜뭉치 톡 톡‥포근한 추억 만들기 곡성에서 부르는  ‘그 옛날 목화밭~’아침 저녁으로 추위가 제법 느껴지는 때다. 따뜻한 솜이불이 그리워진다면, 여행길에 곡성군 겸면의 푸근한 솜밭에 들러볼 만하다. 지금 목화 열매가 입을 쩍 벌려 솜뭉치들을 토해내고 있는 목화밭이 3000여평이나 펼쳐져 있다.

문익점이 들여와 재배한 이래 목화는 의류·이불류 등의 재료로 쓰이며 우리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광복 무렵까지도 전국에서 목화가 재배됐지만, 화학섬유 도입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요즘엔 목화 재배농가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는 아시아면이었고, 20세기 초반엔 일본에서 육지면이 도입돼 경기도 이남에서 주로 재배됐다. 곡성 겸면에선 이 육지면을 대량으로 심어 사라져가는 ‘추억의 목화밭’을 재현해 놓았다. 지난해까지는 겸면천변에 목화길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올해엔 아예 6000여평 터에 ‘겸면 목화공원’을 조성하고 이중 3000여평에 목화밭과 산책길, 원두막 등을 마련했다. 나머지 3000평엔 귀리·기장·갓끈동부·수세미 등 25종의 작물을 심은 희귀농작물단지와 금낭화·매발톱꽃·벌개미취 등 35종의 풀꽃을 가꾼 야생화단지를 들여 농촌생활의 추억거리를 고루 갖췄다.
지금 겸면 목화밭으로 가면 열매(다래)가 한창 부풀어올라 입에 거품같은 솜뭉치를 물고 있는 목화 무리를 만날 수 있다. 여름부터 시작된 개화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부풀어터진 목화 솜꽃뿐 아니라 갓피어난 노란빛깔의 꽃과 수정이 돼 색이 변한 보라빛 꽃, 그리고 열매를 맺은 다래 따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11월 초까지 목화 수확을 미루고 관광객을 맞을 예정이다.

2가족 이상이 모여 겸면 사무소에 미리 연락하면 목화따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목화체험전시관에선 목화 수확에서 무명옷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씨와 솜을 분리하는 씨앗이, 솜을 트는 솜틀기, 물레, 베틀 등 기구를 써서 직접 무명베를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2004년 10월14일 겸면 사무소 (061)362-1031.

 

              朝鮮前期 綿織業의 발전과 生活文化의 변화

                                                                 李正守 동서대교수

                                             머  리  말

고려말과 조선초는 한국사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로 주목된다 농업에 있어 시비법발달 품종개량으로 인해  水田의 速作常耕法의 실현과 早田의 根耕法과 2년 3작법의 실현 그리고 면화재배는 농업생산력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대내외 정치적 안정과 함께 왜구의 활동이 진정되면서 연해안을 시발로 점차 북방지역까지 경지 개간이 확대되는 경지의 대개간이 진행된 시기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중국에서의 元,明의 교체와 일본에서의 남북조 내란의 종식등으로 인해 평화적인 대외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인구증가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지주제와 유통경제 발전의 기초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특히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의생활에 있어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본격화된 면포의 생산은 정부 재정과서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시기 면포 생산 증대는 국내 경제의 성장과 함께 본격화된 대외무역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朝-中-日 삼국무역의 발전에는 조선의 綿布와 일본의 銀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면포가 갖는 사회?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여말 선초의 목면과 관련된 연구 성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목면의 전래 시기와 장소 그리고 목면 산업 형성에 있어서의 문익점 일가의 역할에 관련된 문제,

  둘째, 농서나 농업기술상에서의 太綿 耕種法에 관련된 문제,
  셋째, 면업 정책과 면직업의 발전에 관련된 문제,
  넷째,면포의 유통과 기능 및 그펄이 미친 사회?경제적 영향에 관련된 문제 등으로 나눌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전기 면업의 발전과 대내 유통경제의 진전과 대외무역의 발전에 따른 면포의 수요 증대 문제를 살펴보고, 나아가 면포 생산의 확대가 국내의 생활문화상에 미친 영향을 사치 경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綿織業의 발전
우리나라에서 목면이 생산되기 이전에 주로 생산편 의료는 絹織物과 苧麻織物이었고 그 밖에 毛織物도 일찍부터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그 양은 많지 못했다. 1) 
전 세계에서 면 품종은 여섯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중국에 전해진 것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원산지가 인도인 亞洲면(本棉, Bombax tree)이고,
또 하나는 원산지가아프리카인 非洲면(草棉, Gossypium)이었다. 전자로 짠 직물을 桐華布라 하고, 후자는 白첩布라고 한다.
2)
우리나라의 목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이른 것은 신라 경문왕 9년(869)의 당나라에 대한 진헌품 가운데 白첩布가 보인다.
3)

그 후 고려 혜종 2년(945)에 고려에서후진에 보낸 공물 가운데 또 백첩포가 보이고 있다. 4)
이것 이외에는 목면 관련 기록은 고려말이 되어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라말 고려초의 중국에 진헌한 목면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아마도 목면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높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재배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고 생 각된다.
5)

 그런데 1363년(공민왕 12)에 좌시중 李公遂의 書狀官이 되어 元에 갔던 文益漸이 원으로부터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목화 재배를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衣料産業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에 임명되고 이어 벼슬이 좌사의대부에 이르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다시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江城君으로 증직하였다.
6)
또한 1410년(태종 10)에는 사간원에서 올린 시무 8조 가운데 경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이용하 의복의 원료인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祠堂을세우고 祭田을 지급하자'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7)
목면은 絹, 麻 苧 등의 제품에 비해서 美麗하면서도 그 견고한 점에 있어서 우수하고, 寒氣를 막는 보온성과 습기를 흡수하는 점에서 뛰어났다.
이러한 실용성 이외에도 기존의 다른 직물을 대체해 급속히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목면은 다른 어떤 직물을 직조하는 것보다 훨씬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방적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데 면은 마나 저, 견 등에 비해 1/5 정도의 노동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8) 이러한 직물업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 향 상은 농가경제와 국가의 재정에도 큰 보탬이 되었기에, 민간에서 뿐 아니라 정부에 서도 적극적으로 면화 생산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9)

  목면 재배의 확대에 있어 초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는 米穀 생산 증대책과 아울러 면화 재배 장려책도 적극적으로 추진 했다. 정부는 지방관들이 면화의 재배를 민간에 적극 권장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 였다. 정부의 면화 재배 정책은 남쪽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I5세기 초반 세종대 이 테 북쪽 지역까지 적극 추진되어,
10) I5세기 후반 성종대에 와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황해도?평안도의 後民들이 북쪽 지역에까지 면화를 심어 이익을 얻고있었으며, 정부에서도 下三道에 각기 면화씨 20碩을 준비시켜 영안도?황해도?평안도에 보내어 심게 한 후 관찰사로 하여금 그 수확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있다.
11)

이처럼 정부의 면화 재배 장려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I5세기 중반경에는 이미 면포는 마포를 대신하여 민간의 주요 의복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2)
16세기로 들어오면 綿花 재배는 남부지역에는 이미 폭 넓게 퍼져서 旱田 외에 심지어 논을 떼워서 綿花를 심는 경우도 있어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13) 면화 재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정부에서 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綿業은 이제 농가의 경제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주요 부업으로 빠르게 정착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6세기에 발간된 農書의 木綿耕種法 수록으로 나타났다. 14) 그리고 민간에서는 綿花 생산의 확대와 綿布 직조의 증대를 가져와, 면포의가격도 점차 낮아졌다. I5)

 하지만 16세기까지는 정부의 지속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부 지방의 경우 평안도를 제외하고는 함경도?황해도 등은 여전히 기후나 土性 등의 이유로 인해 목면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6)
여전히 북부 지방은 綿布의 자급자족이곤란하여 남부 지역에 의존하는 비을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2. 綿布의 需要 증대로 국내 流通經濟의 성장
면포의 수요는 크게 실물 용도인 의복이나 기타 잡물의 원료로 사용된 측면과 국내외 유통경제의 발전과 함께 화폐나 상품으로서 사용된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I5세기 말부터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한 지주제와 유통경제의 진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농촌내의 자급자족적인 교환경제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地主制와 貢納制 발전은 유통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었다 토지 집적을 통해 확보된 대량의 米穀?木花 등 생산물이 시장과 연결되어 처분되지 못한다면, 토지 집적은 큰 경제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16세기 대토지소유의 진행이라는 이면에는 이러한 시장기구의 발달이 전제되고 있었다.
17) 
당시 營利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상품교역의 장소로서 주목되는 것은 場市였다. 극심한 흥년으로 구황미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처음 허용된 場市(성종1년, 1470년)는 곧이어 他道로 확산되었다. 하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장시는 16세기에 들어와 점차 諸邑 ?諸郡에까지 개설될 정도로 급증하였다. 당시 사정을 南○은 '방방곡곡에 市場이 서지 않는 곳이없을 지경이어서 이로 인해 物價가 등귀하고 있다'고
18)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場市가 확산되자, 정부내에서도 장시 개설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의 場市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그것의 개설을 반대하는 務本抑末論입장과 찬성하는 小民保護論 입장의 두 가지로 진행되었다. 대체로 장시 개설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務本抑末의 원칙하에 농민들이 상업활동에 편입되면서 농업을 버리고 末利만을 추구하여 田畓이 황폐화되고 物價가 등귀하거나 盜賊이 증가하는 등 폐단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장시 개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당시가 凶荒의 타개와 飢民 賑恤의 한 방편으로 도움이 되며, 또 小民들이 有無相遷하므로 資生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장시 개설 주장이 특히 힘을 얻고 있있던 것은 유교적 통치이넘을 기반으로한 정부의 爲民政治가 현실적으로 잘 운영되지 않는 실정에서 小民의 생업 공간으로 場市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場市에서 교역된 물건은 대부분 농촌내에서 생산 ? 제조되는 품목들이었고, 그 지역내에서 생산되지 않거나부족한 물품은 상인들에 의해 다른 지방이나 장시에서 운송되어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衣食에 필수적인 穀物과 布가 중심이었다. 場市는 소농층의 생활과 밀 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고 있있던 것이다.

  한편 교환경제가 발전하자 화페에 대한 관심도 높아갔다.
물품화페인 米 ?布 이외에 명목화폐인 銅錢, 楮貨 등의 유통에 대한 정책적인 노력도 다양하게 시도되었다하지만 사회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민간유통에서 명목화폐는 거부되고, 15세기 후반 이래 점차 綿布가 기존의 摩布를 대신하여 통용화폐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19)

면포는 일반적인 민간에서의 거래뿐만 아니라 국가의 조세 납부에도 통용되었다.  당시 통용된 규정 綿布 1필은 升數가 5升, 길이가 35尺이고, 넓이가 7寸, 1升?의 올數는 80가닥이었다. 20) 국가에서는 당시 통용되던 布幣를 國幣로 인정하여 나름대로 관리?감독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國幣는 크게 3등으로 나누어 유통시켰다. 그가운데 布幣는 5升布를 상등으로 하고 3승포를 중등으로 하였으며, 楮幣를 하등 화폐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민간 유통에서는 저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고, 3승35척 미만의 ○布가 저화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2) 對外貿易의 발전

I5S세기 말경부터 對外貿易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다. 21) 그것은 이 시기에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국내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I5세기 말경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있었으며, 그리고 일본에서는 무사?상인층을 증심으로 고급 비단과 면포에 대한 소비가 확대됨과 동시에 16세기경부터 광산의 활발한 개발로 인해 막대한 양의 金?銀?銅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도地丁銀制 등 세제의 개편과 재정운영의 변화에 따라 銀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조선은 국내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다량의 고급비단,도자기, 약재, 서적 등을 수입했고, 일본은 고급비단과 면포의 생산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 국내 수요가 늘자 胡椒蘇木이나 銅?銀 등을 결제수단으로 삼아 조선 면포와 중국 비단 등의 물품을 조선으로부터 수입했다.

  13?16세기의 대일 수입품은 蘇木, 胡椒, 유황, 銅, 銀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대일 수출품으로는 직물류가 중심이었다. 22)
I5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교역품은주펄 일본의 소목, 호초, 유황, 동 등을 수입하고 綿紬, 저포 마포 등을 수출하였는데 특히 마포가 주요한 답사물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중엽부터 倭使에 대한 답사물로 마포를 한다는 원칙이 점차 변화를나타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내의 면포 생산량의 증가와 일본의 적극적인 綿布 사여 요구에 기인하였다. 실제 1464년(세조 10)에 정부가 大內殷 使行의 銅?○에 대한 대가로 綿布 542필과 庶布 1,080필을 주자 그들은 마포는 쓸 데가 없다고 받으려 하지 않고23) 끝까지 면포의 사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傍使들이 마포 대신 면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국내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에 비해 면업의 성립이 I~2세기 정도 뒤떨어졌으며 목화 종자도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다. 24)
일본은 면포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마포와 견직물이 대중적 의료였다. 그리고 상류사회에서는 明과의 조공무역이나 상인들을 통하여 수입된 중국산 고급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켰다 하지만 I5세기 후반 이래 일본 국내경제의 성장과 함께 무사층이나 상인층을 중심으로 의복 등에 면포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면포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면포는 수입품인 이상 비교적 고가였기에, 그 사용은 서민들 보다는 무사,, 名主, 승려 등의 사이에 수요가 되었다. 그러나 應仁의 亂(1467년) 전후에 조선 무역에 있어 綿紬 보다는 綿布로의 전환이 있었고, 보다 양질의 면포가 수입됨에 따라 품질뿐 아니라 수요의 계급적 한계성을 벗어나 점차 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의 생활속으로 침투되었다.
25) 이에 왜상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綿紬(명주)보다는 이윤이 훨씬 많은 綿布를 선호하고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15기 말에 와서 대일무역은 양과 질에 있어 큰 변화를 보였다. 우선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의 규모가 커지고 그 품목도 금, 은, 동, 납, 유황 등 광산물과 소목,포근 등으펄 다양화되었으며, 조선의 답사물도 마포 대신 綿布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1503년(연산군 9)에 金甘佛 등에 의해서 鉛銀術이 발견된 이후조선내의 端川 ?永輿 등 광산 개발이 적극화되면서 국내산 은과 수입 倭物이 使行과 商人을 통해충국으로 유출되는 朝-中-日 삼국무역 체계가 형성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일본인들의 '來獻土宜'가 상업적 성격을 한충 뚜렷하게 나타냈고 무역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특히 왜객들이 가져오는 銅과 蘇木의 양이 급격하게 늘어 1500년(연산군 6)에는 대마도주가 한 번에 銅 11만 근을 보내어 공무역하기를 청하였다.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왕실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倭物뿐 아니라 中國産物의 수입도 급격히 늘어났다. 反正을 통해 즉위한 中宗은 燕山君의 廢政을 일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대일 통교 규정의 엄격한 운영을 꾀하여 恒居倭, 對馬島民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 결과 1510년(증종 5) 4월에 삼포왜란이 일어 났다. 26)

  함포왜란 후 소강 상태를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5년(중종 20)경을 전후하여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첫째, 倭使들이 가져오는 商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늘어났고, 조선 정부의 무역 규제가 보다 강화되자 무역의 패턴은 공무역 중심에서 사무역,밀무역으로 옮아갔다. 둘째, 倭銀이 급격하게 조선에 유입되면서 국내 유통 銀의 증심은 端川銀에서 倭銀으로 바뀌었다.27) 이에 따라對日貿易은 기존의 綿布 對 南海物産에서 綿布 對 銀 교역체제로 방향을 전환했던것이다. 셋째, 조선의 왕실과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경향이 저변층까지 확대되고 사치품의 고급화가 추구됨에 따라 中國産物을 무역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銀이 조선으로부터 중국으로 유출되었다. 이에 따라 銀을 단일 결제수단으로 하는 삼국무역 체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증종 즉위 후 약 20년간 소강, 갈등 양상을 보이던 대일무역은 1522년(중종 17)경부터 대마도와의 관계를 화해시킨다는 구실로 日本國王使가 빈번하게 도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523년(중종 18)에 일본 국왕사가 무역한 면포의 양이 10만필에 육박했고, 1525년에도 가져온 商物의 가격이 8만 5천 필에 달하였다. 또한1328년에는 小二殿과 日本國왕使가 잇달아 내왕하여 공무역한 수량만도 면포 8만 1천 5백필에 이르렀고 사무역한 수량은 공무역의 배나 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28)  한편 1540년(중종 35)경 대일무역에 있어 획기적 변동이 일어났다. 대일 교역품이기존의 銅鐵, 胡산 등에서 銀 중심으로 바뀌었다. 실제 1542년에 일본 국왕사 安心東堂 등이 가져온 商物은 銀 8만 냥과 硫黃 20만 근으로 그 가격만도 官木 약 4십5만 필에 이르러, 무역한 것이 많아 왜선 3~4척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무렵에 일본인들이 공무역에 의하여 한 해 동안 가져가는 綿布만도 선박으로 6O~7O척 분이나
29) 되었다. 당시 공무역 보다는 사무역?밀무역이 휠씬 더 많았을 것으초 생각되기에 공무역에 이들 수량을 합치면 엄청난 양의 면포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왜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해 국내의 銀 가격은 급락했으며,30) 赴京 使行들이 倭銀을 대량으로 소지하고 가서 明과 무역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처럼 국내에서 왜銀의 가격 폭락으로 인해 정부와 왜使간에 수차 제기된 交易價의 마찰은 결국 1544년(중종 39)의 蛇梁왜변을 일으키는 중요한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치풍조의 확대
국내 유통경제의 성장과 삼국무역의 발전 결과 국내의 富는 전례 없이 증대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富의 증대와 교환경제의 침투는 소비의 팽창을 가져온다. 대개의 경우 소비 수준(구매력)이 올라가면, 量만이 아니고 質의 면에도 소비물자의고급화가 진행된다.

  木花 이전 우리나라의 의복 원료는 桑, 李, 庶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명주는겨울용 의료였고 값도 비쌌으며 모시와 삼베는 여름용 의료로 적당하였음에 비해 면포는흡습성과 보온성이 뛰어나 사계절 의료로 적합하였으며 값도 저렴하여 실용성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 목화가 전래된 이래 면포는 貴賤할 것 없이 보편적 의료로서 재빨리 정착하게 되어 서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특히 겨울철에 추위로 인한 질병 등에 취약한 서민 생활을 크게 개선시켜 주어 수명 연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1)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유교적인 검약의 실천을 강조하였지만, 대내외 경제의 변화와 함께 지배층을 시작으로 점차 사치 풍조가 일어났다. 사치의 시발은 의복에서부터 나타났다. 조선초까지 대부분의 소농층은 白衣를 착용하였지만 양반 사대부층이나 女官, 樂人 등 色服을 착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黃,,紫, 紅, 靑 특히 紅色을 널리사용하였다. 당시 홍색의 草木染料로 국산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紅花를 들 수 있다.紅花染色은 大紅이라 하여 면포 염색에는 적합하고 무난하였으나 그 생산량이 그리 많지 못하여 高價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수입된 蘇木은 기존의 經花 부족을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염료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에는 紅花의 염색을 雜染이라 칭하고 蘇木에 의한 木紅을 上色으로 간주할 정도로 소목의 인기가 높았다. 당시 蘇木은 궐내의 紅袍를 비롯하여 朝服, 公服 및 宗廟用의 紅○ 의장 雜裏○ 등의 제조에 펄히 사용되었으며, 또한 귀족 부녀자의 치마나 옷감의 안찝 염색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32) 이러한 紅染 의 염색을 통한 의복에서의 사치 경향은 양반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점차 하층 민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端川 등 국내 銀鑛 개발과 왜은의 대량 유입에 따른 對明貿易의 활발한 진행과 함께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때 王室 등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사치 풍조가 점차 확산되면서,서민층들도 紗羅綾緞 등 唐物을 착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33) 이후 사치 풍조는 더욱 확대되어 車馬 의복만이 아니라 혼인과 장례 등과 같은 일에도 사치가 심각해져 제반 物價의 등귀도 야기시켰다. 그리고 사치 풍조는 중앙 뿐만 아니라 변방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兩界의 각 고을에서 조차 경기도 廣州의 白器를 무역하여 그릇으로 사용하고, 음식물도 남쪽의 것을 무역하여 사용할 정도였다. 34) 

                               2. 儉約策의 실시
이러한 전 사회적인 사치 풍조의 확산 현상을 정부는 봉건적 신분 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농업의 황폐화와 민생과 국가재정의 부실, 그리고 물가의 등귀를 가져오는 근원으로 보고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곧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왕조체제에 심각한 변질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없는 문제였다.

  이에 15세기 후반경부터 정부는 사치 문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에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중앙의 관료들과 지방의 수령들에게 누차 검약정을 강조하는 下敎뿐 아니라 법률적인 강제성을 갖춘 사치 금지령을 누차 발표하였다. 검약의 대상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배층에서 서민층으로 그리고 衣服에서雜事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대시켰다.

I5세기까지는 대체로 사치의 중심이 衣服이었으며 서울?개성 등의 대도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치의 대상도 의복 염색과 같은 의복과 관련된 소비 증가 문제가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朝-中-日 삼국무역이 본격화되면서 倭産物品 외에 紗羅綾緞등 中國産 物品이 대량 수입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큰 변화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전과 달리 사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사치 금지와 검약의 측진에 대해 수없이 논의하고 금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당시 국내의 사치 풍조 는 대중국 사무역의 활발에 따른 중국산 물품의 대량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에 정부는 중국으로 가는 使行이나 商人들의 銀소지를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는 禁銀令을 강화할 뿐 아니라 차제에 대중국 사무역을 제한하거나 영원히 정지하자는 파격적인 논의까지도 심도 있게 다루게 되었다. 35)  하지만 사무역의 이익이 워낙 막대했기 때문에 宮禁, 戚臣, 權貴 등과 같은 특권층들이 적극적으로 사무역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실제로 1544년(中宗 39)의 聖節使, 千秋使, 冬至使 세 행차의 사신들 모두가 禁銀法을 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성절과 천추 두 使行은 엄청난 양의 銀을 싣고가 사무역하여, 중국의 主事 宋維元이 '두 使行이 銀을 많이 사용하므로 牙人들이 이익을 다투는데, 매우 해가 되는 일이다. 지난 일은 허물하지 않겠으나 국왕에게 回啓하여 禁約을 더욱 엄격히 하여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고 하면서 單子 2건을 주는36) 외교적인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당시 큰 정치적 쟁점이 되어, 세 행차의 사신들과 書狀官 그리고 點馬 등이 모두 推考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무역을 주도한 사건의 핵심 인물은 中宮의 동생이었던 윤원형이었디?. 당시의 상황을 尹仁鏡은 '왜은이 流布된 뒤부터는 北京에 가는 通事들 중에 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사람이 백에 한 두 명도 없으니 추국하기로 한다면 이루 다할 수 없을 것이다'고37) 토로하였다. 실제 당시의 사무역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알 수 없지만, 당시 禁銀令에도 불구하고 使行들이 한 번에 소지해 가는 銀雨이 많게는 1만여 냥에 이르며 적어도 수천 냥을 밑돌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처럼使行時의 범람이 지속되자 중국에서는 우리 사신을 '朝鮮商買'라 하여 '賣胡'나 '○子와 같이 취급하거나 그들의 과거 策題에 이것을 해결할 방안을 묻는 문제가 출제 결 정 도였다. 38)

                                                 맺음말
여말에 와서 재배에 성공한 면화는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서민생활 향상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면포는 미단 삼베 모시 등 다른 직물에 비해서 실용성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생산성이 높았으므로 농가의 부업으로 급격히 정착되었다. 면포는 I5세기 후반 이래 기존의 삼베를 대신하여 국내 기간 화폐로서의 기능과 함께 이 시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삼국무역에서 銀과 함께 주요한 交易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면포를 매개로 한 지역간 결제통화인 왜은의 대량 유입은 국내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국내 유동성의 증가와 富의 증대는 생산적인 측면 보다는 사치와향락 등 비생산적인 소비문화에 투입됨으로써 이 시기 양반층을 시발로 하여 서민층까지 사치 풍조가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15세기 말부터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바탕으로 한 왕조체제내에 생활문화 패턴의 변화가 급격히 나타났다.  의복에서 시작된 사치 풍조는 16세기에 들어와 대중국 사무역이 본격화되면서 사치의 초점도 왜산 물품에서 中國産 물품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소비에 있어 양과 질적으로 큰 변화가 발생했다. 사치 풍조는 신분적으로는 지배층에서 하층민까지, 또 그 대상이 衣服, 住宅, 車馬에서 일반 雜事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으며, 또한지역적으로는 중앙에서 변방지역까지 점차 확산되었다. 이것은 봉건적 신분질서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특히 부업으로서 상업을 경영한 하층민들도 이 변화에 동참한것은 주목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치 풍조의 확산은 성리학적 이념과 농경을 기저로 하는 왕조체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었기에 지배층으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정부는 사치 풍조에 대해 일적부터 우려를 나타내고 사치 금지령을 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I5세기 말부터 신분에 따른 주택, 의복, 집기 등의 사용 제한 규정을 거듭 밝혔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간 생활수준을 다시 떨어뜨린다는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령을 통한 강제적인 방법도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특권층들이 부상층과 결탁하여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는 사치 무역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정부의 여러 노력들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1

"高承濟, 「李朝綿業의 展開過程」, 「近世韓國産業史硏究』, 大東文化社, 1959

2

澤村東平, 『朝辯格作締業하生成t發展」, 朝鮮纖維協會, 1941, 7~8쪽.

3

三國史記」 권11, 景文王 9년 7월

4

고려사 권2, 혜종실록 2년

5

朴性植, 「麗未鮮初의 木綿業에 對하여」, 『大丘史學』 17, 1979

6

태조실록 권14, 太祖 7년 6월 T巳

7

大宗寶錄』 권19, 太宗 10년 4월 甲辰(8)

 8

 위은숙, 「직물수공업의 발전과 소농민경영의 성장」, 『高麗後期 農業經濟硏究』, 혜안, 1998, 227쪽   의 '綿과 다른 작물과의 노동생산성 비교 표' 참조

 9

 南美惠, 「朝鮮前期 綿業政策과 綿布의 生産」, 『國史館論叢』 104,, 1998

 10

 世宗代 이래 국가에 의한 綿花의 보급책이 적극적으로 시행되어, 평안도 함길도 등의 북방 지역    까지 木綿 種子가 보급되고 있었다. (세종실록 권69, 世宗 17년 9월 庚辰(12), 『世宗實錄』 권   71 世宗 18년 1월 壬申(6)

11

成宗實錄」 권54, 成宗 6년 4월 乙巳(27)

12

世祖責錄」 권3, 린천 2년 3월 T酉(28)

13

中宗實錄」 권17, 中宗 7년 10월 辛丑(1)

14

金容燮, 農事直說』과 『四時찬要』의 木綿耕種法 증보」,
東方學志」 57, 1988; 문중양, 「朝鮮時代   叢書에 나타난 綿栽培技術」, 『한국과학사학회지』 14-1, 1992

15

拙槁, 「조선전기의 米價變動」 「釜大史學』 17, 1993

16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 土産條를 보면 京畿道의 廣州, 水原과 慶尙道의   義城, 軍威, 江原道의 春川, 洪川, 狼川, 平安道의 宣川, 郭山, 滑原에서 木綿과 木花를 土産品으로   하고 있다

17

李景植, 「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韓國史硏究』 57, 1987;

李泰鎭, 「16세기 東아시아 경제변동과 정치 사회적 동향」 『朝鮮儒敎社會史論』, 1989. 

18

中宗實錄』 권31, 中宗 13년 1월 壬子(12)

19

宋在璇, 「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 『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20

大典績錄』 「戶與」 雜令

21

I5, 16세기의 대일무역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拙稿, 「15,16세기의 對日貿易과 經濟變動」, 「釜大    定學』 22, 1998을 참조

22

金柄夏, 『李朝前期 對日貿易硏究』, 韓國硏究院, 1969, 31쪽.

23

세종실록 권34, 세조 10년 9월 정축(27).

24

澤村東平, 「返代期鮮의補作,綿業』, 未來社, 1985, 22쪽.

25

小野晃嗣, 「本邦木綿機業成立의過程」, 『日本産業發達史의硏究』, 至文堂, 1941, 331~335쪽.)

26

中村榮孝, 「三浦에 오게루爭亂」, 『日鮮關係樂史의 硏究』 上, 吉川弘文館, 1964.

27

小葉田淳, 『금은貿易史의 硏究』, 法政大출판국, 1969, 109쪽.

28

中宗責錄』 권62, 中宗 23년 8월 壬戌(23), 『中宗實鎭 권65, 中宗 24년 2월 戊子(22).

29

中宗實鐵』 권102, 中宗 39년 4월 壬辰(24).

30

실제 1538년의 은값은 1냥당 면포 4필이었는데 이후에 侵銀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1542년에는 면포 0.5필로 급감하고 있다. 이처럼 불과 4년 사이에 銀價가 이전의 1/8 정도로 급락하였다. (拙槁,   앞의 논문, 1998, 「表」 15~16세기 銀의 對日貿易價의 추이 참조)

31

武部善人, 『綿本과木綿의歷史』, 1989, 45~48쪽,32)

32

金柄夏, 앞의 책, 106~108쪽

33

中宗寶錄』 권26, 中宗 11년 10월 淡辰(20),)

34

34) 『中宗實錄』 권60, 中宗 23년 2월 戊申(6)

35

中宗실록 권76, 中宗 28년 12월 戊寅(10).

36

 36) 『中宗實錄」 권102, 中宗 39년 2월 己卯(10)

34

『中宗實錄』 권102, 中宗 39년 3월 辛표(3)

 

『明宗實錄」 권9, 明宗 4년 3월 癸未(13)

 

일본의 목면전래와 경제구조의 변화

                                                박화진교수(부경대) 2003년 5월 30일 발표

목면이란/ 세계목면의길/ 일본의 목면전래 이전의 서민의복/목면관련 최초기록
일본의 조선목면수입

일본의 목면보급과 재배에서 농서와 목면
전국적 재배양상
목면의용도

목면업재배기술

목면의 영향

경제구조변화


목면이란 ? 

목면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海島木綿, 이집트 목면, 陸地목면,아시아목면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면모의 길이 ,강도 ,색상 ,숙성도 ,균일함, 섬유의 섬도 등에 따라 그 품질이 나뉘는데,
기계방직에는 섬유가 길고 가는것이 좋은데 , 면모의 길이는 해도목면이 가장 길고(3.81~5.08cm) 아시아목면이가장 짧다(0.95 ~ 1 91cm)고 한다.

  일반적으로 면모의 용도는 ①의복(방적)의 원료, ②이불숨 ③화약 및 셀를로이드원료 등이고
특히 목면이 의복의 원료로서 상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 때문인 것 같다.
실의 강도가 강하여 방적하기 쉽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뛰어나 촉감이 좋으며 색감과 광택이 좋으며 염색하기 쉬우며, 나아가 섬유 사이가 中空인 까밝에 중량이 가벼우면서도 보온력이 매우 우수하며 흡수성이 매우 뛰어난 점등을들 수 있다.

  그리고 목면 종자는 약 20% 정도의 유지분을 포함하고 있어 씨를 짜서 식용유(사라다 오일 등등)를 만들기도 하고, 그 찌꺼기는 매우 우수한 유기질비료로서도 중보되었으며 또 목면을 따고 난 뒤의 고목은 연료로서도 매우 소중하게 사용되어 그 용도는 한 두마디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목면의 전래는 의복혁명을 일으키고, 나아가 서양과 일본의 역사를 바꾸어 버리는 제1차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실크로드'와 '코튼 로드(목면의 길)'

서민들의 의복생활에 커다란 변화와 혁명을 가져온 목면의 기원과 그 전래과정에대하여 살펴보면, 현재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구대륙에서는 인도가 이미 약 5,000 여년 이전 중국이 약 3,500년 이전 목면이 재배되었다고 본다.
한편 조선의 재배기원이 640여년전이라고 보는 견해는 너무 늦은 것 같은 감이 있다. 아마 추후의 연구성과에 의해 수정될 것이라고 유추하는 바이다.


(1) 재배식물의 起源』

목면은 세계 각지에서 각각 별개의 기본종자로부터 독자적으로 재배된 것 같다.
인도에서는 '기다치와다'가 가장 오래된 목면종자이었다. 인더스강 하류의 모헨죠다
로 유적(기원전 26세기)에서 綿布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도 最古의 문헌인 리그베다(B.C 1300~1000)에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시로바나와타가 인도에 이어 고대부터 재배되고 있으며 이후 유럽에도 점차 전해졌으며, 그리고 종래의 아시아계통 목면들이 대부분 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의 육지목면으로 호환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마를 의복으로 하고 있었던 탓때문인가 목면재배는거의 보이지 않으며 13~14세기에 이르러 비로서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이집트목면은 주로 19세기에 이르러 유입된 페루목먼이라고 한다. 
신대륙에서는 페루를 중심으로 기원전 26세기부터 페루목면, 브라질에서도 거의비슷한 시기에 브라질 목면이 재배되었으며, 멕시코에서는 이미 기원전 5800년에 육지목면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미국으로는 1704년에 처음으로 버지니아 지역으로유입되어 마침내 주로 육지목면을 중심으로 재배되었다. 중국에서는 10세기이후 인도로부터 종자가 유입되어 12세기부터 본격화하게 되었다.


(2) 「세계면업의 발달」
세계면업발전사』 ,일본방적협회,-村山高- 인류가 목면 꽃으로부터 면사를 만들어 면직물로 짜 의복으로 만들어 입게 된 것은‥‥적어도 약 오천년전의 인도에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인더스강 유역 모헨죠다로와 하랏빠 양 지역에서 ‥‥‥ 고대 도시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인더스 고대도시문명의 존재를 실증하는 것인데 면직물의 파편 및 면화를 잣는 방추차가 발견되었으므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목면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공예작물학』

목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전부터 사용되어 왔는데‥‥‥그리이스인이나 로마인이 기록한 것에도 이미 목면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목면은 회교도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영어의 Cotton(코튼)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어어의 qutum 및kutum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의 목면재배는 태고에 인도로부터 불교와 동시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그 이전이라는 설의 두가지가 있는데 현재 확실치 않다.
조선에목면이 유입된 것은 고려말(1363년 무렵?), 원나라로 사신 갔던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2. 일본의 목면전래 

(1)목면이전의 시대
목면 전래이전의 서민의복-추위와의 싸움

목면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일본의 고대,중세 서민들의 의복생활은 모시와 삼베를 중심으로 한 麻의 재배 ,방적 ,직포의 시대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각 개인의농가에서 본인들 자신의 필요한 직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 농가의 여성들은 매우 손이 많이 가면서 또 능률적으로 그다지 효능이 좋지 못했던 이러한 마의 베짜기 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뒷날의 목면시대와 비교해볼 때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이런 힘든 의복생활에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된 목면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두가지 단계로 나누어 등장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중국이나 조선에서부터 목면제품이 완전한 수입품으로서 전해진 시기와
두 번째 단계는 일본국내에서 목면의 재배, 방적 ,직포가 직접 시행하게 된시기의 두 단계이다.

 우선 면면 관련 기록이 일본 문헌상에 언제부터 나타났던가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헌상의 자료가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대답하기어려운 점도 있으나, 戰前 일찍이 철저한 사료조사를 통하여 목면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해왔던 오노 고우시(小野晃嗣)1)에 의하면 元久1(1204)년 무렵 송나라 상인이 일본에 목면포를 가져온 것으로서 당시 일본에는 없던 물건이었다는 기록을동하여 가마쿠라 시대초기에 이미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
그러나 아직 심유 관련 유물들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검증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어디까지나 가설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正平12(1357)년 10월 17일, 室覺寺의 無隱元○가 히다치 호운지(常陸 法雲寺)의 후암 종기(後○宗己)에게 보낸 편지 속에 "木綿方(○)一領 聯表微志" 라고 기록하고 있어 아마도 禪僧들 사이에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목면의 ○衣가 매우 귀중품으로서 취급되고 있었음을 추측되고 있으며, 또 남북조 시대에 작성된 『庭訓往來微 속에서도 '綾紫小抽','上品細美','單 之絹'등의 의료와 나란히 木綿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I5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점차 목면의 사용실례에 대한 기록이 증가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목면은 중국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박래품으로서 아직도 귀족사회에 한정된 매우 고귀한 물품이었다. 아직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가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滿濟○后日記 永享4(1432)년 5월 8일조 등등 ‥‥)


(2) 조선목면의 일본전래*조선의 목면 전래

  일본에서 아직 목면 재배가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조선에서는 목면 재배가 시작되어 매우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었다. 조선도 원래는 모시와 삼베의 나라로서, 고려시대말기까지는 麻布가 물건매매의 교환수단으로서 화폐대신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14세기 후반 고려말 공민왕13년(1352~74년 재위) 무렵, 원나라에 갔던 사신(문익점)이 귀국하면서 목면씨를 가져온 것을 계기로 약 10년동안에 한반도 전역에널리 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 말기무렵부터 목면이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그리하여 1392년 조선왕조가 성립하였을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목면제배가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 같다. ( 기상적 조건으로 인하여 한반도 북부는 목면재배가 불가능하였던 것 같으나 한반도 남반부를 중심으로 목면재배가 확대되어 의복생활에 있어 모시와 삼베를 대신하기에 이르했던 것 같다. )
이에 일본에서는 쥬고쿠(中國) ,규슈(九州)지방의 守護大名 및 유력한 國人영주들을 중심으로 잇달아 사신들을 한반도로 파견하여 무역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왕조는 일본국왕(=무로마치막부 쇼군) 혼자뿐만이 아니라 사신을 보내오는 大名 , 國人들과의 무역도 그대로수용하는 외교방침이었던 것 같다. 이에 일본측 사절단이 비교적 빈번하게 자주 왕 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使送船, 興利船은 일본의 토산품과 남방(서양) 수입품을 싣고 갔으며, 그 대신에 조선왕조로부터 다양한 많은 하사품을 받았는데, 초기엔 모시,삼베 등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應永13(1406)년 일본국왕의 사신에 들려보낸 하사품 중에 종래의 모시, 삼베 이외에 '靑木綿'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 2년뒤인 오우치(大內)씨가 보낸 사신에 대해서도 '綿布'4)가 하사되고 있다. 이것은, 오우치씨가 수오우, 나카도를 중심으로 한 유력한 수호대명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왜구문제 및 무역문제등에 있어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증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점등에서 쇼군 사신단과 비견될만한 특별대우를 하여 목면을 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대명, 국인에 대한 하사품 중에는 귀중품이었던 목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초기 태조 ,정종 ,태종임금(1392~1418년)시대에는 여전히 삼베와 모시가 중심이었으나 그 이후 급속히 목면재배가 확대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應永25(1418)년부터 동 30(1423)년의 5년 동안 사이에 조선왕조의 일본 사절단에 대한 하사품 중에 목면가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이어 삼베와 모시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종전의 귀중품이었던 목면의 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점과 일본측의 목면에 대한 수요급증에 의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德3(1451)년 ○○日三州太守源貴久(島津)이 문종의 즉위를 축하하여 사신을 보내어 많은 선물을 보내었는데 그에 대한 조선왕조의 하사품이 "綿布 2,394匹"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측의 희망이 면포로 집약되고있음을 알수 있다.

  『李朝責錄』 世祖 成化3(1467)년 8월 己亥조 기사 "司○ 濟用兩司所○ 綿布則二十余万○ 綿○只二千余○는 한반도에서의 목면생산의 급증과 더불어 이에 국고비축도 목면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조선목면 성능의 우수함을 알게 되자, 일본에서의 목면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때마침 오닌의 난을 비롯하여 시작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면은 병사들의 의복을 비롯하여 제반 군사적용에 더할나위 없이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文明2(1470)년, 日本國因伯丹三州太守山名少弼敎豊도 사절을 조선으로 보내어 호키(伯○) 万福寺 수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大般若經一部,子一○ , 木綿三千○ 人參五百斤, 八木五百石,? 大○二○)를 요구했으며 , 文明5(1473)년에는 "일본국 防長攝泉四州太守大內別駕多多良政弘"이 淸水寺 再建料로서 (銅錢 ,綿○,綿布)등을 요구하여 (정포 일천필 ,면포 일천필 ,玄米 500碩)을 얻어갔다.

  이 무렵부터 大名 및 國人領主들의 대조선무역 형태가 동, 철을 조선으로 수출하고 그 댓가로 綿布를 얻기를 희망하는 형태로 일반화 되어 갔다. 그리하여 文明7(1475)년에는 京왜관무역과 경상도 浦所무역으로 지급되어 간 면포의 숫자가 모두 27,800필, 이듬해 文明8(1476)년에는 37,421필이라는 급증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점차 위기감을 느껴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왕조에 가져다준 것은 대체로 사치품이 많았으므로 이것을 목면으로 교환하는 비을을 변경하여 종전의 황금1량=면포 30필의 비율을 고쳐 1량=25필이라는 식으로 목면의 가치를 높이고, 회사품의 하사시에도 正布, 綿주 , 목면의 세가지로 주는 방식을 취하여 목면 국외유출을 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延德2(1490)년 대마도의 宗貞國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일본측은 오로지 목면으로만 받고자함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곤혹하여 공적무역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 및 기타규슈, 산인(山陰)지방과 조선정부는 원래 작은 배로서 왕래할 수 있는 정도였으므로 쌍방의 민간상인 간의 거래까지도 포함한다면 분명히 급증한 일본측의 요구가 한반도에 있어서의 내수분까지도 위협할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조선왕조가 목면의 대일수출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기 시작한 I5세기말부터 16세기에 걸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唐木純)을 수입하려는 동향이 나타나기 도 하였다

 

<에도시대이전의 목면作, 木綿織의 전개상황>

  일본국내에서도 목면재배에 대하여 전전, 탁월한 연구를 한 오노 (小野晃嗣)는관계사료를 널리 섭렵한 위에 말하기를, "草綿花는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機業중심이 구주방면에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동쪽지방에 편재하여 있음을 상기할 때 웬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자문하고. 나아가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필연적인 이유가 숨어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또 규슈방면 지역에서는 활발한 해외교통에 의하여 조선 혹은 중국으로부터 양질의 목면포가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이 양질의 수입목면에 압도되어 구주방면에서의 機業화의 발전이 동국지방보다 늦어졌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를 든다"고 자답하기도 하였다.

  오노씨는 일본국내의 목면재배가 미카와로부터 시작하여 동쪽 지역으로 확대전개되었으며 서국(서쪽)방면은 뒤에까지 우량품질이었던 唐의 목면에 의존하여 일본자체 국내목면의 생산은 늦었었다라는 기본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노씨의 '일본의 목면재배가 서국에서는 미개하고 동국을 중심으로 田개하였다'는인식은 다소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오노씨는 본인(나가하라)이 규슈지역에 대하여 제시한 전○親種의 史料. 加薦淸政의史料. 全國初見 ○田莊등의 사료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일본 국내에서의 목면재배는 규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그것은 일찍이 벼농사(稻作)가 기타규슈(北九州)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동쪽지방으로 전파되어간 것과 거의 같은 발자취를 따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거의 동시적으로 각지에서 병행하여 종자가 전파되고 이곳 저곳에서 면작이 시행되어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때 호쿠리쿠(北陸), 도호쿠(東北)방면이 다소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로서 국내목면 재배의 개시와 확대를 에도시대 전기 중심으로 보는 견해는 정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보다도 빠른 시기,즉 16세기 중엽무렵 전개된 정도를 크게 평가하여만 할 것이다.

 

                                               3. 일본의 목면보급과 재배
(1) 농서와 목면
목면재배 기술 및 경영형태를 알려주는 사료는 에도시대 이전의 것은 현재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게 목면재배에 대해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료로서는다음의 농서 『淸良記, 百姓傳記』 , 『農業全書』 , 『綿圃要務(大藏永常) 등을 들 수 있다.

  『淸良記』 (제7권 「親民鑑月集)는 잔존하는 일본 最古의 농서로서 그 성립연대는 에도시대 초기로 전반적으로 전국시대말~근세초기의 농업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5)

여기서의 목면재배는 오로지 밭작물로서 3월의 파종, 양토, 사토, 점토질의 밭이좋고 비료와 중경제초작업을 많이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6) 
백성전기
7)에서는 딘작 재배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토양은 모래, 작은 돌이 섞인 땅을 좋다고 하며 종자를 잘 선택할 것과 비료로서는 호시카(말린 멸치)가 좋으며 용수작업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고 있어8) 기내 지역에있어서의 면작보급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 농서의 집대성이라 일컬어지는 『農業全書』 의 경우 목면재배에 대한 기술이 가장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9). 稻作(3년)과 면작(2년)의 輪作재배법을비롯하여 파종량과 시비법, 용수, 제초등에 이르는 다비 다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면포요무 (大藏永常)는 에도후기의 농서로서 특히 목면재배기술에 대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단계의 목면 재배기술은 수전에 이랑을 만들어 심는 半田기술이 유행하게 되는데 ‥‥‥‥

 

(2) 전국적 재배 양상

일본인들이 목면을 알고 그 매력에 이끌리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말부터 I5세기 이 걸쳐서였다.
그 이후 일본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면을 손에 놓고자 갖는 노력을 하였다. 일본측의 너무 갑작스런 목면의 수입 증가에 당황한 조선측은 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중국의 당목면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무역방침이 조공무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지한다는 海禁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므로밀무역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초 외국의 목면수입에 의존해오던 길이 끊기게 되는 오닌의 난(1470~1480년) 전후부터 일본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목면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는 사료들이 출현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본국내 목면재배 관련 기사로서 최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문명11(1479)년의 지쿠젠쿠니 가유타노쇼 나츠쇼등연서료족주문(○前國○田莊 納所等連署料足注文) 10)
『金剛三味院文書』 -211호- 속의 "木綿壹端令賢房에進之"라는 기술을 들 수 있다. 가유타쇼(○田莊)라 불리우는 장원은 하카다 동쪽편에 있는 장원으로서 그곳의 장관이었던 나트쇼의 공문들로부터 령현방(?),이라는 인물에게 목면 일 단이 진상되었다는 것이다. 가유타 장원은 高野山글갔 삼미원의 영지로서 이 문서도 이 금강삼매원에 전래되어 오고 있었으므로 아육포 링현방도 이 곳에 거주하였던 스님이었으리라. 여기서 料足의 청산과 관련된 기술에 이어서 (送進上之土産事)라 하여 華屋釜등에 이어서 이 목면이 거론되어 있다. 즉 목면 일단을 일부러 멀리 있는 규슈지역에서 부터 보낸다는 사실은 당시의 설정상 아직도 일본 국산 목면이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일 터이다. 土産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지방의 향토 토산물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당치 수입품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던 목면이 가유타 장원이나 혹은 그 주변에서 산출되었으므로 그 고장의 자랑하는 토산품으로서 령현방에게 보내어졌던것을 아니었을까 이 사료만으로이렇게 단정하기에는 다소 불안함이 남지만 .나가하라게이지는 초견사료로 보고 싶어한다? '이어서 『山科家札記』라는 일기의長草2(1488)년 9월 1일자와 明○1(1492)년 8월 3일자의 기술에서 목면을 의미하는 '기와타와 와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래로 면(綿)이라는 글자는 모두 노에고치실로 만든 眞綿을의미하여 왔으므로 이와 그별하기 위하여 '기와타'라고 히라가나로 기술한 것 같다그리고 '와타노 아후라는 목면 종자를 짜서 만든 綿實油이다. 이 면실유는 식용인 것 같으나, 나무통七十'이라는 숫자는 너무 많은 것 같으므로 다소 의문이 있다.

어쨌던 에도시대에는 야마토 ,셋츠 가와치 ,이즈미 지역이 기술적,생산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고도의 대표적 면작지대였다. 이리하여 서쪽은 구주로부터 동쪽은 관동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에도시대 이전부터 목면재배가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역시 동북지방으로의 전개는 아직 안되었던것 같다.

 

                                          4. 목면업 전개 양상
(1) 목면의 용도

16세기 일본국내에서의 목면생산의 보급, 전개에는 이를 촉진하는 강한 수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麻에서 木綿으로라 하면 서민 의복의 재료가 마에서부터 목면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서민 복식 측면에서만 고찰하기엔 편협한 감이 적지 않다

전국시대 급속하게 목면생산이 발전하게 되는 원인에는 당연히 그 시대 특유의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國男)의 논문 「木綿以前의事」 는 그의 관점 (常民의 생활) 문제로서 논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는 목면 등장이 몰고 온 이루 다 헤아릴 수없을 정도로 깊은 영향과 의미에 대해 살펴볼 때 그 용도의 다양성 측면에서 16세기에 있어서의 구체적 조건, 특수성에 입각하여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군복으로서의 목면

.

*군복으로서의 목면----그림이 철요

문명2(1470) 무로마치 막부의 재정을 맏았던 만도코로의 집사 이세마사치가는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어 목면을 요청했으며,

  이어서 文明5(1473)년 오우미(近江) 이즈모(出雲)의 수호 교코쿠 마사즈네가 자신의 영지인 오우미, 이즈모지역이 오우닌의 난에 휘말려 전쟁터로 바뀌어 인민들이 군인으로 동원되어 농토가 황폐화되어 사람들이 조악한 갈포 종류 정도만 겨우 걸치게 되었다. 이에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는내용으로서 매우 다급하게 귀국의 면주 및 목면을 보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청원편지이다. '臣之蔽邑'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의를 취하는 문장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의 절박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펀지에서 목면의 사음용도가 군복임을 명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사료라고 말할 수있 을 것 이 다

 

진막, 식진 우직 마의 등의 용도
 군복, 무사 복장과 더불어 군용 목면으로서는 깃발, 노보리(○) ?진막(陣幕), ,?陣羽織 馬衣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시위효과를 가진 것이기도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별하거나 지휘관의 소재등을 알려주는 등등. 전쟁시에는 빠뜨릴 수 없는 표식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색채의 선명함이 요구되었다 이 점은 야나기다 쿠니오씨가 지적한 바 있으며 마포의 경우 염색이 선명한 색감을 얻을 수 없는 데에 대하여 목면은 원하는 색깔이그대로 선명하게 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진막 및 노보리등에도 목면은 적격이었던 것이었다. 이와같이 목면의 초기용도는 서민들의 의복으로서보다는 군수품으로서 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 화승총

  목면이 직접적인 군수물자로서의 성격을 띤 대표적인 예로서 種子島銃의 화승을 들 수 있다 火繩銃이란 銃身의 측면에 철확(절구)모양의 구멍(구덩이)을 가진 화약통을 붙여 바닥의 불구멍이 총구멍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며, 또 화약통에는 화약두껑이 덮이도록 되어 있었다 사격시에는 총구로부터 검은 색 화약을 총신의 바닥까지 채워 탄환을 장착하고 화약통에도 약간의 화약을 넣어 화승의 힘을 빌려 화약이 점화되어 총구 부분의 화약을 폭발시켜 발사하게 하는 것이다

  화승이란 종자도총 그 자체는 아니지만 화승이 끄져 있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다. 한편 화승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드디어 결전에이르러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화하기 쉼고 또 다소 버틸 수 있으며 간단히끄져버리지 않는 그런 것이라야만 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는 화승총의 불이 염천의 더운 날씨에는 너무 빨리 타 소진하지 않도록 우천시에는 화승의 불이 잘 붙지않거나 또는 끄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이 화승총의 화승이 처음에는 대나무 소재였으나 차차 내수성이 강한 목면제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13). 따라서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목면으로 된 화승총이 중보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범선의 범포(돛)

  목면의 용도 중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帆布이다 전국시대라는 전쟁 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빨리 대량의 물건을 신속하게 운반하는 여부는 그 승 패를 판가름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이 속도의 증가에 가장 중요한 일익을 맡은 것이 바로 목면으로 만든 돛이였다.

  慶長16(1611)년 모우리 쇼즈이(毛利宗瑞=毛利輝元) 사다메가키(定書)에 "빠른 선박은 목면돛으로 갈색 무지이다"14)라는 표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기존의 짚으 로 만든 돛과 왕골 대으로 만든 돛과 비교하여 목면 돛으로 된 선박 쪽이 속도가 빠른 것은 목면이 바닷바람을 잘 품어 달리기 쉽고 비나 바닷물에 젖어도 다른 소 재의 돛에 비하여 빨리 마른다는 점 또 조작하기 쉽다는 등의 여러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아무튼 목면 돛의 등장은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상 커다란 의미를 가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무로마치(室野) 중기이후 발달 전개된 선박의 대형화가 목면돛에 대한 수요를 더욱더 급증시키게 되었다. 즉 무로마치 ,전국시대는 상품유통이 활발하여짐 과 동시에 지방에서 도시로라는 구심적 물류유통 뿐만이 아니라 각 치방 상호간의 물자이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각 지방을 근거로 성장한 전국대명들은 군수물자 확보라는 전략상의 이유에서도 어용상인들을 고용하여 대량수송에 주력하였으므로 더 욱더 선박의 대형화가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목면돛에 대한 수요가 바로 목면 수요를 더욱 부추겼다

  
*민중의복으로서의 목면-서민의복생활 혁신

   

 (2) 목면업 재배기술

  *다비료, 다노동의 목면 재배로 생산량의 증가하여 직포기술의 발달고 염색기술의 발달을 유발함

  *사라시 기술

 

(3) 목면의 영향-서민생활을 바꾸다
농후한 상품농작물적 성격

한편 목면의 경우 삼베와는 달리 일찍부터 상품적 성격이 농후하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마의 경우, 고대에서는 自家소비분을 제외하고 유통시장에 방출된 것은 일단 용,調로서 국가로 취합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에서도 年貢이나 在家役 등과 같은 장원제적 취합이라는 형태로 변화하기는 하였으나 생산자 농민의 손으로부터 근소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직접 지방시장으로 방출되는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마쿠라시대후기무렵부터이었다. 
무로마치 전국시대로 들어서면 중앙지역의 나라사라시(奈良○) 같은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상인들이 에치고(越後) 등 특정 모시와 삼베 생산지로부터 靑苧라는 중간 상품형태로서 다량으로 사들인다는 형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유통량은 후일의 목면과 비교한다면 아직 소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저마의 방적, 직포생산능률의 비효을성이 대량생산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전국적으로 自家用 생산이 되고 있었으므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를 포함하더라도 상품시장은 대체로 협소하였던 덕이다.

  그러나 목면의 경우, 상품유통적 성격을 농후하게 띄고 있었다. 우선 목면 직물이 조세로서 직접현물 형태로서 지배층의 손에 수합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목면은 각大名등의 상품으로서 영내외로 유통되었으며 이에 대해 대명들은 목면의 역이라는 형태로 役錢을 부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는 영내 경제 정책의 관점으로부터 영외반출을 통제하기도 하고 원활한 거래를 위하여 다양한 규정을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그 전제는 일단 조세로 들어온 물품의 유통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를 비롯한 현지인들 손에서 상품으로서 유통시장에 투입된 것이었다.  원래 이 단계에서도 목면의 생산형태는 농가의 가내노동에 의한 부업적인 성격에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산규모 및 시장에의 투입량을 마의 그것과 비교하여 보면 매우 방대한 양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마는 전술한 바와 같이 겨울부터 봄에 걸쳐서 자신들의 소비분도 포함하여 1호당 생산량이 높은 직포 능력을 가진 여자 한사람에 대해 기껏해야 3~5反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그것도 에치고의 織布지역 같이 산지집중이 전채된 곳은 그만큼 전문화된 경우에 속한다. 이와 비교하면木綿織은 實綿으로부터 紡績하여, 직포하는 노동작업이 전반적으로 훨등하게 효율이 높았다

따라서 생산농가로부터 유통시장에 투입되는 목면포의 수량은, 대체로 가내부업적 생산형테를 취하면서도 횔씬 많았다. 또 그에 대한 수요도 사회분업의 진전, 도시소비시장의 확대 속에서 마의 경우보다도 휠씬 높았다.


(4) 경제구조의 변화

목면은 16세기무렵엔 일본 국내재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 전반 무렵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용도도 군수용품적 성격에서부터 저마를 대신하여 서민들의 일상의복 재료로 변모하게 되었다. 더욱이 목면은 저마와 달리, 그 재배에서 가공까지 분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 목면업의 상품경제적 성격은 주변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일본근세 사회 경제구조 변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藍作과 금비로서의 호시카(마른 멸치) 출어, 이에 따른 回船업 발달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藍作의 발달-아와(阿波)지역의 藍(남=청색염료)생산

  藍은 고대이래로 저마에 사용되어온 염료이었으나 중세말기 그 수요가 증가하여靑苧의 생산증가와 더불어 상품생산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남의 상품화는 일본이 목면시대로 돌입하여 그 목면의 염료로서 각광을 받게 되는 이후,종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목면의 경우, 紡績 ,직포 생산과정의 높은 효을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고 나아가 또 서민 의복로서의 소비가 증가하게 되자 그 염료인 남의 수요도 동시에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아와지역이 남의 주 생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급자족 및 기내지역에서의 일정한 상품수요를 충족할 생산은 종전부터 시행되어 왔으나 목면의 폭발적인 수요증가로 인하여 생산지 집중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와번은 이미 蜂須賀씨가 입국한 이듬해인 天正14(1586)년 吳服屋 마타고로(又五郎)를 屋司로 임명하여 屋役을 징수하게 하고, 寬永2(1625)년에는 '藍方役所'를설치하고 있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아와번의 재정과 관련된 중요 생산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明曆~万治연간(17세기 중엽) 무렵. 현 도쿠시마겐 이타노군 아이스미마치(德島縣板野郡藍住町)를 중심으로 이른바 藍園28개촌이라 불리웠던 지역에서는 수백 町步에 걸쳐 藍밭이 형성되었으며 延室~元祿연간(17세기 후반)에는 다른 지역으로의 판매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正德3(1713)년 간행된 책에서는 아와에서 생산된 남의품질이 야마시로(山城), 셋즈 다음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산량면에서는 아마도 에도시대 전반기부터 아와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았던 주요산지 였다

 

* 금비로서 멸치수요 증가와 어업기술 발달

  목면의 상품생산화는 그 생산 증대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비료, 즉 금비 호시카(干鑛)에 대한 급격한 수요증대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멸치수확을 위한 타국 출어가 발달하게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치바현 九十九里○, 서쪽으로는 대마도해역에 이르는 멸치어업이 전개되었다 이와같이 마른 멸치는 목면재배 증가와 더불어 대량생산되어 오사카로 집적되었다.

  正德4(1714)년의 오사카(大板) 입하 상품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그 입하량이많은 순서대로 살펴보면 米, 木綿류, 菜種, 材木, 멸치, 紙, 鐵의 순서로서 멸치는다섯 번째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正德연간의 오사카에는 쇼코쿠 가이모노 돈야(諸國買物問屋)라 불리우는 지방별 니우케돈야(荷受問屋)를 비롯하여 주요상품의 집산기능 역할을 하는 상품별전문도매상이 널리 성립되어 각각 중간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 『大阪商業史資料』 )전문 도매상으로는 毛綿 도매상 18개, 木綿 도매상 9개, 繰綿도 나카마(정확한숫자 미상),각 지방 藍도매상 18개 藍玉도매상 9개 등과 더불어, 멸치도매상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 곳의 목면지대에서 상당한 분량의 전답에 목면재배를 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볼 때 호시카의 수요급증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와지역 같은 藍作지대에서 필요하였던 호시카도 역시 오사카를 경유하여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목면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藍作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그 생산증대에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호시카에 대한 수요도 급증시키게 되었다. 이와같이기축상품으로서의 목면생산과 발달은 연이어 다른 상품들의 상품생산화에 지대한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같이 에도시대 중염 상품경제화의 물결 속에서 그 유통을 담당한 회선업도크게 발달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문 내용

 1

本邦木綿機業成立의過程」 『日本産業發達史의硏究』 ,至文堂,1941

2

전 게 서 爭白素綠(綵인가)
採考布也 赤名木綿 木綿者木名也 在大唐 取此木之中綿織爲布 其色淨白也 大宋商客多所  持來 其色多染黃 雖然本色白也 (中略) 木綿J.此朝所焉(無)之‥‥‥

3

術定生, 「明代劣딴3木補』普及4L.」 ;西鳴定生, 「中國初期熊業H形成t를』構  造」 ;西定生, 「中國初期精業市場a考奈」 (모두 『中國經濟史硏榮교 에 소수),1966, 東京  人學出版會

4

목면의 경우, 조선에서는 木精이라는 글자를 사용한 데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木綿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綿은 목면보다는 명주류를 일컫는 것 같다

5

古烏敏雄, 『日本農學史』 제1권, pp‥‥

6

淸良記』 (제7권 「親民鑑月集」 ( 『日本農業全書」 제10권 소수), pp. ,農漁山   -. 木鑛

   ÷月r)土用1=植3. 眞土 ?砂土 ?疑路tl吉. 萎』早(따. 五月雨r)內료』 L.危3 f ㄴo  業r)遲란性惡ㄴ. (뒤에 필요하면 후반부 넣을 것)

7

百姓信記

8

 백 성 전기 』 

9

木綿It作3法委Lf?Lf'(;t'美魚ㄴ 』物> 『農業全書』

10

永添慶二, 『新 ?木綿以前卵2 , 中公新書, 1990

11

李朝寶錄』 成化 6년 8월 已巳條

12

 朝鮮丁亥-應仁1: )年 而降 中原風塵 干伐團起 臣之○邑江(近江) 戰鬪...

13

安齋隨筆』 "우천시에는 대나무제 화승은 불이 끄지기 쉬우나 곤색으로 물들인 목면제 화승은 불이  끄지 않는다

14

「定書 栗屋太郎右衛門業」 『蒸霧鬪閱錄 七七』"-. 性今船憶 t約紅. 』色無紋之事

 

목화씨의 전래 우연이 아니다

김성준(수원대 사학과 교수)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 우연이 아니었다.
목면의 원산지는 인도로 기원전 8세기께에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변경에는 일찍이 후한때 광동이나 운남 지방에 전래하여 번이들에 의하여 재배되고 또 남북조시대에는 신강선 토로번의 고창국에서 재식한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이 한인에 의하여 재배된 시기는 송대부터로 보여진다.

북송 신종(1068-1085)때 광동지방에 목면이 많아 토인이 다투어 길패포(吉貝布)를 짰다 하고 남송 이종(1224~1264)때의 기록을 보면 광동이나 해남도에서 물론 복건성 천주에서도 갈패포 또는 목면이 재배되어 면포를 생산한 것을 알 수 있다.이때 광동, 복건 등지에서 재배된 목면또는 갈패포는 다년생의 목면생 즉 수면(樹綿)이었던 것 같아보인다.

목면채취 지역에 대한 논란
그러면 일년생의 목면, 즉 초명은 어떤 경로를 밟아 중국에 전래 되었을까. 초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원 세조때(1273) 발견된 농상집요로서 목면 재배법을 소개한 중국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 목면(초면)은 서역의 소산으로 근래에 협우(협서서부지역)에서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이 없다고 말한 것은 곧 목면(초면)의 동진 내지 북상을 점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농상집요는 주로 화북지방의 농업에 관한 농서라는 점이 목면재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 목면의 동진 ,북상에 관한 자료를 좀더 찾아보면 남송이 아직 강남을 지배하고 있을 때 강남땅에 초면을 많이 심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또 농상집요보다 40년 뒤에 나온 왕정(王禎)의 농서에 의하면 목면종자는 본래 남해제국 소산이었는데 후에 복건의 여려 현이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강동, 협우또한 많이 심어 잘 자라고 번성하고 있는데 본토와 다름없다.
원이 남북통일을 달성한 뒤 십수년이 지난 성종때(1294~1307) 에는 강회, 협우, 천촉(사천)으로 퍼지고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황정은 초면이 남해에서 광동, 복건으로 다시 이곳에서 절강, 강소로 북상하여 온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송,원 양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목면(초면)이 서역을 통해 협서 서부를 거쳐 본토에 전래됐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와같이 강남(화남)에서 강북(화중,화북)으로 서역에서 협서 화북으로 목면의 보급이 확대되어 가오 있었던 송말 원초에 면작은 수익이 대단이 좋은 작물이었다. 때문에 원세조는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목면의 북진정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농상집요를 편찬 목면재배법을 자세하게 소개했던 것이다. 농상집요가 편찬될 13세기 중엽에는 연경부근에 아직 목면재배가 이우러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보다 1세기가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에는 이 지방에도 면화가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문익점은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났다. 부친 숙선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하지 않고 낙향했다. 상우당실기에 숙선은 총민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청간(淸簡)하여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 칭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원 지배하에 혼탁하기 짝이 없던 정계에 몸담는 것을 기피하여 일찍이 고향(강성현)에 내려와 주경야독으로 조영히 세월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목면전래는 필연인가
문익점은 11세때에 멀리 한산에가서 이곡에게 사사했다
또 20세 때 향거(鄕擧)로서 성균관 경덕재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30세인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정몽주,임박,이존오등과 동방이었다. 태조실록에 익점이 가업을 이어서 독서하여 공민 경자(9년)에 등과했다고 한 것은 곧 그가 주경야독하는 부친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열심히 하여 가거에 급제했다는 말이된다. 따라서 문익점은 어린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하는 한편 부친밑에서 농사의 경험을 쌓았을 것이 틀림없다. 문익점이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에 사행하는 시기는 농상잡요가 편찬된 지 90년이 지난 때이며 왕정의 농서과 나오고 50년 뒤의 일이다. 13세기 후엽내지 14세기 초엽에 화중,화북지방에서 이미 초면이 재배 되고 있었음은 이 두가지 농서를 통하여 확인된 바 있고 원세조 이후 목면의 북진정책이 꾸준히 추진된 것을 감안하면 이보다 연대가 많이 경과한 14세기 중엽의 공민왕대 연경 부근에도 면화가 재배 도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면화경작법을 처음 으로 소개 한 농상잡요는 간행되자 말자 고려에 유입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농상잡요가 공민왕21년(1372)에 중간된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힘쓰는 한편 아버지 밑에서 농사에도 상당한 경험이 있던 그로서는 원에 들아가기 전에 농상잡요를 얻어 보았을런지도 모르고 목면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같이 농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고 목면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원에 들어가서는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왕정의 농서도 보고 목면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경지방에서 일찍부터 목면이 재배되고 있었던 것을 진작 눈여겨 보고 있다가 공민왕 폐립사건이 해결되고 귀국하는 길에 그 씨앗을 몰래 적취해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므로 문익점이 길가에서 목면씨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원에 숱한 사신들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목화가 유독 문익점의 눈에 뜨인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평소에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명베가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장철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민속학)

불교적 이념을 지배원리로 삼았던 고려왕조의 말엽에 수입된 주자학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세사와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의 탄생을 예고하는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표방하면서 조선왕조가 새로 건국되었으며 불교는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의 위와 같은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혁명과도 같았다. 그만틈 주자학은 당시의 사회와 생활을 뒤엎는 엄청난 힘을 몰고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의 전파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최근세에 겪었던 격동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독교와 함게 서구의 산업기술과 생활양식이 동시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주자학도 농업기술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동시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에 대한 신진사류의 관심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든다면 바로 면업과 사당제도라 하겠다. 사당제도는 바로 삶의 공간에 죽은 조상을 모시는 공간의 마련과 함께 제사를 집에서 지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제시하게 된다. 이와마찬가지로 면업도 주자학과 함께 들여와 당시의 생활양식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말엽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신진 주자학자들의 궁극적 목표의 하나는 일부 귀족들과 사팡에 집중되어 있는 방대한 토지 때문에 도탄에 빠진 민생을 되살리는 데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변화에도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당시의 옷감이었다. 이전의 옷감으로는 명주나 삼세, 모시가 있었으나 섬유질의 강도, 내구성 또는 방한을 위해서는 비실용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들 보다 더 좋은 무명이나 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들은 당시 원나라에서 독점적으로 고려를 비롯해서 외국에 수출했던 전략수출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화씨는 절대로 외국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다량으로 생산되어 값이 쌌던 것도 아니었다. 수공으로 조금씩 생산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무명이나 솜으 구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와 생활의 격차는 컸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진주자학자의 선두주자였던 문익점은 민생문제 해결책의 하나로서 목화의 도입을 적극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오즘의 관점에서 보아 산업스파이 역할을 스스로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목화씨를 붓대롱 속에 숨겨서 들여온 것이다. 목화의 도입에 의해서 나타나는 변화는 내용과 차원으로 보아 크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농경과 가사체계, 다른하나는 일상생활, 또다른 하나는 사회의 변화가 그것이다. 목화는 이렇게 사회와 생활전반에 걸친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생활문화의 혁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목면제배가 가져다준 경작체계의 변화
이 혁명은 의료경작물로서 목면이 본격적으로 채택됨으로써 비롯된다. 목화의 등장으로 이전의 뽕나무와 삼 모시풀로 이어어진 경작체계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일정한 면적의 경작지가 확보되어야 하는 여러해 살이인 봉나무와 모시풀 재배가 한해살이인 삼과 목면으로 대체될 때 초래된 경작체계의 변화는 상당히 컸다.  한해살이 경작물들은 윤작이나 간작이 가능하며 또한 목화량의 필요에 따라 경작지를 넓혔다 좁혔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의 경작체계와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주와 삼베, 모시 등 다른 의료 경작물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옷감 또는 여름 옷감으로 서의 가치와 효용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적인 수요가 있다. 따라서 양반계층이나 도시지역부유층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특산물로서 여전히 생산되고 있었다.  이는 무명도 마찬가지다. 현재 외국에서 다량 생산되는 목화와 기계섬유 또는 합성섬유로 인해 목화재배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졌지만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특산물과 문화재의 상관관계를 이해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혁명은 목화를 이용 일상생활에 유용한 재료를 만들어 내는 일에서 나타난다.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업은 의식주를 가족단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농업이나 가사노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가족 모두가 농업이나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가족구성원에 의해서 식량과옷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옷의준비는 식량 마련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데도 명주 삼베 모시의 섬유질이 약해 한참 바쁜 때인 여름철에도 조심스럽게 다룰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화가 도입되기 전에는 옷감이나 옷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노동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특정한 계절에 여성들이 치려야 할 가사노등의 부담은 지나치게 과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서 그 질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기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섬유질이 질긴 솜을 대상으로 한 노동은 비교적 손쉬웠을 뿐 아니라 특정한 계절에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여성은 옷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농번기를 피해 짬이 날 때 옷감을 만드는 일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솜과실, 그리고 옷감을 빠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솜과 실과 옷감의 활용은 옷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생활의 전반에 걸쳐 그리고 사회제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삶의 방식제공
이 영향은 이전의 생활이나 사회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삼의 방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먼저 목화의 씨를 뽑기 위해서 씨아라는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 졌다. 그밖에 솜을 타는 활 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가락과 실의 날을 고르는 날틀등 새로운 도구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이때 무명을 짜는데 사용하는 틀은 이전부터 사용하던 베틀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됨에 따라 명주와 삼베와 모시를 짜기 위해서 사용되던 옛도구들은 특산물로 남아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외국에서 기계로 짠 광목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목화재배의 경제성이 사라지게 되자 그에쓰이던 도구들이 쓸모없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이런도구들이 지금은 민속박물관의 수집품으로 전시되어 한때의 기술수준과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솜으로는 이불과 요를 만들 수 있어 일에 지친 육체의 피로를 풀고 원기를 회복하거나 추위를 이기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서민의 민생에 기여한 목화의 효용성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불과 요를 올려놓는 이분장이나 반닫이 같은 기구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흰천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방안의 장판고 도배도 급속하게 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수있다.
솜의 방한기능은 옷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솜옷, 누비옷으로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갑옷이나 방탄복으로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기름기를 뺀 탈지면은 흡수력이 높아 지혈이나 외과 치료용으로 쓰였으며 등과 초의 심지와 함께 화약이나 군사용탄환의 심지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문화영웅
무면실은 질기고 오래가는 내구성 때문에 일상생활에 상당히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 먼저 옷을 만드는 바느질에 쓰이는 것 이외에도 노끈과 멜빠으로도 이용되었다. 따라서 빨랫줄로 사용하나 돗자리 또는 발을 엮고 책을 묶는 데에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노끈을 묶어 만든 멜빵은 물건을 담는 자루나 보자기와 함께 보부상들의 필수적인 휴대품이었다.

그뿐 아니라 실과 노끈을 이용하여 만든 낚싯줄과 그물로 어로활동에 획기적인 발달을 가져오도 했다. 이전까지는 자연조건을 활용하던 어로가 그물이나 낚시라는 인공도구에 의해서 급속도의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강가와 갯벌 또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생활공간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밖에 그물은 사냥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물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생활영역을 넓혀 풍부한 삶의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목화로부터 시작된 혁명탓이었다. 목화의 응용성과 실용ㅅ겅은 농업이외에도 ㅇ업과 상업 그리고 사회제도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무명옷감의 실용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특히 방한복과 노동복으로 서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한양 육주비전이 하나로서 면포전이 설립되어 무명은 중요한 상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이후에 무명은 정포라고 하여 세금으로 받아들이기도 할 정도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그 대량생산을 위한 사회적욕구는 엄청나게 컸다.
이러한 점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영국산업혁명이바로 기계무명(광목)의생산에 의해서 본격화된 점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작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명의 대량생산은 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모두가 갈망하던과제의 하나였으며 무명은 꿈에 그리던 한상의 옷감이었던 셈이다 그뿐 아니라 무명조각은 수건을 비롯하여 행주나 걸레로도 활용하여 일상생활의 위생관념도 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생활문화의변화는 문익점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가치는 점점 확대되었기 때문에 세종 때에는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든 분이라는 칭호인 부민후에 봉해졌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역사상 확실한 시기에 등장한 문화영웅이었다.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옷감으로 정착

조효숙(경원대 의상학교수)

 고려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작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후 면업은 조선왕조의 면업장려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성장 발전하여 오랜 전통을 지낸 마직업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견직업과 함께 조선시대 의료산업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문익점에 의해 유입된 면종자는 지금이 산청지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으나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으므로 국가로부터 적극적인 권장정책은 취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면 종자 유입후 고려말까지의 27년 동안 면포의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 들어 적극화한 면업장려정책
조선왕조로 접어드는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말(1418)까지의 27년은 면포가 대중의 보편적 의료로 정착되는 시기다. 국가에서도 면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면업을 장려하면서 목면 종자의 도입자인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먼저 문익점이 죽은 이듬해인 태조7년(1399)에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으로 증직했다. 또 태종 10년(1410) 사간원이 올린 시무8조 중 위로는 경사에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 까지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의 원료로 쓰이는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전을 지급하자는 건이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화 같이 문익점이 공로에 대한 뒤늦은 표창은 그당시 비로소 목면이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여 국민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고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면업을 장려하려는 국가정책을 반영했다고 하겠다.
태종대의 더욱 적극적인 목면권장정책을 보여주는 예로는 동왕9년(1409)에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한옹이 올린 조목을 들 수 있다. 그는 면포전에 대하여 쌀로 납세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주청했으며 태종은 그와 같은 특혜조치를 허락했다.
이와같은 국가의 권면정책이 촉진제 역할을 하여 면화재배는 서서히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아직 면포의 생산은 충분하지 못했고 태종17(1417)까지도 명과의 교역에서 말을 수출하는 대가로 여전히 많은 양의 면포가 수입되었다.
세종대가 되어 이제 면업은 정착기가 지나고 발전기에 접어든다. 세종7(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의 109개군 현 중에 88곳에서 전세(田稅)로서 면포를 납부했고 83곳에서 목화를 납부했을 정도로 15세기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목화와면포가 생산되었다.
그후 7년뒤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토의목면(土宜木棉)이라 기록된 면의 산지명은 경상도 뿐만 아니라 남한 전역에 급격히 확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남지방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세종은 면화 재배를 기후 풍토가 잘 맞지 않는 서북지방에 까지 보급시키고자 노력했다. 세종17년(1435)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달라 한전(旱田)을 경작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면종자를 거두어 함길도에서 면화를 키우도록 했다. 다음해 역시 함길도 감사에게 목면종자를 보내어 재배법을 시달하고 먼저 관가에서 시범을 보여 일반 농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북방지역의 목면재배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기후가 한랭한 북방지역에 면업을 확산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왕 28년(1446)에는 평안 함길도 관찰사에게 목면 경작을 장려했고 평안 함길도내에 거주하고 있는 하삼도인으로 하여금 목면을 경장하게 하고 차츰 원주민들도 면업을 보급시키도록하는 등 국가의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동왕6년(1475) 영안(永安) 평안 황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토록 함으로써 북방지역의 목면 보급을 위해 일관된 국가정책을 폈던 것이다.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화의 특산지로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가기록되어 재배가 평안도까지 확산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작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양의 면포가 일본, 유구 등지로 수출되었다.

삼남에선 면포가 대표적 토산공물로 책정돼
면업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은 산업경제구조이 카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계속되는 면업의 확산으로 의료산업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삼남지방 일대에서 오랜 전틍을 이어온 마직업은 면화재배가 어려운 서북부 지방으로 옮겨지고 면포가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었다.
예종 원년(1469) 6월에 공조판서인 양성지는 공물을 지역적으로 배정할 떼에 각지방의 토산에 따라 하삼도에서는 면포 평안 황해도에서는 명주 함길,강원도에서는 마포, 충청도임천,한산에서는 저포를 납부하게 하자고 청했다.
경상,잔라,충청도 등지에서 면호를 대표적인 토산공물로 책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예종 원년께에 이르러 면포가 남한 일대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의료로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로 볼 수 있다. 16세기에 저술된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평안도에서 42개군현 가운데 39곳이 함경도에서는 22개 군현이 전부 그리고 황해도에서도 24개 군현들 가운데 14곳에서 마포가 생산되었던 점은 마포 산지의 이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면화 재배는 계속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에서 당시 전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면직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서에서 생산된 면포는 가볍고 고우나 약간 약하고 영호남지방산은 질기고 견고하나 투박하며 경기지방에서 나는 것은 고양 송도에 나는 것을 가장 높이친다 둘째 면포가 조선대 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 사용되었다 면포는 견직물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나 실용적이었다. 저마다가 하복재료로서, 견직물은 동복재료로 적합한데 반하여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는 의료였다. 그외 흡습성이나 보온성이 뛰어나 내의, 버선, 침구까지도 주로 면직물이 사용되었으니 면포의 국내수요는 실로 막대했다.
면포가 의료로 사용되었던 실례로서 태종10년에 위로는 경사에서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상의하상의 의료로 면포를 보급한 공로를 높이 기리어... 라고 한 것을 들 수 있거니와 이것은 당시 의생활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태종대까지는 목면이 상류계층의 의료로 쓰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여진의 사신들에게 몇차례에 걸쳐 목면옷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종16년(1416)에는 석자의 연을 두를 때 잠실의 공력이 매우 어려우니 이제부터 목면으로 대신하고 각전의 자리에 두르는 연도 비단을 쓰지 말고 압두록색 칠승목면을 사용하며, 동왕 18년(1418)에는 예조에서 혼인하는 사람의 금침을 토산인 주(紬;명주)와 면포로 하라는 사의(事宜)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서민들의 경우 이미 목면을 의료로 사용했으나 상류층에서는 의복보다 침구와 같은 생활용품부터 목면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면포는 상류증 의복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종 27(1445)에는 6명의 승지에게 압두록 면포와 홍주(紅紬)를 한필씩 하사하여 중국 체의의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했다. 다음해는 집현전으로 하여금 복색상정조건을 의논하게 했는데, 제1조에 공(工) 상(商) 천예(賤隸) 향리(鄕吏)는 목면 면주 저포를 8승이하를 쓰도록 명시한 점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에게 목면이 일반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8승 이상의 고운 목면도 많이 통용되엇기 때문에 이와같은 규정이 설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종대에는 명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사신들과 그당시 최상의 권위를 가졌던 수양대군에게도 면포로 만든 각종포류(布類)를 하사한 점으로 보아 면포는 이제 관리나 왕족의 의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면포는 왕족으로부터 천예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의료로서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복식유물중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의 출토품에 무명옷이 많이 보이며 특히 임란중에 사망한 사람의 유물은 거의 무명으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임란중에 전사한 김덕령장군의 복식이나 김함의 복식등에는 속옷은 물론 겉옷인 포류도 무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단옷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무명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재 면포는 외국무역 및 국내시장에서 중요한 거리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즉 면포는 세종이후 성종 중중에 이르기까지 명 여진 일본 등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 것에 대한 지불을 충당했고 특히 대일무역에서 면포의 수출량은 막대했다. 그리하여 조선조 대외교육에 있어서 지불수단의 주중을 이루는 대표적인 수출품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세종 이후 국내 유통경제에서 마포를 대신하여 화폐의 역할을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시장을 기점으로 유통이 일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에는 쌀을 거래하고 있는 군현의 수가 253곳이었는데 비해 면포가 거래되는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으며, 명주는 73곳 저마포는  175곳으로 이에 훨씬 못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촌 수공업으로 발전한 면업은 염업,광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무명베 길쌈의 현주소

-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고부자

1995년 8월 현재 목화를 심는 곳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문익점 면화시배지와 경남 의성군 금성면 대리, 목포농업진흥청 시험지, 전남 다시면 신풍리 그외 시골 노인들이 이불솜을 마련하느라고 특별히 심는 정도이다.
"노인들이 미영베 안하면 죽는 줄 알았다" 고 할 만큼 무명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의료이며 부업이었다.
무명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간혹 시골에서 노인들에 의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전남 나주군 다시면 동당리에서 노진남(59세)씨와 동서 김흥남(56세)씨에 의해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다.
노씨는 시모 김만애(1907년생)씨의 뒤를 이어 1990년에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121호 나주의 샛골나이(길쌈)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노씨는 너비 35cm짜리 9세를 짜는 정도이나 판로가 없으므로 1년에 약 5~6필 정도 짤 뿐이다. 이것도 기능보유자이기 때문에 국가에 출품해야 할 때나 겨우 짜고 있다.
다행히도 금년 여름에 국립민속박물관의 요청에 의해서 약 1개월간 노씨와 김씨가 씨앗기.고치말기,물레잣기, 베짜기, 등 베짜기 과정을 시연하여 관람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명길쌈은 나주 샛골나이가 유명했다. 샛골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의 지명이며 나이는 길쌈이란 뜻이다. 무명은 닷새에서 열닷새까지 짰으며 아홉새만 넘으면 고급이라 하여 주로 남성용 외출복으로 쓰였다.
현지에서 무명값은 1필(20자 너비 35cm)에 1960년대 말에는 8승이 1000원, 12승은 1500원 1995년 7월에는 8승모(반)에 250000원에 거래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목화 재배나 무명길쌈은 다른 천연섬유인 삼베나 모시 명주에 비해 전승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수공이므로 재배 제작과정이 힘들고, 둘째는 수공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고 따라서 판로가 없기 때문에 생산할 의욕이 없게 되었다. 솜옷이나 솜이불에 쓰였던 목화는 다른 대치 물건들이 많으므로 필요없게 되었으며 무명은 기계로 짜내는 다양한 면류에 의해 설자리를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지정된 기능 보유자는 나이가 들었고 후계를 이를 젊은 연수생도 없다. 따라서 더 이상 무명길쌈에 대한 기대는 희박한 실정이다. 더구나 값싼 중국 솜과 무명의 범람은 더욱 큰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무명베짜기의 공정

 고부자(단국대 석주선 박물관) -일부 발췌한 내용-

씨앗기
(씨빼기)

목화송이에서 솜과씨를 분리하는 일로서 잘 말린 목화송이를 씨아에 물리고 손잡이를 돌리면 씨는 가락앞으로 떨어지고 솜은 뒤쪽에 쌓인다 1940년 이후는 솜틀집에서 뽑아다가 사용했다.

활타기
(솜타기)

목화를 부드럽게 펴는 작업으로 도구는 대나무를 활 모양으로 휘어서 만든 활을 이용한다. 씨아에서 씨와 분리된 솜을 자리에 놓고 한 손에 활을 들고 반대 손에는 활꼭지(박달나무로 만든 손잡이)로 활줄을 퉁기면 진동에 의해 솜이 뭉게구름처름 부풀어 오른다. 1940년대 이후는 솜틀집을 이용했다.

고치말기

: 실을 빼낼 고치를 마련하는 작업으로 고치를 말 때는 말대와 말판이 필요하다 말대는 고르고 긴(길이 40cm에 굵기 1cm정도) 수수깡으로 했다. 말판은 빨래다듬이판이나 뒷박등 편편한 것을 사용한다. 판위에 솜을 얇게 펴고 수수깡대에 말고 , 솜은 빼내서 가지런히 둔다 고치는 길이 30cm에 굵기 1.5cm 정도인 것이 좋다

물레잣기(실뽑기,
실잣기)

실을 길레 뽑아내는 작업이다. 먼저 짚껍질 구멍에 가락(길이 30cm의 날카로운 쇠꼬챙이)을 꿰고 물래를 고정시킨다. 말아놓은 고치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물레손잡이를 돌리면서 실을 뽑으면 가락에 실이 감기는데 이 감긴 실을 댕이라고 한다. 물레잣기는 무명생산에서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과정이므로 능숙한 사람이 했다. 물레잣기를 할 때 고치를 풀어내는 것과 물레를 돌리는 회전속도 등 기술자의 솜씨에 의해서 실의 굵기가 판가름 나며 이는 품질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날뽑기
(무명날기)

날실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때 짜고자 하는 길이를 가늠한다. 댕이에 감긴 실을 고무레(날틀)구멍에 꿰고 한 쪽에는 큰 소쿠리를 놓고 고르게 뽑아낸다. 고무레 구멍은 더 많은 것도 있으나 10개 짜리가 앉아서 하기에 알맞다 뽑은 날실은 엉키지 않게 사린다.
실익히기 : 뽐은 날실은 강도를 높이고 굵기를 고르게 해주기 위해서 익여햐 한다. 먼저 물과 쌀 한움큼을 손에 넣고 끓인다. 물이 끓으면 뜨거울 때 날실을 푹 담그고 풀물이 골고루 적셔지도록 주무르고 자근자근 방망이 질을 한다. 골고루 잘 젖었으면 두 사람이 코를 내어 마주 잡고 물리글 짜낸 다음 잘 털어서 말린다.

바디에
실궤기

모든 처리를 거친 날실을 베틀의 바디구멍에 한 올씩 꿴다. 이때 몇 세짜리 베를 짤 것인가가 결정된다. 반대쪽 끝에는 도투마리를 연결시킨다.
베메기(올매기) 바디에 올린 실을 틀에 올리기 전에 마지막 손질을 거치는 과정이다. 이 때는 왕겨로 겻불을 지피고 날아놓은 실과 솔 풀 토투마리 끄싱게 뱁댕이 등을 준비한단베를 맬 때는 넓은 마당에서 하는 데 바람이 불지 않고 햇빛이 너무 쨍쨍하지 않는 날이 좋다. 바라밍 불면 재가 날려 실이 타거나 더러워져서 좋지 않고 햇빛이 강하면 실올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 한쪽에다 도투마리를 설치하고 반대쪽에는 날아놓은 실뭉치를 둔다 실은 풀을 먹이는데 실 아래는 겻불을 은근하게 지펴둔다. 풀을 먹이는 이유는 실이 강도를 높이고 짤 때 실이 엉키지 않게 하기위함이다. 풀은 쌀로 묽게 밥을 하고 풀솔로 으깨어 부수면서 쑨다. 풀칠하고 손질이 된 실은 도투마리에 감는데 감을 때는 실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가는 뱁딩이(대나무를 쪼개 만든 막대)를 사이사이에 넣으면서 하다.
베메기는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공동작업으로 이루어 지는데 특히 마지막 손질작업이므로 기술자를 모셔다 한다. 보통 두 사람이 하며 세사람이 있으면 능율이 오르고 이상적이다. 기술자는 풀칠하며 손보고 나머지는 도투마리감기나 끄싱게쪽에서 실을 적당히 푸는 등 보조역활을 한다.

꾸리감기

베를 짤 때는 날실과 씨실 두가지가 있어야 한다. 날실은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고 씨실은 폭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씨실은 북에 넣어서 짤 실이며 북에 넣도록 감은 씨실을 꾸리라고 한다. 꾸리는 길이 20cm 굵기 1.5cm 쯤 되는 전대(시누대)에 감으며 감은 실의 길이는 14cm에 굴기는 5cm 정도가 된다.
꾸리에 실을 감을 때는 한손에 전대를 잡고 이 전대를 돌려가면서 한다. 꾸리에 감는 시실은 날실보다 좀 가는 실로 하며 한핑을 짜려면 꾸리 6개 정도가 든다. 다 감은 꾸리는 전대를 뽑은 다음 맹물에 넣어 삶든가 물에 푹 적신다. 이렇게 해야 실이 굴기도 가늘면서 고르고 또 질겨진다.
꾸리는 베를 짤 때 북(길이 37 너비7.5 깊이 5cm에 홈구명 길이 16.5 폭6.5 깊이4cm 정도)에 넣는데 이 때도 축축하게 물기가 있어야 짜기 좋다. 물기를 오래 유지하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시누대 잎에 싸둔다 요즘은 비닐로 하고 있다. 짜다가 물기가 마르면 물에 적신다.
베를 짤 때 꾸리실은 안으로부터 풀려나온다 짜다가 실이 끊아지면 꾸리 안쪽 구멍속으로 나락 털어낸 꼭지를 밀어 넣어서 조심스럽게 더듬으면 실이 딸려 나온다.

베틀에
올리기

베매기가 끝나면 베를 짜기 위한 설치를 하는데 이를 베틀올린다고 한다 베틀은 주로 여성이 거처하는 방한 구석에 자리잡는다.
베짜기 앉을게(의작)에 앉아서 북을 씨실사이로 양손을 번갈아 가며 집어 넣으면서 짠다 짜는 대로 올간격이 고드로록 고르도록 바디집으로 탁탁 쳐준다 오른쪽발은 끄싱게에 꿰어 북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앞으로 놓았다 잡아 당겼다 한다

베틀
내리기

베가 약 두뼘 정도로 짜지면 밀청대로 도투마리를 쳐서 실을 풀고 배앞 허리에 맨 말코에 감으면서 짠다 대개 한필이 되면 짠 베를 베어 내리는 작업이다

마전하기

베틀에서 내린 베를 옷감으로 사용하려면 불순물이 많이 붙어 있으므로 표백하고 빨아야 하는데 이를 마전이라 한다. 마전하지 않고 베틀에서 내린 베를 깃베라 한다 깃베는 초상이 났을 때 상주나 복친들이 상복을 만들기도 했다. 마전을 잿물로 했다. 잿물은 콩대를 태운 재로 내린 것이 제일 좋다. 잿물을 무명사이사이에 고르게 적신다음 시루에 넣고 찐다(익힌다고 한다) 시루에 넣고 익힉때는 김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시루떡을 찔 때처럼 가루로 시루테를 붇인다.
잘 익힌 것을 꺼내서 방망이로 때리면서 빤다 잘 익으면 베에 묻은 목화딱지가 떨어져 나간다. 잿물에 익힌 베는 깨끗이 빨고 맑은물에 3~4회 담그면서 잿물기가 다 빠지도록 우려내면 하얗게 바래지면서 옷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요즘은 표백제에 가루비누르 타서 삶는다

 

목화씨 전래와 정천익(木棉事蹟과 正史의 차이)

-성대 명예교수 민족문화추진회장 벽사 이우성(李佑成)  -1967년 3월25일 동아일보 발표 논문임

우리는 면화(棉花)를 말할 때에 곧 문익점을 생각할 정도로 문익점은 유명하고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면(木棉)의 종자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지고 와서 목면업 발달의 계기를 마련해 준 분이 바로 문익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면업의 발달은 종자의 전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와 토양이 다른 데다가 재배의 방법도 아는 바 없었던 당시에 있어서 목면의 배양번식(培養繁殖)이 매우 힘드는 일이었을 것이고 배양번식이 성공된 후에라도 목면씨를 골라 내는 것, 베를 짜내는 것, 등의 기구의 제작 및 기술적 과정이 모두 백지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지난(至難)의 작업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오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촌에 세워진 문익점의 면화시배사적비의 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목면화를 보고--그 종자(種子)를 필관(筆管)에 넣어 휴래(携來)---丁未(1367)2월에 환국(還國)하여 소거(所居)하시 배양리에 식수(手植)하니 처음은 토의(土宜)를 몰라 조습(燥濕)을 가려심고 그 영고(榮枯)를 보아 배양의 묘(妙)를 얻어 3년 만에 번성하여 드디어 전국에 퍼지니---후에 선생의 손 정헤공(靖惠公) 래(萊)는 소차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군수 영(英)은 직조(織造)의 요(要)를 얻어 이를 문(文)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전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즉 이 비문에서는 목면의 종자의 전래는 물론이고 그 배양번식이 모두 문익점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고 뿐아니라 소차, 직기(織機)등의 기구의 제작은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에 의해서 이룩된 것으로 말해 놓았다.
이것은 결코 이 비문의 찬자(撰者)가 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면의 배양, 번식에서부터 직조(織造)의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천익의 공로임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실패한 목면의 배양을 정천익이 그 번식에 성공해낸 것이라든지, 지나가는 호승(胡僧)에게 성관(誠款)을 다하여 기구제작의 방법을 알아낸 것이라든지, 가노(家婢)에게 가르쳐 베를 짜내는데 성공해낸 것 등은, 모두 정천익의 뛰어난 지혜와 참담한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더욱이 그는 사리사욕에서가 아니고, 오직 목면업의 보급에 힘을 써서 그와 같이 빠른 시일 안에 일국(一國)에 혜택을 입히게 되었으니, 그는 정말 국리민복에 헌신적 희생심을 가진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그의 생거지는 진주 사월리였다. 그는 전객령으로 치사(致仕)한 후에 고향에 돌아와 퇴헌이라고 호(號)하고 송죽(松竹)속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사적은 그의 후손들이 편찬한 청계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지방인사들은 그의 인품과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주 서쪽 마동리에 청계서원을 세우고 향사(享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문익점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정천익도 망각(妄却)된 인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정천익의 갸륵한 업적이 타인의 업적으로 오인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덮어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관리자의

의문

저는 역사에 어둡지만   정천익님은 우리의 외할아버님이 되시니 그분의 공과 함께 문익점선조님의 공로가 함께 되어야 진양정씨나 남평문씨 모두에게 명예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천익님의 공로인데 문익점이 공을 가로채고 있다고 주장하시는데 반문하겠습니다.

고려사의 문익점편에는
목면(木綿)의 씨를 얻어 돌아와 그것을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었다.
처음 그것을 배양하는 요령에 밝지 못해서 거의 다 시들었고, 단지 한 줄기만 살아 남았던 것이 3년이 되자 드디어 크게 번식되었다. 그 씨를 빼는 수레와 실을 켜는 수레는 다 정천익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

왜 문익점의 열전기록에 이런 내용을적었을까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합니다.
위의 내용이 바르다면 고려사 열전에 정천익 편을 만들고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역성혁명의 기초인 전제 개혁에 반대하였고 역성혁명 후에도 협조하지 않음에 대한 반감으로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가 왜곡되었음을 조사하여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억지인 듯 합니다.
5.16혁명에 가담하지 않거나 반대세력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에
○70세인 1400년 2월 8일에 돌아가니 5월에 예장으로 장례하였다.
   사후에 참지의정부사, 에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증직되고 강성군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가정대부 의정부참지정사를 추증하고 갈충보국 계운순성 좌익택중광리 정량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시호를 충선이라 하고 부조묘를 세우라 명하였다.
○세종대왕은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로 봉한 기록이 실록에있습니다
.

불사이군을 주장하고 조선에 협조 않은 문익점을 포상한 것은 공이 덮을 수 없이 큰 것 입니다.
청계지에 의하면 "정천익님은 과거에 장원하시여 벼슬을 하시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데
공적에 대한 기록이나 은전의 기록이 있나요? 단언 하건데 못 찾을 것입니다.

태종원년의 전교에서.
문익점의 자손은 문관(文官) 무관(武官)에  두루 들게 해서 계급의 차례를 거침이 없이 등용을 하고,비록 외롭고 가난한 자손이나 먼 자손이나 서자(庶子)의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군역(軍役)에 넣지 말고, 혹  관청의 종이 되었거나 개인의 종이 되어 있거든,남녀를 막론하고 다 같이 속량함을 면제하여 억만세에 이르도록 그 은전을 변동하지 않을 일이다.  라고 한 후에도 위와 유사한 전교(왕명)가 조선조에서 15회나 내려졌는데 목화씨 몇 개 갖여온 공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베 대중옷감으로 정착

조효숙(경원대 의상학교수)

 고려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작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후 면업은 조선왕조의 면업장려정책에 힘입어 급속히 성장 발전하여 오랜 전통을 지낸 마직업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견직업과 함께 조선시대 의료산업에서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문익점에 의해 유입된 면종자는 지금이 산청지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으나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기였으므로 국가로부터 적극적인 권장정책은 취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면 종자 유입후 고려말까지의 27년 동안 면포의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왕조 들의 적극화한 면업장려 정책
조선왕조로 접어드는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말(1418)까지의 27년은 면포가 대중의 보편적 의료로 정착되는 시기다. 국가에서도 면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면업을 장려하면서 목면 종자의 도입자인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먼저 문익점이 죽은 이듬해인 태조7년(1399)에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으로 증직했다. 또 태종 10년(1410) 사간원이 올린 시무8조 중 위로는 경사에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 까지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의 원료로 쓰이는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전을 지급하자는 건이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화 같이 문익점이 공로에 대한 뒤늦은 표창은 그당시 비로소 목면이 널리 재배되기 시작하여 국민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고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면업을 장려하려는 국가정책을 반영했다고 하겠다.
태종대의 더욱 적극적인 목면권장정책을 보여주는 예로는 동왕9년(1409)에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한옹이 올린 조목을 들 수 있다. 그는 면포전에 대하여 쌀로 납세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주청했으며 태종은 그와 같은 특혜조치를 허락했다.
이와같은 국가의 권면정책이 촉진제 역할을 하여 면화재배는 서서히 정착되어갔다. 그러나 아직 면포의 생산은 충분하지 못했고 태종17(1417)까지도 명과의 교역에서 말을 수출하는 대가로 여전히 많은 양의 면포가 수입되었다.
세종대가 되어 이제 면업은 정착기가 지나고 발전기에 접어든다. 세종7(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의 109개군 현 중에 88곳에서 전세(田稅)로서 면포를 납부했고 83곳에서 목화를 납부했을 정도로 15세기 초기에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목화와면포가 생산되었다.
그후 7년뒤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토의목면(土宜木棉)이라 기록된 면의 산지명은 경상도 뿐만 아니라 남한 전역에 급격히 확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남지방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세종은 면화 재배를 기후 풍토가 잘 맞지 않는 서북지방에 까지 보급시키고자 노력했다. 세종17년(1435)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달라 한전(旱田)을 경작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하삼도(충청,전라,경상)에서 면종자를 거두어 함길도에서 면화를 키우도록 했다. 다음해 역시 함길도 감사에게 목면종자를 보내어 재배법을 시달하고 먼저 관가에서 시범을 보여 일반 농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북방지역의 목면재배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기후가 한랭한 북방지역에 면업을 확산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왕 28년(1446)에는 평안 함길도 관찰사에게 목면 경작을 장려했고 평안 함길도내에 거주하고 있는 하삼도인으로 하여금 목면을 경장하게 하고 차츰 원주민들도 면업을 보급시키도록하는 등 국가의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동왕6년(1475) 영안(永安) 평안 황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해 삼도에 목면 종자를 나누어 보내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토록 함으로써 북방지역의 목면 보급을 위해 일관된 국가정책을 폈던 것이다.
중종 25년(1530)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화의 특산지로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가기록되어 재배가 평안도까지 확산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하여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작은 함경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막대한 양의 면포가 일본, 유구 등지로 수출되었다.

                    삼남에선 면포가 대표적 토산공물로 책정돼
면업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은 산업경제구조이 카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계속되는 면업의 확산으로 의료산업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삼남지방 일대에서 오랜 전틍을 이어온 마직업은 면화재배가 어려운 서북부 지방으로 옮겨지고 면포가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었다.
예종 원년(1469) 6월에 공조판서인 양성지는 공물을 지역적으로 배정할 떼에 각지방의 토산에 따라 하삼도에서는 면포 평안 황해도에서는 명주 함길,강원도에서는 마포, 충청도임천,한산에서는 저포를 납부하게 하자고 청했다.
경상,잔라,충청도 등지에서 면호를 대표적인 토산공물로 책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예종 원년께에 이르러 면포가 남한 일대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의료로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로 볼 수 있다. 16세기에 저술된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평안도에서 42개군현 가운데 39곳이 함경도에서는 22개 군현이 전부 그리고 황해도에서도 24개 군현들 가운데 14곳에서 마포가 생산되었던 점은 마포 산지의 이동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에도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면화 재배는 계속 증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에서 당시 전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면직물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서에서 생산된 면포는 가볍고 고우나 약간 약하고 영호남지방산은 질기고 견고하나 투박하며 경기지방에서 나는 것은 고양 송도에 나는 것을 가장 높이친다 둘째 면포가 조선대 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 사용되었다 면포는 견직물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나 실용적이었다. 저마다가 하복재료로서, 견직물은 동복재료로 적합한데 반하여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는 의료였다. 그외 흡습성이나 보온성이 뛰어나 내의, 버선, 침구까지도 주로 면직물이 사용되었으니 면포의 국내수요는 실로 막대했다.
면포가 의료로 사용되었던 실례로서 태종10년에 위로는 경사에서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상의하상의 의료로 면포를 보급한 공로를 높이 기리어... 라고 한 것을 들 수 있거니와 이것은 당시 의생활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태종대까지는 목면이 상류계층의 의료로 쓰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여진의 사신들에게 몇차례에 걸쳐 목면옷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종16년(1416)에는 석자의 연을 두를 때 잠실의 공력이 매우 어려우니 이제부터 목면으로 대신하고 각전의 자리에 두르는 연도 비단을 쓰지 말고 압두록색 칠승목면을 사용하며, 동왕 18년(1418)에는 예조에서 혼인하는 사람의 금침을 토산인 주(紬;명주)와 면포로 하라는 사의(事宜)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서민들의 경우 이미 목면을 의료로 사용했으나 상류층에서는 의복보다 침구와 같은 생활용품부터 목면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면포는 상류증 의복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종 27(1445)에는 6명의 승지에게 압두록 면포와 홍주(紅紬)를 한필씩 하사하여 중국 체의의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했다. 다음해는 집현전으로 하여금 복색상정조건을 의논하게 했는데, 제1조에 공(工) 상(商) 천예(賤隸) 향리(鄕吏)는 목면 면주 저포를 8승이하를 쓰도록 명시한 점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에게 목면이 일반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8승 이상의 고운 목면도 많이 통용되엇기 때문에 이와같은 규정이 설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종대에는 명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사신들과 그당시 최상의 권위를 가졌던 수양대군에게도 면포로 만든 각종포류(布類)를 하사한 점으로 보아 면포는 이제 관리나 왕족의 의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면포는 왕족으로부터 천예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의료로서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복식유물중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대의 출토품에 무명옷이 많이 보이며 특히 임란중에 사망한 사람의 유물은 거의 무명으로 되어있다. 예를 들면 임란중에 전사한 김덕령장군의 복식이나 김함의 복식등에는 속옷은 물론 겉옷인 포류도 무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단옷이 퇴조하고 실용적인 무명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재 면포는 외국무역 및 국내시장에서 중요한 거리물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즉 면포는 세종이후 성종 중중에 이르기까지 명 여진 일본 등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 것에 대한 지불을 충당했고 특히 대일무역에서 면포의 수출량은 막대했다. 그리하여 조선조 대외교육에 있어서 지불수단의 주중을 이루는 대표적인 수출품목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한 세종 이후 국내 유통경제에서 마포를 대신하여 화폐의 역할을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시장을 기점으로 유통이 일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초에는 쌀을 거래하고 있는 군현의 수가 253곳이었는데 비해 면포가 거래되는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으며, 명주는 73곳 저마포는  175곳으로 이에 훨씬 못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농촌 수공업으로 발전한 면업은 염업,광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민족의 은인 삼우당

조영일칼럼(국제섬유신문 발행인) 국제섬유신문(www.itnk.co.kr ) 2006년 6월5일

2006년 6월2일은 우리나라 섬유,패션 전문지의 새지평을 연 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일이었다. 단순한 본지의 창간기념행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생활혁명을 일으킨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숭고한 뜻을 담은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 대상시상식이 열린 뜻깊은 날이었다.

백성에게 옷을 입힌 선각자
정치가 혼탁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우리현실에서 충신이자 민족의 의생활을 해결한 은인 삼우당 문익점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고려말의 거유(巨儒)로 성리학의 거장인 문익점 선생은 고려 충혜왕1년 1331년 신미년에 탄생했다. 자는 일신으로 호는 사은,  삼우당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여 가문의 사랑과 향리의 촉망을 받았다. 26살에 향시에 합격하고 1360년(공민왕9년) 과거에 급제했다. 당시 장원급제는 정몽주였다. 이때 김해부 사록으로 관계에 진출한 후 성균관 순유박사(종7품)을 거쳐 중서문화성 좌정언의(정6품)에 승진했다. 1363년 공민왕12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삼우당 선생은 이듬해 10월 목화씨 10개를 숨겨가지고 귀국하게 된다. 그길로 낙향한 선생은 1365년 공민황 14년 고향인 진양 강성현에 가서 10개의 목화씨를 가지고 5개는 선생이 심고 5개는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 파종했다.
그러나 선생이 심은 목화종자는 모두 말라죽고 정천익이 심은 종자는 겨우 한그루가 싹터 살아났다. 이같이 우리나라의 목화의 재배과정에는 피나는 간난신고이 고심참담한 노력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한 한줄기의 목화는 잘 성장하여 가을에 소담한 목화송이로 피어났다. 이것을 가지고 3년간을 확대 정미년부터 향리에 분향하기 시작했다.
삼우당선생이 목화씨를 그 장인에게 주어 재배에 성공하여 조선 목화의 못자리가 된 곳은 진주목 강성현 효자리. 지금의 산청군 단성읍 사월리로 대한민국 사적 108호로 문익점 목면시배지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모든 산하가 목화밭이됐다.  목면산업은 농공 결합산업형태로서 고려말에 조선왕조의 교체혁명의 진통기에 시작되어 본격적인 개화는 조선왕조 혁명이 완성되는 태종조부터 이루어졌다.
조선왕조는 목면산업에 대해 적극적인 장려와 특혜조치를 베풀어 삼남일대에 급격히 보급 전파되었다.
세종조에는 경상,전라, 충청지역에 목면산업의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서 세조 세종 성종은 서북지방에 목면산업의 전파에 전력하여 그 결과 전국에 널리 퍼지게되었다. 목면산업은 조선왕조의 산업구조였다. 조선왕조의 의류산업에 혁명을 가져왔고 그것은 조선왕조 재정의 중추적 기둥이었으며 농가경제의 중요한 봉법보완경제였다. 특히 목면산업은 조선왕조 유통경제의 교환수단이었고 농공 결합형태의 산업이었다. 그리고 백성, 천민, 사대부 등 계급을 초월하는 평등산업이었다. 목면산업은 조선왕조 대외무역품중 왕자의 지위를 차지했다. 대일무역에서 목면을 수출하여 유황, 동, 금, 은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총과 무기 화약을 재조하여 국방에도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명주나 갈포 모시 삼베외에 마땅한 의류소재가 없어 헐벗은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충신이자 민족의 은인 삼우당 선생은 1400년 정종2년 2월8일 수70을 일기로 돌아가셨다.
태종은 전국에 전교를 내려 고려말 충신인 삼우당에게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依被生民之功)을 만세까지 이어지도록 명했고 조정에서 그 공을 높이 치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갖도록 했다. 더불어 태종은 명을 내리어 관봉과 작을 증하고 호를 내리며 사당을 세우도록했고, 논과 밭과 노비를 주어서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삼우당의 자손들에게는 문,무를 가리지 말고 등용하고 자손들이 공과 사의 죄를 범해도 벌하지 말라면서 훗일 억만년이 지나도 이같은 영을 변경하지 말라고 명할 정도였다.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 의류혁명을 가져왔고 국가와 민족에 위대한 공로를 세운 은인 삼우당선생은 섬유산업의 효시이자 아버지였다. 이같이 위대한 민족의 은인의 참뜻을 되새겨 13년전 우리나라 섬유패션산업의 명운을 좌우할 전문신문을 자임하며 출범한 국제섬유신문이 창간정신을 살려 임금을 걱정하고 부모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삼우당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상을 제정한 것이다.

삼우당은 섬유패션 노벨상
섬유,패션분야의 노벨상으로 정착한 삼우당 섬유,패션 대상은 그 취지에 걸맞게 섬유,패션산업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세운 기업인이나 공직자, 섬유,패션 유관인사를 선발하여 시상하는 권위있는 시상제도이다. 수상자 전원에게 순금메달과 상패가 수여되고 수백명의 참석인사들의 축제의 한마당으로 승화된 삼우당 삼유,패션 대상은 올해도 훌륭한 인사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2년간 친섬유 장관으로 섬유,패션 산업에 헌신해온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현 무역협회장)이 공로상을 받았고 의류수출의 기적을 올린 치신물산과 내수패션의 와지 지위에 오른 형지어패럴 최병오 회장과 동광인터내셔날 이재수 대표이사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또 의류,직물, 염색가공 업계의 대표주자들과패션경영과 디자인의 세계화를 이룬 톱1디자이너, 섬유,패선 유통혁명을 이룬 공로자 그리고 노스페이스 단일브랜드로 1억불 수출을 주도한 수출유공자, 산업진흥과 신기술 개발주역 등 18명이 영예의 삼우당 대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전원에게 다시 한번 축하와 경의를 표하면서 내년에도 이같이 훌륭한 수상자가 많이 배출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관련기사 아래에 첨부함

이듬해 10월 : 월남유배 3년이 있어 3년후라고 대종회에서 밝힘
그길로 낙향한 : 귀국후 벼슬에 잠시 있다가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사임함
문익점 목면시배지 : 현재 목면시배 유지로 명칭이 변경되어 명칭환원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슴

2006년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 · 패션 大賞

영예의 수상자 선정            
6월 2일 섬유센터 대회의실서 성대한 시상식·리셉션
섬유패션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우는  2006년 삼우당 섬유패션진흥 대상 수상자가 대상을 포함해 총 18개 부분별로 최종 확정되 오는 6월 2일 오후 3시 섬유센터 17층 대회의실에서 본지 창간 13주년 기념식과 함께 지난 2일 섬유센터 대회의실에서 성대하게 거행된다
삼우당은 문익점 선생의 아호로 본지(국제섬유신문)가 지난 1994년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재정한 이래 올해 열세 번째로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업체 및 개인에게 수여하는 명실공히 섬유패션업계의 노벨상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올해 2006년 삼우당 섬유패션진흥대상의 최고상인 대상의 최고상인 영예의 대상에는 수출부문에 최신물산(주) 김기명 대표이사, 내수패션부분에(주)형지어패럴 최병오회장 (주)동광인터내셔날 이재수 대표이사가 각각 선정됐다. 이밖에 각 부문별로 총 18명의 수상자가 선정돼 각각 상패와 함께 순금메달을 수여받게된다
올해 수상자는 각 섬유단체 및 업체의 추천을 받아 경세호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 정우영 대한직물 연합회장, 박연흠 성균관대학교수, 김호영AMC지점장 등으로 구성된 5인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됐다.

섬유패션인 한마당 축제 대성황

제 13회 삼우당 섬유 · 패션 시상식 본지(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식

섬유패션의 노벨상으로 자리매김한 제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 대상 시상식이 국제섬유신문 창간 13주년 기념식과 함께 지난 2일 섬유센타 회의실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날 시상식에는 특별공로상을 받은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前 산자부장관) 등 정부인사들과 경세호 섬산련 회장을 비롯한 전국 섬유단체장 및 상근책임자 18명의 삼우당 수상자, 내빈등 총5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섬유단체에서는 원대연 패션협회장, 방상태 섬유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윤성광 한국섬유개발연구원 이사장등의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조영일 본지 발행인은 기면사를 통해 지난 13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국제섬유신문은 앞으로 섬유패션 정론지로서 업계의 밝은 등불이 되는 선도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섬유,패션인의 대화합의 장이었던 이날 시상식의 영예와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공로상: 한국무역협회 회장 이희범  대상(내수부문):(주)형지어패럴 대표이사 회장 최병오  (주)동광인터내셔날 대표이사 이재수  대상(수출부문):최신물산(주) 대표이사 김기명  합성직물:(주)신흥대표이사 이동수 의류수출:(주)우인인더스트리즈대표이사 조수혁  패션경영인:(주)아이올리 대표이사 최윤준  패션디자인개발:(주)씨인터내셔날 대표이사 최연옥  패션진흥부문:(주)대경물산대표이사 김두철  패션유통부분:애프원(주)대표이사 박경노  패션교육부문: 사디(삼성이트앤디자인 인스티튜트)학장 원대연  섬유,패션유통부문:(주)한섬204사장 고병인   패션모델리스트부문:(주)이상봉 김인철부장 염색가공기술개발:(주)부용화섬대표이사 조헌호  수출진흥부분:(주)영원무역 김은희차장  산업진흥부문: 한국염색기술연구소 본부장 류종우  신기술개발부문: 함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조대현 

제 13회 삼우당 섬유패션 대상 시상식, 本紙 창간 13주년 기념식 소식

이처럼 성대한 행사 거뜬히 치뤄내는 저력 놀랍다" 감탄

본지 \'창간 13주년 기념식\' 및 \'제 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상\' 시상식이 거행된 지난 2일 섬유센터 17층 대회의실.
행사시간을 한시간 정도 앞둔 오후 2시를 조금 지나면서 영광의 삼우당 수상자들을 필두로 낯익은 얼굴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속속 대회의실 기념식상으로 들어섰다.
2시 50분경 공로상 부문 수상자인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前 산자부장관)이 대회의실에 입장, 먼저 와있던 섬유·패션인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어 경세호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등 12명의 섬 단체장들이 단상에 좌정했다. 개회시간 3시를 조금 앞두고 피아노 3중주의 감미로운 선율속에 18명의 삼우당 수상자 전원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단상의 귀빈석에는 조영일 본지 발행인을 비롯, 경세호 섬산련회장, 정우영 대한직물연합회장, 안영기 화섬협회장, 원대연 패션협회장, 박상태 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박풍언 의류산업협회장, 윤성광 한국섬유개발연구원이사장 등 내외 귀빈들이 자리했다. 또 단하에는 각 단체 상근책임자 및 업계 대표자, 수상자들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경세호 섬산련 회장을 비롯 안영기 화섬협회 회장, 박상태 직물수출입조합 이사장, 함정웅 염색기술연구소 이사장, 김정수 방직협회 회장 등이 보낸 대형 화환이 무대 좌우를 장식했고,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보내온 아름다운 양란 등 수십개의 난꽃 화분들이 단상 전면을 장식해 식장 분위기는 화려함을 더했다. 참석자들은 이처럼 축제열기 가득하고 정감이 넘쳐흐르는 행사장 안팎 풍경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듯 했다.
조영일 본지 발행인이 공로상 수상자인 이희범 무역협회장(前 산자부장관)에게 시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희범 회장과 경세호 섬산련회장이 수상자들에게 차례차례 시상했다.  18명의 수상자들에게 상패가 증정되고 순금메달이 수여될 때마다 하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이들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날 조영일 발행인은 기념사를 통해 \"창간 13주년을 맞은 국제섬유신문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업계의 명쾌한 비전제시, 정확한 정보제공, 정부와 업계를 향한 진심어린 충언 등 섬유패션산업 발전을 위한 전문언론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고 강조했다.
또 경세호 섬산련 회장은 축사를 통해 \"이처럼 알차고 성대한 행사를 거뜬히 치루어내는 국제섬유신문의 저력에 놀랐다\" 면서 \"국내 섬유·패션산업을 선도할 명실상부한 \'섬유전문언론의 필독지\' 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 치하했다.
시상식이 끝난후 500여명의 참석자들은 일제히 잔을 높이 들어 국제섬유신문의 창간 13주년과 제13회 삼우당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상 시상식을 다시한번 축하했다. 축배에 이어 수상자, 정부관계자 그리고 축하객들은 식장 중앙에 마련된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음식을 들면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정겨운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