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무성공(始祖武成公)

무성공전

제단비명

탄강년대

경오보의 분석

 

시조(始祖) 무성공 전(武成公 傳)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1732 영조3년) 서두의 내용

널리 전해오는 옛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購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輪國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博)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으로 받으셨다 

                                 김광순 교수의 <시조신화의 양상에 대한 연구>란 논문에, 
시조 무성공의 오색구름은 수신(水神)의 영향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이름이요, 수신이 석함을 봉정(奉呈)하고 그 안에서 동자가 나오는 경이적인 탄생은 시조신화의 신성성(神聖性)과 생명(生命)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암(文巖) 옆의 못을 장자지(長者池)라 이름하였고, 공을 모신 서원도 장연(長辯)이라 하였음은 예삿일이 아니므로 시조께서 태어난 문바위(文巖)는 성스러운 바위(聖巖)이요 장자지(長者池)는 성지(聖池)인 것이다.

 

고려평장사 휘(諡) 무성 남평문공 다성 제단비명

1993년 季夏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운운(많은 모양)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糶赫: 위엄이 밝게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
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 : 여럿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밑 지석강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23)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 (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
자손은 번창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진저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

 

시조 탄강 년대

 
보명

년도

탄강 년대 기록 비교
신해보 1731 발문(跋文)에 시조께서 羅季元祖 始降于南平 以南平爲貫者
(
신라말에 남평에서 탄강하셨으므로 남평을 본관을 삼았다)
기록하여  고려초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심을 말하였다
병진보 1736 신해보와 같음
무진신보 1808 시조 무성공의 탄강을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처음 기록함
갑자보 1824 무진신보의 자비왕 탄강설의 잘못 바로 잡음
정해보 1827 창간 신해보와 같이 신라말 고려초로 적음
병자보 1846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음
경오보 1851 무진신보와 같이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기록함
다음 족보인 임술보까지 113년간 유지되어 여러 문헌에 잘못 소개됨
임술보 1983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이 탄강년대를 신라말 고려초로 기록함
을해보 1995 오래도록 혼선을 빚어왔던 남평문씨 상계(上系)를 정경공의 묘지명으로 인해 적확(的確)하게 기록하고 상 9대를 의계처리함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4쪽의 내용
시조의 생졸연대와 벼슬길에 이르신 사적과 배위와 묘소는 일찍이 문헌의 증거가 없으므로 기록치 못하였으니 후에 그 기록이 없는 것은 대개는 이와같은 것이나 근자에 상고한즉 각처에 간혹 초한 족보와 인출한 족보가 있는데 동경사를 상고한 즉 시조가 신라 자비왕(20대왕) 15년(474) 미동부리현에 나시어서 벼슬이 삼광상중대부(신라관직) 상구국 대아손 대원수 남평개국백이며 시호는 무성이라고 하고 또 부인 김씨라하였는데 정묘년 가을 경주에 가서 동경사를 상고한즉 처음부터 실린 것이 없으니 위에서 말한 것은
어디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 알수없다
.

 

경오보(1851)의 탄강년대 기록의 분석

1. 474년은 남평을 백제(百濟)의 개로왕이 통치했으니 맞지 않으며, 벼슬은 180년 후의
    신라(新羅) 진덕여왕이 베푼 중시(中侍)를 지냈다고 기록함
2. 시조에서 부터 1세조 경절공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을 12대로 기록하고 있는 바,
    한 세대를 30년으로 어림잡아도 20대가 넘어야 하며,
3. 10세기경 왕건(王建)이 고려(高麗)건국 공신들에게 내렸던 삼한벽상공신을 
    거의 500여 년이나 미리 받았다고 기록 한 점
4. 경절공의 부친에 문정(文正)이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 하고,
    조부에 문장창(文章昶) 기록하였는데,
    당시에 묘지명을 쓰면서 품계(品階)가  7단계 아래인 행초맹중랑장으로 낮춰 
    기록하는 어리석은 사관(史官)은 없을 것이다.
5. 조부의 이름자가 보이지 않으나 한글자인데 무진신보는 장창(章昶)의 두자임

따라서 창간보(創刊譜)인 신해보(辛亥譜)의 기록과 이 묘지명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어
이른바 12대의 의계(疑系)가 분명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