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야

익환

형동

대원

 백윤

 용호

 

 

 

 

 

 

이곳의 자료는 여러분야라고 하나 빈약하기 짝이 없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다만 여러분야를 소개하기 위한 준비의 마당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자랑스러운 일가님들이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자료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일가님들의 자료를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혼자 만든 남평문씨의 홈페이지가 아니라 남평문씨 전체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홈페이지가 되도록 일가님도 남평문씨라면 함께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익환(益煥)  

  

종교인에서 재야 운동가로 변신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 민통련 의장, 전민련 고문 등 1970∼80년대 재야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정부당국의 허가없이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남으로서 사회전체를 통일논쟁으로 몰아넣었는데 당시는 "감상적 통일지상주의자"란 비난과 "통일운동의 화신"이란 극찬으로 상반된 평가가 있었다

1918년 출생
1955년 한빛교회 목사        1968 -신구교성서공동번역구약책임자  
1975년 8월 유신정권에 맞서던 장준하의 죽음 이후 열렬한 재야투사로 변신
1976년 삼일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20년형을 선고 받음
1977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함
1978 민주주의국민연합중앙상임위원회위원장  1978 전태일기념사업회위원장
1978 -국민연합선언서 사건(유신헌법 비민주성 성명발표)로 투옥
1979 -석방 1983 -기장총회교사위원회위원장 
1980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후 석방
1984 -민족통일국민회의의장
1985 -민족통일연맹의장
1989 - 1990양심수후원회회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등
1990 - 1993방북으로 수형생활을 하는등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1994년 졸

 

문형동

수필가 시조시인

 경력

1943년 전남화순 출생
1987년 <한국 수필>에서 수필 추천을 받았으며
1988년 <시조 문학>에서 시조 추천을 받아 수필가, 시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근무처 : (사)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의 사무국장

대표작

국물 이야기(2001년 중학 중학교 국어교과서 1-1에 수록됨

작품집

수필집:『두 번 피는 꽃』(1992)   자화상, 부자 마음, 흙맛 막사발, 축문, 하현달, 호문,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 등
시조시집『네 계절의 노래』공저(1999)   
산문집『국물 이야기』(2001)는 이 달의 청소년도서'로 선정(2001)

                                 국물  이야기 (중학 국어교과서 1-1 에 실린글)
우리의 밥상에는 밥과 함께 국이 주인이다. 봄이면 냉잇국이나 쑥국의 향긋한 냄새가 좋고, 여름엔 애호박국이 감미로우며, 가을엔 뭇굿이 시원하다. 그리고 겨울이면 시래깃굿과 얼큰한 배추김칫국이 있어서 철다라 우리의 입맛을 돋운다.
가을 뭇국은 반드시 간장을 넣고 끊여라 제 맛이 나고, 겨울 시래깃국은 되장을 풀어야 구수한 맛이 돈다. 사람들이 지닌 성품과 애정도 이처럼 사계절의 국물맛과 같지 않을까?

조선시대 왕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선농단까지 나갔던 것이다. 왕이 집적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도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궁궐에서만 사는 왕을 먼발치에서라도 볼수 있고, 또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도 하기 때문이였다. 흉년이 든 다음 해는 백성들이 더 많았는데 그 까닭은 그 곳에 가면 국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농단의 국물에는 은혜와 감사, 또는 마음 속 깉은 기원이나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농단에서 백성들에게 국물을 나누어 주다가 갑자기 사람이 더 늘어나면 물을 더 붓는다. 그리고 간을 다시 맞추어 나누어 먹는다. 물을 더 부으면 그만큼 영양가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 지난날 우리가 영양가를 따져가며 먹었는가? 가난을 나누듯 인정을 사이좋게 실어나르던 고마운 국물이었던것이다.

엿장수 인심에 맛보기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예외가 아니다. 기분만 나면 맛보기 한번에다 덤을 주는데 이 역시 국물 한 대접 같은 인정의 나눔이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살 때도 값어치만큼의 양은 당연히준다. 그러나 덤으로 콩나물이 더 얹히지 않을때 아낙네들은 금방 서운한 눈치를 한다. 파는 이가 두꺼비같은 손잔등을 쫙 펴서 서너 개라도 더 올려놓아야 아낙네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간다. 그 덤 역시 국물과 같은 끈끈한 인정의 나눔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우리네 식탁엔 점차 국물이 사라지고 있다. 걸어가면서 아침을 먹고, 창 흔들이면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인가? 아니면, 개척시대 미국 이주민의 생활이 부러워 그것을 흉내내고 싶어서인가? 즉석요리,즉석식품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내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생선은 굽고 닭고기는 튀겨야 맛이 있다고 성화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그 반대 입장에 서서 국물이 있는 것으로 입맛을 챙기려 하니, 아내는 늘 지혜롭게 식탁을 꾸려 나갈 수 밖에 없다. 기다릴 줄 모르고 자시 욕심과 자기 주장이 통ㄴ할 때 까지 고집을 피워대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그런 성격이 서구화된 식탁문화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도 커진다.

오늘 아침에도 조기 한 마리를 사다 놓고, 구울까 찌개를 끓일까 망설이는 아내의 처지가 참 안쓰러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내는 내 눈치를 보면서 끝내 조기를 굽는다. 국물없는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는 발걸음이 어쩐지 가볍지가 않다.

 

용호(용祜)

1925. 8. 29

근무처  학교법인 문성학원 이사장
경  력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부설 행정연수원 수료
 여수, 안성, 김포, 시흥, 부천시 교육청 장학사
 인천고등기술학교 설립,     인천기술학원설립
 초급대학과정 2년제 전공부설립,       문성여자상업고등학교설립, 
 문일여자고등학교 설립,           

종사관련

  남평문씨 대종회 고문, 대종회장

수  상

 대통령표창, 사학육성특별공로상 봉황장, 녹조소성훈장, 
 서울, 경기지사표창, 무궁화은장

연락처

 ☎  자택 02-815-0651  ☎ 직장   032-465-6507

 

인간문화재 문백윤(삼천포 농악 12차의 선구자)

농악 12차는 영남농악 가운데 진주·삼천포 지방에서 전승되는 판굿을
1966년 6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로 지정한 삼천포 농악 12차 36가락이다

문백윤은 1910년 남평문씨 미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의 어린 나이로 매굿을 따라 다녔으며 상쇠놀이에 넋을 잃었는데 유독 상쇠를 잡은 사람에게 눈을 쏟았다.
8세때에는 이미 동리 매굿패에 끼어 소고와 꽹과리를 쳤다. 비교적 부농이었던 선대는 장차 백윤이 매굿패에 끼어 열중하는 것을 보고 엄하게 나무랐으나 소년의 가슴에 타고 있는 정열을 식힐 수는 없었다.

이 때 우연히 진주 정촌에서 남양으로 이사 온 김한노를 알게 된다. 이 분은 농악예술의 전승자였다.
김한노의 사부 박경호가 조선조 말의 대표적인 악사였다. 이 분이 그의 농악대를 거느리고 유랑할 때 거제 7면을 다녀도 산달섬이 제일이라는 민요를 남겼는데 이 민요는 한국의 구성진 유머가 있었으며
박경호 이상의 계보는 가릴 수 없고 농악 12차 36가락은 박경호.김한노에서 문백윤으로 전승되었다.

김한노는 문백윤의 재능을 간파하고 전승 후계자로 지목하고 자기가 지닌 기예를 물려준다. 수재자로 사사하기 6년인 16세 때에는 이미 그의 기예는 대성했고 김한노는 한 사람의 후계자를 얻으려고 남양땅에 발을 멈춘것이다.

일본관헌들이 나라잃은 민족일 망정 고유의 민속을 지키며 뭉치면서 내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한 민족의 생명을 이 농악놀이와 그 가락에서 본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농촌의 방방곡곡에서 신나게 울려 퍼지던 농악소리와 한국 농민의 애환이 담긴 농악놀이가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기에 일본인들은 집회허가 위반으로 매굿놀이를 단속하기 시작하여 농악이 사라져 가게 되었으니 상쇠를 잡아볼 기회마저 잃은 문백윤은 우울한 심정을 달랠길 없어 홀연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니 19세 청년이었다. 실향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교포촌에 나타난 문백윤은 신들린 사람처럼 상쇠를 쳤다. 교포들의 환희가 절정에 달해 굿판이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 문백윤 그는 일본으로 잘 왔다고 생각했고 농악을 배운 것을 보람으로 느끼게 된다. 이리하여 일본 전역에 걸쳐 교포촌을 다니며 상쇠를 쳤으나,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면서 못하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니 32세의 장년이었다.
동향의 토건업자 김육상 공사장에서 토건업에 종사하면서 탈바꿈의 계기를 찾아보려고 몸부림 쳐본다. 그러나 토건업자로 입신출세 하겠다는 꿈도 깨어지고 8년간의 만주방랑을 마치고 귀향하니 광복 1년 전에 고향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남양땅에 사라졌던 남양 농악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지면서 전국에 명성을 떨쳤던 남양농악대가 이때에 나래를 펴며 발족한 것이다. 나라도 찾고 농악도 찾으니 환희의 농악가락은 한결 신났고 그의 상쇠놀이도 절묘해갔다.

1959년 11월 사계의 권위자들은 문백윤에게 영광의 인간문화재 칭호를 안겨주었다.
1961년에는 미국공연을 가졌고 기타 해외공연을 거듭하여 널리 세계에 농악을 소개했다. 제자로 이금주, 이성진, 박염 등이 있다. 제자 13명중 6명은 이미 16개국을 돌면서 공연하여 세계인의 갈채를 받고 있으며 제자 중 박염이 1991년 5월 1일에 인간문화재의 칭호를 받고 현재 농악 12차 36가락 보급에 전념하고 있다.

1992년 문화부에서 발행한 한국의 민속예술(전국 민속예술강연대회 33년사)지에 1964년 제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마치고 삼천포 농악을 평가한 내용을 소개하면
농악은 원형무를 기본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고대의 전쟁형태의 기본 전법에서 유래했다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또 12차라는 말은 전용하여 굿의 순서를 12종으로 가르고 이것을 농악 12차라 하였다.

특색
(1)무용적 특색 치배들 전원이 전립을 쓰고 상모놀이를 하며 상모놀이에는 외상모, 양상모, 사사, 우물놀이 등이 있다. 법고놀이에 돌아앉기, 한발로 법고차기, 연풍대와 자반뛰기가 있으며 설장고놀이에 있어서 연기가 다양한 가락치기와 연풍대가 있다. 또한 달거리굿과 같은 노래굿이 있다.
(2)음악적 특색 악기에 있어서 소고와 법고를 구분되지 않고 징과 북을 3~4개 쓰는 경북농악과 호남농악의 중간 형태이다. 쇠가락은 거의 3/3박자이며 혼합박자는 잘 쓰이지 않는다. 또한 품앗이 가락과 굿거리를 별로 쓰지않고 덧백와 다드래기, 호호딱닥을 쓴다. 빠른 가락이 많아 힘은 있으나 맺고 푸는 기교가 약하여 구성진 흥이 덜하다. 반면 가락이 다채로와 흥겨운 느낌을 준다

1차

느린 덧뵈기가락으로 구경꾼에게 인사굿을 한 다음 오방진 가락을 반삼채로 치면서 동서남북 중앙에 나선형으로 고도진을 친다. 다드래기 가락에 농악대원 오른편으로 둥글게 돌고 법고잡이들은 연풍대를 한다

2차

농악대원들이 둥근 원을 만들어 오른편으로 돌면서 춤추고 그 가운데서 상쇠가 덧뵈기가락으로 옷놀음을 하고 춤을 춘다. 끝에는 다드래기가락을 치며 빠른 속도로 소고잡이들은 자반뒤집기를 한 다음 농악대는 두패사이로 빠져 나온다. 이어서 덧뵈기가락으로 둥글게 늘어선 대열 안으로 법고놀이를 한다.

3차

홑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어르고 논 다음 삼차길군악을 치며 둥글게 돈다. 이어서 삼차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오른편으로 돈 다음 삼차다드래기가락을 벙어리가락으로 치면서 왼편으로 돈다.

4차

삼차길군악을 빠르게 치면서 둥글게 돈 다음 영산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상쇠와 고스들이 외상파놀음, 양상파놀음, 사사웃놀음, 전치기웃놀음, 쌍전웃놀음, 등 웃놀음을 하고 영산다드래기로 몰아가며 계속된다

5차

자진얼림굿도드리에 이어 굿거리를 한 다음 양반, 포수, 기타 잡색들이 가운데 들어와 굿거리장단에 흥겹게 춤추고 익살스런 구경꾼들을 웃긴다.

6차

상쇠가 가운데 들어가 덧뵈기가락을 치고 농악대 전원은 오른편으로 원진한다. 이어서 소고잡이들의 안을 들어가 둥글게 돌며 다드래기가락에 연풍대놀이를 한 다음 모두 둥글게 늘어서서 자진다드래기가락을 친다. 징은 치지않고 모든 법고장이와 상쇠가 하는대로 갖가지 상모놀음을 한다

7차

삼채가락을 치며 법고잡이가 안에서 둥글게 서서 법고놀이를 한 다음 자진다드래기가락에 법고놀이가 이어 진다. 이어서 상쇠와 목쇠가 서로 품앗이값을 주고 받으면 농악대원은 전원 좌우로 진퇴한다

8차

상쇠는 제3차 가락을 치며 둥글게 돈다. 제삼차가락 둘째박에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나서 회전한다. 이어 상쇠가 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양상피놀음을 하면 법고잡이들도 양상피놀음을 한다. 다시 법고잡이가 두줄로 마주보고 다드래기가락에 맞추어 상모놀이를 하다가 덧뵈기가락에 전후좌우 발 마추어 진퇴한 다음 다드래기가락에 일제히 생피지를 돌리며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한다.

9차

법고잡이들이 둥글게 둘러선 다음 상쇠가 치는 얼리굿가락에 법고 잡이들의 가운데로 둥글게 앉았다가 덧뵈기가락에 천천히 일어나면서 상모놀이를 한다. 상쇠가 산치기놀음을 하면 법고잡이들도 생피집 물체를 세워서 산치기놀음을 하고 끝에는 다드래기로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하며 오른편으로 돈다. 이어 다드래기가락에 전후좌우 일제히 진퇴한다

10차

농악대원들이 굿가락을 치면서 '아하- 아하야'라고 사거리를 부른 다음 굿거리 가락에 중거리노래를 함께 제창한다. 이어 농악대원들은 둥글게 늘어서서 '아하 아하 밝은 달아'하고 달거리노래를 부른다.

11차

다드래기가락을 치다가 상쇠의 신호로 '별따자 별따자 하늘 얼러 별따자'하고 구호를 외치고 나서 다드래기가락을 친 다음 호호굿거리가락을 치며 '호호'하고 구호를 부른다. 이어 굿거리가락에 법고놀이가 계속된다

12차

다드래기가락을 치고 '허치자 허치자 구경가락 허치자'라는 구호를 부르고 다드래기가락을 친다.'어서치고 술먹자. 부포끌러 술먹자'하고 부르기도 한다

                                                      자료출저 미상(인터넷에서 퍼온 글)

 

문대원 화학박사

닮고 싶은 2004과학기술인 선정
선정 분야 : 학술연구 전공 분야 : 화학 소속 및 직위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력

1975년    서울대학교 화학 학사
197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 석사
1984년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 화학 박사1977년 ∼ 1980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1984년 ∼ 1985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박사후과정 연구원
1985년 ∼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985년 ∼ 1986년    미국 NIST 방문연구원
1999년 ∼ 1999년    호주국립대 전자재료과 방문연구원
2001년 ∼ 2002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 재료학과 초청교수

 

수상이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국내 표면분석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가 제작한 중에너지이온산란분광기(Medium Energy Ion Scattering)를 통해 초박막 속의 원자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원자들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국제학회에서 에너지 이온산란 분석법에 대해 총 9회 정도의 강연을 했다.

최근 문 박사는 국제학술지「Critical Reviews in Solid State and Materials Sciences」(고체물리 및 재료과학 리뷰)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고체물리, 박막 관련 분야에 관해 리뷰할 주제를 선정하고, 이 주제에 관해 집필할 연구자를 추천하는 일에 참여할 예정이다.

현재 극미세구조기술사업단의 총괄책임을 맡아 미래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이 사업단에서 그는 다양한 연구분야에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소재의 외부표면을 구성하는 원자층 원소의 조성과 분포, 그것들의 화학상태와 전자구조, 원자구조를 측정하고 제어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열정으로 풀어낸

물체표면의 비밀

3번 문제 풀이과정을 설명할 사람! 문대원, 네가 대답해 볼래?” “저, 그건….”
결코 몰라서 머뭇거린 게 아니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나노표면연구그룹의 문대원 박사(52)는 고등학교 시절 수학선생님이 질문하면 떨려서 아는 것도 답을 못했을 정도로 겁 많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성격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점점 더 어두워졌어요. 가뜩이나 수줍음도 많이 타는데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밝아지려고 노력했죠. 지금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 정말 변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성격마저도 의지를 가지고 변화시킨 셈이다. 이런 적극적인 자세 덕분에 과학의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과감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문 박사는 20여년 동안 물리학 화학 재료공학의 집합체인 표면과학을 연구했다. 당구공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그재그로 여러 줄 놓여있다고 하자. 여기에 당구공을 치면 어디선가 맞고 튕겨나온다. 마찬가지로 물체의 표면을 구성하는 여러 층의 원자에 수소원자를 충돌시키면 튕겨나온다. 이때 어느 층에 부딪히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에너지가 다르다. 이를 측정하면 수소원자가 어디서 튕겨나왔는지, 원자들이 어떻게 배열돼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서도 표면과학은 매우 중요해요. 미세한 회로를 만들기 위해 반도체 소자 표면에 붙이고 깎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죠. 소자가 작아질수록 성능은 표면 상태에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어요.”

문 박사는 지난해 반도체에서 불순물을 측정하는 기술의 국제표준을 만든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3월 물리·화학·재료 분야의 세계적 학술지인 ‘고체물리 재료과학 리뷰’ 편집위원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미국 유학 전에도 연구원으로 일했고,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때마침 표준과학연구원에서 표면과학 분야에 수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하겠다는 제의를 받은 것. 망설임 없이 귀국해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물체 표면의 원자를 관찰하는 연구실 3배 크기의 장비가 반쯤 완성된 상태에서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해 고스란히 잿더미가 돼버린 것이다
“꼬박 보름 동안 손으로 그을음을 닦아냈죠.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어요. 다행히 보험으로 3억원가량의 손실을 보상받고, 새로운 기계를 설치했죠.”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심기일전한 문 박사는 식당에서 줄을 서는 시간조차 아까워 도시락을 싸오면서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자다가도 일어나 꿈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메모해 놓곤 한다고.

“여러 분야 과학자가 모여 서로에 대해 칭찬과 질타를 하며 연구할 수 있는 한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죠. 덕분에 매일매일 과학자로서의 자부심을 느껴요.” 문 박사는 2003년부터 표면과학과 나노과학의 측정기술을 생명과학 분야에 적용하는 ‘나노·바이오 융합 사업’의 사령탑을 맡았다. 이 과제에 도전하면서 그가 내건 슬로건은 ‘노(no) 벤치마킹’이다. 기존 사례들을 보지 않아야 새로운 연구영역을 선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

“과학기술계에도 젊은이들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필요해요. 저 정도면 연구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공한 과학자가 10명만 나와도 이공계 기피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문 박사는 현재 연구원에서 원장보다 높은 최고액의 연봉을 받는다. 그의 희망대로 젊은이들이 과학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물론이죠. 역시 표면과학을 연구할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문 박사는 한국 과학계의 ‘표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문대원 박사는

1952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훈련도중 수류탄을 덮쳐 전우를 구한 소령의 얘기를 듣고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생각을 바꿔 물리학과 열역학 분야에 푹 빠져 지내다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손에서 물리책을 놓지 않아 물리학에서 물리학과 학생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4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현재까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떠나지 않고 있고 연구원을 마치 자신의 집처럼 여긴다.
1999년 호주국립대 전자재료과 방문연구원,
2001∼2002년 미국 일리노이대 재료학과 초청교수로도 활동했다.

▼ 청소년에게 한마디▼
청소년은 우리나라의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라. 그러면 어느새 자신이 성공한 과학자의 모델이 돼 있을 것이다.

2004년 6월 2일 임소형 기자(soh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