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가문의 인물(고대 시조~15세, 역사인물)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많은 분야에서 많은 일가님들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능력부족으로 자료를 구하지 모든분들의 자랑스러운 행적을 모두 소개하지 못함을 양해드리면서 자랑스러운 일가님들의 활동을 아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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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동래학춤 `90살 대가` 마지막 춤사위 뽐낸다
사진을 찍기로 했다. 입고 온 정장을 벗자 90세 어르신의 상체는 뼈만 앙상했다. “무릎도 시려. 그래도 가락만 나오면 내 젊은 애들 하나도 부럽지 않지.” 옷고름을 가지런히 하고 두루마기까지 걸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포즈를 취해 달라는 말에 “그냥 뻘줌히 서 있는 건 내 체질이 아녀. 가짜로 춤 추는 것도 싫고”라고 말했다. 같이 온 공연기획자 진옥섭씨가 급히 굿거리 장단을 흥얼거렸다. “덩더꿍 덩더더러러, 덩더꿍 쿵덕∼.” 지팡이를 어깨에 얹고, 사뿐사뿐 걷는 모양새라. 요란하진 않지만, 노익장의 발매무새엔 가슴을 쿵 내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통 춤꾼 문장원옹(90·동래야유보존회장). 현존하는 최고 한량 춤꾼인 그가 생애 마지막 춤판을 벌인다. 바로 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여는 ‘노름마치뎐 긔 첫판’이다. 그와 한 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동료, 그리고 후배들이 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 공연’이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동래학춤’과 전매특허인 ‘한량무’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이 끝이야. 힘도 빠지고 예전만큼 흥도 잘 안 나. 제자 수백명 배출했으면 되는 거 아녀.”
문옹은 부산에서 알아주는 한량이었다. 그가 기방 출입을 처음 한 것은 열입곱살때.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 시험에 두번 연거푸 낙방한 뒤였다. 동갑내기 천석꾼 사돈을 따라 요정을 드나들며 젊음을 한껏 즐겼다. “못 된 짓이란 못 된 짓은 그때 다 했지. ‘자고 일어나면 내일 뭘 하고 놀까’가 유일한 삶의 목표였어.”

그의 집안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대신 주변에 돈 많은 아전 집안의 2세들이 즐비했다. 그는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기생들이 그를 보기 위해 앞다투어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던 동래기생 200여명의 이름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작업의 달인’의 원조였던 셈이다.

단 그의 유별난 점은 ‘얼굴 좋은 동기(童妓)’는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나이 든 예기(預妓)에 푹 빠졌다는 것. 그녀들의 한서린 ‘육자배기’에 청년 문장원은 묘한 감정의 골을 느꼈다. 그 가락에 춤을 따라 밟아갔고, 이듬해부턴 본격적으로 거리 춤판을 기웃거렸다. ‘기생 오라버니’ 같은 외모에 기방의 실내춤과 거리의 마당춤을 두루 소화해 내자, 그의 춤솜씨는 곧 소문이 퍼졌다.

스무살이 넘자 그는 떠돌이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외판원 생활을 했고, 징용(그의 70여년 춤인생 중 유일하게 춤과 인연을 끊은 기간이었다고 한다)에 끌려가 1년간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세무서 직원으로 채용됐고,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엔 가마니·멍석 등을 만드는 회사의 임원으로 부산과 서울을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공무원이든 회사 간부든 노는 기질로 유명한 그에게 맡긴 일은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일종의 ‘술상무’역이었다.
“어릴 때 인연 맺은 기생들이 전국에 죄다 퍼져 있었거든. 어딜 가다 술 한상 제대로 받아보기 쉬었지.”

60년대 들어 부산에선 가면극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다. 부산 유지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동래야유(東萊野遊·탈을 쓰고 추는, 부산 고유의 춤)를 복원시키고 싶어했다. 문옹이 적임자였다. 65년 ‘동래민속연구회’가 탄생했고, 문옹이 수장을 맡아 그해 10월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로 인해 67년 동래야유는 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됐다.

이후 문옹은 동래민속관을 만들었고,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 등을 복원시켰다. 무엇보다 그는 즉흥춤의 대가였다. 시나위 가락에 맞춰 엇박으로 뒤뚱거리는 춤새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다. 한 무용평론가는 문옹을 가리켜 “구순의 텅 비운 몸으로 나가 여백의 공간을 채우는 한 폭의 세한도”라고 극찬한 바 있다. “외우고 연습해서 되는 게 아니지. 평생을 춤에 절어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노는 게 곧 춤이요, 춤이 곧 삶이었던 문옹. 이번 무대는 살아있는 거장의 마지막 한풀이요, 씻김굿일지 모른다.
중앙일보 2007년 8월7일 02-3216-1185.

<사람들> 90세 춤꾼 문장원 옹  -다음달 7일 국립국악원서 고별 무대 -
"갖춰서 춤추는 것은 이번 무대가 마감이야. 이제 도리가 없어."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아흔 살 노인답지 않게 쟁쟁했다. 다음달 7일 국립국악원예악당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춤의 문장원'을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나는 전통춤꾼 문장원(90)옹. 그는 "담담하지. 나이 아흔 넘어서 마지막으로 추는데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조금 한스럽고 미안해요. 성의를 다해 즐기고 출 겁니다"라며 고별 공연을 앞둔 심정을 털어놨다.
공연을 기획한 진옥섭 축제의땅 대표에 따르면 그는 국내 민속춤 분야에서 최고령 무용가다. 진 대표는 "2005년 '전무후무' 공연 때는 후배들 앞에서 날아다녔다"라고 회고했지만 문옹은 "90이 넘으니 손발 드는게 자연스럽게 되지 못한다"면서 "될 수 있으면 (공연을) 사양하는데 인연이 있는 진군(진옥섭)이 한다고 하고 멤버들이 그전에 같이 춤추던 사람이라 승낙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순사 앞에서는 무릎 꿇지 않아도 동래 기생한테는 무릎 꿇는다"는 콧대 높은 동래 예기(藝妓)의 역사를 춤사위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한량'이다.
고등보통학교 진학에 낙방한 17살 무렵 동갑내기 사돈과 기방 출입을 시작한 그는 예기들의 육자배기와 한이 담긴 춤사위에 빠져들면서 '춤 인생'을 시작했다. 레코드사 직원, 세무과 직원 등을 거친 그는 1960년대에 부산 동래로 돌아와 탈춤 '동래야유'를 복원, 이 춤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데 기여를 했다.
이후에도 동래 옛춤 복원에 힘써 '동래학춤'과 '동래지신밟기', '동래고무'가 차례로 부산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05년에는 그의 독무 '동래한량춤'이 부산시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렇게 40여년에 걸쳐 동래의 흥을 복원해낸 그를 사람들은'마지막 동래 한량'이라고 부른다.
그는 "풍류를 좋아하다보니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고 제자들도 가르치며 즐겁게 살았다"라면서 "전통춤을 후세가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몸이 약해서 70까지도 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춤도 가르치고 즐겁게 살다보니 장수를 하는 것 같아요. 40년 간 길러온 제자들의 춤을 보면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겠다 싶어요."한평생 춰온 전통춤의 매력은 무엇일까. "전통춤은 슬프면 슬픈대로 흥겨우면 흥겨운 대로 같이 출 수 있는 생활에 밀접한 춤이에요. 또 한을 품고 있어서 깊이가있지요." 진옥섭 축제의 땅 대표는 그의 춤을 두고 "조선시대 화공의 그림과 문인화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기교 중심의 현란한 춤이 아닌, 문인화와 조선 백자를 닮은 담담한 춤이라는 것. 마지막 공연에 올리는 춤은 그의 춤재간이 모두 스며 있는 '동래 한량춤'이다. 걸으면서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이 흥을 돋운다. 공연 준비가 잘 돼가느냐고 물으니 그는 "할 게 있습니까. 몸에 배어 있는 것을 풀어내는 것이죠"라고 말한다.
그의 춤 인생을 축하할 후배 춤꾼들도 함께 무대에 선다. 채상묵이 이매방류 '승무'로 첫 판을 열고 양성옥이 강선영류 '태평무'를 이어간다. 장금도의 '민살풀이춤'과 이윤석의 '덧배기춤', 하용부의 '밀양북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도 무대를 수놓는다. '동래학춤'에서는 마지막 동래예기 유금선씨가 구음으로 반주를 한다.
오후 7시30분. 1만-3만원. ☎02-3216-1185.
(서울=연합뉴스)

 

 

30세 동래파종중

백당(栢堂) 문정창(定昌

1. 가계
    경절공 29세로 남평문씨 동래파종중 반여문중인 문승연(升演)님과 동래정씨 구서 여사의 장남으로     
1899. 12. 12 출생하여 1980년 2월18 별세하였다
    동래 동명중학교 졸업하고 경주박씨 德順(덕순)여사와 결혼하여
    榮德, 祥得, 秀得, 武雄, 京子의 4남 1녀를 학자로 기르셨다

차남 상득님은 195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 졸업    서울대 교수와 아주대학교 인문학장과
한국세익스피어학회와 한국 영어영문학회및 한국비교문학회 회장과 한국 번역금고 이사장 역임함
2006년 7월 부친의 저서를 부산종친회에 기증하였다

2. 약력
    동래군 서기에서 경남도청, 조선총독부 근무, 1940년 충청북도 사회과 주사 1942년 황해도 은율군수
    1944년 황해도 사회과장을 역임하고 1945년 월남
 1946년 조선농회 총무부장을 한 후
    1947년 부터 개인사업과 저술활동을 하였다.

3. 사회활동
    1976년 이유립, 안호상, 유봉영 등과 국사찾기 협의회를 결성하고 국사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단제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일제가 식민지 통치의 목적으로 왜곡한 한민족 상고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평생을 바치면서 저술활동을 하신 민족 사학자입니다.

정찬님 소개             -김창욱 사범-

사실 재야사학자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이거나 그 후손인데
이분은 친일파로 일제 때 군수를 역임한 분이다.
조선총독부가 간행하는 조선조사자료총서중 § 朝鮮の市場 (1941)과 §조선농촌단체사(1942) 등을 저술하여 조선총독부에 충성을 하였고 
광복 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후 월남하여 남한에서 한때 조선농회 총무부장에 있기도 하였으나 1947년 개인사업으로 전업하면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조선 독립후에 자신의 친일행적을 크게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조선의 얼과 조선인에게 빚진 것을 갚고자 일생을 바치셨다고 한다.

특히 일제패망기 조선총독부의 폐기문서들을 빼돌려 보존했던 것을 가지고 일제침략사연구에 몰두하여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1964) §군국일본 조선강점 삼십육년사 상(1965)·중(1966)·하(1967)에서 일본침탈의 구체적 내용을 자료로 남기셨고 나아가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관심을 가져 상고사연구에 정진하여 §단군조선사기연구(1968), §고조선사연구(1969) §일본상고사(1970), §한국고대사 상·하(1971), §한국사의 연장:고대일본사(1973), §백제사(1976), §이병도저 한국고대사연구평(1976),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1977), §가야사(1978), §한국-슈메르 이스라엘의 역사(1979) 등을 저술하였다.

한국사연구의 과정에서 문정창 선생은 신라김씨의 계보가 바로 진나라와 흉노의 김일제라는 것을 밝혔으나 당시 이병도가 주도하는 강단에서는 철저히 무시하였는데 문무왕비문으로 그의 논문이 증명되었으며
그가 밝힌 혁혁한 업적중의 하나가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망하게 하여 전한시대를 끝내게 한 왕망이 바로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망이라고 정정한 사실이다. 왕망은 바로 중국의 통일왕조 전한의 뒤를 이은 신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가주몽『駕朱蒙』은 고구려에 대한 왕망의 정복기사이다. 즉 문무왕 비문의 가주몽은 신라의 선조들이 고구려를 통제할 당시를 지칭한 것으로 김씨들이 왕망을 통해 세운 신제국 하에서 고구려의 병력을 압박하고 굴욕하게 만든 것으로 가주몽은 바로 신나라의 개국황제인 왕망 즉 김망을 지칭한 것이다

저서 일부의 간단한 소개

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상,중,하권(1965년~1967년)       
     식민통치에 대하여서는 깨끗하고 허물없는 이가 맏아야 함을 전제하면서 저자는  그런 인물이 아님을
     자인하지만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밝히고  
     총독부는 자기들이 발행하는 역사서에 대치되는 문서들을 폐기하기 위하여
      51종의 도서를 지정하고 서점과 향교, 서원 종가 양반가 세도가 등을 수색하여 2만권의  책을 압수
      폐기하였고...
나. 한국-슈메르 이스라엘의 역사(1979)
       슈메르인(이스라엘 민족으로 예수를 탄생시킨 민족)의 뿌리는 동이족에서 갈려나가  
       서방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생긴 혼혈 민족으로 우리와 민족과 같은 뿌리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이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가졌으며 교육열이 높으며
       구약성서에 예수의 족보가 나올 정도로 조상을 섬기는 공통점이 현재에도 나타나고 있다.

다. 이병도저 한국 고대사 연구평
       우봉이씨 완용의 후손으로 정책적으로 일본 국비유학생으로 선발하여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민사관을 주도하고 조선사 편찬위원회와 진단학회 운영과  문교부장관 서울대학장의 요직을
       거치면서 학계에 식민사관을 보급한 이병도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라.
고조선사 연구
     고조선에 단군조선 고삼조선 위만조선이 있었으며
     단군조선은 만주송화강 유역에서
1000여년간 사직을 유지하였고
     고삼조선은 단군조선이 망한후 만주~북지지방에서 1000여년간 역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위만조선은 연나라 위만이 고삼조선중 예맥조선과 진조선의 일부를 사탈과 흡수해 86년간 존속함


마. 일본 상고사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었는데
     좌호가라는 신라, 인위가라는 고려, 계지가라는 백제이다

 

 

익환(益煥)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 민통련 의장, 전민련 고문 등 1970∼80년대 재야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정부당국의 허가없이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남으로서 사회전체를 통일논쟁으로 몰아넣었는데 당시는 "감상적 통일지상주의자"란 비난과 "통일운동의 화신"이란 극찬으로 상반된 평가가 있었다

익환님 약력

1918년

출생

1955년

한빛교회 목사

1968년

신구교성서공동번역구약책임자

1975년

8월 유신정권에 맞서던 장준하의 죽음 이후 열렬한 재야투사로 변신

1976년

삼일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20년형을 선고 받음

1977년

형집행정지로 출소

1978

민주주의국민연합중앙상임위원회위원장

1978

전태일기념사업회위원장

1978

국민연합선언서 사건(유신헌법 비민주성 성명발표)로 투옥

1979

석방

1983

기장총회교사위원회위원장

1980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되었으나 석방됨

1984

민족통일국민회의의장

1985

민족통일연맹의장

1989

양심수후원회회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1990 출소함

1990

방북으로 구속되어 1993년 출소해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1994년

별세하심
 

인간문화재 문백윤(삼천포 농악 12차의 선구자)

문미봉의 장남으로 1910년  태어았다
1959년 11월 사계의 권위자들은 인간문화재 칭호를 안겨주었고 미국 등 세계 공연을 했다.

농악 12차는 영남농악 가운데 진주·삼천포 지방에서 전승되는 판굿을
1966년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로 지정한 삼천포 농악 12차 36가락이다

다섯의 어린 나이로 매굿을 따라 다녔으며 상쇠놀이에 넋을 잃었는데 유독 상쇠를 잡은 사람에게 눈을 쏟았다.
8세때에는 이미 동리 매굿패에 끼어 소고와 꽹과리를 쳤다. 비교적 부농이었던 선대는 장차 백윤이 매굿패에 끼어 열중하는 것을 보고 엄하게 나무랐으나 소년의 가슴에 타고 있는 정열을 식힐 수는 없었다.

이 때 우연히 진주 정촌에서 남양으로 이사 온 김한노를 알게 된다. 이 분은 농악예술의 전승자였다.
김한노의 사부 박경호가 조선조 말의 대표적인 악사였다. 이 분이 그의 농악대를 거느리고 유랑할 때 거제 7면을 다녀도 산달섬이 제일이라는 민요를 남겼는데 이 민요는 한국의 구성진 유머가 있었으며
박경호 이상의 계보는 가릴 수 없고 농악 12차 36가락은 박경호.김한노에서 문백윤으로 전승되었다.

김한노는 문백윤의 재능을 간파하고 전승 후계자로 지목하고 자기가 지닌 기예를 물려준다. 수재자로 사사하기 6년인 16세 때에는 이미 그의 기예는 대성했고 김한노는 한 사람의 후계자를 얻으려고 남양땅에 발을 멈춘것이다.

일본관헌들이 나라잃은 민족일 망정 고유의 민속을 지키며 뭉치면서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한 민족의 생명을 이 농악놀이와 그 가락에서 본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농촌의 방방곡곡에서 신나게 울려 퍼지던 농악소리와 한국 농민의 애환이 담긴 농악놀이가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기에 일본인들은 집회허가 위반으로 매굿놀이를 단속하기 시작하여 농악이 사라져 가게 되었으니 상쇠를 잡아볼 기회마저 잃은 문백윤은 우울한 심정을 달랠길 없어 홀연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니 19세 청년이었다. 실향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교포촌에 나타난 문백윤은 신들린 사람처럼 상쇠를 쳤다. 교포들의 환희가 절정에 달해 굿판이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 문백윤 그는 일본으로 잘 왔다고 생각했고 농악을 배운 것을 보람으로 느끼게 된다. 이리하여 일본 전역에 걸쳐 교포촌을 다니며 상쇠를 쳤으나,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면서 못하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니 32세의 장년이었다.
동향의 토건업자 김육상 공사장에서 토건업에 종사하면서 탈바꿈의 계기를 찾아보려고 몸부림 쳐본다. 그러나 토건업자로 입신출세 하겠다는 꿈도 깨어지고 8년간의 만주방랑을 마치고 귀향하니 광복 1년 전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남양땅에 사라졌던 남양 농악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지면서 전국에 명성을 떨쳤던 남양농악대가 이때에 나래를 펴며 발족한 것이다. 나라도 찾고 농악도 찾으니 환희의 농악가락은 한결 신났고 그의 상쇠놀이도 절묘해갔다.

1959년 11월 사계의 권위자들은 문백윤에게 영광의 인간문화재 칭호를 안겨주었다.
1961년에는 미국공연을 가졌고 기타 해외공연을 거듭하여 널리 세계에 농악을 소개했다. 제자로 이금주, 이성진, 박염 등이 있다. 제자 13명중 6명은 이미 16개국을 돌면서 공연하여 세계인의 갈채를 받고 있으며 제자 중 박염이 1991년 5월 1일에 인간문화재의 칭호를 받고 현재 농악 12차 36가락 보급에 전념하고 있다.

1992년 문화부에서 발행한 한국의 민속예술(전국 민속예술강연대회 33년사)지에 1964년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마치고 삼천포 농악을 평가한 내용을 소개하면
농악은 원형무를 기본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고대의 전쟁형태의 기본 전법에서 유래했다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또 12차라는 말은 전용하여 굿의 순서를 12종으로 가르고 이것을 농악 12차라 하였다.

특색
(1)무용적 특색 치배들 전원이 전립을 쓰고 상모놀이를 하며 상모놀이에는 외상모, 양상모, 사사, 우물놀이 등이 있다. 법고놀이에 돌아앉기, 한발로 법고차기, 연풍대와 자반뛰기가 있으며 설장고놀이에 있어서 연기가 다양한 가락치기와 연풍대가 있다. 또한 달거리굿과 같은 노래굿이 있다.
(2)음악적 특색 악기에 있어서 소고와 법고를 구분되지 않고 징과 북을 3~4개 쓰는 경북농악과 호남농악의 중간 형태이다. 쇠가락은 거의 3/3박자이며 혼합박자는 잘 쓰이지 않는다. 또한 품앗이 가락과 굿거리를 별로 쓰지않고 덧백와 다드래기, 호호딱닥을 쓴다. 빠른 가락이 많아 힘은 있으나 맺고 푸는 기교가 약하여 구성진 흥이 덜하다. 반면 가락이 다채로와 흥겨운 느낌을 준다

1차

느린 덧뵈기가락으로 구경꾼에게 인사굿을 한 다음 오방진 가락을 반삼채로 치면서 동서남북 중앙에 나선형으로 고도진을 친다. 다드래기 가락에 농악대원 오른편으로 둥글게 돌고 법고잡이들은 연풍대를 한다

2차

농악대원들이 둥근 원을 만들어 오른편으로 돌면서 춤추고 그 가운데서 상쇠가 덧뵈기가락으로 옷놀음을 하고 춤을 춘다. 끝에는 다드래기가락을 치며 빠른 속도로 소고잡이들은 자반뒤집기를 한 다음 농악대는 두패사이로 빠져 나온다. 이어서 덧뵈기가락으로 둥글게 늘어선 대열 안으로 법고놀이를 한다.

3차

홑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어르고 논 다음 삼차길군악을 치며 둥글게 돈다. 이어서 삼차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오른편으로 돈 다음 삼차다드래기가락을 벙어리가락으로 치면서 왼편으로 돈다.

4차

삼차길군악을 빠르게 치면서 둥글게 돈 다음 영산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상쇠와 고스들이 외상파놀음, 양상파놀음, 사사웃놀음, 전치기웃놀음, 쌍전웃놀음, 등 웃놀음을 하고 영산다드래기로 몰아가며 계속된다

5차

자진얼림굿도드리에 이어 굿거리를 한 다음 양반, 포수, 기타 잡색들이 가운데 들어와 굿거리장단에 흥겹게 춤추고 익살스런 구경꾼들을 웃긴다.

6차

상쇠가 가운데 들어가 덧뵈기가락을 치고 농악대 전원은 오른편으로 원진한다. 이어서 소고잡이들의 안을 들어가 둥글게 돌며 다드래기가락에 연풍대놀이를 한 다음 모두 둥글게 늘어서서 자진다드래기가락을 친다. 징은 치지않고 모든 법고장이와 상쇠가 하는대로 갖가지 상모놀음을 한다

7차

삼채가락을 치며 법고잡이가 안에서 둥글게 서서 법고놀이를 한 다음 자진다드래기가락에 법고놀이가 이어 진다. 이어서 상쇠와 목쇠가 서로 품앗이값을 주고 받으면 농악대원은 전원 좌우로 진퇴한다

8차

상쇠는 제3차 가락을 치며 둥글게 돈다. 제삼차가락 둘째박에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나서 회전한다. 이어 상쇠가 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양상피놀음을 하면 법고잡이들도 양상피놀음을 한다. 다시 법고잡이가 두줄로 마주보고 다드래기가락에 맞추어 상모놀이를 하다가 덧뵈기가락에 전후좌우 발 마추어 진퇴한 다음 다드래기가락에 일제히 생피지를 돌리며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한다.

9차

법고잡이들이 둥글게 둘러선 다음 상쇠가 치는 얼리굿가락에 법고 잡이들의 가운데로 둥글게 앉았다가 덧뵈기가락에 천천히 일어나면서 상모놀이를 한다. 상쇠가 산치기놀음을 하면 법고잡이들도 생피집 물체를 세워서 산치기놀음을 하고 끝에는 다드래기로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하며 오른편으로 돈다. 이어 다드래기가락에 전후좌우 일제히 진퇴한다

10차

농악대원들이 굿가락을 치면서 '아하- 아하야'라고 사거리를 부른 다음 굿거리 가락에 중거리노래를 함께 제창한다. 이어 농악대원들은 둥글게 늘어서서 '아하 아하 밝은 달아'하고 달거리노래를 부른다.

11차

다드래기가락을 치다가 상쇠의 신호로 '별따자 별따자 하늘 얼러 별따자'하고 구호를 외치고 나서 다드래기가락을 친 다음 호호굿거리가락을 치며 '호호'하고 구호를 부른다. 이어 굿거리가락에 법고놀이가 계속된다

12차

다드래기가락을 치고 '허치자 허치자 구경가락 허치자'라는 구호를 부르고 다드래기가락을 친다.'어서치고 술먹자. 부포끌러 술먹자'하고 부르기도 한다

                                                      자료출저 미상(인터넷에서 퍼온 글)

 

 

문대원 화학박사

닮고 싶은 2004과학기술인 선정
선정 분야 : 학술연구 전공 분야 : 화학 소속 및 직위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952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1975년    서울대학교 화학 학사
197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 석사
1984년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 화학 박사1977년 ∼ 1980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1984년 ∼ 198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박사후과정 연구원
1985년 ∼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985년 ∼ 1986년    미국 NIST 방문연구원
1999년 ∼ 1999년    호주국립대 전자재료과 방문연구원
2001년 ∼ 2002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 재료학과 초청교수

 

수상이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국내 표면분석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가 제작한 중에너지이온산란분광기(Medium Energy Ion Scattering)를 통해 초박막 속의 원자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원자들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국제학회에서 에너지 이온산란 분석법에 대해 총 9회 정도의 강연을 했다.

최근 문 박사는 국제학술지「Critical Reviews in Solid State and Materials Sciences」(고체물리 및 재료과학 리뷰)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고체물리, 박막 관련 분야에 관해 리뷰할 주제를 선정하고, 이 주제에 관해 집필할 연구자를 추천하는 일에 참여할 예정이다.

현재 극미세구조기술사업단의 총괄책임을 맡아 미래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이 사업단에서 그는 다양한 연구분야에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소재의 외부표면을 구성하는 원자층 원소의 조성과 분포, 그것들의 화학상태와 전자구조, 원자구조를 측정하고 제어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열정으로 풀어낸

물체표면의 비밀

3번 문제 풀이과정을 설명할 사람! 문대원, 네가 대답해 볼래?” “저, 그건….”
결코 몰라서 머뭇거린 게 아니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나노표면연구그룹의 문대원 박사(52)는 고등학교 시절 수학선생님이 질문하면 떨려서 아는 것도 답을 못했을 정도로 겁 많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성격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점점 더 어두워졌어요. 가뜩이나 수줍음도 많이 타는데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밝아지려고 노력했죠. 지금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 정말 변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성격마저도 의지를 가지고 변화시킨 셈이다. 이런 적극적인 자세 덕분에 과학의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과감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문 박사는 20여년 동안 물리학 화학 재료공학의 집합체인 표면과학을 연구했다. 당구공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그재그로 여러 줄 놓여있다고 하자. 여기에 당구공을 치면 어디선가 맞고 튕겨나온다. 마찬가지로 물체의 표면을 구성하는 여러 층의 원자에 수소원자를 충돌시키면 튕겨나온다. 이때 어느 층에 부딪히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에너지가 다르다. 이를 측정하면 수소원자가 어디서 튕겨나왔는지, 원자들이 어떻게 배열돼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도 표면과학은 매우 중요해요. 미세한 회로를 만들기 위해 반도체 소자 표면에 붙이고 깎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죠. 소자가 작아질수록 성능은 표면 상태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어요.”

문 박사는 지난해 반도체에서 불순물을 측정하는 기술의 국제표준을 만든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3월 물리·화학·재료 분야의 세계적 학술지인 ‘고체물리 재료과학 리뷰’ 편집위원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미국 유학 전에도 연구원으로 일했고,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때마침 표준과학연구원에서 표면과학 분야에 수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하겠다는 제의를 받은 것. 망설임 없이 귀국해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물체 표면의 원자를 관찰하는 연구실 3배 크기의 장비가 반쯤 완성된 상태에서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해 고스란히 잿더미가 돼버린 것이다
“꼬박 보름 동안 손으로 그을음을 닦아냈죠.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어요. 다행히 보험으로 3억원가량의 손실을 보상받고, 새로운 기계를 설치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기일전한 문 박사는 식당에서 줄을 서는 시간조차 아까워 도시락을 싸오면서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자다가도 일어나 꿈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메모해 놓곤 한다고.

“여러 분야 과학자가 모여 서로에 대해 칭찬과 질타를 하며 연구할 수 있는 한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죠. 덕분에 매일매일 과학자로서의 자부심을 느껴요.” 문 박사는 2003년부터 표면과학과 나노과학의 측정기술을 생명과학 분야에 적용하는 ‘나노·바이오 융합 사업’의 사령탑을 맡았다. 이 과제에 도전하면서 그가 내건 슬로건은 ‘노(no) 벤치마킹’이다. 기존 사례들을 보지 않아야 새로운 연구영역을 선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

“과학기술계에도 젊은이들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해요. 저 정도면 연구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공한 과학자가 10명만 나와도 이공계 기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문 박사는 현재 연구원에서 원장보다 높은 최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그의 희망대로 젊은이들이 과학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물론이죠. 역시 표면과학을 연구할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문 박사는 한국 과학계의 ‘표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문대원 박사는

중학교 때 훈련도중 수류탄을 덮쳐 전우를 구한 소령의 얘기를 듣고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생각을 바꿔 물리학과 열역학 분야에 푹 빠져 지내다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손에서 물리책을 놓지 않아 물리학에서 물리학과 학생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4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현재까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떠나지 않고 있고 연구원을 마치 자신의 집처럼 여긴다.
1999년 호주국립대 전자재료과 방문연구원,
2001∼2002년 미국 일리노이대 재료학과 초청교수로도 활동했다.

▼ 청소년에게 한마디▼
청소년은 우리나라의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라. 그러면 어느새 자신이 성공한 과학자의 모델이 돼 있을 것이다.

2004년 6월 2일 임소형 기자(sohyung@donga.com)

 

 

유니버셜 발레단장 문훈속

애가 아주 자동이예요 발레단 언니,오빠들 틈에서 몰며 자라서인지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춰요 호두까기 인형 멜로디도 허밍으로 부르고,  발레리나의 조건중 음악성도 몸만큼 중요하거든요 한국무용계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다 발가락 부상으로 은퇴한 뒤 발레단 경영에 몰두하는 문훈숙 유니버셜발레단 (UBC) 단장은 2년전 입양한 딸 신월(3)이 이야기 부터했다.  신월이는 지난여름UBC의 '심청' 일본공연에서 아기 심칭 역으로 깜짝 데뷔했다. '심청'·은 2001년 9월 발레리나 문훈숙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은 창작발레.

문 단장은 "곤히 낮잠을  자다가도 '신월아,이제 심청 해야지' 하면 벌떡 일어나는 게 자세가 됐더라"며 웃었다. 발레 영재 발굴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와 CEO로서 5년째 경영에 전념하며 발레단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문 단장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다. "저도 언젠가 할머니가 될 텐데 누군가는 UBC를 끌고 가야 하잖아요. 발레에 마음 붙인 신월이가 예뻐 보일수 밖에요." 문훈숙단장은 첫째 아들도 입양했었다. 오래 전에 입양한 아들 신철(15)이는 지금 미국 유학 중이다. 신월이는 신철이와 여러모로 다르단다. 문 단장은 "아들은 발레보다 컴퓨터나  그림을 즐겼는데, 딸은 춤과 음악을 좋아하니 나중까지 하겠다고만 하면 100% 밀어줄 생각" 이라고 말했다. '지젤'로 이름난 그는 "발레리나는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보람이 휠씬 크다.

'지젤' 만큼은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싶다" 고도 했다. 8개월간 리모델링 을 거치고 10월 말 개관하는 유니버설 아트센터(구 리틀엔젤스예술회관)와 함 께 VBC의 공연도달라진다. 경영자가된 문단장은 무대에  설 땐 몰랐는데 객석이 내 자리가 된 뒤로는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에도 끌린다"며 "내 년엔 '문훈숙과 함께하는 브런치 발레' (가제 양정웅 연출의 발레 뮤지컬 '심청' 등 대중적 인 무대를 많이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루 종일 사람들 만나고 말도 많이 해야 하는 경영도 힘들지만, 극도의 긴장 속에 2시간 동안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발레가 여전히 더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요즘 살을 뱄더니 다리가 귀 옆에 착착 붙는다"는 전직 프리마 발레리나. 그래도 무대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은 0%라고 했다. "공연히 환상 깨뜨릴 일 있나요?"라며 웃는다. 은퇴한 지 5년이 지났어도 가끔 꾸는 악몽은 발레리나  시절 그대로란다. "막 올랐는데 토슈즈 못 찾아 허둥대거나 다음 순서를 까먹고 얼어붙는 꿈을 꾸다 벌떡 일어나기도 하죠.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물 주고 볕 줘 나무를 키우는 지금의  CEO 일에 만족합니다. " 글=박돈규기자

 

 

문정인(正仁)

연세대 교수 외교부 국제안보 대사

정보 얻기위해서라도 psi 참여는 필요<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구상>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외교 정책에 직·간접 으로 관여하고 있는 문정인(文正仁) 연세대 교수(외교부 국제안보 대사)는 I6일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 1718호가 본격 실행되면 동해에서 미 ·북 간 국지적인 무력충돌 등 긴장 국면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다음은 문답 요약.  

-북한이 유엔 결의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나? 
 "북한은 추가 핵실험보다는 영변 원자로에 연료봉을 재장전하고 꺼낸 연료봉으로 재처리를 시작할 것으로 본다. 북에 남은 것은 핵무기 양산체제다. 지난번에 장전한 연료봉을 꺼낼 때도 됐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무력제재를 가능케 하는 유엔헌장 7장의 42조를 포함시킨 더 강력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할 것이다. 미국이 '봉쇄'를 할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 미·북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은 화물선도 무장을 시켜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
-대화 가능성은?
"당분간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최근 워싱턴을 방문해 전문가들을 만나본 결과 미국도 봉쇄 이후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체제변환 외교'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이란, 레바논에서도 성공하지 못해, 미국도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안다. " 
 -정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은 유엔의 제재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핵실험 이후에도 포용정책의 기조에 변화가 없나?  
"상당 부분 조정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본다.  지난 7월 북한의 미사일 무더기 발사 이후 이미 쌀과 비료지원을 중단했다. 개성은 시범단지만 운영하는 수준으로 조정돼 그 이상은 어 려울 것으로 본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금강산관광인데, 시장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정이 될 것이다. "
-안보리 제재위원회가 개성공단·금강산관광의 사업 방식을 그대로 허용할 것으로 보나?
"개성공단의 경우 북한 노무자들에 대한 임금지급 방식을 투명하게 해야 할 것이다. 노무자들에게 임금을 직접 지급하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만일 북한이 이를 원치 않으면 그때는 사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북한 핵실험에 대해 미국 책임론을 제기한다.  "북한의 원죄,미국의 미숙함,한·중의 무기력, 일본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빛어진  결과 아닌가. 하지만 이제 와서 남의 탓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미국 탓을 해봐야 한·미 공조가 약화돼 결국 우리만 손해 보게 된다. 지금은 책임론이 아니라 역할 분담론을 이야기 할 때다. "
 -유엔 결의는 북한을 오가는 화물을 검색하게 하고 있다. 미국이 추진해온 PSI가 본격화되리라는 전망이지만, 여당 의원들은 반대하고 있정부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정부가 PSI의 원칙에 동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미 ·일이 해상검문을 한다면 동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PSI에 참여하지 않으면 실제 검문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길이 없다. 미국이 북한 선박을 검문하면 북한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관련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PSI 참여는 필요하다. 세계 70여 개국이 참여하는 활동에서 빠지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
-제한적인 군사적 충돌 가능성 이외에 유엔 제재에 대한 북한의 예상되는 반응은?

   "북한이 제재를 2년 넘게 견디면서 체제가 붕괴해갈 가능성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불확실성이 생긴다. 또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통해 제재를 극복하고 핵 보유국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핵을 가진 북한'과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북한을 설득해서 다시 6자회담에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
-지금 한·중 대(려) 미 ·일로 의견이 대립하는 양상인가?
"요즘 중국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이 강대국화 하면서 미국하고만 상대하려고 해, 우리가 전처럼 중국 고위층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 북핵을 이유로 군사대국화하려 할 것이다. 심각한 문제다. 아베 총리는 내년 참의원 선거 때까지 우경화할 것으로 본다. "  
 <전문가 시각> 조선일보 2006년 10월 17일<강인선기자>

 

  문경원(敬媛)   화가

가계 : 1969년 서울출생 父창복  母김은정 第경석, 재원  夫김한준
주거 : 서울 강남구 사동
학력 : 이화여대 미술대 서양화과 동 대학원졸
92년~93년 현대판화공모전(바탕골미술관)
93년          두 번째 씨스전(단성갤러리)  서울예고40주년 동문전(예술의 전당)  
                우리들살아가는 이야기전(홍겔러리)
94년          현대미술아카데미 사진전(국립현대미술관)  제20회 현대미술제(문예진흥회관)
                 세번째씨스전(단성갤러리)
                 도서판화 탐험전(윤겔러리)  가기전(나화랑)  
95년          내일의 판화전(인사,종로갤러리) 한국미술단체 초대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청년작가전1(이콘겔러리)
                뉴-폼전(윤갤러리)  서울판화미술제 선정작가전(예술의 전당)   
                VIRTUSL REALITY 김영미, 문경원, 신지영전(관훈겔러리)
96년         제22회 서울현대미술제(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이화젊은 모색전(이화미술관)
                우리시대의 오브제전 나는 돼지들(보다겔러리) 제1회 개인전(박영덕화랑)
수상         제1회 박영덕화랑 신인공모전 대상  

 

 

문경현(暻鉉)   역사학자, 경북대교수

1934년 8월26일  충북괴산출생
가족 : 妻최정희 子영준 영순 혜련
주거 : 대구시 수성구 파동1967년 경북대 문리대 사학과   
1969년 경북대 대학원 문학석사  1986 동 문학박사
1981년~1984년 경북대 박물관장  
1982년~1983년 동 교무처장  
1984년 사법고시위원  1987년 행정고시위원
1993년~1995년  경북대 인문대학장  
1993년 경북문화재위원(현)  
1996년 경북21세기 발전연구위원
저서 : 신라사연구, 고려태조, 후삼국통일연구, 경북의 얼, 팔공산 사적조사보고

 

  문광삼(光三) 부산대 법과대학장

1951년1월17일  妻김수현, 子 석준 영석
주거: 동래구 복천동 현대아파트
1970년 서울대 법과대   
1974년 동대학원 법학석사  85년 동 박사
1976년 부산시 행정사무관  1978년법제처행정사무관  1980년 내무부 치안본부 경정
1982년 부산대 법과대 전임강사, 교수 동 볍과대 학생과장, 교무과장, 법학과장, 부학장
1996년 동 법과대학장
저서 : 코멘탈  헌번(공저) 한국헌법사(공저) 헌볍재판소의 효력에 관한 연구(공저)

 

  문광수(光洙) 새한정보시스템 대표

1945년1월22일 경북성주
가족 : 妻이숙자 子동신 동재 동희
주거:서울 강동구 암사동
1972년 영남대 공과대 건축공학과
78년 제일합섬과장  83년 삼성생명보험회사 부장   
90년삼성생명보험회사 이사  
1992년삼성데이타시스템상무이사
96년 제일합섬상무이사  97년 새한정보시스템(주)대표이사

 

  문광순(光順) 한국계면공학연구소장

출생 : 1942년 4월18일경기화성
서울 강남 역삼  妻고선옥  子필현
1964년  서울대 자원공학과  1976년  加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공학박사
1985년 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이학박사
1964년 ROTC  66년 대한철강 성광주임  1989년 평통위원 UNDP자문위원  
1990년 加오타와교육청 자문위원   在加한인회장
1992년 재가 한국계면공학연구소장
1993년 한국과학기술정책자문위원(현)
1994년 한국과학기술 한림원정회원(현) 특허 : 미국1 카나다2 한국1    
외무부장관 표창

 

 

문광희(光) 동의대 생활과학대학장

1950년8월13일 부산
주거 동래구 거제동 경남아파트
부산대 가정학과 부산대대학원 의류학과 석사, 박사
동의대 생활과학대 의류학과 조교수 동의대 생활과학대학장

 

 

구암(九庵) 대한불교 법화종 종정

1922년 경남양산
주거 부산북구 모라동 관음사
통도사에서 이월요스님 및 김용운 스님께 범패사사,
1932년 양산 일과암에서 득도(은사이인봉)  통도사전문강원  
1966년법화종 입종  1987년 부산어산회운영  1992년 제4대 대한불교법화종 종정
대한민국미술대전대상(서예)

 

국진(國鎭) 고려대 명예교수

출생 : 1925년3월9일 평남평양
가족 : 妻이복순 子태영, 혜희, 혜숙
주거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장아파트
1955년 서울대 의과대 의학사  1965년 서울대 대학원 철학, 의학박사  1988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 법학 법학박사
1955년 국립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1963년 서울대법대,수도의대 강사  1964년 병리전문의 자격취득
1965년 우석대 의대 외래 조교수  1968년 동 외래부교수, 일본 볍의학회 평의원  1970년 고려대 법의학연구소장,
            의대부교수,
1973년 동 의대교수   미국뉴욕의대, 뉴욕감찰의무원 객원교수,  미국 법의학회 회원  
1990년 고려대 명예교수  1992년 성폭력위기센터설립 위원회 공동대표 국제법의학회 회장 일본법의학회 평의원
           학술원 자연응용부분 수상 고려대 학술상  교수아카데미상  동아의료문화상
저서: 진료과 오법의학, 간호법의학, 최신법의학  의료의법이론  생명윤리와 안락사  진료실의법의학
         의료와진단학  생명의 미소

 

  문국진 한양대 교수

출생 : 1931년10월10일 서울
가족 : 妻정평완  子초우 수복 현아
주거 : 서울 강남구 도곡동 동신아파트
1961 연세대 물리학 이학사  미오하이오주입대 대학원 물리학 이학박사
1970년 한양대전님강사  1974년 동조교수  1975년 부교수, 기초과학연구소장,
1976년 동자연과학대 물리학과교수
1979년 물리학회 핵물리분과회원장  1985년 한양대 자연대학장, 한국물리학회 평의원,
           편집이사
저서 : 지구과학, 물리학, 자연과학개론,

 

국현(國現) 유한캠버리대표이사 사장

출생 : 1949년1월12일 서울
가족 : 妻박수애 子지영 지원
주거 : 서울 서초구 서초동
1971년 한국외국어대 영어영문학 문학사  
1976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관리회계경영학 석사
1972년 차량창연구관(병기학교)  
1974년 유한킴벌리 투자 및 원가관리 담당관  
1976년전산실장  
1979년기획조정실장
1983년 마케팅부장  
1988년전체사업담당 마케팅 상무이사  
1989년개인용품 사업본부장  1990년 개인용품 사업담당부사장  
1995년 대표이사, 사장
국방장관상수상, 아시안 마케팅 어워드 수상

 

 

규상(奎湘) 검사

출생 : 1954년8월1일 부산
1978년 서울대법과대 법학사
1984년 제26회사시합격  
1989년 사법연수원16기수료  춘천지검 검사
1989년마산지법진주지청
1991년 서울지검남부지청  
1994부산지검 동부지청

 

규석(奎錫) 은행원

출생 : 1939년 충남서산
주거 :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고려대 상학과
1990년 한일은행 오사카지점장  
1992년 동경지점장  
1993년 외환업무부장  
1995년상근이사
1996년상무이사
 

규진(珪鎭) 관악구의회 의장

출생 : 1935년2월5일
주거 : 서울 관악구 신림동
충남대 문리과 대학
새마을금고이사, 난곡새마을금고 부이사장  신림3동 사회정화위원장  신림3동 민방위협의회장 남부경찰서 선진질서추친위원  새마을 지도자  신림3동협의회 부회장  세일경리학원원장 1991년 관악구의회 의원  
1995년 관악구의회 의원(재선)  
1995년 관악구의회 의장

 

(槿現) 서울방송 감사

출생 : 1937년 2월11일 경북의성
주거 : 서울 송파구 가락2동 가락현대3차
1959년 서울대상과대 경제학 상학사
1959년 한국은행 입행  1959년 조사부 비서과  
1967년 외환은행 입행 1969년 수출입부장 대리  
1972년 LA지점장대리  1975년 심사2부과장 , 차장  
1976년 대성모방 상무이사  
1980년 대성모방사장
1985년 럭키금성상사 전무이사  
1989년 부사장  1992년 서울방송 감사

 

 

근배(根培)광주일보 국장

출생 : 1942년4월23일 전남진도  
주거 : 광주시 동구 신영1동1965년 전남대 상학과
1968년 전남일보 광고부, 총무국총무과, 광고부차장  총무부장 광고부장,
1980년 광주일보총무국 부장, 부국장  출판국부국장  1994년 광주일보 출판국장

 

   
 
 

금주(金柱)한국기업연구원 원장

출생 : 1935년10월16일 전남신안
주거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현대아파트1958년 육군사관학교  
1971년 미육군 보병학교  
1975년 육군대학교
1978년 육군보병 제 57연대 연대장  
1980년 육군본부 교육과 과장  
1981년 보병21사단 부사단장  
1981년 제68사단사단장  
1983년 보병학교교장  
1984년 군특검단 부장  
1988년 한국기업연구원 원장  보국훈장삼일장, 천수장 수상
 

기열(基烈) 외교안보연구위원

출생 : 1930년10월18일 전남
주거 : 서울용산구 이태원동 청화아파트
1954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 문학사  
195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원수료
1969년 총무처 총무국장  
1970년 외무부입부,  외교안보연구원 상임연구위원  
1971년 주이디오피아 대사관 참사관
1974년 주칠래대사관 참사관  
1977년 외무보 감사관  
1979년 주방글가세시 대사  
1984년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1986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1987년 주자메이카 대사
1991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홍조근정훈장 수상
 

기상(基祥) 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출생 : 1926년8월4일 전남보성
가족 : 子승현 두현 대현
1978년 중소기업진흥공단 창설, 초대이사장  
1981년 특허법률사무소 개설
녹조소성훈장 수장

 

 

기선(基善) 제주대교수

출생 : 1935년8월27일 제주
주거 : 제주시 삼도2동서울대학교 조소학과
제주대 인문대 미술학과 교수
작품상 : 물허벅 여인상, MBC사옥 탐라여명, 제주해녀상, 성화대 88옥림픽제작기착,
            제주대학 상징탑, 제주여인의일생  삼일운동 기념탑
 

기성(基成) 그루만코리아 부사장

출생 : 1940년7월28일 경기 개성  
가족 : 妻이금영 子지호 정아
주거 : 서울 강북구 수유5동
1963년 육군사관학교  
1987년 영국국방대학원
1971년 주월군 사령관 전속부관  3군사령관 수석부관
1976년 9사단 대대장
1979년 주호주무관  
1982년훈련소연대장
1986년 보병21사단부사단장  
1988년 교육사 전투발전부장  
1990년 한미엽합사 작전차장  
1991년 국방정신교육원 부원장  
1992년 그루만코리아 전무  
대통령표창 화랑무공훈장  부국훈장삼일장  천수장  미국legion of merit
 

기수(奇秀) 경기도의회 의원

출생 : 1948년1월30일 경기고양 가족 : 妻김순자 子지연 지심 지휴
주거 : 고양시 효자동
1968년 건국대밥학학사
1972년북한산농원 대표
1986년 고양장로회회장  
1988년 고양시해병전우회회장, 한국반공연맹 한국자유총연맹 고양시지부장
1989년 민자당중앙위원
1993년 고먕시 새마을협의회 후원회 회장  
1995년경기도의회의원  경기도의회원내총무
 

기호(基浩) kbs제작위원

출생:1937년 8월27일 경기화성
가족 : 妻김팔조 子성현 지영 석현
주거: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장미아파트중앙대 예술대
1965년 CBS사회부차장 1978년  편집부장  
1980년 KBS전주방송총국보도국장
1988년 KBS보도본부 보도위원  
1994년KBS라디오국 제작위원

 

길모(吉模) 삼원합동회계사무소 대표

출생 : 1952년 5월21일 충남부여
가족 : 父제원 妻오진숙 子병찬,병석
주거 : 강남구 대치동 506 선경아파트성균관대 경영학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석사
이화여대, 성균관대 강사  보람은행, 평화방송, 자민련, 한국가스공사 세무고문
서울YMCA재정위원  KBS세무상담위원  세무공무원교육원, 중소기업연수원, 금융연수원 강사 삼원합동회계사무소대표  한국부동산조세연구소장
저서: 양도소득세실무, 법인세실무, 은행원의 세무기초, 경리실무, 부동산
        금융실명제와 세금잔력

 

 

길주 창원시 의회 의원

출생:1941년 11월 9일 경남창원
주거 : 경남 창원시 반지동경남대 산업대학원 산업공학
1990년 민자당 을지구 반지동협의회 회장, 1992년봉곡동 등 자문위원  봉곡동 방범자문위원장  자유총연맹 반지동위원장 1995년창원시 의회의원

 

 

대원(大源) 코리아제록스 대표이사

출생 : 1953년 3월6일 부산  
가족 : 妻최수주
주거 :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975년 서울대상과대 상학사  1979년 미국미시간대 대학원 경영학석사
1975년 코리아제록스입사. 1980년영업담당이사  1982년 상무이사  1985년 사장  1994년 유강교역대표이사 부회장겸
1994년 코리아제록스 대표이사 부회장  경영연구회회원
수상: 철탑산업훈장
 

덕만(德萬) 정풍물산 회장

출생 : 1940년 1월24일 경남진해
주거 :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아파트서울대 경제학 경제학사   1965년 정풍물산(주) 전무이사  1978년 사장  1992년 회장
 

덕수(德守)한국예술문화회장

출생 : 1928년 12월 8일  경남마산
주거: 서울 강남구 논현동 현대타운빌라
1955년 홍익대 법정학부  
1977년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문학 석사 1979년 대학원수료  
1981년 고려대 대학원국문학박사
1955년 마산상고 교사,
1957년 제주대 전임강사, 조교수, 도서관장,
1961년 홍익대조교수 부교수 1965년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1974년 월간 시문학 주간
1977년 한미 친선사절단으로 방미  1981년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월간시문학주간
1982년 한국문인 협회 부이사장  국제펜대표자회의 대표(런던) 홍익대 사범대학장
1984년 교육대학원장 국제펜한국본부부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동경개최 아시아인대회 대표  
1986년 UPLI 한국위원회 대표
1987년 계관시인
1990년 국제펜크럽한국본주회장  국제펜크럽 한국본부 제28대회장 홍익대 예교수
1995년

 

 

 

대성

1976년9월3일 서울태생 3남4녀중다섯째

 경력

시드니올림픽(2004년) 태권도 금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01년 전국체전 5연패(국내),
1999년 세계선수권대회 헤비급 1위

2000년 아시아선수권대회 헤비급 1위,

 학력

구월초등학교 - 구월중학교 - 리라공업고등학교 - 동아대학교

 체격

키190cm 몸무게91kg이며 특기는 나래차기,뒷차기

 

의제

1975/02/10

 가계

문영환씨와 이영옥(62)씨의 3남중 막내, 처 김정미(28)아들 문유빈(3)

 주소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경력

2004 제28회올림픽대회 은메달(레스링) 1997년 캐나다컵국제대회를 제패
1998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방콕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0 제27회올림픽대회 은메달 2001 세계선수권 준우승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동기

대전 동산초교 4학년때부터 씨름을 하다 6학년때 레슬링대회에 우승하여 보문중학교에서 레슬링입문

 

 문필희

1975/02/10

 경력

시드니올림픽(2004년) 핸드볼 은메달

 신문기사

후반 막판. 덴마크에 밀려 22-25로 패색이 짙던 한국은 종료 5 분여를 남기고 오른쪽 코너를 파고든 최임정과 중앙을 돌파한 문필희에 이어 장소희의 왼쪽 사이드슛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더구나 종료 40초를 남기고 덴마크 선수의 워킹으로 공격권까지 빼앗아 단 한골 만 넣으면 금메달은 우리 차지.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종료 3초 전 문필희가 상대 수비수 사이로 강슛을 날렸으나 그만 골키퍼의 왼손을 맞고 튀면서 골문을 외면했고 연장전에서도 동점을 이루어 승부던지기에서 패했으나 금보다 값진 은이었다.

천안공고 출신으로 모교에서 교생실습중인 문필희선수(한국체육대)는 고향의 도민체전(충남)을 축하해주고 성공대회로 이끌기 위해 최종 성화주자로 나서 관중들로부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문경하 선수도 핸드볼 은메달팀이다.

 

 

문재인(在寅)

학력

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경 력 1953. 1. 24 경남 거제에서 출생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3년 법무법인부산 대표변호사
1984년 부산해양대 해사법학과 강사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   
2003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 

                                                                    소개글
문재인 변호사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자연인, 인권변호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보면, 문변으로 계속 불러줘야 할 듯 싶습니다.)
  그 계기를 들자면, 어머니의 친한 친구분이 공안수사관출신입니다. 부산에서 80년대 공안과에서 일하는 건 386이 아닌 저도 어렴풋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벌써 가슴이 팍 답답해지네요. 그 분과 정치적인 이야기는 단 한번 해봤습니다. 아시죠? 부산에서 나고 자라, 생각이 굳어진 부모님세대와, 서울로 상경해 대학을 다니는 아들또래가 어떤 대화가 되는지. 그날은 얌전한 아들로써 생각을 들어봤습니다.  요약하자면,
  "노무현은 인간아니다."는게 당시 노후보의 평가였습니다. 하하. 그러고보니 부산에서는 "인간아니다"라는 말을 자주쓰는데, 서울에서는 한번도 못들어봤군요.
   언제나, 노무현과 다른 편에서 싸워왔던 사람들이라면 노무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이견의 여지가 있으나, 수긍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노무현을 가르는 중요한 키워드중 하나는 원칙주의입니다. 이번에 끝까지 사과안하고 버텼던 것에 대해, 부산어르신들은 "독한놈"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온, "노무현 물흐리기"의 대표적 전략은 말바꾸기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이런 것이 노무현은 죽어도 곧이곧대로 하는 사람임을 반증하는거라 봅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존칭생략)   그런 분이 문재인에 대해 뭐라고 평했을까요. 공안경찰로써 인권변호사들과 숱하게 맞부딪쳤을텐데. 좋게 만났을리는 없고...
"훌륭한 사람, 남자중의 남자"라고 평하더군요. 뜨아.
이때 문재인의 존재를 알았지만, 수도권에서 문재인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민주화도 수도권집약이라, 문변에 대해 정확히 평가해주는 분은 드물더군요. 운동했던 386이 아니라, 공안수사관으로부터 문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거죠.
  결국, 문재인에 지금 생각은, "남자중의 남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사태후,  20년뒤 대학생중엔 여학생은 금실이가 많을테고, 남자중엔 재인이가 많을지 모릅니다.
노 당선자가 부산을 방문한 자리에서."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부산이 청와대를 인정했다면, 노무현이 아니라 문변이 청와대 민정수석을 했기 때문일겁니다. 민노당쪽에서도 부산시장선거때, 문재인이 민주당 후보로 나오면 시민경선을 치뤄 단일화할 생각이 있다고 했지요. 물론 한이헌씨가 후보로 나가면서 비웃음을 많이 샀지만요.
  또다른 키워드는, 외유내강입니다. 겉보기엔 선한 목사같은 인상입니다. 기자들로부터 대표적인 친절맨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학생운동하다 군대에 잡혀가서 특전사복무를 했다는게 믿기 어렵지요. 물가에 놀러가면, 맨손으로 매운탕꺼리 잡아온다고 하더군요. 산과 바다를 사랑해서 모르는 야생화 이름이 없다고 하는, 낭만파이기에, 이번에도 퇴임을 하고 티벳으로 놀러갔다 급히 귀국을 하게됐지요.
  공안수사관과 시민운동가, 대통령에게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혼란스러운 이시대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게 신기합니다. 유일하게 미워하는 그룹이 있다면,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지 않는다고 해서 열우당 지지자들이 미워하기도 하더군요. 문변이 출마한다면 이 포스트는 선거법 위반이 되버리는 겁니다.^^
4년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다, 시위에 앞장서고 구속된 사람.
유치장에서 사시합격이 되어, 경찰서장이 소주파티 열어준 사람. 
차석으로 사법연수원 마치고, 인권변호사하는 사람.
대통령에게 사랑받고,대통령의 적에게 사랑받는 사람.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지금까지 살아오다 보니, 딱 저렇게 생긴 사람이 여자들에게 인기 많더군요. (네이버 블로그에서 문변이 섹시하다는 포스트도 읽었다구요. )  여기까지가 문재인에 대해 제가 아는 텍스틉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드라마틱한 인간이군요. 아직 어린 제가 뭘 알겠습니까. 나중에 누가 영화화해주면, 보고 생각하렵니다. 마치 소설속의 주인공같기에.
출저http://blog.naver.com/min3d.do?Redirect=Log&logNo=1310263

 

정수(正秀)

 경  력 1939. 8. 9.부산 사하구 다대동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수료(석사)
12대 국회의원(신민당 부산북구)     신민당사무총장   
13대국회의원
부산시장(초대 민선)                  

종사관련

남평문씨 대종회 고문 역임

연락처

☎자택 051-363-0312 

 

희갑(熹甲)

   

 

1937. 6. 9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376에서 출생
주 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375 남평문씨세거지

남 평문씨 대종회 고문역임

학력

화원초등학교 졸업(1950) 대륜중학교 졸업(1953) 경북고등학교 졸업(1956)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1963)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1966)  
미국 테네시주립대학교(MTSU) 대학원 경제학과 수료(1972)
경북대학교 명예행정학박사(1977)  계명대학교 명예도시공학박사(2001)

경력

제5회 행정고시 합격(1967) 경제기획원 기획국/협력국/예산국 재경사무관(1967~1976)
경제기획원 예산국 기업예산과장 (1976)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1977)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1978)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1982) 12대 국회의원 (민정당 전국구, 1985)
민정당 대표위원 보좌역 (1985) 민정당 국책연구소 정책조정실장 (1985)
경제기획원 차관(1985~1988)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1986) 77그룹 각료회의 수석대표(1986) 기계류/부품/소재 국산화 대책위원회 위원장 (1986) 대일 무역역조 시정위원회 위원장 (1986)
부실공사 및 건설부조리 방지대책위원회 위원장 (1986) 한일 각료회담 대표 (1987)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장관급, 1988~1990) 부동산투기방지대책위원회 위원장 (1988)
금융거래실명제준비단 단장 (1989) 지역균형발전기획단 단장 (1990)
13대 국회의원 (민자당 대구 서갑구, 1990)
민자당 경제대책특별위원회 위원 (1993)  미국 예일대학교 산림 및 환경대학원 객원교수(1993)
계명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책개발대학원 초빙교수 (1994) 대구경제연구소 이사장 (1995)
대구광역시장 (1995~2002. 6)  계명대학교 특임 교수(2002)

수상

보국훈장 천수장 (1980) 청조근정훈장 (1990) 제1회 지방자치단체 경영자상 (1996)

저서

보리밥과 나라경제 (국문, 일문판) (1987, 동아출판사)
경제개혁이 나라를 살린다 (1992, 행림출판)  
함께 사는 경제 (1995, 이가책)

연락처

☎자택 053)426-6677   FAX : 053)252-0123

 

희상(喜相)

경  력

1945년 3월 3일(음) 경기 의정부 출생
경복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남평문씨 대종회 고문 남평문씨 의정부종친회 회장
(전)정무직 공무원, 국회의원, 스포츠기관단체인
제16대 국회 국회의원(경기 의정부) 제26대 대통령비서실 실장(장관급)
노무현대통령당선자 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당개혁특위 부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집행위원회 부위원장
2003년 2월 ~ 2004년 2월 제26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2004년 5월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2005년 4월 ~ 2005년 10월 열린우리당 의장

연락처

☎자택 031-846-2345

 

문석호  (文錫鎬)

직업

 국회의원, 변호사문석호법률사무소 변호사

경  력

 

1959년 7월 12일 서산 출생
안면초등학교 안면중학교 졸업   공주사대부고 졸업    
1981 고려대학교 법학 학사
1981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1983 사법연수원 13기 수료 군법무관
1986 변호사 개업(대전)
1996 민주당 입당민주당 충남 서산.태안지구당 위원장
1997 국민회의 입당 국민회의 충남 서산.태안지구당 지구당위원장
2000 - 2003 새천년민주당 충남 서산.태안지구당 지구당위원장
2000 - 2003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충남서산.태안)
2000 - 2002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2000 - 2003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회 위원장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인권특별보좌관
2002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2002- 2003 새천년민주당 대변인, 새천년민주당 인사위원회 위원  새천년민주당 탈당
2003 제16대 국민참여통합신당 국회의원(충남 서산.태안 )
2004 열린우리당 충남도지부장 및 서산태안지역구위원장 국회의원 당선

2006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현 열린우리당 제3정책조정위원장 

국회의원 출마시의 약속

1. 당선되어서도 살아있는 여론을 수렴하고 이를 국정에 반영하기위하여 서산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2. 국정감사나 청문회에서 증인 및 공무원에게 국회의원의 품위를 훼손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3. 대기업 및 업체, 각종 이익단체로부터 정치자금법에 위배되는 어떤 음성자금도 받지 않겠습니다.
4. 주민의 의견 수렴 없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철새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
5. 지방의회 선거에서 공천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하지 않겠습니다.
6. 당의 결정이 국민의 이익과 요구에 크게 반하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소신결정을 하겠습니다 
7. 저는 당과 개인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겠습니다
8. 저는 육군본부 군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쳤으며,
    자식들의 군복무 의무를 면제시키겠다는 불손한 생각도, 어떤 불미스러운 행동도 하지 않겠습니다.
9. 성실한 의정활동과 입법활동을 전개하고, 불가피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국회에 100% 출석할 것이며,
    다음 총선에서 시민단체로부터 공천부적격자 또는 낙선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겠습니다.
10. 저는 이번 총선에서 내세운 공약과 지금 드리는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연락처

홈페이지 http://www.moon2080.co.kr/          메일주소 minjoost@nownuri.net
☎직장 02-788-2563 

문병호 (文炳浩)

                   

근무처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543-4         열린우리당 인천 부평구 갑 

경  력

 

1959년 12월 27일   전남 영암에서 출생
인성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 수료 

1987년 ~ 1989년 사법연수원 제18기 수료
1998년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연구원
부평미군부대 공원화추진 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옷 로비사건 특별검사팀 수석수사관
-인천노동법률상담소운영(무료상담, 1989-2002)
- 한국가정볍률상담소 법률구조를 위한 100인 변호사단 변호사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한양목재 노동조합 전교조인천지부 고문변호사
인천일보 객원 논설위원
2004년 5월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문병호 변호사는 1959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예향광주에서 유소년시절을 건실하게 보내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지만 문변호사의 대학시절은 매우 암울했습니다.
군사독재 하에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희생되고 힘없는 시민들이 군사정권에 짓밟히는 현실이 젊은 법학도의 가슴을 슬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중이 고통받고 있는 불평등한 세상, 정의보다 권력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문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여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신의 환경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시장에서 작은 가판을 벌려 놓고 만원어치도 안되는 나물을 팔려고 애타게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가녀린 눈동자, 야간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여공들의 지친 발걸음 소리, 민주화를 외치다 독재정권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선배들의 의로운 투쟁들, 이 모두가 문변호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시대적 사명감에 대한 계시가 되었습니다.

   문변호사는 핍박받는 민중의 쓰라림과 함께하며 군사독재의 퇴진과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정의롭고 결연한 학생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다 진압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고 1981년에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무림사건"에 연류되어 강제휴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년 뒤, 다시 복학하여 서울대학교 교정에 돌아온 문변호사는 고심하였습니다. 과연 자신이 힘없는 대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문변호사는 갈등과 번뇌를 거듭하며 하나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법학도로서 시대에 맞는 역할을 다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문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1년 10개월 동안 법학 서적과 씨름한 끝에 제 28회 사법고시에 합격,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첫 관문을 통과하였습니다. 문변호사는 노동ㆍ인권운동의 성지인 인천, 그 중에서도 법의 사각지대인 부평에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며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때가 15년 전 1989년 봄 이었습니다. 문변호사는 개업 후 2개월 동안 시국사범 7건, 근로자들의 임금ㆍ손배ㆍ퇴직금ㆍ산재 등 노동분쟁 10건을 무료로 수임하며 인권변론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문변호사는 그 동안의 인권변론 활동과 성품의 강직성이 높이 평가되어 1999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추천으로 옷로비사건 특별검사팀 수석수사관에 임명되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문변호사는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과 부평의 발전을 위해서도 애써왔습니다. 인천참여자치연대 공동대표와 '개혁과 희망의 지방자치를 위한 인천시민의 힘' 집행위원장 등 시민단체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인천의 건강한 시민사회의 성숙을 위해 힘써 왔을 뿐만 아니라 부평미군부대 공원화추진 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미군부대 철수를 위한 시민운동을 주도하여 미군부대의 철수를 이끌어 냈고 지금은 미군부대 공원화와 사회복지정책의 대안 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홈주소

http://www.lawmoon.com

 

문학진(文學振)

                                    

경력

1954년 10월 26일 경기 광주시구천면 곡교리(현,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에서 출생
서울중,고 졸업
1974. 고려대학교 사학과 입학(1975 고려대학교 반유신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제적)
1980. 03 고려대학교 복학후 2개월후 무기정학  1982. 03 고려대학교 복학   
1984. 02 고려대학교 졸업(4년)사학박사
1983. 11 조선일보 수습기자 수석 합격 1984. 04 해직(학생운동 경력 문제)
1984. 05~1988. 01월간조선 근무
          1987. 06 조선일보 보도부문 특종상 수상 (부천서 성고문 사건)
1988. 03~1995. 06 한겨레신문 근무(정치부, 사회부 등)
          1988. 12 한겨레신문 보도부문 특종상 수상 (고문기술자 이근안)

1998. 11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조정위 부위원장
2000. 03 새천년민주당 광주시지구당 위원장
2002. 07 새천년 민주당 하남시 지구당 위원장
2003. 02 대통령 정무제1비서관
2004. 01 열린우리당 하남시지구당 위원장
2004. 05 제17대 열린우리당 인천 부평갑 국회의원

저서

1996 고문경찰보다 힘센 남자 - 문학진의 정치 이야기 (풀빛출판사, 1996)
1999 백범 김구처럼 (풀빛출판사, 1999)저서: 백범 김구처럼

연락처

 자택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은행동부APT 112동 503 031-791-2075
E-mail : hakjin54@hanmail.net   홈페이지 : www.m21.or.kr

 

문성진(文成振)

경력

1967년 4월 10일(음) 제주 애월 출생
1992년서강대학교 졸업  최고기공 용접공으로 근무
1993년인천민중정치연합 정책국장
1999년민주노동당 창당 발기인
2000년민주노동당 인천시지부(준) 정책 선전국장
2001년민주노동당 인천시지부 정책위원장, 중구 동구 옹진군 지구당 위원장
2003년~현재 민주노동당 중구 동구 옹진군 지구당 위원장
                      민주노동당 인천시지부 사무처장

인사말

저는 1986년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래 노동자·민중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과 노력은 91년 인천으로 내려와 용접공으로 취직하고 노동운동 단체 일을 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이런 뜻과 노력은 노동자·서민의 정치, 진보 정치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주노조 활동과 노동운동 단체 일을 해온 여러분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해온 여러분들과 함께, 노동자들과 함께 민주노동당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구·동구·옹진군은 제가 1993년 이래 노동운동 단체 일, 교육 문화 단체 일, 민주노동당 활동 등을 통해 인천에서 활동의 둥지를 튼 곳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와 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현재 벌이고 있는 지역활동은 중구 동구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환경·교육·노동·주거·인권·문화 등을 개선하기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03년
국회의원
출마의 변

이제 절대 다수 국민들 이해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괴롭히기까지 하는 정치는 청산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교육과 의료, 일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또한 지방 자치가 불완전한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은 지역 주민들 복지, 지역 발전을 위한 노력도 펼쳐야 합니다.
인천에서 가장 낙후한 우리 중구, 동구, 옹진군 지역은 이제 노동의 기쁨, 교육과 문화 기능 확충을 미래의 희망이 숨쉬는 지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 사진

연락처  주소 :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 78-8번지 2층    Tel : 032)762-5173, 5175
 E-mail : incheon_sarang.hanmail.net     injdo-kdlp@hanmail.net  
 홈페이지 http://www.moonsungjin.or.kr

문두식(文두植)

경력

1947년 9월 27일(음) 전남 화순 출생
1966년 광주제일고등학교   1996년 연세대학교 행정 대학원 석사
2002년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박사
1972. 4~1973. 2.  주월맹호사단 기갑연대 소대장
1986. 3~1989.12.주미대사관 국방무관 보좌관
1996.11.~98.3.국방부 기무부대장
2001.10.~2003.4.기무사령관
2003. 7~현재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2003년 열린우리당   전남 나주시.화순군 회의원 후보

출마의변

본인은 새로운 시대에 국민여망을 반영할수 있는 당은 "열린우리당"이 가장 근접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군생활과 학문수련을 통하여 남북통일문제, 군비통제, 군사력건설, 군의보완문제, 국방외교, 군의사기, 복지에 관해서 남다른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국회에 진출하면 그런분야에서 국민을 대변 함으로써 국가이익을 보호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에 관한 문제는 농산물의 특성화 개발로 전국적 경쟁력을 제고하는데 일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