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문화유산

세거지

인흥문고

목화

옥미주

문정승감나무

역사연구회

 

인흥 세거지 문고(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401-2)         ☎ 053-637-5416 

조용현님 글

방문기

사진첩

신동아2001년 11월(링크)

위치

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구마고속 화원나들목에서 5번 국도 이용 대구쪽 1.4km에서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여  하천 따라 2.5km 지점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광거당
(廣居堂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님의 글씨인데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인수
(仁壽)문고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중곡(中谷)문고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고려 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인흥사는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인흥으로 남은 터를 잡아
신분에 따른 건축 제한(궁궐만 100칸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이 폐지된 후였기에
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우수한 자재와 기량으로 11개 건물 3,500여평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과 안목을 높였다
남평문씨 의안공 이곡파의 후손인 인산제 문경호
(文敬鎬1812-1874) 씨가 건립한 후  160여년에 걸친 문씨세거지인데
시도민속자료  3호로 대구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바 이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씨종가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에서 관리하는 3개 문중의 하나로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이곳의 자랑은 7000여질의 2만권이 넘는 장서인데 후손에게 일제치하의 식민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에 구입단을 파견하여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의 태산준령을 넘어 운반하는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님이 이 집안 출신이며
주관리자는 종손 문정기님이고 서책관리는 서울신문사 사장을 하신 문태갑님이 하고 계시면서 안내를 하시기도 하는데 
언제 방문하여도 좋으나 늦여름 담장마다 능소화가 만개 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2만권 고서 소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 조용현님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출판)에서 발췌 -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인수문고는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된
①경(교과서 격인 경전) 536책 ②사(역사서)1813 ③자(기예와 술수 소설등 )588  ④집(개인문집)4011으로 총6,948책과
1975년 이후에 구입한 1,500책으로 8,500책에 20,000여권으로 서원중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안동 도산서원이 4,400책이니 책의 량을 가늠할 수 있다.
경술국치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학교에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하여 남평문씨의 자녀 교육을 위한 독자적 프로그램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겸 도서관이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만권당은 돈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과 재력의 뒷받침을 남평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萊파) 문세근(世根)씨가 500여년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에 이주한후 화원에 들어온 것은 문세근의 9대손인 문경호(敬鎬)로 1840년경이었다.
인흥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역대연대표를 작성하고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의 절터였는데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이 대웅전 자리이고,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인 고려정은 인흥사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밭가운데의 석탑도 인흥사 유물이라고 전한다.
절터 중에서는 명당이 많으나 그렇지 못한 곳도 있는데 바위로 된 곳은 기도처로는 좋지만 주택으로는 좋지 못한데 이곳은 바위산이나 보이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다.
이집의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데 왕가가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여년에 걸친 조상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는 집안의 가통이 확실하게 정립되었음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경호는 천석의 재력을 갖추었고 처음부터 계획한 마을로 우물정(井)자 형태로 400~500여평의 대지를 가진 9개의 가옥과 공공건물인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까지 도합 12채의 건물이 1만여평의 대지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1만여평은  동네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유공간에 건물이 들어서면 품격이 떨어짐을 우려하여 앞으로도 더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고 현재 처럼 9채만 유지하기로 문중에서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 살고 차남은 다른 곳에서 사는데 다른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보다 주택을 받은 장남이 적게 가지는 등으로 상속되지만 주택만은 장남상속의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데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며 직장을 다닐 때는 객지에서 생활 하더라도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이며 외부인에게 집을 판매하지 않아 문씨들만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휴지나 빈병등의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조선소설사 저자)은 인흥의 모습을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 나면 수년전 연희 전문학교에 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전남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 壽峯 문영박)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방문하니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이 모여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전채 제시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건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고 했디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그 재력은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이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어 1만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도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들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이다 만권당의 기획은 문영박이 하고 아버지가 적극 후원하였으니 부자간의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문경호가 터를 잡고 손자인 문봉성이 대들보를 세우고 증손자인 문영박이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으로 문장지와 수봉선생이란 표현들은 문영박을 지칭하며 수봉정사도 수봉 문영박의 사후(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이 교류한 인물중에는 심제 조긍섭(영남지방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창강 김택영(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있음) 난공 이건방(강화학파 핵심멤버), 이정, 변정상 등이며 강화학파는 개화기때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 학파로 일제 강점기를 수용하지 않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만주로 갔으나 강화학파의 맥을 잇기 위해 이건방을 남겼고 위당 정인보에게 전했기에 수봉의 묘갈명을 정인보가 짓게된 것이며 수봉 사망후 상해 임시정부발행으로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은 1931년의 이 조문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인흥 방문기(2002년 6월 문병달 작성)

08:45 병준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병준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부산을 출발하여 남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구마고속도로를 달리다 화원 나들목으로 나와 5번국도를 따라 대구쪽으로 진행하다 본리동과 남평문씨 세거지의 안내판을 보고 다리를 건너 내려가니 왼편에는 인흥서원(추적 선생 배향)이 있고 오른편이 문씨 세거지로 참깨밭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인수문고앞 주차장에 내리니 연락을 받으신 정기님(종손)과 태갑님(전 서울신문사장)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입구에 심어둔 목화가 30cm 정도 자라 있기에 가져간 것은 분재용으로 쓰기로 하였고 먼저 종가댁을 방문하였는데 양쪽은 2m 가량의 흙과 돌로 담은 쌓았고 도로폭도 2m 정도인데 60여m 를 걸어 대문에 들어가니 거북모양의 잠금장치는 종가에만 거북의 등에 무늬를 세겼다는데 사랑채의 대문과 안채의 대문이 있어 대문이 3개였다. 대지는 400여평에 300여평의 채마밭이 딸렸다
공직에서 물러난후 인흥에서 생활 하시는 정기님의 집안은 의안공 이곡파인데, 원래 성당동에 입향하여 경호선조께서 인흥에 터를 잡으셨고 10여리 떨어진 뒷산에 14대에 걸친 선조님의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손수 커피를 내어오신 김신자(종부)여사 께서는 응접실은 창고를 개조 하였고 안채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안채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안내를 하시면서 긍지에 찬 자신있는 표정으로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시면서 조용현 교수님(한국의 명가 저자)도 안채에서 하루를 머물었다고 하고, 건축가와 풍수 관련 분야등의 전문가들의 방문이 잦다고 하신다
안채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청의 우측은 부엌이고 좌측은 아담한 방인데 천장의 구조가 특이하였고 아름드리 홍송으로 건축하여 아직 다른 나무 한쪽 덧된 것이 없다는 종부님의 설명을 듣지 않드라도 견고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현판과 그림 앞에서는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 무식이 탄로날까 하여 질문조차 못했다.
내부는 생활을 위해 개조하였다는데 부엌은 일핏보면 현대식 주방으로 보이지만 싱크대 옆에는 물려 내려온 것이라는
고색창연한 찬장과도 함께 들여 놓은 듯이 잘 어울리고 위에 걸린 에어컨 까지 원래 부터 자리를 잡고 있은 것처럼 현대와 고대가 이질감이 없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종부께서는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답하시었다.
부엌의 문을 열어 보이시는데 현대식의 욕실이 나타나니 문경의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에 갔을때 한식의 기와지붕을 한 건물앞에 화장실의 안내판이 있어 들어갔을 때의 수세식 화장실을 만난 듯한 기분인데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무릎이라도 치고 싶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를 3년째 기르고 있다고 하시고,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꾸어 잔디의 녹색 바탕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를 보는 듯 한데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대며 서성대는 순하게 생긴 개는 그림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2칸의 행랑채는 행랑살이가 없어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을 하시는데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고깔을 쓰고 영글고
옆의 우물이 고려정이라고 설명하시는데 차범총무님은 고려정이란 안내판을 붙여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신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채의 대청에서 마을 입구가 보이도록 구조가 되어있어 손님의 내방을 미리 알 수 있고,
경호 선조님께서 건축 당시는 모두가 초가였지만 광거당과 3채의 집을 1910년에 기와를 올리고 차례로 작업하여 30여년전에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1:30 인터넷 족보 입력을 위하여 인흥파보 한권을 기증받아 종가를 나오는데 종손님과 함께 종부님께서 마을 입구까지 전송하면서도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함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에서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베인 종가집 며느리의 품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조용현 교수의 글에서 안동 김성일씨의 집안에서는 종부에게 해가 바뀌면 모든 일가들이 세배를 올리고 종부는 서울에 살면서도 일년의 절반을 안동에 내려와 손님을 접대하면서 종가를 지킨다는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 했는데 남평문씨 인흥세거지의 종부도 그에 못하지 않으니 가씀이 부듯하였다.

인흥에서 서고 관리를 하시는 태갑님의 안내로 들어간 인수문고는  근간에 건축하여 현대의 인문에 관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며 열람은 맞은편 건물에서 한는다는 설명이 계셨고 사람이 겨우다닐 좁은 통로외에는 책들로 가득 채웠는데 감명깊에 읽었던 왕비열전등이 앞쪽에 꽂혀있고 영어로된 책들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수봉정사 마루에는 추사의 글씨외에 문진경(송나라의 명필)씨가 적었다는 사백루 현판의 글씨는 날아갈 듯 한데 복사한 글씨로 목판에 세긴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만약  진품글씨가 있다면 가격이 없다는 설명도 하셨다. 설명과 담소 속에 2시간이 잠간인 듯 갔고 정기님과 태갑님의 전송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인 군위로 향했다

인흥 사진첩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본리리 401-2 ☎053-637-5416 인흥세거지 찾아 오시는 길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본리리 401-2 ☎053-637-5416 인흥세거지 전경(팜플렛에서 발췌)

 가옥배치도(장손들에게만 상속하고 판매하지 않기로 문중에서 결의)

 2만권의 장서를 보관한 서고의 경내

 인흥세거지 원경

 수종정사에서 기념촬열

 광거당

 

세거지 소개

전남영암장암리 송파구문정동 부산기장군  기타 세거지

 

세거지란 일족이 모여사는 마을을 말하며 옛날에는 세거지가 양반의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 이기도 했습니다.
산업화 후에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하여 떠나고 산소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는 현실이지만 수많은 전쟁과 가난속에서도
씨족을 자랑과 긍지를 여겼던 선인들의 자취는 남아 있습니다.
충남 서산군(128)은 성숙공의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전북김제군공덕면(146)은 순평군파의 집성촌이며
전북 옥구군(132)은 시중공의 후손   전남 화순군 보성군(764)은 순질공의 후손  경남 합천군(196)은 판서공파후손
북제주군(135)은 남제공의 후손의 집성촌들이며 경북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23)    함남 함흥시(250)  황해도 봉산,장연군(133)  평북 평창군(150) 등에도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300여 가구)

1454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세조의 패륜에 분개한  문맹화(순평군 후손)祖 께서 벼슬을 떨치고 경기도 파주에서 이거 하신 곳으로   전체 3백50여 가구중 3백여가구가 남평문씨요,
시인묵객들에 의해 ‘용강에 붉게 타는 노을’ ‘월출산의 자욱한 안개’   ‘토끼동산 허리의 보름달’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역사스페셜<다큐·KBS1 밤8·00>
전라남도 영암군 장암리에는 300여년 전부터 유지되어온 장암 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두 계의 총회가 열리고 엄격한 회계 감사를 실시하며 회계장부인 ‘용하기’에는 문중재산과 마을 공동재산의 쓰임이 정확하게 기록된다. 300년 전부터 전해진 ‘용하기’를 통해 ‘신용사회 조선’을 들여다본다.

장암에 대한 게시판의 글들의 내용

문규연

2003년 4월 12일 KBS에서 방영한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대동계를 보고 우리 선조들의 단결과 평등정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300년전 조선시대에 정확하고 투명한 회계로 신용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상업회계상 자랑스런 지혜의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방송에서는 남평문씨가 고려시대 상업을 주로 한 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상업은 평민들이 하는 걸로 아는데...

문병달

저도 방송을 잠시 보다 자리를 떠나야 했기에 내용은 모릅니다만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마을은 순평군 달한선조의 후손들의 세거지로 알고 있습니다
사농공상이란 서열은 조선시대의 산물이고 고려시대는 군벌(지방토호)들이 양반이었다고 봅니다.
고려태조 왕건도 무역선단을 운영하던 상인의 집안이었고 제2부인인 나주오씨는 염전을 운영하던 집안이었습니다.
고려의 양반은 문반과 무반으로 벼슬을 한 사람을 일컬으며
조선의 양반은 우선 집성촌이 있어야 하고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 삼대 이내에 벼슬을 하는 집안이 명문으로 대접받았고, 반상의 구분이 뚜렸하여 신분상승을 제한하고 직업 또한 귀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세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상업에 치중하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문태훈

장암이라면 순평군파일가분들이 살고 계시며 우리의 전통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오고있는 마을로만 알았는데 이번역사스페셜을보고 새로운것을 알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할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한것인데 고려시대 우리의 선조님은 최고로 위세를 떨쳤던 시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자금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나 장사는 양반이 하는것이 아니라 중인이나 평민이 하되 총괄하는 것은 권력이있는양반일것이구요
고려시대 개성에는 시전이 크게 있었다는데 시전은 권력있는 양반이 운영하는 그런 상가아닙니까
심지어 왕까지도 비단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했다는 말도 있으니 송상하면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의 코리아라는 명칭도 고려의 송상들이 세계각국으로 장사를해 고려를 알려 지어진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선조님들이 그렇게 TV이에 나오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그리고 승권씨 순평군파 24대손이라는데 어느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순평군 달한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아니면 유필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저는 광주에 거주힙니다 장암하고는 가까운 거리지요 예전부터 마음은 있었는데 실천을 못했지만 직접 장암을 체험하려합니다

문승권

저는 순평군파 24대손인 문승권이라 하며, 바로 '장암(일명 '마당바우)이 고향입니다.
저는 아침에 www.kbs.co.kr/history를 통해 회원가입 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대부분 아는 분들이 나오시더군요..
경영학 중 회계학을 전공했던터라 유심히 눈여겨 보았는데 몰랐던 부분도 발견되었습니다.

1. 1668년부터 창립되어 유지되어 온 '장암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는데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있었고, 현재도 거의 중장년층에도 상부상조정신에 따라 동년배들끼리 또다른 '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2. 남평문씨가의 대동계는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을 하는 장부인 용하기(用下記)로 쓰임새를 아래로 기록한다는 의미로, 조선사회의 공동재산 관리에 대한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3. 내(內)를 중심으로, 경주최씨의 경우는 이(以)를 중심으로
예를 들면, '1781년 봄 벼장부'라는 보조부로서, 왼쪽에 차변(항목과 두, 승, 홉), 오른쪽에 대변( 항목과 두, 승, 홉)을 대차평균의 원리에 의해 기록, 집계했다는 사실입니다.

4. 장부기록 용어를 보면,
질(秩, 차례질)이라는 계정(account), 과목, 항목과 유사한 의미로서 순서대로 정리, 기록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봉차질(수입), 급(給)차질(지출)로 현재의 손익계산서의 비용과 수익으로 대응하여 분리, 회계처리함과 같으며
또한 이익질(秩), 소비(秩)로 구분도 했으며, 단위는 계량형에 의한 척도로서 두, 승, 홉, 작까지 명확하게 기록했다.

4. 부기(簿記)에 대한 세계최초는 이탈리아의 베니스상인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 때 개성상인들이 작성한 '四介松都治簿法' 이 복식부기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5. 대동계의 시초는 역사책에도 나옵니다만 영암 월출산 바로 아랫마을인 '구림'이며, '장암'은 장암대동계를 운영하면서 기록면에서 충실했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전계원들 앞에 공개하고 잘못된 오류 즉 '오록'은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결산보고나 주주총회에서 보고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6. 장암의 동네는 경기도 파주 봉일천 지역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낙남(落南)하여, 나주목사로부터 장암으로 터를 받아 정착하여 3개파(영보, 서계, 율산)로 3형제가 터를 이루고, 4km 떨어져 월출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전형적 농촌지역 입니다.

7. 지역적으로는 상업지역은 아니라고 보며, 장보고를 연상할 수 있는 바닷가인 목포와는 20km 이상 떨어져 있어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불편해서, 사농공상으로 분류함은 착오가 아닌가 합니다.
고려시대 때 선조들께서 영의정 등이 특히, 많이 배출되어 고려시대를 피크로 보며, 조선시대에는 영호남 지역으로 흩어져 특별히 상업에만 의존한다고 봄은 무리라고 봅니다. 장암의 동네는 집성촌으로 사와 농의 중간정도로, 수년전에는 '효의 마을'로 군내에서 지정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 향리에 이렇게 오래 된 장부기록을 보존 해 옴은 처음 알았으며, 어느 정도 종가집에서 족보정도만 보관되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리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전계원 참여하에 300여년동안 빠짐없이 기록, 보고함이 의의가 큰 것 같고, 중년계층에서 이어 받을 세대가 없어서 단절이 될까 우려도 됩니다. 이농현상이 심한데다 회계기록이 요즘은 PC프로그램에 의해 기록, 정리되고 한문에 의한 붓글씨 기록을 부담스러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9. 최근 회계부정으로 미국의 엔론(에너지회사)사태, SK 분식회계처리와 같은 경우가 많음은 회사를 곱게 포장(자산이나 이익이 많게)해서 대출이나, 투자자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 효, 투명성(유리알), 계, 장부기록, 상부상조, 예절, 조상숭배 등이 느껴지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한국계의 장부기록에 관한 연구"를 논제로 하고픈 맘도 있습니다.
남의 것, 큰 나라것만 좋다고 무조건 찾고, 보고, 관심가지는 것보다 우리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지혜도 가져여 한다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10. 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성호 박사 (물가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명희 박사 (향토윤리)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文井洞)

병자호란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사는 문씨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의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의류상가인 로데오 거리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 문정골, 혜경머리,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두댐이마을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광주군 문정리라 불렀다  분당 신도시와 인접하여 주택지, 농지, 임야 등이 혼재한 도농(都農) 복합지역이다. 송파대로가 동의 중심을 지나 경기도 성남시로 통하고 문정1동사무소 옆에는
수령 500년, 높이 20m, 둘레 4.7m의 서울시 지정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웅천리는 행정구역으로 중리 미동 석길의 자연부락 3곳을 합한 이름입니다.
1955년 경에는 200여 가구 중 80% 이상이 남평문씨 동래파종중의 북면파 후손들이 모여 살았으나 현재는 50% 정도의 비율인데 주로 부산으로 많은 이주를 하였으며 타성들이 들어오기도 한 것입니다.
30여미터 높이의 와폭인 홍류폭포가 절경인데 50여년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주민들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기도 하였으며 홍류폭포 옆에는 문씨들의 정각인 문연정이 있고 1992년 중산재실을 신축하여 선조들의 제향을 모시고 있습니다.
미동 부락에는 한국의 100대 아름다운 집으로 방송에 알려진 문백섭씨 소유의 집과,
                     문백섭씨 앞집 또한 2001년 아름다운 정원으로 방송에 소개 되기도 한 아름다운 마을이며
                     홈관리자의 출생지 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가는 헐리고 없습니다.
마을의 경로당에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드높은데 마을의 길흉사나 객지에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면 꼭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로당 옆에 있는 당산입구에는 수리정이란 비석이 있고
현재는 한우 쇠고기 전문점의 단지가 되어 30여곳 이상의 음식점이 한우만을 취급하는 영업을 하고있습니다.

 

향토지적재산 남평문씨 종중주 옥미주(玉味酒)
향토지적재산 한국 전통민속명주 제1호

100여년동안 충북의 제천, 단양 지방의 관혼상제나 큰행사에 쓰이던
문씨종중주(文氏宗中酒)로 내려온 술인데 동동주이며 서민의 술이다.
문씨 집안에 시집온 임송죽씨가 시어머니로부터 제조 기법을 전수받아
도수 11도의 발효시켜 관광민속주로 지정받아 제조하여 오다가
지금은 며느리 김미선씨 내외가
안양의 안양유원지에서 시판하는데
현미를 주원료로 하여 옥수수, 고구마, 엿기름 및 누룩을 사용하여 16일간에 걸쳐 만들어 지는데 이름처름 구슬처럼 아름다운 술이다.
옥미주는 담황색 빛깔에 그윽한 향과 독특한 맛을 지니며 그 취기도 은근히 올라 서서히 깊게 취한다.
깊고 순한 맛을 내며 피부미용과 동맥경화 예방에도 좋다. 특히 술이 깬 후에도 갈증은 물론 두통과 숙취가 없어 건강에도 득이 되는 약주이다
일반 소비자들이 민속주에 대한 선입견이 안타까워 양질의 민속주를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집안의 이름을 걸고 시판하고 있다고 한다
옥미주 특유의 향과 맛은 현미가루와 찰옥수수 가루를 어떻게 혼합하느냐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옥미주의 제조과정을 보면, 먼저 벼의 외피인 왕겨만을 벗겨낸 현미 3kg을 지하수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12시간동안 지하수에 담가 놓는다. 담가놓았던 현미를 물에서 건져 물기가 완전히 빠지게 한 다음 거칠게 빻아 2시간 정도 증자(蒸煮)한다. 다음으로 증자한 분말 현미에다 누룩 1kg을 콩알만하게 빻아 면밀하게 혼합한 후 지하수 4리터와 효모 20g을 희석시키고 이것을 도기에 부어 골고루 저어 주어야 한다. 이때 저어주는 용구는 반드시 나무로 만든 지팡이나 주걱을 사용한다. 이러한 공정을 거친 뒤 1차 당화과정이 있는데 이때 온도를 25 - 30도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1차 당화과정후 옥수수, 고구마 가루, 엿기름을 적당히 넣고 보름동안 숙성시킨 다음 주맥을 자루에 넣어 짜내면 맑고 그윽한 향을 지닌 옥미주가 빚어지게 된다. 하루동안 짜내도 겨우 30리터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제조과정은 1단계 공정으로부터 160 - 170시간이 소요된다

안양 옥미주 판매장
안양역에서 서울방향으로 (103-1번) 버스로 안양 유원지 입구에서 내려 안쪽으로 200m정도인 대형풀장 맞은편

일제시대 양곡관리법 및 주세법 등에 의한 밀주단속으로 전통 민속주의 대부분이 맥이 끊겼지만 다행히도 옥미주는 문씨 집안의 일부가 경북 안동 산골로 이주하여 그 뿌리를 내려 단절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임송죽씨는 문씨 집안에 시집온 뒤 황경분씨로부터 제조법을 전수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1990년 들어 전통문화발굴 및 관광문화개발 차원에서 전통주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자 임경숙씨는 옥미주에 대한 제조 및 시판 면허신청을 하여 1990년 3월에 제조면허를 취득했다. 그 해 4월에는 안양유원지 안에 옥미주 시음장을 열었으나 처음 하는 주점이라 어설픈 점도 많았고 유원지내 상인들의 텃세가 심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손님이 없어 빚어 놓은 옥미주를 버리기도 했으며. 옥미주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찾아온 고객들이 옥미주시음장의 간판을 보고 동동주와 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옥미주 시음장은 문을 연지 몇달 안되어 일반인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여 찾아오는 고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임송죽씨는 오직 순수한 진품만을 내놓으며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음장 운영의 철칙으로 세우고 있으며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많은 사람들에게 옥미주를 알리겠다는 의지로 생산하고 있다

2)제법
옥미주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미 3Kg을 물로 깨끗이 씻은다음 12시간 담가 두었다가 건져서 물기를 뺀 후에 거칠게 빻은 후 곡자 1 Kg을 콩알만하게 빻아 섞고 물 4리터에 효모 20g을 희석해서 깨끗한 도기에 붓고 혼합한 것을 넣어 잘 젓는다. 그 뒤 고구마와 엿기름 등을 첨가하여 숙성시킨 주요를 넣어 짜내면 11도의 옥미주가 얻어진다.

3)특징
원래 충북, 강원도 지방은 감자와 옥수수술이 대종을 이루었는데 현미를 넣어 만든 술은 그 고장에서는 고급주로 취급되어 제조된 듯하다. 고급 약주로써 문씨 가문의 술로서 재주로 많이 빚은 듯하나 지금은 쌀의 생산이 많아 옥수수, 감자등의 원료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옥미주는 모든 향토주의 공통적인 장점이기도 하듯이 재래식 누룩과 공정을 사용함으로써 뒤끝이 깨끗한 서민적인 약주이다.

4)옥미 동동주
전래되어온 옥미주기법을 활용하였으나 주원료는 찹쌀과 누룩으로 빚었으며 그 외 몇가지 비방의 재료가 들어갔으며 맛의 우열은 물과 숙성시기, 온도에 좌우된다.

옥미주제조장 : 평촌역에 하차하여 열병합 발전소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목화(Cotton)

설명

재배역사

기르기

발아와성장

꽃봉오리

다래

솜꽃

재배장

 

목화의 설명

학     명

 Gossypium herbaceum Linn

원산지

 동아시아

 꽃 말

 어머니의 사랑

염색체수

  2n=26

개화기

 8-9월

     

 무궁화목 무궁화과의 섬유작물

목화는 다른 천보다 땀을 흡수하고 강하여 우리들이 입는 내의는 대부분 목화로 만든답니다. 입고 계신 속옷의 안쪽에 붙은 라벨을 보세요. 또는 cotton이라고 있는 것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만든 것입니다 .
목화는 충선공 문익점 선조께서 목화씨를 들여오시고 손자인 문승로, 문래, 문영 등의 노력으로 모든 국민들이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기후

목화는 생육에 고온이 필요하므로 연평균 15℃ 이상인 열대에서 온대의 남부에 걸쳐 재배된다. 한국이나 미국의 재배 북방한계(北方限界)는 북위 37°이다. 일조(日照)를 많이 필요로 하여, 생육기간의 40%이상, 특히 결실기에는 맑은 날이 계속되어야 한다. 미국 남부의 목화지대가 적지로 알려져 있다

토양

목화는 이어짓기 장애가 적은 작물이며 토양에 대해서도 적응성이 크다. 산성에 약하나 염분에 대해서는 각종 작물 중 가장 강한 편이므로 염분이 많은 알칼리성 토양에서 재배되는 것이 보통이다

형태

현재 주로 재배되고 있는 목화는 한해살이초본으로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키가 0.6∼1.2m이다. 품종에 따라 잎은2∼4개가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지며 길이는 5∼10㎝, 여름에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결과지(結果枝)가 나와 각 마디에 꽃이 핀다. 꽃은 3개의 포엽(包葉)에 싸여 있고 안쪽에 꽃받침이 있다.
꽂잎은 5개로 개화 후 모두 붉게 변색된다. 줄기는 약 6㎝, 자화수정(自花受精) 후에 생기는 삭과는 길이 3∼4㎝로 복숭아 열매 모양이고 녹색이며, 속에 3∼5칸이 있고 1칸에 7∼8개 정도의 씨앗이 생긴다. 성숙하면 삭과는 갈색으로 되고 갈라져 열린다(개서).
목화(木花)는 꽃모습이 무궁화나 접시꽃과 비슷하나 꽃 밑에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삼각형 모양의 포 3개가 꽃잎을 갈고리처럼 움켜쥐고 있는데 갈고리 속에서 꽃봉오리가 생겨나 자라나는 모습도 볼 만합니다

제사
과정

씨 껍질의 섬유는 긴 것으로 해도면이 5㎝, 육지면은 3㎝, 아시아면은 2㎝ 정도이다. 섬유는 전체가 꼬여 있는데, 꼬임은 제사(製絲)에 중요한 성질로 해도면이 가장 많고, 아시아면이 가장 적다. 섬유를 빼지 않은 씨를 실면(實綿)이라 하고 실면에서 씨를 제거한 것을 조면(繰綿) 또는 목화(木花)라 한다. 섬유를 뺀 씨는 면실(綿實)이라 하며 16∼20%의 단백질과 12∼20%의 기름을 함유한다. . 늦여름부터 가을에 개서한 실면을 손이나 기계로 따서 공장에 보내 조면기로 목화를 얻는다. 조면율은 육지면이 30∼35%, 아시아면이 25∼30%이다

용도

목화의 고급품은 방적용으로 면사·면직물 등을 만들고, 품질이 나쁜것은 이불솜,탈지면 등에 이용된다.
솜화약(火藥)이나 각종 충전재(充塡材)로 사용된다. 열매는 압착 또는 용매추출(溶媒抽出)에 의해 짜낸 기름(면실유)은 품질이 좋고 값이 싸 튀김기름 등에 많이 사용된다. 냉각법으로 고형분을 제거한 것은 샐러드유·마요네즈유에 적합하고 마가린 원료가 되며 동물성지방과 섞어 라드(lard)를 만들며 비누 원료에도 쓰이고, 기름을 빼고 난 씨 껍질은 사료나 비료로 이용된다.

 

세계의 목화 재배역사

인도

아세아목화로 기원전 수세기부터 목화공업으로 유럽에 알려졌으며 모헨조다로유적(현재 파키스탄領)의 기원전 2000년 경의 지층에서 면사가 발굴되었다

페루

아세아면이 BC1500년경부터 이용되었고 인도와 별도로 직물을 만들었음이 밝혀졌으며 그 후 동남아시아·아라비아·아프리카 및 남부유럽으로 목화재배가 퍼졌다

중국

아시아면이 11세기경부터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중요한 작물로 재배되었다

이집트

고대부터 섬유작물로 아마(亞麻)가 생산되었지만 기원전부터 목화가 이용되었다.

중남미

콜럼버스가 오기 이전부터 중남미·서인도제도 일대에서 목화가 재배되고 있었다

이집트

서양인들이 해도면이 서아프리카나 수단에 전해져 카리브제도 면이 탄생되었다.

영국

인도의 목화를 파나마에서 재배를 하고 미국에 전함

미국

1740년경 버지니아에서 재배되고 영국의 랭거셔에 대방적업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규모 기업재배화 됨과 방적에 유리한 육지면은 세계 여러나라로 퍼져 생산되었다

한국

1363년(공민왕 12) 원(元)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던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숨겨와 경남 산청에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되었다. 아시아면은 방직원료에는 부적당해 점차 육지면으로 대체되어 1904년부터 목포(木浦) 면작 시험장(현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목포지장)에서 육지면 품종 육종시험을 실시하고 있는데 목화 품종으로는 목포 6호·목포 7호·수원 1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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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에서 목화(木花) 기르기

화분에서 목화를 길러 자녀의 관찰력과 정서순화에 도움을 줍시다.

목화의 한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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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

떡잎

개화직전

만개

 개서

 목화꽃

 산청목화밭
꽃은 물론 열매인 목화솜도  아름다워  두번 꽃이 핀다고 하고 잎의 모양도 관상가치가 높습니다.
목화를 키우면서 자연을 배우고  헐벗은 백성을 사랑하신 익점 선조님의 솜처럼 따스한 정을 느끼면서  관찰일지를 적어 관찰력과 기록하는 습성을 갖게하고 정서순화에도 도움이 되게 합시다
목화솜은 쿠션이나 방석을 만들어 선물해도 좋으며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으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목화 솜 실을 뽑아 옷감(무명베)을 만들거나 솜으로 사용합니다. 기름을 빼면 탈지면이 됩니다
목화 씨 기름을 짜서(면실유)  페인트 원료나 등유로 사용하고 한약재로 사용합니다.
목화뿌리 천연 염료로 사용하므로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과정 작업 설명
씨앗 준비 전년도에 수확한 솜에서 목화씨를 분리합니다.
파종전에 씨앗을 세수비누를 이용하여 씻습니다(솜털의 지방분 제거해 발아준비)
맑은 물로 비누를 씻어낸 후에 물에 담그고 위에 뜨는 씨앗은 버립니다.
부산 종친회에 우표를 동봉한 반송용 봉투를 보내면 선별된 목화씨를 보내드립니다.
씨뿌림시기 아파트인 경우 남부지방에서는 4월 하순 중부지방은 5월 상순이 좋습니다
보온을 하지 않고 바로 밭에 씨앗을 뿌릴 경우는 1개월 정도 늦게 뿌리는데 나뭇재에 오줌물을 넣어 반죽한 것에 씨앗을 버무린 후 뿌리기도 합니다.
씨앗 뿌리기 많은 씨앗은 포토를 이용하여 씨앗을 뿌리고 소형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보온합니다
소량이면 몇개의 종이컵을 준비하고 물 빠짐 구멍을 뚫고 흙을 담습니다
씨앗의 뾰족한 부분이 아래로 가도록 3개씩 심고 씨앗 높이의 2~3배의 흙을 덮습니다
파종후 관리 2~3일에 1회 정도 물을 주어 흙이 마르지 않게 합니다 물기가 많으면 좋지 않습니다.
높은 온도에서 싹이 잘 나오니 햇볕 좋은 곳에 두고 투명 비닐로 덮어주면 좋습니다
10여일 후에는 떡잎이 나오고 자라면서 본잎이 나오게 됩니다
쏙아내기 파종 20여일 후 키가 10cm정도일때 약한 싹들은 뽑아내고 종이컵에 한 개의 싹만 남깁니다
겨심기 아낸 10여일쯤 후 목화의 키가 15cm 정도 자라면 밭에 옮겨 심거나
지름 30cm 정도의 화분에 옮겨 심어 햇볕이 잘드는 곳에 두고 첫날은 햇빛을 가려줍니다
배양토는
퇴비5, 흙3, 모래2,  정도이며 영양분이 많은 편이 잘 자랍니다
목화 병해 진딧물이 발생하면 화분의 것은 진딧물을 딱아 내기도 합니다만
밭에서 많이 키우는 경우는 진딧물 약을 뿌려도 주변에서 날아오므로 재차 뿌려야 합니다
목화 벌레 잎에 구멍이 있고 잎이 말려 있는 잎은  따서 버립니다(잎을 먹는 벌레가 있습니다)
밭에서 재배하는 경우는 약을 2회 이상 뿌려야 합니다
꽃 봉오리 7월 초순경 꽃 봉오리가 맺기 시작하고 각 마디에 잎이 달리고 가지가 무성해 집니다.
키가 작고 가지가 많은 목화가 튼튼한 목화입니다
순 자르기 꽃 봉우리의 자람을 돕기 위해 봉우리 없는 줄기의 끝을 때때로 잘라 줍니다
화분에서 키울 경우는 겹쳐서 햇볕을 못받는 잎이나 가지를 자르고 모양을 만듭니다
목화 꽃 꽃 봉오리가 맺히고 흰꽃봉우리가 보이면 다음날 오전 7시~10시 사이에 꽃이 핍니다
꽃 잎은 5장으로 흰색, 백황색, 홍색으로 첫날은 엷은 크림색이지만 다음날은 붉게 변하여  떨어지고 다른 봉오리가 계속 피며 벌이나 나비가 없어도 열매를 맺습니다. 
목화 다래 꽃이 지고나면 몽우리가 생기고 자라서 3~4㎝ 정도의 원형의 봉우리가 생기고 20일 가량 계속해 길게 자라는 것을 다래라고 합니다 다래는 단맛이 있어 어린이들이 간식으로 따먹다가 들키면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북돋우기 왕성하게 자라면 퇴비를 추가로 넣어주고 주변이 흙을 모아 줄기쪽에 쌓아 높여줍니다
목화 솜꽃 다래가 익어서(재래종 30일 육지면 43일) 갈색으로 변하고 서서히 벌어지면서 목화 솜이 보입니다. 살짝 당기면 실이 서서히 풀려 나옵니다.
거두기 먼저 익은 것 부터 순차적으로 따서 햇볕에 3일 정도 말려서 실을 뽑거나 솜으로 사용함.
솜은 지방분이 많아 물의 흡수가 약하므로 약솜을 지방을 빼어 탈지면으로 사용합니다

병충해 방제

진딧물 : 울숙주에서 알로 월동한 것이 4월 중~하순에 부화하여 5월하순~6월상순에 유시충이 나타나 점차 여름숙주로  옮겨진다
목화
의 즙액을 빨아먹으며 각종 바이러스를 매개하고 그을음병도 유발시키며 생육을 저해한다
진딧물 전용약제(메타유제, 피리모수화제. 모노포액제, 포스팜액제, 델타린유제, 피레스유제 등) 를 살포하면. 쉽게 죽지만 다른곳에서 날라오므로 완전한 방제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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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말이벌레 : 애벌레는 목화잎을 먹고자라 목화 잎을 말아 알을 낳으므로 말린잎은 따서 버린다

 

 

목화의 발아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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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씨앗

파종후 3일

파종후 6일

파종후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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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후 8일

파종후9일

파종후 9일

파종후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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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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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후 10일

파종후11일

파종후 15일

파종후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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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화원의 목화밭

 자라가는 목화

목화의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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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가는 목화

 성장한 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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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의 묵은 가지에서 난 목화의 새싹(목화는 다년생임)

 

꽃봉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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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봉오리

봉오리와 다래

개화직전 봉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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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꽃의 목화꽃

백색꽃 목화꽃

백색꽃목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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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꽃 품종

 다래와 목화

 목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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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화사진523

 노란색 목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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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색으로 변한꽃

크림색으로 변한꽃

 분홍색으로 변한 목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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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꽃582

목화꽃583

 시들기 직전의 목화꽃

시드는 목화꽃

시든꽃과 봉오리

목화꽃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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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목화꽃

꽃과 봉오리

목화 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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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다래404

목화다래401

목화다래402

다래(꽃이 진 후에 솜을 만들기 위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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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다래422

목화다래423

익어가는 다래와 솜이 터지기 직전

목화솜424

목화솜425

목화솜601

다래가 여물어 터지고 솜이 피어나는 과정

 

목화솜꽃

목화솜꽃

목화솜꽃603

목화에 달린 솜(늦은 가을의 시배지)

목화솜과 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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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솜633

목화솜634

목화솜651

목화솜636

 솜이 터져나온 과정 이후는 솜을 따서 씨아로 씨와 솜을 분리하게 됩니다.

 

목화 재배장

목화새비지914

목화시배지916

2002 봄 목화 시배지(경남 산청군 신안면)

목화시배지913

목화시배지915

목화시배지의 목화재배 광경

2002년 가을의 시배지

목화시배지912

2002년 시배지의 근경

2002년 시배지의 근경

목화시배지731

1970년대 시배지 모습

남평문씨목화재배장

남평문씨목화재배장933

남평문씨 부산종친회 목화 재배장

남평문씨목화재배장

남평문씨목화재배장928

남평문씨 부산종친회 목화 재배장

남평문씨 부산종친회관 화단

남평문씨종친회 목화

남평문씨 부산종친회 목화재배장922

남평문씨 부산종친회관 화단

 

문정승 감나무

 

보호수 지정 현황

지정사유 : 남평문씨 광주종친회의 지정요청을 받아 타당성 조사 및 검토결과 보호수로 지정 보호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우리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호수로 지정하였기 통보하오니
               향후 보호수가 고사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주변 환경정비 및 사후관리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      치 : 전남 나주시 산포면 신도리 552
관리번호 : 15-4-11-3
품      격 : 시(市)나무
수      종 : 감나무(수령 600년 추정, 높이17m, 둘레 8m 직경 2.7m) 희귀 노목
관 리  자 : 김현수
지 정  일 : 2005년 4월 4일

광주 종친회(회장 문광명)에서 대종회장님께 보낸 서신의 내용

1170년 경 충숙공 휘 극겸 선조께서 전남 나주시 산포면 신도리 도민동 마을에 거주하시면서
손수 심으신 감나무가 이후 800여년 동안 별 탈 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도민동 마을회관이 목각현판에도 고려 명종때 문정승이 도민동 마을에서 출생하셨으며 문정승이 심은
황새 큰 감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도민동 마을 주민들이 문정승 감나무를 잘 보호해 왔습니다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보호의식도 점차 약해지고 있으며 감나무도 노목으로 자생력이 약해져 가고 있어 이를 보존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도민동 주민 김현욱(80세 전 교장,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이 마을이 예로부터 문정승 마을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감나무도 주민들이 잘 보호해 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후손들이 너무 무관심하다고 합니다.
또한 감나무의 보존에 대하여 적극성을 보여야 할 문씨들이 안일한 행동을 한다며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광주,전남 종친회에서 지난 5월4일 전남 나주시에 문정승의 감나무의 역사적 가치성에 대하여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주시에서도 문정승 감나무가 보호수로 지정할 만한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보호수로 지정하였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정승 감나무를 앞으로 수천년 동안 보족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 하다고 사료됩니다.

대종회장 께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2005년 8월

 

 

                 사적연구 기록

곤계연구

나의조상

 

 

                   四世 후식공과 유필공의 곤계연구            -부산종친회 부회장 문신만-

상고위원회의 결정으로 족보의 의계 12대는 넣지 않기로 하였는데도  일부 파에서는 의계를 넣어 세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지만 이는 충분히 연구된 것이기에, 저는 충숙공(3世) 극겸선조의 아들 세분의 昆季(곤계-형제의 순서)를  살폈습니다

 

1. 남평문씨 족보 내력

◎최초족보인 신해(1731)보는 3권으로 고려사에 기초하여 강성군파가 중심이 되어 월천사(현강성서원)에서 우암송시열의 발문으로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 순으로 되어있고


◎을유(1735)보 2권은 동래임란공신 집안과 헌납공파와 여주목사공파가 합작하여 진주 오대사에서 발간한바 역시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 로 되어있고


◎병진(1736)보는 순평군 파보로 외손인 海豊君 李耆(이기)가 외가의 세계 분실을 우려하여 수집한 자료는 임란 때 소실되었으나 유지를 받은 외손인 송암 李魯(이로)가 편찬하고 경암공 文東道(동도)가 완성하였으나 1699년 타계하므로 37년 후인 병진년에 아들인 宇徵(우징)께서 발문하여 제작한바 惟哲(유철) 惟弼(유필), 侯軾(후식)로 하으며 이후 강성파 순평파 감천파에서 여러 편의 족보와 가첩을 발간했으나 특색이 없다.


위의 족보에서는 상계 12대는 의계 처리하고 고려사열전, 충숙공전 원문과 충선공 원문은 공통으로 실었으나

4세 侯軾(후식)과 惟弼(유필), 惟哲(유철)의 昆季(곤계)가 바뀌고 있다


◎정해(1827)보는 강성파와 순평파의 합작으로 판도판서파의 참여가 없는 점이 아쉽긴 하나 창보 이후 100여년의 진통 끝에 양파의 견해가 일치된 명실상부한 대동보로 이때 병진보는 가첩을 중심으로 외손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正史(정사)를 따름이 옳다하여 昆季(곤계)는 侯軾(후식)과 惟弼(유필), 惟哲(유철)로 하였다


◎정유(1957)보는 강성집과 순평집의 합보로 장연서원에서 발행한 바

발문에서 世勳(일명갑주)어른은 곤계 문제를 “구보와 고려사가 크게 차이가 있어 구보를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사기 또한 쫓지 않을 수 없으니 자행 층을 비우고 분파하여 신중하게 한다”고 적었는데 이는 곤계문제의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된 것이다.


◎임술(1982)보는 대종회가 주관하여 전국계파가 총망라되어 대종회가 위촉한 각파와 각지역의 대표를 보계상고위원(譜系詳考委員)으로 위촉하여 심혈을 기우려 만든 합의된 대동보이며 여기서도 충숙공 아들란은 비우고 분파하여 각서하였는데 순서는 후식, 유필 순으로 하였다.


◎을해(1955)보는 누락된 종인들을 등재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순서는 임술보와 같이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로 하였다


◎1997년 합천의 문병춘(병춘)씨의 주도하에 순평군파대보가 6권으로 발행되었는데

  1世        2世            3世           4世

 익(翼) ― 子公裕(공유) ― 子克謙(극겸) ― 嗣 惟弼(유필)

                                                        ― 子 侯軾(후식)

                                                        ― 子 惟哲(유철)로하였는데 근거로는 고려중엽 정치가요 문장가인 최자(崔滋)가 저술한 補閑集 중에서 忠肅公之嗣(충숙공지사) 惟弼時亦爲相(유필시역위상)의 글귀를 취했다고 하여 보한집을 살펴 보면


2. 보한집의 설명

고려 고종때 최자가 이인로의 파한집(파한집)을 보충한 저서로 권신 최이의 권유로 거리에 떠도는 이야기 및 흥미있는 사실(史實), 부도, 부녀자들의 이야기 등을 수록 고려시대의 사회사정을 알아보는 자료가 된다고 밝히고 있는데

1976년11월25일 남평문씨 대종회에서 발행된 충숙공 삼우당실기의 충숙공 년보편(p67~p68)에 최자의 보한집이 해설되어 있으며 남평문씨충선공파종회 문영훈회장은 이 책을 자비로 증판하여 배포하였고,

1999년 9월10일 대종회에서 발행된 남평문씨세덕록 상권 p109~110에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라옵고

참고로 2003년 발행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겸 문학과문학 교육연구소 소장 구인환선생의 보한집 번역문은
경문공 최홍윤이 금방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을 제수받아 중서성에 들어갔는데 숙직하는 방이 네 번째 방에 있었다. 영렬공 금의가 또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을 제수 받고 곧이어 그 방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중서성 넷째 번 재상의 방은 몇 번이나 평장과 정당을 갈았는가 오늘밤 부귀가 감히 누가 이 사람과 같을까 금장원이 최장원 대신 하였네 라고 하였다

영렬공이 임금의 명령을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직책을 맏은 데다가 3대부와 쌍학사를 겸임하였고 재상이 되어서는 오랫동안 인재발굴의 임무를 맡았는데 시를 짓기를

궁중을 드나들기 24년이나 지났구나 닭이 울고 시간이 넘어도 다녀야 하니 모래언덕을 지나다가 밤이 금함을 범할까 두렵구나 라고 하고 이 때 부터 병을 구실삼아 집에 돌아와 휴양하였다.

최공과 금공이 다 같이 충숙공 문극겸의 문하생으로 장원이었고 그 뒤 임신년 봄에 같이 예조에서 시관으로 있었는데, 나도 그의 문하출신이었다

두분은 동시에 재상이 되었는데 충숙공의 아들인 유필또한 그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영렬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 휴양할 적에 그 문하생들이 축수하려고 큰 잔치를 베풀고 겸하여 최, 문 두 재상을 초대하여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영렬공이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같은 문하의 두 장원이 종백과 같이 동시에 평장사가 되었다가,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이번 문하생들의 축하연에 참석하였으니 이는 실로 오랜 세월동안 들어보지 못한 일이로다 어찌 실컷 취함으로 성대한 경사에 보답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대보를 만들어 발문에
忠肅公之嗣(충숙공지사) 惟弼時亦爲相(유필시역위상)의 글귀는 병진창보 이후의 속수보의 한을 풀어준 쾌거라고 말하였으나 해석은 재상인 아버지(충숙공)의 뒤를 이어 아들 유철 또한 재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족한 것이요.
이을 “嗣”한자의 의미로 동생이 형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사적으로 본 서차와 곤계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의 충숙공 묘소는 공의 충절을 기린 옛 사당으로 충남도 문화재 51호인 고간원이 있고 입구에 세워진 충숙공 신도비는 문학박사 이가원이 찬하였는데

삼남삼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贈 평장사이고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는 태상경이요 차거수는 태부시사이며 이린은 내시부집주관이시다....


◎묘소 앞의 묘정비의 묘갈명은 숭정대부 예조판서 판의금 홍문관제학 양산趙得林(조득림)의 찬인데  아들 셋을 두었으니 첫째는 후식으로 평장사를 증직받았고 둘째는 유필이니 평장사였으며 셋째는 유철이니 추밀원사였다...로 기록하였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의 경남지방문화재 102호인 송호서원의 충숙공 선조의 사적으로

송호사(松湖祠)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세운 충숙공 사적비문은 1986년 병춘씨의 선고이시며 1990년 1월25일 장연서원의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편집인 겸 발행인도 하신 세훈(일명갑주)어른이 찬하신 비문의 내용에도 자녀 부분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셨으니 侯軾(후식)은 합문지후이고 惟弼(유필)은 판삼사사 순평부원군으로 시호는 효혜(孝惠)이며 惟哲(유철)은 추밀원사다 딸 셋은 태상경 임부와 태복시사 차거수와 내시집주 이린에게 가셨는데 이린의 손자는 이조의 목조대왕이시다 라고 적고 있다.


4. 고려사 세가 및 열전편의 기록

문극겸은 1185년 중서시랑 판예부사(종1품)로 임명하고  1189년 평장사 문극겸이 죽었다.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아들은 후식과 유필이다. 유필은 벼슬이 지문하성사까지 이르렀다.

문후식은 1198년 동북지병마사(3품)로 임명

문유필은 1220년 안서부사(정5품)로 강직 1221년 수사공좌복야로 임명  1222년 문하성사로 1228년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죽으매 3일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여기서 짚어 볼 것은 후식은 합문지후에서 서기 1198년에 정3품으로 승차되었고,

                             유필은 22년 후인 1220년 정5품으로 임명되었으니 서차의 구별이 가능하며

강성, 순평 양파의 문헌에는 후식은 1137년 출생하여 1199년 별세하시었고

       유필의 생년은 없으나 졸년이 1228년이고 수(壽) 78년이니 이를 역산하면 1151년 생이되니

       후식과의 나이 차이는 14살임을 추정할 수 있다.

 

5. 맺는말

우리 족보에는 시조의 탄강과 12대의 의계 등 여러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씨의 역사는 천년임에도 기록은 겨우 300년이라 앞으로 후손들이 연구하고 밝혀 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그러나, 후식과 유필 두 분의 곤계에 대하여 양 파의 주장이 강경하다고 하여 기록을 덮어 곤계를 밝히지 않고
책을 나누어 각파를 기록한 족보를 만들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으며
앞으로도 이 문제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곤계 문제는 후식, 유필의 순서임이 역사서에 뚜렷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역사서에도 오류와 왜곡이 적지 않음은 익히 아는 바이나,  왜곡할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역사 기록을 외면하고

외손이 만든 파보에 근거하여 분서 각파 한 것은 우리 자신과 나아가 타 성씨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되는 일입니다.
파보도 아닌 남평문씨의 족보를 만드는 분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족보 제작에 참여하실 분들은 문중의 대변자에 머물 것이 아니요,

대동보를 만드는 사람답게 대승적인 견지에서 냉철하게 살피시고 기록할 것이나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문중의 의견을 모아 각파 분서한 부분만은

역사의 기록에 따라 1137년 생인 후식은 형이요, 1151년생인 유필은 아우로 바로 잡는 결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의 모자람에 대해서는 일족 여러분의 지도와 편달 있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조상 남평 문씨            -계룡고등학교 문용기(http://krt.hs.kr/~myk1/

남평문씨의 종사

종사라 함은 어느 씨족(氏族)이 모여 조상(祖上)을 위한 사업(事業)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업에는 여러가지가 있다즉, 족보(族譜)를 만들고 또는 조상의 문집(文集)을 간행하는 것, 제실 비각을 건립하는 것 등 선조(先祖)의 사적을 보존(保存)하기 위한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사는 옛날부터 유교정신에 의하여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씨족의 모임이 있는데 첫째로 대소 문중이있다. 문중이란 어느조상의 후손들의 모임을 말한다.

그밖에 종회(宗會)가 있고 화수회(花樹會) 대종회(大宗會)가 있다. 이 모두가 종사를 목적(目的)으로 한 모임이다.

여기에는 모든 자손(子孫)이 자진해서 참여하여야 하며 평등(平等)한 권리(權利)와 의무(義務)가 있어야 하고 이 신성한 모임은 어느 단체나 개인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안되며 총회 본연의 목적을 망각해서도 안된다.

 

우리 남평문씨는 시조(始祖)로부터 1000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단일 본 씨족(氏族)으로서 그간 위대한 조상들이 국가 사회 발전에 공헌하여 왔으므로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아 왔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의 피를 이어 받은 우리 자손들은 긍지와 자부를 가지고 선대들이 땀 흘려 가꾸어온 위적수훈(偉蹟垂訓)을 더욱 빛내야 하는 공통된 책임을 가지고 종사에 지진 참여하여야 한다.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시조(始祖)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諱 多省)께서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장자지(長者池) 못 가에 우뚝솟아있는 문암(文巖)위에 탄강하신이래 유구한 수보(修譜)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시조로부터 연계소목(連系昭穆)이 구구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계속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 문제는 비단 우리 남평문씨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이 나라 모든 씨족이 같은 실정이라 할 것이다.

옛날에는 족보(族譜)법이 없었다. 족보 법이 시작된 것은 중국 주(周)나라와 한(漢)나라 시대의 세본(世本)과 연표(年表)가 시초이고 북송(北宋)시대의 소보(蘇譜)가 지금에 전하여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서는 고려중기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선원록을 효지로 권문세가에서 4세 까지 만을 수록하는 가승(家乘)이 처음 시작되었으나 체계를 세워 족보를 만들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인 1476년 선조 성종 7년 성화 12년 안동 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1562년 조선조 명종 17년 가정 41년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최근 다시 1422년 조선조 세종 4년 영락 20년의 문화 류씨 세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조정에서 왕족(王族)이나 사대부(士大夫)만이 혈통을 기록하여 내려왔고 일반서민 들에게는 혈통을 기록하는 가승이 없었다.

 

우리 문씨는 서기 1159년(고려 의종 13년)의 경정공(敬靖公) 휘 공유 (諱 公裕)묘지명에 따르면 조(祖) 증(曾) 고(高)는 가첩(家牒)에 올라 있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중엽에 이미 가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1464년(조선조 세조 9년) 의 천순갑신 세승(天順甲申 世乘)을 비롯하여 가정말의 문씨일승(文氏逸乘). 만력년간(萬歷年間) 의 모계가첩(茅溪家牒), 파산가승(坡山家乘) 이천가보(利川家譜), 현종년간(顯宗年間)의 희석보(熙碩譜)등이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전하여진 것이 없고 단지 1731년 신해년에 전라도 장흥 풍암 선조를 모시고 있는 월천서원에서 만력년간에 모계 선조 휘 위가 수서 하여 전한 바 모계가첩을 편신하며 간판 3권으로 간행한 신해보가 유일하게 오늘에 전하여 오고 있다. 따라서 종중에서는 이 신해보를 창간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1736년에 해인사간 병진보가 있다.

 

그러나 시조가 탄강한지 1000여년 후에 시조 이하 대대로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시대는 첫째로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였으며 같은 자손간의 왕래도 없어 어디에 어떠한 자손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실정이 있어으며 또한 상고할 문헌도 많치 않은 터여서 어찌 올바른 족보가 될 수 있었으리요. 그러나 당신 나름대로 모계가첩등 모든 참고될 수집 고증하여 시조 무성공 휘 다성을 모시고 아들에 휘 탁 선조까지는 알았으나 그 이하는 상고할 수 없으므로 중조 휘 익 선조를 원대 손으로 모시고 아들에 휘 공인, 휘 공유, 휘 공원, 선조를 모시고 아들에 휘 극겸을 모시고 그 아들은 장자에 휘 후식 이요, 차자에 휘 유필이요, 셋째에 휘 유철을 모시고 충숙공 휘 극겸에서 충선공 휘 익점까지 9대 선조를 모시어서 나름대로 족보가 만들어졌다.

이 신해보가 간행된 5년 후인 1736년 병진에 다시 휘 유필선조 후손들이 주관하여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서 외손 송암 이로가 찬술한 사성강목을 편신족보를 간행하였다.

이 족보를 병진년에 만들었다 해서 병진보라고 한다.

이 족보에는 시조 무성공 휘 다성 다음 2세에 휘 탁이요, 3세에 바로 휘익선조요, 4세에 휘 공유요, 5세에 휘 극겸선조요, 6세에 장자는 휘 유철선조요, 차자는 휘 유필선조요, 3자는 휘 후식 선조로 연계하였다.

이렇게 신해보와 병진보가 시조 이하 계대가 다르고 충숙공 선조 아드님의 서열이 다르다.

이 서열을 각파가 서로 옳다고 주장해 내려오다가 1982년 임술보에서는 양파가 합의해서 충숙공선조 아드님의 서열(즉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을 모르니까 각 파별로 계대를 잇는 것으로 했다, 즉, 분파각서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수치스러운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은 신해보와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충열공 휘후식선조가 장자로 되어있고 병진보에 따르면 효혜공 휘 유필 선조계가 장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인 것이다.

이리하여 그간 신해보와 병진보를 근거로 많은 족보를 간행하여 오면서도 소위 곤계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오랜 현안이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 백여년전 까지만 하여도 남평 시조 탕생지가 어디인지, 공주 충속공 선조 묘소가 어딘지, 산청 충선공 선조 묘소가 어떻게 관리 봉사 되어 왔는지 우리 선대 조상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해보 서문에 덕현씨를 영남 단성 충선공 선조 묘소에 보내서 선조 묘소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나 선조 묘소를 누가 봉사 관리하고 있는 지는 확인한 바가 없으며 그 후 백여년 간을 선조 묘소에 후손이 참배했다는 기록은 아무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비로소 산청 충선공선조 묘소를 원 본 손이 찾아 모시고 그 후 수십년후에 남평을 답사하여 문암을 찾아 문암이라는 비각을 하여 세우고 시조 탄강의 유래를 기술하여 유허비를 세웠다.

또 그 후에야 공주 충숙공 선조 묘소를 찾아 모시게 되는 등 이렇게 우리 문씨의 종사가 시작이 되고 진행되어 내려왔다. 우리 문씨의 시조가  탄강하여 1000년간은 종사가 전혀 없었으며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에 족보를 하면서 비로소 종사가 시작 되니 뜻있는 일가분 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금 면밀히 상기하면서 종사에 참여하야 주기 바란다.

 

우리 선대 조상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처음으로 산청 충선공 선조 묘소를 찾아 모시고, 제각을 건립하고 그 이전에 찾아 모시지 못하였던 12대 조상 님들을 모든 참고 문헌을 상세히 고증하여 모시고 그후로 160여년 간을 광복 후까지 전국 일가들이 이의 없이 만세일계의 혈통임을 자랑해 내려왔다.

그러나 그 역시 연대가 기타 사적에 다소의 오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모든 성씨가 성도 없었고, 각 성씨의 시조도 비과학적인 천강설, 난생설등 신화, 사성 등으로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상계가 옳다. 그르다 하기 전에 우리나라 단군의 신화를 알아야하고 일본이 국민정신을 통일하기 위한 천조대신의 유래를 알아서 잘 이해하고 남평문씨의 자랑스러운 단일 혈통을 내외에 더욱 빛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어느 식자가 무엇을 근거로 옳다 그르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고집하려고 하는 편협한 아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종사와 족보의 유래를 기술하였으나 좀더 상세한 내력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씨족이 각기 조상의 상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선조들의 역사를 기술할 때도 시조로부터 몇대손이라 하게 되고 조상의 제례를 모실 때도 몃대손 감소고우라고 하게 되고 또한 일가간의 계촌때에도 혼돈이 오고 모든 일가의 단합에도 조상의 혈통이 통일 되므로서 정신적인 단합이 되어야 종사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의 상계에 대하여는 확실한 결론이 없다. 1000여년 사를 1000후에 아무런 증거될 문헌도 없이 밝히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 첫 족보를 만들때는모르니까 상계 12대를 뺀 것이고, 그 후에는 선조들의 유지와 산소를 처음으로 찾아 모시면서 헤어져 살고 있는 거소 불명의 일가들을 찾아 귀합하고, 찾지 못한 12대 조상들을 모든 문헌을 찾아 밝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충숙공에서 충선공까지의 계대이다. 9대냐 7대냐 하는 소위 7, 9대 문제이다. 모르니까 어찌되든 좋다는 식의 이러한 논리는 생각해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선조 묘사나 제사 때에는 몇 대손 감소고우 하게 되고. 일가 까리 계대도 조가 되었다가 손이 되었다 하는 문제다.

 

물론 요즈음 사람들은 그저 저 사람도 문씨이구나 하는 식으로 일가를 대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어 받고 서로의 혈관에 같은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일가이다.

일가라면 계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느 계대가 옳다고, 생각하기 전에 냉철한 입장에서 연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첫 족보에 이렇게 되어 있고,우리 문중에서 이렇게 해 왔으니 우리는 주장한다 하는 사고방식은 잘못이다. 국사도 잘못된 사항은 여러 사학자들이 확증을 발표하여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족보를 한다면 무조건 수단금을 내고 족보가 만들어져서 분질을 하며 이것이 족보로구나 하는 식의 일가들이 있다.

상계는 어떻게 정하였느냐 하면 소위 상고위원을 정하여 결정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고위원중에는 자기의 계보도 잘 모르는 분도 있었기에 무엇을 상고하는 지도 모르는 차이다.

어느 때나 보소를 지배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상계가 결정된 것이다. 모르니까 어떻게 해도 좋다고 맹종하는 일가들이 대다수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고찰하여 보자, 충숙공 휘 극겸 선조가 1122년에 태어 나시고 충선공 휘 익점선조가 1331년에 태어나셨으니 그 차이나는 횟수가 209년이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다. 타 성씨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조혼도 있고 만혼도 있겠지만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7대가 옳고, 9대로 계산하면 61년이 부족하다.

또한 충숙공의 사위이신 이인 선생이 태조 이성계의 6대조다, 이성계는 충선공 익점선조와 같은 시대 분이시다.

이리하여 충숙공의 7대손이 충선공이라는 계대가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순평군 휘 유필 선조 아들이신 휘 정 선조와 휘 득준 선조와의 관계는 종증조와 종증손의 관계이다. 이 두 조상이 고려 충렬왕 조정에서 같이 벼슬을 하였다. 이러한 일은 숙질 관계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증조와 증손이 한 시대의 조정에서 같이 출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휘 득준 선조의 위에 휘 중연, 휘 장영 두 조상이 계신데 이 두 조상으로 인하여 9대가 되었다가 7대가 되었다 한다.

이 두 조상이 안 계시면 휘 정과 휘 득준의 관계가 종질 관계로 되어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였다는 것이 수긍이 된다.

또한 다른 조상들은 족보에 분주가 있으나 이 두 선조는 족보에 언제 출생하고 어제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누구고, 벼슬 등이 전혀 분주가 없으니 더욱 의심이 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조상의 상계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만을 고수하려 하지말고 합리적인 이치에 따라서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조선조 500년 간에 우리 조사의 3현조라 하면 풍암공, 옥동공, 모계공 선조를 말하는데 300여년전의 옥동공 선조 실기의 년보에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어 기술되어 있음은 물론 곤계문제도 충열공 휘후식 선조가 장자로 되어있다.

이 서책에 있는 실기는 인흥 인수문고에 보관되어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10여년전 공주 충숙공 묘사에 참석한 바, 당시 헌관이 충숙공 21세손 감소고우라고 했다. 충숙공이 1122년에 출생하였으니 875년이 된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29세가 타당하다.

전국 종사에 고명한 분들이 모여서 이분을 조헌관을 추대를 하였다. 그러하여 축문을 쓰도록 하여 축문을 읽고 묘제를 지냈다.

여기에서 의심을 느낀 일가는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가는 순평군파 일가였다 한다.

지금 충선공 32세가 태어났다. 여기에 9세를 보태면 41세가 된다. 1세를 30년으로 계산하면 1230년이 된다. 충숙공을 기준으로 한 계대는 29세에서 30세이다. 41세라면 355년의 차이가 생긴다. 다소의 차이가 날수 있으나 너무 계대가 높거나 낮은 일가들이 있다. 지금까지 현관에서 계대까지를 기술한 것은 우리일가들의 계대가 각양 각색이기에 여러 일가들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상계 12대 조상을 모신다 안 모신다 또는, 충숙공에서 충선공 까지를 9대냐 7대냐 하기 전에 우리 남평문씨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 왔는가를 다시 한번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조 탄강후 1000여년을 혈통을 이은 가승 하나 전하여 오지 못하다가 1731년 신해년에 처음으로 체제를 갖추어 문씨 족보를 장흥 월천서원에서 만들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는 일가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조상을 상고할 문헌도 없이 만든 것이다. 상계도 모르니까 원대 손이라 하였고, 휘 공유 휘 극겸 선조는 훌륭한 분으로 고려사에 명기되어 있고, 충선공 휘 익점 선조도 명기되어 있으나 그 사이의 조상 중에는 연대가 미상인 분이 계신다. 당신 족보에 참여한 일가도 근처 일가들이고 책도 단지 3권에 불과 했다.

그 후 5년 후인 1736년에 순평군파 일가들이 합천해인사에 병진보를 강행한 족보들을 근거로 정해보, 임자보, 갑진보, 임술보 등 이곳저곳에서 파보 비슷한 족보를 간행하였으나 1780년경까지는 시조를 위시한 조상들의 산소와 사적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고, 족보만 간행하였으나 1805년 비로소 보성계항씨가 산청 충선공 선조 산소를 본손이 없다고 250여년간을 합천 이씨들이 외손이라 하여 봉사하여온 충선공 선조를 다시 본손이봉사하기 시작하면서 거소불명인 일가들을 찾아 규합하여 지금 까지 누락되어 오던 상계 12대 조상들을 모든 문헌을 상고하여 찾아 모시고, 충숙공에서 충선공까지 계대가 잘못된 9대 조상을 7대 조상으로 바로 모시었다.

이리하여 그 후로는 전국 일가들이 모든 족보를 12대 조상을 모시어 통일된 족보를 하고, 특히 경신 대동보 1920년에는 충선공파, 순평군파, 남제공파의 전국 일가들이 참여하여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어 통일된 대동보를간행하고 그 후 갑자년에는 맹헌, 규석, 기성, 석표, 익호, 태욱, 일모, 봉호, 승헌 일가들이 참여한 갑자대동보를 간행하고 상계 12대 조상을 어떠한 문헌에 근거하여 모셨다는 설명이 되어 있다.

이리하여 광복전 160년 동안을 전국 일가들과 지금 상계 12대를 반대하는 일가들이 이의 없이 같이 참여하여 가승을 하여왔다.

 

광복 이후 서기 1954년에 당시 사손 승헌씨와 백순씨, 정동씨가 족보 발간을 발의하여 전국 많은 일가들이 참여를 하여 상계 문제를 논의한 바, 화순 재휘씨가 상계 12대를 빼자는 제의를 하게 되어 논란이 생겨 선조 묘정에 가서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는 의견까지 대두되어 결과적으로 결렬되고 화순 일가들만 일부가 탈보하고 기타 전국 일가들은 을미대보를 완성시켰다. 그 후 영빈씨 대종회장이 1957년 진주에서 정유보를 간행하였고, 또 1982년 병선씨와 영암 일가들이 주창하여 남평 장연서원에서 임술보를 간행하다 병선씨가 돌아가시니 병이 씨가 원장이 되어 12대를 뺀족보를 완성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대동계승보 발간을 주장하여 양씨가 간행원장이 되어 7,000여부를 간행하였다.

또한 부산 철환씨가 대동보 속간을 하였다.

이렇게 광복후 수많은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사손승헌씨와 백순씨가 대동보 속간을 하였다.

 

이렇게 광복후 수많은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사손승헌씨와 백순씨가 발간한 을미보와 대구 양씨가 발간한 대동계승보는 상계 12대 선조를 모시고 충숙공 선조의 계대도 7대로 족보를 하였고 영빈씨가 진주에서 발간한 정유보와 병선씨와 병이씨가 발간한 족보는 상계 12대 조상을 빼고 충숙공의 계대를 9대로 하여서 족보를 간행했다.

1987년 부산거별파의 파보도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로 하여 발간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 상계에 의심나는 사항과 족보의 유래를 기술하였으나 나의 40여년간의 연구와 선대일가들로부터 듣고, 보고, 알아본 결론으로는 우리상계는 12대 조상을 안 모시고 9대로 하여도 정확하지 않고,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로 한다 해도 의심이 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느 조상의 상계를 승봉하여야 할 것인가는 현명한 일가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상계를 모르는 것으로 할수밖에 없어 익 선조를 중시조로모시게 된것이다.

이 불행은 시조 이하 대대로 혈통을 이어온 바 없기에 이렇게 상계에 혼동이 생긴 것이다.

지금 전국 우리일가들의 상계조상의 신봉도를 알아보면
30%는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를 옳다고 생각하는 일가들이고, 20%는 상계 12대를 빼고 9대가 옳다고 하는 일가들이며, 50%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일가들이다.

어째서 5대에 속하는 일가들이 많으냐 하면 대다수 일가들이 조상의 상계에 대하여 무관심이고 또한 조상의 연대나 유래에 대하여 아는바 없기에 그렇다고 본다.

우리는 타 성씨들이 단일혈통의 씨족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유래에 대한 많은 성철로 서로가 이해하고 혈족간의 유대와 화목을 더욱 굳게 다져나가야 하다고 생각한다.

종말에 상계 12대 문제를 설명한 것은 엄연한 우리 족보의 역사이기에 설명한 것이다.

12대를 반대한다 해도 내력을 알고 반대 해야하고 찬성을 한다 해도 왜 12대 조상을 모시고 되었는가를 알고 찬성을 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선대조상들은 지금 까지 종사를 해 내려오면서 족보나 비석에 기록하여 내려 왔기에 누가 찬성해라 반대해라 하여도 안되는 일이다.

반대와 찬성은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우리 문씨는 단일 혈통의 자손이기에 상계가 통일되어야 한다. 영특한 우리 후손들의 끊임없는연구에의해 고증을찾아야 하고그때 비로소 상계가 바로 잡아지며 그 이전에는 상계12대가 모르는 의계로 남아야 한다. 

 

     http://www.moon051.com     2004.1.15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