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인물2(13세~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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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창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승로

상행

치창

익성

경동

판도

충선

충선

충선

충선

충선

충선

충선

충천

충선

순질

순질

순질

순평

감천

감천

남평문씨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이시고  중시조때는 세도와 재력을 겸비한 문벌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조선의 초기는 불사이군을 지켜 출사하지 않거나 은거하신 분이 많았던 관계로, 문과 급제자는 52명으로
고려에 비해 벼슬 하신 분은 적으나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에는 많은 선조께서 참여하셨습니다.

고려사등의 역사 기록에는 있어도 족보에 없는 분을 인터넷 등에서 추출한 자료를 실었으며 의계처리 된 분들과 족보의 내용중 미비한 부분들은 시급히 수정하여야 할 일이기에 대종회 차원의 연구단체를 만들고 연구하여야할 것입니다.

아래의 목록에서 이름을 누르시면 내용을 볼 수 있으며 자세히☞를 누르면 추가 자료를 보실수 있습니다.

 

13세 판도판서

  계창(繼昌)?∼1522(중종 17)  號 : 養心亭

1504년(연산10) 4월 별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 거창현감·창원부사·김해부사·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제주목사·함양군수를 지내고, 풍기군수를 마지막으로 임지에서 별세함
1511년(중종 6) 5월 창원부사 김협이 민치(民治)에는 뛰어났으나 궁마(弓馬)를 알지 못하여
          외적 방어는 미흡하니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으로 교체하자는 논의가 있어 공은
          이자화(李自華)·신공제(申公濟)·이포(李苞)·구지신(具之愼)·조순(趙舜) 등과 물망에 올랐다.
          당상(堂上) 및 내지수령(內地守令)에 관계없이 널리 후보자를 선택하라는 왕의 특명이 있어
          당시 거창현감으로 있던 公은 당상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지만 무재가 있고 왜구를 물리친
          공이 있었기에, 성희안(成希顔)의 천거로 5등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창원부사로 발탁되었으나           생원으로 있을 때 권문(權門)에 아부하였고 또한 5등을 뛰어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임명된 지 한달 만에 교체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탄핵을 받았는데
          무재는 있으나 몸가짐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대간의 탄핵은 김해부사로 부임하였을 때와
1517년 12월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을 때도 탄핵을 밭았으며 그가 권문에 아부하였다고 지탄을 받은
          것은 조광조(趙光祖)가 실각할 때 선배 이항(李沆)이 경상좌도감사에서 대사헌으로 영전하니
          함양군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아첨에 찬 시를 지어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이항은 그뒤 사류(士類)를 모함하고 해치는 데 남은 힘을 다하였다는 비난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것이 주목되며, 이를 암시하는 기록은 실록의 졸거기사(卒去記事)에도 보인다.
1919년 양심정을 건립해 아버지 극충과 함께 모신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연려실기술 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慶尙道 居昌郡 新增 名宦 本朝

※<국조 문과 방목>
      문계창(文繼昌)    연산군(燕山君)10년(1504년), 별시(別試)

      가족사항 : 부:문극충(文克忠) 조부: 문승욱(文承郁)  증조부:문전(文典)

      이력및기타 :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 (郡守)

 

15세 감천군파

  경동(, 1457~1521)  본관:안동(). 자 흠지(). 호 창계().

1486년(성종17) 생원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1) 증광문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성균관 벼슬을 거쳐
1506년(중종1) 강원도 도사가 되었으며, 그뒤 춘추관편수관(
) 등을 지내고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산군수() 재임 중 1510년 삼포왜란() 때는 왜구를 토벌, 공을 세우고 사성()이 된 뒤 청풍군수() 등을 지냈다.
시문(
)에 뛰어났으며, 문집에 《창계집()》이 있다

  
13세 충선공파

  중용(中庸)   자 : 도보 (道甫)  충목왕 4년에 출생

37세인 우왕18년 5월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을 지내고 조선때 사임함
익점공 장남으로 헌납공파 파조로 승로 승선 두 아들을 둠 2004년 도천서원 입구에 설단함

 

13세 충선공파

  중성(中誠)  순질공(純質公) 고려 충정왕2년에 출생    

우왕11년 형 중용과 문과에 국자 진사에 급제 한림원 학사
이성계의 전횡에  봉직중이던 합문지후 간의대부를 사임하고  창왕때 병부상서 사임,
1405(태종5년)중실 중계와 함께 수 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사이군을 고집하고 사양별세 후 정헌대부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됨    순질공파 파조 되심

 

13세 충선공파

  중실(中實)  13세(의안공파파조) 의안공(毅安公)   의안공파 파조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부친의 불사이군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사임    참지문하시중에 추증
의안공 파조

 

의안공 13세

  중진(中晉)  13세(시중공파 파조) 시중공(侍中公)  

고려때 성균관 진사 시랑밀직부서 참지문하시중을 역임  단소: 1976 전북 옥구군 회현면 고사동에 설단 단소 옆에 영모재란  재택이 있다

 

13세 의안공

  중계(中啓)성숙공(成淑公)  호 : 창주()  시호 충정공()

고려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 ·도첨의()에 이르렀고 예부상서로 봉직하다 조선 개국 후 사임한 후  
     조선때 은거하여 1395(태조4년) 불렀으나 응하지 않음 자현대부 의정부좌찬성 추증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 앞에 설단하여 4월5일 제사를 모심

 

14세 충선공파

  승로(承魯)

경북 의성의 원으로 목화를 시배하여 땅이 적합함을 알고 목화를 재배하게 하여 의성을 전국 최대의 목화산지가 되게 함
의성목화 시배 비석 있슴

 

14세 순질공

  (和) 경혜공(景惠公) 자 양중(養中) 호:만은(晩隱) 순질공14세

1397 (태조6) 낭중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증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지냄  제전을 하사받고 자현대부 좌찬성 참지의정부사에 추증

 

14세 순질공

    (彬) ?∼1413(태종 13)평익공(平翼)

1400(정종2년) 대장군(大將軍)으로 재직할 때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고 이방원(李芳遠 : 후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지낸 후 1409년 풍해도 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14세 충선공파

  (萊)  정해공(靖惠公) 자: 자봉(子蓬) 호: 이곡(理谷)

이색 문하에서 설리학을 비롯해 천문 지리 산수 유려에 정통한 학자로 물레를 발명
태조4년 촤찬성이 되고 치사를 거쳐 장연백에 봉해짐 대광보국 승록대부 영의정에 추증

 

14세 충선공파

    (英) 양민공(襄敏公)   호: 해은(海隱)

목은 이색문하에서 수학 1393(태조2) 문과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제 직제학 역임
      베짜는 방법을 연구하여 만든 베를 문영베라 했는데 무명베로 변함
증 자헌대부 이조참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민공(襄敏公) 휘 영(英) 신도비명 병서
1980년 경신(庚申) 4월 상완(上완) .성균관장(成均館長) 박성수(朴性洙) 삼가 지음

정제회(기묘명현의 후손들의 친목회)의 벗 문재근(文宰根)이 반관(성균관)으로 나를 찾아와 그 선조 양민공 신도비명을 청하면서 중종조(中宗朝) 부제학 박윤경(朴閏卿)이 지은 묘갈명과 그 6대손 홍문관 수찬(修携) 선(瑄)이 쓴 사적기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은 묘비 음기(墓碑陰記) 등을 보이므로 자세히 살펴 보니 선생(先生)의 성은 문(文)이요 휘는 영(英)이요 자는 자화(子華)며 호는 해은(海隱)이다. 남평개국백 무성공 휘 다성이 시조이다. 이어 고려조 경절공 휘 익(翼)과 이부상서 경정공(敬靖公) 휘 공유(公裕)와 평장사 충숙공 휘 극겸(克謙)이 모두 중세의 현조다. 고조 휘는 윤각(允恪)이니 문과 문학박사요 증조 휘는 숙선(叔宣)이니 문과(文科)로 정순대부 보문각제학 증(贈) 문하시중 충정공(忠貞公)이시다. 조부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성학(聖學)을 배워 정도(正道)를 창명(懼明)하고 목화씨를 얻어와 모든 백성들이 옷을 입도록 하시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과 지서

연사를 역임하시고 강성군과 부민후를 받으셨으며 시호는 충선공이고 호는 삼우당이시다. 부친의 휘는 중실(中實)이니 문과에 급제하고, 간의대부 증(贈)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시호는 의안공(毅安公)이요 비(어머니)는 완산이씨(李氏)니 영동정(令同正) 경인(景仁)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우리 태조 7년 홍무(洪武) 31년 서기 1398년 무인년에 단성현 배양리에서 출생(出生)하시었는데,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므로 충선공이 유달리 사랑하셨다. 백형(伯兄) 휘 래(萊)와 함께 목은 이색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재덕이 다 함께 하니 사람들이 금옥(金玉) 같은 형제라 하였다. 형제(兄弟)가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아 형 래(萊)는 해사기(解絲機)를 만들고 선생은 직포기(織布機)를 제작(制作)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해사기 즉 물래를 만든 사람을 문래라 하고 베가 이루진 것을 문영포라 하여 관용어가 되었다.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 지제교에 이르고 외직(外職)으로 일선(一善:경북선산)군수와 도총부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당시에 종족(宗族)이 조정에 있는 자가 심히 많으므로 선생이 말하길 "조정에 사람이 가득참은 집안의 복이다"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선산 해평(善山海平)에 퇴거하여 산과 강을 거닐고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다 세종 때에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에 오르고 세조 6년 무진년 서기1460년에 돌아가시니 62세였다. 묘(墓)는 해평현 월포사동 간좌(艮坐)다.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양민(裵敏)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조부 충선공과 백형 정혜공과 같이 현재 광주동광영당(東光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군위 봉강서원 경현사(景賢祠)에 배향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일선김씨(一善金氏)니 전서 연경(延慶)의 따님이다. 마음씨가 곱고 깨끗하여 숙덕(淑德)을 함께 갖추었다. 묘는 쌍영으로 우편에 모셨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관(琯)은 임금이 내린 이름으로 아경(亞卿)이요 차남 전(琠)은 감사이다. 아경의 아들은 현(顯)이니 좌승지요 승지의 아들은 절(節)이니 생원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자인(自仁)이니 호는 나촌(懶촌)으로 진사 참봉이며 무예(以武藝)로서 훈련참군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다음은 이의(以義)요 다음은 이례(以禮)이며 다음은 이지(以智)로서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이신(以信)으로 문과 현감이다. 따님은 김옹(金옹)에게 시집갔으니 현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집안이어서 어진 이의 문하를 좇아 배웠으므로 도량이 넓은 인재로서 족히 나라를 건지고 도울만 하되 세태의 낌새를 알아차린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백의로 돌아갔으니, 덕이 많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여 그 뜻을 크게 펴보지 못하였다. 그 후예가 한미하여 각지로 흩어져 그 아름다운 일과 착한 행실을 모아서 전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가 순환(循環)함에 조상의 음덕이 다시 회복되어 이제는 많은 자손이 다시 창성하였다. 19대손 대식(大植)이 독특(篤特)한 효성으로 혼자 거액을 부담하여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한다 하니 윤강(倫綱)이 끊어지고 이로움을 구하는 지금 세상에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묘소와 위선(爲先) 밝힘을 위주(爲主)로 하는 성균관의 으뜸 자리에 있는 나로서 감탄함을 금할 수 없어 우(右)와 같이 간략히 적고 이이서 명(銘)한다.
특출한 탄생과 화려한 가문은 후배 학자에 어진 스승의 제자라
형과 함께 기계를 만들어   통용하는 말의 관형어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형과 공 자신과 함께   문씨의 세 어진 분이요,
벼슬을 버리고 자취 감춤은   오랫동안 숨어 사는 이치였다.
이에 꼭 닮은 손자가 있어서  영묘한 도리를 다시 밝히니
오랜 세월 후에 이 같이 나타나는  빛나는 그 이름을 그리워 한다.
내 그 정성에 감동되어 사실을 근거하여 명을 짓는다

 

14세 충선공파

    (동래파 파조)

진사를 지내시고 부산으로 처음 입향하시었다.

진사공(進士公) 휘 평 이하(以下) 5위조(五位祖)제단 비문
1972년 임자(壬子) 3월 청명절(淸明節) 16세손 동숙(東淑) 삼가 지음

펴노니 조선(祖先)은 백대(百代)라도 잊지 못하고 종족(宗族)은 백세(百世)라도 친목(親睦)함이 천륜(天倫)의 떳떳함이요 인도의 마땅함이 다. 우리 남평문씨의 시조 무성공 휘 다성은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요, 몇 세를 전하여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은 간의대부 평장사니 고려 때 12평장(平章)과 7봉군(封君)이 나시어 높은 벼슬과 큰 작위가 대대로 이어져 세상에서 벼슬한 집안이라 일컬으고 말엽에 와서 강성군 부민후 충선공의 제3자 의안공(毅安公)이 우리 파조(派祖)이다.
공(公)의 제4자로부터 이어서 5세가 모두 묘소가 없으니 극히 한심스러운 일이다. 보첩을 상고해 보면 5세 중에 제1세의 휘는 평(평)이니 사문에 수학하여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고, 제2세 맏이의 휘는 어동(어仝)이요 부사를 지냈고 부인은 용인이씨(李氏)니 후손이 곤양(昆陽)에 오래 살았다. 다음의 휘는 우원(遇元)이니 후손이 현재 동래(東萊)에 살고 있고, 제3세의 휘는 눌(訥)이니 급제를 하였고, 제4세의 휘는 여동(麗東)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제5세의 휘는 손(遜)이요 호가 둔재(遯齋)니 경학을 좋아하며 이름이 나고 지위가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고 다음산(多音山)에서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살다가 돌아가심에 모두가 칭송하고 우러러 사모하였다. 이상 5세의 무덤을 모두 실묘(失墓)하였으니 이는 상상컨대 여러 번 난 리를 겪은 나머지 자손들이 흩어져 버린 까닭이다. 또한 둔재공 이하 세계를 기록하면 장남 휘 창매(창梅)의 묘는 다맥산에 있고, 차남 창실(창實)의 묘는 곤양 남산에 있으며 후손들이 현재 하동 삼천에 살고 있고, 장손(長孫)의 휘는 귀문(貴汶)이요 통훈대부 군자 감정이니 묘는 굴피산에 있고, 장증손(長曾孫) 휘 계일(繼逸) 의 후손은 현재 남해 설천(雪川)에 살고 있고, 계증손(季曾孫) 휘 계현(繼賢) 의 후손은 현재 창녕 유어장명리(長明里)에 살고 있다.

각 파 자손들이 각처에 홑어져 있으며 매 년 초목이 떨어지는 시향 때를 만나면 몹시 구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생각건대 굴피산은 즉 둔재공의 직계 장손의 세세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제 5위 조고 제단(祖考祭壇)과 비(碑)를 세워서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드리게 함은 위로는 편히 조선(祖先)의 혼령이 오르내리게 하고 아래로는 전해가며 자손들의 감모(感慕)하는 정성을 갖게 하고자 5공제단비(五公祭壇碑)라 이름하였으니 후예들은 근실히 선세(先世)의 덕을 닦는데 더욱 힘쓸진저. 본사업 진행시에 갑정의 석만(石萬) 차용(且龍) 동수(東洙)와 유장의 동무(東武) 동현(東泫) 동준(東準) 종길(宗吉)이 실로 시종일관 힘과 정성을 다하였다. 나머지는 번거로워 기록치 않는다.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우리 집안이 각기 동서(東西)로 흩어져 있으나   조상을 위해 설치합에 함께 협력하네.
옛 무덤 받들어 절하며  마음은 삼가 두려워 하고  새 비갈에 명을 새겨 마음의 공 알리네
송백을 둘러 심으니 신(神)의 문(門) 통하였고   잔 올리고 향(香) 피우니  의 례가 밝더라.
진퇴(進退)하고 주선(周旋)하며   함께 제 드리는 날에  정령(精靈)이 이 곳에 강림하네.

 

14세 순평군파

    익성 (成) 1526~1584 ] 자: 숙재(叔栽) 호:옥동(玉洞) 합천출신   도연서원에 재향

조식() ·주세붕()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에게서 《대학》의 요지를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15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저작()을 지내고 내외직을 역임한 뒤,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도승지겸 직제학이 추증되고, 도연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옥동집》이 있다.

도연서원 [ ]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에 있는 서원.
지정번호 : 경남문화재자료 제37호  지정연도 : 1983년 7월 20일

                           남명원보[제25호/2002년 3월15일]에서 발췌함
玉洞 文益成은 중종 21년(1526), 성균생원 文翁을 부친으로 함안조씨 趙績의 딸을 모친으로 합천군 泉谷里에서 태어났다. 옥동의 직계 조상에 드러난 분으로는 고려조의 文克謙(忠肅公)이 있으며, 서울에서 합천 大冶村으로 이사한 분은 옥동의 6세조인 版圖判書 文瑾이었다. 합천이 문씨와 어떤 구체적 연관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나 같은 문극겸의 후손인 江城君 文益漸 역시 합천, 단성지역에 깊은 연고를 갖고 있었던 점과 南平文氏를 다르게 江城文氏로도 불렀던 점을 보면 합천이 문씨들의 故居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로부터 고려조의 귀족제적 문화전통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신분제적 요소는 조선조에서도 사회를 구획하는 중심에 있었고, 옥동이 살았던 시대 역시 강력한 신분제적 요소와 혈연적 유대가 사회구성의 중심 축으로 기능 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데는 혈연적 사회적 連帶網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옥동의 모친은 함안지역에서 강력한 在地的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함안조씨 漁溪 趙旅의 증손녀로 判決事를 지낸 趙績의 딸이었다. 이를 계기로 옥동의 가계는 강우지역 재지사족들로서 구성되던 혈연적 연대망 속에 위치되게 되었던 것이다. 姨母夫 全義 李公輔는 掌令 李昌胤의 아들로 남명선생의 姉兄 李公亮과는 종형제 사이였고, 옥동의 이종사촌인 李得은 黃江 李希顔의 사위로 雪壑 李大期 형제의 부친인 동시에 陶村 曺應仁의 장인이었다. 그리고 옥동은 황강의 형인 修撰 李希曾의 손서가 된다. 그리고 이종사촌 매부인 安胤祖는 후일 밀양지역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한 광주안씨 일파였으며 이공량의 손서인 大笑軒 趙宗道는 외가인 함안조씨로 어계의 5대손이었다.

  옥동은 대개의 사족가문의 교육과정에서 그러하듯이 家學으로 기초를 다졌다. 17세 때 비로소 愼齋 周世鵬의 문하에 나가 問學하였는데, 이는 그의 伯兄 梅竹窩 益亨이 尙州周氏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二樂堂 周怡, 和齋 姜仁壽 등과 친하게 지냈다. 24세에 司馬兩試(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 되던 해에 비로소 부친의 명으로 옥동을 위시한 삼형제(옥동에게는 梅竹窩 益亨, 大谷 益明의 두 형이 있었다.)가 山海亭으로 南冥先生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는데, 부친인 생원공이 일찍이 남명선생을 만났을 때 아들들을 부탁하였던 연고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보면 옥동 형제는 남명선생의 초기 제자 집단인 '山海亭 그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옥동 형제는 남명선생께 『禮記』와 『春秋』를 주로 배웠다. 이로부터 35세에 이르는 근 10년 동안 남명선생의 학문 規矩에 따라 南冥道學의 요체에 접근하였는데, 진사 徐天樞와 '出處'에 관해 토론하기도 하고, 眞樂堂 金就成과 道義를 논하기도 하였다. 특히 覺齋 河沆과는 취향이 서로 통하여 서로 격려하며 학문에 침잠하였으며, 新庵 李俊民(남명선생의 생질)과 도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깨끗한 잔에 물을 담아 밤 새워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는 수련도 하였는데 이는 옥동이 남명선생께 심취했던 정도를 알 수 있는 사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의 결과 心經, 近思錄, 詩, 易, 春秋 등의 대의를 一身에 체득하였고, 여러 벗들과 논의하는 내용을 보고 남명선생이 특히 '게으르지 않고 힘써 공부하는(力學)'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명종 16년(1561), 36세 되든 해에 식년 문과에서 병과 제2인으로 합격하여 宦路에 들어섰고, 이듬해에는 山天齋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敬義'의 요점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 벼슬로는 承文院正字, 承文院博士등을 거쳤는데, 학문의 蘊蓄을 게을리 하지 않아 守愚堂 崔永慶, 大笑軒 趙宗道 등과 도의에 대해 강론하며, 도학이 현실 행정과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明宗 21년(1566) 洪原縣監으로  文科重試에 합격하여 成均館 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東皐 李浚慶으로부터 정치행정의 요점을 듣고, 洛村 朴忠元, 梧陰 尹斗壽, 思庵 朴淳 등을 찾아보았다. 아마 이 시기에 당시 조정에 있던 뛰어난 학자관료들과 交遊한 것으로 보이는데 高峰 奇大升, 西厓 柳成龍, 開巖 金宇宏, 竹 吳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벼슬살이에 바쁜 가운데서도 자제들이나 사람을 보내어 남명선생께 問候하게 하였고, 東岡 金宇, 寒岡 鄭逑를 찾아 의리와 예의에 대해 논하였다.

  옥동은 벼슬살이에서 外職을 많이 맡았는데, 울산군수, 양양부사, 나주목사를 거쳤는데, 더러 誣陷을 받기도 했으나 치적이 높아, 병으로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肅川府使로 임명되어 부임한 후 公館에서 세상을 떴다(1584, 선조 17년).

  그런데 옥동의 행적에 관해서는 인식의 시각에 따라, 그 중요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초기의 문자에는 退溪先生이나 서애 류성룡 등과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음에도 후세에는 그 사실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과 來庵 鄭仁弘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옥동의 아들 雪溪 文勵, 醒狂 文 그리고 큰집의 從孫인 文弘道, 사위인 慕亭 裵大維 모두 내암의 문인으로 정치적 사회적 핍박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것을 고려해 보면, 옥동의 從遊에 강좌의 퇴계학파가 부각되는 것에는 다분히 정치적 고려가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옥동을 위시한 남평문씨 가문이 강우 남명학파의 큰 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옥동의 墓碣銘은 상주·문경지역에 거주하면서 江左의 대학자로 실학적 안목을 갖추고 있던 息山 李萬敷(안동권 유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의 원장을 맡았던 것으로도 유명함)가 撰하였다. 息山은 옥동의 從遊로 옥동이 나주목사를 마치고 돌아와 臥龍岩 위에 집을 짓고 낚시로 세월을 보내려할 때 지은 德溪의 賦와 覺齋의 詩를 근거로 吳健과 河沆을 부각하였는데, 특히 덕계 학문의 篤實함을 높이고, 이러한 덕계와 옥동이 도의의 벗이었음을 들어 그 從遊의 높음을 은근히 보여 주고 있을 뿐, 다른 교유를 심상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옥동 학문의 大略으로는 남명선생께 나아가 "수신의 요점(修身之要)"을 들었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다른 구차한 學問歷程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필자는 息山의 식견을 믿는 마음이 있다.                                    박병련(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본원 상임연구위원)

 

15세 충선공파

    치창(致昌) 감찰공

문종때 사헌부 감찰이 되고 1455년(단종3년) 단종의 화를 막으려다 세조7년 국(鞠)형을 받았으나 공신의 후예인 점을 참작해 구성으로 유배당함 문익점 선조의 기록을 정리하여 가전을 만들었다. 가전의 내용은 충선공파종회 홈페이지의 충선공&목화 메뉴의 가전에 있습니다.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회산공(悔山公) 휘 치창(致昌) 유허비명 병서
丁卯 백로절(白露節)
가수종당(嘉樹宗黨) 방(旁)후예 세훈(世勳) 삼가 지음

옛적 단종때의 참화를 어찌 차마 다 말하겠는가 마는 정 충과 절의를 보여준 선비는 수십 명 수백 명이었다.
혹 곤장 맞아
죽은 사람 혹은 목 베어 죽은 자 혹 멀리 도망친 자 혹은 유배된 자가 무수히 많으니 곤장에 죽은 자와 목베어 죽은 자는 사육신이라 일컬으고 높이 우러러 숭모하기를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밖에 내쫓기고 유배된 자는 혹 그 사실이 있어도 이름이 없고 그 이름은 있어도 역사에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자가 허다 하니 후세에 역사를 논한 사람들이 어찌 개탄하며 슬퍼하지 않으리오? 이는 역사를 기록한 자들의 책임이며 후세에 붓을 잡는 자가 숨은 것을 들추어 내지 못한 책임 또한 거기에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회산(悔山) 문공의 경우에 대하여 깊이 개탄함이 있었다.
공(公)의 휘는 치창(致昌)이오 자는 자신(自愼)이며 호는 회산이고 성은 문씨요 본관은 강성군의 선계대로 남평인데 남평백 무성공 휘 다성을 시조로 하였다. 중세에 오면서 세계(世系)가 확실치 않음이 있으므로 고려조에 상서좌복야이신 경절공 휘 익(翼)을 일세조로 하고, 3세 휘 극겸(克謙)은 문하평장사 판이부사 시호는 충숙(忠肅)이시며, 공의 아들 후식(侯軾)은
합문지후 전중내급사 태부경이니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4대를 지나서 휘 득준(得俊)은 판도판서로 강성백에 봉해지니 시호는 의안(穀安)이요 강성으로 인적(因籍)하고, 아들 휘 극검(克儉)은 판도판서 시호 정열(靖烈)이며, 아들 휘 윤각(允恪)은 삼사우사 문한학사시니 공의 5세 이상이다. 고조 숙선(叔宣)의 호는 청도(淸道)선생이니 좌정언 헌납 시호는 충정(忠貞)이요, 증조 익점(益漸)의 호는 삼우당이니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 강성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선(忠宣)이신데 나라에서 명하여 부조묘를 세웠고, 조부 중용(中庸)은 문과로 사간원헌납이시며, 아버지 승손(承孫)은 태종조에 호조좌랑이시었으며, 어머니는 숙인 밀양박씨(朴氏)로 아버지가 성검(成儉)이다.
건문 2년( 1400)은 곧 정종대왕 2년 경진 2월 8일에 공이 강성현 복문밖에 성리 세가에서 출생하심에 타고난 성품이 순후(醉厚)하고 도량이
청직(淸直)하였으며 지모(智謀)가 크고 깊었고 덕과 기량이 황중(況重)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불의(不義)를 보면 바로 잡지 않고는 그치지 않았으니 당시 친구들이 존경하고 무겁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 14세 되던 계해년 봄에 양촌(陽村) 선생 권근(權近)을 찾아가 글을 배워 존심행기(存心行己)의 중요함과 고인위기(古人爲己)의 학을 배워 가슴 깊숙히 잊지 않았다. 
18세 되던 정유년에 가례(加禮)를 행하고 함양 군수 윤 미정(美鼎)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20세되던 기 해년에는 향학으로서 성균관 제생으로 들어가 근면함으로 학문을 돈독히 하고 문사와 덕행이 여러 유생들중에서 우수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35세였던 세종 16년 갑인년에는 음보로 예문관 직강이 되고 병진년에는 강성에서 여주 별묘리로 이거하였는데, 지금 번매리이다. 공이 거기서 거(居)한 후 그 증조부 되신 충선공 삼우당 선생의 별묘(別廟)를 세우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전배를 드렸으므로 세상에서 동리 이름을 별묘로 부른 것이 이 때부터였는데 지금은 훼철되어 빈터만 있다.
52세였던 문종 신미년에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었고 경태 7년(1456) 병자년에는 정보(鄭保) 유계번(柳季蕃) 이증석(李曾碩) 구치명(具致明) 제공들과 더 불어 노산군(단종)을 구하려 다가 화를 입고 국형(鞠刑)에 이름에 충선공의 후예라 하여 용서를 받고 귀성(龜城)으로 유배되어 3년만에 돌아왔다.
그 후 신사년에는 삼종형 사직(司直) 휘 치수(致粹)와 더불어 한성으 로부터 고향 마을인 강성을 찾아가 증조부 충선공의 부조묘에 참 배하고 주위를 돌며 은행나무와 시초에 심었던 목화밭과 효자정비를 둘러보고
슬픈 감회에 눈물이 내려 옷깃을 적시며 시(詩)를 지었으니 
국운(盛時)은 편안 하지 못한데 남기신 유풍을 우러르며 사물을 따르도다.
동떨어진 벽지에서 조사 의 공을 기억한다(以盛時傭憬慕遣風圈事遊蒸記祖功)"
라는 구절은 조상을 추
한 것이었다.

세조 9년( 1464년)에는 증조부 삼우당 선생의 사적이 오래 멀리 갈수록 실전될까 걱정되었다. 이에 부조께서 전하신 말씀들과 가전(家傳)의 문자(文字)에서 참고하고 아울러서 사초(史抄)와 제가(諸家)들이 문헌(文獻)을 지으신 것들을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로 한 권을 만들어서 후세에 전하였으니 그 공을 어디에 비유하리오? 수백년 내려온 지금에 삼우당 선생의 도학과 공덕을 칭송하게 된 것은 감찰 회산공의 저술한 바가 아니면 어떠했겠는가?

슬프다. 공(公)은 증조부 충선공께 성을 다하여 그 공을 우리 자손 만대에 전하신 분이시며 충의에 격(激)한 마음으로 다시 화를 입게 되었으니 실지로 명교(名敎)를 백세(百世) 후에까지 세운 바가 있으신 분이다. 그러나 공(公)과 같은 분은 단종조에 충의의 선비로 그 사실도 이름이 있는데 역사에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 것은 어찌 후인들의 애통함이 아니겠는가?
공이 돌아가신 때는 성화 성종 5년(1474)이었는데 향년은 75세였고 장지는 고향 강성현 북문 밖 석리의 산경좌원(山庚坐原)에 장사지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겸(謙)은 포천 현감이고, 다음 상효(尙孝)이니 만호이며,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별묘리는 지금 번매리인데 후손이 세거(世居)하며 공의 유허의 감회를 차마 잊을
수 없어 장차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우기 위해 후손 병학(炳學)군으로 하여금 방손 원근(愿根) 씨가 지은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請)하므로 의리상으로 보아 감히 사양치 못하여 글을 짓고 삼가 명(銘)한다.  (중용-승선-致昌)

 

16세 충선공파

   경숙공(敬肅公)  상행(尙行)

일찍 성균생원에 올라 권극중  방하에서 급제한후 용담현령과 예조참의 
능주에 처음으로 입향하시고 묘소는 능주 춘양면 진곡

예조참의 증참지의정부사 휘 상행(尙行) 묘갈명 병서
무진(戊辰) 10월 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 지음  18대손 병식(丙植) 삼가 세움

남평문씨는 고려의 무성공 다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몇 대를 지나 충숙공 극겸(克謙)이 있고 또 몇 대(代)를 지나 삼우당 부민후 익점(益漸)에 이르러 고려의 시대에 크게 유명하였다. 부민후의 현손에 상행(尙行)이란 분이 있으니 호(號)가 월곡(月谷)으로 바로 공(公)이다. 증조(曾祖)는 중성(中誠)이니 증(贈)병조판서요 시호는 순질(純質)이며, 조부는 화(和)니 호(號) 만은(晩隱)으로 증지의정부사요 시호는 경혜(景惠)이다. 아버지는 염(瑞)이니 이씨조선(李氏朝鮮) 태종(太宗) 때 정읍현감(井邑燃監)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증직받았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칠원윤씨(漆原尹氏)니 사간원정언(司談院正言) 신필의 딸이다.

공(公)은 정종(定宗) 때에 단성(丹城)의 세거(世居)찬 집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함이 남달라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懲)와 종유(從遊)하여 경사(經史)를 널리 통(通)하고 지조(志操)와 행검(行儉)이 깨끗하고 발랐다. 일찍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올라 책문(策問)에 응답(應答)한 치도책(治道策)이 제15등이 되었으니 권극중(權克中)의 방하(榜下)에서 급제를 하였다. 용담(龍潭)현령을 지내고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태종 때 능주(綾州)에 처음으로 살으셨고, 세상을 버리시자 읍소재지의 남쪽 춘양면(春陽面) 진곡(眞谷)의 남쪽 장등 건좌원(乾坐原)에 모셨다. 경종 때 참지의정부사(恭知議政府事) 겸경연춘추관사를 증직받고 시호를 경숙(敬肅)이라 했는데 자손이 그대로 능주(綾州)에서 살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의(大義)의 딸이다. 공(公)과 함께 묻히었다.
계배(繼配)는 정부인(貞夫人) 함양노씨(咸陽慮氏)니 공(公) 묘(墓)의 외청용등(外靑龍雌)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목(糧)은 장흥고령(長興庫令)이요 온(蘿)은 영해부사(寧海 府使)요 옹(雍)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다. 목의 아들은 자수(自修) 자달(自達)이요 온(蘿)의 아들은 창(昌)이요 옹(雍)의 아들은 빈(梅) 휘(輝)다. 손자는 윤(潤) 환(換) 한, 숙(淑) 준(潛) 문, 견(堅) 긴(緊) 현(賢) 구연(九撚) 구택(九澤) 구해(九海) 구문(九汝) 구심(九潛) 철동(哲全)이다. 공(公)의 묘(墓)에 그 전 비석이 있었는데 해가 오래 되어 닳아져 읽을 수가 없으므로 후손(後孫) 용식(容植) 동일(東日) 재국(在國) 제춘(濟梅) 등이 장차 다시 만들어 세우고자 장(狀)을 갖추어 나에게 명(銘)을 지어 달라 청(請)했다. 명(銘)하노니

부민후(富民候)의 혜택이여만성(萬姓)에게 옷을 입혔다.
공(公)은 이 집에서 태어나그 문행(文行) 참으로 아름다웠도다.
마치 아침 해가 솟아 오르듯운로(벼슬길)를 마음껏 달렸어라.
구비(舊碑)가 읽기 어려워 돌을 다시 깎았네.
나의 명(銘)을 새겨 두어 먼 후일(後日)에 보여 주노라

 

17세 감천군파

    (瑾) 자: 사휘(士輝) 호: 매계(梅溪)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

1495년(연산군1) 식년문과에 병과급제 검열되고 춘추관 기사관 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정사가 청렴하고 정사가 간결하여 선정을 베풀고 1508 금산군수로 상을 받음 
1516 대사간 동부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로 중종의 신임을 받아 경상도 관찰사로 전직 
1519 기묘사화때 조광조의 처형을 통박하다가 파직되고
1521참판에 기용되었으나 삭직됨 이조판서 추증  용궁의 기천서원에 제향

≪新增東國輿地勝覽 제9권 京畿 水原都護府 新增 名宦 本朝≫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9권 慶尙道 金山郡 新增 名宦 本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