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 활동

국가 유공 선조들의 집안과 세손을 아시거나 묘소의 사진등과 후손들의 소식등을 게시판에
알려 주시면 소개하겠습니다

의병활동

국가유공자

세수 16 6 17 18 18 19 19 19 20 20 20 20 20 20 20                                    
이름 홍운 홍헌 택용 세휘 도명 덕겸 위세 원개 영개 형개 홍개 희개 기방 관도 홍도

병현

세영

갑이 경근 경록 경섭 공학 광채 남규 남은 달환 대식 덕길 덕흥 도배 도석 동길
문파 합천천곡 진주관방 충혜공파 동래파 동래파 동래파 동래파 풍암파조 풍암파 풍암파 풍암파 풍암파 풍암파                                        

국가유공자

세수                                                             30    
이름 만동 맹근 명근 명섭 명주 명진 명훤 무술 무현 병갑 복금 봉성 봉의 사훈 상명 상익 석봉 석부 석주 석환 성근 성선 성초 성호 세현 수열 승수 시환 신영 심연 양목 영박 영산
문파                                                       동래파     성숙공파    

국가유공자

세수               26                                                    
이름 영주 용기 우석 위동 윤국 응선 인갑 일만 일민 일평 장섭 장호 재교 재민 정규 정덕 정진 창모 창숙 창학 치룡 치무 치백 태수 학도 학신 학이 학준 한우 현서 형모 홍의 화순
문파               판서공파                                                 판서공파  

 

갑이(甲伊) 1909. 6. 3~1983. 3. 13 경남 사천

건국훈장 애족장(2004)
1929년 9월경 경남 사천군(泗川郡) 삼천포읍(三千浦邑)에서 정종주(鄭종柱) 등과 함께 비밀 사회주의단체인 용산독서회(龍山讀書會)를 조직하여 활동던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2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아 석방 후 다시 삼천포적색농민조합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4년 12월 장백윤(張佰允)이 운영하던 이물리(耳물里) 농민야학을 인수하여 1935년 5월까지 농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노동독본·조선어독본·산술 등을 가르치면서 사회주의사상과 반일의식의 함양을 위한 활동을 벌리다가 1938년 2월 4일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1939년 8월 30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東亞日報(1939. 5. 9·8. 26·9. 3)
·   日帝下社會運動史資料叢書(한국역사연구회, 1999) 제12권 237∼369면

  경근(敬根) 1920. 7. 7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동년 10월 만주의 북간도지역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서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군정부(軍政府)가 개편되어 조직된 것이다.
북로군정서의 조직 당시의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재 서 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여단장 최 해(崔海), 연대장 정 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경리 계 화(桂和), 길림 분서 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 현(梁玄) 등이었다.
문경근이 활동한 북로군정서는 대종교(大倧敎)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여 일제를 물리치고 이상국가인 배달국(倍達國)을 지상에 재건하고자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일제를 물리치고 배달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였으며, 관할구역에 살고 있는 재만동포들 역시 혈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북로군정서에 있어서 무장투쟁은 대단히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위하여 북로군정서에서는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무기구입 등에 진력하였다.
문경근은 1920년 7월 7일 소속부대인 북로군정서 의군부(義軍府) 연락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다가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969면   ·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其一)(국회도서관) 752면

  경록(璟錄) 1884. 7.27~1919.11. 1 전북 남원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1919년 3월 2일 같은 천도교도이며 남원군 덕과면(德果面) 사율리(沙栗里)에 사는 황동주(黃東周)가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의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李起東)으로부터 손병희(孫秉熙)외 32인이 연명한 독립선언서 2통을 전달받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붙여 취지를 알려 달라는 요청을 하자 이에 동의하고 그날밤에 기매면(己梅面) 계수리(桂壽里) 장귀연(張貴然)과 인화리(仁化里) 박봉석(朴鳳錫)의 집 등에 붙여 3·1독립운동의 취지와 내용이 곳곳에 전해지도록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옥고 여독으로 1919년 11월 1일 순국하였다.
註·판결문(1919. 4. 24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호적등본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37면
  경섭(瓊燮) 1883.10.7~1941.9.18 충남 부여 장암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한 고향 출신인 강철구(姜 求)는 1920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하여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역으로 활약하던 중 동년 4월 서일의 밀명을 받고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입국하였다.
함북 회령과 청진 및 서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활약하고,
고향인 부여에 이르러 1921년 1월(음)경에 박길화(朴吉和)·문장섭(文章燮)·김정제(金廷濟) 등의 동지와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독립군정서 서무부장 김 택(金澤)에게 전달하는 등 활동하였다.
문경섭도 이들과 함께 군자금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1922년 10월 모든 공채를 다 처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철구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려고 준비하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으며, 문경섭은 1923년 4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동아일보(1923. 2. 15, 3. 14, 3. 30, 3. 31, 4. 1)
  공학(文孔學) 1897. 9.27~1946. 8.27 경남 하동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21일 하동군 횡천면(橫川面) 여의리(如意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하동군 북천면(北川面) 직전리(稷田里)에서 주민 1,000여명의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범죄인명부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9. 10) 628·629면
  광채(文光彩) 1861.~1919.12.15 경기 양주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瓦阜里 松村里)에 살고 있으면서 이 지역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정성(李正成)·김춘경(金春經)·김현모(金顯模)는 손병희(孫秉熙) 등이 독립선언을 하자 그 취지에 호응하여 김정하(金正夏)와 의논한 후 이 지역의 만세운동을 계획·추진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5일 이른 아침에 동면 송촌리에서 면민 다수를 주도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덕소리(德沼里)로 향하여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는 이 시위행렬에 적극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이정성·김춘경 등과 함께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註·韓國獨立運動史 (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146·147面  ·除籍謄本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299·300面
  남규(南奎,南圭) 1870. 6.23~1932. 2.28 제주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문남규를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문남규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형사사건부 ·수형인명부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65·26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206면 ·순국(1994. 11월호) 100면
  남은(南恩) 1875. 6.28~1953. 6.29 제주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문남은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문남은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형사사건부 ·수형인명부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65·26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206면 ·순국(1994. 11월호) 100·101면

31세 경숙공

달환(達煥) 1851. 8.21~1938. 3. 7 전남 화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자; 덕경(德卿) 호:둔제(遯濟)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면암은 각 지방의 유림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고관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3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있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제휴하여 의병운동의 거점을 태인·순창(淳昌) 일대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때 문달환은 면암 의진에 입대하였다.
면암 의진은 일본 정부에 글을 보내어 침략주의 일본의 16개 죄목을 들어 성토하고 정읍(井邑)·순창·곡성(谷城) 등지로 진군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관원이나 민중이 호응하여 병력이 3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병의 이러한 세력확대와 함께 일본군의 많은 병력과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며, 19일 의병진은 옥과(玉果)로 향하던 도중 적측의 제지를 받아 순창으로 회군, 유진하였다.
그 이후 광주 진위대 소속 관군의 강압과 회유로 많은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문달환은 문인 12인과 함께 면암을 호위한 채 진중에 그대로 앉아 적을 꾸짖다가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 때 면암을 위시하여 임병찬·고석진·김기술·임현주·유종규·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최제학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태형 100도에 처해지고, 약 2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06년 8월 석방되었다.
註·매천야록 38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8·36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6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8·90·130면

능주의 부춘사에 제향

  대식(大植) 1923. 1.11~1973. 3.28 충남 금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향에서 문방구 점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4월 창고를 청소하던 중 일본 대판(大阪)의 〈매일신문(每日新聞)〉에서 1909년에 발행한 세계지도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검토한 결과 한국이 본래 독립국임과 국기(國旗)가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년 5월 11일 금산읍의 각종업소에 근무하는 18세 내외의 청년동지 7명과 더불어 친목을 위장한 항일결사 시장친우계(市場親友 )를 조직하였다. 동계는 동년 7월 진락동지회(進樂同志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항일투쟁을 펴나갔다.
동회는 항일투쟁의 방법으로 우선 일제의 조선인 지원병 강제모집에 반대하여 불합격자초운동(不合格自招運動)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매월 15일에 모임을 갖고 이의 추진상황을 검토해 가기로 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접선하여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할 목적으로 동지인 최병무(崔秉茂)를 중국에 파견하였다. 이에 필요한 여비 200여원은 동 회원들이 40원씩 분담하여 마련하였다.
한편 그는 1940년 9월 17일 정해안(鄭海晏)·박승묵(朴勝默) 등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금산군 남이면(南二面)에 소재한 관광명소인 진락산동굴(進樂山洞窟)의 암석에 페인트로 대형태극기를,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조각된 목탑(木塔)을 건립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1941년 2월 17일 일경에 피체되어 1942년 5월 1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42. 5. 13 전주지방법원)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148면
  덕길(德吉) 1921. 9.15~ 경남 창녕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1년 2월 15일에 그는 동교생 권쾌복(權快福)·배학보(裴鶴甫)·문홍의(文洪義)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개편한 것으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경기부원(축구부 책임)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예심종결결정(1943. 2. 8 대전지방법원)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70·77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1·807면
  덕홍(德洪) 1902. 9.19~1949. 5.12 제주 한림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일본 배의 선원으로 근무하다가 상해에서 탈출하여 1941년 초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경비대원(警備隊員)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원으로 근무하다가 동년 6월 서무국원을 겸직하였다.
1945년 봄에 국내비밀공작원으로 국내에 특파되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가 조국 광복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註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719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72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279·608·612·69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68·981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63·520·602·604·605·608·636·689·703·772·786·828·856·857·858면

  도배(道培) 1908.12.27~1953. 6. 2 제주도 북제주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30년 혁우동맹(革友同盟)을 조직하고 제주도 해녀들의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문도배는 1930년 3월 신재홍(申才洪)·오문규(吳文圭)·김성오(金聲五)·김순종(金順鍾)·김시곤(金時坤)·강관순(姜寬順) 등과 함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전복할 목적으로 혁우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문도배는 여성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혁우동맹의 조직을 확대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중반 혁우동맹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로 발전하자 1931년 7월 여기에 가입하여 8월부터 농민단체와 해녀조합의 결성·공산주의 선전 활동에 주력하던 중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들이 해녀조합의 부당한 수탈에 항거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이를 배후지도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33. 6. 5)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東亞日報(1932. 12. 22, 12. 25)
    ·朝鮮日報(1932. 3. 4, 1933. 3. 4, 6. 8)
  도석(道錫) 1882. 2. 5~1968. 8.14 경북 안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5일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거사에 대하여 의논함으로써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의 동원을 담당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듣고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할 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경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건조물 손괴·가택 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0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47·1348·1349·1354·1355면
  동길(東吉) 1900. 6.10~ 광주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수여

그는 신덕채(申德采)로부터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라는 밀명을 받아 1920년 음력 2월 14일 광주군 소재 박운아(朴雲娥)의 집에서 김성현(金聖炫)·김제중(金齊中)과 모임을 갖고 군자금 모금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음력 2월 15일부터 음력 4월에 이르기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곡성(谷城)·담양(潭陽) 등지의 부호들을 역방하며 임시정부원임을 밝히고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후 1921년 동지규합에 힘쓰던 중 밀고에 의해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강도상인(强盜傷人)·강도미수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21. 12. 3 광주지방법원)
  만동(萬同) 1881. 4.13~1958. 3. 1 충남 서산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그는 1919년 4월 4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정미면 천의(天宜) 장날을 이용하여 1천여 명의 대호지면(大湖芝面)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대호지면의 면민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시위를 계획해 갔다. 평소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가던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宋在萬)이 행동총책을 맡고, 면장 이인정(李寅正),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原) 등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3월 19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군과 일경에 의해 송재만·이인정 등의 주동인물이 피체되고 말았다.
이후 이들 면민은 다시금 만세시위를 추진하여 이웃 정미면 천의 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호지면에서 출발한 이들은 정미면 천의리에 이르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는 한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나 서산·당진·공주에서까지 동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이들 만세군중은 해산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인사들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註·범죄인명부 ·당진지역항일독립운동사(당진문화원, 1991) 제5집 148∼163면
  맹근(孟根) 1914. 8.15~1967. 4.18 경남 창원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31년 경남 합천군 적중면(赤中面)에서 김상복(金相福)·박영수(朴永守)·박홍목(朴弘穆) 등과 함께 이동리(泥洞里) 사립야학교에서 이동독서회(泥洞讀書會) 동맹구락부(同盟俱樂部)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김상복 등과 체포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고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註·高等警察關係摘錄(慶南警察部, 1936) 83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東亞日報(1931. 6. 30, 11. 15)  ·朝鮮日報(1931. 7. 4, 11. 15)
  명근(明根) 1902. 2. 4~1976. 3. 2 전북 임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당시 임실군천(任實郡廳)의 사환으로 재직 중에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해 3월 5일 16세의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 일제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동맹퇴직(同盟退職)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전라북도 내의 11개 군수에게 발송하고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19. 5. 16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3·1운동실록(이용락) 57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61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02·503면
  명섭(命燮)   강원 양양, 철원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그는 1919년 10월 중순 이근옥(李根玉)의 권유에 의해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양양군단(襄陽郡團)에 가입했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도단(道團)을 설치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 양양군단은 강원도단의 하부조직이었다.
이러한 대한독립애국단의 주된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 및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년 10월 하순에 그는 이근옥(李根玉)·이석규(李錫圭)·김연수(金延洙) 등과 함께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올라왔으나, 당시 서울의 본부와 연결이 되지 못하여 귀향하였다.
그런데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다가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0∼1030면
  명주(明柱) 1885~1921. 3. 5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1920년 8월 김시황(金時晃)·김동식(金東植)·백운기(白雲起) 등이 평북 의주(義州)에서 조선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금, 군자금 기부를 거부하는 부호와 친일밀정, 일제 관헌 등을 처단할 목적으로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자, 단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단원 배일하로 하여금 평북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조봉리(朝峰里)에서 한인 순사 문치보(文致步)를 처단하게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5일 중국 요녕성(遼寧省) 안동현(安東縣) 접리구(接梨溝)에서 안동경무서(安東警務署) 국길(國吉) 형사 등 일경(日警)과 신의주경찰서(新義州警察署) 대서(大西) 경부보(警部補) 등 십여 명이 습격하자 이들과 교전 끝에 순국하였다.
註·東亞日報(1921. 3. 11) ·韓國民族運動史料(國會圖書館) 三一運動篇 其 一 863面
·1920年代初 國內武裝鬪爭團體의 活動과 推移(박걸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第3卷
  명진(明鎭) 1888. 3. 3~미상 서울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런던상회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5월 임시정부 요원 김보현(金甫鉉)으로부터 임시정부 포고문을 받아 국내에 배포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평소 조국의 독립을 희망하던 그는 임시정부 선전활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동년 5월 31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등의 명의로 된「동포(同胞) 2천만에게 고(告)함」이라는 통유(通諭) 제1호 문서 1백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포고문을 김홍작(金鴻爵) 등에게 교부하였고, 김홍작은 그 중 일부를 윤혜자(尹惠子)에게 교부하여 임시정부 선전 활동을 펼쳤다. 또한 문명진은 6월 상순경 서울 종로와 남대문 등지에서 포고문을 위익환(魏益煥)·박용남(朴容南)·이운룡(李雲龍)·김길훈(金吉勳) 등 다수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7. 3)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19. 8. 1)   ·判決文(高等法院, 1919. 10. 9)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권 74면, 제12권 1190∼1193면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권 384면

 

  명훤(明훤) 1892.11.30~1953.10.25 평남 평양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국권이 침탈되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 방략을 모색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맹산(孟山)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영어전문학교를 수료하고 192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6월 24일 의원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였다.
1931년 초에 귀국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7년 6월 회원 15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4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 재판 끝에 1941년 7월 21일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일경의 고문을 견뎌 내야 했다.
註 조선민족운동연감 78 84 122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827 501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21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84 1293 1316 1328 1352 1367 1413면
  무술(武術) 1887. 9.20~1950. 9.28 함남 원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1919년 4월 원산에서 주 익(朱翼)으로부터 주세진(朱世鎭)에게 권총 2정과 실탄 5발을 건네 줄 것을 위탁받고 이 무기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후 윤영주(尹永周)외 1명과 같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계획하고, 동년 5월 19일 원산의 부호 남상준(南相俊)에게 군자금 천원을 서신으로 요구하였으며, 동월 하순에는 윤영주와 같이 그 집에 남상준의 아우인 남상보(南相輔)에게 군자금을 요구, 백원을 모금하였다.
그후에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서울에 올라와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1919년 5월부터 6월까지 활동하던 중 서울에 거주하는 남관희(南觀熙)에게 군자금 100원을 모연하였으며, 1920년 1월에는 유극선(劉克善)과 함께 서울의 차상건(車相健)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고 일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10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공갈·강도미수·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8년형을 받고 1925년 7월까지 서울과 함흥옥을 오가며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2월 11일에는 함남 원산 신간회 조직에 참가하여 이세모(李世模)·전진규(全眞珪)·유재숙(劉在淑)·장기도(張基都)·임경수(任敬洙) 등과 함께 그 실행위원으로서 재만 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註·판결문(1920. 9. 14 경성지법)  판결문(1920. 10. 13 경성복심법원)   동아일보(1925. 8. 4, 1927. 12. 13)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63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00면

  무현(武鉉  武年) 1899. 4.17~1970.12.22 경기 부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9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龍游面 南北里)에 사는 조명원(趙明元)·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鳳鶴) 등과 함께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3일과 24일에 모여 독립운동단체인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3월 28일 거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준비를 위해 광목으로 대형태극기를 하나 만들어 그 기에 혈성단 주도자 4명의 이름을 쓰고 만세운동 격문을 인근동리에 배포하였다.
그는 3월 28일 관청리(官廳里) 광장에 동리 주민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중앙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주동자로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註·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52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313∼315面
  병갑(炳甲) 1929. 2.25~ 광주 광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1944년 6월 24일 광주공립서중학교(光州公立西中學校) 재학 중 동급생에게 "미군비행기에 조선인 비행사가 타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좋은가"라고 선생에게 질문하였더니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으로서의 길을 가면 된다"라고 하더라는 것과 1944년 7월 중순 일제의 구축함이 목포항을 출발하였는데, 미국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승무원 다수가 사상당하였으며 현재 목포 시립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수병(水兵)들을 보았다는 등 반일 시국담을 유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4년 9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임시보안령 및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검사의 공소제기로 1944년 12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1944. 9. 26 光州地方法院)  ·決定書(1944. 11. 17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44. 12. 21 大邱覆審法院)
  복금(卜今) 1905.12.13~1937. 5.22 전남 해남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목포 정명(貞明)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1년 11월 14일, 다른 학우들 및 영흥(永興)학교 학생들 그리고 일반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를 다량으로 만들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21년 12월 2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57·158·925∼928면 ·동아일보(1922. 1. 23)
  봉성(奉成) 1921. 8. 9~1948. 8.24 경북 문경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중동학교 재학중인 1940년 교내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문봉성은 1939년 3학년 당시 민족의식이 투철한 영어 교사 김광섭(金珖燮)에 크게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동교생 김경동(金敬東)의 소개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가했던 권오직(權五稷)을 알게되면서, 더욱 투철하게 항일의식을 길러갔다.
1940년 6월 24, 25일 경, 그는 김경동(金敬東)·김재수(金在洙) 등과 더불어 서울 수하동(水下洞)의 고택림(高澤林)의 집에서 민족의식 보전운동을 위해 독립에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동지포섭에 힘을 쏟는 한편 조국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교양 함양을 통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이일이 발각되어 피체된 그는 1942년 9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하였다.

註·豫審終結決定書(1942. 5. 31. 京城地方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3輯 390面
  봉의(鳳儀) 1878. 7. 3~1937. 3. 3 충남 서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그는 1919년 9월 안 황(安滉)으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이에 가입하였다.
1919년 5월 서울에서 신현구(申鉉九) 등이 주도·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는데, 그는 동단의 재무감독(財務監督) 겸 충청도 방면의 조직을 맡았다.
당시 대한독립애국단에서는 임시정부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그리고 국내의 조직망을 통하여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10월 동단의 단장(團長) 신현구의 지시에 따라 충청도 지역의 조직 확대와 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동년 11월까지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논산군(論山郡)·예산군(禮山郡) 등지에 지부 조직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년 12월초에는 직접 충청도 지역에 내려가 청양군의 정상길(鄭相吉) 등을 동지로 포섭하는 한편 자금수합 활동도 폈다.
또한 1월 하순경 동단의 단장 신현구가 일경에 피체됨에 따라 본부 조직의 개편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동년 12월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과 힘을 합쳐 혈복단(血復團)을 새로이 조직하고 동단의 충청남도 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江原道團 : 일명 鐵原愛國團)이 발각되고 이어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자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5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990∼1030면
  사훈(士勳 士元) 1912. 4.17~1979. 5.23 전남 영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9년 9월 27일경 전남 영암군 영암면 교동리(校洞里) 최판옥(崔判玉)의 집에서 여러 동지가 모여 청년회(靑年會)를 비밀결사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2년 2월 24일경부터 영암군 덕진면(德津面) 청년회관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청년회원들의 모임을 갖고 일제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투쟁방안을 논의하였으며 같은해 6월 4일 산유회(山遊會) 명목으로 회원 70여 명이 집합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토록 결의하고, 큰 북을 치며 나팔을 불고 만세를 부르며 일인 지주집과 친일 지주집에 들어가 규탄하는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폭력행위 및 업무방해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豫審終結決定書(1933. 6. 22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判決文(1933. 9. 29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상명(相明) 1922.12.19~ 경북 영양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중국 개봉(開封)지구에서 광복군 제3지대 현지공작원으로 입대하여 개봉시(開封市)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포섭하는 등 광복군 초모공작활동을 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28·431면
  상익(相翊) 1893. 7. 3~1960.10.15 경기 수원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송산면의 서기로 3월 26일부터 동면 사강리(沙江里)의 면사무소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 면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천여 명의 군중이 송산면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경은 주동자 홍 면 외에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러나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야구광삼은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 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시위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였다.
이에 야구광삼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며 홍 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김교창(金敎昌)·왕광연(王光演)·김용준(金容俊) 등과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65∼16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78∼399면

 

  석봉(錫鳳) 1851.12.24~1896.11.19 대구 달성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의 봉기를 이끈 의병장이다. 1895년 2월 공주부(公州府) 영장(營將)에 재직하면서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관병 400여 명을 훈련시키다가 피체되어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년 음력 9월 18일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에 항거하여 충남 대덕군(大德郡) 유성(儒城)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기의(起義), 회덕(懷德)으로 진군하여 군사를 모은 후 그곳 관아(官衙)를 습격하였다.
무장을 갖추고 진용을 정비하면서, 선봉장(先鋒將)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장(中軍將)에 오형덕(吳亨德)을 임명하여 진산(鎭山)을 거쳐 공주(公州)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전하여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중군장 오형덕 등과 함께 경북 고령(高靈), 초계(草溪)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이에 감역(監役) 윤희순(尹羲淳)은 군자금의 지원을 약속하고 초계군수(草溪郡守)는 신변보호에 나서는 등 재봉기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으나 아쉽게도 거의 직전에 피체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구부(大邱府)에 압송된 그는 심문하는 관찰사를 논박하며 거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다.
1896년 봄 오형덕과 함께 파옥(破獄), 탈출하여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도지휘(都指揮)로서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띄우고 제천의진(堤川義陣)의 유인석(柳麟錫) 의병장과 연계하여 의병 구국투쟁을 모색하는 등 재거의(再擧義)를 계획하던 중 병을 얻어 46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 그의 봉기는 의병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註·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189면 ·소의신편(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249면
·구한국관보(제209호, 1895. 11. 10)  ·의산유고(1934) 제2권 11∼13면
·의산유고(1934) 제4권 9·10·11·15·20∼23면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1976) 제19권 363면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1980) 55면 ·한국사강좌(이광린, 1981) 제5권 377면
·의병항쟁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4) 61면 ·고등학교 국사(국사편찬위원회, 1984) 하권 108면
·한말 의병전쟁(조동걸, 1989) 2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15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265면
  석부(錫富) 1908. 9.24~ 함남 함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중경(重慶)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608면
  석주(錫柱 碩柱) 1899. 4. 4~1934. 1.26 경남 창원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그는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마천리(馬川里)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사전 발각되어 피체되었다.
웅천의 만세운동 계획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3월 중순경 계광학교(啓光學校) 교사 주기용(朱基溶)이 절친하게 지내던 문석주와 정운조(鄭雲朝)·김병화(金炳化) 등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면서 비롯되었다.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깊게 인식하고 민족의식을 길러 가던 문석주 등은 주기용의 제의에 즉각 찬동하고 4월 3일을 의거일로 정하고, 아울러 마천리에서 거사를 일으킨 후 창원읍까지 시위하여 읍내의 시위와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문석주 등은 거사에 필요한 격문과 태극기 등을 철야로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거사 직전 문석주는 정운조와 함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 일경에 사전 발각되어 피체되고 말았다. 이 때 문석주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지킴으로써 4월 3일의 만세운동은 차질 없이 예정대로 치러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4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 후 동경한인노동조합 총연맹의 총무를 맡아 일본지역의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28년에 귀국한 그는 청년운동을 지도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31년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註·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3·1운동실록(이용락) 642·643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51∼253면
·진해시사(진해향토문화연구소, 1987) 235∼240·650·651면

  석환(奭煥) 1869.10.16~1925. 7.13 충남 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자; 영백(英伯) 호: 운초(雲樵)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1월 4일 참판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최익현은 윤 4월 13일(6월 4일) 태인(泰仁)에서 거의하기로 하고, 민종식은 4월 18일(5월 11일)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문석환은 민종식의 의진에 입대하여 종사(從事)가 되었다.
민종식 의진은 충청도 홍산 지치(鴻山 支峙)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이들은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로 진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호서(湖西)지방의 요충인 홍주성을 무난히 차지한 의병진은 곧 민중들을 안심시킨 후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 때 문석환은 서기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의진의 지도부 인사 구성은
대 장 민종식 소모관 이만식
참모장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수문장 최선재
중군장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수성장 조병순
유격장 채경도 선봉장 이남규 박영두
좌군관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정해도
우군관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운량관 박제현 성재평
소모장 지우범
이들 홍주의진에 대한 적의 대공세가 전개되자 이에 의진은 병력 증강과 성첩의 수축 등으로 대처하였으나, 윤 4월 9일 다시 적의 공세가 급하여지고 새벽 3시경 큰 폭음과 함께 성 동문이 깨어지고 수많은 적군이 문안으로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의진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흩어져 이미 전세는 패색이 짙어졌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대장 민종식 등은 성을 탈출하여 재거를 기약할 수 있었으나 문석환을 비롯한 80여 명이 체포, 압송되어 서울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6월 상순에 이르러 70여 명이 석방되고 문석환은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 식(李 )·신현두(申鉉斗)·이상두(李相斗)·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과 더불어 적을 끊임없이 꾸짖고 굽히지 않으므로 대마도(對馬島)로 귀양보내어졌다.
유배지에서 문석환은 많은 우국시를 지었는데 그 중의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다 서남쪽에 자리잡은 한 섬    산을 지나 비 내리니 자못 서늘하구나
석양의 매미소리는 고향과 같으나  언어·의관이 다르구나
나그네 아홉 사람 고초를 겪으면서  만리 밖 고국의 안부를 편지로 들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니 혼미한 꿈속 인양 하구나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가!
海水西南闢一灣 爲容九人同苦楚    過山乍雨動微寒 寄書萬里報平安
晩樹蟬聲如故國 回息過境渾如夢    殊方鵠舌異衣冠 成敗由天力難)
8월말에 태인(泰仁)·순창(淳昌) 의진의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이 대마도로 유배되어 와서 홍주 9의사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모두 학문 있고 또 의기가 높던 인물들이었으므로 눈물로 해후하였다.
이들은 유형지의 외로움을 시로써 달래면서 살았다. 면암의 칠언절구에 대하여 문석환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본디 바탕이 어디 간들 바뀌리  위아래가 거꾸로 바뀐 세상
옛 성인이 오늘의 세태를 가엾이 여겨
이러한 제도를 가르치셨으니 의식을 보존해야만 하리.
(素行隨處我無移 冠屢那堪倒置時  先聖應憐今日事 故敎此制保形儀)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던 중 연로한 면암이 병석에 눕자 문석환을 비롯한 의사들이 병구완하였으나 끝내 면암은 유형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었다.
면암의 장례에서 문석환은 사서(司書)를 맡아 정중히 모셨고, 후에는 고국에서 온 운구반에 인계되었다.
문석환과 나머지 9인은 적의 감언이설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옥고를 치르다가 소위 조선 총독 장곡(長谷)의 특전(特典)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5·356·357·359·36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6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148·208∼222·299·87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97·107·863면

  성근(誠根) 1917. 5.24~ 평북 용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전방공작원으로 활약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4·619면
  성선(性善) 1912. 4.17~ 전남 영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1931년 9월 영암군 영암면에서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한 후 1932년 2월 청년회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청년회원들의 모임을 갖고 항일투쟁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청년회원들은 동년 6월 영암군 덕진면(德津面)의 운암리(雲岩里)·수보리(水保里)·노송리(老松里)·장암리(場岩里) 등의 청년회원 70여명을 규합하여 항일시위를 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큰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지주와 친일지주 집을 습격하는 등 항일시위를 펴기로 결의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34. 3. 7 대구복심법원)
  성초(星超) 1887.12.30~1919. 4. 6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이곳의 비밀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을 기하여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자기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였다. 이달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튿날의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 사람이 검거된 후 해산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조(李文祚)·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다가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러서,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 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선두에 있던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06·207·208면
  성호(成鎬) 1872. 2.13~1949. 4.29 경기 양평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조선 13도대표자 명의의 독립요구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이래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인하여 서울에서는 며칠간 잠잠한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일제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시가 행군케 하면서 민중을 위압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성호 등은 3·1운동 후 서린동(瑞麟洞) 영흥관(永興館)에서 모여 3·1독립선언식의 후속 조치를 취하여 만세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고, 애원서라는 제목 하의 '조선 독립은 2천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孫秉熙) 등의 후계자로써 조선 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선전 문서를 작성한 뒤 이를 여러 장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 보신각 앞에서 수백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애원서를 낭독하고, 문성호가 선두에서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3집 394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6·10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03∼11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8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174∼20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58∼82·129∼13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95∼121·140∼142면  ·매일신보(1919. 11. 8)
  세현(世鉉) 1917.11.25~1945. 8.18 강원 춘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춘천고등보통학교(春川高等普通學校) 재학중인 1937년 3월에 동교생 남궁 태(南宮 )·백흥기(白興基)·조규석(曺圭奭) 등과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동회의 강령 및 부서를 정하였는데, 그는 선전부장의 일을 맡았으며 또한 동회의 회가(會歌)도 지었다.
그후 상록회는 신입회원을 가입시켜 회세를 확장하여 전교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 회원은 졸업 후에도 그러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롭게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3월, 졸업 후 철원(鐵原)금융조합서기로 근무하면서 동년 10월까지 상록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자 그도 피체되었다.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39. 12. 27 경성지방법원)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370면
·동아일보(1939. 12. 20, 12. 21)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31·73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434면  ·태백항일사(조동걸) 298∼302면
  수열(洙烈,雄明) 1923. 7.15~ 경남 사천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작전참모반에 소속되었으며, 기관지 "빛"의 편집을 맡아 홍보활동을 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28·412·423·424·504·551·617면
 
광복군
애족장(91)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승수(升洙) 1905. 1.23~1950. 7.20 전남 완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등 16명이 함께 모여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그런데 회원중 이탈자가 생겨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고, 또한 주동학생인 장재성, 박인성 등의 졸업으로 인하여 조직 내용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1927년 3월 해체되고 각 학교별로 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지용수(池龍洙)·강해석(姜海錫)등의 지도를 받고 광주농고생인 김만복(金萬福)·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피체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았으며 대구복심법원에 공소,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완도에서 황동윤(黃東允)·최창규(崔昌圭)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32년 초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기관으로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재정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야학과 독서회를 통하여 농민계몽과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을 계기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되어 전남운동협의회가 탐지됨에 따라 그도 1934년 2월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고문과 옥중 투쟁 끝에 그는 결국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다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30. 10. 27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31. 6. 13 대구복심법원)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2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90·49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65·1624∼1633·1654∼1708면
  시환(時煥) 1897. 8.12~1973.11.11 부산 동래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24. 2. 28 경성지방법원)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조선민족운동연감 178면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76·279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78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61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5·309·482·489면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152·153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동아일보(1924. 2. 16, 2. 24, 3. 1, 1926. 3. 3)
  신영(信英, 永信) ~1920-1921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된 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적절한 시기가 오면 국내로 진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들은 압록강 대안지역인 서간도지역에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 한인의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기관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개교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이처럼 활발히 독립전쟁에 대비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영향은 서간도 지역에도 미치게 되어 독립운동이 보다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서간도 지역에는 3·1운동 이후 30여 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내로 진공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그들의 말에 잘 순종하는 중국 현지 당국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31일에는 오래 전부터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중심지였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습격하여 많은 한인들을 체포 투옥하였다. 이어 훈춘(琿春)사건을 빙자하여 만주로 출병한 일본군은 10월 하순경부터 관전(寬甸)·통화(通化) 등 서간도 지방 각지에서 독립군 수색을 빙자하여 방화, 살인, 약탈 행위를 도처에서 자행하였다.
이 무렵 문신영은 서간도 지역 한족회(韓族會)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구이다. 이 단체에서는 재만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시가에 본부인 중앙총부(中央總部)를 두고 그 최고 책임자로 이 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무사장 김종훈(金宗勳), 사판(査判)사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재무사장 남정섭(南廷燮), 상무(商務)사장 김정제(金定濟),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 내무사장 곽 문(郭文), 검사감 최명수(崔明洙) 등을 두어 재만동포의 치안·재무·사법·행정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한족회는 지방자치조직도 체계화하였다. 당시 한족회의 지방 조직은 유하현·통화현(通化縣)·흥경현(興京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임강현(臨江縣)·해룡현(海龍縣)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호수는 1만여 호에 달하였다. 이곳 한족회에서는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 호마다 백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 등의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족회의 지방자치는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재만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한인자치기구에서 구(區)의 책임자로 활동하던 문신영은 1920년 4월부터 1921년 2월 사이에 일제의 한인독립운동가의 탄압에 의해 서간도 지역에서 희생당하여 순국하였다.
註·조선민족운동연감 159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15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0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64면
  심연(心淵) 1858~미상 평남 성천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4일 정오경 평남 성천군(成川郡) 성천읍(成川邑) 읍내 천도교구당 앞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도자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배부해 주자,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열광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당일 아침에는 읍내 각 관공서에 독립선언서가 살포되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대는 헌병대 앞에 당도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정문 앞에 도열해 있던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를 가하여 다수의 시위자가 현장에서 순국하거나 일경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피검자를 평양으로 호송하기 위해 병력을 증파하였고, 성천과 정주(定州) 등 철도 연변(沿邊) 지역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특별 경계를 하였다.
문심연은 이날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高等法院, 1919. 9. 18)

30세 성숙공파

양목(讓穆,良穆,聖烈) 1869. 6. 7~1940.12.25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2004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됨

호 : 우운  문상도씨의 2남으로 출생(장남은 상목)
일찍이 동학에 몸을 담고 있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적극 참여하여 반봉건·반침략을 목적으로 혁명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3년 경기도 인천(仁川)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제의 한국침탈이 노골화되어 가자,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1905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1907년 3월 장 경(張景)·백일규(白一圭)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결성하고 1907년 10월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인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에서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합동으로 공동회(共同會)를 개최하여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4인의 총대(總代)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그는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이튿날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獨立裁判)'으로 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08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이 한인군사학교(韓人軍事學校)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기울인 그는 동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흡수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軍人養成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1년 4월에는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출판하였고, 1912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선임되자 그해 6월에 박용만의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을 섰다.
그 후 계속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40년 서거하였다.
註·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47면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86·87면
·대한계년사(국사편찬위원회) 하권 303∼305면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29·263·264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2·12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195·19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55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1집 430면  ·태평양주보(1941. 4. 19, 4. 26, 5. 3)
·국민회 의무금 지출(1917. 2. 15, 5. 24, 1918. 9. 12)  ·신한민보(1941. 1. 9, 1. 16)
·한국민족운동사연구(1989) 제4집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연구(김도훈)
·박영석 교수 화갑논총(1992) 구한말 미주의 대동보국회에 관한 일고찰(최기영)
·박영석 교수 화갑논총(1992) 재미삼일운동총사령관 백일규의 투쟁일생(방선주)

           약력소개(태안신문 2004년 2월 20일 5면에서 발췌)

1894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동학에 참여

1903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킴

1905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로 지원하여 망명

1906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907

장경, 백일규선생과 함께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10월 중앙회장에 선임
          동회기관지인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면서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킴.

1908

대한제국 외교고문“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과 글을 신문에 발표하자 대동보국회는 미주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합동으로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 4인의 총대를 선정하였는데 선생께서는 그 중의 한명으로 “스티븐스”를 항의 방문, 그의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대책을 논의함.
다음날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구성하고 판사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으로규정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인식시킴

1908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한인군사학교의 설립과 재미한인단체의 통합논의를 목적으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를 적극후원

1909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을 권유, 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 무장 투쟁론을 적극 지지

1910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하여 독립정신의 고취에 노력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흡수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의 총무로 피선

1911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   일제의 한국강점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인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하여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함.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을 출판함

1912

신한민보의 주필로 선임됨.
박용만의 군인수지를 발간하는 등 항일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 선도에 앞장섬

1940

그 후 계속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이끄시다가 12.25 71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서거

1995

대한민국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함

우운 문양목선생 추모사업회 설립취지문  -태안문화원장 정우영

  우리는 과거 선열들의 순국 의거로 말미암아 나라를 찾게되어 해방된 조국에서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선열들에 대한 은혜를 망각한 채 자가망상에 빠져 윤리도덕이나 의리를 잊은 채 입으로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르짖고 있ㅅ브니다. 선열들께서 누구를 위하여 고문을 당하셨고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겠습니까? 우리가 태산같은 은혜를 묻어둔 채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문화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으며 우리나라가 어떻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적인 규모는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 태안 군내에서 만이라도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옥파 이종일 선생의 뒤를 이어 우운 문양목 선생에 대하여도 숭고한 애국정신을 정확히 알림과 아울러 군민의 뜻을 모아 추모하고자 합니다.

  우운 문양목 선생은 1869년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서 출생하여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며 1907년 대동보국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1908년 당시 한국정부의 외무부 고문으로 있던 스티븐스가 미국에 귀국ㅎ여 기자회견을 할 때,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하자 이에 격분하여 재미 애국단체와 회합하고, 진상규명 총대로 뽑혀 그를 방문하였으나 여전히 일본정책을지지하는 발언을 하므로 격분 끝에 그를 구타하였습니다. 그 해 장인환, 전명운 등이 스티븐스를 살해하자 그들의 변호비용을 바련하고자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1년 '대한인국민회'의 총회장으로 교민들의 권익증진에 힘쓰시는 한편, '신한민보' 주필로 일본에 대한 규탄을 멈추지 않는 등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애씃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문양목 선생이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주로 해외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그분의 활동상이 밝혀짐으로써 1995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운 선생에 대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우리 군민 모두가 알고 합심함으로써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교육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생의 숭고한 뜻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하여 우운 문양목 선생 추모사업회를 구성합니다.

 

우운 문양목선생 추모사업회 창립총회
태안신문  -2004-02-21

태안이 낳은 독립운동가 우운 문양목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우국충정의 뜻을 후손에 길이 전하기 위한 추모사업회가 지난 17일 오후 2시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진태구 군수, 문석호 국회의원, 조한무 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과 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 출범했다.
이날 행사에서 정우영 발기인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그동안 우리는 선열들로부터 태산같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망각하고 살아왔다”고 전제한 뒤“뒤늦게나마 우운 선생의 추모사업에 뜻을 같이하고자 모였으니 함께 노력하여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길이 전해지도록 노력하자”고 역설했다.

이어 축사에 나선 진태구 군수는 멀리 이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광복에 일생을 바친 선생의 뜻을 높이 찬양한 뒤“선생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조국의 독립의 밑바탕이 되었음을 우리 태안인들이 가슴깊이 간직하고, 그 뜻을 군정발전의 원동력과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문석호 국회의원도“오늘 이 자리가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우국충정의 뜻을 이어받는 뜻깊은 자리가되리라 믿는다” 며 추모사업회 발족을 축하했으며, 조한무 군의회 의장도“추모사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선생의 뜻을 기리는데 의회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간단한 의식행사가 끝난 뒤 정우영 발기인대표 주재로 창립총회에 들어가 임원선출에 대한 토론을 벌였는데, 추모사업회 회장에 박동윤 도의원을 추천 만장일치로추모사업회장에 추대했으며, 부회장은 정우영 문화원장이 맡기로 했다.
또 나머지 임원에 대해서는 회장단에 위임 선임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이날 추모사업회 회장에 선임된 박동윤 도의원은 수락인사를 통해“지역의 도의원으로서 열심히 노력하여 추모사업회를 잘 이끌어 달라는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추모사업회가 창립됨으로 인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운 문양목 선생의 업적과 뜻을 기리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추모사업회는 우운 선생을 옥파 이종일 선생과 함께 태안을 대표하는 애국지사로 위상을 제고시켜 나가기로 했다.

6월의 독립운동가 문양목선생 
문양목선생의 민족운동과 생애 -안형주 (UCLA 재미한인연구소 총무간사)

태안신문 2004-06-17

문양목선생은 미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1995년 독립장에 추서 된 애국자이다. 그는 음(音)이 같은 두 호(號)를 가지고 문필활동을 하였는데 처음 호는 우운(雩雲)이고 나중에는 우운(友芸)이다.

문양목은 미국본토 재미한인사회 초창기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약 7년간 일선지도자로 단체들을 통일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출산하는 산파역을 하였고 대동공보사장 겸 발행인으로 해외동포들을 토대로 실력양성과 무장운동을 민족운동이 나아갈 방향으로 일찍 정한 선구자였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할 때 헌장을 고쳐서 지방회들은 자치제를 실행하도록 하여 미국, 하와이, 멕시코, 연해주, 만주지역에 100여군데 지부를 거느릴 해외동포의 자치단체로 발전할 기초를 만들고, 이어서 이들을 관할할 중앙총회를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일선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뒤에서 중론을 모으고 자기보다 10년이나 젊은 이승만, 박용만 등을 후원하였는데, 이승만의 <독립정신>(1910), 박용만의 <군인수지>(軍人須知, 1911)와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 1912)을 출판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면에서 이바지하였다. 또한 그는 한학자로서 재미중국인들과 같은 운명에 있는 한국, 중국이 당면한 문제인 개화·자주독립을 토의하고, 해외화교들을 조직하여 중국의 개혁을 이끌던 강유위·양계초의 보황회(保皇會)와 손문의 혁명당과 접촉하여 한인들의 해외민족운동의 폭을 넓히었다. 더구나 그가 처음부터 적극 참가하였던 스티븐스 사건에 조국을 잃고 미국을 토대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아이랜드 출신 변호사들이 동참함으로 해외민족운동의 지평선을 넓히었다. 따라서 문양목은 조국을 서구 강대국에 빼앗기고 미국에 와서 각자의 조국독립운동을 하던 다른 소수민족들과 한국민족이 서로 배우고 도와야 한다는 것을 제일먼저 제시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박용만은 스티븐스 사건이후 아이랜드 사람들 조직인 신펜(Sin Fein)에게서‘임시정부’(무형정부) 개념을 배웠던 것이다.

문양목은 문필가로서 논설, 한시, 시조 등을 남겼는데 재미한인신문에 한시와 시조가 발표된 것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하고 그 후에는 한시와 시조가 발표되지 않아서 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재미한인사회 출판문화역사에 독특한 시기를 장식하였다.

문양목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면에서 재미한인사회와 해외민족운동에 기여하였다.

 

첫째는 재미한인단체장으로 일선 지도자로의 역할이다.

둘째는 재미한인사회의 나이 많은 선비 후원자로서의 역할이다.

셋째는 문필가로의 역할이다. 이 세가지 모습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한 그가 활동한 약7년간에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여러 모습을 살피면서 그의 가장으로서의 인간적 모습을 빼놓을 수 없어 이 글 마지막에 싣는다.


가. 어촌에 태어난 혁명가

문양목은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몽산리의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성촌에서 부친 상도(常道)와 모친 순흥안씨 사이 두 아들 중 차남으로 1869년에 바다가 2㎞도 안 되는 어촌에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문양목의 23대조)을 중시조로 하여 조선조 초에는 성균관 진사들로 맥을 유지하다가 그의 7대조 계운(繼雲)이 호조참판을 그리고 영조조에 무관을 지낸 그의 5대조 덕원(德元)을 마지막으로 한말에는 몰락한 전형적 사대부 집안이었다. 그의 형님의 손자가 타향 당진에 가서 일제 때 머슴살이를 해야 할 정도로 가계는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은 그로 하여금 과거와 한국사회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과 이념에 뛰어들어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게 한것으로 추정된다.

문양목이 어려서 누구에게 한학을 배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도 문중에서 그의 뛰어난 암기력과 두뇌에 대하여 일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유명한 스승에게 많이 배운 경우가 아니라 조금 배우고도 많이 응용하고 스스로 깨달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경우인 것 같다.

문양목은 일찍이 열강들의 한반도 침략정책 그리고 한국정부의 부패·무능을 통탄하고 정부를 개혁하고 국민을 계몽해야 된다고 믿은 지성인으로 행동에 옮기여 반침략·반봉건 기치를 든 동학에 참가하였다. 그가 어느정도 동학에서 활동하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피신하지 않고 고향에 있다가 체포된 것을 미루어 보아 큰 역할은 하지 않은 것 같다.

하여간 문씨 문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그가 체포되어 결박을 당해 포졸에게 끌려가는 것을 처가친척이 보고 주막거리에서 포졸에게 술을 먹이고 “저 사람은 얌전한 선비로 동학에 참가한 적도 없고 도망갈 사람도 아니니 포박을 늦추어 줘라”하여 포박을 늦추어 주자 풀고 도주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거쳐 인천에 가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박용만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한말에 삼남지방 학교시설을 조사하던 학부의 이휘승의 수행 보조관으로 직접 한국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문양목의 한국에서 행적은 대동보국회 회원이었던 남정현이 <우운선생추도문>에서 ‘항상 혁명사상이 있는 서적을 사랑하시고 성품이 관후인자하여 친구를 좋아하시고 민족을 사랑하시다. 우리나라가 점점 부패해감을 개탄하고 울울분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경향각처로 주류하면서 기회를 엿보시더니 이때에 하와이로 다수 동포가 건너옴을 기회로 아시고 1905년에 하와이로 오셨다가 1906년에 미주 상항으로 오신 후에…. ’라고 적고 있다. 이보다 더 자세하고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추가할 가정사정은 부인 김해 김씨가 딸 원필(元弼)을 1895년에 낳고 원필이 세살 때(1898년)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1905년초에 딸을 형님에게 맡기고 하와이로 떠났다.


나. 재미한인사회 지도자 문양목

문양목은 재미한인사회가 1905년 보호조약 이후 배일운동과 1910년 한일합방이후 항일운동을 할 시기에 활약한 지도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재미한인사회는 3단계로 발전하였는데 첫단계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는 각 지역사회에서 동회를 설치하고 질서와 친목을 유지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장려하든 재미한인사회를 조직하던 초창기였다.

둘째단계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을사조약을 체결, 국권침탈이 본격화됨에 재미한인들이 각종 항일단체들을 조직하였고 1907년에 헤이그밀사사건에 따른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등이 발생함에 따라 한인민족주의 단체가 항일운동기관으로 발전하여 국권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1907년 이후 단체통합시기로서 하와이에서 한인합성협회가 수십 개의 단체를 통합하고 이어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총격을 계기로 북미지방과 멕시코, 하와이지방을 망라한 통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성립되는 시기이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를 포함한 시베리아, 남만주 등 해외지역에서 ‘가정부’(무형의 한민족정부)로서 활동하여 해외한인의 권익보호와 국외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문양목은 단체통합시대에 무형정부 이론을 발표하고 해외 한인사회에 팽배하였던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위한 선도사업으로 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과 함께 미국본토에서 활약한 지도자이다.


ㄱ. 대동보국회와 대동공보

대동보국회는 1905년 12월에 칼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장경위·김우제·차미리사·방사겸 등이 동포들의 교육진흥을 위해 세웠던 대동교육회가 1907년 3월에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로 이름을 바꾸고 동년 10월부터 기관지 주간 <대동공보>(大同公報)를 발행하였다. 대동보국회의 목적은 아래와 같다.

大同保國會라 함은 凡上下內外와 男婦老小가 大同合力하여 君國을 保全코자 함으로 二大主義와 三大綱領을 건립하니 밖으로 천하에 公論을 喚起하여 동양의 평화를 保有케 하며 안으로 동포의 衆心을 결합하여 한국의 안녕을 보전하기로 主義를 建하고 인민의 교육을 확장하며 인민의 실업을 興起하고 인민의 자치를 創設하기로 강령을 立하여 保國의 목적을 期達코자 하고(중략) 一邊으로 취지를 세계 각국에 공포하야 본회에 正大한 목적과 광명한 행동으로 大韓에 平和維持함을 言하여 만국에 동정을 廣求하여 一邊 내지 동포에게 仰告하여 본회 主義로서 본회를 국내에 廣說하야 내외 이천만 국민이 一團體一精神을 조성코자 하오니….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동보국회는 모든 국민이 대동협력하여 조국의 君國을 보존함을 목적으로 2대 주의와 3대 강령을 제정하였다. 2대 주의는 밖으로는 천하의 공론을 환기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유케 함이요, 안으로는 동포의 중심(衆心)을 결합하여 한국의 안녕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또 3대 강령이란 인민의 교육확장과 실업흥기(實業興起), 자치창설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발족한 대동보국회는 강경한 항일언론을 펴는 <대동공보>(大同公報) 기관지를 문양목이 사장 겸 발행인이 되어 1907년 10월 3일에 창간하여 그가 처음으로 재미한인사회에 지도자로 나타난다. <대동공보>는 원래 대동교육회의 취지를 이어받고, 언론으로 활성화하는 역할을 담당한 주간지로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위급함을 깨닫고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정신으로 군민(軍民)을 양성, 民의 자격으로 君을 보호, 元氣를 닦아 외환(外患)을 방어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내의 국권실추를 직시하여 구국의 정치성향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군국의 보전을 강조하고 있는 군왕적 성향이 짙었던 것이다’라고 해외한민족 민족운동역사가 윤병석 교수는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애국·동족상부·환란상구를 내세우긴 하였지만 만민평등·민주정체를 종지로 하였던 공립협회와는 성격을 달리하였고 후술하겠지만은 방법도 달랐다. 애국과 환란상부를 목표로 시작한 대동교육회와 공립협회가 대립적 입장에서 조직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대동보국회의 지도자들은 한학자들로 장 경은 강유위·걍계초와 서신교류가 있었고, 문양목·백일규는 동학에 참여한 경력있는 개혁에 눈뜬 한학자들이었고 최운백(崔雲伯)은 하와이에서 중국인들의 보황회회원이었고, 방사겸(方四兼)은 재미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인삼장사로 쿠바까지 갔다 왔고, 장 경은 미국은 물론 남양군도와 호주에까지 인삼을 팔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대동보국회 간부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개화단체 치공당(致公黨, Chinese Free Mason Society)과 남북미 화교 상공인들이 후원하던 <中西日報>와 가깝게 지내며 교류하였고 한국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장 경·문양목의 방문과 근황을 자주 실었다. <中西日報>에 1903년 일년동안 尹溪石이란 인삼장사가 사모관대에 한 옷을 입은 사진과 함께 광고를 내었고, 1906년 2월 16일에는 <痛數韓臣閔泳渙之死罪>란 사설을, 1907년 7월 27일에는 <韓僑僑保國之心>이란 기사에 장 경이 프레스노 대동보국회 지부를 방문한 기사를, 1908년 5월 2일에는 이상설이 兩經滄海客이란 익명으로 <中韓僑民之比較>란 사설을 실었고, 1911년 4월 25일에는 <韓民救同種之誠>이란 제호아래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문양목이 중국본토 기근피해자들을 위해 50불을 전달하였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동학 의병활동은 빠짐없이 보고하였다.

대동보국회의 실세인 장 경은 1907년 9월 23일 아내와 딸 둘을 데리고 상해로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산재해 있는 중국인 거류지와 차이나타운들을 방문하여 인삼도 팔고 그들의 해외동포 조직 그리고 상업술을 연구하여 나름대로 해외중국인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해를 거점으로 출판사업도 하면서 국외한인들이 많은 연해주와 남만주에 대동보국회 지부들을 조직하면서 민족운동을 벌여 나가려고 하였다. 그가 그 후에 싱가폴에 갔다가 객사 한 것도 그의 소신인 해외중국인들과 손잡고 민족운동을 하려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양목은 창간호를 발행한 1907년 10월 3일부터 1908년 4월 9일자를 종간호로 7개월간 존속하다 폐간한 <대동공보> 사장겸 발행인이었다. 그는 신문사사장 뿐만 아니라 대동보국회 학무, 재무, 특별시찰원, 장정세측 기초의 원이었다. 그가 여러 가지 책임을 맡은 것은 대동보국회 회원이 전부 10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단체였고 대다수의 회원들은 농장이나 탄광 등 샌프란시스코에서 먼 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절에 문양목은 독신으로 모든 정력을 대동보국회와 재미한인사회 발전에 쏟아 붓고 있었다. 이때가 대동보국회 전성기로 정기적으로 하와이에서 오는 배에는 삼사십명의 한인이주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방사겸은 혼자서 이들을 접촉하고 회원모집하기에 힘드니 장 경 보고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대동공보>의 논설의 주지는 일본에 빼앗긴 국권회복, 애국심고취, 황제존수, 의병활동 지지였고 외신은 중국에 관한 것이 많고 미국 내 중국인에 관한 것도 많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기사들은 대동(大同)이란 단어가 강유위(康有爲)의 ‘大同思想’에서 나왔고 대동사상이란 중국고전 예기(禮記)에 무차별, 재산공유의 자유로운 평화사회를 대동이라 한 데서 비롯하고 이런 사회·정치·경제이념은 서구사상에 대응하고자 옛 동양사상을 재정립한 것이다. 한편 공립협회와 공립신보는 국외중국인들은 태평천국난(1850∼1864)이후 해외로 진출한 개화파들로서 중국의 개혁을 열망하였고 개화가 되어야 귀국할 수 있는 외국에서 철저한 인종차별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보황회와 손문의 혁명당은 이들의 절실한 소원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특히 보황회원들은 중국인의 민도가 낮아서 국민국가를 실현하는 공화국체제 보다는 영국·일본같이 입헌군주국을 모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다. 중화민국을 세우게 되는 1911년 10월 혁명은 손문의 혁명당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 오랜 군벌들 간에 전쟁으로 통일이 지연되었던 것을 회고하면 진보적 정치이념이 반드시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대동보국회의 소수성은 무장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조국애로 발현되었는데 대동보국회원으로 박용만의 네브라주의 한인소년병학교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백일규·이명섭·남정현·방사겸·유흥조·박장순·정태은 등이다. ‘세계열강과 공립(共立), 사농공상·빈부귀천의 차이가 없는 공립의 뜻에 따른 입헌공화’를 주목적으로 하여 이념상의 차이가 있었다. 발생부수도 <공립신보>는 5,000부에 달했던 것과는 달리 대동공보는 1,500부에 불과하였으나 약 220부씩 국내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대동보국회와 대동공보는 미국 대통령의 행정조치법 제589호에 의하여 한인과 일본인은 하와이에서 미국본토에 입국허가가 없이는 올 수 없게 되었고 경제공황으로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동공보는 발매소를 미국본토에 10개소, 하와이에 3개소, 본국에 22개소, 중국에 1개소 모두 36개소를 두고 있었으나 구독료가 제대로 걷히지 않고 재정가도 없고 회원수도 늘지 않아서 1908년 4월 9일자를 종간호로 7개월만에 폐간되었다.

그러나 대동공보는 로스앤젤레스 보황회, 샌프란시스코 중국영사,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일 큰 중국잡화상, 그리고 버크리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세우려는 일본인 혁명가들도 의연금을 내었다고 기록하여 그들의 폭넓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대동공보가 활자를 구입하기 전에 석판에 손으로 써서 발행하였는데 여백이 남으면 묵화로 매화 또는 국화를 그려서 공간을 처리하였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고 다른 재미한인자료에서 볼 수 없는 선비들의 문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한 역사적 자료이다. 대동공보 활자는 폐간 후 문양목이 로스앤젤리스로 옮기어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을 세워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1910년 초에 간행하였고 그 후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되면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활자와 기계를 옮겨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간행에 사용하였다.


ㄴ. 스티븐스사건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 후 많은 발전을 하고 있고, 일본의 한국정책은 미국의 비율빈 대우보다 나으며, 한국인들은 전과 같이 백성을 학대하지 않는 현 정부를 좋아한다는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을 찬양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문양목이 쓴 <의사장인환공을추도>에는 스티븐스가 스티븐스는 한국정부의 외국인고문으로 일제의 침략외교에 앞장서 1905년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5조약 체결에 앞장서 한국 ‘보호국화’에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후로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여 한국의 공적이라고 지칭되었던 자로 되어있다. 다음날 일요일에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이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본 후 스티븐스의 신문기사에 관하여 두세 사람들이 발설하기 시작하여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가 분개하였다. 그날 저녁에 공립회관에서 공립회원과 대동보국회 임시 공동회을 열고 스티븐스를 찾아서 전일 기자회견 내용이 사실과 다른 허황된 것을 밝혀야 한다고 결정하고 그에게 질문한 대표를 뽑았는데 공립협회의 정재관·최정익 그리고 대동보국회의 문양목·이학현을 선정하여 그들은 바로 스티븐스가 묶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서 성명을 취소하라 하였고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구타하고 호텔에서 축출 당하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모두가 흥분하여 스티븐스를 처치하여 한인의 애국심을 보여야한다고 격론할 때 장인환의사가 ‘어느 분이던지 총을 한 자루 사주시오 내가 그놈을 죽일 터이니’하여 좌중이 엄숙하였을 때 문양목이 같은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충고와 대답할 의무를 느끼고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우리가 용서할 수 업슨 가살의 죄를 지은 국적이라고 인정하여 누구나 죽이겠다는 결심이 있으면 발설도 말고 실행할 것이 올시다. 누가 누구더러 죽이라 죽이지 말라 할 수 없소. 또 그 자를 죽이라고 총을 주던지 총을 사라고 돈을 주던지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나의 생명은 희생할 수 업스니 너의 생명을 희생하여라 함과 마찬가지인 까닭이올시다. 또 지금 이 자리는 비공식 회석이 안이오 닛가.

여기서 누구나 개인 자격으로라도 내가 총을 주리다하고 허락하는 잇다하면 이는 변동 공체로서 로살을 공결하여 자격을 선풀하고 지계까지 공급 파송함이라. 공립협회와 보국회의 본성질에 누구를 죽이라고 한다는 의미가 없는 이상 이 자리에서 누구나 그 자를 죽이겠다는 말을 다시 하지 마는 것이 올켓오. 만일 애국셩의 원동으로 긔여코 의가하는데 대하여는 말어라할 사람이 업슬것이 올시다. 실행하랴거던 침묵중에 암행하시요.

이렇듯 문양목이 설득하여 흥분한 한인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 산회하였고, 그 다음날 3월 23일(월요일) 아침 스티븐스가 선창에 나올 때 양의사와 문양목은 전일 네 대표 중 한사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스저격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다.

위의 문양목 증언에서 3가지 중요점을 발견하다. 첫째는 장인환의사가 혹시 전명운의사가 실수하지 않을까 하여 친구가 맡겨놓았던 총을 가지고 나갔다는 수동적 동기를 번복하는 것이다. 장인환 의사는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임시공동회에서 스티븐스저격을 결의하거나 공모하려는 것을 반대하여 한인단체나 무리들이 사건에 개입치 않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문양목이 임시공동회에서 스티븐스처치를 공모내지 결의하지 못하게 하여 스티븐스 저격 후 재판과정에서 격렬한 개인의 우국지심으로 행한 행위로 변론할 수 있게 하여 제2등 살인죄로 25년 금고선고를 받았다. 문양목은 개인과 단체, 공과 사의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슬기로운 선비의 풍모를 스티븐스 사건에서 보여주었다. 그는 사리를 따져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대를 이루어 중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문양목은 스티븐스가 전날 저녁에 모여서 두 의사 공판을 대비하여 판사전담위원 7인을 선임하였을 때 그중 한사람으로 뽑히었고, 변호사비용 의연금을 걷기로 하였을 때 ‘독립재판’으로 규정하고 후원하며 재무로 봉사하였다. 문양목은 변호사 선임할 때 동양인으로 미국에서 오래 차별대우를 받은 중국인들과 충분한 의견교환을 하였을 것이고, 나라를 영국에 잃고 미국에 와서 붉은 머리털을 가졌다고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이랜드 출신 변호사들을 추천 받았을 것이다. 양의사를 변호한 세 변호사중 네탄 코그랜(Nathan C. Coghlan)은 아이랜드 사람으로 변호사비를 받지 않았다.


ㄷ.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문양목

재미한인단체의 통합은 헤이그밀사 이상설·이종위가 미국에 오면서부터 신문지상을 통해 광무황제 고문이었던 호머 헐벗과 하와이이민시절 공헌이 많았던 안정수가 글을 발표함으로 공론이 되었다. 그후 장인환·전명운 의사 변호의 연금 모집을 각 단체들이 협력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1908년 7월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 해외한족독립운동 방향을 설정하고 통일된 기구를 만들 기초로 한인지역사회를 연락할 통신원을 각 지역사회에 두어 통신망을 조직하고 결속을 다짐하였다. 박용만이 덴버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 주장한 것은 연락원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대표자를 보내어 토론하자고 하였는데 이것은 광대한 미주서부지역에 걸쳐 800명의 회원과 지방조직을 가지고 있던 공립협회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박용만이 한인단체들의 연합을 주장하는데 공립협회에서 통합을 주장하였고 대회장소도 덴버를 반대하였으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참가도 안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문양목은 방사겸을 덴버에 보내어 대회가 성공하도록 후원하였다. 문양목은 핵심지도세력이 서북인인 안창호추종자들이고 정치이념도 진보적인 공립협회와 서부해안에서 대결하지 않고 미국중부로 개척정신으로 떠나갔던 박용만을 적극 지원하였다. 박용만은 네브라스카에 1905년에 가서 많은 노동자들과 어린 학생들을 커니시에 남의 집에서 일하며 학교다니는 '스클보이'로 취직시키고 덴버에 와서 하와이에서 건너오는 동포들을 위해 노동주선소를 경영하였고 문양목은 동포들에게 덴버의 박용만을 찾아가 일자리를 구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양목도 하와이에서 1906년에 미국본토로 건너와서 코로라도 덴버 근처에서 한시호·임영택과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하여간 문양목은 1908년 7월 덴버에서 애국동지 대표대회가 열릴 때까지 통합보다 연합을 주장하였고 그 후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해 국민회가 1909년 2월 1일 차출되자 대동보국회가 미약해지고 경제공항으로 하와이에서 동포들도 이주해오지 않고하여 국민회에 합동하는 것을 제시하고 백일규와 대동보국회 회원들에게 설득하여 중론을 보았다. 그 결과로 1910년 5월 10일 정식으로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가 되었다. 문양목은 이렇듯 대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중론을 모을 수 있는 정연한 논리와 설득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모든 재미한인단체들이 통합하여 창출한 대한인국민회가 된 후 문양목은 대동보국회 회원이었던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1910년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곧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고쳐야 해외한인들을 총괄할 수 있는 기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네브라스카주 린컨에가서 박용만에게 간고히 신한민보주필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고 박용만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그의 평소에 생각하였던 정치개념들을 사설로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무형정부(임시정부)개념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박용만은 정치학도로서 조국을 잃고 미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아이랜드 사람들의 신펜운동을 연구하고 그들의 무형정부개념과 인두세를 걷는 것을 본받아 네브라스카주에 한인교민단을 만들고 인두세를 걷어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운영하였다.

신한민보주필 박용만은 창의적이고 도전적 논설을 많이 쓰고 대한인국민회 헌장을 고쳐서 1년후에는 멕시코, 큐바, 하와이, 연해주, 만주에 120개 지부를 거느린 거대한 해외한인단체로 발전할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문양목은 총회장 임기1년을 못 마치고 9월초에 사임하였고 박용만도 약속대로 6개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고 린컨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안창호가 극동에서 미국에 도착하므로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으나 아직 고증할 증거는 못 찾고 있다. 그러나 문양목은 1912년 11월에 박용만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만들어 여러나라에 흩어져 있는 116개의 지부를 총괄할 기반을 닦았으며, 대한인국민회는 통일시대를 맞아 문명퇴치, 애국심고취, 해외에서 한인권익을 보호하는 명실공히 정부를 대신하는 기구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다. 후원자 문양목

문양목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35세 노동자로 하와이에 이민와서 자기보다 10년 젊은 이승만·박용만을 장래의 유망한 민족지도자로 믿고 성심껏 밀어주어 그들이 재미 한인사회에서 그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문양목의 후원은 박용만이 1908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최초의 국외한인들 대표자대회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것 같이 지역한인사회를 연결하기 위한 연락원 설치와 무관학교설립을 결정하였고 이러한 대동단결 연합운동은 1909년 2월 1일 공립협회와 한인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출범시키었다.

두 번째 그의 후원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한국에서 오는 유학생들과 서부에 있던 학생들을 네브라스카 린컨시에서 공부하는 박용만에게 가서 지도를 받으라고 권고하여 1910년경에는 한인유학생이 네브라스카에 약 80명이 있었고 그들은 여름방학에 헤이스팅스의 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박용만에게 받은 것이다. 문양목은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선출된 후 린컨시까지 찾아와 박용만에게 국민회일을 보아달라고 부탁하였고 박용만은 학업을 중단하고 6개월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신한민보와 국민회일을 보며 헌장을 고쳤던 것이다.

문양목과 박용만은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였다.

세 번째 문양목의 후원사업은 재미한인들이 집필한 서적을 출판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의 한성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을 1910년에 대동신서관에서 동지들의 재정도움을 받아 발행하였고, 이어서 박용만의 <군인수지>를 1911년에 <국민개병설>을 1912년에 출판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문양목의 출판문화운동은 그의 서적을 사랑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전통적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 서양문명을 정규대학에서 제대로 배우는 이승만과 박용만 그리고 그가 후원하던 유학생들은 그의 선비로서 못 다한 유학의 꿈을 대신 실현하여 주는 사람들이었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가서 독립운동기지로 오아후섬 가할루지방 파인애플농장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1914년 6월 10일에 제막식을 할 때에 문양목이 제일 앞줄 한가운데 앉아 있는 사진은 그가 얼마나 박용만을 열심히 지원하는 동지였던가를 보여준다.


라. 문양목의 글과 시

문양목이 남긴 글, 한시 그리고 시조는 모두 재미한인의 신문과 잡지에 남아있다. 그는 논설 19개, 한시 9편 그리고 시조 6편을 남기었다. 그의 글들은 거의 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 발표한 것들이다.

그의 논설은 미국본토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발행하였던 월간 잡지 <대도>에 발표하였는데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숭무정신으로 무관학교를 운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박용만을 격려하는 글들이다. 그는 소년병학교와 하와이 국민군단을 치하하는 글을 누구보다 먼저썼다. 둘째는 재미한인들을 해외애국단체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 할 것을 훈계하는 글들이다. 대표적인 글들은 <의무는 권리를 산출하는 어미>, <偏黨心의惡結果>, <아편에 취한 꿈을 깨우라>등이다. 그리고 그는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수필에 가까운 감상문들도 썼는데 <미국국부의 탄일기념식과 관광자의 감상>, <대치옥을 감상>을 썼다. 끝으로 문양목은 그만이 쓸 수 있는 두 글을 남기었는데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이 싸움을 할 때 <밋치광이 싸흠인가 주정방이 싸흠인가>를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통곡하며 썼고, 장인환의사가 자살을 하였을 때 <의사 장인환공을 추도>를 스티븐스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증언을 남기었다.

위에서 살핀 것 같이 그의 글은 사회문제나 사건을 시비를 가리고 따져서 중론을 모으는 언론인의 글이 아니라 개혁에 눈 뜬 전통 인본주의 동양사상과 가치관을 지닌 선비로서의 글들이다. 그는 조국과 한민족이 맞은 암울한 시대에 큰 지도자가 재미한인사회에 나타나서 난세를 해치고 나가길 바랐던 영웅숭배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문양목은 논설보다 뛰어난 한시로 유명하다. 한문을 좀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한시를 보고는 그가 한학자였느냐고 묻는다. 초기 재미한인의 한시가 약 60수정도 남아 있는데 문양목의 한시가 9수이고 박용만과 백일규까지 합치면 절반이 된다. 문양목의 한시 중에서 친구에게 주는 시가 3수나 있어 그가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였는지를 알 수 있고 옥중의 장인환 의사를 방문하고 한시를 지어 그가 얼마나 장의사를 존경하고 동정하였나를 보여준다.

문양목은 시조도 발표하였는데 모두 하와이에 갔을 때 국민보에 발표한 것이다. 박용만도 그와 어울려 번갈아 가며 시조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시조를 한시같이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 여흥으로 시조를 지며 배운 듯 시조의 종장 마지막 구절은 적지 않아 시조를 부를 때 부르지 않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문양목이 하와이에 있을 때 작가를 밝히지 않은 시조가 ‘國民風아’라는 제호로 9번 발표되었는데 이 시조들은 아마도 문양목과 박용만이 합작인 것 같다. 한시와 시조는 문양목이 사회활동을 하던 기간에만 발표되었으므로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재미한인 출판문화사에 독특한 시기를 장식하였다. 이것은 상투를 자르고 도포를 벗어버리고 해외에 나갔던 개혁파 선비들의 내면적 모습이기도 하다. 그들의 한시와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유산이었고 국외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독립투사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마. 가장 문양목

고국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신학문을 접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하와이 이민길에 오른 문양목은 미국 본토에 가서도 생활을 노동으로 해결하고 사회 일에 매이게 되어 결국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없었고, 원래 상업과는 거리가 먼 유가에서 성장하여서 그는 다른 한인들과 같이 사업할 기회를 찾고 사업을 해보려고 한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많은 한인들이 그랬듯이 그에게 익숙한 것은 농사일이었다.

문양목은 1913년 하와이에 있을 때 사진을 본국에 보내 교환하여 결혼한 이찬성과 1914년에 다시 미국본토로 돌아와 첫아들 덕소(헨리)를 낳았다. 문양목은 고국에 두고 온 딸 원필의 교육을 서울 배제학당 교장인 신흥우에게 부탁하여 신흥우는 원필을 서울에 데려다 이화학당에 입학시켰고 그녀는 같은 학급에 유관순과 기숙사생활을 하며 이화학당은 다녔고 3.1운동에 참여하였다. 문원필은 유관순과 이화학당에서 찍은 사진 2장을 남기었다. 3.1운동 후 원필은 이수석(李秀石)과 결혼하여 3남2녀를 낳았고 그녀는 문양목이 별세할 때까지 서신연락이 있었고 지금도 그녀의 후손들과 문양목의 3남 한소와 소식이 오고간다.

문양목은 1915년 칼리포니아주 마운텐비유(Mountain View)에 이주하여 김원택의 농장에서 종사하다가, 1차대전 중에는 미국연방정부에서 사탕무농사를 보조해 주고 가격을 유지해 주어서 칼리포니아주 만티카(Menteca)에서 사탕무재배에 종사하였다. 그는 만티카에서 한인2세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운영하였으나 학생수가 많지 않아 한글학교운영만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만티카에서 1916년에 딸 '하나'를 출생하였다. 2년 후 1918년 만티카에서 2남 합소(에드워드)를 출생하였다.

문양목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칼리포니아주 과일농사지역 머세드(Merced), 마데라(Madera)에서 한인노동자들을 상대로 방과 식사를 제공하는 하숙업을 경영하다가 3·1운동이후 김형제상회(Kim Brothers) 때문에 한인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리들리(Reedley)에 이사하여 하숙업을 1920년부터 8년간 하였고 3남 한소(William)가 이곳에서 1922년 태어나 미국에서 3남 1녀를 기르게 되었다.

1928년 문양목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언저리에 세탁소를 차렸으나 생활은 곤궁하여 자동차도 흔한 라디오도 없이 살았고 저녁식사는 돼지고기 10전어치, 두부 10전어치(두부 세모), 그리고 밥과 김치였다고 한소는 추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정신적으로 가난하지 않았고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큰아들 덕소는 이사를 자주 다녀서 학교를 옮기어도 그는 언제나 1등을 하였고 끝내 월반을 하여 한인사회에 화제가 되었다.

문양목이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이사 왔을 때 교포들은 그를 국민회지방회 회장으로 선임하였는데 그는 얼마 안 되는 국민회 회비를 몇 년간 내지 못하여 회원 자격을 상실한지 오래돼 회장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곤궁하게 살았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올곧은 선비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문양목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 후에도 여름철에는 리들리 김형제상회(김호와 동업자 김형순의 농장)에 가서 일을 하였다. 큰아들 덕소가 명문 버크리대학 의과대학을 다닐 때 김형제상회의 도움을 받아서 그는 늘 고맙고 미안해 하였다. 덕소는 우수한 성적으로 1935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촉망받는 병리학학자가 되었고 다른 자녀들도 모두 우등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문양목은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생계를 돕지 못하게 되어서 차남 합소는 학업을 중단하고 일을 해서 집안살림을 도왔고 사위 박필립(의사)도 도왔다.

문양목은 두 번째 뇌졸중을 받고는 자택에서 72세를 일기로 1940년 12월 25일 영민하였다.


바. 맺는말

문양목은 한말 개화에 눈 뜬 선비로서 반침략·반봉건에 가치를 든 동학에 참가하였고 미국에 망명가서는 단체통일운동과 해외독립운동기지 마련에 참가하였다. 그는 또한 개혁과 독립을 유지하려는 해외중국인들과 휴대하여 국외민족운동의 지평선을 넓히었다. 그는 독립운동에 정신적 도움이 되는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박용만의 <군인수지> 그리고 <국민개병설>을 출판하였다. 국내에서 큰 선비 월남 이상재가 젊은 독립협회지도자 이승만을 후원하였듯이, 우운 문양목은 미국에서 젊은 지도자들 이승만과 박용만을 성심껏 후원하였다. 문양목은 몇 명 안되는 문예에 조예가 깊은 선비로서 논설·한시·시조를 발표하여 재미한인사회 출판문화에 독특한 시기를 장식하여 그가 풍부한 감성과 사려가 깊은 선비였음을 보여주는 그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문양목은 35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끝내 언어의 장벽을 못 넘고 상업을 중시하는 주류사회문화에 적응 못하여 노동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으나 그의 바르게 삶을 사는 태도와 교육열은 자녀들이 이어 받아 아들 셋 중 둘이 의사가 되었고 큰아들은 세계병리학계에서 주목받는 학자가 되었다. 그의 손자들도 미국 동부의 명문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들로 활약하고 있고 손녀들은 공인 계리사들로 활동하고 있어 현재 200만이 넘는 재미한인들에게 미국주류사회 전문직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규범가문이 되었다.

 

  영박(永樸,章之,樸) 1880. 8. 3~1930.12.18 대구 달성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

영남의 거유(巨儒)로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부터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기 전 그가 별세할 때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계속 송달해 주어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 진작 시켰다. 1930년 12월 그가 별세하자
재정적인 지원을 사례하고, 그의 자손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1931년에 이교재(李敎載)를 국내에 밀파하여 그를 애도하는 추조문(追弔文)과 특발문(特發文)을 보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상도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이교재는 일경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자택 천장에 감추어 두었는데, 광복 후에야 발견하여 비로소 그의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당시 영남지방의 유학자로서 한서(漢書)만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인수문고목록(仁壽文庫目錄)을 펴내는 등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는데 현재도 달성군 화원면 인흥촌(仁興村)의 수봉정사(壽峯精舍)에는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고가 남아 있다.

임시정부에서 보내 온 특발문 즉 격문의 역문(譯文)은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동양평화와 유신(維新)을 크게 내세워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고인(故人)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 주어 무궁한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
註 대한민국임시정부 특발문(1931. 10. 3) 및 추조문

 

  영산(英山) 1881. 1. 8~1959.10. 8 충남 서산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4월 4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정미면 천의(天宜) 장날을 이용하여 1천여 명의 대호지면(大湖芝面)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대호지면의 면민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시위를 계획해 갔다. 평소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가던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宋在萬)이 행동총책을 맡고, 면장 이인정(李寅正),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原) 등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3월 19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군과 일경에 의해 송재만·이인정 등의 주동인물이 피체되고 말았다.
이후 이들 면민은 다시금 만세시위를 추진하여 이웃 정미면 천의 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호지면에서 출발한 이들은 정미면 천의리에 이르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는 한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나 서산·당진·공주에서까지 동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이들 만세군중은 해산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인사들이 피체되었는데 영산은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註·범죄인명부  ·당진지역항일독립운동사(당진문화원, 1991) 제5집 148∼163면
  영주(榮柱,폰同) 1909.10.30~1970. 6.30 전남 해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33년 1월 28일 전남 해남(海南)에서 농민지도기관(農民指導機關) 설치를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농민조합(農民組合)을 결성하였으며, 동년 10월에 풍수해를 당하여 농작물 작황이 부진하자 소작료 감면요구 운동을 전개하여 그 관철을 목적으로 농민들을 규합하며 활동하던 중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36. 12. 28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鏞,昌錫) 1861. 8.27~1926. 3.15 경남 합천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써 문용도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註·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50面  · 翁金昌淑一代記(心山事業會) 98面
·吾岡文集(文鏞의 子 文存浩의 文集, 1959) 卷之七 19∼2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935面
  용기(鏞祺) 1878. 5.19~1919. 4. 4 전북 익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리지방은 호남교통의 요지로서 3월 26일 이래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일본의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전주(全州)·군산(群山)·익산방면의 통행자를 일일이 검색하고 있어서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상의하고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정해진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이중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 등도 합세하였다. 이때의 상황은 일제가 이미 헌병과 보병부대로 병력을 강화하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의 대결이 불가피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나 1천여명이 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여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군중이 이에 대항하며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그 왼팔마저 베어 버리고 그는 두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이날 거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운동정신은 4월 5일 이후 군내의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21·522·53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85면

솜리만세운동 이끈 문용기 열사

독립만세 현장에서 일본군의 칼에 오른팔, 왼팔이 잘리운 가운데서도 대한 독립을 외치다 끝내는 저들의 총칼에 희생된  귀신도 곡할 그의 놀라운 애국의 혼      시민시대 조형조 기자

각계의 노력으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역사 속 의인(義人) 열사(烈士)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3.1운동은 3월 1일에 국한된 독립운동이 아니다. 파고다에서의 함성을 시작으로 전국방방곡곡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부산만 하더라도 4월 중순까지 3.1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올해 제87주년 3.1절을 맞아 우리가 새롭게 바라봐야할 열사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이리 솜리장터에서 4.4만세운동을 펼치다 끝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하신 문용기 열사가 바로 그 분이다.
‘익산시史’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이리에서는 남전교회 교인인 김만순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 여러 차례 숙의한 끝에 이리 장날인 1919년 4월 4일을 기해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 날의 시위는 3대로 나뉘어 행해졌는데 제1대는 최대위, 제2대는 문용기, 제3대는 김만순이 이끌었다고 되어있다.
제87주년 3.1절을 맞아 본지가 특별히 전북 익산 출신의 문용기 열사를 취재한 것은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오른팔, 왼팔을 차례대로 절단되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는 일본인의 전신 육시에 의해 순국한 아주 특별한 독립운동이 아직까지 그 가치만큼 잘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용기 열사는 ‘4․4솜리만세운동’을 기획했고 준비했고 이끌었던 핵심 인물이다. 문 열사에 대한 기록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남전교회100년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남전교회 100년사’(金鍾三 著)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걸 기초로 기사를 작성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솜리만세운동 주도한 문용기 열사

비밀리에 준비된 4.4솜리만세운동
당시 전국 각지의 학교들은 3ㆍ1독립만세사건으로 인해 대부분 휴교상태였다.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 등지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은 급히 귀향하여 자신들이 다니던 학교 주변의 만세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했고,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운동 조직을 통해 귀향하여 고향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문용기 열사는 오산면 오산리 관음부락 출신으로 당시에 함경도 갑산에서 선교사들의 현지 통역인으로서 선교사들을 도와 포교활동을 도와주고 있다가 급히 귀향하여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문 열사는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8년간이나 활동하면서 자금을 모아 만주 독립군의 군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해 주고 있던 터였다. 그런 그가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때에 고향을 찾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의사를 기리기 위한
순국열사충혼비(오산면內 소재)

문 열사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한 모교회이고 당시 그의 모친 김씨와 부인 최정자(崔貞子, 1887~1955) 여사가 다니고 있던 남전교회를 방문함으로써 본격적인 솜리민중항쟁의 거사 계획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먼저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던 도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솜리독립만세운동을 위한 거사의 실제적인 계획은 최대진 목사와 함께 협의하여 추진하였다.
솜리항쟁을 위한 거사계획은 최대진 목사(당시 40세)의 민족주의에 기초한 영웅적인 기질과 문용기 열사(당시 41세)의 의협심과 독립의지가 투합하여 이루어낸 결과인 셈이다. 이들은 거사시기와 장소를 택하고 그에 따른 방법, 그리고 그 준비를 위해서는 앞서 치러진 만세운동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준비에 착오가 없도록 하였다.
최 목사와 문 열사는 다른 지역의 대부분의 만세운동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택해서 전개되었던 점을 착안하여 거사일을 솜리의 장날인 4월 4일(음력 3월 4일)로 택했다. 당시 솜리의 장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성황을 이루었고,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만세운동의 효과는 대단했다.
또한 그들은 군산 만세운동과 익산의 만세운동이 거사 전에 발각되었던 점을 중시하여 보안에 신중을 기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만세운동의 주체인 주동세력은 남전교회의 교인으로만 국한시키되, 거사 당일 아침까지도 준비에 참여한 일부 교인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이 같은 그들의 의도는 계획대로 실천되었으며 거사 당일 아침까지도 그동안 준비에 참가했던 교인들 외에는 그 누구도 독립만세운동에 남전교회의 교인들이 주동으로 참가하리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어쨌든 철저한 보안 속에서 거사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선 최대진 목사와 문용기 열사는 교회의 직분자들 중 일부와 도남학교 학생들 중에 나이가 위인 학생 수명을 선별하여 거사 준비에 동참시키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미 3월초에 김병수로부터 전해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천장 더 만들기로 하고 극비리에 교회(당시 영성부락에 위치) 가까이에 있는 교인들 집(김내문, 박다연, 정군덕)에서 숙식까지 하면서 꼬박 사흘 동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문용기는 보다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군산 영명학교 후배이자 전북지방의 만세운동의 연락책이었던 김병수(세브란스 의전 학생)와 만나 이리에서의 거사계획에 대해 숙의하고 그에게 거사당일 직접 행동대원으로 나서서 대열을 선도할 청년들을 포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로써 당시 이 지역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 3ㆍ1만세운동시에 그곳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각 학교가 휴교하자 귀향하여 집에 있던 청년들을 행동책으로 삼을 수 있었다. 문 열사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학생 중에 급장(반장)으로서 매사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솔선수범하는 박영문(朴泳文)을 신임하여 그에게 비밀리에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당부하고, 다른 대원들과의 연통을 위한 연락책임이나 거사를 위한 사소한 준비를 맡겼다.
또 문용기 열사의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전, 주일예배 후에 예배당에서 공식적으로 전교인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서 연설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철저한 보안 속에서 최 목사와 문 열사는 솜리독립만세운동의 거사계획을 수립하였고,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해 극비리에 서로 접촉하면서 부단하게 활동하였다. 계획 실천의 전위조직은 김병수, 최대위, 박영문을 위시한 청년학생 조직과 남전교회의 직분을 가진 교인들 일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자 되어
4월 3일 목요일이었다. 
솜리민중항쟁의 거사를 하루 앞둔 날, 일을 준비하고 있던 남전교회의 교인들 위시한 참여자들은 끝마무리를 위해 긴장한 채로 바쁘게 움직였다. 대형 깃발을 만들고, 현수막을 만들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교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각 부락의 책임자들(구역장)에게 연락을 취하여 ‘내일 오전에 교회로 모일 것’과 ‘복장은 흰색 한복을 차려 입을 것’ 등을 전달하면서, 이 부락 저 부락으로 바쁘게 뛰어 다녔다.
한편, 문 열사는 학생ㆍ청년조직을 운용하여 다음날의 만세운동 장소에 대한 사전 답사를 실시했다. 장터를 돌아보며 길목과 요소요소에 배치해 둘 행동대원들의 자리와 최초 집결장소, 시위대열의 이동 통로에 대해서, 또 일본 헌병대의 주둔지인 대교농장 부근까지도 돌아보았을 것이다.


 
익산 3.1만세운동(4.4솜리만세의거)
         관련 중요기록

후손들이 말하는 그의 인물됨이나 철두철미하고 치밀했다는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추정은 어렵지 않다.
솜리만세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드러난 문헌과 후손들의 증언, 그리고 생존해 계신 분들의 증언까지를 포함하여 D-데이의 시나리오를 가상해서 구성해 보면 먼저 오전 중에 남전교회를 출발, 정오에 이리역 앞에 모두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대열을 나누어 장터를 돌아 일본군의 주둔지인 대교농장으로 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한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거사의 전야... 긴장과 불안, 초조, 그리고 거사의 성공을 위하여 지새우는 밤이 그렇게, 거사 준비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에게 하얗게 지나가고 있었다.

 

4월 4일, 솜리장터의 함성4월 4일(陰 3월 4일), 금요일.
옥익꾸뜰의 들판을 가로질러 저편 옥성산(沃城山) 마루 너머로 불그레한 태양이 솟구쳤다. 솜리의 장날이었다. 장터로 향하는 장꾼들의 부산한 몸놀림은 들녘의 논두렁길을 따라, 아스팔트로 포장된 신작로를 따라 건들거리며 희뿌연 안개 속으로 하얀 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전교회의 아침은 바빴다. 하얀 한복으로 차려입은 교인들은 교회의 안마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교인들은 교회 가까이에 있는 부락(남참, 북참, 영성 등)의 非신앙인들에게도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교회로 몰려들었다. 일부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남참이나 북참, 그리고 영성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남전교회 4.4만세의거 제79주년 기념행사

문 열사는 거사를 주도적으로 준비해 온 교회의 직임자들과 상의하여 준비된 거사는 차질이 없도록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박영문을 통해서는 도남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합세하게 하고, 좀 나이가 든 학생들은 장터에서 장꾼들을 선동하는 선동조로 활약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모두 150명가량 되었다. 이윽고 각각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뭉치씩 받아서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넣어서 대님으로 묶고는 모두들 솜리장터로 향했다. 정오에 이리역 앞에서 ‘독립선언선포식’을 갖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4.4솜리장터 만세의거 운동의 추모 행사

이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그 사지를 향해 남전교회의 교인들과 거사 참가자들은 하얗게, 하얗게, 휑한 들녘을 가로질러 동구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오.
이리역 앞 광장에는 ‘朝鮮獨立萬歲’라고 빨갛게 적힌 커다란 깃발이 높은 대나무 장대 위에 매어져 푸른 하늘을 이고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문용기를 비롯한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최대위... 아홉 살의 어린 소년 정군덕, 정명안... 등등의 남전교회 교인들이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이미 아침부터 장터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선동조격인 청년 학생들이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장꾼들에게 “오늘 정오에 역전에서 만세운동을 한다”고 알려주면서 참가할 것을 권했던 만큼, 역 앞에 운집한 시위 군중의 수는 금방 1천여 명이 될 정도로 불어났다. 도남학교의 어린 학생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열심히 나누어 주었다.
12시 30분경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해 보이는 40대 한 사람이 운집한 군중들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의협심으로 불타는 듯한 눈빛과 위풍당당한 자세는 그 위세만으로도 능히 어떤 상대라도 기진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서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하야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문 열사는 독립선언서를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목청을 돋우었다. 군중들은 숨소리조차 낮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독립선언서 읽기를 다 마친 문용기 열사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윽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가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하늘을 찌를 듯한 우렁찬 함성이 솜리장안을 뒤흔들었고, 손과 손에 들려진 태극기는 세차게 흔들리며 물결치기 시작했다. 10여 년간이나 보이지 않았던 태극기가 온 장안에서 하얗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 열사의 선창에 따라 만세 삼창을 복창하는 시위 군중들의 함성은 피에 끓고 있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는 군중들의 입에서 만세의 함성은 끊일 줄 모르고 계속 터져 나왔다. 자주독립(自主獨立)과 민족자결(民族自決)을 갈구하는 함성은 우리 민족의 환호성이요, 절규의 몸부림이었으며 울부짖음이었다.
천부적인 웅변가의 재능을 지녔던 문 열사는 군중들을 향해 조국 독립의 당위성과 민족의 대오각성을 촉구하고, 그리고 모두 행진하여 일본군의 본영이 있는 대교농장으로 갈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서 역전 광장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連呼)하면서 장터를 돌아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각 방향에서 일본군 헌병들의 주둔지인 대교농장으로 진출함으로써 맨주먹이니 비폭력적인 만세시위로 압박을 가하여 그들 앞에서 우리 민족의 숭고한 독립의지를 당당하게 천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각 대열은 “대한독립만세”를 위치며, 계획된 통로를 따라 시장 안의 사거리로 육박해 들어갔다. 가장 먼저 사거리로 들어선 대열은 문용기 선생이 선도한 대열이었다.

 

핏물로 가득한 솜리장터

드디어 시위대의 시야에 붉은 색조의 담벼락 너머로 대교농장 건물이 보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맨손으로 일으킨 민중의 만세운동은 일본인들의 눈앞에서 더욱 그 기개가 충천하였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오직 그 소리만이 온 장안을 뒤흔들고,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본 헌병들은 농장 안에 머문 채, 문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모두들 농장의 담벼락을 사대(射臺)삼아 시위 군중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민중의 외침은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더 높아만 갔다.
그때 문득 “탕! 탕! 탕!...”

문용기 열사의 짠왓킨스중학교 졸업증서(1911년 6월 15일)

시위 군중의 만세소리에 묻힌 총성이 가늘게 울렸다. 연이어 서너 발의 총성이 더 울리며 장안을 흔들었다. 시위대는 잠시 주춤하여 술렁거렸으나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일본군들이 허공에다 위협사격을 해댄 것이었다. 그러나 시위 군중의 대열이 흩어지기는커녕 만세소리만 더욱 높아졌다. 곧이어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일본군들이 포진해 있는 대장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군들은 당황하여 시위 군중들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비폭력을 통한 결연한 독립의지였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비명과 함께 혼비백산한 시위 군중의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총격을 당하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핏물이 장터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피어린 울부짖음이 온 장터를 떠돌고, 곳곳에서 다친 사람들을 부축해서 옮기느라 황망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일본군은 총검으로 무장한 채로 장안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과 갈고리 등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농장원들까지 투입하여, 비무장의 시위 군중들에게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했다. 그들은 곤봉이나 갈고리로 시위 군중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다고 당시 현장을 목격한 한 선교사의 선교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여섯 명이 적의 총검에 희생되었고 맨주먹의 민중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제일 서두에 서서 솜리민중항쟁을 이루어낸 사람은 문 열사와 도남학교 학생인 박영문(朴泳文)을 비롯하여 신덕리의 장경춘(張京春) 신도, 박도현(朴道賢, 소재미상), 그리고 이리 사람 서공유(徐公有), 이충규(李忠圭) 등이었다. 모두들 기독교인들이었으며 남전교회 교인도 네 명이나 되었다. 선두에 서서 솜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기에 인명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일본군에게 체포된 사람도 39명이나 되었다.
일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장안에는 일본인들의 총탄에 맞거나 총검과 곤봉, 갈고리 등의 흉기에 찔리거나 가격을 당한 시위 군중들은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특히 대열의 앞에 나섰던 남전교회 교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치자 격분하여 마침내 맨주먹으로 일본군에 대항하여 격투를 벌였다. 맨손으로 덤벼들어 적의 총검과 곤봉과 갈고리를 빼앗고, 빼앗은 무기를 같이 휘두르며 투쟁했다.
이에 대한 당시 일본군 헌병대의 시위상황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와 남전리에서 기독교도 약 30여명이 곤봉으로 무장하고 혹은 그 중에는 권총이나 비수를 휴대하여 헌병을 저격하고 헌병보조원을 구타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했으며, 또 일부는 일본수비대를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헌병대에 반항하고, 일본인 점포에 난입하여 파괴함으로써 분풀이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보고서에는 한 사람을 적시(摘示)하여 “首謨者의 1人으로서 劍銃의 ?擊을 받은 者는 絶命에 이르기까지 萬世를 唱하다”라고 함으로써, 당시에 죽음에 이르면서도 만세를 부른, 투혼을 발휘한 문 열사의 의연한 행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만세 시위가 있던 그날, 문 열사는 제일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다. 솜리시장 안의 사거리에 이르러 일본군의 총탄세례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시위 군중들이 몸을 숨기며 피했으나 문 열사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태극기를 더 세차게 흔들면서 동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을 독려하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쳐댔다.
이에 일본 헌병이 일본도(길이 60cm 이상이 되는 긴 칼)를 빼어들더니 문용기 열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태극기를 흔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을 그 긴 칼 ‘다캄로 내리쳤다. 순간, 비명과 함께 떨어진 그의 오른팔에선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문 열사는 골수를 쪼개는 고통을 참아내며 다시 일어섰다. 이를 악물고 왼팔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었고, 또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통도 잊은 분노의 외침이었으리라. 그때 ‘다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열사의 왼팔마저 잘려나가고 말았다. 열사는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의 주위로 선혈이 낭자하여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열사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두 팔이 잘려나간 팔뚝에선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두 눈 부릅떠 다시 소리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부릅뜬 두 눈에선 핏물이 괴고, 피를 뿌리며 맨몸으로 대열의 앞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문 열사의 그 투혼과 의분은 형언할 길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일본군들은 그를 에워싸고는 총검으로 가슴과 복부, 옆구리를 찌르고,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열사의 후두부를 강타하니 그대로 쓰러졌다.
문 열사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겨운 소리로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 열사의 죽음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문 열사의 다짐대로 의사(義士)의 붉은 피로, 의로운 영혼의 음조(陰助)로 대한민국은 마침내 독립의 날을 맞았다.
당시 4․4솜리만세운동에서는 문용기 열사와 함께 박도현ㆍ장경춘ㆍ박영문ㆍ서공유(徐公有)ㆍ이충규(李忠圭) 등 6명이 순절했고, 김병수 등 수십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36명이 검거됐다고 한다.

▲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문용기 열사가 순국 당시 입었던 두루마기와 저고리

문용기 열사를 기리는 사람들

문 열사가 솜리장터에서 장렬하게 산화했을 그 시간, 문 열사의 노모와 아내 최정자 여사는 관음리 집 안마당에서 아침나절 들녘에서 뜯어 온 나물을 한가로이 다듬고 있었다.
거사 당일 아침, 나물을 뜯으려고 집을 나서는 노모와 부인에게 문 열사는 “많이 캐 오라”는 말 외에 별다른 말이 없었고, 평상시와 별다른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최정자 여사(미망인)가 말씀하셨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문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최정자 여사는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동네 사람 몇 명과 나섰다. 일본군들은 시신마저도 수습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날 시위현장에 문 열사의 장렬하고도 처참한 희생 장면을 목격한 천도교인 정홍근(鄭弘根)은 훗날(1933년) 자기 딸을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려하는 문용기의 아들인 문창원(1918~1981)에게 시집을 보냄으로써, 집안의 대를 잇게 하였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 경찰은 솜리만세운동 사건이 있은 후부터 문 열사의 집이 있던 관음부락에 진을 치고 집 부근을 배회하며 예의주시하고 있던 터였다. 따라서 서슬 퍼런 일본 경찰의 감시대상으로 지목되어 있으니 동네사람들과도 교분을 나누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왕래를 하는 이웃은 일본 경찰의 또 다른 감시 대상이 되니 부락에서도 자연히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순국열사 문용기 3.1운동 기념비

1933년 문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가난과 멸시의 60년 세월을 견딘 문 열사의 자부(子婦)인 정귀례(鄭貴禮) 여사는 시어머니인 최정자 여사에 대한,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흐유! 우리 어머님 같은 분 없었시유. 어머님이 마을 사람 몇 명을 데리구 가서 시신을 모셔오는디 십리길에 피가 쏟아져 집에 당도허니깐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 시체맹키로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남아있질 안터래유, 게다가 시체가 들어오는 것을 보구 노모와 아홉 살 먹은 딸이 혼절해서 그길로 숨을 거두었고, 네 살 먹은 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대유. 그해에 시체 넷을 치른 셈이유. 흐유! 그런 중에두 어머님은 남편이 입었던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버리지 않구 피를 말려설랑 거적때기에 싸서 곳간 대들보 위에 묶어놓으셨시유. 아들헌티두 말하질 않았는디 나헌티만, ‘무신 일이 생기더라두 저것만은 잘 지켜야 헌다’고 말씀허셨시유. 해방되던 날, 어머님은 그걸 대들보에서 내려 마당에 멍석을 깔구 옷을 내려놓으시군 그 앞에서 눈물을 주루룩 쏟으시는디.... 전 그때 어머님이 우시는 걸 처음 봤시유. 흐유! 그리구서야 옷을 방안으로 모셨는디 피로 얼룩진 옷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두 생생허유....”

그렇게 해서 지킨 문 열사의 두루마기와 저고리는 지금 천안(天安)의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군데군데 칼에 찔려 옷이 찢겨진 자국은 그날의 처절했던 순간들을 증명하고, 피로 범벅이 되어 얼룩진 혈흔은 아직도 선혈의 강한 냄새가 분노처럼 배어나오고 있는 듯하다. 열사의 의분은 지금 그렇게 각인되어 조국 독립의 숨소리로 살아있는 것이다.
해방 후 1948년 3월 1일을 기하여 이 지방의 유지들은 문 열사의 순절(殉節) 현장인 이리 구시장에 ‘순국열사 문용기 3ㆍ1운동 기념비’를 세웠으며, 당시의 대통령이던 이승만(李承晩)은 비문을 손수 지어주었다고 한다. 다음은 비문 내용.

인류 평등이 대의(大義)에 의한 전 민족적 항쟁의 첫걸음이요, 조국의 독립을 사해에 선포하여 민족의 불멸의 정의를 내세운 기미 3ㆍ1운동은 우리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도다. 단기 4252년 3월 1일 선영 손병희 선생 등 33인이 우리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한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겨레의 자유민임을 세계만방에 외치자, 경술 실국(失國) 이래 자유를 빼앗기고 국가를 잃은 백성의 비애와 울분은 화산(火山)같이 터져, 독립만세의 소리 지축(地軸)을 흔들며 태극기의 물결 하늘을 가리울 때, 우리 이리에서 문용기 선생께서 이에 호응하여 동년 4월 4일 이리시장에서 성거(聖擧) 지휘하시던 중, 포악한 왜적의 총검에 무찔리어 이 땅에서 장렬한 순국의 길을 떠나셨으나, 아아, 거룩하다! 품으신 이 뜻 3천만 민족의 빛이 될지며, 장하도다! 많으신 이 길 우리 겨레의 거울이 되오리다. 위대한 선열의 흘리신 의혈(義血)의 값은 37년 후 오늘에 당당한 대한민국으로 자유의 독립을 다시 찾게 되었도다. 이에 우리는 성지(聖地)에 이 비를 세워 자손만대의 추모(追慕)의 표가 되도록 하노라.

문용기 열사의 약사(略史)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 서일면 관음리(現 오산면 오산리 310번지, 관음부락)에서 남평(南平) 문씨 시중공파(侍中公派) 17세손으로 문재윤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실제 호적상의 이름은 문용기(文鏞棋)이나, 집안에서는 문정관(文正寬)으로 불렸다고 그 후손들은 전한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돌보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 혼자서 독학하여 한문(漢文)을 전수함으로써 나중에 인근 부락으로 초빙되어 한문사숙(漢文私塾: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가 스무살 때의 일이다. 그 뒤, 24세 때부터 군산 영명학교의 한문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고, 동시에 同학교의 학생으로서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30세가 되던 1908년, 기독교계 학교로서 처음 개교한 목포의 짠왓킨스중학교(後에 영흥중학교로 改名)에 입학하였다. 이때 역시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처럼, 한문선생이면서 동시에 학생의 신분이었다.
문 열사는 특히 외국어인 영어 습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그의 영어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1911년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학교의 추천으로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미국인의 통역사로서 9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그는 특히 갑산에서 일하는 동안 돈을 모아서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을 통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 목포의 짠왓킨스중학교에 재학(1908~1911) 당시 YMCA활동을 통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애국 계몽운동을 역설하고 다니던 이승만 박사와 목포에서 만나게 되는데, 조국에 대해 고뇌하는 비슷한 연배의 청년동지는 의기투합하여 쉽게 가까워졌으며 당시 이승만이 묵었던 여관방에서 조국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전라도를 떠나 함경도 갑산에 있을 당시에도 이승만과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로서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을 때 문 열사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어 있는 문 열사를 애통해하면서, 그의 뜻을 기리고자 직접 친필 비문을 내려 1949년에 4ㆍ4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당시 문용기 열사가 순국한 자리인 시장 화교학교 앞(現 익산시 주현동 105-19)에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문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우석(禹錫) 1894. 6. 6~195. 2. 6 경북 안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5일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타작장에 모여 거사에 대하여 의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의 동원을 담당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할 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건조물 손괴·가택 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0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47·1348·1355면

32세 해은파

위동(渭東) 1903. 2.23~1976. 5. 1 경남 김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진주농업학교 재학중인 1920년 8월에 동교생 신영안(申英安)·김익상(金益祥) 등과 함께 일제의 천장절(天長節)인 8월 3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진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동교생 박학두(朴學斗)와 함께 기숙사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3백매를 인쇄하였다.
거사계획은 8월 30일 오후 7시에 진주공원·농업학교앞·재판소앞 등 세곳에 모여 일제히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거사에 앞서 8월 28일에 동교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제1, 제2보통학교·광림학교·기독청년회·청년친목회 등 학교 및 단체에 통보를 하였는데 도중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거사 직전인 8월 30일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920년 10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모교인 진주농업학교에서는 그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묘소 : 부산시 강서구 봉림동  차남인 문성술이 관리

註·수형인명부 ·신원증명서 ·3·1운동실록(李龍洛) 65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9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6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740면

  윤국(潤國) 1877.~1954.4.8 평북 정주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7일 선천군(宣川郡) 아이포(阿耳浦) 일대와 정주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 모인 4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출옥 후에는 자신의 토지를 처분한 돈 7만원을 만주(滿洲)에 살고 있는 김숙제(金肅濟) 목사를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조달하는 등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다.
註·판결문(1919. 6. 12 고등법원) ·확인서(평북도민회장, 정주군민회장)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61·862면
  응국(應國) 1921. 6.10~ 황해 안악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여 중국중앙간부훈련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영국과의 군사협정에 의하여 주인면공작대(駐印緬工作隊)에 편입되어 임팔, 만다레 및 랑구운 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61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67·229·231·404·477·479·480·483·545·608면
  응선(應善) 1895.11.17~1945.5.15 황해 해주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만주의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출신인 박장호(朴長浩), 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甫)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문응선은 대한독립단의 황해도 지단에 이성룡·이수영 등과 함께 가입하여 만주 본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20년 8월 만주 대한독립단 특파대장 이명서(李明瑞)가 군자금 모집, 일인관리 암살, 친일파 응징 등을 목적으로 구월산대(九月山隊)를 조직하여, 친일파 은율군수(殷律郡守) 최병혁(崔丙赫)을 처단하고 유격전을 전개할 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지원활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海州市誌(海州市誌編纂委員會, 1994) 284·285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3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0輯 1226面 ·東亞日報(1921. 10. 31)
26세 판서공파 인갑(仁甲) 1923. 7.11~ 부산 동래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판도판서공파 25세 영택(榮澤)님과 경주박씨의 4남(막내)으로 1923년 출생
자녀는 아들 무형(武亨) 손자 봉성(鳳晟)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1년 겨울에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에 가입하였다.
조선독립당은 동래중학생 김일규(金一圭)·양중모(梁仲模) 등이 앞서 1940년에 조직하였던 독서회를 강화, 개편한 것으로서 당원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농민지도 및 국내조사 등의 일을 맡았다.
그후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동당원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일군 탄약고 폭파·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도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註·부산교도소장발행 수감자명부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15·816면

 나의비망록(원명: 산절로 수절로)   바로가기

  일만(一萬) 1904.11.9 ~1955. 5. 6 전북 옥구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27년 10월 2일 옥구군 서수면(瑞穗面)에서 일본인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작인의 권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장태성(張台成)·박상호(朴相浩) 등의 주도로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瑞穗支部)가 결성될 당시 같이 참여하였다. 1927년 11월 25일 서수면 서수리 소재 주식회사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이 소작농민들에 대하여 수확량의 75%에 달하는 과도한 소작료를 요구하자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간부들이 나서서 45%로 감액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고, 지부장 장태성이 농장의 일본인 지배인을 협박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문일만은 장태성이 군산(群山)경찰서로 압송되는 도중 서수면 임피(臨陂) 경찰관출장소에서 일시 대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상호·김행규(金杏奎)·오승철·신문관·최봉엽·이성순·정연운 등과 함께 500여 명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동 출장소를 습격하고 장태성을 구출하였다. 이를 이유로 조합원 80여 명과 함께 피체된 그는 1927년 2월 29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927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구금자탈취(拘禁者奪取) 및 소요(騷擾) 혐의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27. 5. 29) ·우리고장의 항일운동사 옥구농민의 항일투쟁사(2001 김양규)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618·626·726·727·756面
·東亞日報(1927. 11. 29, 11. 30, 12. 10, 1928. 2. 1, 3. 1, 3. 2)

  일민(一民 逸民 熙錫)   평남 강서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7월 남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광복군총영(總營)에서는 일제기관 폭파, 일제요인 암살 등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자는 방침 아래 특공대를 국내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그도 이 대열에 참가하여 장덕진(張德鎭) 박태열(朴泰烈) 우덕선(禹德善) 김예진(金禮鎭) 안경신(安敬信) 등과 함께 제2대에 편성되어 평양에 특파되었다. 입국 도중 평남 안주 입석(安州 立石)에서 검문하려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평양 시내에 들어와 평남경찰부에 폭탄을 던진 후 피신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일행 중 여자인 안경신은 피신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았으며, 그는 궐석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1921년 9월 삼육대학(三育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24년에는 운남(雲南) 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3월 13일에는 곽 헌(郭憲) 최석순(崔錫淳) 강창제(姜昌濟) 나창헌(羅昌憲)과 "이승만탄핵결의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다시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교련에 주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에는 상해로 돌아 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제25회 이사회에서 특별회원으로 입회가 승인되었고, 그후 중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김 철(金徹) 박창세(朴昌世) 이 웅(李雄=李俊植) 왕 웅(王雄=金弘壹)과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군인회간장(軍人會簡章)을 발표하는 등 무장항일투쟁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3년 1월 15일에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가입하여 신언준(申彦俊) 임득산(林得山) 등과 제1반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김규식(金奎植) 유동열(柳東說)과 중령(中領)을 대표한 의정원 의원에 보선되어 이후 광복시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에는 김홍서(金弘 )와 같이 교민단(僑民團)재건을 위해서 활동하였고, 동년 10월에는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는 박창세, 신공제와 함께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는 한국독립당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임명되었고,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유동열 참모총장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2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조국의 광복시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동분서주하였다.
註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2면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441면  조선민족운동연감 196 223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4 302 348 360 363 366 370 37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99 500 502 513 532 534 536 540 570 608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72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318 446 474 775 810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549 764 767 768 800 823 825 844 885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24 225 226 228 229 230 231 232 234 236 241 258 259 270 281 288 299 306 356 362 374 408 409 444 457 459 464 492 496 498 521 523 530 531 535 540 546 547 549 573 589 590 591 601 610 611 626 627 630 632 633 634 636 645 672 673 679 681 689 690 692 705 706 730 736 85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79 618 71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7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4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23면
  일평(一平) 1888. 5.15~1939. 4. 3 평북 의주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2003년 5월독립운동가

號:호암(湖巖) 항렬에 따라 명회(明會)로, 초명은 정곤(正坤), 자는 일평(一平),으로 기재되어 있다.
문천두(文天斗)와 해주 이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여 종 4품의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0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부를 중퇴
       상해의 대공화보사에 근무하다 귀국하여 중동 중앙 배재 송도 중학에서 교편을 잡음
       중외일보기자로 있다가 1933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취임 7년간 논설을 집필하고
       국사연구에도 정진해 많은 논문 남김

200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1905년 도일하여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정칙학교(正則學校)를 거쳐 동년 가을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입학, 1908년 졸업한 그는 이 시기 관서(關西) 출신 유학생들의 자강운동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에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학회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 편찬원으로도 참여하여 국민주권론과 국가독립론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들을 기고하였다.
1908년 귀국 후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의주 양실학교(養實學校),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등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 출입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토요강습소의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를 포기한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예과를 수료한 뒤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강하였으며, 유학생친목회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담당하여 창간호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2년 국권 회복에 투신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한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상해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서 일본글 번역을 담당하면서 동년 5월, 신규식·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아시아 각 민족, 특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혁명당 영수 진기미(陳其美), 청년외교관인 고유균(顧維鈞) 등과 교유하는 한편,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918년경 귀국하여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애원서(哀願書)」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중앙고보·송도고보·배재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연구에 전념하게 된 그는 1923년 「동명」이라는 잡지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이라는 논설을 기고하는 등 역사관을 정립하였고, 1925년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귀국한 그는 1927년 2월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 자격으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간사를 맡아 통일전선의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8월에는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의사 및 기관지인 「자활(自活)」의 주필로 선임되어 민족자본 육성 활동과 그에 관한 계몽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활동한 그는 사론과 논설을 정력적으로 집필하면서 이 때부터 역사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을 전후하여 본격화하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에 참여하여 국학 진흥에도 힘을 쏟았으며, 1934년 5월 창립된 진단학회(震檀學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문헌고증 사학적 방법론의 도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27년부터 1939년 사이 발표된 100여 편의 글 가운데 90% 이상이 이 시기에 집필된 대중적인 역사관계 글들이었고, 많은 대중강연을 통하여 한국사의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가 1939년 4월 서거하였다.
그의 사후 1939∼40년경 조선일보사에서는 고인의 글을 묶어 『호암사화집』, 『호암전집』, 『소년역사독본』 등으로 출간하였다.
註·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8권 424·425면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일조각, 1994), 호암 문일평의 생애와 저술(최기영) 1788∼1820면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권, 문일평(윤해동)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23면 제8권 471·969·985면  제9권 197·468면 제10권 752·75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67·129면 제13집 96·108·141면  제14집 113·292·293면  
                                               별집 제2집 396면

文一平  [이규태 코너](조선일보 2003. 05.11)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에는 건국훈장을 받은 12분의 애국지사 묘역이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한용운(韓龍雲)·오세창(吳世昌)의 무덤을 지나면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의 무덤에 이르는데 그 기록비(記錄碑) 전면에 ‘조선 독립운동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학이다’고 새겨져 있음을 본다. 기미년 3월 12일 호암이 손수 짓고 손수 보신각 앞에서 낭독한 ‘다시(又)독립선언서’로 불리는 ‘애원서’ 속의 한 구절이다. 호암은 이 사건으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 이전에 중국 남경에 건너가 임시정부 대통령인 박은식(朴殷植), 국무총리인 신규식(申圭植)과 비밀결사(同濟社)에서 일했고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께 기식하며 국권 회복을 꾀했다.

1930년 전후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민족의 목 조이기에 악독해갔고, 문화가 살면 민족은 죽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빈사(瀕死)의 민족문화를 살리는 쪽으로 민족운동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 대항을 위한 민족문화의 통칭이 필요했고, 그래서 생겨난 것이 ‘조선학(朝鮮學)’이요, 조선일보를 터전으로 조선학 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 즈음이다. 홍명희의 ‘임꺽정’, 한용운의 ‘삼국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안재홍의 ‘충무공 탐방’이 연재되고 당시 국학자를 총망라한 ‘조선여지승람(朝鮮輿地勝覽)’ 연재도 조선학 운동의 일환이다. 이 운동의 핵심인물이 호암이다. ‘한미외교사’ 101회를 비롯, 5년 동안에 총 400여편 원고지 10만여장의 방대한 조선학을 발굴했는데, 후세에 문화운동이 아니라 민족운동이라 평가받은 것은 그 저류에 흐르는 민족혼 때문일 것이다.
지팡이 짚고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한용운 찾아다니며 만년을 살았던 호암이 임종한 내자동 집, 열린 동창으로 기절(氣節)의 싱징 백송(白松)이 내다보이고 임종의 머리맡에는 야국(野菊)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야인의 수더분함과 외곬고집, 질긴 생명력으로 호암의 일생을 상징하는 야국이다.
5월의 독립인물로 기리게 된 호암의 조선학이 물리적 말살에서 민족을 구하는 깃발이었듯이 사대 외래사상의 기승으로 민족 자질이 퇴색하고 있는 오늘에 한국학의 위상을 뒤돌아보게 하는 호암이다.

[사람들] 5월 독립운동가 문일평선생  (조선일보 2003.05.01)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회 간부 등을 지낸 뒤 조선일보 편집고문(1933~1939)으로 사망할 때까지 언론에서의 역사 서술을 통한 대중 계몽에 앞장섰던 대표적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1888~1939)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호암은 1888년 5월 15일 평북 의주의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던 그는 18세가 되던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 메이지학원 등을 다니며 소설가 이광수(李光洙) 홍명희(洪命熹) 등과 교유했다. 1910년 귀국 뒤 평양 대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11년 이후 일본과 중국 등에서 활동하면서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것은 평생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1919년 3월 12일 보신각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 독립청원서를 낭독,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진영이 합작해 1927년 발기한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중앙위원과 간사를 역임했으며, 조선인 본위의 민족경제 자립을 추구했던 조선물산장려회에도 이사(1927~1929)로 참여했다.
조선일보 사주 계초 방응모(啓礎 方應謨)의 초빙에 응해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을 맡은 그는 민족에 대한 사랑 평이한 문체와 서술적인 제목 짧은 문장 역사 문제 뿐 아니라 자연 예술 풍속까지도 아우르는 분야의 다양성 극히 객관적인 논조 등을 특징으로 언론을 통한 역사학의 대중화와 국학(國學)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사후 발간된 ‘호암전집’에 수록된 글 대부분은 조선일보 편집고문 시절,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들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발표한 400여편의 글을 통해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근본을 알려는 데 있다”는 ‘조선학(朝鮮學)운동’을 이끌었다.

호암이 역사 서술에서 강조한 것은 조선심(朝鮮心), 즉 ‘조선의 마음’이었다. 그는 조선심의 결정체(結晶體)를 한글로 보았고,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을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생각했다.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풍을 외쳤던 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했으며, 1939년 4월 3일, 향년 50세로 타계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아들 동표(東彪)씨도 조선일보 조사부장·편집국장을 지냈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그를 기리는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5월 한달 동안 전시에 들어간다.

[창간특집] 조선일보 30년대 학예운동  (조선일보2003. 03. 04)
일제가 전쟁으로 치닫던 1930년대 후반, 연희전문에 다니던 문학청년 윤동주(尹東柱)를 지탱해준 것은 조선일보 학예면이었다. 2001년 8·15를 맞아 공개된 그의 조선일보 기사 스크랩북(총 3권)에는 당대 조선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지성들의 원고가 등장한다.1938년 2월 24~26일자에 실린 박종홍(朴鍾鴻)의 ‘현대 철학의 제문제’(상·중·하)부터 1939년 2월 14일자에 실린 정지용(鄭芝溶)의 ‘시인 산문―전귤(煎橘)’에 이르기까지 모두 144건이다.
홍명희 문일평 이원조 한설야 이기영 안함광 안회남 박영희 정지용 백석 이희승 이여성 유자후 박치우 송석하 채만식 유치진 전몽수 안호상 유진오 백철 신석초 김남천 임화 모윤숙 김광섭 함대훈 윤곤강 정인섭 김영수 정비석 김태준 김오성 양주동 박종홍 최재서…. 스크랩북에 나온 당시 조선일보 필진들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일급 지식인들로 가득하다. 장르도 문학 역사학 철학 국어학 민속학 등 광범위했다.
이렇듯 당대의 지성들이 필자로 참여한 덕분에 조선일보는 1930년대 지식인사회와 문화계를 주도해 나갈 수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30년대 우리 언어와 역사, 민속 등에 대한 연구인 ‘조선학 운동’을 주도한 당시 조선일보 편집고문 문일평(文一平)과 학예부장 홍기(洪起文) 등 사내인사와 신채호(申采浩)·안재홍(安在鴻) 등이다. 이들중 가장 왕성하게 조선학 운동을 펼친 이는 문일평(1888~1939)이었다. 1933년 초 조선일보에 입사한 문일평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년 남짓한 짧은 재직 기간 동안 ‘역사로 본 조선’(1933·9회) ‘역사상의 기인’(1933·24회) ‘한·미 외교 50년사’(1934·101회) 등 400편이 넘는 글을 남겼다. 문일평의 뒤를 이어 조선일보의 조선학 관련 기사를 주도해 간 사람은 홍기문(1903~1992)이었다. 1935년 학예부장으로 입사한 그는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폐간될 때까지 근무했다. 홍기문은 흔히 국어학자로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의 풍속과 지명, 말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하는 연재물을 실을 정도로 국학 전반에 걸쳐 박식했다. ‘잡기장(雜記帳’(1937·40회)과 ‘소문고(小文庫)’(1938·50회)가 대표적이다.
신채호(1880~1936)도 중국 여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1931년 6월 10일부터 103회에 걸쳐 ‘조선상고사’를 연재했고, 이어 ‘조선상고문화사’를 41회에 걸쳐 기고했다.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우리 고대사를 새로 정리한 이 두 저작은 ‘독사신론’과 더불어 신채호의 3대 저술로 꼽힌다. 1931년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후 회사를 떠났던 안재홍(1891~1965)도 객원 필자로서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추적한 ‘충무유적’(1934·15회) 등을 연재했다.
일제하 조선일보 학예면의 권위를 드높인 것은 1938년부터 127회에 걸쳐 연재된 ‘향토문화를 찾아서’란 한국학 시리즈였다. 홍명희 문일평 이외에 손진태 이병도 이능화 권덕규 이병기 고유섭 송석하 황의돈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국학의 르네상스를 이뤄냈다. 감수성 예민한 식민지 청년 윤동주가 조선일보 학예면을 선택한 것은 이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金基哲기자 kichul@chosun.com )
 

2003년 5월 독립운동가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공적개요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독립과 민족주의역사학의 확립을 위해 헌신하신 문일평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남평(南平)을 본관으로 하는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상당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고향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인들을 보면서 서양문화를 접한 선생은 러일전쟁을 목도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단발을 한 뒤 일본에 유학하였다. 선생은 메이지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의 임원으로 기관지『태극학보』에도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1910년 3월 귀국한 선생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를 시작으로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결사로 조직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봄 선생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재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를 편집하고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1912년 말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상해에서 신규식이 주도하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면서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도 활약했다. 상해에서 박은식․신채호와의 만남은 선생의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4년 봄 이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독서에 전념하던 선생은 1919년에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 앞에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출옥한 선생은 중동학교와 송도고보, 배재고보, 중앙고보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노동대회 교육부장, 신간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간사,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하였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한 선생은 조선일보에 여러 편의 사화(史話)와 사론, 수필 등 한국사 관련 글들을 게재하여 역사지식의 대중화에 노력하는 한편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정신’을 강조, 민족주의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실증적 학풍을 주장하면서 진단학회가 창립되자 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39년 4월 3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5월 한달 동안 전시할 예정이다.

①…우리는 우리네 과거문화를 너무 과장하여서 자아의 최면을 행할 필요도 없는 동시에 너무 과겸(過謙)하여서 자아의 가치를 일부러 깎을 까닭도 없고 어디까지든지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한 역사적 거울로써 자아의 정사연추(正邪姸醜)를 잘 살펴 엄숙한 비판을 내릴 때가 왔다. 그리하여 그 바르고 고운 것은 더욱 발휘하고 그 어긋나고 나쁜 것은 스스로 제거함을 힘써야 하겠다……(「조선사의 교과서에 대하여」, 동광 1927년 2월호, 45쪽)

오늘 세계대세는 이미 무단적 실력은 가고 정의 인도가 온 것이 아닌가. 이미 압박적 역리(逆理)가 가고 평화적 정도(正道)가 흥한 것이 아닌가. 민족이 이미 무력으로써 자립치 아니하고 인도 정의로써 자존자보(自存自保)케 된 이상은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이 무슨 모순이 있으며 무슨 패리(悖理)될 것이 있으리오 동양평화가 조선독립으로 더욱 확고할 것이 아닌가…(3.1운동 때 선생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중에서)


1. 머리말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선생은 일제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20-30년대에 중등학교나 신문사에 적을 두고, 주로 신문과 잡지에 계몽성 짙은 역사 관련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1910년대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또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新幹會)와 조선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한 바 있다. 언뜻 문약한 학자로만 보이는 선생이 중국과 국내에서 직접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그간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1920~30년대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깊고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억압하던 식민지 현실에서 우리 역사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선생의 생애와 학문 또는 저술에 관해서는 그간 자주 논의되어 왔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부분을 강조하며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고, 학문도 언급하고자 한다.


2. 생 애

  선생은 변방인 서북지방의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그 출신지역이나 신분적 배경이 전통적인 지배계층의 후예가 아니었다는 점은 선생의 생애나 활동, 그리고 학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선생이 전통에만 얽매이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자 하였음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도 가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888년(고종 25) 5월 15일, 압록강 가까운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에서 선생은 남평(南平)을 본관으로 하는 문천두(文天斗)와 해주 이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문일평의 선대 13대조 이래로 의주의 동북방인 창성(昌城)에서 세거해 온 무관가문이었다. 남평문씨세보에 의하면 선생의 선조 여럿이 무관직을 지녔던 것으로, 특히 증조부는 무과에 급제하여 종 4품의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족보에는 선생의 이름이 항렬에 따라 명회(明會)로, 초명은 정곤(正坤), 자는 일평(一平), 호가 호암(湖巖)으로 기재되어 있다. 일평이란 이름은 본래 자였던 것이다.

  상당한 재력을 지녔던 가문의 외아들이었던 선생은 18세가 되던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자 최해산(崔海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사이에 의주에 교회가 설립되고 서양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서양문화를 접한 선생은 러일전쟁을 목도하고 시세에 대한 관심도 많아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선생이 교회에도 출석하고 단발한 것은 미국유학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미국유학이 여의치 않자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도쿄에 간 선생은 1905년 가을 기독교계통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청강생으로 등록하였으나 일본어 능력이 부족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 1907년 9월에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로 편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부인 김사재(金思哉)에게도 신식교육을 받도록 하여, 부인도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선생은 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계통의 학교를 다니는 등 기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평안도 출신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에 참여하여 학회의 임원을 역임하고, 기관지 태극학보에도 여러 차례 기고하였다. 이광수(李光洙)나 홍명희(洪命憙) 등과도 가깝게 지내며, 문학을 좋아하고 많은 독서를 하여 이 시기부터 한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10년 3월 명치학원을 마친 선생은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1908년 9월 평양에 설립된 대성학교(大成學校)의 교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학기 뒤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로 옮겼다. 모두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 의주의 양실학교에 재임하던 시기에 선생은 비밀결사로 조직된 국권회복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1911년 봄 선생은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년 6개월 뒤 예과를 마친 선생은 학부의 정치경제과에 진학하며 재동경조선유학생친목회의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맡아 창간호를 간행하고, 김성수(金性洙)․안재홍(安在鴻)․송진우(宋鎭禹) 등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1912년 말 중국으로 건너가는데, 혹 국내에서 진행되던 105인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선생의 중국행의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선생은 신규식(申圭植)의 주선으로 대공화일보(大共和日報)라는 중국신문사에 취직하였다. 여기서 조소앙(趙素昻)․홍명희․정인보(鄭寅普)․신채호(申采浩) 등과도 가깝게 지내며, 신규식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또 기독교보다 도교와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중국에서 선생은 민족주의 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을 만나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 일은 후일 역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이 귀국한 것은 1914년 봄으로, 중국체류는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셈이었다. 선생은 귀국 이후 상당기간을 고향에서 생활하였는데, 농사를 지으며 독서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즈음 선생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해야할 만큼 병이 중하여 휴양도 필요하였다. 이미 선생이 중국에서 귀국하였을 때에는 집안의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학교를 지원하고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1919년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에 선생도 적극 참여하였다. 선생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3월 12일 서울 보신각에서 시위군중에게 낭독하였으며,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봄 출옥하자 선생은 신문이나 잡지에 간간이 글을 발표하며,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의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선생은 1920년까지 ‘호암(虎巖)’이라고 자호(自號)하였으나, 이후 잘 알려진 ‘호암(湖岩)’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호랑이 같은 성격에서, 호수와 같은 잔잔함을 스스로 기대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1922․3년경부터 선생은 중동학교를 거쳐,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의 역사교사로 재직하였다. 선생이 교직에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제형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경제형편에서도 선생은 송도고보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평안도 유지들의 지원으로, 1925년 8월경에 세 번째의 일본유학을 떠날 만큼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다. 사실 3․1운동 직전에도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재입학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선생의 면학의지와는 달리 막상 그 성과는 크지 않아 1년이 못되어 귀국하였다. 만학인데다가 동경제대의 관학적(官學的)인 분위기가 선생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1933년 조선일보사에 편집고문으로 취직하기까지 선생은 신문사와 중등학교를 자주 옮기며 호구(糊口)를 삼고 있었다. 1927년에는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 논설부 기자로 있었고, 일시 경성여자상업학교에도 재직한 바 있었으며, 1928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조선일보사에 재직하였다. 1929년 봄부터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의 교사를 겸직하다가, 1932년 8월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임하였다.

  선생은 1933년 4월에 조선일보사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여, 1939년 4월 별세할 때까지 만 6년을 재직하였다. 1932․3년에 걸쳐 조선일보사를 인수하였던 평북 정주(定州) 출신의 광산주 방응모(方應謨)는 서북 출신의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에, 선생을 편집고문으로 초빙하였던 것이다.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선생은 비교적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고, 한국사에 관한 많은 글들을 쓸 수 있었다. 선생의 사후 호암전집(湖岩全集)에 수록된 글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들이었음에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적어도 2, 3일에 한 차례는 조선일보에 선생의 사화(史話)나 사론, 또는 수필이 실렸던 것이다. 물론 그 대부분이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계몽성이 짙으면서도 다양한 소재를 한국사와 연결시킨 글들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1934년 5월에 발기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학회를 주도하던 이병도(李丙燾)․송석하(宋錫夏)․이병기(李秉岐)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1939년 4월 3일 오전 6시 30분, 선생은 향년 52세로 별세하였다. 사인은 급성단독(急性丹毒)이었다.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에 매장되었고, 그 해 12월 3일에 정인보의 글로 묘비가 세워졌다. 선생의 글은 유고집 형태로 1939년에 호암사화집(湖岩史話集)과 호암전집 3권, 그리고 1940년에 소년역사독본이 발간되었다.

  선생은 학문도 출중하였으나, 인품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학자․언론인․종교인․문인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선생을 추모하는 글에는 모두 학문뿐 아니라 인품에 감동되었음이 자주 언급되었다. 선생은 성격이 급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으며, 동시에 엄격하였던 같다. 그리고 5남매를 양육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나, 가난한 사람이나 친구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여럿 전한다.


3. 독립운동

  선생은 1910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아마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의주 양실학교에 근무하며 신민회에 가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체로 1910년 9월 중순의 신민회 회합에 그가 출석한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梁起鐸) 등이 주도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결성된 신민회는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는데, 의주지역은 양실학교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선생은 의주에 체재한 기간이 짧아서 신민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11년 봄 재차 도일하지 않았다면 선생 또한 일제에 의해 날조된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신민회 의주 관계자로 105인 사건에 기소되었던 인물의 신문조서에서,

     문 : 작년(1911년)에 암살할 때에는 문일평은 있었는가.

     답 : 그 사람은 작년에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으므로 있지 않았다.

     문 : 재작년(1910년)에는 확실히 관계하였는가.

     답 : 그때는 같이 협의했다.   라는 신문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신민회에 참여한 사실로 선생이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그것은 국내에서 신민회 회원들이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는 실정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주로 상하이에 머무르며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김규식 등 지사와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 함께 선생은 1912년 7월 신규식의 주도로 설립되었던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였으며, 1913년 12월에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다만 선생은 중국에서 오래 체류하지 않아 이 때의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립운동에 많은 자금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이후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1914년 귀국한 선생은 고향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선생의 경력으로 말미암아 1917년 1월부터 경찰의 갑종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생은 2월 3일 동경 유학을 목적으로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하였으며, 3월 8일 오후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협의하고 새로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3월 11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내고, 3월 12일 오전 서린동의 영흥관(永興館)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문성호(文成鎬)․김극선(金極善)․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이 문제에 관해서 회합하였다.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형식으로 된 이 선언서는 당일 오후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며, 선생은 보신각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 만세시위운동에 앞장섰다. 이 선언서에 관여된 인물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와 유생들이었고, 관련자 7명이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선생도 즉각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이후 선생은 학교 교원생활을 하면서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5월에 창립된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대회에 교육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1927년 2월 국내 민족유일당 운동의 결과로 발기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출되었다. 6․10만세운동을 기화로 국내의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이 타협하여 조직한 신간회는 정치-경제적 각성의 촉진․단결 공고․기회주의 배격을 내세웠는데, 1928년까지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발기인과 간부로 신간회에 참여한 것은 선생이 좌우진영의 합작에 관심을 가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선생과 절친한 홍명희와 이관용(李灌鎔) 등이 신간회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일제의 조사에는 선생의 ‘주의사상’을 “배일사상을 가지고 민족주의를 품고 있다”고 하였다. 

  또 선생은 1927년 8월 15일에 개최된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이사(선전부 상무이사)로 보선되었으며, 그 기관지 자활(自活)의 주필로도 선임되었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비롯된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1월 전국적인 조직이 창립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으나, 1924년부터 이 운동이 침체되자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1927년에는 지식층과 상공인․기술자 층의 참여를 시도하여 ‘조선인 본위의 민족경제 자립’을 추구하였다. 선생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있으며,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3․1운동뿐 아니라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한 사실은 이후 선생이 지배층에 국한되지 않고, 민중지향의 역사를 서술하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선생이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던 지식인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는데, 1930년대 초에 근대 서양의 사상가로 마르크스를, 정치가로 레닌을 제일의 인물로 지적한 것도 그러한 관심의 하나였을 것이다.


4. 역사학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의 한 분이었다. 특히 선생은 1920년대부터 한국사에 관한 많은 사화와 사론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며, 역사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다. 국권을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민족의 존재를 묶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국어와 국사였으므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지식을 널리 알려 민족의식을 고조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선생에게 있어서 한국사의 연구와 대중화 작업은 바로 그가 계속해온 독립운동의 다른 한 모습이었다.

  호암전집은 정치․외교사, 문화․풍속, 사담(史譚)․수필로 편집되었다. 선생의 글은 대체로 외교사와 정치사, 한국의 문화․사적․자연에 관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바로 선생은 정치와 문화를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는데, 한국사에 있어 정치의 전개양상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지배계급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폐해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며,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정치에 비하여 문일평은 한국문화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사상’, ‘조선학’ 등을 논의하였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독창성과 위대성을 강조한 바 있었다. 아울러 역사상의 사랑이나 풍속 등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문화에 대한 개별적 소개라기보다는 문화사적으로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생의 역사학이 문화사적 역사발전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문일평은 사적과 자연에 관해서도 국토여행 형태의 많은 글을 써 한국의 자연과 역사에 애정을 표시하였다. 또 선생은 인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으며, 그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매우 다양하였다. 군주나 정치가․학자․장수․예술가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 뿐 아니라, 역사상의 반역아로 알려진 인물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승려, 그리고 역사에서 잊혀졌던 인물들도 선생에게는 중요하였다. 여성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것도 선생의 학풍을 보여주는 한 모습이다. 온달(溫達)보다 평강공주(平岡公主)를 내세운 것이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관점은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선생의 다양한 관심은 결국 한국의 국토와 그곳에서 생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생은 사람들의 생활은 정치사로, 생각과 자연은 문화사로 드러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의 한국사 연구는 민족주의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사학은 국가라는 외형은 없어졌으나 정신만 살아 있으면 민족은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낭가사상’(郎家思想, 신채호)을 비롯하여 ‘혼’(박은식)이나 ‘얼’(정인보) 등 민족정신을 강조한 정신사관이었다. 선생 역시 1930년 전후 한국사의 전개를 ‘대조선정신’과 ‘소조선정신’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대조선정신이란 대륙경략과 관련된 북진정책의 수행을 의미하고, 소조선정신은 한반도 내에 머무는 것이었다. 특히 선생은 고구려와 고려가 외침을 막아낸 사실을 여러 차례 서술하며, 삼국통일을 고구려의 대조선운동의 실패이며 신라의 소조선운동의 성공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신채호가 한국사의 전개를 낭가사상과 유학사상의 대립으로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정신 역시 정신사관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조선정신과 아울러 ‘조선심’이나 ‘조선사상’도 내세웠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민중 본위의 문자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조선사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하였으며, 세종대왕은 민중본위의 정치를 시행하고 훈민정음을 제정하였으므로 조선심의 대표자로 파악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심․조선사상의 핵심은 민중본위의 실제적인 민중문명이었다. 선생이 역사의 원동력을 민중에서 찾은 것은 특히 3․1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3․1운동을 동학농민전쟁 이래 최대의 민중운동이었음을 지적하였고, 그 결과로 민족과 여성의 각성이 이루어졌음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자긍에서 조선심․조선정신․조선학을 강조하면서도, 역사에 있어서 국수주의적인 요소는 배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서술하고 엄정한 비판을 통하여, 그 장점에는 더욱 힘쓰고 단점은 제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즉 국수주의를 비판하면서, 아울러 우리 역사에 대한 비하도 배격하였다. 사실 그대로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선생의 또다른 관심은 역사학의 대중화였다. 선생은 한국사의 통속화․취미화․과학화․미문화(美文化)를 주장하며, 신문에 계몽적인 사론이나 사화를 쉬운 문체로 쓰고 어린이를 상대로도 연재한 것도 역사학 대중화의 실천이었다. 일부에서 선생이 전문적인 학술논문을 쓰지 않고 계몽적인 글로 일관하였음이 안타까운 일로 이야기하지만, 이윤재(李允宰)가 선생의 사학을 소개하며, “심오한 학설이나 번쇄한 고증은 일체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일반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통속적 문장으로 쓰기를 힘썼”다고 지적한 것이 오히려 올바른 인식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랫동안 선생이 추구한 역사의 대중화였고, 그것은 동시에 문화운동의 형태로 드러난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5. 맺는말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주의 사학에 기반을 둔 역사가로 높은 평가를 받아오면서도, 독립운동가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식민지시대에 한국사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자체가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었지만, 선생은 국내에서 역사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다. 즉 1910년 국권회복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대에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 관여하였다. 귀국해서는 일제의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으면서도 3․1운동시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선언문을 낭독하여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선생은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회 등에 참여하면서 민족현실문제에 직접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한국사를 통한 민중계몽, 즉 역사학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는데, 그 또한 독립운동의 다른 한 모습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섭(章燮) 1896. 5. 6~1967. 8.31 충남 부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l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으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그는 북간도에 소재한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하여 강철구(姜 求)·김동진(金東鎭)·박길화(朴吉和)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3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동아일보(1923. 2. 15, 3. 14, 4. 1)
  장호(章鎬) 1876. 5. 6~1909. 8.29 전남 보성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06년 임창모(林昌模)가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능주(綾州)에서 의거하여 광주(光州)로 진군을 감행할 때 보성에서 의거하여 임창모의 의진에 입대하여 적과 접전하여 수명의 적을 살상시켰다.
얼마 후 의병장 임창모가 체포되어 지도(智島)로 유배되자 의진은 곧 해산되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한 의병장 임창모가 보성 일대의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함께 다시 의거의 기치를 드높이자 임창모의 의진에 입대하여 여양만(與陽灣) 일대에서 적 수십 명을 살해하고 다시 순천(順天)에서 출동한 일군을 격퇴시켰다.
1909년 화순(和順)에서 미촌(梶村)중위가 이끄는 적과 접전하던 중 의병장 임창모와 그의 아들 임계순(林季淳)과 함께 체포되어 현장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註·전남도지(1968. 7. 15) 4권 42면 ·남평 문씨파보 2권 ·의병장 임창모의 비문

 

  재교(在敎, 炳浩) 1879.11. 5~1957. 5. 5 전남 순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이후 1917년 5월까지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정동근(鄭東根)·양기중(梁基重)·양재홍(梁在鴻)·김영하(金榮夏)·김교락(金敎洛)·고성후(高成厚) 등의 동지와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이후 권총·철봉(鐵棒)·도검 등을 휴대하고 나주·함평·화순·순천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러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3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징역 5년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註·판결문(1919. 3. 5 대구복심법원)
  재민(載敏, 香姬) 1903. 7.14~1925.12. 황해 해주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9년 4월 1일, 해주읍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기생이었던 문재민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료 기생들을 동지로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3·1운동은 남녀노소·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전민족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특히 기생들의 참여는 3·1운동의 의미를 더욱 값지게 하는 것이었다.
문재민은 동료 기생들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해주 종로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종로를 출발하여 남문으로 행진해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이 동문으로 나갈 때는 군중의 수는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종로 큰 거리로 들어선 기생들은 일시 행진을 중지하고 독립연설을 하였다. 어떤 기생은 준비하였던 격려문을 들고 나와 고성 대독하기도 하였다. 당시 해주 기생 중에는 서화에도 능숙한 기생조합장 문월선(文月仙)을 비롯한 학식있는 기생들이 많았다. 그들의 이러한 독립연설과 격려문 낭독은 군중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기생들은 종로에서 다시 서문 밖으로 행진을 계속하던 중, 헌병과 경찰에 의해 강압적인 해산을 당했으며, 이들 중 재민을 비롯한 기생 7명이 구속되어 6월 2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231∼23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82面 ·朝鮮日報(1925. 12. 13) ·每日申報(1919. 7. 1)
  정규(精奎) 1851~ 평북 창성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19년 4월 1일 평북 창성읍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창성읍내에는 3·1운동 이전에 이미 이승훈으로부터 밀지를 받은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이 파견되어 송목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고, 실질적인 일은 읍내 교회 장로이던 강제희(康濟羲)가 맡았다. 이들은 전창교회 집사 박찬소와 강정식(康貞植)·황대붕·전봉재(全鳳梓) 등과 의논하여 4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당일 보통학교 학생이던 허의선으로 하여금 일본 헌병분대장에게 통고문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4월 1일 정각이 되자 읍내와 각 면에서 동원된 군중이 모여들었고, 강제희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뒤이어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창성읍내로 행진하여 나아갔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군중들의 행진을 저지하려고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찬소와 강정식이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그리고 주동자인 강제희 장로는 부상당했다. 시위하던 군중들은 일본 헌병의 무력 진압에 항거하여 돌을 던지며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문정규 역시 투석(投石)으로 일본 헌병에 맞서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었다.
문정규는 이 일로 1919년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883∼884面
  정덕(正德) 1928.8.30~1947.10.10 전북 남원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944년 5월 일본의 패전을 예견하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문정덕은 1941년 남원의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공업학교(東京高等工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민족차별에 반대하여 1년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3년 도립남원의원(道立南原醫院)의 잡역부로 일하던 중, 그는 『신조선(新朝鮮)』에서 한국인을 멸시하는 글을 읽고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절감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944년 5월 도립남원의원의 견습 간호사인 김정도석(金井道石)에게 일제가 내세우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나라가 있으면 이러한 경멸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조만간 일본이 패배할 것을 예견하여 민족 독립이 도래했음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주장하였다.
일제가 전시동원 체제 아래 인적·물적 약탈을 강화해가자, 그는 남원군청(南原郡廳)에 다시는 사람들을 모집하지 말라는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직장에서 해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경에 피체되어, 1944년 11월 13일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임시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判決文(1944. 11. 13. 全州地方法院 南原支廳)
  정진(靖珍) 1910.7.30~1969.12.29 평남 강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입하여, 중국항일군 9전구지역에서 활동하다가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1941년 광복군 제1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구에 침투하여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동년 10월 인도공작원에 임명되어 동지 16명과 함께 파견되었다.
註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541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18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72·610면
  종우(鍾禹) 1889.11. 4~1941.11.16 평북 용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연락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 일행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일제 요인을 주살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였는데, 제1대는 서울에, 제2대는 평양에,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방면으로 파견되었다.
제3대의 결사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 일행은 박치의(朴致毅)를 비롯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선천경찰서의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는 제3대의 결사대원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비가 강화되어 거사에 사용할 무기의 반입이 늦어진 때문에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에 결사대원들이 다시 모여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사람은 선천군청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박치의는 9월 1일 새벽 3시에 이학필과 함께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수종의 유인물 수십 매를 살포하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던 그를 비롯하여 20여명의 동지들이 동년 9월 7일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는 1921년 4월 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8월 4일 출옥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註·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9면  ·동아일보(1921. 4. 14)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3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82면

 

 

  창모(昌模) 1907. 4.23~ 평북 선천

 

1926년 6월 배재고보(培材高普) 5학년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天道敎)가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민족세력을 결집한 대대적인 6·10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참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학생층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강경탄압으로 만세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성경학교 기숙사에서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대표자들과 회합을 갖은 그는 제2의 6·10만세운동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격문과 선전문을 작성·인쇄하는 책임을 맡아 실천하던 그는 6월 18일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동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32년 황해도 해주(海州)의 구세병원 의사로 기반을 잡은 그는 1938년 감리교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윤치호(尹致昊)·정춘수(鄭春洙) 등 친일 기독교인들이 한국감리교회를 일본메소디스트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행각을 벌이자, 한국감리교회의 일본교회 예속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1년 3월 정춘수 등이 국민총력(國民總力)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명의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혁신단(日本基督敎朝鮮革新團)을 창립하려 하자, 1942년 10월 해주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여 이규갑(李奎甲)·조신일(趙信一) 등과 함께 정춘수의 불신임안을 결의하였으며, 1943년 10월 일제의 비호로 정춘수가 다시 교권을 장악할 때까지 종교투쟁을 통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註·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175면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378면
·반민특위자료(양주삼목사편) 제8권 307·349면  ·감리교회배신배족교역자행장기(1947)
·양주삼총리사저작전집(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1) 제1권 21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96·197·228∼230면  ·조선일보(1926. 6. 20, 6. 26)
·한국감리교회백년(김광우, 1990) 266·274면  ·동아일보(1926. 6. 18, 6. 19, 6. 26, 7. 1, 7. 4)

 

 

  창범(文昌範) 1870.~1934.10.10 함북 경원

199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1877년경 부친을 따라서 노령(露領)으로 망명한 뒤 1908년 노령 니콜리스크의 타레스부락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위하여 이 학교를 1916년에 이르기까지 운영하였다.
1911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배일선전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발송하고 국권회복을 기도하면서 국내에 무력진공을 계획하는 한편 노령과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쌍성(雙城)에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선임되어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자치기관으로 육성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 동삼성과 노령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독립국가임을 천명할 때 서명자 3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노령지방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나갔다.
동년 3월 17일 국내에서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서를 대한국민의회장의 명의로 작성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에 있는 일제 영사관으로 송부하여 일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는 한편 기타 11개국 외국영사관에 배부하며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도록 자동차 여러 대에 나누어 승차한 뒤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는 그곳에 망명하여 있던 독립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3·1독립운동 정신의 결집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상해에 수립하고 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여 내각을 조직할 때 그는 교통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23일에는 국내 13도 대표 이만직(李晩稙)외 23명이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어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내각조직으로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李東輝)가 선임되었는데 문창범은 교통부총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각 단체 각 당파를 총망라하여 대통령제로 조직을 개편할 때 그는 다시 교통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동년 4월 대한국민의회를 해삼위에서 무시(武市)로 이전한 뒤 흑룡강주(黑龍江州)에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본부를 설치하여 러시아 공산당 정부의 원조를 받아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자유보(自由報)〉〈신세계(新世界)〉등 홍보물을 발행하면서 독립운동 대표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조국독립을 성취하고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2월 22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연추(煙秋) 지부의 책임을 담당하여 중국 동삼성 및 노령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치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노령내에 거주하는 귀화한 교민들에게 입교를 권유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동년 6월 독립군의 청산리(靑山里) 전쟁 후 노령 하바로브스크 소재 소련 공산군 제2군단과 교섭하여 간도지역 독립군의 노령 자유시(自由市)로의 이주를 성사시켰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인 1922년 6월에는 노령 무시(武市)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이동휘와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6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소집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가,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10월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독살당하였다..
註·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246面
·朝鮮民族運動年鑑 5·10·38·150面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5·83·87·89·92·96·112·113·117·129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3·4·20·51·414·439·451·493·508·530·765· 805·815·856·1001·1053·1054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56·58·64·65·67·70·151·251·276·382·437 440·441·442·447·489·492·493·494·495·497·503·515·517·519·520·876·877· 879·880·881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56·63·128·175·215·262·521·522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3·40·402·582面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27·30·73·143·153·272·308·318·355· 356·357面
·武裝獨立運動秘史 16·18·44面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37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34·344·388·393·394·447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8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90面 第3卷 694·770面  第4卷 53·56·63·72·116·139·154·171·213·219·
                          238·366·369面  第5卷 135·145·189·205·413·418·663面  第8卷 367面  第10卷 32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60·97面  第9輯 49

  창숙(昌淑) 1898.~1928. 4.23 황해 신계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여,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병졸 17명을 이끌고 봉천성 즙안현(奉天省輯安縣)에 주둔하여 활동 중, 부하들에게 밀정 홍종흡(洪宗洽)을 사살하도록 하였다.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江界) 지방에서 군자금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1928년 3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살인교사·가택침입·강도미수·공갈살인이란 죄명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註·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27·583면  ·기려수필 338면  ·동아일보(1927. 9. 4, 10. 23)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940면 14권 927면 ·법무기록 제9호 사형관계서류

  창학(昌學,彦俊) 1882~1923.12.20 평북 온성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1921년 2월 2일에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김학섭(金學燮) 인솔하에 소총 10정, 탄약 150발, 폭탄 2개씩을 가지고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연말연시중 일군경의 특별경계가 심하여 이 계획을 취소하고 신건원(新乾源)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동년 2월 5일 오후 8시 화룡현(和龍縣)을 떠나 밤이 깊기를 기다려 오전 1시에 그곳의 지리에 밝은 그가 먼저 도착하여 불빛으로 신호하는 것을 목표로 일제히 사격을 시작,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을 사살하고 숙고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에 폭탄 2개를 투척하고 일군경과 교전후 피신하였다.
그후 만주 혼춘(琿春)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 등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김학섭(金學燮) 등과 함께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김학섭 이하 13명은 1923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동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김학섭과 그의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90·39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무장독립운동비사 97면
     ·동아일보(1923. 6. 2, 6. 23, 9. 29, 11. 15, 12. 21)
  채호(采浩) 1924.11.27~ 전남 구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1943년 10월 중순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지구(安邑地區)의 일본군 3541부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탈출을 기도하다가 1944년 12월 탈출에 성공하였다.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면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註·寫眞(1945. 6月 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 幕舍(中國 土橋)에서 訓鍊光景)
·韓國獨立史(金承學) 上卷 30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609面

 

 

  치룡(治龍) 1902. 1.21~ 함북 종성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간도에서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졸업한 후 국민회(國民會)에 가입하여 경호부장 장성순(張成順)의 부하로서 간도지방에서 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7월에는 동지 최승열(崔承烈)·최영진(崔英鎭)·최인선(崔仁先) 등과 함께 간도에 잠입한 일본 밀정 김만수(金萬壽)를 총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1년 2월 4일 용정(龍井)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청진(淸津)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받고 공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1928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註·독립운동사(보훈처) 140면  ·동아일보(1921. 7. 13, 7. 31)  ·독립운동사자료집(보훈처) 10권 1140면
  치무(致武) 1877. 8.11~1942. 4. 9 경북 안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5일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타작장에 모여 거사에 대하여 의논함으로써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의 동원을 담당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마령동(馬嶺洞) 구장인 그는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이어 시위군중은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9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0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36∼1339면
  치백(致伯) 미상~1908. 4. 8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1908년 충남 연산군(連山郡)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4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의병장 정충안(鄭充安) 부대와 함께 활동하던 중, 동년 4월 8일 연산군(連山郡) 및 전북 진산군(珍山郡) 접경지대에서 연산주재소(連山駐在所) 순사 및 연산 주둔 헌병토벌대(憲兵討伐隊)의 공격을 받고 전투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註·暴徒 討伐 報告(公警 第922號, 1908. 4. 13), 暴徒에 關한 編冊
  태수(泰洙 泰瑞 鳳珍) 1880~1913.2.4 함양서상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99년 1월의 인물로 선정 

1880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병진의 외아들로 태어남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기적비(紀蹟碑) :  함양군 안의면 광풍루에 1970년 건립    신석호( 국사편찬위원장)씨 비문지음
순국비(1908 일군 헌병을 격파한 무주군 설천면 상공리 인월담의 정수장 옆)
전적비(거창 계북면 양악리) 문태서 비석(함양읍 상림숲 인물공원)

註·매천야록 438·513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2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4·534·53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99·710·819·829·832·917·1203면

  학도(學道) 1923;28세~  

 
중국 봉천성 즙안현(奉天省 輯安縣)에서 독립단원(獨立團員)으로 조성오(趙成五)와 함께 활동하던 중 1922년 5월 중국관헌에 피체된 후 일경에게 인도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477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29面
·獨立新聞(1923. 3. 10)   ·東亞日報(1927. 5. 14)
  학신(學信)    

199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만주에서 독립군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밀려 소련·연해주 등 각지를 전전하다 자유시참변을 겪고 난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다.
문학신은 그러한 시점인 1921년 3월 5일 독립중흥단(獨立中興團) 결사대장으로서 중국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 태공구(太公溝)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평북 벽동(碧潼)경찰서 일경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註·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555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60面

 

  학이(學伊,應學) 1898. 6. 1~1979. 5.15 경북 김천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1919년 3월 초순 이래로 서울 및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곳 김천군 개령면(開寧面) 동부동(東部洞)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같은 해 4월 4일 동부동 뒷산에서 정남준(鄭南俊)·황도석(黃道石)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중단되고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하였다.
註·판결문(1919. 4. 25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459·460면

 

  학준(學俊) 1910. 7.~1943. 8. 평남 평양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
서안(西安)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초모공작활동, 적 정보수집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3년 3월 중국군 제27집단군에 파견되어 작전 중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에서 전사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04·614면

 

  한우(漢雨) 1921. 1.22~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연희전문학교 재학중인 1943년에 그는 학우들과 함께 항일적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1년·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그후 1944년 1월 20일에 일본군 대구 24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는데, 이무렵 일제는 전쟁에 광분하여 소위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병지원은 어디까지나 표면상 지원이었지 실제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대구24부대에 모집된 600여명의 학병중 대부분은 입대한지 10여일 만에 3대대 3중대 소속 학병 27명만 남기고 북중국(北中國)으로 떠났다. 이때 27명 속에 잔류하게 된 그는 김이현(金而鉉) 등과 함께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먼저 탄약고 폭파 및 무기탈취, 그리고 독극물로 일본군을 몰살한 후 집단 탈출 하여 국외로 나가 독립군 대열에 참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무력항쟁 및 독살계획은 실행상 어려운 점이 많았으므로 이들은 일단 집단탈출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동년 8월 8일에 동지 6명은 부대내 하수구를 통하여 탈출에 성공한 뒤 팔공산에 입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탈출을 탐지한 일군경이 추격하여 포위망을 좁혀옴에 따라 그는 권혁조(權赫朝)와 한 조를 이루어 안동(安東)에 잠입한 뒤, 서울로 가기 위해 역으로 나갔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3개월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2월에 조선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대창(大倉)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1면
  현서(賢瑞) 1897. 3.21~1976. 4.16 황해 장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1921년 2월에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요원과 함께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동년 5월 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상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다음해인 1922년 5월 9일에 출옥하였다.
註·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동아일보(1922. 11. 14)
  형모(亨模 貞仁) 1875. 7. 5~1952. 7.12 전북 옥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책동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에서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사반대를 위한 의병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06년 당대의 거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거사하여 전북 태인(泰仁)지방을 거점으로 창의하였다.
이 때 많은 호남지방의 유림 인사들이 면암의 의거에 동조하였다. 문형모 역시 면암의 의진에 소속되고자 찾아뵈었다.
이 때 영광의 김병섭(金秉燮)·전주의 최학엽(崔學燁)·유예근(柳禮根) 그리고 익산의 박이환(朴 桓) 등도 아울러 소속되었다. 이후 문형모는 면암 의진의 길지 않았던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
의병활동이 종식된 후 1914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의 호남 통신국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1918년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한다.
註·칙명 (1911) 사본  ·돈헌유고(6) 1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2면
  홍의(洪義) 1921. 1. 3~1945.4 경남 합천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1939년 7월, 왜관(倭館)철도노선 매립작업에 근로동원 되었던 대구사범학교 학생들 중 5학년생(7회)이 중심이 되어 평소 민족차별을 일삼던 악질 일인교유를 작업장에서 구타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동교 4·3·2학년 학생들은 선배들의 항일저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39년 10월 초순에 각 기별(期別)로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우리민족의 역사, 문학서적을 윤독하며 월 1, 2회 모임을 가졌다.
이때 동교 3학년생(9회)이던 그는 동년 10월 하순에 동교생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이태길(李泰吉)·유흥수(柳興洙)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뜻을 모으고, 윤독회를 통하여 원고를 수집하는 한편 방학 동안에도 귀향하지 않고 수집된 원고를 편집하여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는데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것들이었다. 책자는 약 200부를 발간하여 학생들에게 배부되었다.
이같은 윤독회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게 되었고 다가온 조국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0년 11월 23일, 그는 박효준·이태길·강두안 등 위의 동지들과 함께 당시 대구 봉산정(鳳山町) 소재 이태길의 하숙집에 모여 표면상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항일학생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동지포섭과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등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1940년 11월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갖고 민족문화 존중 및 항일의식을 고양하였다.
또한 동년 3월에는 기관지 「학생(學生)」을 발간하여 이를 부원들에게 배부하였다.
한편 문예부와는 별도로 동교내에 1941년 1월에 임 굉(林宏) 등의 주도로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되어 「문예부」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동회는 겉으로는 학술연구를 위장하면서 민족의식 앙양과 독립을 목적한 결사였다.
그런데 1941년 2월 그는 유흥수·권쾌복(權快福)·배학보(裴鶴甫)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이같이 문예부와 연구회의 조직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서 교내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 등 각 부서를 두었다. 이때 그는 연구부 책임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예심종결결정(1943. 2. 8 대전지방법원)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556·610·62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765·767·770·77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01·804·807·811면
  화순(文和淳) 1920;30세~1920.11. 2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중국 길림성 연길현(吉林省 延吉縣)에서 국민회(國民會) 통신원(通信員)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군에게 피체되어 1920년 11월 2일 두도구(頭道溝)에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註·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349面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8卷 526面
  흥빈(興彬) 1924. 2. 1~1985.8.26 평북 강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상해(上海), 남경(南京) 지구에서 초모공작을 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5·618면

 

 16세 합천천곡

 홍도(道) 1553~?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본관 남평. 자 여중(). 정인홍()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3년에 정언이 되었으며, 이어 지평 ·세자시강원사서 ·홍문관수찬 ·장령을 지내고
어사가 되어 평안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수원부사 ·의정부사인을 지냈다.
북인(
)으로 활동하면서 정인홍과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남인의 영수 유성룡을 임진왜란 때 강화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탄핵,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크게 현달(
)하지 못하였다.출처

 

 16세 진주관방

홍운(運)  호 : 매촌(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의병장이 되어 싸우다 전사하자
격문(
)을 지어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왜적을 격퇴,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612년(광해군 4) 진사를 지냈다. 문장 ·시문()에 능하였다.

원종공신()
조선시대에 큰 공을 세운 정공신(
)을 정할 때 그에 따라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 칭호로 그 유래는 태조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이 많은 개국공신()을 정할 때, 개국공신을 도와 태조의 잠저()에서 봉사한 공신의 자()·서(사위)·제(), 기타 수종자() 1,000여 명에 대하여 원종공신의 칭호를 수여하고 노비()와 전토()를 급여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정종(
) 즉위년의 정사공신()부터 1728년(영조 4)의 분무공신()에 이르기까지 28종의 정공신에 등외공신을 원종공신이라 하여 논상()하였다. 이들에게 급여한 전토를 공신전이라 하고 노비를 공신노비라 하였으며, 상훈문서()를 공신녹권() 및 공신상훈교서    

 

19세 충혜공파

(緯) 1555~1632 자: 순부(純夫) 호: 모계(茅溪)

12세 익겸(益謙:충혜공) 후손으로 16세 응(雄)은 선생의 증조부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부친 18세 산두(山斗)와  어머니는 덕계 선생의 일족인 함양오씨(咸陽吳氏)의 차남으로 명종(明宗) 9년(서기 1554) 6월 14일 거창 가조현 용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
)과 함께 고령에서 왜적과 싸웠다.
김면이 싸움 중에 병으로 죽자, 뒷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에 내려가, 10여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런 독행(
)으로, 부제학 김우옹, 재상 유성룡 등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고령현감(
)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신병으로 사임했다.
거창 용원서원(
)에 제향하고 거창박물관에 유품등이 있다.

문위公 소개

가.출생과 성장
부친의 호는 학산(學山)으로 학문이 높아 덕계(德溪) 오건(吳建)선생과도 교우(交友)하였고 향리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기에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배웠다
당시 이석명(李碩明) 거창현감(居昌縣監)은 팔송정(八松亭)을 건조하여 학산공(學山公)에게 지방자제의 교육을 부탁하였고, 영호(瀯湖) 윤경남(尹景男)은 문하생(門下生)이었다
함양(咸陽)에서 거창군가북면용산리로 이거(移居)해 왔으며 아들은 삼형제로 성후(誠後), 경후(敬後), 충후(忠後)이다

나. 행적(行蹟)
선생은  6세때 독서를 시작하여 9세에는 상서(尙書)의 뜻을 알았다. 13세때 조 상(喪)을 당하여 부친이 시묘(侍墓)하는 데서 영호(營湖) 윤경남과 함께이 공부하였다.
○ 19세 : 남명(南冥)선생을 방문하였고, 장례(葬禮)때 참석하여 예(禮)를 배웠다.
○ 21세 : 산청의 덕계선생께여 역학(易學)을 배웠는데 경의지학(敬義之學)의 근본을 얻었다.
              7월에 덕계를 제사하는 제문(祭文)으로 분명이 진동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께 50년동안 가르침을 받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정선생 또한 여러
    제자중 으뜸으로 생각하였으며 후에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을 지었다.
○ 38세 : 6월에 영남유생을 대표해서 수우(守愚) 최영경 신원소를 지었다
              9월에는 팔송정(八松亭)에서 현감 이석명의 명으로 생도를 교수함.
○ 39세 : 임진년 창의하여 김면(金沔, 호는 松庵)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지례, 병암, 고령, 성주, 합천
              등지에서 왜적을 방어하여 진양일로(晋陽一路)와 주민을 구제하였다.
○ 46세 : 용산에서 모계리로 이거하다
              호(號)의 계(溪)를 '谿로 바꿈은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함이었다고 한다.
○ 50세 : 의사 이형(李亨), 장응인(張應麟), 효자 최발전(崔潑傳)을 지었다.
○ 51세 : 5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동강(東岡) 김우옹의 추천에 의해 6월에 부임했다.
             당시 문인 모의자(慕義者)는 사우도를 참조할 것. 52세에 계공랑(啓功郞∼종7품)에 승진
○ 52세 : 선무랑(宣務郞), 선교랑(宣敎郞) 종6품에 승진. 선무원종공신 삼등에 봉해지다.
○ 53세 :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12월, 서애 유성룡(柳成龍) 추천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
○ 55세 :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義郞), 봉훈랑(奉訓郞 종5품), 봉직랑(奉職郞)에 승진
○ 56세 : 광해군 1년, 벼슬을 버리고 귀향.
○ 61세 :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제주도 대정에 안치, 윤경남이 운봉 현감(縣監)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 62세 : 문인 조직(趙稷)이 광해의 폐륜행위를 상소(上訴)하여 남해로 유배되고 선생도 무고(誣告)되어
              화(禍)를 당할 뻔 했는데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오사호(吳長)는 정온(鄭蘊)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토산(兎山)으로 유배됨.
○ 63세 : 서계서원(西溪書院) 건립에 전력함.
○ 64세 : 오사호(吳思湖)는 유배지에서 사망, 선생은 삭명사판(削名士版: 모든 벼슬이 삭탈)됨.
○ 65∼66세 : 허목(許穆∼眉), 조경(趙炯∼龍州), 이진철 등과 서신 왕래, 상봉 등이 빈번하였다.
○ 67세 : 한강선생 사망(광해 12년), 위패(位牌)를 모시고, 대곡(大哭)하고 제문(祭文)으로 조의하였다.
○ 69세 : 연평답문절요(延平答問切要)를 초록(抄錄)하였다.
○ 70세 : 인조왕 1년 4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종4품) 고령현감에 임명되었다. 6월 부임 -> 11월 사임.
○ 75세 : 도산서원(道山書院) 창건을 발의함.
○ 78세 : 덕계선생 행장(行狀)을 지었다.    12월 24일 별세하시다
○1644년 공의 행장(行狀)을 허목(許穆)이 찬술함


2. 선생(先生)의 스승
가. 선생은 19세때 남명의 장례(葬禮)에 참석하기까지는 부친께 배웠다. 부친은 당시 거창현감이 공의 향리에 팔송정을 건립하여 생도를 교수케 했다는 거창군지를 보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선비임을 알 수 있고, 운봉현감을 역임한 윤경남(尹景男)은 문인이었고, 허목이 적은 선생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선생의 아버지 산두(山斗)는 어질고, 예가 있었지만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했으나 고을의 자제들 중에는 예를 알고, 부형(父兄)을 섬기는 자는 모두가 그의 제자였다고 했다.
조경(호∼龍州)이 지은 묘갈명의 학산공에 관한 기록은 이름은 산두요 통정대부, 소년시절부터 순수하고, 문과 예에 깊고, 향리의 종사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나. 남명(南冥)과 조식(曺植) 선생
선생은 정훈(庭訓∼가정에서 배움)을 하는 한편 큰 뜻을 품고 덕산(德山)에 가서 19세에 남명(南冥)선생을 배알하였다. 19세에 당시 남명선생의 학덕(學德)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남명은 철저한 선비정신으로 평생을 산림처사로 일관하였으며, 정몽주, 길재, 정여창 등의 전통적인 영남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영욕, 이달 등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평소에도 종일 단정히 앉아서 게으른 빛이 없었고, 그 기개는 추상열일(秋霜烈日)하였다.
수제자 정인홍은 천고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고, 백세를 앞두고도 혹하지 않는다(前千古而無愧 後百世而不惑者)했다
학문은 수기실천(反躬實踐)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일을 허비함은 기세도명(欺世盜名)이라고 갈파하였다. 선조 1년 무진봉사에서는 선조에게 정치의 근본으로서 명선(明善), 성신(誠身), 주경(主敬), 지의(至義)를 상주하였다. 마음속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외부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의(義)라고 하였다.
남명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강조하고, 형식보다는 실질을 숭상하였기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은 대개가 남명 문인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정인홍을 미워한 나머지 남명사상까지 싸잡아 몹쓸 것으로 청소하였기에 우리 민족사는 더욱 얼빠진 격이 되고 말았다.(內明者敬外斷者義)
모계선생은 당시 우리 민중의 위대한 선각자이며, 실천가라고 추앙하는 남명선생의 높은 뜻을 19세 청년의 가슴깊이 간직하였고, 남명 사후에는 그의 수제자 오덕계(吳德溪), 정내암(鄭來菴), 정한강(鄭寒岡) 등을 통하여 스승의 정신을 더욱 깊게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다. 덕계(德溪) 오건(吳建) 선생
21세때 산청에 있는 덕계선생을 배알하고, 주역(周易)을 배웠으며, 거기에서 비로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깨달았다고 서술되어 있다.(제덕계오선생문에서) 덕계선생을 제사하는 제문(祭文)을 통해서 사제지간의 관계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선생의 아버지인 학산공은 덕계선생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선생의 외가(外家)가 덕계선생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덕계선생을 배알한 것은 21세 6월(1573)이었는데 덕계가 죽은 것은 7월이었다.(54세)
위 내용으로 보아 선생이 덕계로부터 배운 기간은 불과 한달이 되지못하나 주역(周易)의 휘역(義易)을 통해 경(敬)과 의(義)를 배워 그 끝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선생은 제문(祭文)에서 덕계의 선비로서의 인품을 出可以砥柱邦國(나가면 국가의 기둥이 되고)  處可以標的後擧(머물면 후진의 표적이 된다.)고 하였다.
백성에게 재앙(災殃)이 있으면 이를 구제하고, 후진의 질의에는 친절을 다하였다. 덕계는 대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근무한 적과 호남어사(湖南御使)로서 민정(民情)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덕계를 스승으로 섬겼지만 덕계의 아들 장(長: 호∼思湖)과는 친형제 이상으로 의기상합(義氣相合)하는 사이였다. 연령은 사호가 10세 아래였지만 임진왜란때 다 같이 송암장군의 참모로써 생사를 같이 하였고, 광해군시절엔 힘을 합쳐 항쟁하다가 사호공(思湖公)은 끝내 토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사호공 또한 대과에 급제하여 광해군정권때 조정에서 정언(正言) 벼슬을 하며, 광해군 정권을 맹렬히 탄핵(彈劾)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과도 생사를 초월한 친우관계이다.
선생은 덕계선생이 사망한 이후 문집의 정리와 서원(서계서원) 건립에 약 20여년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동안 광해정권 15년이 끼어 있으니 더욱 더하였다. 서계서원(西溪書院) 상향문(常享文)에 의하면 선생은 효우하고, 조정에서는 정직, 수절하였으며, 정의지학을 전함이 있어서 실로 참 스승이라고 하였다.

라.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1543~1620) 시호(諡號)는 문목(文穆)
남명, 퇴계의 문인으로 추천에 의하여 대사헌까지 올랐음. 지방수령때는 선정으로 여러 서원에서 제향(祭享)하였다.
선생의 제한강선생문(祭寒岡先生文)에서 身亡而道不亡 跡熄而名不熄(몸은 없어져도 도는 그대로 남아 있고 발자취는 없어져도 이름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 한강(寒岡)이라고 하고 있다.
인륜(人倫)에 모범되고, 난세(難世)에 기둥이라 하였고, 덕계의 지도와 남명을 근원하였으며, 퇴계에 계도되었다고 했다. 선생으로 보면 덕계와의 관계는 동문수학인 동시에 사제사이로 되어 있다. 선생은 한강에게서 약 50년동안을 배웠기에 그 은혜는 보통의 사제지간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선생과 한강(寒岡)은 광해정권때 명분과 의리로서 사생일체(死生一體)가 되어 투쟁하면서 진퇴를 같이 하였다.
정동계(鄭桐溪)의 10년 유배, 오사호(吳思湖)의 유배지 사망, 조직의 남해 유배, 한강과 모계의 파직과 제야투쟁 등은 실로 남명사상(南冥思想)의 처절한 발로(發露)이며, 승리였다.
선생 57세때 광해 3년(서기 1610) 한강선생에게 올린 편지를 보면 광해정권을 일시(一時) 폭객(暴客)의 변(變)이라 하였고,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살자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광해군 시절의 그 참흑한 탄압상을 말해주고 있다. 한강선생이 임해군의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니 선생은 이를 위로하기를
   선생께서 광해의 폭정을 탄핵하니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통쾌하겠는가?(聞先生論時事 聞子孰不興起
   그러나 그들은 도마이고  선생은 고기이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但彼方爲机 先生自就爲肉 何如哉)
선생은 그 많은 한강의 문인중에서 한강선생의 언행록(言行錄)을 찬술(撰述)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그 내용을 보면 한강은 어릴 때도 종이조각에 쓰인 버리는 글자도 밟지 않았고, 경학은 물론 천문, 지리, 의방, 제례, 심학 등 무불통이었다. 나는 남명(南冥)선생 장사때 처음 만났고, 그후 덕계(德溪)문하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마.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
정인홍은 광해군정권때 산림정승(山林政丞)으로써 북인들의 영수(領袖)인 동시에 광해군이 의지하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들이 주장하는 모든 책임을 지고, 형벌을 받았다. 정인홍이 역적이란 누명이 여러 백년 계속되는 사이에 특히 경상우도에 있어서의 그의 행적은 철저하게 삭제되어 지금 공에 대한 재조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암의 증조부 희(喜)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삼가현감을 역임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11세에 경상도사 구졸암 양희(梁喜)의 사위가 되었고,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문하생이 되었다. 15세에는 남명의 문하생이 되어 결국엔 의발전수(衣鉢傳受)의 고제(高弟)가 되어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氣像)과 내경외의(內敬外義)의 학맥(學脈) 및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경륜(徑輪)을 이어 받았다. 24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선비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39세때는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선발되어 6품직을 받았고,(五賢士) 44세때에는 영천군수로 배명되었다.
내암은 합천 가야출신이고, 선생은 가조 용산출신으로 서로의 거리가 8km정도이니 보행으로 2시간 정도로써 하나의 경내(境內)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모계선생은 1554년생이고, 내암은 1536년생이니 내암이 18년 연장이었다,.
내암이 전국 5현사로 선발되었을때(39세) 모계는 21세의 청년이고, 이때 덕계와 한강(22세 때)을 찾았으니 이전에 이미 내암과 모계의 관계는 사제(師弟)의 의로서 맺어진 것으로 보아진다. 내암과 동문관계인 덕계와 한강을 내암이 모계에게 소개한 것은 당연한 이치로 보아진다.
모계일기(茅谿日記)와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跡), 그리고 거기에 부착되어 있는 몇가지 상소문(예 다사헌계사 등)에 의하면 등재된 대사헌 사직상소가 모계의 일기 일부에 등재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보통의 사이가 아니었다. 이름을 삭제한 것은 후인(後人)의 소행으로 보아진다.
모계문집에 서문(序文),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등 곳곳에 내암과 모계의 관계를 구의(舊誼)로 표현하고 있음이 보통의 사이가 아님을 실증케 한다. 모계의 입장으로 보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명문가이며, 갈천(葛川)의 문인으로 24세에 급제한 내암 같은 명망가에게 사사(師事) 아니할 이유가 없고, 내암으로 보아도 장래가 유망한 후진의 간청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도 분명하다.
위와 같은 깊은 인연은 남명학통(南冥學統)과 경상우도의 기질 및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 등에서 더욱 밀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시절을 맞이하여 북인정권의 실리정책(實利政策)과 명분을 지상과제로 삼는 서인(西人) 및 우도(右道)의 전통정신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갈등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내암과 모계, 동계 등의 관계를 갈라 놓게된 연유라고 보아진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모계와 내암의 구체적인 관계 등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재조명의 날이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바.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
원천공은 천천리(泉川里)에 살고, 모계공은 용산으로 그 거리는 약 1km 정도이니 한 마을이라 할것이다.
원천공이 모계공보다 14년 연장이고, 원천집 32세 연보에 의하면 문모계(文茅谿) 순보(順甫∼선생의 자)가 원천공에게 와서 학문을 익혔다는 기록이 있고
원천공 68세 연보조에는 유서애(柳西厓)에게 답하는 서신에서 문순보(茅谿)의 재행(才行)을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모계공이 유서애의 추천으로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는 연도와 부합되고 있다.
원천공은 뛰어난 재행과 학문, 그리고 생활의 여유 등으로 건축한 원천정사에는 오덕계, 정한강, 최수우당, 김동강, 정동계 등 명망있는 선비들이 연달아 내방하여 학문과 우의를 다졌으니 바로 이웃에 있는 모계의 참석은 불문가지이다.
원천공은 임진왜란때 창의(倡義)에 참여하여 김면(金沔)의 거창 의병군을 도와 전공을 세웠기에 명(明)의 황제로부터 첨지(僉知)의 직함과 선조로부터 대사헌(大司憲)의 직함을 받았고 사후에 용천정사에 제향되었다.
모계공은 원천공에게서 학문뿐 아니고, 출처와 행의에 대한 것도 배웠으며, 모계일기에도 여러곳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존경하는 스승이며, 향토내의 선배로써 지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모계사우록(茅谿師友錄三十六賢)에도 원천공이 소개되어 있다.
이상 외에도 의병 삼장사적 부록에 의하면 사우록(師友錄)이 있는데 그곳에는 36현(賢)의 이름과 행략(行略)이 기록되어 있으며, 스승으로는 정한강(鄭寒岡), 동강(東岡) 김우옹, 동강은 부제학으로 종사할 때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여 동몽교관을 임명받게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모헌(募軒) 이경명(李景明),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이다.

3. 선생(先生)의 벗
오장(吳長∼思湖)  윤경남(尹景男∼瀯湖)  이휘옹(李希雍∼和彦)  정장(鄭樟∼都事) 조응인(曺應仁∼善伯)   형예갑(邢禮甲∼巷叔) 이덕경(李得慶∼治善) 오해(吳解∼鎭安) 이분(李芬∼馨甫)  신여율(愼汝栗) 신정(愼定∼解彦) 이승(李承∼晴暉堂)

4. 선생(先生)과 뜻을 같이 한 분들
전팔급(全八及∼源溪) 김면(金沔∼松庵) 정온(鄭蘊∼桐溪)  장현광(張顯光∼旅軒) 류중룡(柳仲龍∼漁適)  조종도(趙宗道∼大笑軒) 성팽년(成彭年∼石谷) 정경세(鄭經世∼愚伏堂) 강대연(姜大延) 박이장(朴而章∼龍潭)  이경의(李慶義∼子方) 이영(李霙∼汝洽) 이경현(李景賢) 노형운(盧亨運∼時甫) 최현(崔睍) 박성(朴惺∼德凝)

5. 선생(先生)의 학덕(學德)을 존경하여 왕래한 선비
허목(許穆∼眉) 유진(柳袗∼修巖) 임진부(林眞∼林谷)  권수(權壽∼東溪) 강대수(姜大遂∼寒沙) 윤응석(尹應錫∼西潭) 여작(呂 ∼晦仲) 권극경(權克經∼參奉) 노향운(盧享運∼表庵)  박계회(朴啓晦) 이찬

6. 선생(先生)의 문인(門人) :
※모계재 문인(茅谿齋 門人) : 이선립(李善立) 윤사임(尹思任∼聖元) 변창후(卞昌後∼月潭)                                          정시수(鄭時修∼琴川) 이준향(李俊香) 이응백(李應白)  이굉(李宏)
                                           박황(朴黃) 허후(許厚∼觀雪) 유진(柳袗)  조임도(趙任道)
         조경(趙絅∼龍州) 이호민(李好閔∼玉峯)  조정생(曺挺生) 조정립(趙挺立) 박군수(朴君秀∼龍湖)
※경사문인(京師門人) : 조직(趙稷) 이경의(李景義∼晩沙) 이진철(李晋哲) 이시명(李時明∼石溪)

7. 저술(著述)

모계문집(谿集)    목활자본. 4권 2책.시문집
1829년 후손들이 간행하였다. 앞에 저자의 세계도(
)와 연보가 있다

시(詩)

5편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의 장례에 부친 만사()로 구성

상소문

1.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어 서인에 의해 죽은 최영경()의 신원을 요청한 것
2.국왕의 구언(
)에 응답한 응지상소인데  타인을 대신하여 적은 글인바
   광해군의 몰락이 북인의 전횡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인조때 서인의 독주 비판    하면서 남인의 입장을 강하게 표현했는데 대필한 것들이었다

잡저

의병장 김면() ·곽재우()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사람들이나
효자들의 사적을 기록한 글이 많고

행록

스승 정구()와 선비 이희옹() ·이사념()의 행적기록 등
의병장이나 효자 ·선비 등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서, 임진왜란 때 저자가 의병을 직접 지휘한 경력과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확립해 가는 사림파로서의 입장이 바탕이 되었던 듯하다.

그외

정구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하여 제문 ·묘지() 등 다른 사람들에게 바친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행장 ·만장 ·제문 등 저자에 대해 쓰여진 다양한 형식의 글들을 모아놓았다.

선생의 문집(文集)이 이루어진 것을 몰세(沒世) 후 약 200년 후인(서기 1631년 사망) 기축년(己丑年)이라고 하니 순조(純祖) 29년(서기 1828)인 듯하다.(柳尋春의 문집 서문에 의함) 그동안 많은 세월과 혼란, 그리고 후손들의 영락(零落) 등으로 원래의 많은 양에서 줄어든 것 같다. 그 대요(大要)를 보면 아래와 같다.
시(詩)∼3수, 만사(輓詞)∼16수(한강, 원천, 영호, 삭주 등), 부(賦) 2, 소(疎)∼2, 서간(書簡)∼52(상 한강, 여 오익승, 여 조지원 등), 잡저(雜著) 5(황석산성사적, 김송암사적 등), 발(跋) 1, 제문(祭文) 4, 묘지(墓誌) 1. 행록(行錄) 3, (한강어행록 등), 모계일지(茅谿日誌),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跡) 및 사우룩(師友錄)

시(詩)에 있어서 금한(昑旱)의 일절을 소개한다.
농사철은 비가 없어서 모두들 단비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비 오지 않는 저 푸른 하늘을 원망하기 보다는 권세부리는 관원(官員)을 더 원망한다고 서술하고 있다(不怨彼蒼者 惟怨居 軸)

ㅇ 만(輓) 윤여술(尹汝述), 경남(景男) 갑인(甲寅, 광해 7년, 서기 1614) 만사 16수 중
영호 윤경남을 조의하는 시는  
   少而壯而同遊 同學(소년 장년시절 같이 놀고 배웠다)
   知志慕芳 噫之之薔 基 基慽 白頭芳噫(뜻을 알고 사모하니 동고동락이 새삼스럽다.)
   一死一生 庵忽今朝 天曷故芳(슬프도다! 하나는 죽고 삶이 문득 오늘에 이르니 하늘은 무슨 까닭인고)
   噫老友茅谿順甫 情不能成文芳噫(늙은 벗이 능히 글을 이루지 못하니 슬프다.)
선생은 14세때 영호(營湖)를 만나(당시 영호는 12세) 아버지인 학산공(學山公)에게서 수학한 이래 영호가 죽을 때까지 한번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때는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김면(金沔)과 같이 선무원종공신록권(宣務原從功臣錄券)을 받기도 하였다.
영호(營湖)는 운봉현감 재직시 사망했기에 선생은 영호의 운구(運柩)를 도중에서 맞이하여 대성 통곡하였다. 선생의 만사(輓詞)는 스승인 정한강, 전원천, 변삭주 등으로 이어지는데 한강(寒岡)선생과 박이장(朴而章)에 대한 만사는 문장형태로 장문(長文)으로 진술되고 있다.

부(賦)에는 사자언지(四者言志)와 소성약천성(少成若天性)이 있는데 사자언지는 선생의 철학이 담겨진 내용으로 선비로서 정치를 걱정하고, 예(禮)와 종묘(宗廟)에 뜻을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간상행(日間常行)과 자연에 순종하는 생활이 성인(聖人)의 뜻이라고 갈파하였고, 소성약천성에서는 선생 성리학(性理學)의 대강을 피력한 것으로 인간의 심성(心性)은 순선(純善)한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박탁(駁濁)의 차이가 있으니 수양과 교육의 필요성이 있고, 특히 어릴 때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하였다.

소(疏)에는 대영유신리최수우소(代嶺儒伸理崔守愚疏)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최영경(崔永慶)은 원래 서울의 사족(士族)으로 학문과 선비로써의 덕이 높아 6품직에 벼슬을 받은 사람으로 진주에 와서 살면서도 충군(忠君), 애민(愛民)하였는데 방자한 무리의 무고(誣告)를 받아(정여립 역모사건 때)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선조왕께서는 무고한 간신(奸臣)들을 벌주고, 선량한 선비를 구하여서 선비나 백성으로서 억울함이 없는 대명천지(大命天地)가 되도록 요청한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최영경은 이 상소문이 올라가기 전에 이미 옥사(獄死)하고 말았기에 한자리에 모여 최영경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상소문을 선생에게 의뢰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학문(學問)과 명망(名望)을 짐작할 수 있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
이 상소문은 을축 12월 선생 72세(인조 3)서기 1625년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서는 선생이 고령현감에 임명되고 난 후에 상소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보면 인조왕은 훈신(勳臣)의 발호(跋扈)와 평안감사 이상길의 부당한 처리 및 군정(軍政)과 이도(吏道)의 확립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붕당의 폐단 및 국왕으로서의 수기(修己)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서간(書簡∼편지)이 제일 많은 편이다. 그 당시에는 우편제도가 없었기에 편지는 모두가 인편(人便)으로 전하는 사정으로 원거리에서 소식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경우를 보면 가조(加祚) 용산(龍山)이나 월천(月川) 모곡에 앉아서 서울이나 남해(문인조직이 남해에 유배당하고 있었다.) 황해도 토산(오사호 유배지) 등지까지 사람을 보내어 서신을 여러 차례 내왕케 하였다.
하인(下人)이나 인편을 이용하는데 모두가 몇백리 길을 보행으로 왕래하였다. 말(馬)을 이용한다는 것은 특수한 사람 이외는 불가능하였다. 지금 전하는 52건의 서간중에는 조경, 허목, 장현랑, 정경세, 오장, 정구, 사위(羅子中), 아들(忠俊) 등 50여건이 보이는데 서신을 통해서 사상이나 포부, 스승에 대한 가르침, 제자에 대한 교육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직(趙稷∼문인)에 대한 편지 속에는 독서의 방법, 공부하는 책의 선택, 수양하는 덕목(德目), 건강법(단전호흡)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잡저(雜著)
이곳에는 향토에 관한 기중한 사료(史料)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중의 사적(史蹟), 황석산성사적, 산제동입원창규(山祭洞立院創規) 등으로 임진왜란 중엔 선생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들이니 귀중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선비들은 향토에 대한 사적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데 비하여 선생은 향토사(鄕土史)에 무게를 두고, 후세에 남겼다는 것은 남다른 식견(識見)이 없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발(跋)
발(跋)에는 연평답문질의발(延平答問質疑跋)이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의 연원에 대한 내용으로 성리학은 연평 이선생(주자의 스승)에 의하여 그 뿌리가 확립되었다는 것으로 오덕계선생이 퇴계선생을 찾아서 약 한달동안 머물며, 상호 토론한 요지를 문장화시킨 것이다.

제문(祭文) : 제문(祭文)에는 정한강, 오익승(오장), 윤영호 등을 조문하는 내용이다.
묘지(墓誌) : 묘지(墓誌)에는 변벽(성균새원 구산 변공묘지)의 것이 있다.

한강선생언행록(寒岡先生言行錄)
한강은 퇴계와 남명의 수제자로서 학문이나 도덕이 특출한 선비이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 생사당(生祠堂∼살아있을 때 사당에 뫼시었다)을 주민들이 정성으로 지을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극진한 추앙을 받은 분으로 그 제자는 수백명이었다. 한강은 선생을 가장 신임했고, 선생은 스승으로 한강을 가장 존경했다.

행록(行錄)
선생은 타인의 행장이나 행록, 묘갈명 등에는 극히 신중한 편으로 자신이 직접 상면한 분이 아니면 저술치 않는 것 같기도 느껴진다. 구산선생의 묘지(墓誌)는 극히 간략하고, 두건의 행록 또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수식(修飾)이나 과장(誇張)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계일기(茅谿日記)와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蹟)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부터 시작으로 임진 이듬해 즉 송암(松庵) 김면장군이 사망하여 임진 의병활동(義兵活動)이 사실상 마감될 때까지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문헌으로 국가적인 사료(史料)이다.
의병삼장사적, 사우록 등이 있는데 후인들의 가필(加筆)과 삭제 등이 있는 듯하고, 내암문집 등 내용과 중복되는 부분도 눈에 띄인다. 모계일기 등도 선생의 친필이 아닌 듯하다. 그 해제(解題)는 별지와 같다.

모계선생일기(茅谿先生日記) 해제(解題)

모계선생 일기는 선생이 임진왜란 3년전인 기축년 선조 22년(서기 1589) 1월부터 선조 26년 계사년 4월까지 약 4년간 4개월간 기록한 선생자신의 일기와 모계관계 기록이 첨부된 전체 161쪽 분량의 필사기록이다.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으로 가로 18.9cm, 세로 28.2cm 크기로 한면은 대개 14행, 1행은 37∼38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지를 접어서 양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사람의 필체로 보아진다.
선생은 명종 9년(서기 1554) 6월 14일, 가조현 용산에서 아버지 학산(學山) 문산두(文山斗)와 함양오씨 부인의 소생이다. 선세(先世)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단성(丹城)이고, 그후 함양 3세조인 문웅(文雄∼현감)때 거창으로 이거했다. 선생의 벗은 윤경남(尹景男), 오장(吳長) 등이고 스승은 오덕계(吳德溪)와 정구(鄭逑)선생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송암의 참모로써 헌신하였기에 선무원종공신록권(三등)을 받았다. 선생은 동몽교관, 사헌부감찰, 고령현감을 역임했는데 78세로 졸했다. 용원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송암실기에는 모계수기(手記), 영호실기에는 모계수기략(略), 학암집(鶴巖集)에는 문모계위수기라고 인용되고 있다.
이 자료는 내용으로 보아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기, 의병사적, 정인홍관계 기록, 만사, 서(書), 기타 사우록(師友錄)이다.

일기(日記)는 선생의 개인 일기인데 161쪽 중 98쪽으로 선조 22년에 시작하여 거창, 합천, 고령, 성주, 현풍 등지의 사람들과의 교우관계가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이 지역 역사고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암의 의병활동 및 전란관계가 아주 간단 간단하게 일기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병사적은 의병 三장사적이라 했는데 내용에는 정인홍, 김면, 이향, 장응린, 곽재우, 이대기, 전치원 등의 의병사적과 황석산성사적, 최발사적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인홍관계 사적이 많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특수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한다. 의병 三장사적은 정인홍, 송암, 망우당, 그리고 이형, 장응린, 최발의 사적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정인홍관계 기록은 교유대사헌서(敎諭大司憲書) 등 네편인데 선생과 내암관계를 추측케하는 것으로 뜻이 있다. 의병사적(義兵事蹟)에서 정인홍을 선생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사와 사우록은 문집 간행상 필요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할 때 일기, 정인홍관계 기록, 의병기록 등은 선생이 직접 쓴 것이고 만사, 사우록 등은 후손이 첨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컨데 이 모계일기(茅谿日記)는 우리 향토사(鄕土史)를 연구하는데 가장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향토사료는 본 일기와 영호실기 및 함양 출신의 정경운이 저술한 고대일기 삭주문집, 석곡문집 등이 있지만 거창의병군(居昌義兵軍)을 인솔한 책임자가 직접 기록했다는 것과 선생을 중심한 당시 문인들의 내왕과 생각들까지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라 아니할 수 없다. 가조의 용원서원(정현제교수 논문참조)에 보관되어 있다.

8. 선생(先生)의 이기문제(理氣問題)
선생은 논문(賦)에서 소성약천성(小成若千性) 인성(人性)문제에 언급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분한 자질이 있어서 힘쓰지 않아도 이(理)는 중(中)을 간직할 수 있고, 도(道)는 생각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며, 마음은 어릴때(赤子) 것을 읽지 않으면 커서도 도(道)는 온전할 수 있다."
위에서 인간은 원래 순선(純善)한 것으로 무오(無惡)하나 박(駁), 탁(濁)에 인연하여 혹은 달리할 수 있으니 뜻은 성색(聲色), 이목(耳目)에 유인되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물(水)이 동서를 가리지 못하고, 길(路)이 남북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있음을 경고하였다. 수기(修己)의 방법으로는 쇄소응대(灑掃應對)와 간특함을 멀리하고, 천리(天理)를 따르면서 인간(人間), 인사(人事)에 소흘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에서 이(理)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실이 사람다운 것은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천(天)이다. 만고에 이(理)는 하나이고, 만물에도 이(理)는 하나이다. 하늘과 사람에 이(理)가 하나일 뿐 아니고, 천지간 형색, 동식물 등이 우리와 더불어 같은 이이다. 이(理)가 이미 하나이니 (相同) 서로 느끼는 도(道) 또한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나의 기(氣)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氣) 또한 순하다. 때문에 천지와 사람은 하나의 이(理)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생이 이를 강조한 것은 인군(人君)은 하늘을 대신하여 이(理)를 이끌어 나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조지원(趙止源)에게 보낸 답서 가운데서 선생은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주자서절요, 근사록 등을 숙독하면 심목(心目)이 맑아져서 우환(憂患)이나 곤고(困苦)가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성리대전 중에서도 심성졍(心性情)과 주서절요 중에서도 왕장문답(汪張文答)이 가장 요긴하다 하였다.
조지원은 선생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서 서울에서 동몽교관으로 근무할 때의 제자인데 광해군의 폐륜행위를 직간(直諫)하다가 남해도로 유배되어 10년동안 고초를 겪은 분으로 성정이 너무나 곧아 선생도 걱정을 하는 바였다.
여기에서는 유배생활의 고난을 성정을 공부하여 극복하도록 서신으로 교훈을 주는 장면이라고 본다. 광해 14년 신유에 보낸 서신에도 성정(性情)공부는 주야로 읽고, 날로 만언(萬言)을 기록하는 효과보다도 더하니 심지공부(心地工夫)는 오로지 하나에 있으니 사색이나 정의도 일경(一敬)에 있다. 하물며, 일경공부(一敬工夫)는 병중백약(病中百藥)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건강법으로 단전호흡을 전하기도 하였다.

주자학(성리학)의 근원은 연평(延平∼주자의 스승)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문집중 연평답문질의발(延平答問質議跋)에서 주자의 위대함을 밝히자면 그 연원인 연평(延平)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9. 선생(先生)의 왕도론(王道論)

옛날 선비들의 최대의 지향점(指向點)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요약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남명같은 분도 치인에 대해서는 밤잠을 자지않고 걱정할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향상과 왕도(王道) 및 이도(吏道)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적이 많았다.
모든 선비들은 국가정치에 대해서 상소라는 형식으로 건의, 비판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언론(言路)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왕도 그러한 전통관례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간혹 지나치게 과격한 진언(進言)을 하다가 유배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이를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국내 여론이 비등(飛騰)하여 결국은 처벌을 거두고 말았다.
선생 또는 대영유신리최수우소와 대인응지소에서 선조왕과 인조왕에게 건의하고 국정을 비판하여 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대영유신리최수우소(代嶺儒伸理崔守愚疏)
위 상소는 선조 22년(서기 1588) 호남에서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반역사건으로 진주에 살고 있었던 남명의 제자이며, 덕망이 높았던 최수우(崔守愚)가 무고로 인해서 구금되어 결국은 옥사하고 말았는데 이때 영남일대의 선비들이 합천에서 회합하고, 수우당의 억울한 것을 풀기 위해서 선생에게 상소문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문은 상달되기 전에 수우당은 옥사로 끝나고 말았다.
첫째는 최영경(崔永慶)의 사람됨을 설파하고 있다. 선비의 가정으로 충효(忠孝)를 실천하고, 충군(忠君), 애국(愛國)의 정성이 지극하며, 간특하고, 그릇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곧은 선비임을 강조되고 있다.
위와 같은 선비가 어찌 역적과 같이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는가? 하며, 진주인(晋州人) 정대성(鄭大成), 판관(判官) 홍정서(洪廷瑞) 등이 사감(私感)으로 정여립난에 억지로 연관시켰기 때문인데 관계기관이 진상(眞相)을 파악치 못하였고, 국왕 또한 진상파악에 소흘했기 때문에 선량한 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통박(痛駁)하고 있다.
둘째는 조사과정에서 일부가 명백한 허위와 무고임이 밝혀졌는데도 왕법을 집행하는 관원들이 적당하게 호도하여 유야무야하게 지나쳤기에 최영경은 희생되고 말았다. 이것은 한사람의 최영경이 죽은 것이 아니라, 만사람의 최영경이 죽은 것이며, 왕법의 최고권자인 국왕은 지금이라도 소상하게 밝히어 왕법 시행에 있어 역사적인 과오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위와 같은 처사가 속출하기 때문에 인심은 전하의 정형(政刑)에 대해서 열복(悅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人心之不悅服於殿不政形者也
전하는 조종(祖宗)으로 생민(生民)의 책임을 지고, 착함을 상주고, 악(惡)을 벌하여 사(私)업이 다스려온지가 25년이나 되었는데 오직 최영경의 사건에 있어서는 간특한 무리들에게 농락되어 선량한 사람으로 하여금 애매하게 희생을 당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넷째로 국왕 가까이에 있는 공경(公卿)들은 전하를 도우는 임무이고, 이목(耳目)인데도 권리나 이익에 도취되어 전하의 눈이나 귀를 가리우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이들의 농간(弄奸)에 빠지어 왕법이 바르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直視)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다.
다섯째로 우리들이 영경의 처형에 대하여 이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주함은 결국은 종묘사직을 위함이고, 선이 미움받는 사회와 국왕의 형정의 실(失)을 바로 잡고자 함에 있다고 역설했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에 나타난 왕도론(王道論)
  대인응지소는 인조의 하명(下命)에 응하여 선생의 정치적인 식견(識見)과 현안중에 국사(國事)에 대하여 진언한 내용임.

첫째, 왕의 심법(心法)으로서 인(仁), 명(明), 무(武)는 성제(聖帝) 명종(明宗)의 상전(相傳)의 대법으로 명(明)이란 요 순 우를 이르는 바 정(精)이고, 무(武)란 요 순 우의 유일(惟一)이고, 인(人)이란 요 순 우의 이르는 바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 하였다. 인 명 무에 대하여 이를 변별치 못하면 굶주린 사람이 먹을 줄 모르며, 병자가 약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다

둘째, 인성군(仁城君)에 대한 처리인데 국내여론은 인성군이 광해군시절 강제로 끌리어 광해정권에 협조한 것을 가지고 처벌해야 된다고 하고 있는데 대하여 선생의 의견은 은의를 베풀어 구제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인성군은 선조왕의 후궁 소생으로 이름은 공(珙)인데 광해군 폐모사건때 억지로 참여된 것을 가지고, 이귀(李貴) 등 인조반정 주신들은 이를 탄핵하여 결국은 유배(진도)시켰다가 사사시켰는데 후일 인성군의 무고함이 밝혀져 벼슬이 복구되었다.
선생은 여기서 왕의 명(明)과 인(仁)을 발동시켜 일가(一家)를 보전함이 사해(四海)의 백성을 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셋째, 훈척(勳戚)의 신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과거의 중국이나 우리 나라 통치자가 왕의 측근에 있는 훈척을 잘못 다스렸기 때문에 위란(危亂)을 겪은 일이 비일비재라고 일일이 예를 들어 밝히고, 지금은 이나라 훈척은 사병(私兵)을 가지고 있으며, 혹은 전토(田土)를 강점하여 백성들을 곤궁에 빠지게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넷째, 장만(張晩)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장만은 이팔난때 도원수(都元帥)로써 앞장에 나서지 않고, 적도(賊徒)의 뒤를 따르다가 이괄로 하여금 왕도(王都)를 점령하고, 인조왕을 부득이 피란케한 역적과 비견(比肩)되는 인물인데도 오히려 그에게 중한 상을 주고 있으니 당시 생명을 버리고, 사운 용사들의 비웃음을 받고 있다. 왕께서는 주위에 있는 장만을 도우는 무리들의 말만 듣고, 그를 옹호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충신 장순(張巡)은 적세로 성이 함몰될 것을 알면서도 쥐나 새를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애첩을 죽이면서까지 성을 지키다가 죽었기에 당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는데 도원수 장만은 적의 뒤를 따라 고양이 모양으로 이쪽 저쪽의 눈치만 보다가 나타난 자에게 상까지 주었으니 뒤에 만일 왕에게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누가 전하의 위급을 구할 것인가 하였다. 지금 하나의 장만이 장차 천이나 만의 장만이 나타날 것을 미리 경고하였다.

다섯째, 평안감사 이상길(李尙吉)에 대한 처리였다. 당시는 명(明)청(淸)의 대립기로서 광해정권 때는 양단책(兩端策)으로 양국(兩國)을 조정하여 백성에 미치는 화를 미연에 막았지만 인조반정 후에는 명분책에 의하여 숭명척청책(崇明斥淸策)으로 오히려 명(明)청(淸) 두나라의 미움을 받는 결과였고, 결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초래하여 역사상 유래없는 수모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상길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가도(假島)를 지키는 명의 모문룡(毛文龍)과 합작하여 조정의 인사까지 좌지우지하였다. 이에 선생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국왕의 권위를 세워 이와 같은 사례가 없도록 건의하였다.

여섯째, 군정(軍政)과 재정(財政) 혁신을 역설하였다. 재정의 근본은 세수(稅收)인데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는 경계(經界)가 불명하여 권신(權臣)들은 한없는 토지를 가지면서 세금을 면제받고, 주민들은 한구역에서 권신이나 조정에 이중으로 세금을 빼앗기고, 군정에서도 군적(軍籍)이 없기 때문에 유랑하는 청년은 많은데 군인은 태부족이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군문에 들어오는 자들이기에 하나도 훈련과 사기가 없는 군졸들이니 이들로서 어찌 국토를 방위하겠는가 함이었다. 이러함에도 대신(大臣)들은 유유하게 날짜만 보내고 소신(小臣)들은 사욕에만 정신없으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였다.
    땅이 있는데도 재곡은 모이지 않으며(有士而財不之聚) 사람은 많은데도 병사(兵事)는 일어나지 않으니(有人而兵不興)
   국사가 어긋남은 괴이하지 않다(無在乎國事之日去也)
   신이 생각컨데 이것은 나라에 유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臣以爲此國與人之所致)

일곱째, 관리(官吏)의 선발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관리등용은 국운(國運)을 좌우하는 것으로 해당관리의 책임은 물론이고, 추천한 사람까지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관리등용에 있어서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다면 그로 인한 부정은 많은 시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급관리들의 착취를 막아야 됨도 주장하였고, 상벌의 엄정도 주장하였다.
여덟째, 붕당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광해의 폭정(暴政)은 광해가 아니라 당인들이었고, 임진왜란도 수길(秀吉)이가 아니라 바로 당인들로 발생되었다. 오늘의 당인들의 행폐는 왕이(인조) 익히 아는 바이니 실로 국운(國運)이 달린 것으로 왕께서는 일대결단이 요망된다고 하였다. 지금의 형세(形勢)는 노도(怒濤)치는 망망대해에서 노없는 배와 같아 언제 어디서 거센 파도와 암초에 의하여 산산조각 날지 모르는 형세가 이 나라의 형세라고 지적하였다.
아홉째, 국왕(인조)의 수신(修身)을 강조하였다. 국왕은 만고일리(萬古一理)를 믿고, 천명(天命)에 순응할 것이며, 하늘을 대신한 통치자(統治者)로서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왕은 언제나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정령(政令)은 마땅한가? 상벌은 공평한가? 조정의 관리등용(官吏登用)은 적절한가? 궁궐의 출입은 적절한가? 군자(君子)는 향촌(鄕村)에 있고, 소인(小人)은 조정(朝庭)에 있지 않는가? 잘못이 있는데도 그대로 방치함이 없으며, 잘된 일을 중단하는 일은 없는가? 등에 대하여 언제나 살펴야 할 것이다.
열째, 국왕의 통치는 오로지 득인(得人)에 있다. 요임금은 사방의 도적이 일어남을 걱정하지 않고, 순임금을 후계자로 맞이하지 못함과 순임금의 황화(黃河)의 범람(氾濫)을 근심하지 않고, 후계자에 우임금을 초청하지 못할까를 몹씨 근심하였다. 순임금이 자리하니 사방의 도적이 안개사라지듯 없어졌고, 우임금이 재위하니 황하의 범람이 자연적으로 치수(治水)되었다. 이와 같으니 전하의 근심은 마땅히 덕인(得人)에 있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인재의 얻음이야 말로 통치의 근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0. 선생(先生)의 출처지도(出處之道 : 벼슬하는 선비들의 처신의 길)
이것은 명분(名分)과도 통하는 것으로 고려말의 정몽주, 길재, 조선초기의 사육신(死六臣) 등과 남명이 평생동안 처사(處士)로 자처한 소의(所以)도 출처지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남명은 이록(利祿)을 탐내는 속유(俗儒)가 아니었다. 명종왕의 척족정치(戚族政治)와 주부(主簿), 판관(判官), 현감(縣監)정도로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음을 알았고, 명종을 대면한 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식견(識見)이 한낮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위와 같은 출처지도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벼슬길에 출입하는 자를 추시도명(趨時盜名)하는 무리라고 비판하였다.
남명의 출처지도는 남명(南冥)의 창안이 아니고, 특히 경상우도 선비들의 사림정신(士林精神)이었다. 선생은 우도(右道)의 지역적인 환경과 스승 남명 등의 학풍(學風)을 전승한 분이니 출처지도에 있어서는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광해왕이 즉위시 선생은 봉직랑(奉直郞 - 종5품)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해정권은 왕의 이복(異腹)형인 임해군을 제거코져 사단을 일으켰다. 이에 한강선생은 전은설(全恩設 - 無罪)을 주장하다가 배척당하니
선생 또한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때 선생은 말하기를 "떠나지 않으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광해초기에 임해군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을 당하여 동계(桐溪)는 제주도 대정, 무인 조직(趙稷)은 남해, 오장(吳長)은 토산(황해도)으로 유배되는 변란(變亂)이 거듭되었다. 이때 선생은 참기 어려운 신변위헙을 겪으면서도 오직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인심을 맑게 하는데 힘쓰면서 유배중인 지사(志士)들에게 재기를 기약하였다.

삭명사판(削名士版 : 과거의 모든 벼슬을 몰수한다는 것으로 선비에게 내리는 최대의 형벌 ) 되었다(선생 64세)
광해정권에서는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아끼어 북인편으로 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모진 형벌로써 다스리고져 하였다. 광해정권이 내세우는 선생에 대한 죄목을 열거하면, 조정대신을 모욕하고, 적을 찬양한다(동계(桐溪), 사호(思湖), 조직(趙稷) 등)는 것이었다.
이때 북인정권에서는 정인홍과의 옛 관계를 회복하라는 유인도 있었지만 선생은 나는 귀인의 문전(門前)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가혹한 형벌이 예상되었지만 대관(台官)으로 조정에서 근무하는 조정립(曺挺立)의 구원으로 삭명사판에 그치고 말았다. 어떠한 형벌이 닥쳐도 요지부동인 선생은 언제나 태연하게 정주학을 공부하고, 의리사정(義利邪正)을 강론하니 모의지사(慕義之士)가 사방에서 운집했다고 하였다.

고령현감에 임명되었지만 6개월만에 사직했다. 광해정권은 인조반정으로 끝이나, 서인정권에서는 광해정권에 항거한 인사들을 등용하였는데(70세) 6월에 부임하여 11월에 사퇴했다. 허미수와 장현광 등의 격려서신이 왔지만 경상우도에 대한 차별과 조도인의 지니친 득세 등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11. 선생(先生)의 교육과정(敎育課程)
선생의 공부는 수기(修己)에 있었고, 수기의 도달점은 안자(顔子)가 됨에 있었다. 때문에 대과(大科)를 통한 벼슬길 보다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파악코져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문사(文辭)는 학문의 끝이다. 대본인즉 성리(性理)에 있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서 그만 두지 않으면 반드시 마음으로 얻은 바 있을 것이라(文辭古人以爲末技 則所課大本者 不在於性理上乎  自內至外 自始之終 孜孜乾乾  必有得於審 樂於己者矣)하였다

"논어, 맹자를 숙독하고, 성리대전 및 주자서절요를 독파하여 마치면 근사록 심경을 머리에서 끝까지 관통하여 완전한 내것으로 만든다면 자연히 얻는 바 있고, 대(大)를 기약치 않아도 대도(大道)할 것이며, 나가고 싶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나가게 되며, 공부 차제(次第)는 명료하게 눈과 마음에서 밝아져 우환이나 곤고(困苦)가 자신을 침범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리대전 중에 심성정(心性情) 이기(理氣)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중 왕장문답부권(往張問答附卷)은 가장 긴요하다 하였다. 배워서 도를 알고, 공부하여 경(敬)에 이름이 고인(古人)이 말하는 정(精)이라고 말하였다.

경자(敬字)공부는 동정(動靜)을 관통하고, 종시(終始)를 밝힘이니 처음은 장주(張朱)에서 다음은 양정(兩程)으로 나아가야 한다. 잘못하면 선(禪)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경계할 일이다.

공부에서 의심나는 곳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남이 의심나는 것으로서 남에게 정(正)을 구함은 스스로의 공부가 아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면 남이 의심하지 않는 것에 의심이 생기는 법이니 이것을 반복해서 연구하여 밤낮 되풀이하면 끝내는 얼음이 풀리듯 풀릴 것이라 하였다.

도를 구하는 공부는 사서(四書)와 정주(程朱)를 가지고 숙독하고, 반복하여 힘써 행해야 한다. 시, 서, 역학은 모두가 적당하지 않으니 참고하기 바란다(求道工夫四書及程朱之書 孰讀反得尋思一力行可也)

조일장(趙日章 :조경의 字)에게 준 서신은 성정(性情)서에 힘쓰고, 오로지 학문에 힘쓰면 천지의 광대함이나 일월의 밝음 등이 옛날에 비유가 안될 것이니 그칠 수 있는 곳에서 그치고.(可止而止) 벼슬할 수 있는 곳에서 벼슬해야 한다.(可仕而仕)

과거공부를 경계하였다. 선생은 이응백(李應白)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공은 과업(科業 - 과거공부)에 치중치 말 것이다. 오로지 심지(心地)공부에 힘쓰면 문호계제(門戶階梯)가 자연적으로 밝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한강언행록에서 한강의 교육과정을 소개하였다. 한강은 주자관계 학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대전(朱子大典)에 심력을 경주하였고, 서산심경, 심경발휘와 예서(禮書), 천문, 지리, 의학, 관혼의례 등에도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12. 선생(先生)의 건강관리법(健康管理法)고 취향(趣向)
선생은 일경지공(一敬之功)으로써 병중백약의 근본으로 삼았다(病中百藥之本乎). 경공부는 심지를 편안케 할 뿐 아니라 만병에도 근본이 됨을 강조하였고, 주자의 가르침(朱子亦言)이라 하여 단전호흡법을 말하고 있다. "조용한 방에 단정하게 앉아서(靜坐淨室) 코 끝을 직시하고(直視鼻端) 기운을 아랫배에 주면(下氣腹底 )자연히 화기가 가득하니(則自然和氣) 이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 뿐 아니라( 此不惟養疾之方) 양기양심의 법도되는 것(兼亦養氣養心之法)이니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可試爲之)"이라고 사랑하는 제자 조직에게 서신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의 건강법으로서 "모든 생각은 정(精)하게 하고, 복잡하게 생각지 말것이며, 화평하고, 쾌할하여 근심에 이끌리지도 아니함이니 이렇게 하면 끝내는 나의 강용(剛勇)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형운(盧亨運)에게 주는 건강법
여기서도 역시 단전호흡법을 권장하고 있다. 노형운이 병으로 고생하기에 선생은 "조용한 방에 단정하게 앉아서 외부적인 번잡을 쓸어 버리고, 코끝의 흰점을 익히 보면서 심간(心肝)의 기운으로 하여금 배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이것을 승룡복호(升龍伏虎)의 법이라고 하여 매일 시행하면 약 천첩을 먹는 것보다 좋으니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취향(趣向) : 선생의 문인 조직이 선생에게 올린 답서에는 유자와 동백에 대한 것이 있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유자와 동백에 관한 말씀이 있는데 "이것들은 얻을 수는 있으나 화분에 간직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기록되어 있다.(前敎海柚冬栢 則可以得之 而得益之路 甚難慮慮

선생께서 그 당시 78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물론 건강한 체질의 탓도 있지만 위에서 서술한 단전호흡법을 매일 실시하여 몸과 마음을 단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선비들은 보약으로 모든 건강은 해결된다고들 생각했는데 선생의 생각은 특이한 곳이 있기에 장수했다고 볼 수 있고, 그때 이미 유자(柚子)나 동백(冬栢) 등의 화분을 가꾸었다는 취향을 보아도 선생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여유가 있고, 대단한 선각(先覺)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 선생(先生)에 대한 평론(評論)
행장(行狀)에 나타난 선생
선생의 행장은 미수 허목(許穆)이 찬술했다. 미수는 조선 숙종때의 명신으로 시호는 문정(文正)인데 정한강의 문인이었다. 미수는 벼슬이 우의정에까지 올랐는데 조경 등과 같이 남인(南人)으로 영남일대의 남인들과 교분이 두터웠고 아버지 허교(許喬)가 거창현감으로 재직할 때 거창에 와서 이곳 선비들과는 교우가 많았는데 모계공에게는 스승으로 대하였다.
허교는 정사년에 부임하여 기미년에 갔다고 하니 광해 10년(서기 1617)에서 광해 12년, 약 3년간으로 모계, 용주, 미수 등은 광해정권의 최고조에 달한 탄압을 받으면서 학문을 쌓아 재기를 도모하던 시기였다.
허교(許喬)가 거창현감으로 재직시 세력가의 은폐로 그 시비를 가리지 못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여 곽재우가 탄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알길이 없다. 미수는 모계재에 매일같이 방문하여 학문과 시(詩) 사(詞) 등을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선생의 교화와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6세에 이미 독서하고, 9세에 상서(尙書)에 대통하였다. 남명의 장례에 참석하여 예(禮)가 무엇인가를 보았다. 덕계(德溪)와 한강(寒岡)을 스승으로 공부하고, 임란 때는 의병을 창의했는데 송암대장이 병사 후에는 그 뒷 일을 밭아 잘 처리하였기에 존경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유성룡과 김우옹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광해정권 때는 귀향하여 경상우도의 풍속이 크게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강학 등으로 인심을 맑게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하는데 전력하다가 삭명사판의 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에는 고령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도(道)가 더욱 쇠(衰)함을 보고는 귀향하였다. 선생의 천품은 고매(高邁)하고, 일찍이 구도(求道)의 뜻이 있어 군자의 문에서 수학하여 뜻을 얻었으니 그 광채가 몸에서 빛나고, 화하면서 의젓하고, 곧으면서 관용하며, 공경하면서 예절이 있으며, 은둔하되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궁하되 의를 잃지 않으며, 즐거워 하되 근심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군자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묘지명(墓地銘)에 나타난 선생
묘지명(墓地銘)은 선생의 문인 용주 조경(趙絅)이 찬술했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으로 서울 태생인데 26세에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이이첨의 간청을 물리치고, 거창(居昌)에 내려와서 장팔리에 살면서 선생의 문하에 출입했다. 거창에 살 때 자기의 조부까지 모두가 와서 몇십년 살았다고 전한다. 인조반정 후 벼슬길에 나가지만 학문하여 대과에 급제하여 이조(吏曹), 형조(刑曹) 등 판서와 판중추에까지 올랐다. 선생이 가장 아끼는 문인중의 한사람이었다.
묘지명 첫머리에는 정인홍과의 관계가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는 정인홍과의 관계가 밀접했지만(제자?) 북인들의 실질책과 남서인들의 명분론은 상합이 불가능하여 귀향하였다. 혹은 모르는 사람들은 정인홍과의 관계를 개선토록 권고 했지만 "나는 평생 귀인의 문은 모르는 사람이라 하여 거절하고, 의리사정을 논하니 의를 쫓는 사람들이 문전에 가득했다."고 하였다.

문하에는 곧은 선비 조직(趙稷)이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광해정권에 항소하여 인목대비의 유폐를 강력하게 비판하다가 심한 곤장을 맞고, 남해로 유배되니 선생의 부식강상(扶植綱常)이 더욱 밝아졌다. 선생이 동몽교관으로 재직할 때는 서울의 사대부들이 다투어 자제를 교육케 하였고, 선생은 먼저 제자직(弟子職)을 설치하고, 예로써 움직이니 제자들이 이에 따라하니 그들의 예하는 모양만 보아도 저 소년이 누구의 제자인가를 알았다고 전한다.
저는(조경) 저의 아버님에게 이끌리어 선생의 문하에 들어왔다. 선생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은 백수여일(白首如一)하고, 이기학(理氣學)은 이미 광명(光明)의 경지에 들었다. 선생의 좌우명과 자성록(自省錄) 등은 탁세를 맑게하고, 강상을 부식케 하였다.(좌무여과 자성록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저는(조경) 처음에는 아버님 손에 이끌리어 입문하였지만 사사(師事)하여 지금은 백발이 되었다. 지금까지 선생의 게으른 빛과 근심하는 안색을 보지 못하였고, 후진을 언제나 장려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참다운 독실(篤實), 인후(仁厚)한 군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만사(輓詞) 및 제문(祭文)에 나타난 선생
문인 정시수(鄭時修)는 만사에서 이르기를 "우리 고을의 문운(文運)이 오랫동안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선생으로 인해서 비로소 문풍(文風)이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조경(趙絅)은 제문에서 이르기를 "맡은 바 반드시 주정(朱程)이고, 강(講)에는 반드시 시(詩) 서(書)이다. 이단은 반드시 거절되었고, 오리(奧理)는 꼭 해부되었으며, 노장(老莊)이 손 가까이 미칠까 두려워 하였고, 공리(功利)가 내 입을 더럽힐까 근심하였으니 참으로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장 아끼는 제자 조직(趙稷)은 제문에서 이르기를 "선생은 강물과 태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추월(秋月)의 정기로서 중화(中和) 되었다. 일찍이 사문에 올라 정학(正學)에 종사하니 천리가 독실하고, 체용이 구비하였다"고 찬술했다. 어릴 때부터 어언 40년동안 때로는 유배되어 천리를 격하여 있어도 바다와 산천을 사이에 두고, 선생을 그리워하고, 가르침을 주고 받음이 저 차가운 달(月)은 알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만사(輓詞)가 문집(文集)에 전하는 사람으로는 조임도, 조정립, 임진부, 정오, 변창후, 정시수, 조경, 유진, 조직, 서계서원 유생(儒生), 윤사임, 박황, 이응백, 이준향, 서숙, 이찬, 정필달 등이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상의 선생
선생의 자(字), 호, 관향, 생년, 스승, 창의, 효행, 모계(茅谿)에 서재를 짓고, 호를 계(溪)를 계(谿)로 고침, 김우옹, 유성룡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감.
광해정권때 귀향, 삭명사판(削名士版) 당하였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강론, 반정후 고령현감으로 임명, 몇 달후 사직, 78세로 사망, 임종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부인을 멀리하였다.

이정휘사우록(李晴暉師友錄), 예조원사록(禮曺院詞錄), 용원서원상량문(龍源書院上樑文), 봉안문(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강당중수상량문(講堂重修上樑文), 한강선생답서(寒岡先生答書), 장려헌답서(張顯光答書), 정우복답서(鄭遇伏答書), 유심춘(柳尋春)의 문집 서문 등이 있으나 모두가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자료출처 :거창군청

 

21세 풍암파파조

위세(緯世) 號풍암(楓庵)   字: 숙장(淑章)

1543(중종29) 출생 부친은 생원 량(亮)으로 선전관에 오르셨다.
           모친은 해남윤씨로 어초은 처서 효정의 따님이시다
1567년(명종22) 진사가 되었는데 미암 유희춘(
), 퇴계 이황()의 문하이다.
          일찍 퇴계선생이 공의 자질을 간파하시고 팔진도(제갈공명 병법)를 연구하게 하였다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우리면서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용, 율곡 이이, 한강 정술 간제 이덕홍 고봉 기대승 선생들과 托道義契하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금산성이 함락되자 통곡하면서 아들넷과 조카두명 사위에게
           각 고을에 격문을보내고 박광전(
)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임계영을 대장, 장윤을 부장으로 삼고 공은 군량조달과 작전계획을 책임하여
           전북 장수까지 진격하면서 금산 무주의 왜적을 토벌하고 영남성주 개령의 외적을
           격파하는 등의 공을 세움
1595년 용담(남원)현령에 임명되어 재임중에 정유재란을 맞았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용담현에 침입하니 아들 조카 사위들과 읍민을 동원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많은 왜군을 섬멸
1600년 파주목사에  임명되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고 별세하시니 병조참판에 추증되다

풍암공을 도와 의병활동을 한 아들과 조카와 사위

관계

성명

활                   동

장남

원개
元凱

1592년(선조 25)동생 영개 형개 홍개 종개 희개, 위자천 장남 종질익명,익졸등과 함께
정예의병100여명을 모집하여 금산 무주 성주 개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시 용담현에 침입한 왜적을 토벌하였으며
이순신장군을 따라 진도 벽파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주부(簿)에 기용되었고, 후에 참의()로 추증되었다.

차남

영개
英凱

자 순해() ·순서(). 호 휴헌()
1592년(선조 25)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키고
각 고을에서 군량을 수집하고
         조달하였으며 금산 무주 개령등지에서 승첩하였고
용담(: 전북 진안)에서 방어진을 구축하여 세 번이나 크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선전관(
)이 되고, 군자감()에 승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시는 백진남 정영염 임계영 등과 피난선 10여척을 동원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랑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직장()에 오르고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삼남

형개
亨凱

아버지의 막하에서 작전계획을 수집하였고
두령과 더불어 이순신장군을 도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음

사남

홍개
弘凱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키고 순신장군 막하에서 명랑해전에 참여해 큰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1624년 인조반정 때에는 군사와 군량을 징발하여 이괄의난 평정에도 공을 세웠다.
뒤에 직장(
)을 거쳐 참의()에 이르렀다.

장질

희개
希凱

풍암공과 곳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고창현감에 보임되었는데
정유년에 왜적에게 성을 포위되었을때 아들 익명,익졸과 함께 격퇴하여 고을을 지킴

사위

백민수

장인의 창의에 호응하여 임계영 정충제 정사제 문영개 등과 장수 성주 개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권율장군을 도와 이현전투에서도 공을 세웠으며
정유년에도 장인과 함께 용담현을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음     출처

이후 6부자가 모두 선무원종훈에 녹훈되시었고 호남의 忠義 집안을 말할 때에는
제봉 고경명 선생의 삼부자와 풍암 문위세 선생의 6부자가 제일 공이 크다고 말한다

풍암유고 [ 稿 ] 필사본. 2권 1책. 1819년(순조 19)
후손들이 간행하여 이헌경(
)의 서문과 6대손 취()의 발문()이 있다

 

위인유기() 일신환유일건곤() 활처관리(理) 예위수신지간() 학귀변화기질() 지락무여독서()> 등은 성리학의 본체론과 도덕 주체성의 함양, 그리고 독서 등의 주제와 관련된 가르침을 경서에서 직접 뽑아 자기의 입장에서 풀이한 글이다

행장

 

통문

좌의병통문()임진왜란 당시 군량미의 공급을 담당했던 필자가 전라좌도의 여러 고을에 부족한 군량미의 공급을 요청한 통문

팔진도

의병들을 훈련시킨 천복() ·지재() ·풍양() ·운수() ·용비() ·호익() ·조삭() ·사반() 등 여덟 가지의 진법도이다.
이 외에도 <진중일기(
)> 등이 있었으나, 종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행장

 

묘지명

 

강성사도기

 


 

 

부록

 

 

부산시 동래구 충렬사에 모신 선조님

덕겸
(德謙)
21세

동래파 거벌문중(대조집)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임진왜란때 왜군이 부산진 함락후 동래성을 향하자 오성(공자, 안자, 증자, 노사자 맹자)의  位板(위판)을 동래성의 청원루에 옮겨 모시고 송상현부사와 함께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임진년 4월에 순절(殉節)하였다      호조좌랑을 증직  안락서원(安樂書院). 향교  벼슬 : 교관 유생(儒生)으로써 문묘를 지켰다.
≪신증문헌비고 輿地考 사원 東萊縣≫

세휘
(世輝)
20세

동래파거벌문중  자: 世平(세평) 호: 百修(백수) 해운대구 반송동 운송제실에서 4월14(음) 유림들이 향사 모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간  의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올림  특수훈련원 정차위 당예원판결사 통정대부병조참판의 증직과 선무원종 공신록권 三等條및 寡忠結義錄(모충결의록)에 오름

택용
(澤龍)
 20세

동래파북면문중 자:  雲甫(운보)      동래구 사직동 달북에 묘소와 제실있슴
유학과 말타기, 활쏘기를 잘하고 임진왜란때 8촌형  세휘, 7촌조카 도명과 함께 동래성에서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도명과 의병을 일으켜 동래와 양산등에서  유격전술로 많은 공을 세우고 전란후 독서와 후진을 양성함
종2품 僉知中樞府事(첨지중추부사) 증직과 선무원종공신록권 三等條에 오름

도명
(道明)
21세

동래파초읍(草邑)문중    진구 초읍동에 묘소와 제실
정한강(鄭寒崗)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때 세휘, 택용과 함께 동래성에서 혈전을 벌렸으나 성이 함락되자 택용과 의병을 일으켜 동래 양산등에서 적의 수송로  습격등으로 활약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유격전으 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전쟁후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씀  宣武原從功臣錄券 二等 條에 主簿 로 오름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1605년(선조 38) 공신도감자로 발간한 활자본으로 규격 35.5 cm X 22.5cm. 

1604년에 扈聖功臣 淸難功臣 등과 함께 결정한  임진왜란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주청(兵糧奏請)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관헌 등에게 내린 공신號로 선무원종 공신에 기록된 사람들에게 내린 녹권(錄券:책)으로 
1등은 효충장의의협력(孝忠杖義毅協力)선무공신 으로 이순신, 권률 원균이며 
2등은 효충장의협력(孝忠杖義協) 선무공신으로 申點 등 5인이며,
3등은 효충장의(孝忠杖義)선무공신으로 정기원 등 10인을 임명하였다.

공을 세우고 선무공신 들지 못한 사람들을 이듬해에 선무원종(原從)공신에 녹훈하고
扈聖原從功臣 淸難原從功臣도 함께 책록하였는데, 원종공신은 왕족~노비까지였기에,
직역(職役)에 면천(免賤) 면역(免役) 면향(免鄕)이란 내용도 있다
諱도명선조는 2등조에 諱택용 諱세휘는3등조에 기록되었으나 諱덕겸은 무공이 없어 기록되지 않았다.

 

  22세 경숙공파

 홍헌(獻)  호 : 경암()  자 여징()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사로서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분전하였다.
금산(錦山)에서 패하자 다시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막하에 들어가 진주성에 집결한 의병과 합세, 격전을 벌였다.
1593년 끝내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와 함께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능주(綾州) 삼충각(三忠閣)에 최경회 ·조현(曺顯)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22영해부사공파 

기방(紀房) 자(字) ; 중률(仲律) 호(號) 聾齊    

어릴 때부터 남달리 무예에 뛰어나 자칭 장군이라 하시고
1591년(선조24)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이 되심
1592임진란에 창의하셨으며
1597년 정유재란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남 남원에서 전라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몇 겹으로 포위되자, 옷소매에 혈서를 남기고 격전 끝에 이복남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남 남원의 충렬사에 제향
95년도 을해보 2권 332쪽 및 장흥문중 세록 중 "의열사" 참고 宣祖實錄, 耳溪集. 〈趙成都〉출전

 

22세목사공파

  관도(貫道)

1584 문과급제 하양현감 경주판관  임진왜란때 아들 희성 희현 희철을 데리고 의병 일으킴
경상도 순찰사의 중군으로 재직중 순직 호조참찬 추증

 

  세영(世榮) 호: 청람(靑嵐)

배재고보 졸업후 모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음
어윤재와 함께 연구하여 1939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을 간행함
1940년 수정증보조선어사전을 출판 
1954 국어사전 간행회에서 주정증보국어대사전을 간행

 

 

병현(炳鉉) 자는 사일(士日)

국운이 쇠퇴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 원통사를 거점으로
      군사를 양성하여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우고 후에 체포되어 경성미결소에서 옥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