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인물(15세~근세)

세손

13 13 14 15     19   16                     20                

이름

경동 치창 상행

관琯 관瓘 동도 시룡 자수 기호 학천 재도 상희 선교 희성 희순 상례 기방                

가계

감천군파 헌납공파 순질공파 감천군파     판서공파   순질공파                     순질공파                

많은 인물들이 소개에 누락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계속 보완할 것입니다

 

영해부사공 용계파

기방(文紀房 1548~) 字중율(仲律) 號농제(聾齊)

부친이 꿈에 커다란 별이 지붕에 떨어져 환하게 비추자 곁에 있던 사람이 방성(房星)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 깨어났는데, 그날 밤 아들을 낳았으므로 이름을 기방(紀房)이라고 하였다.
기방은 어려서 놀이를 할 때 죽마(竹馬)를 타고,종이를 오려 기(旗)를 만들어서 자칭 장군이라 하였으며,
뭇 아이들은 모두 기방의 명령을 따랐다.
15세때 사서를 읽다가 장순(張巡)허원전(許遠傳)에 이르자 비분강개하여 무릎을 치며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다.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말타고 활을 잘 쏘았다.
재종제(再從弟) 명회(明會)와 더불어 신묘(1591)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뽑혀 수문장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기방은 명회와 창의(倡義)하여 향병(鄕兵)을 일으켜 전라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랐다. 정유년(1597) 8월에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오자 전라병사는 순천에서부터 점차 이동하여 남원에 이르렀는데 사졸(士卒)들은 모두 흩어지고 부장(副將) 50여 명만 남아 있었으며 적의 선봉대는 점차 성 아래로 육박해왔다. 기방은 명회와 더불어 눈을 부릅뜨고 기운을 내 일에 착수하며 말하였다. “오늘 결연히 죽어 나라에 보답하리라!”
북을 치고 행군하며 남문을 거쳐 들어가니 적이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기방과 명회가 화살을 쏘아 적을 무수하게 많이 죽였다. 오른손 손가락이 모두 떨어져 나가니 왼쪽 손으로 적을 쏘았으며 왼쪽 손가락마저 떨어져 나가자 기방은 한구절을 소리쳐 읊기를 “평생 순국에 뜻을 두었던 것을 요하(腰下)의 옥룡검(玉龍劍)은 알으리라!”
명회가 이어서 읊기를“고성(鼓聲) 속에 힘이 다하니, 누가 사직의 위태로움을 구원할 것인고!”
적삼 소매에 혈서를 쓴 뒤 마침내 병사(兵使)와 더불어 싸움터를 누비다가 죽었다.
종 단쇠(甘金)가 피묻은 적삼을 가지고 시체 가운데 엎드려 있다가 몸을 빼내어 집으로 돌아가 그가 순절한 상황을 모두 말하였고, 혈서가 쓰여진 적삼으로 고산(高山)에 장사지냈다.
두 사람 모두 선무원종(宣武原從)2등에 녹훈되었고,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후에 본도의 선비 200 여명이 글을 올려 이들에게 증직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답이 없었다가
그 후, 문기방은 나라에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의마총은 주인이 숨을 거두자, 말은 주인의 칼을 입에 물고 남원에서 장흥까지 300리를 뛰어와 칼을 내려놓고 계속 울다가 죽었다. 사람들은 이로 인해 문 장군의 변을 알고 초혼장을 지낼 수 있었다.
마을 뒤에 의열사를 지어 배향했고, 말무덤에도 비를 세웠다.

 

 

상례(尙禮)

정묘호란시 의주서성의 장군으로 역전 끝에 전사
1627(인조5) 하여 훈련원 참정으로 추증 귀암사에 제향

 

 

15세 감천군파

  경동(1457~1521)  자 흠지(). 호 창계()

본관은 안동이요 1486년(성종17) 생원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1) 증광문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성균관 벼슬을 거쳐
1506년(중종1) 강원도 도사가 되었으며, 그뒤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내고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산군수() 재임 중 1510년 삼포왜란() 때는 왜구를 토벌, 공을 세우고 사성()이 된 뒤 청풍군수() 등을 지냈다.
시문(
)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창계집()》이 있다

  
15세 충선공파

    감찰공치창(致昌)  호 : 회산(悔山)

문종때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55년(단종3년) 단종의 화를 막으려다 세조7년 국형(鞠刑)을 받았으나
공신의 후예인 점을 참작해 구성으로 유배당함
문익점 선조의 기록을 정리하여 가전을 만들었다.
가전의 내용은 충선공파종회 홈페이지의 충선공&목화 메뉴의 가전에 있습니다.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회산공(悔山公) 휘 치창(致昌) 유허비명 병서
丁卯 백로절(白露節)
가수종당(嘉樹宗黨) 방(旁)후예 세훈(世勳) 삼가 지음

옛적 단종때의 참화를 어찌 차마 다 말하겠는가 마는 진정한 충과 절의를 보여준 선비는 수십 명 수백 명이었다.
혹 곤장 맞아
죽은 사람 혹은 목 베어 죽은 자 혹 멀리 도망친 자 혹은 유배된 자가 무수히 많으니 곤장에 죽은 자와 목베어 죽은 자는 사육신이라 일컬으고 높이 우러러 숭모하기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밖에 내쫓기고 유배된 자는 혹
그 사실이 있어도 이름이 없고 그 이름은 있어도 역사에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자가 허다 하니 후세에 역사를 논한 사람들이 어찌 개탄하며 슬퍼하지 않으리오?
이는 역사를 기록한 자들의 책임이며 후세에 붓을 잡는 자가 숨은 것을 들추어 내지 못한 책임 또한 거기에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회산(悔山) 문공의 경우에 대하여 깊이 개탄함이 있었다.
공(公)의 휘는 치창(致昌)이오 자는 자신(自愼)이며 호는 회산이고 성은 문씨요 본관은 강성군의 선계대로 남평인데 남평백 무성공 휘 다성을 시조로 하였다. 중세에 오면서 세계(世系)가 확실치 않음이 있으므로 고려조에 상서좌복야이신 경절공 휘 익(翼)을 일세조로 하고, 3세 휘 극겸(克謙)은 문하평장사 판이부사 시호는 충숙(忠肅)이시며, 공의 아들 후식(侯軾)은
합문지후 전중내급사 태부경이니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4대를 지나서 휘 득준(得俊)은 판도판서로 강성백에 봉해지니 시호는 의안(穀安)이요 강성으로 인적(因籍)하고, 아들 휘 극검(克儉)은 판도판서 시호 정열(靖烈)이며, 아들 휘 윤각(允恪)은 삼사우사 문한학사시니 공의 5세 이상이다. 고조 숙선(叔宣)의 호는 청도(淸道)선생이니 좌정언 헌납 시호는 충정(忠貞)이요, 증조 익점(益漸)의 호는 삼우당이니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강성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선(忠宣)이신데 나라에서 명하여 부조묘를 세웠고, 조부 중용(中庸)은 문과로 사간원헌납이시며, 아버지 승손(承孫)은 태종조에 호조좌랑이시었으며, 어머니는 숙인 밀양박씨(朴氏)로 아버지가 성검(成儉)이다.
건문 2년( 1400)은 곧 정종대왕 2년 경진 2월 8일에 공이 강성현 복문밖에 성리 세가에서 출생하심에 타고난 성품이 순후(醉厚)하고 도량이
청직(淸直)하였으며 지모(智謀)가 크고 깊었고 덕과 기량이 황중(況重)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불의(不義)를 보면 바로 잡지 않고는 그치지 않았으니 당시 친구들이 존경하고 무겁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14세 되던 계해년 봄에 양촌(陽村) 선생 권근(權近)을 찾아가 글을 배워 존심행기(存心行己)의 중요함과 고인위기(古人爲己)의 학을 배워 가슴 깊숙히 잊지 않았다. 
18세 되던 정유년에 가례(加禮)를 행하고 함양 군수 윤 미정(美鼎)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20세되던 기 해년에는 향학으로서 성균관 제생으로 들어가 근면함으로 학문을 돈독히 하고 문사와 덕행이 여러 유생들중에서 우수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35세였던 세종 16년 갑인년에는 음보로 예문관 직강이 되고 병진년에는 강성에서 여주 별묘리로 이거하였는데, 지금 번매리이다. 공이 거기서 거(居)한 후 그 증조부 되신 충선공 삼우당 선생의 별묘(別廟)를 세우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전배를 드렸으므로 세상에서 동리 이름을 별묘로 부른 것이 이 때부터였는데 지금은 훼철되어 빈터만 있다.
52세였던 문종 신미년에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고 경태 7년(1456) 병자년에는 정보(鄭保) 유계번(柳季蕃) 이증석(李曾碩) 구치명(具致明) 제공들과 더 불어 노산군(단종)을 구하려 다가 화를 입고 국형(鞠刑)에 이름에 충선공의 후예라 하여 용서를 받고 귀성(龜城)으로 유배되어 3년만에 돌아왔다.
그 후 신사년에는 삼종형 사직(司直) 휘 치수(致粹)와 더불어 한성으 로부터 고향 마을인 강성을 찾아가 증조부 충선공의 부조묘에 참 배하고 주위를 돌며 은행나무와 시초에 심었던 목화밭과 효자정비를 둘러보고
슬픈 감회에 눈물이 내려 옷깃을 적시며 시(詩)를 지었으니 
국운(盛時)은 편안 하지 못한데 남기신 유풍을 우러르며 사물을 따르도다.
동떨어진 벽지에서 조사 의 공을 기억한다(以盛時傭憬慕遣風圈事遊蒸記祖功)"

라는 구절은 조상을 추
한 것이었다.

세조 9년( 1464년)에는 증조부 삼우당 선생의 사적이 오래 멀리 갈수록 실전될까 걱정되었다. 이에 부조께서 전하신 말씀들과 가전(家傳)의 문자(文字)에서 참고하고 아울러서 사초(史抄)와 제가(諸家)들이 문헌(文獻)을 지으신 것들을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로 한 권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였으니 그 공을 어디에 비유하리오? 수백년 내려온 지금에 삼우당 선생의 도학과 공덕을 칭송하게 된 것은 감찰 회산공의 저술한 바가 아니면 어떠했겠는가?

슬프다. 공(公)은 증조부 충선공께 성을 다하여 그 공을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하신 분이시며 충의에 격(激)한 마음으로 다시 화를 입게 되었으니 실지로 명교(名敎)를 백세(百世) 후에까지 세운 바가 있으신 분이다. 그러나 공(公)과 같은 분은 단종조에 충의의 선비로 그 사실도 이름이 있는데 역사에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것은 어찌 후인들의 애통함이 아니겠는가?
공이 돌아가신 때는 성화 성종 5년(1474)이었는데 향년은 75세였고 장지는 고향 강성현 북문 밖 석리의 산경좌원(山庚坐原)에 장사지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겸(謙)은 포천 현감이고, 다음 상효(尙孝)이니 만호이며,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별묘리는 지금 번매리인데 후손이 세거(世居)하며 공의 유허의 감회를 차마 잊을
수 없어 장차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기 위해 후손 병학(炳學)군으로 하여금 방손 원근(愿根) 씨가 지은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請)하므로 의리상으로 보아 감히 사양치 못하여 글을 짓고 삼가 명(銘)한다.  (중용-승선-致昌)

 

16세 순질공파

   경숙공(敬肅公)  상행(尙行) 호 : 월곡(月谷)

일찍 성균생원에 올라 권극중  방하에서 급제한후 용담현령과 예조참의 
능주에 처음으로 입향하시고 묘소는 능주 춘양면 진곡

예조참의 증참지의정부사 휘 상행(尙行) 묘갈명 병서
무진(戊辰) 10월 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 지음  18대손 병식(丙植) 삼가 세움

남평문씨는 고려의 무성공 다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몇 대를 지나 충숙공 극겸(克謙)이 있고 또 몇 대(代)를 지나 삼우당 부민후 익점(益漸)에 이르러 고려의 시대에 크게 유명하였다. 부민후의 현손에 상행(尙行)이란 분이 있으니 호(號)가 월곡(月谷)으로 바로 공(公)이다. 증조(曾祖)는 중성(中誠)이니 증(贈)병조판서요 시호는 순질(純質)이며, 조부는 화(和)니 호(號) 만은(晩隱)으로 증지의정부사요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아버지는 염(瑞)이니 이씨조선(李氏朝鮮) 태종(太宗) 때 정읍현감(井邑燃監)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증직받았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칠원윤씨(漆原尹氏)니 사간원정언(司談院正言) 신필의 딸이다.

공(公)은 정종(定宗) 때에 단성(丹城)의 세거(世居)찬 집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함이 남달라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懲)와 종유(從遊)하여 경사(經史)를 널리 통(通)하고 지조(志操)와 행검(行儉)이 깨끗하고 발랐다. 일찍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올라 책문(策問)에 응답(應答)한 치도책(治道策)이 제15등이 되었으니 권극중(權克中)의 방하(榜下)에서 급제를 하였다. 용담(龍潭)현령을 지내고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태종 때 능주(綾州)에 처음으로 살으셨고, 세상을 버리시자 읍소재지의 남쪽 춘양면(春陽面) 진곡(眞谷)의 남쪽 장등 건좌원(乾坐原)에 모셨다. 경종 때 참지의정부사(恭知議政府事) 겸경연춘추관사를 증직받고 시호를 경숙(敬肅)이라 했는데 자손이 그대로 능주(綾州)에서 살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의(大義)의 딸이다. 공(公)과 함께 묻히었다.
계배(繼配)는 정부인(貞夫人) 함양노씨(咸陽慮氏)니 공(公) 묘(墓)의 외청용등(外靑龍雌)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목(糧)은 장흥고령(長興庫令)이요 온(蘿)은 영해부사(寧海 府使)요 옹(雍)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다. 목의 아들은 자수(自修) 자달(自達)이요 온(蘿)의 아들은 창(昌)이요 옹(雍)의 아들은 빈(梅) 휘(輝)다. 손자는 윤(潤) 환(換) 한, 숙(淑) 준(潛) 문, 견(堅) 긴(緊) 현(賢) 구연(九撚) 구택(九澤) 구해(九海) 구문(九汝) 구심(九潛) 철동(哲全)이다. 공(公)의 묘(墓)에 그 전 비석이 있었는데 해가 오래 되어 닳아져 읽을 수가 없으므로 후손(後孫) 용식(容植) 동일(東日) 재국(在國) 제춘(濟梅) 등이 장차 다시 만들어 세우고자 장(狀)을 갖추어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 청(請)했다. 명(銘)하노니

부민후(富民候)의 혜택이여만성(萬姓)에게 옷을 입혔다.
공(公)은 이 집에서 태어나그 문행(文行) 참으로 아름다웠도다.
마치 아침 해가 솟아 오르듯운로(벼슬길)를 마음껏 달렸어라.
구비(舊碑)가 읽기 어려워 돌을 다시 깎았네.
나의 명(銘)을 새겨 두어 먼 후일(後日)에 보여 주노라

 

17세 감천군파

    (瑾) 자: 사휘(士輝) 호: 매계(梅溪)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

1495년(연산군1) 식년문과에 병과급제 검열되고 춘추관 기사관 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정사가 청렴하고 정사가 간결하여 선정을 베풀고 1508 금산군수로 상을 받음 
1516 대사간 동부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전직 
1519 기묘사화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고
1521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삭직됨 이조판서 추증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

≪新增東國輿地勝覽 제9권 京畿 水原都護府 新增 名宦 本朝≫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9권 慶尙道 金山郡 新增 名宦 本朝≫

 

 관()

청렴하고 정직하며 관후(寬厚)하였다.
살아가기 위한 사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에 있어서는 절조를 지키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을 때 도부서(都府署) 한충(韓冲)이 와서 뵈이니
문관이 선채로 절을 받고 한 마디도 말을 주고 받지 아니하니 한충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진정 원수(元帥)다운 기상이 있다.”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46권 江原道 旌善郡 人物 高麗≫
문관(文瓘)≪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慶尙道 安陰縣 新增 名宦 本朝≫

   감천군파

(瓘) 자: 백옥(伯玉) 호: 죽계(竹溪)

별시문과에 을과급제 검열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전임인 정여창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전정후문(前鄭後文)이라고 찬양함
지평을 거쳐 1518 주청사의 검팡관으로 면에 다녀와 장령 장악원첨정을 지냄
1507(중종2년)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

 

19세   판서공파

동도(東道) 자: 성원(聖源) 호: 경암(敬암)

성리학을 강의하여 문명을 떨쳐 숙종때 후릉참봉과 세자익위사 부수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
합천 용연서원에 제향되었으나 용연서원이 훼철된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시룡(시룡) 자: 현지

1753(영조29) 식년문과에 병과급제해 승문 강원도 도사를 역임 종부시 첨정 춘추관편수관을 지냄
1508(중종3) 양산군수로 왜적 토벌해 사성도심 예천군수 청풍군수를 지내시고 시문에 특히 능했다

 

18세순질공파 

 자수(自修) 자: 도숙(도숙) 호: 면수재(勉修齊)

세종때 생원시에 합격 1454(단종2년) 장흥,고부직장 
세조1년 녹사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     함영,곡성현감 퇴임후 고향(능주 월곡)에 사마제를 건립 후진양성에 힘쓰고  향사당을 지어 향민들의 교화에 힘씀 능주의 삼현사에 제향

 

 

  기호(基浩)?~1811 자; 양오(養吾)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정주()에 가서 홍경래를 설득하겠다고 의주부윤()에게 자청하자, 부윤이 그 뜻을 장하게 여겨 전마() ·전포()를 주었다.
성에 들어가 반란군을 설득하다가 살해되었다. 의주 학봉사(
)에 제향되었다.

 

 

  학천(學天) 자 명보(明普) 호 :백운처사

1891(고종28) 2월 도향에서 천거해 승정대부 호조판서 경연 춘추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백운암이라는 초당을 짓고 개탄시 개탄가를 지어 우국의 뜻을 품었다 
1923년 2월 경학원의 효행 포상에 본인과 아들 3형제( 제요 제순 제우)가 모두 포상 받음

 

 

  여(勵) 자: 자선(子善) 호: 운계(雲溪)

1553년(명종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 정자를 지내고 임진왜란때 곽재우와 같이 적을 토벌한 공으로 2등훈이 되고 왕을 호종하여 선무공신 1등에 녹공됨 헌납 교리 대사간을 지냄

 

 

  재도(載道) 자: 계기(戒器) 호: 휴헌(休軒)

1597년 정유재란시 백의로 관군에 참가해 공을 세움 
1603 무과급제 병자호란때 왕을 호종
3군의 수령을 거치고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를 지냄

 

 

  걸(傑) ?~1500     자 : 언장() 초명 빈()

본관 : 안동()선 전기의 문신종 때 생원시() ·진사시()를 거쳐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
)로 급제, 의정부사록(), 회덕() ·영동()의 현감 ·헌납()을 지냈으며, 1499년(연산군 5) 양양부사(使)가 되었다.

 

 24세

  상희(禧) ?~1627 ]

지략()이 뛰어나고 무술에 능한 무인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주서성(
西)의 장군으로 분전 끝에 전사했다.
훈련원첨정(
)이 추증되었다.

 

  선교(敎) ?~1592 ] 조선 선비

본관 개령(). 자 중화(). 함흥() 출생. 제독교수() 덕교()의 동생.
1592년(선조 25) 형을 잡으려고 왜적을 이끌고 그의 집을 포위하였다.
자기가 덕교라고 나서서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고, 어머니도 자결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삼강행실(
)》에 기록되고, 호조좌랑이 추증되었다.

 

 

희성(聖) 자: 경수(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 3년 뒤 정유재란 때 전공을 세웠다.
그 뒤 고령첨사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18년(광해군 10) 정주목사(定州牧使)가 되었다.
1619년 방어사(防禦使)로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보좌하여 요동(遼東)에 출전하여
           명(明)나라를 도와 싸우다가 패전, 강홍립과 함께 후금(後金)에 투항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진 뒤에 귀국하여 한때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1625년(인조 3)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정묘호란 때 삼전도(三田渡)를 지켰다.
그 후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거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다.

 

 

희순(舜) 1597~1678 ] 자 여화().

어릴 때 안방준()으로부터 성리학을 사사한 학자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왔으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듣고 벼슬을 단념,
귀향한 후에 태고정(
)을 짓고 풍류로 세월을 보내다가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서 안우산(
)을 거쳐 여산()까지 진격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http://www.moon051.com   관리자 滿月 文柄達(경절공 33世孫)   moon32th@hanmail.net    ☎011-9522-0740
                  
               본 홈페이지의 내용은 무단으로 사용하실 경우 저작권법에 의해 불이익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