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가문의 인물(고대 시조~15세, 역사인물)

우리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이시고  중시조때에 명문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의 초기는 불사이군을 지켜 출사하지 않거나 은거하신 분이 많았으며 태종때 가학선조의 역성혁명 실패로 숨어살아야 했기에 문과 급제하신 분은 52명으로  위축되었습니다
역사기록에는 있으나 족보에는 없는 분들을 역사인물로 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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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시조 문다성(多省)   무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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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1세

중시조 익(翼)  경절공

인위仁渭

2세

공인

공원

가관

공유(公裕) 경정공

대大

3세

     

극겸(克謙) 충숙공

장필章弼

4세

     

후식侯軾(충렬공)

 유필惟弼( 효혜공孝惠公)

정正

5세

 

 

 

정挺

(言正)   정민공 貞敏公)

한경漢卿

6세

 

 

 

득준(의안공)

득걸

양부

윤실(允實)

인위

황晃

7세

     

극검

원길

영희

구球

녹천(綠天)

 

8세

     

윤각

재도

신愼

경(璟)

근(瑾)간혜공

 

9세

     

숙선(충정공)

구龜

창우

달한(達漢)

세봉

세린

 

10세

     

익겸

익점(益漸)
(충선공, 강성군, 부민후)

익하

한영

공제

계종

효종孝宗

진軫

전典

 

11세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가학  

승서

승조

치致

민敏

서敍

여충

여령

승도

승리

승욱承郁

장수

 

12세

        승로 승손    

한영

신보

송수

 

 

 

 

극충

극정

유지

 
13세                     숙기                   계창    
14세                                                           익성  

시조 무성공(武成公) 諱 다성(多省)

무성공전

제단비명

탄강년대

벽상공산설명

화벌보서문

字는 명원(明遠)   號 : 삼광(三光)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으로 봉군 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시고 98세에 별세하심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1993년 설단하여  매년 3월20일 전국 일가들이 단제를 모시고 있으며 장연서원에 배향함

문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등의 문헌에 남평, 단성, 영산, 보령, 감천, 정선, 결성, 개령, 강릉 등을 156본으로 기록되어 있고 2000년 인구조사에서 40여개의 본이 조사되었습니다
정선을 제외한 본관은 모두가 남평에서 분적되어 시조가 같은 단일본입니다.
그러나 정선문씨(2000년 인구조사시 1000명 미만)는 남평문씨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된 남평문씨 시조 출생에 대한 전설은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대종회에서는 472년(신라자비왕 15년) 탄생은 역시 기록과 맞지 않아 신라말기로 정정하였다

무성공 전(武成公 傳)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1732 영조3년) 서두의 내용

널리 전해오는 옛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購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博)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으로 받으셨다 

                                 김광순 교수의 <시조신화의 양상에 대한 연구>란 논문에, 
시조 무성공의 오색구름은 수신(水神)의 영향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이름이요,
수신(水神)이 석함을 봉정(奉呈)하고 그 안에서 동자가 나오는 경이적인 탄생은 시조신화의 신성성(神聖性)과 생명(生命)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암(文巖) 옆의 못을 장자지(長者池)라 이름하였고, 공을 모신 서원도 장연(長淵)이라 하였음은 예삿일이 아니므로 시조께서 태어난 문바위(文巖)는 성스러운 바위(聖巖)이요 장자지(長者池)는 성지(聖池)인 것이다.

남평문공 다성 제단비명

1993년 季夏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운운(많고 많은)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
위엄이 밝게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
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 족보를 만듬)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 : 여럿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밑 지석강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 (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
자손은 번창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진저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

 

시조 탄강 연대 고찰

보명

년도

탄강 년대 기록 비교

신해보 1731

발문에 시조께서 고려말~신라초에 남평에서 탄간하셨으니 남평을 본으로 삼았으며
고려초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심을 말하였다

병진보 1736

신해보와 같음(고려말 ~ 신라초)

무진신보 1808

시조 무성공의 탄강을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처음 기록함

갑자보 1824

무진신보의 자비왕 탄강설의 잘못 바로 잡음(고려말~ 신라초)

정해보 1827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음 (신라말~고려초)

병자보 1846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음 (신라말~고려초)

경오보 1851

무진신보와 같이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기록함
다음 족보인 임술보까지 113년간 유지되어 여러 문헌에 잘못 소개되게 하였다.

임술보 1983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이(신라말~고려초) 탄강년대를 로 바로잡음
자비왕 15년을 탄강년대로 할 수 없는 근거로서는
1. 474년은 남평을 백제 개로왕이 통치했으니 신라 자비왕의 연호는 맞지 않으며,
   벼슬은 180년 후의 신라(新羅) 진덕여왕이 베푼 중시(中侍)를 지냈다고 기록함
2. 시조~ 중시조(경절공)는 600여년이 됨에도 12대로 기록하여 한 세대가 50년이 됨
3. 946년 왕건이 고려건국 공신들에게 내렸던 삼한벽상공신을 474년에 미리 받음

을해보 1995

신해보의 내용 같이(신라말~고려초) 탄강년대를 로 바로잡음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4쪽의 내용
시조의 생졸연대와 벼슬길에 이르신 사적과 배위와 묘소는 일찍이 문헌의 증거가 없으므로 기록치 못하였으니
후에 그 기록이 없는 것은 대개는 이와같은 것이나 근자에 상고한즉 각처에 간혹 초한 족보와 인출한 족보가 있는데 동경사를 상고한 즉 시조가 신라 자비왕(20대왕) 15년(474) 미동부리현에 나시어서 벼슬이 삼광상중대부(신라관직) 상구국 대아손 대원수 남평개국백이며 시호는 무성이라고 하고 또 부인 김씨라하였는데 정묘년 가을 경주에 가서 동경사를 상고한즉 처음부터 실린 것이 없으니 위에서 말한 것은 어디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 알수없다
.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가.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삼한벽상공신으로 부른다.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①홍유(洪儒:殷悅 의성)   ②배현경(裵玄慶 성산)    ③ 유금필(庾금弼무송)    ④복지겸(卜智謙 목주)
⑤ 신숭겸(申崇謙 평산)  ⑥김선필(金宣弓 선산)   ⑦이총언(李총言 벽진)    ⑧김선평(金宣平 안동)
⑨권행(權幸 안동)        10.장정필(張貞弼 인동)    11.윤신달(尹莘達 파평)   12최준옹(崔俊邕 동주)
⑬문다성(文多省 남평)  ⑭이능희(李能希 청주)    ⑮이도(李棹  김의)         16.허선문(許宣文 양천)
17.구존유(具存裕 능성) 18.원극유(元克猷 원주)   19.금용식(琴容式 봉화)   20.김훤술(金萱術 해평)
21.한란(韓蘭 청주)        22.강여청(姜餘淸  냉천)  23.손긍훈(孫兢訓 밀양)   24.방계홍(房係弘남양)
25.나총례(羅聰禮 금성)  26.이희목(李希穆 부평)   27.염형명(廉邢明서원-파주) 28.최필달(崔必達 강릉)
29.김홍술(金弘述 )        30. 김락(金樂) 등이다

나.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였다

 

 화벌보(華閥譜) 고려지 서문 변역문

우리 동방 국사에 이르기를 신라가 망할 때 많은 영웅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궁예는 동주(철원)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고 견훤은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여 남북이 서로 다투고 침범했다.
이때 하늘이 어진 임금을 내리시어 고려를 세우고 지혜로운 신하와 사나운 장수들이 줄을 이어 하늘을 우러러 만세를 부르니 태종 왕건께서 나라를 세울 때 충성을 다하야 훈공을 세운 여러 신하들을 벽상에 기록하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내리게 했든 것이 475년에 이르러 하늘의 뜻이 다하여 왕씨가 망한후 26년 세종조 정미년에 여조에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받은 신하들의 방명을수록하여 화벌보라 이름하는 한 책자를 만들었다
그후 성종 신묘년에 영상 김질이 이를 다시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으나 혹은 어느 선비의 집에 숨겨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들었다는 사람이 간혹있었으나 나같이 한미한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500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뒤 경인 병란때 서울에 사는 김민석씨가 고향을 떠나 남으로 피난을 오든중 우연이 길거리에서 만나 소지한 행장에 여사 화벌보가 있었다
내가 이것을 얻어 읽어 보매 세상에도 희귀한 것으로 천고의 기적이라 할수있다.
이 사적을 일일이 베껴서 똑같이 실고 마침내 그와 또 같은 수사본을 이룩하니 여기 43가(家)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며 내 뜻을 전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세재 갑오중양절 대흥 이재하 근지 

< 화벌보 >
나라를 세운 공신들은   높은 벼슬로 영화누리네    충성된 훈업은   대대로 녹을 이어받고
벼슬을 주어  가문을 이어가네    관직을수록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모아     세보를 만들었네

< 벽상공신 >
한자 은패에 공훈을 세겼도다   군후의 대례복에 통천관을 쓰고  
대궐안 임금님 거실에 그 이름 나란히 걸었네

< 삼중대광 >
문반에선 중신이 되어   모든정치 보살피고   무반에선 장군되어   나라 사직 받들었네 
                군후의 봉함 받으니   높은 벼슬 더욱 영광일세

 

중시조(1세) 경절공(敬節公) (翼)

시조에서 중시조까지는 해석상 모순이 있어 신해보(1731년 장흥 월천서원 발간)에서
경절공을 중시조로 모시고 1세로 하였다.   
고려문종때 과거에 급제해 왕에게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가 불교인 상황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헌종1년(1095) 근신으로 보제사 상량준비문 받음
숙종3년(1098) 찬선대부, 급사중(종4품)을 거쳐 1099년 3월(숙종4년) 요나라에 원자 책봉 임무 완수후  좌복야 승진 1102년 직문하성사로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1103(숙종8년) 우산기 상시(정삼품)로 승진하고 
예종 3년(1108)
병부시랑지어사대사 충상장군 병부상사  1112(예종7년) 참지정사(종2품)
강종때  평장사 상주국 영동정의 추증과 풍산군으로 봉함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중흥조로  네분 아드님(공인,공원,가관,공유)도 모두 뛰어나시었다.
.

묘소를 실전하여 설단을 논의하고 있는데 고간원과 장연서원에서 서로 모시겠다 하여  조정중에 있습니다

 

2世

      충의공(忠毅公) 공인(公仁) 초휘(初諱) : 공미(公美)

문과 급제후 직사관이 되고 예종10년(1115) 호부시랑(戶部侍郞)재직시 사은사겸 진봉부사로
      宋에 다녀온 후 전중소감 우부승선겸 태자 우찬선이 되고 
1122년(예종17) 예빈소경  추밀원(樞密院) 지주사를 거쳐 1123(인종원년) 추밀원 부사로 봉직
1127(인종5년)최사전과 이자겸의 모함으로 충주로 유배당했으나 이자겸이 몰락한 후 이부상서,
1129(인종7년)
지문하성사(종2품) 예부상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평장사 및 서경 유수
1130(인종8년) 판상서형부사
인종11년 판상서 병부사 감수국사에 봉직함
묘청의 서경천도설에 찬성해 묘청을 추천 하였는데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일시 좌천되었으나 상주국 남평현 개국백(佰)에 식읍(食邑) 3천호와 식실봉 3백호를 받음
인종15년(1137) 73세로 별세하니 왕은  3일간 조정을  닫고 장례를 돌보게 함 부인은 해주최씨

 

2世

정경공(貞敬公) 공원(公元 ) 일명 공윤(公允)

고려 선종1년(1084)출생.
음보로 기용되고 예종때 문과 급제해 승진을 계속하여 인종때 우정언ㆍ지제고에 발탁되시어

   전중시어사  이주연과 함께 상소해 시정의 폐해를 바로 잡고  
1130(인종 8)년 중시어사(정6품)  
1135년(인종 13)랑중(郞中)으로 봉직시 금나라에 만수절 축하사절로 다녀온 후 
1148년(의종 2) 어사대부 지추밀원사 판삼사사 됨
1150년(의종 4) 지공거 참지정사, 판형부사 중서시랑 평장사 판이부사를 거쳐 수국사가 됨
1152년(의종 6) 서경유수
1156년(의종10) 서경유수를 거처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하고 별세하시니 의종 묘정에 모심
왕이 공의 저택을 진사400근에  구입해 순어사로 삼은 기록은 벌족으로 경제력을 증명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공의 묘지명(위쪽그림누르면 크게보임)에는 선세가 현달하였고 조부와 증조의 휘자가 마모되었으나 명망이 세상에 저명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묘지석의 판독한 결과

석함내부의 문양(모란,주작 청룡)

국보 115호
청자상감당초문완
(靑磁象嵌唐草文盌)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크기 : 높이 6.05㎝, 입지름 16.8㎝, 밑지름 4.4㎝.
고려시대 청자대접으로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상감청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1159년(의종 13)에 별세하신 3세 공유선조님의
의 묘지(墓誌:묘앞에 묻었던 묘의 설명문)와 석관과
함께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에서 발굴되었다

굽 부분은 좁고 아가리[口緣部(구연부)]가 크게 벌어진 형태인데, 그릇 안쪽 바닥 한가운데에 큰 단판(單瓣) 국화를 상감하고, 그 둘레를 유려한 보상화무늬띠(덩굴무늬띠)로 백상감하였다. 아가리 부분에는 안팎 모두에 간격을 둔 2줄의 흰색선을 나란히 두르고 그 안에 흰색의 풀무늬띠[草文帶(초문대)]를 구사하였으며, 바깥쪽의 굽 부위에는 앙련(仰蓮)을 음각하고, 중심부 5곳에는 국화를 흑백으로 상감하여 변화있는 조화를 꾀하고 있다.

비교적 정선된 바탕흙[胎土(태토)]과 함께 그릇 안쪽의 보상당초무늬가 단아한 비색으로 우러나와 역상감(易象嵌)수법이 한층 돋보인다. 12세기 중기 고려청자 상감 발달의 실태와 수준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경공 문공원 묘지명 (墓誌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수국사(修國史) 정경공(貞敬公)이 이미 돌아가신 지 3년 후의 일이다. 그 외손 국학(國學) 양정당(養正堂) 조영심(趙永心) 등이 공(公)의 행장(行狀)을 나한테 보이며 말하길 "우리 외조부님 생전에 자네를 대접함이 자못 후(厚)하였다. 이제 그 분을 장사함에 마땅히 자네의 명(銘)을 얻어 소장하려고 하네."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공(公)이 세상의 새 중에 봉(鳳)이 있음 같고 짐승 중에 기린(麟)이 있음 같아서, 비록 하찮은 사람들도 모두 추존할 줄 알거늘 하물며 나는 공의 문하(門下)에 수학 한 지 오래되었는데 감히 명(銘)을 받들지 않으랴."하였다

공(公)은 남평군인(南平郡人)이니 문(文)씨가 그 성(姓)이요 공원(公元)이 그 이름이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휘 익(翼)의 아들이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행초맹중랑장(行抄猛中郎將) ○의 손자요 증조는 휘○ 벼슬이 ○○이었는데 그 명망이 높아 세상에 알려졌다. 모친 유(柳)씨는 현덕(賢德)이 있어 항상 공(公)을 옳은 법도로 가르쳤으니 옛말에 이른바 '능히 효자(孝子)로 하여금 충신을 만든다'함을 이뤄낸 것이다.

공(公)이 처음 음직으로 예종때에 관직을 받았으나, 일없이 지낸 10년 후인 갑오에 진사(進士)에 올랐다. 이때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공(公)이 가히 크게 쓸 수 있음을 알고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詰)에 발탁하였다. 이후로 역임한 관직이 모두 난대(문하성)와 봉각(鳳閣:중앙관서를 말함)이었다.

공(公)은 인품이 밝고 평탄하여 표리(表裏)가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사람을 대함에 성실하고 공검(恭儉)○○○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절(大節)에 임하고 대의(大議)를 결단할 때는○○○○ 비록 죽음이 목전에 있어도 동요됨이 없었으니, 상감이 이 때문에 공(公)을 중(重)히 여겼다.

○○○○○군신(君臣)이 서로 만나기 가히○○○○ 공(公)이 상부(相府)에 들지 못하였다.한번 찰방사(索訪使)가 되고 두 번 안부(안部)가 되고 세 번 ○통(統)이 되었으니 역임한 바에 모두 치적이 있었다. 경오년에 과거 시험을 맡았는데, 문생(門生)들이 모두 당시의 어질고 뛰어난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公)의 명감(明鑑)을 알게 되었다.

공이 중추원사(中權院使) 이의(李이)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인(夫人)을 삼았는데, 아들은 없고 딸만 넷을 낳았다. 장녀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숙문(崔淑問)에 출가하였고, 이녀는 도염서령(都染署令) 박황(朴環)에 출가하였고, 삼녀는 시대관서령(試大官署令) 조○언(趙○彦)에 출가하였고 사녀는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 최언방(崔彦方)에 출가하였다.

공(公)이 공(功)을 이루고 늙어 물러감을 아뢰어서 녹야(綠野)의 풍취를 추상 하였으며, 향수 73세되는 병자(丙子) 12월에 감기로 돌아가셨다. 부고를 알리자 주상(主上)이 크게 슬퍼하시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유사(有司)에게 그 장사를 명(命)하여 조양산(朝陽山) 동편 기슭에 장지를 정하였다가 齡勳() 5월 13일에 오관산(五冠山) 천태사(天금寺) 부근으로 이장하였다. 슬프다. 선비가 분장(文章)과 공업(功業)으로 역대의 세 왕조(王朝)에 벼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집에서 돌아가셨다. 이는 예전에도 일직 듣기 어려웠거니와 곧은 그 영광을 얻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명(銘)하기를
망망한 조화(造化)속에 옛날과 지금이 바뀌어 
백세(百世) 후에는 능곡(陵谷)이 변천되어도
오직 공(公)의 영명(令名)은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으리
명(銘)을 무덤 속에 넣으니 덕(德)에 부끄러움 없다오.


문림랑 시대학박사(文林郎 試大學博士) 직사관(直史館) 윤○신(尹○信) 

 

2世

가관(可觀)  대선사공(大禪師公)  

고려때는  왕가나 명문가의 자손들이 불문에 들었는데 조계종 대선사로 공유의 주각에 기록 되어 있다

 

 2세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    자: 항적(亢迪)  후에 순수(순壽)

남평에서 출생  15세에 남성시에 급제       
1122년 합문지후 제수됨
       장인韓安仁의 죄에 권신들이 모함으로 연루되어 양산에 유배되어  숙정후 복직됨
1129(인종7년) 금나라 생신축하차 파견
1132년 시어사 시서경 집무중 묘청을 탄핵하다 좌천되고 
         묘청 일당이 지은 대궐에 액자를 쓰라는 왕명을 거역하였으나   묘청의난 이후에 충의를 알게됨
1156년 검교 태자 태보 중대부 지문하성사(中大夫知門下省事)를 제수받고 
          남평개국자에 식읍 3백호를 받음
서예가로 서풍은 당과 송나라에 미치고 해서(楷書)전성기 인데도  체양(북송4대가) 서풍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개성을 살린 행서 필체가 묘향산 보현사 창사 비문(김부식 지음)은 현재도 남아있다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22쪽)


묘향산 보현사 창사비문 탁본

보현사

창사

비문

공유

글씨

고려국 검교태자태보  중대부지문하성사 형부상서치사(刑部尙書致仕) 문공유 묘지명

검교태자태보 승무랑(承務郎) 행시상서공부시랑(行試尙書工部侍郎) 지제고 사자금어대 사위(史偉) 지음

공의 휘는 공유(公裕)인데 뒤에 고수(顧壽)라 개명하였고, 자는 항적(克適)이며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나이 15세에 정당문학(正堂文學) 정문(鄭文)이 주재하는 남성시(南省試 진사시험 )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25세에 학사(學士) 오연총 임언 등의 밑에서 우등으로 급제하였으며, 29세에는 급전녹사(給田錄事)가 되었다. 다음해 장릉(長陵)의 의신(儀寢인종이 태자때 궐내에 함께)에 있으면서 첨사부록사(畯事府錄事)로서 논어 맹자 상서(尙書)를 진독(進讀)하고 서법(書法)도 함께 올렸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인년(예종17년 1122)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합문지후(閣門福候)에 제수되었으나 때마침 권신(權臣)이 집권하여 충신(忠臣) 의사(義士)들이 모두 귀양가게 되는 바람에 공도 장인의 죄에 연루되어 양주(梁州)로 귀양갔다가 가덕도(加德島)로 이배되었다. 병오년에 이르러 권신을 추방시킬 때 상감이 공의 정직함을 알았다. 무신년 봄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지제고(知制誥)를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는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이 되었다. 기유년 겨울에는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제수되었으나 임기가 차기 전 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제수받고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으로 충원되었다.

임자년 겨울, 시어사(侍御史)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이 요망한 말로서 임금을 현혹시키려 하자 동료인 이인실(李仁實)과 함께 극력 간(諫)했던 바, 이로 인해 상감의 뜻을 거슬려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서경(西京)의 임원역(林原驛)에 새 궁궐을 세워 태화궁(太和宮)이라 이름하였는데, 상감이 공을 불러 궁궐 액호를 쓰라고 명하자 공이 거절하면서 아뢰길 "신이 전일에 묘청등을 마땅히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는데 지금 그의 말로 창립한 신(新)궁궐에 액호를 쓴다면, 이는 한 마음으로 상감을 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감께서 장차 신궁(新富)에 납시려고 먼저 서경에 가시자, 묘청이 그 무리들과 함께 제 말을 신령스럽게 하고자 떡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속에다 기름을 넣어 대동강(大同江)바닥에 담가두었다가 거기에서 기름이 새어나와 수면에 떠오르자, 이를 상서로움이라 하였다. 이윽고 상감이 신궁에 거동하시니 그 남쪽 산 위에 등불을 설치해 두고는, 수성(壽星)이 상서를 바쳐 신궐을 가까이 포용하는 뜻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부근에서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근방의 우마가 떼죽음을 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목이 삼백이십 그루나 뽑혔으며, 어마(御馬) 두 마리가 죽었다. 상감이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급히 서쪽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환궁하시었다 얼마 뒤 서경에서 묘청의 반란이 일어난 연후에야 상감이 공의 충의(忠義)를 아시고 호부낭중(戶部郎中) 동궁시독사(東富侍讀事) 지제고(知制詰)에 발탁하였다.

병진년 겨울에 조정에서 청주부사(淸州副使)로 있는 공의 임기가 다 차기도 전에 예빈소경(禮賓小卿)에 임명하여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로 삼았고, 임기가 끝나자 예빈소경(禮賓小卿)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가 되었다. 경신년에 비서소감(秘書少監)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에 제수되었다. 신유년에는 병부시랑(兵部侍郎)에 제수되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였다. 
2년후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 형부시랑(刑部侍郎)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가 되었다가 상서좌승(尙書左丞)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되었다. 정묘년에는 국자감 대사성 (國子監大司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도성(知都省)이 되었고, 무진년 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고, 기사년 겨울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수문전학사 지제고(修文嚴學士 知制詰)가 되었다.

천덕(天德) 3년 여름에 서경지유(西京知留)가 된 지 겨우 여섯달 만에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가 다시 병부(兵部)로 개임(改任)되고 권삼사사(權三司使)가 되었다. 계유년 정월에 소명(召命)을 받아 금상(今上)을 태자(太子)로 세우게 되자 임금이 공에겐 특별히 태자부첨사(太子府詹事)를 제수하여 봉책(封冊)하는 일을 관장케 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마침내 형부상서(刑部尙書)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지제고(知制詰)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제수하며, 예(例)에 따라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로 삼았다. 을해년 여름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權密院事)가 제수되었고, 그 나머지 관직은 모두 예전대로였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병자년 여름에는 지금의 관직이 제수되었던 것이다.

공은 풍채(風采)가 당당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서(隸書)를 잘썼다. 병신년에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보행(補行)할 사람을 선택할 때 공이 사무직으로 뽑히어 수행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사신으로 금(金)나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儀射) 지추밀원사(知權密院事) 남평개국자(南平開國子: 공,후,백,자,남의 5등급중 4등급)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받고 금나라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었다 일찍이 동북서북(東北西北) 양계(兩界)의 안찰병마사(接案兵馬使) 도통병마사(都統兵馬使)를 지냈다.

공의 선세(先世)는 문무관으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하였고, 조부와 증조 고조는 모두 가첩(家牒)에 실려 있음으로 여기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부친 익(翼)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였는데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공인(公仁)이요 차남은 공원(公元)으로 모두 총재(?宰:이부상서 )가 되었고, 다음 가관(可觀)은 조계종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공이 그 막내이다.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계씨(季氏)가 서로 차례로 정승에 올라 세상에서는 공의 집을 재상집이라 하여 심히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추밀원(樞密院)에 있을 때 천문(天文)이 변동이 있자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추부(樞府)에 변고가 있겠다. "하였는데 공이 숙직하다가 갑자기 수족의 병에 걸려 드디어 돌아가시게 되어서 세상에서 더 크게 쓰이지 못함을 개탄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극겸(克謙)은 지금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7품 관직에 있고 다음 극순(克純) 극이(克易)는 모두 음직으로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 딸 셋이 있는데 큰사위 정극(鄭極)은 지금 내시로서 형부외랑(刑部外郎)직에 있고, 다음 사위 윤자고(尹子固)는 일찍 죽었으며, 끝에 사위는 이세창(李世昌)이니 역시 음직으로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

기묘년( 1159) 3월 13일에 상감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백학사(白鶴寺) 서남산 기슭에 장사 드리라 하니 공의 아들과 여서(女壻)들이 묘지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이 에 명 (銘)한다.
공의 두 자손 하늘이 아끼어 계승하였으니     여경이 있는 곳에 공의 아들 있었더라
누가 그 후 알기를 그 처음보다 크다 하리오.
충효와 문학으로 근원을 삼아  비단옷 입고 장차 높아지려는데 유명이 이미 이루어져
아들과 사위가 묘에 지명을 갖추고자 하네.
내가 공과 안 지가 오래이라고 공의 묘지명을 지어 불후함 밝히라 하니 내 재주 없으므로 피하려 했으나
감히 굳이 거절 못하고 도리어 눈물을 닦고 붓을 잡아 편다오
충의 온전한 덕 공은 실로 있었고 문의 화려한 국토 공은 실로 떨쳤어라.
몇천 만세나 이 무덤 산기슭에 전하리.

 

3세

충숙공(忠肅公) 諱 극겸(克謙) 

문극겸전

벽상시 평

묘갈명

신도비명 병서

극겸 영정

고간원의 극겸 사당(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현존하는 남평문씨 최고의 고분 극겸 묘소

신도비

字는 : 덕병(德柄)이요  재상으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였으니 문무직을 겸임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됨
1122년(고려 예종17
년)  2세 휘 공유를 아버지로 남평에서 출생  음보로 벼슬하고   의종때 문과에 급제
의종때 좌정언 봉직시 내시와 점장이의 폐해에 대한 상소로 황주판관으로 좌천 당했으나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이 높자 내시들이 모함하여  진주판관으로 좌천시키려 할 때   대신들의 반대로  중앙에 복귀하여 합문지후와 전중내급사 하시고 
1170년(명종4년) 궁궐 당직시 정중부의 난으로 체포되었으나 상소로 좌천된 일로  화를 면했고
좌부승선으로 왕명으로 승려들을 위무하고 추밀원 부사 지주사를 거쳐 
추밀원사로 승진 상서도성의 좌복야(정2품)가 됨
송유인의 시기로 사공(최고의 명예직)으로 이직하였을 때 하는 일이 없다고 급료를 받지 않으셨다. 
1179년 12월 중서시랑 평장사에 호부판서   
1181년 관등순위 2위인 판예부사를 제수받음
1182년 중서문하두성의 시랑 평장사와 병부판서겸 수국사(국사편찬 책임관)로 임명되고
1183년 이부판서 겸직 
1189년(명종 19) 9월 68세로 별세 조정을 3일간 폐하고 명종 묘당에 배향 공신으로 모심
               출전 : 新增東國輿地勝覽<36권 全羅道 南平縣 人物 高麗> <41권 黃海道 黃州牧 名宦 高麗>
묘소는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이머 입구에 신도비가 있고 옆에는 고간원의 금강재이다
제향은
송호서원과 장연서원, 저산서원, 의열사 등에 배향되심

2003년 방영된 주말연속극 무인시대에서 
강직하고 절개있는 충신으로 무신들의 횡포를 막아 국가를 지키다 돌아가신 행적 방영

문극겸전(文克謙傳)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문극겸(文克謙)의 자(字)는 덕병(德柄)이요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 대학사(大學士)인 공유(公裕)요 시호는 경정공이라 했다. 극겸은 처음에 백부인 공인(公仁)의 음덕으로 산정도감(制定都監)의 판관(判官)을 지내었다 나라의 제도상 남삼(藍衫:음직으로 벼슬한 사람)을 입고 있는 신분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하는 사람은 세 차례만 응시하게 되어 있는데, 극겸은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평민도 과거를 열 번이나 치르게 하면서 남삼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어찌 세번까지로 제한한단 말인가?" 하고는 다섯 번까지로 그 한도를 삼아주기를 청원드리니 조정의 의론이 그의 의견을 붸아 시행하기로 한 것이 결국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다.

극겸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 연마를 멈추지 않아. 마침내 의종조(穀宗朝)에 문과에 급제, 관직이 계속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합문(閣門 :왕의 편전앞문)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내시관(內侍官) 백선연(白善撚)이 벌과 상을 주는 임금님의 권한을 함부로 부리옵고, 궁녀 무비와 은밀히 추한 짓을 했사옵니다. 점장이 영의(榮儀)는 옳지 못한 도를 가지고 임금님께 총애를 받아 백순, 관북의 두 궁전을 지어 사사로이 재물을 비축하고 복을 빌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으로 사용하였사옵니다. 백선연과 같이 사무를 관장하면서, 양계(兩界)의 병마사와 오도(五道)의 안찰사(按察使)가 임지로 가기에 앞서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올리는 날에는, 반드시 두 궁전에다 술자리를 차리어 위로하고 송별을 하는데 제각기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게 해서, 그 바치는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전최(嚴最: 근무성적의 최상과 최하등급)를 매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재물을 거둬들이게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나이다. 추밀원지사 최포칭도 중요한 직책을 맡아 조정의 내외에 세도를 부리고, 탐욕이 끝이 없어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중상모략을 하며 치부함이 아주 많사옵니다. 청하오니 백선연과 무비를 목베고 영의를 몰아내어 마소 먹이는 사람으로 충당하시고 최포칭을 파직시켜 온 나라에 사죄케 하소서,"

그는 또 궁중 여성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왕이 보고 크게 노하여 그 소장(疏狀)을 불태워 버렸다
최포칭이 궁에 들어가 변명하기를 청하니 왕이 극겸을 불러 대질케 함에 극겸의 진술이 아주 적절하고 사리에 합당했으나 결국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 당하였다. 처음에 극겸이 그 상소문을 초안(草案)하였을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지심과 급사중(給事中) 박육화(朴育和)와 기거주(起居注) 윤인첨(尹鱗瞻) 등은 그 상소문의 서명에 응하지 않았고.
극겸이 좌천된 후에도 그들이 태연하게 일을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 "문공(文公)과 친히 함께 지내어 영특하고 탁월한 사람들이라 여겼는데 어찌 그리도 낯이 두터운가?"라는 말로 비방하였다.

황주판관인 극겸을 아전들과 백성들이 좋아하고 흠모하며 잘 다스린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왕의 측근인 한 고위 관리가 전부터 품은 감정으로 작은 과실을 꾸며내고 왕에게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니 왕도 이전의 일로 화를 내며 다시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좌천시키려 하였을때, 담당관리가 아뢰기를  "극겸은 강직한 신하이니 지방관으로 연속 좌천시키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라 하여 논의하는 것을 막음에 합문지후(閣門福候)를 제수하였다.
이어 전중성(嚴中省)의 내급사(內給事)에 올랐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날 때에 극겸은 전중내에서 숙직을 하다. 변란이 났음을 듣고 피하다가 군사들에게 잡히어
"나는 전에 정언이었던 문극겸이다. 주상(主上)께서 만약 내 말씀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냐? 원하노니 잘 드는 칼로 나를 죽여라" 하자 그 병사가 이상하게 여기고 여러 장수 앞에 이르니, 장수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들이 명성을 들었다. 우선 궁성 안에다 가두어라" 하였으며, 의종은 남방으로 쫓겨가는 말 위에서 탄식하기를 "내가 일찍 문극겸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이런 모욕이 있게 되었으랴" 고 하였다.

명종(明宗)이 왕이되어, 여러 신하의 관직을 새로이 베풀 때 극겸을 옥에서 석방하고 비목(批目 : 왕의 제가를 받은 인사발령장)을 쓰게 하였다. 이의방(率義方)이 왕에게 아뢰어 극겸에게 우승선(右承宣) 어사중승(御史中童)이 내려졌고,
문신중에 이공승(李公升
중서시랑평장사 1099~1183) 등 많은 사람들이 극겸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고 무신들도 또한 그를 의지하고 믿으며 옛적의 많은 사실을 물었다. 이어서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을 겸하였고, 재상이 되어서도 역시 상장군(上將軍)을 겸하였다 극겸의 결혼할 딸이 있었는데 이의방의 동생 이인(李璘)이 처로 맞이하였고 이러므로 계사년(癸巳年)의 난(이이방이 권력을 잡음)에 일족이 모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좌간의 대부(左談議大夫) 김신윤(金華尹)은

"승선이란 직위는 임금님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자리로 다만 임금의 재가를 출납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현재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은 관직이 어사대의 벼슬을 겸하고 중추부에 있으면서 일을 보니 권력을 부릴 수 있는 빌미가 되므로 청원하옵건대 그 겸직을 풀으소서"라고 상소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날 왕의 처사에 논박하는 관청의 신하들이 합문에 엎드려 애써 충간함에 이준의를 위위시(衛尉寺) 소경(少卿)으로 전보시키고, 극겸은 대부시(大府寺) 소경(少卿)으로 삼았다

하루는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왕의 수명장수를 비는 술자리를 베풀어, 한밤중이 되도록 끝내지 않고 주위가 점점 떠들썩해졌다 이에 극겸이 간곡히 말하기를 "이런 일로 전(前)의 임금님께서 폐위되었는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왕을 권하여 안으로 들게 하므로 드디어 그 자리가 파하게 되었다. 이에 이준의는 성내며 욕설을 했다.
곧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전임되고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임명받았고, 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었는데,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守司空)과 좌복야(左儀射)로 좌천된 후에는 명예직이라 하여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에서는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해를 넘기고 일년 만에 다시 전의 관직으로 복귀하였다. 오래지 않아 참지정사(瑻知政事)가 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였다. 이 직위를 받고서 일을 처음 볼 즈음 예관(禮官)이 왕에게 아뢰기를
"태후의 제삿날이 음력 11월에 들었사온즉 팔관회(八關會)의 예식을 음력 10월에 거행하도록 청하니, 왕이 재상부(宰相府)에게 물었을때 
극겸이 대답하기를 "태조(太祖)께서 애초에 팔관회를 개설하셨음은 즉 천지신명을 위해서였나이다. 그러하오니, 뒤의 임금님께서 다른 일로 그 시기를 앞당기거나 뒤로 물릴 수 가 없나이다. 더군다나 태조대왕께서 신명에게 기도드려 말씀하시옵기를, "세세토록 음력 11월에는 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이 들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만약 불행히도 이 때에 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이 드는 일이 생긴다면 나라의 복운(福運)이 끊어지려는 걸로 의심하겠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다 통합되어진 이래, 음력 11월에 임금님이나 왕후님의 제삿날이 없었사온데, 이제는 있사온즉 이는 나라의 재앙이옵니다. 그런데도 또 음력 10월로 팔관회를 개설키로 함은 진실로 태조께서 세우셨던 뜻대로가 아니오니 예관이 아뢴 바는 윤허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라 하니 왕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명종 15년(1185)에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을 때에 한문준(韓文俊)이 문관으로는 석차(席次)가 제2위이고 그 다음은 극겸 이었으며, 그 다음은 최세보(崔世輔)였다. 한문준이 맨 윗자리의 재상으로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됨에, 극겸은 응당 아상(亞相)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세보의 윗자리에 있으려 하지않고, 선수를 써서 자진해 후퇴하고 사양하며 최세보로 하여금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아 아상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그 다음 자리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자 최세보 또한 굳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
나는 문공(文公)에게 은혜를 받았음이 실로 많았었는데, 감히 문공의 윗자리에 있으리오." 하였다. 왕은 예부가 병부의 위가 된다는 이유로써, 극겸에게 판예부사를 제수하여 아상으로 삼고 최세보를 그 다음 지위로 삼음에, 아는 이들이 그 양보심을 칭송하였다.

      왕이 일찍이 한 절구시(絶句諒)를 지어 극겸에게 주었는데,
一村靈臺萬事侵(일촌영대만사침)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다
惟餘憂廬目加簪(유여우려목가잠)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短懷拙智一難斷(단회졸지일난단)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白髮千
己滿簪(백발천경기만잠) 다만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이 시를 받은 극겸은 화답의 시를 지어 올렸으니 
年光荏苒暗相侵(년광임염암상침)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두어나
輔國思量日漸深(보국사량일점심)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더욱 깊어 지나이다.
自原君恩猶未報(자원군은유미보)임금님 은혜 갚자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無情白髮己盈簪(무정백발기잉잠)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 두 시를 비교하여 이르되 "둘 다 쇠퇴하여 시들 기미가 엿보인다. 하였는데 왕은 결국 폐출되었고 극겸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생각건대 시의 뜻이 우연히도 뒷날과 적중되었다
그 다음해에 중서(中書), 문하(門下)의 두 성(省)의 시랑평장사(侍郎平章事)로 판병부사를 겸하고, 이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올랐다. 명종 19년(1189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8세였다. 왕은 3일간 조정 조회(朝庭朝會)를 폐하였고,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명종의 묘정(廟庭)에 모셔 제사 지내고
아들은 후식과 유필이 있었는데 유필은 벼슬이 문사성사에 이르고 유필의 5세손 달한이 이어서 전하였다.

그의 성품은 효도스럽고 우애하였으며, 인자하고 어진 가운데 충성스런 마음으로 바른 말을 하며 정직하였다. 그는 식사를 함에 반찬 그릇이 두셋에 불과하였고 화려하게 무늬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는 세 번이나 과거 시험을 주관, 천거한 바 이름난 선비가 많았으니 그 때에 어진 재상이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권세 있는 사람과 세력 있는 집안의 청탁을 들어, 어진가 여부를 살피지 않고 인물을 전형(鐘衡)하여 배치함에 그릇됨이 많았고, 또 나이 어린 자제들을 벼슬하게 하고, 종을 사방으로 보내어 전원을 넓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의 논의가 애석히 여기었다.

앞에서는 청렴한 인품(人品)에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고, 다음에는 이치가 맞지 않는 소리로 폄하(貶下)하고 있다. 왜 이처럼 모순된 기록을 자행하게 되었을까?
조선 조정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면서 친왕적(親王的)인 입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조(前朝)의 사초(史草)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공께서 청렴하였던 기록으로는
   조카인 상서좌복야 문효식이 세 번이나 물러나기를 청하자 윤허하는 글에 친혐(親嫌)을 염려했고
   문인 이담지(李灌之)가 자기를 돌봐주지 않음을 원망하는 시(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반면 원전사료(原典史料)인 고려사(高麗史)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유구역의 시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句節)도 언급되지 않고 있음은 의도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다만 고려사에 복합소(伏間疎)를 기록한 것은 충신의 본(本)을 보인 것이 되었으나, 그 내용은 군주(君主)의 위치에서 볼 때 신하가 임금의 허물을 직언(直言)한 것이니 새 기틀을 다지는 왕권확립에 저해(沮害)요인이 되므로 충신이란 사실만 기록하여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곧은 사대부(士大夫)로서 충간했던 시평(詩評)과 사실을 이인로(李仁老)와 최자(崔濫)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기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유구역 벽상시에 대한 서평

-이인로(李仁老1152~1220) 파한집(破閑集)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형상으로 나타나기 전에 알아차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사하다고 태연해 하며 근심스레 여기지 않다가 급기야는 환란이 이른 뒤에야 애태우며 힘써 구하려 한들, 그것이 어찌 살고 죽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운수에 이익이 있으리오? 이는 편작)이 환후(의 질병을 고치지 못한 까닭과 같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는 천하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백성이 풍성하고 넉넉하였다. 그런데도 가의()는 그 세상을 염려하며 통곡했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건국(建國)한 뒤부터 날로 더욱 삼가하고 두려워해서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는데도, 위징은 오히려 일의 열가지 징조를 아뢰었다. 그러므로 옛글에 말하기를 "충간하는 자는 그 근원을 살퍼 좋지 못한 것이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니, 얼음은 서리 생길 때에 경계하고, 옥으로 된 술잔을 쓰는 사치는 칠기(漆器)에서부터 막아야 한다. "고 하였다.

옛날 의왕은, 수십세의 풍족하고 평화스럽게 잘 다스려진 왕업에 의지하여 왕위에 있은 지가 오래 되도록 일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자, 모두 태평한 왕업이 태산보다 더 안정스럽다고 여겨 감히 중간에서 진언하는 자가 없었다. 정언 문극겸(正言 文克謙) 공은 바로 임금이 계시는 곳의 문을 두드려 충간을 하는 글 한 통을 올렸는데, 말한 바가 당시의 병폐를 제대로 맞아서 다른 사람들이 봉이 아침해에 우는 것과 같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들어 주지 않자, 공은 관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해서 아니고,
           원앙이 그 수레 가로막은 일 어찌 일신을 위함이었을까?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여윈 말 세차게 채찍질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리노라.

명종왕이 등극하심에 이르러, 왕명의 출납을 맡는 자리에 발탁(拔擺)되었는데,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 백성의 이해(利害)와 사대부(士大夫)의 어짐과 못됨을 다 왕께 아뢰고 추호()라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제것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안팎으로 편안하고 환란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공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이 총재(이부상서)의 지위에서 나를 옥당(玉堂 : 홍문관)으로 들어가 왕을 모시게 천거했었는데 일년이 지나서 공은 세상을 떠나셨다.나는 만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기렸다.(8구중 파한집에 3구~6구가 있고 나머지는 동문선에서 발췌)

영특한 그 모습이 상대성(上臺星)을 응했었고
옥병의 얼음같이 그 마음 깨끗했네.
일찍이 대궐문의 구름을 헤치어 외치었고
늘그막에 우연(虜湖)에서 해를 돌이켰네.
단봉(丹鳳)은 오래도록 못(池 :
中書省) 위에서 목욕하였는데
흰닭(
신유년을 뜻함)은 어찌하여 꿈 속에서 재촉했나.
사조(謝跳)의 '푸른 이끼' 시구(詩句)만이 남아서
온 세상 만인(萬人)의 입에 우뢰같이 전하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길 "공이 벼슬길에서 지킨 절개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시구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비록 그 분의 실록(實錄)이라 해도 좋겠다. "하였다. 어제 공의 옛 별장(別莊)을 지나다 보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샘물이 돌들에서 나오는데, 공이 평소 노시던 곳이다.
나는 슬프게 여겨 배회하면서 차마 떠나지를 못하고, 시를 지어 벽에 써 두었다.

바위 밑 찬 물줄기, 감돌아 흐름이 무슨 생각 있는 듯하네.
빙설파(氷雪派)가 아직도 봉황지를 따름을 누가 알리오.
동각(東閣)을 거듭 엿봄이요 서문(西門))에 날 저물려 할 때로다.
시를 지어 벽 절반에 써 두는 것은 저승의 임에게 알리려 함이로다. 

충숙공(忠肅公) 묘갈명(墓謁銘)

1924년 4월 숭정대부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제학 양산(楊山) 조득림(趙得林) 지음

선비가 굳은 마음과 변하지 않는 절개와 뛰어난 풍채를 지닌다면, 백세의 위에 떨치고 백세의 뒤에까지 듣는 자가 감동되어 일어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인데, 나는 고려의 문 충숙공(文忠肅公)에게서 그러함을 체험한다. 공의 이름은 극겸(克謙)이요, 자(字)는 덕병(德柄)이며, 남평군(南平郡)사람이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정직하였다 의종(談宗)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왕의 정치가 정도를 잃자 공은 상소하여 극력 충간을 하였다. 그 언사가 지극히 정성스러웠으나 왕은 성내어 황주판관(藝州判官)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정중부난(鄭仲夫亂)이 일어나자 왕이 남쪽으로 귀양가며 말위에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만일 일찍부터 문 아무개(文某)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오늘의 모욕이 있었으랴? 이제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구나!"고 하였다 공은 왕에게 더 이상 충간을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공주(公州) 유구역의 벽에다 시를 지어 썼던 바, 다음과 같았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해서 아니었고
원앙(衰瑞)이 그 수레를 가로막은 일 어찌 일신을 위함이었을까?
이처럼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여읜 말 세차게 채직질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리노라.

그 후의 사람이 시를 보고 역의 벽에다 그림을 그렸는데 화공(盞工)은 그 당시에 묘한 솜씨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 화공은 관직에 있지 않은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산길을 따라 말고삐를 늦추어 잡고 천천히 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는데도, 어느 한 도승이 보고 한탄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충간을 직책으로 하는 관원이 조정을 떠나는 그림이다. " 하고, 시를 적었는데, 
벽 위에 어느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가? 간관이 조정 떠나니 나라 일이 어찌 될까?
산승도 한번 보고 오히려 슬퍼지거늘 하물며 사대부인들 오죽이나 할 건가?


그 뒤에, 두 객이 이 시의 운(韻)에 맞추어 시를 처음 사람이 지은 것은
화재 예방 위해 굴뚝 굽히라는 옛말 생각 못하고, 
화재 나서 머리를 데고난 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누가 이 간관(諫官) 조정 떠나는 그림 그렸나? 
벽에 가득한 맑은 바람이 게으른 사람 격동시키네.

그 둘째 사람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흰옷에 누런 띠 띤 간판의 그림은, 이 사람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 바르게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조정 떠나니 모름지기 털끝만큼도 애를 쓰지 않았구나.


뒤에 중국의 장군으로 모씨(某氏)가 또한 차운(次韻)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계로부터 신하(臣下)는 많은 편안을 꾀하나, 
그 누가 죽은 후 역사에 기록될 줄 생각했을까?
문 재상(文宰相), 인의를 갖추었으니 해와 달같이 빛나는 장부가 되었네.

사관의 찬(贊)에 이르기를, "문 충숙공(文忠肅公)은 음탕한 짓을 함부로 하는 임금을 만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흘로 나서서 충간을 하였으니, 맑은 하늘에 우뢰와 서리치는 날의 추위도 그 열렬함에는 비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직에서 밀려났어도 그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 조정을 떠나니 사람들이 다투어 칭송을 하고, 화공은 그림을 그리기에 이르렀으며, 산 속의 도승은 시를 을었다. 뛰어난 풍모와 굳은 절개는 천고에 빛나, 비록 흥하고 사나웠던 정중부(鄭仲夫) 같은 무리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듣고는 감히 해치지 못했으니,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리고 원앙이 수레를 가로막고 충간했던 일보다도 더 나은 것이었도다. 고 했다.

서거정(徐居正) 이인로(李仁老) 등 여러분이, 다 시문을 지어 그 자취를 실증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공이 있었던 옛터를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것은
"고려 국운이 중간에 글러져 왕은 바다 가운데가 거 처 되었었네 무관들은 서로 다투어 큰소리로 꾸짖는데,  문 재상 기등처럼 잘 버티었도다. 
조종묘(祖宗廟)에 왕의 신위(神位) 편히 모시게 했던 온 나라에 벽상(壁上)이 빛나는도다. 
길이 백성들 신망이 두터워지고 난세에 지조지궈 외로히 우뚝하였네."
"자녀 낳고 딸을 시집 보냄에, 그 계책은 쇠처럼 굳세어 아첨하지 않았네 
전주이씨 사위 삼아 이실(貳室)의 높음과 같이 되었도다. 
뒤얽힌 뿌리는 의당 크게 무성할 것이요
태양은 서서히 나타나 밝혀지리라. 천만세에 큰 복이 있게 되었으니 
임의 공명은 마땅히 새겨질 것이로다. "
 

그 분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가, 곧 중서(中書) 문하(門下) 두 성(省)의 시랑평장사(侍郎平章事)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점하기도 했었다.
세 차례 과거를 주관하여, 뽑아낸 선비 중에 명사(名士)가 많으니 어진 재상이 라고 칭송받았다. 왕이 일직이 한 절구시(絶句詩)를 지어 하사한 바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다. 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다만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이 시를 받은 공은 그 운(韻)을 따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둬지나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더욱 깊어지나이다
임금님 은혜 갚자 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명종 19년 9월 병인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라 했고 명종(明宗)의 묘정(廟庭)에 모셔 제사지냈다. 영남의 선비들이 삼가(三嘉)에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송호서원(松湖)이라 했으며
묘는 충청도 공주 금계산(公州 金難山) 자락 갑좌의 언덕에 있다. 공의 조부는 이름을 익(翼)이요, 벼슬은 좌복야(左傑射)로서 시호는 경절(敬節)이었다. 부친의 이름은 공유(公裕)요, 벼슬은 지 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지냈고, 시호는 경정(敬端)이었다 부인은 지추밀원사(知權密院事)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이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첫째는 후식으로 평장사를 증직 받았고, 둘째는 유필(惟弼)이니 평 장사였으며, 셋째는 유철(惟哲)이니 추밀원사(權密院使)였다. 딸은 전주이씨 (全州李氏)로 내시부(內侍府) 집주관(執奏官)인 인(璘)에게 시집갔다.

후손에는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 월천군(越川君) 빈(彬), 경흥군(慶興君) 봉상(鳳欄), 오천군(鰲川君) 회(晦), 오산군(鰲山君) 중용, 월성군(月城君) 이익(以翊), 월은군(月恩君) 사기, 오은군((鰲恩君) 윤중(允中), 백초당(自草堂) 삼, 풍암공(楓菴公) 위세(緯世), 동호공(東湖公) 덕교(德敎)가 있어, 다 도덕 ·학문 충 효 절의로 일세에 모범이 되어 천년토록 격려가 되어지니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취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만력(萬歷) 경인년(庚寅年) 3월에, 공주의 진사(進士) 이치림(李致添)은 공을 위해 고간원기(記)를 지어 판목에 생명을 길게 해서 걸었었다. 그랬는데 고간원의 집채가 무너지고 그 터만 남아 있자, 지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한탄한 지 오래였더니, 이제 공의 후손 세휘(世輝)가 재물을 모아 채석(採石)을 해서, 묘도(墓道)에다 세을 내력을 기록하려 함에, 나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였다.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에는 떳떳이 마땅한 비명을 찬(撰)해야 할 일이어늘, 내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생각건대, 공의 사적은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실려 있어 세월이 천년을 지났는데도, 듣는 사람은 아직도 감동이 일어나는도다.

 

충숙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

정사(丁巳) 세모(歲幕)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 삼가 지음

가원(家源)은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文忠肅公)의 사적에 이르러선 무릎을 치며 여러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 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하므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남에 청고(淸高)한 명망이 더욱 높아져서 영특한 풍모와 굳센 절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공주 추동 금계산 갑좌에 모시었는데 예전에 전해오던 신도비가 어느 시대엔가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 후손들이 다시 세우려 함에 종성(鍾誠)과 중대(重大)가 협력하고 일이 이루어지자 원모(元模)와 세훈(世勳)이 공의 실기(實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공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요 남평문씨(南平文氏)니 시조는 고려 태사(太師) 무성공(武成公) 다성(多省)이요 고려에 들어와 좌복야(左僅射) 경절공(敬節公) 익(翼)이 조부이시며 아버지 공유(公裕)는 지 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태학사(集賢嚴太學士)이며 시호는 경정(敬埼)이시다. 어머니는 장단한씨(長端韓氏)로서 평장사 문렬공(文烈公) 안인(安仁)의 따님이시다.

공은 예종 17년(1123)에 전남 나주군 남평면에서 탄생 하셨으며, 백부 공인(公仁)의 공으로 산정도감판관의 직을 얻었다. 당시의 제도에 평민으로는 열 번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나 부조(父祖)의 공으로 음직에 있는 사람은 세 번 이상 응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공은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제도의 타당치 못함을 개탄하고 다섯 번까지 응시하게 해 줄 것을 청원하며 조정의 의논이 이를 따랐다. 그 후 공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아니하여 의종 1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으며,
의종 17년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상소내용과 이하 내용은 문극겸전에 있으므로 생략함)"

그 후 명종 19년(1189) 9월 병인일에 68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이씨(李氏)니 추밀원사 시민(時敏)의 따님이시다. 삼남 삼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증평장사(贈平章事)이고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任博)는 태상경이요 차거수(車擧首)는 태복시사이며 이인(李璘)은 내시부집주관이다. 신종 5년에 명종묘(明宗廟)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고간원(端談院)을 사액하고 송호(松湖) 저산(樹山) 장연(長測)의 여러 서원에 모셨다. 

명(銘)하였으되
 공주(公州)의 산하를 돌아보니 상서로운 기운이 울울히 서린 묘소가 있네
깊고 깊이 옥을 묻었으니 고려대(高麗代)의 꽃봉오리로다.
그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 위계가 드높구나
그 시호는 충숙(忠肅)이라 나라로부터 애도와 영광을 갖춰 받았네.
처음에는 음보(蔭補)로 나가서 청운의 길 바야흐로 형통하니
남삼(藍植)입은 신분도 다섯 번 응시케 하자고 나라의 규례를 고쳐 놓았네.
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론의 집에서 굳센 절의를 지켰네.
소인들 무리가 일어나 형벌 주고 복 주는 왕의 권능을 멋대로 행사할 때
용기 있고 강직한 공의 언론 구름을 헤치고 울려 퍼지다.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서나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서나 선정의 소리 무성했네.
중부(仲夫) 비록 사나웠으나 차마 고을 더 이상 해치지 못했네. 
말 위에서 외로이 탄식하며       왕은 마침내 남쪽으로 귀양가고 
새 왕의 첫 정사(政事)에    결재의 조목 써서 도우니 
문신은 편안하게 되고 무신은 공에 의지하고
조정의 옛일도 공에게 자문했네. 왕이 주연에 빠짐에 간절히 화복의 기틀 아뢰었고
사공(司空)으로 좌천되자 청렴히 그 녹을 받지 않았네.
시월의 팔관 의식은 옛 전통 등진 무례함이 니 잘못이로다.
근거한 바 옳고 곧음이 남들의 흠모하는 바 되었네.
백발 둘이서 애달아 하여 임금이 지은 시에 신하는 화답했네.
둘 다 쇠하고 시들어 시의 가락 몹시도 구슬프고나
돌아와 이땅에 몸 붙인 지 아득한 팔백 년
자손들은 면면히 뻗어 있고 묘소의 나무들도 무성하구나.
이 높직한 빗돌에 새기니 나의 말 감개롭다.
뉘 감히 존경하지 않으리오 고려 왕조의 어진 이 재상을

 

3세

  의성공(毅成公) 극순(克純)

의종때 내사인이 되어 충환 정함의 합문지후를 거두라 상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파직하여 귀향을 떠나시면서 왕정이 정함의 손에 떨어지고 정중부의 무리가 두렵다고 예언하시었고
정중부가 난을 일으킨 후 다시 불러 명종때 중준내급사로 계시다 71세에 별세하시니
대광보국 도첨의 정승을 증직함

 

4세   

충렬공(忠烈公)  후식(侯軾)

충숙공(忠肅公) 諱 극겸(克謙)의 장남으로 평장사 최선의 따님과 배혼
1177년(명종7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학사로 봉직하고 합문지후 이부시랑 전중내급사를 역임하고
1196년 대부경 동북면 지병마사가 되고 
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를 추증함
합문지후파의 파조가 되시고 아래에 충혜공파 충선공파 감천군파 남제군파로 분파된다.

 

 4세 효혜공(孝惠公) 유필(惟弼)

1177년(고려명종) 형 후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시다
1216년(고종 3년) 추밀원사로 있을때 부인인 채순희의 따님 광주채씨와 사별함 
                         좌산기상시 어사대부를 거치다.
1220년(고종7년) 안서(황해도 해주)부사가 되어 뇌물을 받아먹는 풍습을 단속하고
1221년(고종8년) 수사공 좌복사를 거쳐
1222년(고종9) 지문하성사가 됨  
  조석의난 때 왕을 모시고 물러나지 않으므로  왕이 빠른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다고 칭송함
지문하성사로 봉직하시다  78세로 별세 하시니 왕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증직 : 대광보국 숭록대부 상주국 평장사 태자 소사
시호는 효혜로 내리시고 순평(順平:남평)부원군(府院君)이시다.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에서 제향함
순평군파의 파조로서 순평은 현재의 남평, 아래에 후순평군파(달한) 판도판서공파(근)로 분파된다

 

 

4세

정식(廷軾)

좌대언 평장사 역임 후손 없으시다
이규보와 친해 전해지는 시는
      
사모하는 깊은 정이 늘어 다시 슲더니         감격하다 그대 오늘 기꺼이 찾아오네  
     알네라  이달에 흐르는 샘 못에 차면           또다시 지나면서 술잔 띠울것을 

 

4세

효식(孝軾)

우보궐 복야를 지내고 지밀직사 병부전서 상장군을 지내셨으나 후손은 없으시다.
통헌에 봉해짐  공이 왕에게 3회이 물러감을 청함에 임금이 윤허한 글이 
경이 상소를 보매 늙어 물러감을 청함이 마땅하니 필시 번잡한 사무를 싫어하여 일찍 물러가려 할 뿐이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옷을 떨치며 벼슬 마다하는 높은 태도는 대개 세상을 바로잡아 탐내는자를 격동시키려 함이라

 

5세 합문지후파

정() 일명 탄(誕) 충익공(忠翊公) 

1212년(강종1년) 정순대부 판전교사 보문각 집현전 제학을 지내셨고 
고종때 별세하시니 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를 추증하다 부인은 평장사 문화유씨 성후의 따님

 

 5세 착(言卓)  가나군  시호 : 사간

가나군(加那君) 시호: 사간공  호: 남제(南濟) 일명 綽(작)
고려 의종14년(1160) 출생하시어 문장이 세성을 떨치었으며
명종14년(1184) 문과 급제해 좌정언이 되었으며
                       점차 승진하여 병마대원수가 되었으며
명종24(1194) 대제학으로 왕명으로 탐라에 들어와
    예악과 문물을 선화한 공으로    왕이 상주국평장사를 제수와
    가나군에 봉함.
탐라지 성씨부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보성군 복성현 사람인데
탐라에와서 고씨에게 장가들었다

제주도 입도조로 남제공파의 파조다 되신다
남제공 부터 9대에 이르기 까지 추모하는 탑을 북제주군 애월면 하가리에 건립하고 4월5일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5세 순평군파

  정(言正 )   정민공(貞敏公)

고려 충렬왕때 광정대부 검교 추밀원사를 지내시고 정민이라는 시호를 받으시고 부인은 평강채씨 인계님의 따님 부인의 외갓집 후손종에 최영장군이 있다

 

 5세

대륜(大倫)

고려 충렬왕때 광정대부 검교 추밀원사를 지내시고 형부시랑을 지내셨으며
부인은 평강채씨 인계님의 따님 부인의 외갓집 후손종에 최영장군이 있다  후손없습니다.

 

 5세

정기(廷基)

국자사복 지제고를 지내셨습니다. 후손은 없습니다.

  

 6세  남제공파

양부(陽夫) 장숙공(章淑公)   일명 : 양부(陽富)

1176(명종6년) 출생하시어 명종23(1193) 과거에 급제하여 1198(신종원년)참지정사 좌정언 참지정사에 오르고 문무지략과 융기가 겸전하였으므로 용호대장군으로 누진한 다음 병마 대원수됨
1208(희종4) 문양부에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탐라국으로 군사를 발하도록 명령한 바
1212(강종원년)에 왕이 크게 근심하는 바를 해결하고 돌아오니 그 공을 칭찬하여 대사마 대중군 상주국공신 금자광록대부 동 평장사를 제수하였으며 이부상서를 추증함과 동시 특별히 가나군에 봉하고 시호를 장경공이라 하였는데 이 사적은 동국대전과 한훤당집에 실려져있다
-임신보의 기록내용이며 경신대동보 기록과 차이있습니다.

 

  6세  판서공파

인위(仁渭)

벼슬이 충선왕 때 봉순대부 대부소경을 지내고 상장군 공부상서 역임 우복야 참지정사 및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시고 신유년에 별세함(대동보)≪新增東國輿地勝覽 제43권 黃海道 長淵縣 人物 高麗≫

 

 6세 합문지후파

득준(得俊) 字 : 명랑(明朗) 시호 : 의안(毅安)公

원종 4년 계해년에 등재하시어 한림학사를 지내시다
탐라에 해적을 소탕하신 공으로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배명하시고 인거 강성하시다
충열왕때 예부상사를 배명하시고 돌아가시니 시호를 의안이라고 하다
부인은 평장사 광산김씨 명진(銘鎭)의 따님

 

 6세 합문지후파

득걸(得傑) 字 : 명랑(明朗) 시호 : 양간(襄簡)공

집현전 학사와 평장사를 지내시다

 

 7세 합문지후파

극검(克儉)  정열공(靖烈公)  字 정부貞夫

충선왕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좌정언 좌사의를 지내셨고
1314년(충숙원년) 참지 판도판서를 지내시고 또 대사의 대부를 역임 광정대부 검기감 판전농시사 개성윤이 되시어
67세에 별세 후일 광록대부 문하시랑 상주국 평장사에 추증되셨고 정열의 시호를 받으심
부인은 안동권씨 권엽님의 따님

 

7세 합문지후파

원길(原吉)

중랑장을 지내시다

덕걸의 아들로 손자 구(龜)가 좌정승으로 올라 남평문씨에서 분적하여 구를 시조로하고 감천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남평문씨 대동보(임술보 세록)에 쓰여있다
따라서 그의 상계는 남평문씨이며 문익(중시조)의 11대손이고
고려조에 집현전 학사에 이어 평장사를 지낸 양간공 문득걸의 현손이다.
그리하여 감천으로 본적하고 계대를 이어온 후손들이 남평문씨와 같은 뿌리임을 확인 남평문씨 대동보를 편간하면서 남평문씨와 합보하였다.

또 감천을 본관으로 하는 문씨는 신라왕족인 김원길이 중국에서 문명을 날려 문씨의 사성을 받아 문원길이 되었으며 문근, 문관을 배출하였는데 본관이 같아 착오를 하기도 한다.
                                                                                   출처 : 성씨의 고향(한국성씨대백과 691)
                           참고 : 현재의 세계표는 문득걸의 현손이 아니고 증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9세 합문지후파

충정공(忠貞公) 숙선(叔宣)

1307년 (충렬왕33년) 출생         호 : 청도
1351년(충정왕3년) 문과급제   
 한림원 학사, 좌정언 지제고 사간원헌납으로 원종훈에 책록되고 보문각제학을 지냄
          군수로 있을때 선정을 베풀어 검소한 생활로 군호를 청도라고 함
          오산현 원님으로 재임시 미신에 미혹되어 인륜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을 교화하여
          3년에 걸친 노력으로   미신을 버리게 되었다
광록대부 문하시중에 추증됨
장남은 충혜공 익겸이요 차남이 충선공 익점이며 3남은 익부, 4남은 익하이다 

  

10세 합문지후파

충혜공(忠惠公) 익겸(益謙)

문과에 급제하셔서 좌승선 합문지후를 거쳐 전중내급가 되셨고 부인은 청주정씨   충혜공파 파조이시다
후손중에는 문위(거창 용원서원에 배향)가 있으며 후손들이 거창쪽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10세 충선공파조

충선공(忠宣公) 익점(益漸)

자 : 일신(日新)   호 : 삼우당(말년은 사은)
목화재배의 기틀을 만들어 백성을 부강하게한 공으로  부민후를 추증 받았으며
남평문씨의 가장 큰 인물이요 간판스타가 되시는 분입니다.
자세한 자료는 충선공파종회  메뉴의 충선공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11세 감천군파

재도(載道)

홍무 임술년(공민왕 21)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공이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발견하고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로 왜적을 베어 굴복시키고 부자가 목숨을 지킨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되었다.<
여지승람 여주지>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고
공민왕 23년 효자비를 세웠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5권 慶尙道 榮川郡 孝子 高麗≫
단소: 경북 영풍군 평은면 평은리

정려각중건기(旌閭閣重建記)

주상 재위 9년(主上在位九年) 을사(乙巳) 9월 하순 병조좌랑(兵曺佐郎) 한양 조보양(趙普陽)이 지음

모든 일이 마땅히 폐(廢)해서는 안 될 것이나 폐(廢)해진 것이 있고 쉽게 이를 수 없는데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니 비록 모두가 수(數)이나 또한 사람에 매였다.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원대조(遠代祖) 지평해군사공(知平海那事公)이 옛적에 영주(榮州)의 두서리(斗西里)에 살았는데, 고려말에 왜란을 만나 부친을 업고 산속을 가다 부친이 도적의 화살을 맞음에 공(公)이 피를 빨아 화살을 뽑아내고 격분하여 칼로 도적들을 쳐부수어 부자가 모두 안전하였다. 난이 평정됨에 사실이 알려져 정려(旅閭)가 내렸으니, 갑인년(홍무 7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들 구(龜)가 검교군기감(원문은 감천군이며 정승이라 했으나 맞지 않아 수정함)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높은 벼슬이 이어져 오다가 6, 7세가 지난 감사공(監司公) 휘 근(瑾)과 장령공(掌令公) 휘 관(瓘)에 이르러 용성(龍城)에 옮겨 살았으니 사화(士祿)를 만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이 되었고 그 재종 사성공(司成公) 휘 경동(敬全) 호 창계(滄溪) 역시 문장과 절행으로 저명하였으나 불행히도 자손들이 영주(榮州)에 사는 자 없었다.

이로부터 문씨(文氏)의 문호(門戶)가 퇴락하여 정려각이 보존되지 못하고 다만 한 발되는 판각문만 전해 흙손에 매몰되어 있는 것을 옆에 사는 이씨(李氏)란 자가 외손이 됨으로 주워서 집에 간수하였고, 길 엎에 있는 비석은 자획(字劃)이 이그러져 겨우 효자리(孝子里)세 글자만 분별할 수 있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누구의 정려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이른바 마땅히 폐(廢)하지 않을 것인데 폐하게 된 것이니 어찌 수(數)가 아니겠는가?효자공(孝子公)의 예손 광억(光億)씨가 구보(舊譜)로 인하여 옛날 살던 곳의 소재를 알았으나 고로(古老)가 생존한 이 없어 자취를 찾을 수 없음에 반나절이나 서성거리다가, 이씨(李氏)집에 들어가서 그가 오게된 사유를 말하니 이씨(李氏)가 추연(撚然)한 얼굴로 말하기를 "그대가 과연 문효자(文孝子)의 후손인가? 내 또한 문씨(文氏)의 외손이네" 하였다.

대개 이씨(李氏)의 집이 즉 효자공(孝子公)의 옛집이었으니 문씨(文氏)가 이 집을 여서(女斷)인 현감 김숙량(金叔良)에게 전하고, 김공(金公)은 이 집뜰 여서(女斷)인 이공(李公) 진(畛)에게 전하여 이씨(李氏)가 지금가지 지키고 있었으며, 그 중세(中世)에 부사맹(副司猛) 휘 정헌(廷憲)이 있으니 임진란에 부산(釜山)에서 순절하였고, 그 손자 유형(惟馨)은 모친병에 일곱 살 나이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우고 효심이 더욱 돈독하여 늙도록 쇠하지 않았으니, 만약 조정에서 그 자상함을 들을려면 마땅히 복호(復戶)에 그치지 않았을 것을 애석해 하였다. 영조 임술에 신하들의 주청으로 인하여 사맹공(司猛公)을 포증(褒贈)하면서 그 정려(旅閭)가 내리어졌으니,기등에 붉게 쓴 글자가 휘황하게 마을을 빛내나 홀로 문씨(文氏)의 옛 정려가 폐퇴되어 전하지 않음에 이치가 마땅히 이같지 않을 것이라 이씨(李氏)가 매양 한(恨)하더니 마침내 문씨(文氏)의 후손을 보고 기뻐하고 또한 감격하여 들보사이에 감춰두었던 판서(板書)를 내보이니, 「효자 지평해군사(知平海郡事) 문재도(文載道) 지려(之間)라 쓰여 있었다 광억(光億)씨가 희비가 어울려 심정을 누르기 어려움에 눈물을 흘리떠 말하기를 "판서(板書)가 광억(光億)이가 사는 삼십리 가까운 이곳에 있었으되, 5, 6대(五六代)가 지나도록 그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가 지금에야 공(公)의 집에서 얻어보니 이 필연 선조의 영령이 보호하심으로 불초(不肖)가 오기를 기대하셨는가? 광억(光億)이 비록 가난하나 어떠한 고난도 무릅쓰고 고판(古板)을 수집(修緝)하여 정려각(旋閭閣)을 옛터에 세워서 후일 이곳을 지나는 이로 하여금 고려 효자 문모(文某)의 정려임을 알게 한 즉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겠다 하고 드디어 영주(榮州) 사림회(士林會)에 가서 그 일을 알리니 그 중 열 몇 사람이 평해공(平海公)의 외후손으로 꾀하지 않고도 함께 말하기를 함께 도을 것을 원하였다. 
광억(光億)씨가 다시 절하며 말하기를 "지난 신유 연간(辛酉年間)에 각문(各門)의 선부형(先父兄)들이 통문(通文)을 내어 문씨(文氏)의 예전 묘(墓) 퇴폐한 것을 손보고 위토(位土)를 두어 수호하게 해준 것을 광억(光億)이가 마음 속에 느껴 새긴 지 오래이다. 지금에 이 판서(板書)가 다시 외후손의 집에서 나오고 제공(諸公)들이 모두 도을 것을 원하니 이 본손 외손의 구별없이 위선(爲先)의 정성이 하나인 것을 알겠노라. 하고 이에 마침내 서로 함께 재목을 모으고 일을 동독하여 몇 달이 안 되어 공역(工役)을 마쳤다. 이에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을 이룬 것이니 또한 이른바 수(數)가 아닌가? 
여각(閭閣)이 이루어짐에 나한테 기(記)를 청하나 나의 누추한 글이 효자공(孝子公)의 명덕(名德)을 더럽힐까 저어하여 재삼 사양했으나, 그 청(請)이 더욱 강근함으로 내가 공경함을 지으며 문군(文君)은 진정효자(孝子)의 후손이구나 하였다. 문씨(文氏)가 수세(數世) 이래로 방선조(傍先祖)를 제사 지내지 못한 자 4, 5가(四五家)였으니 문군(文君)이 모두 힘을 다해 위토를 마련하고 산소를 손질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므로 내가 일찍 가만히 그 사람됨을 흠모했었는데, 지금 와서 이 일을 주선하여 수백년(數百年) 버려둔 일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사람에 매였다 한 것이 그 군(君)에게 있음이다. 이에 시경(詩經)의 불궤(不濫)의 글귀를 외우며 석류(錫類)의 축원을 한다.

 

11세  

감천군(甘泉君)(龜)  일명: 귀  시호 : 경양(敬襄)

안동부 감천현에서 출생
조선국 초 좌정승 역임하시고 감천군에 봉함 감천군파 파조가 되시다.

좌정승(左政丞) 휘 구(龜) 신도비 병서 1967년 대구광역시장 방예 희갑(熹甲) 삼가 지음

공의 휘는 구(龜)요 시호는 경양(敬襄)이며 성은 문씨이니 시적(始籍)은 남평이다. 조선국초(國初) 좌정승을 역임하시고 감천군(甘泉君)에 봉군(封君)되어 감천파(甘泉派) 원조(元祖)이시며 안동부(安東府) 감천현(甘泉縣)에서 태어났다. 휘 다성(多省) 시호는 무성공(武成公) 자는 명원(明遠)이요 호는 삼광선생(三光先生)이며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 보국상주국평장사(金紫光祿大夫三重大匿輪國上柱國平章事) 삼한벽상공신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이 비조(鼻祖)이시다.휘 익(翼) 고려 상서좌복야 시호 경절공(敬節公)의 12세손이며 강성군 시호 충선공 휘 익점과는 사종간(四從間)이다.(경절공 11세로 정정됨)
집현전태학사 휘 득걸(得傑) 시호 양간공(裏簡公) 휘 극명(克明) 중랑장(中郎將) 휘 원길(原吉)은 고조 증조 조부이시고 아버지의 휘는 재도(載道)이니 벼슬이 평해군사(平海郡事)로 왜구가 영천(榮川)에 침입 약탈과 살인을 자행(恣行)할 때 관원(官員)들은 중과부적으로 피신하였으나 공(公)은 부친을 모시고 관아(官街)를 사수(死守)하며 적을 토벌, 퇴치하여 평정하니 연안(沿岸)까지 평화(平和)가 회복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침입한 왜구들을 물리침으로써 고려 공민왕23년에 정려(旌閱)가 내리니 지금 영주 시내(榮州市內) 소재 효자리(孝子里) 비각(碑閣)이 그 때에 세워진 것이다.

아, 임진왜란으로 문씨 일문(文氏一門)이 화를 입어 이후 4백여년 간 공(公)의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자손들이 밤낮으로 몹시 슬퍼하던 중 감천면(甘泉面) 대덕산(大德山) 임좌원(壬坐原)에 한 고분(古墳)이 우뚝 서 있으니 예로부터 향리에서는 문 정승묘(政丞墓)라는 전설(傳說) 아닌 정설(定說)로 이어온 지 오래다. 장구(長久)한 세월 수호하지 못하였는데도 봉분은 왕릉(王陵)과 비슷하고 남아있는 문관석 (文官石)과 상석(床石)은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과 유사하며 지명(地名) 또한 재사(齋舍) 골이다. 문 정승(文政童)의 99간 재사(齋舍)가 소재(所在)하였다는 자리에는 고와(古瓦)가 출토(出土)되고 초석(礎石)이 남아있는 등 미루어 볼 때 조선국초(朝鮮國初)의 좌정승(左政丞) 감천군(甘泉君)의 묘소(墓所)가 와전이 아닌 정설(定說)임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오종대동보(吾宗大同譜)에도 감천 대덕산(甘泉大德山) 임좌향(壬坐向)이라 기록(記錄)이 있어 묘를 찾아 가토(加土)하였다.

사적을 적은 책이 불타고 오랜 세월 병란으로 여러 대의 서적은 남김없이 잃어 버려져 공(公)의 생졸 및 배위(配位)와 벼슬하신 내력 등 행장(行狀)이 미상(未詳)하니 기송(祀宋)을 면하리오.  그러나 퇴계(退溪) 이황 선생이 지은 공의 5세손(五世孫)이며 퇴계의 처외조(妻外祖)인 군수(郡守) 창계(滄溪) 휘 경동(敬仝)의 묘갈명(墓謁銘)과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이 지은 공의 6세손 참판 매계공(梅溪公) 휘 근(璉)과 장령(掌令) 죽계공(竹溪公) 휘 관(鑛) 형제 묘지명(墓誌銘) 그리고 기 묘사초록에 공이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였음을 기징(記徵)하였으니 미루어 살피건대 벼슬하는 가문을 세습한 충효가정에서 탄생(誕生)하여 타고난 기상이 총명하고 정신과 풍채가 깨끗하고 밝아 성품(性品)이 단정(端正)하고 공손하고 겸손하여 지행(志行)이 돈독(敦篤)하였음을 가히 알 만하다.

또한 재주가 뛰어나고 학덕(學德)이 비법하지 않았으면 일국(一國)에 막중(莫重)한 재상(宰相) 지위에 있었으리오. 무릇 재상이란 충심으로 군주(君主)를 보필(輪漏)하고 덕망(德望)으로 여민(黎民)을 선치(善治)하는 자리이니 평생 이력과 덕행을 미루어 알겠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선대의 업을 잇고 그 화려함을 헤아릴 수 없으니 공의 음덕이 무궁함을 십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일남 일녀를 두었으니 아들에 한영(漢英)은 벼슬이 종부시(宗簿寺) 문과 내부령(文科內部令)이요 딸은 순흥인(順興人) 안축(安軸) 흥령군(興寧君) 시호 문 정공(文貞公)이며 소수(紹修)서원에 배향되었다. 의성인 사헌부대사헌 김숙 량(金叔良)과는 남매지간(男妹之間)이다. 
손자에 숙기(淑器)는 문과 보성감무(寶城監務)요 증손 사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손관(孫貫)은 안동판관(安東判官)과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며 손무(孫武)는 성균생원(成均 生員)이고 다음 손발(孫發)은 감사(監司)이시고 손찬(孫瓚)은 막내로서 통례(通 禮)이다. 그 후손이 감천파(甘川派) 네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 손관 (孫貫)의 아들 인(認)은 문과 동정(同正)이요 큰 딸이 철성인(鐵城人) 이 참의(李參議)이고 둘째 딸은 옥천인(添川人) 전희철(全希哲)로 무과 상장(將)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4백여 년(四百餘年)을 소급(湖及)하여 임진왜란이야 말로 민족의 수난사상 7년이란 치욕적 참상은 현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문정자동(文亭子洞)에서 평화롭게 살던 오문(吾門)이 일시에 화를 입히었다. 사기(史記)에 기록된 것만 볼 때 공의 10세 손 응주(應周)는 부친을 업고 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는데 난후(亂後) 인조 때에 충효 정려(旋閭)가 내려지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정려를 찬양하는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 배 함양여씨(呂氏)는 증정부인(贈貞夫人)이 되었다. 공의 9세 손부 남양홍씨(南陽洪氏) 10세 손부함양여씨(呂氏) 11세 손녀 등 양대(兩代) 부녀가 임진왜란 중에 적을 만나 굽히지 않고 임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으므로 일가(一家) 삼부(三婦)가 되었으니 그 참상은 붓으로도 기록하기 어려운지라 애통함 극에 이르렀다. 난후(亂後) 광해군 임자년에 정려(旋閭)가 내리니 현 의성군 다인면에 있고 전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으며 식암(息蓄) 황섬(黃暹) 선생이 여찬(閭撰)하였고 삼강실록(三綱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후예 경옥(炅玉) 현덕(顯德)이 세계(世系)를 대략 초하여 가지고 불초의 공관(公館)에 찾아와 신도비명을 청(請)하니 감당할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재삼 강권하고 불초 또한 방예(傍裔:후손)로 효심에 동감하여 불구여필(不拘閭筆)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영남의 명문이요   남평의 세족이니  대대로 벼슬을 계승하고   시서와 예의를 이었네. 
오직 충성과 효도로  가문의 명성을 세상에 떨치고  커다란 나무처럼  자손이 번성하니 
많은 사람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신할 수 없다.
공의 생활이 올 곧으니 시류에 물들지 않아 오직 소박하였고  학문을 쌓고 덕을 심으니 
일백세에 본보기가 됨이라  몸을 닦고 가정을 거느림에 절도가 있고   
나라를 평안히 다스리고 세상을 도우니   신분은 재상에 이르고 뭇 백성에게 은택을 입혔다.
오랜 세월 속에 산천이 변하고  아무 증거도 없이 모두 없어지고
비석과 석물(石物)이 사라져 버리니  자손들의 한스러움이 더하였다.
이제야 자손이 힘을 모으고 계획을 세워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서
비석을 세워 가문을 부러워 하게 하고   숨은 덕을 크게 밝혔으니 
감천군께서 더욱 빛나누나 큰덕이 상서러움으로 엉켜지고 
내가 그 아름다움을 터 닦아  이제야 견주어 비석에 기록하노라
그 덕에 향기가 있고 그 큰나무 높은 산처럼 고요히 우러러 보며
일천년을 드릴 제사에  신중히 조심스레 올리리라

좌정승에 대한 해설 : 순흥안씨 문순공(文順公) 안축(安軸)의 아들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 의 묘비명이 동문선(同文選) 120권에 실려 있다 그 비명에 "감천군부인(甘川郡夫人)에게 장가들었으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구(龜)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안종원은 삼우당 문익점(文益漸) 선생보다 5년 먼저 출생하였으며, 문구(文龜)의 벼슬 또한 검교군기감이니 시대적인 배경과 관작을 상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7세 남제공파

  영희(永禧)

경신대동보에는 통사랑을 지내시고 배위는 탐라고씨라 하였고
임신보에는 집현전태학사를 지내시고 부인은 탐라고씨인데 한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함

 

 8세 남제공파

  (愼) 동지총관공     

원나라는 다루하치부와 총관부를 두었는데 고인단으로 총관을 삼고 적은 총관부가 되었으며
문신은 동지총관이 되었는데 얼마후에 이를 파하고  군민안무사부를 설치하여 탐라적으로 다루하치를 삼았으며 고인단은 안무사 문창우(문신의 아들)는 부사가 되고 청종 도달은 동지사 채유인은 첩사가 되어 관부의 일을 행하였다.<탐라지 고적조>

1276(충렬왕2년) 원나라가 군민총관부를 설치했는데 고인조를 총관으로 적을 총관부로 삼고 문신을 동지총관으로 삼았다<남환박물지 지적조>

 

 9세 남제공파

창우(昌祐) 탐라왕자 1세

     창우(탐라왕자1세)-공제(탐라왕자2세)-승서(탐라왕자3세) -신보(탐라왕자4세)

왕자의 휘는 창우요 고조는 대제학 휘 착으로 이분이 처음 탐라로 건너오신 시조이시다.
고홍진 읍지에 이르기를 문씨는 처음에 보성군 복성현 사람인데 탐라에 와서 고씨에게 사위들고 그 자손은 고씨에 이어 왕자된 사람이 있다 함은 이를 말함이다.
휘 착은 양부를 낳았고 양부는 영희를 낳았으며 그 손자에 이르러 왕자가 되었는데 고려에 벼슬하여 원종때에  비로소 봉작을 받으므로써 그 아들 공제에게 전하였고 공제는 그 아들 승서에게 전하였으며 승서는 그 아들 신보에게 전하였고 신보는 그 아들 충걸에게 전하였으며 충걸은 그 아우 충세게 전하였으니
탐라왕자로 된 것이 무릇 6세(世)요  133년이다.
현덕문의 탐라기략에 따라 상고하면 왕자시봉원년 경오는 남송 함순 6년인데 이때에 원의 반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이끌고 귀일촌에 옮겨 토성을 쌓고 애월에 목성을 쌓아 험한 것만을 믿고 침략을 일삼으니 왕자가 고려조에 주달하였다.
이에 원종은 김방경에게 명하여 장병과 함께 몽고군과 더불어 일만병력과 첨함160척으로 협격케하니 함덕포와 비양도 등지에서 적의 무리를 섬멸하였으므로 백성이 안도하였다.
1세왕자 5년 갑술에는 원이 초토사를 두었고 동6년 을해에는 원이 탐라라 이름을 부활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와서 지키게하였다
1세왕자 7년 병자에는 원이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임유간이 와서 빈주를 취하여 갔고
1세왕자 12년 신사에는 원이 일본을 정벌코자하여 탐라사로 하여금 전함 백척을 만들게 하여 일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몽고군 1,400인을 보내와서 수직케 하였으며
1세왕자 24년 갑오에는 충렬왕이 원에 청하여 탐라를 고려에 환속케 하였다.
2세왕자 원년 경자(원 대덕4년) 동서도현을 설치하였고 원의 기황후가 구마를 보내와서
                   방목하였으며 처음으로 목자(牧子)를 두었다  
2세왕자 6년 을사에는 탐라가 다시 고려에 환속하였다.

3세왕자는 그 기록이 읍지에는 볼 수 없고 가첩에만 있어 연표와 사적은 상고할 수 없다.

4세왕자 원년 임자는 명나라 홍무5년으로서 명의황제가 예부주사 엄밀을 보내어
                   탐라말 2천필을 요구한 일이 있고
4세왕자 3년 갑인 원 목자 합적등이 난을 일으켜 고려 도통사 최영이 3도병력 25,000으로  
                  명월포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5세왕자원년 을묘에 토적 차현유의 무리가 역모를 꾀하여 난을 일으키니 고려조정에 청병해
                  이를 처형하려다가 그대로 그 죄목만을 바르게 하였고
5세왕자2년 병진 왜선 600여척이 침입하였을때 성주 고신걸과 더불어 방어하였다.
5세왕자18년 이태조원년에는 향교가 섰으며
5세왕자19년 계유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여의손을 보내어 제주만호겸 목사로 삼았다.

6세왕자 원년 임오는 태종2년인데 봉토헌납을 청하였고 조선에서는
                   도지관이라 개칭하였으며 이로부터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직품을 관장하였다.

슬프다. 이 사적을 고쳐 서로 요점을 따본다면 처음과 끝이 송나라, 명나라사이이요,
뚜렷하지 않은 것과 사실과 다른 것이 겹쳐져 있으니 말을 한들 어찌 하리요.
어느것을 취하여도 착오를 면하기 어려운 바 차라리 전기나 정사로 상고함보다 야사로 상고할 일이니 그 찬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바다와 산악의 정기가 뭉치어  기이하신 왕을 내시었다.  
그 덕이 빛나니  곤의와 수상으로 영화를 누리었다.

백삼십여년간을 지내도록 왕업을 딱아 어질고 어진 정치를 하였으니
5대에 여섯왕이 계승하였다
임신(1932)정월     탐라왕자 세기(이응호 : 한학자 경주)에서 발췌함

탐라왕자(耽羅王子) 휘 창우(昌祐) 사적(事蹟)

공의 휘는 창우(昌祐)요 남평문씨 시조 무성공 다성(多省)의 후예로서 남제공(南濟公) 착(言卓)의 5세손이다. 처음에 고려의 탐라부사(耽羅副使)로 재임하였다가 1370년(원종11) 감란구민(勘亂救民)의 공을 세워 탐라왕자 1세에 봉작되고 충렬왕 35년까지 30년간을 재위했다.
당시 원(元)의 침공을 받은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쟁하였으나 고종 46년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고 고려 태자의 원나라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하여, 삼별초군의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裵仲孫) 등 삼별초군이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받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강화도 백성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재물과 자녀들을 천여척의 배에 싣고 진도로 옮기어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관군에 항전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반군이 다시 남쪽으로 옮길 것을 대비하여 전라도 안찰사 권단(權旦)에게 지시해 부사(副使) 김수(金須)에게 200여 명의 병력을 주어 탐라도로 파견하여 수비케 하였고, 탐라에서는 1세 왕자와 협력하여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축조하는 등 반군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 해 11월 반란장 이문경(李文京)은 병력을 이끌고 명월포(明月浦)로 침공하여 1세 황자는 스스로 중군이 되고 진무(鎭撫) 김유성(金有星)을 대장으로 하여 일만 군사와 오천 기병으로 김수(金須)의 고려군과 합세, 이를 공격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하자 그 대책에 부심하게 되었다. 
마침 고여림(高汝霖)이 화북포(禾北浦)로 50척 전선에 일천 병력을 거느리고 찾아 왔으므로 동제원(東濟院) 입구에 포진 반군 소탕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 때 반란장 이문경이 진격하여 송담천(松淡川) 전투에서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고 수륙교통의 요충인 조천포(朝天浦)까지 이르고 고려군은 정수와 고여림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된 반면, 진도와 탐라에 거점을 둔 반란군의 기세는 날로 드높아져서 남해 내륙에까지 위협을 가하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원장 아해(阿海)를 흔도로 교체하는 등 여원(麗元) 연합군의 진용을 재정비하여 400여척 전함 병력으로 진도를 공격케 하여, 원종 l2년 5월에 이를 함락시켰다

이 때에 반군측은 온(溫)과 배중손 등 많은 장졸이 죽었고 부장인 김통정(金通精)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그 해 여름에 탐라의 북부 해안인 귀일촌(貴日村)으로 상륙하고, 남해 반란장 유존혁(劉存麥)의 80척 전함 병력과 합세하여 항파두리(缸竣頭里)에 진주하고 원종 13년 써름 내외토성을 쌓는 한편 애월포구에 목성을 축조하여 그 험난한 것만을 믿고 상시로 출몰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에 1세 왕자 문창우는 성주 고인단(高仁旦)과 더불어 고려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여 그 해 8월 원장(元將) 홍다구(洪茶郵)를 선발로 파견, 김통정(金通精)의 조카인 낭장(郎將) 김찬(金贊)과 이소(李郡) 등 5인을 반군 진영으로 보내어 회유와 설득을 시도했으나, 불응할 뿐 아니라 조카 정찬을 제외한 일행을 모조리 죽이는가 하면, 원종 14년 3월에는 방수산원(防守散員) 정국보(鄭國甫) 등 15인을 주살하는 외에 낭장(郎將) 오단(吳旦) 등 18인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 진압은 여전히 시일만 지체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 해 5월 중군원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 흔도 등 160척 전함에 일만 병력으로 탐라를 지원 공략케 하였다. 여원연합군은 추자도에서 바람을 기다렸는데 하룻밤 북풍을 이용한 중군원수 김방경은 30척 전선 병력으로 서쪽 명월포로 상륙하였으며 좌익장(左翼將) 고세화(高世和)와 장군 나유(羅裕)가 이끄는 군사는 동쪽 함덕포(咸德浦)에 당도하여 바위틈에 은신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반군을 무찔러 상륙하고 반란장 이시화(李時和)를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동서에서 반란의 본거지 항파두리 외성으로 쇄도하여 내성으로 불화살 4발을 발사해 방화하고 일제히 쳐들어가니 김통정의 처 이화선(李華仙)은 남복으로 변장, 말을 타고 도망쳤으며 김통정도 일당 70여 명과 함께 산중으로 도주하였는데 병기제조 책임자인 조시적(曺時適)은 항복하였고 잔당 수괴 김원윤(金元允)은 참살되었으며 나머지 반군 일천삼백 여명은 생포가 되어 고세화(高世和)의 영솔로 전함에 나누어 타고 회군하였으므로 삼별초반군의 대세는 진압되었다.

이때에 1세 왕자 문창우는 성주(星主)와 더불어 고려군의 대승과 국내 평정을 기뻐하여 군량과 우주(牛酒)로 삼군을 위로하였다. 그 후에도 원군 오백과 송보연(宋甫演) 장군 등 영군(領軍) 일천 병력이 머무르며 잔당 소탕을 계속하였는데 그 해 6월 김통정(金通精)은 목메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마지막 잔당 김혁정(金革正)과 이기(李奇) 등 70여 명은 생포되어 원장 흥다구(洪茶郵)에게 보내어져 주륙당해 삼별초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삼별초난 평정 이후 원은 탐라(畿羅)가 일본까지 가는 중간 위치의 전략 요충인 점에 주목하여 원종 15년에 초토사(招討使)를 두었고 충렬왕 3년에는 초토사를 고쳐서 군민총관부(軍民總管府)를 두었으며 충렬왕 10년에는 다시 군민총관등으로 탐라는 원의 속국이 되어 천여 명 이상의 원병이 수비 명목으로 주둔하여 빈번하게 교체되는가 하면 일본 정벌의 전초 기지로 삼아 군량조달과 일백 척의 병선 건조를 명하는 등 폐해가 막심하였는데,
1275년(충렬왕 원년)과 l281년(충렬왕 7)등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정벌은 태풍과 역질로 모두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탐라 백성을 고려로 강제 이주케 하는가 하면 원의 도범(盜犯) 일백여 명을 유배하여 오기도 하였고, 모시 ·포 일백 필씩을 세공으로 바치게 하였으며 민간 소장의 빈주를 거두어 가기도 하였다. 또한 동서아막(東西阿幕)을 세워 말 ·약대 나귀 ·염소 등을 싣고 와서 사육하고 달로화적(達魯花赤)을 파견해 감독하고 목장을 주관하는 단사관(斷事官) 만호(萬戶) 등을 배치하는 등 원나라의 지배로 심한 곤욕을 당하게 되자 1세 왕자 문창우(文昌祐)는 여러 차례 원나라에 주청하여 고려에 속하기를 원한 바 원나라의 승상 완택(完澤)의 도움으로 1294년(충렬왕20) 5월에 고려로 환속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삼별초난 평정과 그 이후의 치적을 높이 찬양함과 동시에 원으로부터의 고려 환속에 진력하였다 하여 그해 11월 역어낭장(譯語郎將) 정공(鄭恭)과 임양필(任良弼)을 보내어 1세 왕자(一世王子)에게 홍정(紅努) ·아홀(牙箥) · 모개(帽蓋) · 화개(靴蓋)를 전달 치하하였다.
배(配)는 원주원씨(原州元氏)와 탐라고씨(點羅高氏)요 아들로는 공제(公濟)를 두었다

 

10세 남제공파

  공제(公濟) 탐라왕자 2세  

탐라지에 1318(충숙왕 5년) 난적 사용, 엄복등이 병정을 모아 난을 일으키니 와자 문공제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적들을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1300(충렬왕26)원나라 태후는 다시 말을 방목하고 인조의 아우 수좌로 성주로 삼고 공제로 왕자로삼았다.

 

11세 남제공파

  승서(承瑞)  자 : 현조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해 부승지로 공충도수사를 지냄 
          1467(세조13) 이시애의 난을 토평하여 조석문 등과 함께 녹훈함

 

12세 남제공파

  신보(臣輔)경절공 12세 탐라왕자 4세

고려사 4권 282의 기록은 1375(우왕1년) 제주인 차현유등이 관해를 불사르고 안무사 임완과 목사 박윤청과 마축사 김계생들을 죽이고서 반하거늘 문신보와 성주 고실개와 진무 임언과 천호 도덕명들이 군사를 일으켜 다 주살하였다.
탐라지에 1372 비고초등이 동서합적이라고 자칭하고 괄리를 살해하였으므로 왕자 문신보가 그 아우 신필을 보내어 왕에게 보내니 2년후(1374) 합적을 토멸하였다.

 

9세 신순평군파 파조

  달한(達漢) 충익공(忠翊公)

고려 충숙왕6년(1337) 남평에서 출생하여 이교의 따님 고성 이씨와 배혼
우왕때 대호군을 제수받고 동지 밀직사사로 영전하여 충익대보조공신의 호를 받음
경기, 충청, 경상도 도체찰사로 왕명으로 군대를 순시중 왜적 1000명을 소탕함
원나라로 우왕을 배행 하던 중 말을 탄 채 물을 건너려는 왕을 위험하다고 만류했다가
   왕의 길을 막았다하여 삭탈관직까지 당하고
찬성사가 된후 헌사(憲司)의 탄핵으로 합포, 철원으로 잠시 귀양을 다녀오시고
삼사우사를 임명 받은 후 이임의 탄핵 받아 다시 유배를 당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고, 순평군에 봉작(新增東國輿地勝覽 제36권 全羅道 南平縣)
순평군 태조원년으로 봉직하던 56세 6월16일 별세하시고 
저산서원에 배향

문달한(文達漢)전(傳)        고려사 제27권

문달한(文達漢)은 고려 평장사(平章事) 극겸(克謙)의 6세손이다. 우왕 때에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고 여러 벼슬을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의 호를 받고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승진하고 평리(評理)에 옮겨졌다 양광(楊廣) 경상도 도체찰사(慶尙道部都體察事)가 되었는데, 우왕 39년 8월 왕이 명(命)하기를 "가서 장수의 부지런하고 게으름과 사졸의 강약을 살피고 그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거든 가두어 명을 기다릴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곧 처단하라"고 하였다당시  왜적 천여명이 옥천(沃川) 보령(保寧) 등의 고을을 함락하고 개태사(開泰寺)로 들어와 계룡산(鷄龍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문달한은 왕안덕(王安德) 도흥(都興)과 더불어 공격하여 적(賊)들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자 공주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과 판관(判官) 안자호(安子浩)가 구점(仇岾)에서 싸우다 자호(子浩)가 패하여 죽었으므로, 달한이 또 안덕 (安德)과 흥(興), 김사혁(金斯革) 안경(安慶) 박수연(朴壽年) 등과 더불어 공주(公州) 반용사(盤龍寺)에서 싸워 팔급(八級)을 베었다.
그 후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니 물이 바야흐로 불어서 깊고 얕음을 측량할 수 없었다. 왕이 말을 타고 건너려 하니 달한이  "물의 깊고 발음도 가히 알지 못하는데 어찌 갑자기 들어감이 마땅하리까" 하고 만류하였는데, 별안간 사냥꾼 한 사람이 물을 건너가 짐승을 쏘는지라 우왕이 크게 노(怒)하며 "만약에 물이 깊다면 저 사람은 날아서 건넜느나? 문평리(文評理)가 나를 속였도다"하고 곧 달한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 출입을 금지하고 이어 벼슬을 깍았다.
오래된 후 최영(崔瑩)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최단(崔鄭)을 보내어 우왕에게 아뢰기를 "달한은 우직으로써 어지(御旨)를 거슬리고 집에 있어 억울하니 청컨대 출입을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허락하거늘 최영이 정방(政房)에 있으며 달한의 직책을 회복시켰다.
우왕이 달한의 이름을 보고 말하기를 "지난 번에 단(鄲)이 김실(金實)을 시켜 달한을 용서하도록 청하더니 벌써 죄를 면하였느냐?" 하고 붓을 잡고 글귀를 없애버렸으며 또 단(鄲)과 실(實)의 직(職)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렸다.
이어 달한을 기용(起用)하여 평리(評理)를 제배(除拜)하고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寶祚功臣)의 호를 더해 내렸다. 찬성사(贊成事)로 오름에 헌사(憲司)가 탄핵하기를 "달한이 외척을 빙자하여 탐람(貪勢)을 방종히 하였다"고 하므로 합포(合浦)에 귀양보냈는데 도당(都堂)이 가까운 지역에 두기를 청하여 철원(鑛原)에 옮겼고 이어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제배(除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함에 대간(臺諫)이 서로 상소의 글을 올리기를 '달한이 이림(李琳)의 매서(妹壻)로써 정사에 참여하여서 불의를 방자히 행하거늘 이림의 족속이 모두 이미 귀양되었는데도 달한은 홀로 도중(都中)에 있으나 청컨대 관직을 거두고 내쫓으소서' 하므로 이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 공양왕 4년에 순평군(順平君)을 봉하여 졸(卒)하였다 아들은 계종(繼宗) 효종(孝宗)이다.

신도비명 병서   정사년 세모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 찬(撰)

가원이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의 사적에 이르러 무릎을 치며 여러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하므로 그 명성이 온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나매 청고한 명망이 더욱 높아져서 영특한 풍모와 궅센 절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공주 추동 금계산 갑좌좌에 모시었는데 예전에 전해오던 신도비가 어느 시대엔가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 수손들이 다시 세우려 종성과 중대가 협력하고 일이 이우러지매 원모와 세훈이 공의 실기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 배명을 청하였다.
공의 휘는 극겸이요 자는 덕병이요 남평문씨니 시조는 신라 태사 무성공 다성이요 고려에 들어와 좌복야 경절공 익이 조부이시며 아버지 공유는 지문하성사 집현전 태학학사이며 시호는 경정이시다  어머니는 장단한씨로서 평장사 물렬공 안인의 따님이시다. 공은 예종 17년(1122)에 전남나주군 남평면에서 탄생하셨으며 백부 공인의 공으로 산정도감판관의 직을 얻었다 당시 제도에 평민으로는 열번이라도 가거에 응시할 수 있으나 부조의 공으로 음직에 있는 사람은 세 번이상 응시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공은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제도의 타당치 못함을 개탄하고 다섯 번까지 응시하게 헤 줄 것을 청원하여 조정의 의논이 이를 따랐다. 그후 공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아니하여 의종 12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에 이르렀으며 의종 17년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환관 백선연이 권세를 함부로 부리어 궁인 무비와 추한 행위를 하고 있으며 점술ㅇ니 영의는 요사한 술법으로 임금께 사랑을 받고 백순관 북쪽에 두궁을 두고 재화를 사축하여 복을 빌고 재를 올리는 비용으로 쓰고 있으면서 백선연과 함께 그일을 하고 있사오니 양계의 병마사와 오도의 안찰사가 임금께 하직할 때 반드시 술자리를 차려 각기 방물을 바치게 해서 그 실적의 상하를 매기고 심지어 재화를 추렴하여 백성의 원망을 일으키며 지추밀사 최부이는 요직을 맡아 조정 안팍으로 세도를 부리어 탐욕이 한없고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중상을 일삼아 재물을 모아 쌓음이 많사옵니다. 청컨대 백선연과 무비를 베고 영의를 몰아내어 목축하는 사람으로 충당케하고 최부이를 파직시켜 온라라에 알리소서  하고 궁중의 일까지 언급하매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소를 불태워 버렸으며 최부이가 궁실로 들어가 변명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 ㄷ질을 시키매 공이 지극히 적절했으나 마침내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처음에는 공이 그 소장을 초 잡을 때에 간의대부 이지심과 급사중 박육화와 기거주 윤인첨등은 상소문에 서명함을 회피하더니 공이 좌천되어도 그들은 태연자약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같은 동료 영걸들은 어이 그리 뻔뻔한가 라는 시구를 읊어 충자하였다 공이 황주에 있을 때에 아전과 백성들이 흠모하고 선정으로써 명성이 자자했으나 다시 중상을 입어 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담당관이 아뢰기를 극겸은 곧은 신하인데 오랫동안 지방에 두어 올바른 언론의 길을 막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의종 24년에 합문지후를 제수받고 전중내급사로 옮기었다 그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매 공은 마침 성중에 숙직하다가 이를 피하려 하였으나 뒤쫓아온 병사에게 잡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전에 정언이었던 문극겸이다. 임금께서 만약 내말을 따르셨다면 어찌어런 경지에 이르렀겠느냐. 원컨데 그 칼로 나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 병사가 이상히 여기고 공을 잡아 여러 무장앞에 이르니 무장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름은 평소에 들은 바 있으니 죽이지 말고 가두라고 하였다. 의종이 남쪽으로 가는 길에 말위에서 한탄하기를 내 일찍 문극겸의말을 따랐던들 어찌 이런 욕을 당했겠느냐고 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관직을 주매 공을 석방하여 비목을 쓰게 하였으며 이의방의 건의로 공에게 우승선 어사중승을 제수하매 이공승 같은 문신들이 이에 힘업어 화를 면했고 무신도 역시 공을 존경하여 옛일을 많이 자문했다. 그리고 이어 용호대장군을 겸하였고 재상이 된 후에도 여전히 상장군을 겸하셨다. 공의 딸이 이의방의 동생 이인의 처가 되었으므로 계사년의 난에 온가족이 화를 면하였다  명종원년에 좌간의 김신윤 등은 공이 승선으로서 대성의 벼슬을 겸하여 부당하다는 이유를 들어 상소하였고 또 간관들이 간쟁하므로 공이 대부 소경으로 옮기었다. 어느날 근신들이 왕의 장수를 비는 술자리를 베풀어 밤이 깊도록 파하지 않고 점점 시끄러워지자 공이 간하기를 이런 일은 성왕이 폐위당한 원인이라 고 말하고 왕을 권하여 안으로 들 게 하였다.
명종3년에 예부시랑으로 옮겼다가 추밀원지주사가 되었으며 지원사로 승진되었으나 송유인과 틈이 있어 수 사고좌복야로 좌천되었다. 사공에 임명된 후로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에서느 ㄴ그 철렴함을 칭송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해를넘기고 기복되어 전직에 복귀되었다가 후에 참지정사가 되고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 태자태보로 오르셨다. 그때 동짓달에 거행해오던 팔관회가 태후의 제삿날과 상치되므로 10월로 당기자는 예관의 건의가 있자 왕이 재상부에 문의하여 공이 변경할 수 없음을 역설하여 종전대로 확정되었다
명종15년 판예부 부사가 되었을 때 문관으로는 한문준이 석차가 둘째이고 다음으로는 공이었으며 그 다음이 최세보였다. 한문준이 가장 윗자리에 재상으로 판이부사가 되매 공은 당연히 다음 자리에서 재상이 되어야 함에도 그 자리를 최세보에게 양보하니 당시 아는 이들이 그 도량을 찬양했다. 이듬해 중서문하 두성의 판 병부사를 겸하고 그 다음해에 권판상서이부사에 오르셨다.
그수 명종19년(1189) 9월 병인일에 68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충숙의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이씨이니 추밀원사 시민의 따님이다
삼남삼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증 평장사요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는 태상경이요 차거수는 태북시사이며 이인은 내시부집주관이다.신종5년에 명종묘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고간원을 사액하고 송호, 저산, 장연의 여러 서원에 모셨다.
※명은 생략합니다.(원문은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171쪽에 있습니다.)

 

10세 순평군파

호간공(簡公)  효종(孝宗) 1365(공민왕)~1344(세종26)

부친 달한의 음보로 무관으로 입조해 조선 개국후 첨총제사가 되고 
1409(태종9) 풍해도(강원도) 첨절제사(
使)에 오름 
1412년 삼군별시위가 설치되면서 동지총제(
)를 제수하였다.
1418(세종 즉위) 좌금위일번절제사(
使)  
1421년 봄에 모친상으로 사직하였으나 1개월 뒤 좌군총제(
)를 지냈다.
1425년 (세종7) 진향겸 등극부사가 되어 명에 다녀옴
1427년 우군도총제(
) 1431년 좌군총제가 되었다. 1432년 중추원이 복설되면서 중추원동지사(), 이듬해 중추원 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중추원판사를 지내고 치사(), 궤장(궤)을 받았다.

치사(致仕:벼슬에서 물러남)    당상관(堂上官) 정三품 이상의 관원으로서 나이 七○세가 되면 치사를 허락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이들에겐 『봉조하(奉朝賀)』란 칭호를 주고 종신(終身)토록 그 품계(品階)에 알맞는 봉록(俸祿)을 주었고 국가적인 의식에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게 했다.
봉조하(奉朝賀)  예종(睿宗) 때 처음 시행되었고 정원(定員)은 15명이었으나 뒤에는 정원을 폐지했다

궤장(궤杖) 나이 70을 넘어도 치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때 正一品에게는 임금이 특별히 팔을 괴고 몸을 기대는 안석인 궤와 지팡이인 장(杖)을 내리고 궤장연(궤杖宴)을 베풀었는데 이는 개인과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11세 순평군파

 (敏)

1431 호군을 거쳐  1411 판서운관사 이듬해 판통례문사에 이름 
          따님은 세종 직접 선택해 세자의 승휘가 되었다

 

11세 순평군파

   승조(承祚)

세종7년(1425, ) 1418(을묘) 공조 좌랑(左郞)으로 진상할 금안장[金鞍]에 오점(汚點)이 있자 감독 소홀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으나 곧 석방되고  세종 10년(1428, ) 05/22(계유) 사헌부 지평에 임명.
세종 10년(1428, ) 06/26(정미) 박용을 잘못 국문하였다 하여 사직을 청함.

세종 19년(1436, ) 08/25(임오) 부친인 전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문계종(文繼宗)이 졸함.

 처남(妻男) 인손(引孫) 초명(初名) 안주(安柱) 자(字) 조윤(祚胤) 호(號) 석천(石泉)
 처남(妻男) 운손(雲孫)   관(官) 창신교위(彰信校尉)
 동서(同棲) 이붕(李鵬)    관(官) 제주 안무사(濟州 按撫使) 겸(兼) 목사(牧 使)
 동서(同棲) 포(金布) 관(官)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사(善工監事)    거(居) 상주(尙州)

 

11세 순평군파

영안군(永安君)   (致)   시호 : 문성(文成)

정종때 벼슬하여 부호군을 역임 세종대왕 내외육촌 계모임의 계원

부호군(副護軍) 영안군(永安君)공 휘 치(致) 묘표 방후손(蒡后孫) 원모(元謨) 삼가 지음

대개 덕이 깊은 즉 유택이 멀고 공(功)이 높은 즉 은혜가 길이 흐른다
우리나라가 예의의 나라로 덕(德)과 공(功)이 아울러 현저한 분이 많이 있으나 문성공(文成公)처럼 탁위(卓偉)한 이 없으며, 사적이 소상히 사기에 실려 있으니 어찌 흠모하지 않으랴. 공의 성은 문씨요 휘는 치(致)니 남평개국백 무성공 휘 다성이 그 시조이시고 경절공 휘 익(翼)이 그 중조이시다. 8대조는 고려 평장사 시호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이요 증조는 남평부원군(南平府院君) 휘 경(景)이요 조부는 순평군(順平君) 시호 충익공(忠端公) 휘 달한(達漢)이요 부친은 대제학 시호 호간공(胡簡公) 회 효종(孝宗)이요 모친 부인 낙안김씨(樂安金氏)는 감사공 사(泗)의 따님이다.

공은 선 세로부터 충효를 계승하였고, 누대로 높은 벼슬이 빛났으니 가히 성대하다 할 것이다. 공(公)이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셋째 아들 휘 찬(贊)은 서천군수를 지내고 전북 이성군( 완주일부)에
물러나 살았으니 지금 김제에 후손이 번성하여 학덕 높은 선비들이 집안에 많이 나왔고, 공의 아우 서(敍)는 나주목사를 지냈고 후손들이 영암에 살고 있으며, 이 외는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公)이 정종(定宗) 때 벼슬하여 호익시위 좌령부호군에 올랐고 세종 때 세종대왕의 내외육촌계(內外六寸)에 들었으니 상감께서 계 서문을 지어 말하기를 "무릇 지금 사람들이 종족(宗族)만찬 이 없으니 정이 자연 친하고 의(義)가 마땅히 화목하다. 멀다 말아라. 다만 가까우니 번영(무덤에 대해 읊은글)의 아름다운 문장에 홀로 행(行)하니 쓸쓸하다 함은 시인(詩人)이 길이슬퍼함이라. 진실로 혹 서로 친하나 능히 종족을 생각지 않으랴, 만약 곤란한 일 당하면 형제 같은 이 없으니 어려움에 서로 구해주고 질병에 서로 부축하며 길흥과 영욕에 때로 경하하고 조상할 것이니 만약 이 언약을 어긴 자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 하리라" 하였으니 국왕(國王)의 32인 중에 한 분이었다. 수의부위 좌 군부사정 좌익일등공신 (佐翼一等功臣永安君) 영안군 시호 문성(文成)이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세종대왕은 문무(文武)를 갖춘 성군(聖君)이며 동방(東方)의 요순이었는데 공(公)에게 이토록 남다른 대우를 하였으니 만약 공(公)의 위덕과 열공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와 같은 두터운 성전을 입었으리오. 공(公)이 파주에 살다가 돌아가시니 마전 삼화리 앞산 병좌원(丙坐原)에 왕명으로 예장(禮葬)되었다. 배위 정부인 하음봉씨(河陰奉氏)는 소윤(少尹) 안국(安國)의 따님이니 함께 묻히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 참봉 철상(哲庠)이 처음 성묘차 와서 소송하여 위토(位土)를 찾았고, 그 후에 풍우로 무덤과 묘비가 마멸됨에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다시 세우려고 흥연(洪連)이 특별히 태안 몽대(夢垈)의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청하였다. 진실로 동근(同根)의 의(義)로 감히 사양 못하여 고루(固陋)함을 잊고 감히 공(公)의 공덕이 만에 하나를 칭송하여 서술한다. 후손(後孫)들의 성력(誠力)을 각 문(各門)의 대표 명단대로 다음과 같이 별도 기록하고 삼가 내내(來來) 후손들이 창성함을 기원하노라.
(達漢∼孝宗-치)

 

12세 순평군파

송수(松壽)

봉훈대부(奉訓大夫) 행교서교리(行校書校理)공 휘 송수(松壽) 묘표(墓表)
공(公)의 휘는 송수(松壽)이고 자는 몽징(夢徵)이며 본관은 남평인으로
고려 충숙공(忠肅公)극겸(克謙)의 팔세손이다. 조부 계종(繼宗)은 이조에 벼슬하여 성재(省宰)의 직위에 이르고 아버지 승조(承祥)는 사헌부 지평(持平)이었으며 어머니는 복창군(福墨君) 휘 보(譜)의 따님이다. 영락(永樂) 정해년(1407)에 공(公)이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글을 저술하여 명성이 날로 전파되었으며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을과(乙科 제 3인의 급제에 올라 종부직장(宗簿直長)을 보직 받고 얼마 후 부친 상을 당하였다 연속해서 모친 상을 당하니 여묘살이로 예를 다하였다
태종 때 벼슬이 여러 번 올라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으며 갑자년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고 교서관의 교리(校理)였다가 경진년 2월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이 해 여름에 파주 화산의 술좌(戌坐)에 안장됐다. 직위가 덕망과 맞지 않으니 당시에 논의하기를 애석하다고 했다. 출전:남평문씨 세덕록

 

12세 순평군파

  (贊)  호는 명천(明泉)

통정대부 서천군수 역임 서천군에서 처음 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경전을 깊이 연구해 후학을 열었다
어 저산서원에 배향되었고  많은 후손들의 묘와 장산종각은 위토답이 5000평으로 묘소 관리
묘소는 김제군 공덕면 제말리

 군수 명천공(明泉公) 휘 찬(贊) 묘표  계미(癸未) 10월 일강릉(江陵) 유재호(劉載鎬) 지음

공(公)의 휘는 찬(贊)이요 호는 명천(明泉)이요 성(姓)은 문씨요 남평인이니 고려조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이 공(公)의 9세조 되신다
고조 휘 경(環)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요 증조 휘 달한(達漢)은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端蘿補祥功臣) 삼중대장문하 찬성사 순평부원군(三重大匿門下贊成事順平府院君)이요 조부 휘 효종(孝宗)은 이조(李朝)에 판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이니 시호 호간(胡簡)이요 아버지 휘 치(致)는 세종(世宗)의 내외6촌동계(內外六寸同潔)에 참여하고 호익시위 좌령부호군(虎翼侍衛佐領副護軍) 좌익일등공신(佐翼一等功臣) 영안군(永安君)에 기록되고 경기(京畿) 마전군(麻田郡) 서쪽 삼화리(三和里) 앞산 기슭 병좌원(丙坐原)에 예장(禮葬)되었으며 어머니 정부인하음봉씨(河陰奉氏)는 소윤(小尹) 안국(安國)의 따님이니 묘(墓)는 함께 묻히 었다

공(公)이 서천군에서 처음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경전(經傳)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후학(後學)들 열어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으니 사림(士林)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서 저산(楮山) 서원에 배향하였다. 묘(墓)는 전주군(全州郡) 이동면(梨東面) 장산 유좌원(長山齋坐原)이다. 배위 숙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공(公)의 묘(墓) 오른편에 쌍봉(雙封)이다 아들 상경은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이요 네 아들을 낳았으니 명서(命瑞)는 생원(生員)이요 명현(命賢)은 진사(進士)이며 명필(命弼)은 생원(生員)이요 명창(命昌)은 호조좌랑(戶曺佐郎)이다. 명서(命瑞)는 자식이 없고 명현(命賢)의 아들에 세경(世敬)이요 명필(命弼)은 1녀를 두었으니 이세규(李世珪)에 출가하였고, 명창(命昌)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세영(世英)은 소위장군(昭威將軍)이요 세웅(世雄)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낭장(郎將)이고 세걸(世傑)은 참봉이다 세경(世敬)은 자식이 없고 세영(世英)의 아들 응성(應星)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요
세웅(世雄)의 아들 응벽(應壁)은 통덕랑(通德郎)이요 세호(世豪)는 아들 넷을 낳았으니 응락(應洛)은 전력부위(展力副尉)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대행하였고 응하(應河) 응한(應漢)과 응렴(應濾)은 공조좌랑(工曺佐郎)이요 세걸(世傑)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응서(應瑞)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회(應會)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응시(應時)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이다.

아, 공(公)이 잠영세가(替榮世家)의 후예로 벼슬이 군수(郡守)에 그쳤으나 종손(宗孫)이 떨어지고 문헌(文獻)이 유실 되어 그 덕행(德行)을 만(萬)에 하나도 알길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으리오? 옛 비(碑)가 이즈러져 이번에 다시 세우면서 삼가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을 비(碑) 후면에 기록한다.

 

 

8세 판서공파

    간혜공(簡惠公) (瑾) 

충열왕 때 정국의 혼미함을 개탄해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사임 
두아드님과 합천에 내려와  합천 입향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점필제(김종직)님의 시에 있슴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선목리에 단(壇)을 모시고
제향은 고현재(羔현齋)에서 음력 10월 9일 향사를 모시는데
1987년 5월 재단장하였고 인동 장석영이 찬기문을 적고 후손 효제, 용, 경종은 상량문을 쓰고 세훈은 중건량송을 하였다.

                                              ▲간혜공 단소                간혜공 신도비▶

간혜공(簡惠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

영가(永嘉; 경북안동) 권오익(權五翼) 지음(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

공의 휘는 근(瑾)이요 성은 문이니 남평 사람이다. 고려 삼한벽상공신 평장사 남평개국백 무성공 다성(多省)이 그의 시조요, 고려상서 좌복야 산기상시 경절공 익(翼)과 집현전 태학사 경정공 공유(公裕)와 문하평장사 충숙공 극겸 (克謙)은 공의 7세 6세 및 5세조요, 판삼사 효혜공 유필(惟弼)과 검교추밀원사 정민공 증(?)과 공부상서 좌복야 인위(仁渭)와 전리판서 녹천(祿千)은 공의 고조 증조 조요 선고이다.
공은 고려말에 태어나 여러 조정에 벼슬하여 지위가 판서에 올랐으나 나라가 날로 혼란함을 보고 두 아들 전농판사 세봉(世鳳)과 소부감 세인(世麟)을 불러 말하되 우리 삼부자가 조정 중신으로 국가가 날로 위태함을 보고 그 직을 다하지 못할 바에야 일찍 물러가서 후회를 면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벼슬을 저버리고 솔권(率眷)남하하여 합천 대야촌에 표박하였으니 대야촌은 지금 합천읍 소재지로서 옛적 읍호이다.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의 시에 이르기를, "어느 사람이 먼저 동으로 옮겼는고, 대야촌에 표박하였도다"하였으니 곧 공을 가르침이다. 공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전의 조정에서 있었던 문자를 불 살으시고 두 아들 에게 명하기를, "내 이름이 만약 세상에 전한다면 이 모두 너희들 죄니라" 하였다.
그 뒤로부터 일절 왕래를 끊고 숨어 살았음으로 공의 벼슬 때의 업적과 닦은 덕행은 물론이고 생년월일까지 알 길이 없고 묘소는 족보에 이르길 고현(羔峴)에 있다 하였으나 능히 허물어져 찾지 못하였다. 근세에 와서 후손이 부서진 비석 조각을 산하 흙 속에서 발견하였는데 문공지(文公之)라는 석 자와 그 뒤에 판서라는 두 자의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공의 묘소가 멀지 않은 것을 알았으나 신중히 분묘를 모우지 못하고 부득이 단을 모우고 비를 세웠으며 평산군부인 청주한씨도 부제하였다. 대개 묘소가 멀지 않은 곳에 설단하였으니 묘와 같도다. 자손이 신도비를 세우고자 함이 어찌 예(禮)에 어긋나리오. 
부인 청주한씨는 예의판서 희적(希迪)의 딸이다. 남하쪽으로 내려올 때 예의판서와 같이 하였다. 또 박눌수 용전(朴訥未 龍田)의 문집에 보면 공이 한 판서 철충(哲沖)과 노판서 천필(天彈)과 같이 지금 이사리 가수정 현주동에 공유(共遊)하였다고 집록되어있다.
공의 두 아들은 곧 세봉과 세린인데 세봉은 시호가 강헌(康獻)으로 군기소감 진(輸)을 낳고 세인은 사재소감(司宰少監) 헌(憲)을 낳았으며 증손과 현손 이하는 번성하여 대소 벼슬에 많았다. 오호라. 공은 고려의 세신으로 그 나라에 편안함과 근심을 걱정해야 마땅하겠지만 하물며 나라가 없어질 때를 당하여 그 직위에 있어 나라 일을 바로잡지 못하고 힘으로 반정(反正)을 못할진대 차라리 자정함만 못할지니 이것이 곧 공이 문자를 불살으시고 세상에 성명을 숨기며 조용히 산야에 묻힌 그 뜻이 더욱 슬프도다. 


삼가 명하여 이르되
은나라와 상나라 시대에 빛나는 삼자(三子)가 있으니     혹 죽고 혹 간 것이 오직 의(義)로 본 것이다.
의는 각각 당연하나 자취는 따라서 다르고     비록 자취는 다르나 충성은 한가지 이니
이로써 공자(孔子)께서 다 어질다 하시었다.  
고려말을 상론(尙論)컨대 의열의 인(人)이 위의 삼자에 그 짝이 있을까 
헌헌(憲憲)한 문공이여 부자가 중신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힘은 모자라나
정절(靖節)만은 몸에 모았도다.
이름 전함이 죄(罪)이거든 하물며 분자(文字)를 남길소냐  
스스로 고석(顧惜)함이 없음에 한낱 연기에 붙이도다.
터와 묘가 곳을 잃으니 능히 변하고 골짝이 옮기어져  
어찌 또한 아닌 것을 알리요 공의 거소는 낙위(樂爲)되어 있다.
문 자손이 통곡함에 하늘이 조각 비(碑)를 발견케 하니  
세 글자(文公之)와 두 글자(判書)가 증거를 잡음이 이에 있도다.
이에 단(壇)을 모을제 주위를 넓게 하여서   
할아버지는 은회(隱晦)를 일삼고 손자는 빛내는데 힘을 쓰도다
한 번 빛내고 한 번 어두움은 곧 이치(理致)의 떳떳함이요  
염재산이 청창(靑蒼)하고 염잿 물이 종장하니
명(銘)을 새겨 뒤를 밝힘에 길이 윤강(倫綱)을 밝히도다.

 

9세 판서공파

소부감공(少府監公)    세린(世麟) 

함안 수령으로 치적이 높아 송사없는 고을이 되어 왕이 특진시켜 중현대부 소부윤이 됨 
옥산재(합천군 대양면 무곡리)는 세린을 모신 사당으로 70여년이 되어 헐리고 없으며
         위토는 논이 1400평 밭이 400평 임야 15000평임

중현대부(中顯大夫)    휘 세린(世麟) 묘표(墓表)

 공의 휘는 세린(世麟)이요 성은 문씨이니 남평인이다. 시조(始祖) 휘 다성(多省)은 고려 대광보국평장사요 중조(中祖) 휘 극겸(克謙)은 고려 명종조에 우승선 어사대부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시호 충숙(忠肅)이니 명종 묘정에 배향되고 남평읍지(南平邑誌)에 실렸으며, 삼가(三嘉)에는 송호(松湖)서원 전주(全州)에는 저산(緖山)서원을 세워 제향드리고 이 분의 아들 유필(惟漏)은 명종조에 추밀원사 좌산기상시 어사대부(權密院事 左散騎常侍 御史大夫)요 고증조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시호 효혜(孝惠)3)요 4세를 전하여 휘 근(蓮)은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端大夫 版圖判書)니 고려의 국운이 바야흐로 다된 것을 보고 합천 대야촌(大治村)에 남하(南下)하였으니 즉 공의 아버님 되신다. 어머니 청주 한씨(韓氏)는 예의판서(禮儀判書) 희적(希迪)의 따님이시다.
공의 관직은 중현대부 소부감(中顯大夫少府監)을 하였고 함안(咸安)군수로 나갔으니 치적이 있어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사적이 함안지(咸安誌)에 소상히 실려 있다. 묘가 합천 남쪽 대목방(大目坊) 무곡촌(茂谷材) 초막동 을좌원(草幕洞 乙坐原)에 있으니 예전에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 풍우에 마멸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음으로 지금에 후손들이 동심협력하여 새로 세운다.
배위는 족보에 기록이 없고 두 아들이 있으니 장남 전(典)은 소감(少監)이요 차자 헌(憲)은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재소감(司宰少監)이다. 손자 승도(承道)진사(進士)와 승리(承理) 통덕랑(通德郎)과 승도(承都) 중부령(中部令)은 장남에서 낳았고 장수(長壽) 과의장군 중군사직(果談將軍 中軍司直)은 차자에서 낳았으며 이하는 생략한다.
병진년(丙辰年) 소춘절(小春節)

 

9세 판서공파

  세봉(世鳳) 강헌공(康獻公)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판서를 지냄
묘소: 합천군 쌍백면 장전리

봉익대부 판전농사사 강헌공 휘 세봉 묘비명(墓碑銘) 성산(星山) 이기원(李基元) 삼가 지음

대개 부와 귀는 형세와 이로운 것이며 훈혁한 것이니 사람마다 연모하고 쟁취하는 의리는 공도며 정상인 것이다. 군자는 반드시 변별(辨別)하여 택취(擇取)하나니 훈혁한 것이 비록 일시의 영료에는 극진하나 그 때를 지내면 무형하고 무적하되 정상인 것은 만세가 되도록 불변한 이치이건만 하물며 대를 전해서 갈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리오. 내가 강헌공에게 또한 증험함이 있으니 대개 큰 벼슬로 누대 세신을 지내다가 마침 국조가 장차 옮기려 할 때에 피세은둔(避世隱遁)하여 몸이 다하도록 후회함이 없는 것은 어진 사람이 아니고는 능함이 있으리오. 

어느날 문군 홍섭(洪燮)과 창수(昌樹)와 갑주(甲柱)가 찾아와서 그 선조의 유사를 보이면서 이르되 우리 선조가 고려말기에 국조가 장차 바러려할제 자취를 감추고 문을 닫고 살면서 조정에 있던 문적을 모조리 불살라 버림은 이름을 세상에 전하지 않겠다는 것이니,그 스스로의 지키는 고절(高節)이 도리어 이로서 어찌 가히소멸하리오. 지금 묘소가 있고 작은 비가 서 있으나 세월이 오래됨에 비바람에 닳아져 글자를 분별할 수 없고 생졸년월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 이제 종의에 따라 묘비를 개수코저 명(銘)을 청하오니 원컨대 저희를 보살펴달라 하거늘 내가 생각건대 수천 자손이 각군에 산재하여 다같이 추원지의를 다하여 합심 경기(經紀)하니 억양컨대 충효지택(忠孝之澤)이 백세가 되도록 바꾸지 않은 것인가. 참으로 시전에 이른바 영석이류(永錫爾類자손이 흥성하고 효도를 다하는 것)로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고 나이 90이 되는 황폐물이 어찌 멀리 천년 앞의 일을 촌탁하여 그 실상을 속이지 않고 그 정성을 갚으리요. 아무리 사양하여도 거절치 못하고 오직 하나의 의자(義字)로 송(頌)하는 것이 가할까
.[중략(中略)]
공이 우왕 원년(서기 1375년)을 당하여 간신이 용사(用事)하여 원나라를 다시 섬기려 하였다 포은 정선생과 모든 신하가 극간 하다가 도리어 형을 받고 귀양살이를 하는데 공이 힘껏 다투어 저지하여도 이루지 못하다가 얼마 후에 나라가 위태하거늘 공은 부친을 모시고 아우 소부감 세린(世麟)으로 더불어 벼슬을 버리고 합천 대야촌에 퇴거하거늘 이름을 숨기고 돌아가시니 반드시 사기에 기록이 있을 것이로되 옛적 중원의 기(努)나라와 송(宋)나라가 증거가 없는 것이 다 문헌이 부족한 탓과 같도다.
오직  문충공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어느 사람이 먼저 동으로 옳겼는고 대야촌에 표박(漂泊)하였도다. " 하는 시가 공의 삼 부자를 가르킴이로다. 묘는 삼가 아동이재 해좌원에 있다. 배위는 무진(茂珍) 군부인 노씨니 사재소감 천필(天漏)의 딸이다. 묘는 합천 서쪽 서룡동 신좌원에 있다.
(자손은 생략)
슬프다. 공이 누대 현혁한 집안 사람으로 나라의 기등이 되어 휴척(休戚)을 같이 하다가 급기야 운수가 쇠진하여 나라가 바러려고 할 때에 능히 구국의 뜻을 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몸을 도망하여 이름을 숨김이 춘추의 의로다. 포은과 야은 제현으로 더불어 자취를 같이 못한 것은 돌이켜 보건대 또한 때를 만나지 못함인가, 그러나 들어나고 안 들어나는 것이 공이 공되는데 무엇이 가손(加損)이 있겠는가 오직 공의 섬기지 않은 대의는 밝기가 대낮과 별 같으며 가히 백세를 뻗치어 변치 않을 것이다 이로서 가히 명하리로다. 

명(銘)에 하였으되
세는 얼굴이니 변함이 진실로 무상함이리오.     의는 마땅함이니 오래 되어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고적이 이미 멀어졌다고 말하지는 말라,      오히려 어진 이름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믿겠도다.
천경대의는 백세에 가히 질정(營定)하리로다.   이에 현 각하노니 지나는 자 반드시 공경할지어다

 

11세 판서공파

   여충(汝忠) 

묘소: 합천군 용주면 방곡리 서룡산의 5현 선조 묘소와 인근해 있다
세종때 통훈대부 도첨의사를 제수하고 금산 군수를 지냄

통훈대부 금산(錦山)군수공 휘 여충(汝忠) 묘갈명 병서(근-世鳳-汝忠)  
후산(肩山) 전주 허유(許愈) 삼가 지음

공의 휘는 여충(汝忠)이니 남평인이다. 삼한벽상공신 시호는 무성, 휘 다성이 그 시조이다. 그로부터 5 봉군(封君) 10 평장(平章) 8 제학(提學) 4 간의(談議)가 있어 동방거실이 되었다 휘 극겸(克謙)에 이르러 충직으로서 고려조에 이름이 났으니 시호는 충숙(忠肅)이요 증조의 휘는 근(瑾)이니 판도판서(版圖判書)로 비로소 낙향하여 합천 대야촌(大冶村)에 살았으니 점필재 시에 "이른바 어느 사람이 먼저 동으로 옳겼는고 대야촌에 표박하였도다. "하는 것이 이를 이름이다. 조부 휘 세봉(世鳳)은 전농판사(典農判事)니 시호는 강헌(康獻)이요 아버지 휘진(軫)은 군기소감(軍器小監)이니 우리 세종(世宗)의 때로서 비는 상주김씨(尙州金氏)니 전농시사 간(侃)의 딸이다

공이 나서 타고난 성품이 준이(俊異)하고 재기가 청명하여 아우 교리공 휘 여령(汝寧)으로 더불어 함께 명절을 닦아 사람이 일컬으기를 형이라 하기 어렵고 아우라 하기 어렵다 하였다. 세조(世祖)가 특별히 통혼대부(通訓大夫) 행(行) 금산군수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제수하다. 벼슬에 오르고 직에 있을 때 지조와 절개가 늠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 묘는 합천 서쪽 서룡동 경좌원(庚坐原)에 있는데 선영 아래이다. 부인은 삼척정씨(鄭氏)니 생원 섭(섭)의 딸인데 함께 묻히었으며 또 부인 포산곽씨(郭氏)는 대제학 종(悰)의 딸이다. 네 아들을 두었으니 신(信)과 성(誠) 함(함) 전(銓)인데 함은 중훈대부요 전은 충순위(忠順衛)다. 신(信)이 영수(氷壽)를 낳고 성(誠)이 영강(永康)과 영수(永綏)를 낳았는데 영수는 중훈대부요, 함이 영견(永堅)파 영년(永年)을 낳고 전이 영덕(永德)을 낳았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치 못한다.

묘에 전부터 비갈이 있었는데 이제 글자가 마멸되어 상고할 수 없기에 후손이 돌을 표하기를 정하고 글을 유(愈)에게 청하였는데 유는 늙고 글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세대가 오래 되었는지라 문헌이 증거가 없는 터에 강 찬성(姜贊成) 희맹(希孟)의 함벽루 중수기에 이르기를 앞 군수 문여충(文汝忠)이 이 루를 중수하였다고 하였으니 공이 당시의 강산 누대의 주인임을 가히 상상할 수 있도다. 이로서 약간 그 세계와 관함(官啣)을 쓰고 이어서 명(銘)한다

대(代)로 빛나는 공경 에  공이 그 뒤를 이었으니
형과 아우가 명덕(名德)이 다 무성하도다. 
서룡동 산허리에 높이 석 자가 있음에
내가 명(銘)하여 초동, 목수를 경계하노라.

11세 판서공파

  여령(汝寧)

 증(贈) 록공원종(錄功原從)
세종9년(1427)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 사헌부감찰을 역임
서장관으로 명에 갔다가 황제로 부터 의대를 상으로 받고 귀국   홍문관 교리, 헌납을 역임

홍문관교리 증록공원종(贈錄功原從)공 휘 여령(汝寧 )묘갈명 병서

상략(上略)...
공은 홍무 병자(1396년)에 나시어 영락 계묘년에 생원이 되고 선덕 정미년에 급제하다. 서장관으로 중국 서울에 가서 아뢰고 응대하기를 본국 왕의 뜻을 어긋나지 않게 하니 황제가 칭찬하여 의대(衣帶)를 하사받고 본국에 돌아온
즉 특별히 좌정언(左正言)을 제수하고 다시 옮겨서 교리 헌납을 역임하였다. 일찍 한성참군이 되었을 때 부에서 완강한 송사가 있었다. 이때 세조가 대군으로 있으면서 공에게 일을 부탁하여 맡기며 승소(勝訴)케 하려 하자 공이 안 된다 하였다. 세조가 노(怒)하였다가 등극하여 공이 죽은 것을 듣고 놀라 슬퍼하면서 포상을 하니 대개 송나라 태조가 조빈(曺彬)을 알아본 것과 같은 것이었다. 기사년 정월 28일에 돌아가시니 수는 54세이다. 예로서 서룡동 경좌(庚坐)에 장사 지내셨다. 배위는 청산정씨니 판서(判書) 충(衰)의 딸이다. 네 아들을 낳았으니 규(珪)와 찬(瓚)과 침(琛)은 진사(進士)이고 노(노)는 진사(進士)에 부사(府使)였다. 딸이 둘인데 강허손은 별장(別將)이고 다음은 김광려이다. 뒤 배위는 광주김씨니 현감 유(維)의 딸이다 한 딸이 있는데 사위는 김적(金적)으로 판관이다. 규의 아들은 경화(敬和)로 봉훈대부요 경신(敬信)과 경지(敬智)이며, 경충(敬忠)은 일찍 조정에 벼슬하다가 기묘사화 뒤에 모든 진취할 뜻을 버리고 월여산 아래에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살으니 남명(南冥) 선생이 정(亭)을 이름하기를 사미(四美)라 하였다. 찬(瓚)의 아들은 효조(孝祖)와 승조(承祖)와 극조(克祖)와 계조(繼祖)이고 침(琛)은 후손이 없다. 노(노)의 아들 윤경(允卿)은 충순위로 글씨를 잘 쓰고 옥경(玉卿)과 신경(信卿) 충경(忠卿) 제경(悌卿)인데 신경은 참봉이고 제경은 충순위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슬프다. 공이 통민(通敏)하고 크신 절개가 있었으되 세대가 멀고 오래됨에 문헌의 증거가 없으니 아깝도다. 묘는 예전에 돌로 새긴 것이 있었는데 마멸되어 읽을 수 없어서 모든 자손이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후손 선호(宣浩)와 재규(載奎) 등이 재효(載孝)가 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청하였는데 사양하다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글을 짓고 이어 명을 하는 바,

                                           명(銘)하여 이르되
지경에 나가 욕되게 아니하고  절개를 굽히지 않으셨다.  
옛부터 내려오는 말을 들었음에  공이 진실로 그러하니
서룡(瑞龍)산 밑에  어진 사람이 묻혀 있어    옥돌에 새겨 글월을 써서 
길이 세상에 꽃다움을 전하리 로다.

 

12세 판도판서공파

극정(克貞) 

통훈대부 사복시첨정을 지내고 중종 15년 87세에 별세  묘소는 합천군 야로면 신정대리 에 내외분 쌍분이 있고 경충제는 장남인 사천현감 개성부유수 상보를 모시는 재택으로 경지문과 숙소로 되어있는데 위토는 논 1500평 임야 15,000평

 

12세 판도판서공파

극충(克忠)  

원종공신 중훈대부 사복시첨정을 지내고 문장이 뛰어났다 
양심정(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에 추모사란 사당이 있고
양심정은 1919년 건립해 아들  계창( 함양군수)과 함께 모셔져 있는데
논 500평 밭 2000평 임야 2만평이 있다

  
13세 충선공파

  중용(中庸)   자 : 도보 (道甫) 

충목왕 4년에 출생  37세인 우왕18년 5월 문과급제 사간원 헌납을 지내고
조선때 불사이군을 고집하시며 사임함
익점공 장남으로 헌납공파 파조로 승로 승손 두 아들을 두심
묘를 실전하여 2004년 도천서원 입구에 설단함

 

13세 충선공파

  중성(中誠)  순질공(純質公)     

고려 충정왕2년에 출생  우왕11년 형 중용과 문과에 국자 진사에 급제 한림원 학사
이성계의 전횡에  봉직중이던 합문지후 간의대부를 사임하고  창왕때 병부상서 사임,
1405(태종5년)중실 중계와 함께 수 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사이군을 고집하고 사양별세 후 정헌대부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됨    순질공파 파조 되심

 

13세 충선공파

  중실(中實)  호: 의안(毅安)   의안공파 파조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부친의 불사이군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사임하셨다
 참지문하시중에 추증되었다.

 

13세 시중공파조

  중진(中晉)  13세(시중공파 파조) 시중공(侍中公)  

고려때 성균관 진사 시랑밀직부서 참지문하시중을 역임  
묘를 실전하여 1976 전북 옥구군 회현면 고사동에 설단하고 단소 옆에 영모재란  재택이 있다

 

13세 성숙공파조

  충정공(忠貞公)중계(中啓)성숙공(成淑公)  호 : 창주(滄洲)

고려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 ·도첨의()에 이르렀고 예부상서로 봉직하다 조선 개국 후 사임한 후  
     조선때 은거하여 1395(태조4년) 불렀으나 응하지 않음 자현대부 의정부좌찬성 추증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 앞에 설단하여 4월5일 제사를 모심

 

13세 판도판서

  계창(繼昌)?∼1522(중종 17)  號 : 養心亭

1504년(연산10) 4월 별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
  거창현감·창원부사·김해부사·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제주목사·함양군수를 지내고,
  풍기군수를 하시다가 임지에서 별세함
1511년(중종 6) 5월 창원부사 김협이 민치(民治)에는 뛰어났으나 궁마(弓馬)를 알지 못하여
          외적 방어는 미흡하니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으로 교체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공은  이자화(李自華)·신공제(申公濟)·이포(李苞)·구지신(具之愼)·조순(趙舜) 등과 물망에 올랐으며 당상(堂上) 및 내지수령(內地守令)에 관계없이 널리 후보자를 선택하라는 왕의 특명이 있어 당시 거창현감이던 公은 당상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지만 무재가 있고 왜구를 물리친 공이 있었기에, 성희안(成希顔)의 천거로 5등을 뛰어넘어 창원부사로 발탁되었다.
  대간의 탄핵이 있었는데 생원때 권문(權門)에 아부하였고 또한 5등을 뛰어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받아들여져 임명된 지 한달 만에 교체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탄핵을 받았는데 김해부사로 부임 할 때는
무재는 있으나 몸가짐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것이었고
1517년 12월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을 때도 탄핵을 받았다.
1919년 양심정을 건립해 아버지 극충과 함께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연려실기술 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居昌郡 新增 名宦 本朝

※<국조 문과 방목>
      문계창(文繼昌)    연산군(燕山君)10년(1504년), 별시(別試)

      가족사항 : 부:문극충(文克忠) 조부: 문승욱(文承郁)  증조부:문전(文典)

      이력및기타 :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 (郡守)

 

14세 충선

  가학(可學)

태종때 역성혁명을 위한 조각까지 하였으나 동지의 고변으로 인하여 참형을 당하고 자식들도 효수당했다
조선의 왕권확립을 위해 부모를 유폐하고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을 죽이면서 등극한 태종에게 반역이란 용서될 수 없는 죄였기에 남평문씨의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게 한 것이다.

가학선조의 의거와 남평문씨

산청의 충선공 묘소를 참배하면 앞이 비문은 충선공과 팔계주씨만 적혀있지만 족보에는 3위 합분이라고 적었고 산소주변에서 많은 합천이씨들의 산소들로 채워져 있지만 충선공의 아드님들의 묘소가 없는 이유에는 13세 諱 가학선조(충선공의 조카)의 의거 실패가 그 원인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가학선조는 함께 의거를 준비하였던 임빙의 외조부인 부사직 趙昆의 고변으로 체포된 것은 조선 태종때였다
태종은 역성혁명을 했던 태조(아버지)를 유폐하고 수차의 왕자의 난에서 형제간을 죽이고 정종은 왕위를 포기하게 하여 왕이 된후에 태조의 후처 강씨가 밉다하여 서얼차별법까지 만들었으니 반란이라는 죄목은 용서될 수 없는 죄였다

태종은 친국에서 규모가 대단하지도 않았고 군사는 신병을 불러 온다는 말에 미친놈의 행동이라 무시하려고 했으니 난의 규모는 대단하지 않았음을 알겠지만 신하들은 가학은 미친놈이라고 하더라도 가담한 사람은 미친사람이 아니며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가학과 일당 6명은 거열형을 당하였고 문가학의 어린 두 아들과 아내도 처형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학이 살았던 생가는 못이 되었다고 한다(합천 삼가 문태마을)
일가들은 연좌죄를 우려하여 살아있던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는데
종손인 휘 광서는 무사하여 연산2년 무과에 급제하고 문화현령을 지냈으며 중종34년 졸하시니 합천삼가쪽에 예장을 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윗대의 산소를 돌볼 수 없었으나 숨어살던 문씨들은 올 수가 없었기에
합천이씨 집안으로 출가한 충선공의 증손녀가 충선공의 묘소를 돌보게 되었으며 사후에도 자손들에게 묘소를 돌보도록 유언하였다고 하는데 300여년을 문씨들은 산청에서 살지 못하고 충선공 묘소의 실묘(失墓)에 까지 이르었고 우리의 선산은 합천이씨 문중에서 관리를 하다가 계환씨가 사람을 보내어 실묘된 산소를 찾았으며 선산은 소송에서 절반 정도를 돌려받은 것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대단했던 세거지는 하루 아침에 빈 마을이 되었고  200여년을 문가들은 발을 붇이지 못했었는데..
150여년전 순질공의 목사공 후손( 복,영생,영욱님 가계)이 진동에거 안봉마을로 옮겨 왔으며
의안공 諱종(익점공 3남)의 후손들(용호, 승열)도 이거한 집안으로 현재 산하에서 거주하고 있다

문가학의 처형 (백과사전에서 발췌)

1406년(태종 6) 12월에는 문가학(文可學) 등 6명의 반역죄인을 거열형에 처했으며, 10년(태종 10) 4월에는 개국공신인 조호(趙瑚)를 거열형에 처한 다음 그 시체를 각 도에 회람전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세조 때의 사육신(死六臣) 등을 <죄응능지처사(罪應陵遲處死)>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열형에 처한 다음 효수전시(梟首展示)하는 부가형(附加刑)을 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거열형이란 이미 목숨이 끊어진 시체나 살아 있는 사람의 사지와 목을 오거(五車)에 따로따로 묶어, 말을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혹독한 형벌로. 중국에서는 진(秦)·한(漢)시대에 있었던 듯하며 그 뒤 수(隋)·당(唐)에서도 있었으나 송(宋)·명(明)대에 와서 없어졌다.

한국의 경우 《삼국사기》에 보면 874년(신라 경문왕 14)에 모반(謀叛)한 근종(近宗)을 거열에 처했다고 하며, 또 《고려사》 <형법지> 등에 이 형의 실례(實例)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의 《경제육전(經濟六典)》 <형전>에 <전형회시(典刑回示)>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능지(陵遲)나 거열 같은 중형을 실시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어 돌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이미 그 때에 그런 형벌이 벌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67년 황해도 귀진사에서 간행한 초정해보 남평문씨 족보

가학 종숙과 의란모의(義亂謀議)  요술탁란(妖術濁亂)으로 경화신사(京華身死) 박죄형참화연종족(樸罪刑참禍延宗族)하여 가학은 참형을 당하고 승손공은 문씨 제족과 귀양살이 하다가 도주하여 명주로들어가셨다.

 

문익점의 후대의 평가와 현창활동
김준형 경상대학교

그런데 문익점의 자손이 단성에 많이 살지 않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文可學 사건으로 인한 단성 이탈현상이 그것이다. 문가학은 문익점의 동생 益夏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태종때에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였는데, 그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2년(1402) 진주 출신인 예문관 직제학 鄭以吾가 진주에 사는 문가학이 비를내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하여 왕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러들여 시험하였는데 그가 치제를 하자 과연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는 항상 神衆經을 외워 도를 얻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한다.
60<태종실록 4권 2년7월 경인>

 

그 이후에도 테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 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태종실록 5권 3년4월 계유, 태종실록 9권 5년 5월임인>61) 후에 효험이별로 없자 내쳐서 開城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이후 이곳에서 생원 金천, 주부任聘, 생원 趙方輝, 부정 曺漢生, 소윤 金亮 등 여러 사람과 공모하여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어 잡혀와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太宗實錄』에 나와 있는 내용을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스러운(妖人)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참찬의정부사 崔有慶에게 명해 委官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李叔蕃, 尹祗, 형조 판서 金希善, 사헌 집의 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
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말하기를, '비가 내리고 볕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했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金천에게 말하기를, '이제 佛法은 쇠잔하고 流文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神衆經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 있고, 天兵과 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하니, 김천이 그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任聘 생원 趙方輝, 전 부정 趙漢生 전 소윤 金亮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사직 趙昆이 그 음모를 알고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 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 하니, 미친 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라 하니,

黃喜가 아뢰기를, '한놈의 문가학은 미친 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발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태종실록 12권 6년 11월>62)

 

이 사건은 중대한 모반사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권12, 6년 11월 辛未조 참조>63)

결국 문가학과 일부 핵심 연루자가 처형당하고, 문가학의 어린 자식도 교살되었다. <태종실록12권64)

 이 사건으로 인해 관련자의 친족들이 연좌되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한해를 당하거나 일이 있을 때 연좌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조치를 취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되었던 朴苞와 문가학 등의 친족들은 제외되었다. <세종실록 36권 9년6월65) 

원래 모반죄를 저지르면 당사자의 조부에서 손자까지와 형제는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 되고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방계로 조카 및 백숙부 등도 연좌되어 먼곳에 유배되었다.
       <김영범저-연좌제의 역사적 전개와 그 의미
66)

 

문익점의 자손들은 이 연좌제의 직접적인 범주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그들에게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문익점 자손중에도 그 영향을 받아 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남평문씨대동보』에는 문익점의 손자 文承孫이 '從叔(문가학)의 처형으로 화가 종족에 미쳐 여기저기 도망쳐 숨어 살게 되었는데 공은 溟洲로 들어오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좀 과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정황은 17세기 중반 李時분에 의해서 편찬된 『雲窓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운창지』에는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의 기사와는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가학이 젊었을 적에 淨趣庵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우가 미녀로 둔갑하여 사람을 흘리고 있어 이를 잡아 죽이려 하자 여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둔갑술이 적힌 비결을 제공하였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궁궐 내에 들어갔다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문가학은 죽임을 당하고 단성현에는 그 자손들이 살 수 없도록 모두 바닷가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지금 東萊府에 거주하는 문씨들이 그들이다.
<운창지 도산팔방고증67) 
이런 상황에서도 문익점의 4대 장손인 光瑞는 큰 피해를 받지 않고 단성에서 살고 있었다.
문익점의 공훈에 대한 국가의 은전이 상당하고 그에 대한 부조묘나 묘사에 대한 봉사를 맡아야 하는 장손이므로 국가에서도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광서에게는 서자 彦國 이외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매부 박천군수李鶴(여주이씨)의 아들 李承宗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여주이씨는 단성에서 세거하지 않고 서울 인근으로 이거해 버렸다. 68)

 

14세 충선

  승로(承魯)

경북 의성의 원님으로 의성에 부임하여 목화를 시험재배하고 토질이 목화에 적합함을 아시고
목화재배를 권장하여 의성을 전국 최대의 목화산지가 되게 하시니 의성목화 시배 비석을 세웠다

 

14세 충선

 승손(承孫) 초휘 : 형노(亨魯) 자: 사백(嗣伯)

생원이시다 태종종 음직은로 호조좌랑을 지내셨다.
종숙 가학의 역성혁명의 실패로 처형되고 화가 종족들에게 까지 미치니 모두 각 곳으로 흗어져 숨어 살았는데 공은 명주로 입향하였다. 묘는 강원도 강릉 북문 외석현이고
후손들이 2004년 여주의 매산서원 앞에 유허비를 세웠다.

조정에서는 우리 문씨 종족에게 죽음과 박해를 가함으로써 가까운 친척 5형제 중용,중성,중실,중진,중계가 각기 원지로 흩어지고 공은 해도인 명주땅에 살던 중 아들 휘 경동(敬仝)참의공, 손자 휘상겸(相謙)생원공 이하 제족사죄 제문(諸族赦罪諸文)하여 사전(赦典)을 내려 사면을 받았다.
태종원년 신사년(1401년) 전교에 문익점의 자손은 문관무관에 두루 들게 해서 계급의 차례를 거침이 없이 등용하라 명하셨다. 공의 묘는 강릉 북문밖 석현 경좌원에 있고 아들 경동의 묘는 같은 산 자좌원에 있다. 1남 경동을 두었는데 동(仝)자 항열의 독자이시다. 그 후 공이 증손 휘 덕린(德린)현령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후손 모두가 무과 벼슬에 올라 예천 가감술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14세 순질공파

경혜공(景惠公)  (和)  자 양중(養中) 호:만은(晩隱)

1397 (태조6) 낭중이 되고 승정원 도승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증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지냄 
가선대부 태종조에 사직하고 양주 문곡으로 내려와 살았다
세종때 제전을 하사받고 자현대부 좌찬성 참지의정부사에 추증

 

14세 순질

  (稔)

황주목사를 지내시고 증 판부사 하다

 

14세 순질

    평익공(平翼)(彬) ?∼1413(태종 13)

1400(정종2년) 대장군(大將軍)으로 재직할 때 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셨다 
이방원(李芳遠 : 후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으로 월천군(越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무관직을 지낸 후 1409년 풍해도 첨절제사(豊海道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운산서원에 배향되어 3월 중정일에 제사를 모신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14세 이곡파 파조

 정해공(靖惠公) (萊)  자: 자봉(子蓬) 호: 이곡(理谷)

이색 문하에서 설리학을 비롯해 천문 지리 산수 유려에 정통한 학자로 물레를 발명
태조4년 촤찬성이 되고 치사를 거쳐 장연백에 봉해짐 대광보국 승록대부 영의정에 추증

 

14세 해은공파조

    양민공(襄敏公)(英)   호: 해은(海隱)

목은 이색문하에서 수학 1393(태조2) 문과급제 홍문관 교리를 거제 직제학 역임
      베짜는 방법을 연구하여 만든 베를 문영베라 했는데 무명베로 변함
증 자헌대부 이조참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민공(襄敏公) 휘 영(英) 신도비명 병서
1980년 경신(庚申) 4월 상완(上완) .성균관장(成均館長) 박성수(朴性洙) 삼가 지음

정제회(기묘명현의 후손들의 친목회)의 벗 문재근(文宰根)이 반관(성균관)으로 나를 찾아와 그 선조 양민공 신도비명을 청하면서 중종조(中宗朝) 부제학 박윤경(朴閏卿)이 지은 묘갈명과 그 6대손 홍문관 수찬(修携) 선(瑄)이 쓴 사적기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은 묘비 음기(墓碑陰記) 등을 보이므로 자세히 살펴 보니 선생(先生)의 성은 문(文)이요 휘는 영(英)이요 자는 자화(子華)며 호는 해은(海隱)이다. 남평개국백 무성공 휘 다성이 시조이다. 이어 고려조 경절공 휘 익(翼)과 이부상서 경정공(敬靖公) 휘 공유(公裕)와 평장사 충숙공 휘 극겸(克謙)이 모두 중세의 현조다. 고조 휘는 윤각(允恪)이니 문과 문학박사요 증조 휘는 숙선(叔宣)이니 문과(文科)로 정순대부 보문각제학 증(贈) 문하시중 충정공(忠貞公)이시다. 조부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성학(聖學)을 배워 정도(正道)를 창명(懼明)하고 목화씨를 얻어와 모든 백성들이 옷을 입도록 하시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과 지서

연사를 역임하시고 강성군과 부민후를 받으셨으며 시호는 충선공이고 호는 삼우당이시다. 부친의 휘는 중실(中實)이니 문과에 급제하고, 간의대부 증(贈)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시호는 의안공(毅安公)이요 비(어머니)는 완산이씨(李氏)니 영동정(令同正) 경인(景仁)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우리 태조 7년 홍무(洪武) 31년 서기 1398년 무인년에 단성현 배양리에서 출생(出生)하시었는데,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므로 충선공이 유달리 사랑하셨다. 백형(伯兄) 휘 래(萊)와 함께 목은 이색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재덕이 다 함께 하니 사람들이 금옥(金玉) 같은 형제라 하였다. 형제(兄弟)가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아 형 래(萊)는 해사기(解絲機)를 만들고 선생은 직포기(織布機)를 제작(制作)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해사기 즉 물래를 만든 사람을 문래라 하고 베가 이루진 것을 문영포라 하여 관용어가 되었다.

세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 지제교에 이르고 외직(外職)으로 일선(一善:경북선산)군수와 도총부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당시에 종족(宗族)이 조정에 있는 자가 심히 많으므로 선생이 말하길 "조정에 사람이 가득참은 집안의 복이다"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선산 해평(善山海平)에 퇴거하여 산과 강을 거닐고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다 세종 때에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에 오르고 세조 6년 무진년 서기1460년에 돌아가시니 62세였다. 묘(墓)는 해평현 월포사동 간좌(艮坐)다.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양민(裵敏)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조부 충선공과 백형 정혜공과 같이 현재 광주동광영당(東光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군위 봉강서원 경현사(景賢祠)에 배향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일선김씨(一善金氏)니 전서 연경(延慶)의 따님이다. 마음씨가 곱고 깨끗하여 숙덕(淑德)을 함께 갖추었다. 묘는 쌍영으로 우편에 모셨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관(琯)은 임금이 내린 이름으로 아경(亞卿)이요 차남 전(琠)은 감사이다. 아경의 아들은 현(顯)이니 좌승지요 승지의 아들은 절(節)이니 생원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자인(自仁)이니 호는 나촌(懶촌)으로 진사 참봉이며 무예(以武藝)로서 훈련참군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다음은 이의(以義)요 다음은 이례(以禮)이며 다음은 이지(以智)로서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이신(以信)으로 문과 현감이다. 따님은 김옹(金옹)에게 시집갔으니 현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집안이어서 어진 이의 문하를 좇아 배웠으므로 도량이 넓은 인재로서 족히 나라를 건지고 도울만 하되 세태의 낌새를 알아차린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백의로 돌아갔으니, 덕이 많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여 그 뜻을 크게 펴보지 못하였다. 그 후예가 한미하여 각지로 흩어져 그 아름다운 일과 착한 행실을 모아서 전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가 순환(循環)함에 조상의 음덕이 다시 회복되어 이제는 많은 자손이 다시 창성하였다. 19대손 대식(大植)이 독특(篤特)한 효성으로 혼자 거액을 부담하여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한다 하니 윤강(倫綱)이 끊어지고 이로움을 구하는 지금 세상에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묘소와 위선(爲先) 밝힘을 위주(爲主)로 하는 성균관의 으뜸 자리에 있는 나로서 감탄함을 금할 수 없어 우(右)와 같이 간략히 적고 이이서 명(銘)한다.
특출한 탄생과 화려한 가문은 후배 학자에 어진 스승의 제자라
형과 함께 기계를 만들어   통용하는 말의 관형어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형과 공 자신과 함께   문씨의 세 어진 분이요,
벼슬을 버리고 자취 감춤은   오랫동안 숨어 사는 이치였다.
이에 꼭 닮은 손자가 있어서  영묘한 도리를 다시 밝히니
오랜 세월 후에 이 같이 나타나는  빛나는 그 이름을 그리워 한다.
내 그 정성에 감동되어 사실을 근거하여 명을 짓는다

14세 의안공파

    자:자익(子益) 호:곡음(谷陰)

시중을 지내시다
학문은 목은 이색에게서 배웠으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14세 의안공파

    (동래파 파조)

진사를 지내시고 부산으로 처음 입향하시었다.

진사공(進士公) 휘 평 이하(以下) 5위조(五位祖)제단 비문
1972년 임자(壬子) 3월 청명절(淸明節) 16세손 동숙(東淑) 삼가 지음

펴노니 조선(祖先)은 백대(百代)라도 잊지 못하고 종족(宗族)은 백세(百世)라도 친목(親睦)함이 천륜(天倫)의 떳떳함이요 인도의 마땅함이다.
우리 남평문씨의 시조 무성공 휘 다성은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요, 몇 세를 전하여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은 간의대부 평장사니 고려 때 12평장(平章)과 7봉군(封君)이 나시어 높은 벼슬과 큰 작위가 대대로 이어져 세상에서 벼슬한 집안이라 일컬으고 말엽에 와서 강성군 부민후 충선공의 제3자 의안공(毅安公)이 우리 파조(派祖)이다.
공(公)의 제4자로부터 이어서 5세가 모두 묘소가 없으니 극히 한심스러운 일이다. 보첩을 상고해 보면 5세 중에 제1세의 휘는 평(평)이니 사문에 수학하여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고, 제2세 맏이의 휘는 어동(어仝)이요 부사를 지냈고 부인은 용인이씨(李氏)니 후손이 곤양(昆陽)에 오래 살았다. 다음의 휘는 우원(遇元)이니 후손이 현재 동래(東萊)에 살고 있고, 제3세의 휘는 눌(訥)이니 급제를 하였고, 제4세의 휘는 여동(麗東)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제5세의 휘는 손(遜)이요 호가 둔재(遯齋)니 경학을 좋아하며 이름이 나고 지위가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고 다음산(多音山)에서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살다가 돌아가심에 모두가 칭송하고 우러러 사모하였다. 이상 5세의 무덤을 모두 실묘(失墓)하였으니 이는 상상컨대 여러 번 난 리를 겪은 나머지 자손들이 흩어져 버린 까닭이다.
또한 둔재공 이하 세계를 기록하면 장남 휘 창매(창梅)의 묘는 다맥산에 있고, 차남 창실(창實)의 묘는 곤양 남산에 있으며 후손들이 현재 하동 삼천에 살고 있고, 장손(長孫)의 휘는 귀문(貴汶)이요 통훈대부 군자 감정이니 묘는 굴피산에 있고, 장증손(長曾孫) 휘 계일(繼逸) 의 후손은 현재 남해 설천(雪川)에 살고 있고, 계증손(季曾孫) 휘 계현(繼賢)의 후손은 현재 창녕 유어 장명리(長明里)에 살고 있다.

각 파 자손들이 각처에 홑어져 있으며 매 년 초목이 떨어지는 시향 때를 만나면 몹시 구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생각건대 굴피산은 즉 둔재공의 직계 장손의 세세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제 5위 조고 제단(祖考祭壇)과 비(碑)를 세워서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드리게 함은 위로는 편히 조선(祖先)의 혼령이 오르내리게 하고 아래로는 전해가며 자손들의 감모(感慕)하는 정성을 갖게 하고자 5공제단비(五公祭壇碑)라 이름하였으니 후예들은 근실히 선세(先世)의 덕을 닦는데 더욱 힘쓸진저. 본사업 진행시에 갑정의 석만(石萬) 차용(且龍) 동수(東洙)와 유장의 동무(東武) 동현(東泫) 동준(東準) 종길(宗吉)이 실로 시종일관 힘과 정성을 다하였다. 나머지는 번거로워 기록치 않는다. 이어서 시(詩)를 짓는다.우리 집안이 각기 동서(東西)로 흩어져 있으나   조상을 위해 설치합에 함께 협력하네.
옛 무덤 받들어 절하며  마음은 삼가 두려워 하고  새 비갈에 명을 새겨 마음의 공 알리네
송백을 둘러 심으니 신(神)의 문(門) 통하였고   잔 올리고 향(香) 피우니  의 례가 밝더라.
진퇴(進退)하고 주선(周旋)하며   함께 제 드리는 날에  정령(精靈)이 이 곳에 강림하네.

 

14세 의안공파

    字:자익(子益) 호:곡음(谷陰)

무과하시다
문장이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하셨다

 

14세 순평군파

    익성 (成) 1526~1584 ] 자: 숙재(叔栽) 호:옥동(玉洞)

조식() ·주세붕()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에게서 《대학》의 요지를 배웠다.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15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저작(
)을 지내고 내외직을 역임한 뒤, 사간원 헌납()에 이르렀다.
도승지겸 직제학이 추증되고, 도연서원(
)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옥동집》이 있다.

                           남명원보[제25호/2002년 3월15일]에서 발췌함
玉洞 文益成은 중종 21년(1526), 성균생원 文翁을 부친으로 함안조씨 趙績의 딸을 모친으로 합천군 泉谷里에서 태어났다. 옥동의 직계 조상에 드러난 분으로는 고려조의 文克謙(忠肅公)이 있으며, 서울에서 합천 大冶村으로 이사한 분은 옥동의 6세조인 版圖判書 文瑾이었다. 합천이 문씨와 어떤 구체적 연관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나 같은 문극겸의 후손인 江城君 文益漸 역시 합천, 단성지역에 깊은 연고를 갖고 있었던 점과 南平文氏를 다르게 江城文氏로도 불렀던 점을 보면 합천이 문씨들의 故居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로부터 고려조의 귀족제적 문화전통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신분제적 요소는 조선조에서도 사회를 구획하는 중심에 있었고, 옥동이 살았던 시대 역시 강력한 신분제적 요소와 혈연적 유대가 사회구성의 중심 축으로 기능 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데는 혈연적 사회적 連帶網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옥동의 모친은 함안지역에서 강력한 在地的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함안조씨 漁溪 趙旅의 증손녀로 判決事를 지낸 趙績의 딸이었다. 이를 계기로 옥동의 가계는 강우지역 재지사족들로서 구성되던 혈연적 연대망 속에 위치되게 되었던 것이다. 姨母夫 全義 李公輔는 掌令 李昌胤의 아들로 남명선생의 姉兄 李公亮과는 종형제 사이였고, 옥동의 이종사촌인 李得은 黃江 李希顔의 사위로 雪壑 李大期 형제의 부친인 동시에 陶村 曺應仁의 장인이었다. 그리고 옥동은 황강의 형인 修撰 李希曾의 손서가 된다. 그리고 이종사촌 매부인 安胤祖는 후일 밀양지역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한 광주안씨 일파였으며 이공량의 손서인 大笑軒 趙宗道는 외가인 함안조씨로 어계의 5대손이었다.

  옥동은 대개의 사족가문의 교육과정에서 그러하듯이 家學으로 기초를 다졌다. 17세 때 비로소 愼齋 周世鵬의 문하에 나가 問學하였는데, 이는 그의 伯兄 梅竹窩 益亨이 尙州周氏를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二樂堂 周怡, 和齋 姜仁壽 등과 친하게 지냈다. 24세에 司馬兩試(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25세 되던 해에 비로소 부친의 명으로 옥동을 위시한 삼형제(옥동에게는 梅竹窩 益亨, 大谷 益明의 두 형이 있었다.)가 山海亭으로 南冥先生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는데, 부친인 생원공이 일찍이 남명선생을 만났을 때 아들들을 부탁하였던 연고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보면 옥동 형제는 남명선생의 초기 제자 집단인 '山海亭 그룹'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옥동 형제는 남명선생께 『禮記』와 『春秋』를 주로 배웠다. 이로부터 35세에 이르는 근 10년 동안 남명선생의 학문 規矩에 따라 南冥道學의 요체에 접근하였는데, 진사 徐天樞와 '出處'에 관해 토론하기도 하고, 眞樂堂 金就成과 道義를 논하기도 하였다. 특히 覺齋 河沆과는 취향이 서로 통하여 서로 격려하며 학문에 침잠하였으며, 新庵 李俊民(남명선생의 생질)과 도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깨끗한 잔에 물을 담아 밤 새워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는 수련도 하였는데 이는 옥동이 남명선생께 심취했던 정도를 알 수 있는 사례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의 결과 心經, 近思錄, 詩, 易, 春秋 등의 대의를 一身에 체득하였고, 여러 벗들과 논의하는 내용을 보고 남명선생이 특히 '게으르지 않고 힘써 공부하는(力學)'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명종 16년(1561), 36세 되든 해에 식년 문과에서 병과 제2인으로 합격하여 宦路에 들어섰고, 이듬해에는 山天齋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敬義'의 요점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이 때 벼슬로는 承文院正字, 承文院博士등을 거쳤는데, 학문의 蘊蓄을 게을리 하지 않아 守愚堂 崔永慶, 大笑軒 趙宗道 등과 도의에 대해 강론하며, 도학이 현실 행정과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明宗 21년(1566) 洪原縣監으로  文科重試에 합격하여 成均館 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東皐 李浚慶으로부터 정치행정의 요점을 듣고, 洛村 朴忠元, 梧陰 尹斗壽, 思庵 朴淳 등을 찾아보았다. 아마 이 시기에 당시 조정에 있던 뛰어난 학자관료들과 交遊한 것으로 보이는데 高峰 奇大升, 西厓 柳成龍, 開巖 金宇宏, 竹 吳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벼슬살이에 바쁜 가운데서도 자제들이나 사람을 보내어 남명선생께 問候하게 하였고, 東岡 金宇, 寒岡 鄭逑를 찾아 의리와 예의에 대해 논하였다.

  옥동은 벼슬살이에서 外職을 많이 맡았는데, 울산군수, 양양부사, 나주목사를 거쳤는데, 더러 誣陷을 받기도 했으나 치적이 높아, 병으로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肅川府使로 임명되어 부임한 후 公館에서 세상을 떴다(1584, 선조 17년).

  그런데 옥동의 행적에 관해서는 인식의 시각에 따라, 그 중요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초기의 문자에는 退溪先生이나 서애 류성룡 등과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음에도 후세에는 그 사실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과 來庵 鄭仁弘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옥동의 아들 雪溪 文勵, 醒狂 文 그리고 큰집의 從孫인 文弘道, 사위인 慕亭 裵大維 모두 내암의 문인으로 정치적 사회적 핍박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것을 고려해 보면, 옥동의 從遊에 강좌의 퇴계학파가 부각되는 것에는 다분히 정치적 고려가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옥동을 위시한 남평문씨 가문이 강우 남명학파의 큰 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옥동의 墓碣銘은 상주·문경지역에 거주하면서 江左의 대학자로 실학적 안목을 갖추고 있던 息山 李萬敷(안동권 유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의 원장을 맡았던 것으로도 유명함)가 撰하였다. 息山은 옥동의 從遊로 옥동이 나주목사를 마치고 돌아와 臥龍岩 위에 집을 짓고 낚시로 세월을 보내려할 때 지은 德溪의 賦와 覺齋의 詩를 근거로 吳健과 河沆을 부각하였는데, 특히 덕계 학문의 篤實함을 높이고, 이러한 덕계와 옥동이 도의의 벗이었음을 들어 그 從遊의 높음을 은근히 보여 주고 있을 뿐, 다른 교유를 심상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옥동 학문의 大略으로는 남명선생께 나아가 "수신의 요점(修身之要)"을 들었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다른 구차한 學問歷程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필자는 息山의 식견을 믿는 마음이 있다.                                    박병련(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본원 상임연구위원)

 

족보기록없슴

 인위(仁渭)

?∼1019(현종 10). 고려의 문신. 목종 때의 궁사(宮使). 본관은 장연(長淵).
오랫동안 천추궁(千秋宮: 천추대후의 궁)의 사(使)로 있었는데 성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김치양(金致陽)의 무리가 숙청될 때 천추궁의 궁료(宮僚)가 많이 연좌되어 죽고 귀양갔으나, 문인위만은 강조(康兆)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009년(현종 즉위년)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고, 2년 뒤인 1011년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1019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타계하셨다

<신종우 인명사전은 연대가 맞지 않으나 소개하면>
1009년(현종 즉위년) 공부상서(工部尙書 정3품)가 되고, 2년 뒤인 1011년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1019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타계하셨다



 

의계로 처리

   정()

문종(文宗)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르렀다.
1078년(
문종32) 고시관
1080년(문종34)동번(東蕃;여진)이 난을 일으키매 출정하여 승전하고 돌아오니,
          특별히 보충찬화탕구정새공신(輔忠贊化蕩寇靜塞功臣)호를 하사하고
          특진검교사도(特進檢校司徒)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상주국(上柱國)
1081년(문종35년) 장연현(長淵縣)개국백(開國伯)을 더하였다.
1082년(문종36년) 사형토록 사복사 이정공이 상소했으나 문하시중이 되심 출전
고려의 12공도(사설교육기관)중 10번째인 정헌공도를 창시하시고

시호는 정헌(貞獻)이며 선종(宣宗)의 묘정(廟廷)에 배향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43권 黃海道 長淵縣 人物 高麗≫


 족보 기록없슴  한경(卿)

생년미상~1226) 본관 명주()
대정(
)을 거쳐 대장군()이 되고, 1215년(고종 2) 서북면병마사로 파견되었다. 1216년 거란 금산왕자()가 국경을 침범하자 이를 격파, 공을 세웠다.
1217년 11월 거란이 다시 고주(
) ·화주()로 쳐들어오자 상장군()으로
           중군병마사(
使)가 되어 대장군 유돈식() ·기윤위() 등과 함께
           격퇴하였다.
그 후   거란군이 동계(
)를 침범하자 군사를 의주()에 주둔시킨 채
          군비를 소홀히 하다가 크게 패하여 해도(
)에 유배되었다.
얼마 후 복직되어 다시 상장군이 되고, 병부 ·공부 상서(
)를 거쳐
           추밀원부사 ·우복야(
)에 이르렀다. (출처)

 

    족보기록 없슴

    (晃) 생졸미상

1076(문종30)년 어사중승()이 되고, 1078년 공부상서()를 지냈다.
1080(문종34)년 중서시랑 평장사(정2품)
1082(문종36)년 문하시랑(정2품)1086년(선종 3) 중추원 지사(
事 종2품),
1087(선종4)년 서북로병마사 겸 중군지병마사(
西使)
                     검교태자대부(
)를 거쳐 다시 중추원지사가 되었다.
                                                                                                  자료: 고려사 세가

 

 

족보기록 없슴

(大)

생년은 미상이며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1231년(고종18) 낭장(
)으로 서창현()에서,
          몽골군 살리타이[
] 휘하 군사와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몽골군에게 끌려 철주성(
)에 이르자, 성 안의 군사에게 항복을 권하라는 몽골군의 명령에 굴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하라고 외치다가 참살()되었다. 출처

 

 

족보기록 없슴

 장필(章弼)  

생년미상∼1190(명종 20). 본관 : 강릉(江陵))
아버지는 좌복야를 지냈다고 하며, 외조부는 병부상서를 지낸 윤선지(尹先之)이다.
1170년(의종 24년) 무신란의 성공으로 중낭장이 된 뒤
    공부낭중, 금오위의 차장군(借將軍)·어사잡단(御史雜端)이 되었다.
    의종 때 문신·유가자제(儒家子弟)들이 교유하던 계에서
    무인 문장필, 오광척을 입계시키려 하니 모두 좋아하지 않았으나
    유자량(庾資諒)은 「우리가 교유하는 데는 문무가 서로 어울리는 것이 마땅하니
    만일 거절하면 문신들이 반드시 후회가 있으리라」라고 주장하여 함께 계를 하였는데
    얼마 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문신들이 박해를 당했으나
    이 계원들은 오공척과 문장필의 도움으로 무사하였다

1172년(명종 2년)  12월 경인에 이광정을 수태보판이부사로, 한문준을 판병부사로,
   문극겸을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로, 문장필을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로,
   두경승 염신약 조정원을 함께 추밀원부사로, 이의민을 공부상서로 삼았다
                                                                                    (고려사 20권-세가 20)

1174년(명종 4)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 윤인첨(尹鱗瞻)휘하에서
          지병마사로 참전하여 서경을 공벌하기도 하였다.
1176년 추밀원의 승선이 되고, 1181년 추밀원지주사·좌산기상시를 거쳐
1177년 추밀원부사가 되심
1183년 12월
이광정(李光挺)을 수태보판리부사(守太保判吏部事), 한문준(韓文俊)을 판병부사로,
    문극겸을 중서시랑 평장사로 삼고, 문장필(文章弼)을 동지추밀원사로 삼고,
    어사대부 두경승(杜景升)   염신약(廉信若)ㆍ조원정(曹元正)을 모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高麗史節要 제12권)
○어사대부를 거쳐 이듬해 참지정사가 되었다. 벼슬이 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韓國金石文追補(李蘭暎編, 亞細亞文化社, 등).

○경대승 정권때 연등회에서 장군들과 친위군이
   명종 앞에서 술에 취해 소동을 일으키는 것에 분개하였고
   충의있는 문신으로 무신정변 이후 문극겸과 함께 명종을 보필하였다.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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