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세거지란 일족이 모여사는 마을로 옛날에는 세거지가 양반의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습니다.
산업화 후에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하여 떠나고 선조의 묘소들이  마을을 지키는 현실이지만
수많은 전쟁과 가난속에서도 씨족을 자랑과 긍지로 여겼던 선인들의 자취가 있을 것입니다

지역명 인흥 장암 문정 웅천 신안면            
소재지 대구달서구인흥마을 전암영암군장암리 서울송파구문정동 부산기장군철마면 경남산청군신안면            
설명                      

 

산청 세거지

구분  
소재지  
설명  

남평문씨는 크게 합문지후(4세 후식)파와 순평부원군파(4세 유필)로 나누고 있습니다
산청은 합문지후파의 세거지이며 산청군지에는 산청출신 문과합격자 명단인 방목에는 문정(의계처리됨)선조의 이름도 있고 익점공과 아드님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이는 남평에서 오래전에 산청으로 이거하여 누대의 세거지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초기 익점公의 조카인 가학公의 난으로 인하여 헌납공파 승손공 계열은 강원도 명주로, 순질공파의 후손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도피하니 하루 아침에 산청의 세거지는 폐허가 되었고 이후 300여년 동안을
산청에는 문씨들이 살지 못하였습니다
150여년전 순질공의 후손들이 진동을 거쳐 산청에 자리잡고 의안공 후손들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정리 세거지

도별  
충남

서산군(128)은 성숙공의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전북

김제군 공덕면(146)은 순평군파의 집성촌이며
옥구군(132)은 시중공의 후손

전남

화순군 보성군(764)은 순질공의 후손

경북

경북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23)

경남

경남 합천군(196)은 판서공파후손

제주

북제주군(135)은 남제공의 후손의 집성촌들이며

북한

함남 함흥시(250) 
황해도 봉산,장연군(133) 
평북 평창군(150) 등에도 집성촌이 있다고 합니다.

 

인흥 세거지와 인흥문고

구분

시도민속자료  3호로 대구시에서 관리
남평문씨 세거지로 전국문중문고중 책이 가장 많은 집안

소재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401-2          ☎ 053-637-5416 

설명

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구마고속 화원나들목에서 5번 국도 이용 대구쪽 1.4km에서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여  하천 따라 2.5km 지점

고려 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적었던 인흥사의 터에 99칸 이하로 제한하던 건축법이 없어진뒤에
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우수한 자재와 기량으로 11개 건물 3,500여평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과 안목을 높였다
남평문씨 의안공 이곡파의 후손인 인산제 문경호
(文敬鎬1812-1874) 씨가 건립한 후  160여년에 걸친 문씨세거지인데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씨종가와 함께 국가에서 관리하는 3개 문중의 하나이다
후손에게 일제치하의 식민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하여 7000여질의 2만권이 넘는 서적을  국내는 물론 중국에 구입단을 파견하여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의 태산준령을 넘어 운반한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을 보관하고 있다.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님 집안이며 주관리자는 종손 문정기님이고 서책관리는 서울신문사 사장을 하신 문태갑님이 하고 계시면서 안내를 하시기도 하는데  언제 방문하여도 좋으나
늦여름 담장마다 능소화가 만개 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신동아2001년 11월기사보기(링크)

서고 소개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광거당
(廣居堂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님의 글씨인데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인수
(仁壽)문고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중곡(中谷)문고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2만권 고서 소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 조용현님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출판)에서 발췌 -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인수문고는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된
①경(교과서 격인 경전) 536책 ②사(역사서)1813 ③자(기예와 술수 소설등 )588  ④집(개인문집)4011으로 총6,948책과
1975년 이후에 구입한 1,500책으로 8,500책에 20,000여권으로 서원중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안동 도산서원이 4,400책이니 책의 량을 가늠할 수 있다.
경술국치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학교에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하여 남평문씨의 자녀 교육을 위한 독자적 프로그램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겸 도서관이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만권당은 돈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과 재력의 뒷받침을 남평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萊파) 문세근(世根)씨가 500여년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에 이주한후 화원에 들어온 것은 문세근의 9대손인 문경호(敬鎬)로 1840년경이었다.
인흥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역대연대표를 작성하고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의 절터였는데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이 대웅전 자리이고,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인 고려정은 인흥사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밭가운데의 석탑도 인흥사 유물이라고 전한다.
절터 중에서는 명당이 많으나 그렇지 못한 곳도 있는데 바위로 된 곳은 기도처로는 좋지만 주택으로는 좋지 못한데 이곳은 바위산이나 보이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다.
이집의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데 왕가가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여년에 걸친 조상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는 집안의 가통이 확실하게 정립되었음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경호는 천석의 재력을 갖추었고 처음부터 계획한 마을로 우물정(井)자 형태로 400~500여평의 대지를 가진 9개의 가옥과 공공건물인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까지 도합 12채의 건물이 1만여평의 대지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1만여평은  동네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유공간에 건물이 들어서면 품격이 떨어짐을 우려하여 앞으로도 더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고 현재 처럼 9채만 유지하기로 문중에서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 살고 차남은 다른 곳에서 사는데 다른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보다 주택을 받은 장남이 적게 가지는 등으로 상속되지만 주택만은 장남상속의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데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며 직장을 다닐 때는 객지에서 생활 하더라도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이며 외부인에게 집을 판매하지 않아 문씨들만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휴지나 빈병등의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조선소설사 저자)은 인흥의 모습을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 나면 수년전 연희 전문학교에 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전남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 壽峯 문영박)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방문하니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이 모여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전채 제시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건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고 했디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그 재력은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이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어 1만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도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들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이다 만권당의 기획은 문영박이 하고 아버지가 적극 후원하였으니 부자간의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문경호가 터를 잡고 손자인 문봉성이 대들보를 세우고 증손자인 문영박이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으로 문장지와 수봉선생이란 표현들은 문영박을 지칭하며 수봉정사도 수봉 문영박의 사후(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이 교류한 인물중에는 심제 조긍섭(영남지방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창강 김택영(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있음) 난공 이건방(강화학파 핵심멤버), 이정, 변정상 등이며 강화학파는 개화기때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 학파로 일제 강점기를 수용하지 않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만주로 갔으나 강화학파의 맥을 잇기 위해 이건방을 남겼고 위당 정인보에게 전했기에 수봉의 묘갈명을 정인보가 짓게된 것이며 수봉 사망후 상해 임시정부발행으로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은 1931년의 이 조문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인흥 방문기(2002년 6월 문병달 작성)

08:45 柄俊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丙準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구마고속도로의 화원 나들목으로 나와 5번국도를 이용 대구쪽으로 가던중 본리동과 남평문씨 세거지의 안내판에 따라고 다리를 건너 하천의 옆길을 가니 왼편에는 인흥서원(추적 선생 배향)이 있고 오른편이 문씨 세거지로 참깨밭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인수문고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연락을 받으신 정기님(종손)과 태갑님(전 서울신문사장)께서 마중해 주셨다
입구에 심어둔 목화가 30cm 정도 자라 있기에 가져간 목화묘목은 화분에 심으신다고 하셨고 
종가댁을 가는 길은도로폭은 2m정도인데  양쪽은 2m 가량의 흙과 돌로 담은 쌓아 골목길로 만들었다.
60여m 를 걸어 대문을 지나니  거북모양의 잠금장치가 보이는데 종가에만 거북의 등에 무늬를 세겼다한다
사랑채의 대문과 안채의 대문이 있어 대문이 3개였다. 대지는 400여평에 300여평의 채마밭이 딸렸다
공직에서 물러난후 인흥에서 생활 하시는 정기님의 집안은 의안공 이곡파인데, 원래 성당동에 입향하여 경호선조께서 인흥에 터를 잡으셨고 10여리 떨어진 뒷산에 14대에 걸친 선조님의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손수 커피를 내어오신 김신자(종부)여사 께서는 응접실은 창고를 개조 하였고 안채에서 생활하는데
안채는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곳곳을 짚어 가면서 건축 전문가인양 긍지와 자신있는 표정으로 친철하게 설명하셨다
조용현 교수님(한국의 명가 저자)도 안채에서 하루를 머물었다고 하고, 건축가와 풍수 관련 분야등의 전문가들의 방문이 잦다고 하신다
안채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청의 우측은 부엌이고 좌측은 아담한 방인데 천장의 구조가 특이하였고 아름드리 홍송으로 지어 지금도 다른 나무 한쪽 덧된 것이 없다는 종부님의 설명이 아니어도
견고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음을 느꼈으나 현판과 그림 앞에서는 무식이 탄로날까 하여 질문조차 못했다.
내부는 생활을 위해 개조하였다는데 부엌은 일핏보면 현대식 주방으로 보이지만 싱크대 옆에는
대를 물려온 고색창연한 찬장과도 잘 어울리고 위에 걸린 에어컨 까지 원래 부터 있었던 것인양 자연스러우니 현대와 고대가 이질감이 없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종부께서는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받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부엌의 문을 열어 보이시는데 현대식의 욕실이 나타나니 문경의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에 갔을때 한식의 기와지붕을 한 화장실 건물에 들어가 수세식 화장실을 본 것이 생각났다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무릎이라도 치고 싶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도 3년째 기르며,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꾼다고 하신다
녹색 바탕에 수채화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한데 컹컹대며 서성대는 순하게 생긴 개는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2칸의 행랑채는 행랑살이가 없어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으며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고깔을 쓰고 영글고
옆의 우물이 고려정이라 하시는데 차범총무님은 고려정의 안내판을 붙여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신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채의 대청에서 마을 입구가 보여 손님의 내방을 미리 알 수 있는 구조였다

경호 선조님께서는 초가로 지었으나 1910년 광거당과 3채의 집에  기와를 올리고 차례로 작업하여 30여년전에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1:30 인터넷 족보 입력을 위하여 인흥파보 한권을 기증받아 종가를 나오는데 종손님과 함께 종부님께서 마을 입구까지 전송하면서도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함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에서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베인 종가집 며느리의 품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조용현 교수의 글에서 안동 김성일씨의 집안에서는 종부에게 해가 바뀌면 모든 일가들이 세배를 올리고 종부는 서울에 살면서도 일년의 절반을 안동에 내려와 손님을 접대하면서 종가를 지킨다는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 했는데 남평문씨 인흥세거지의 종부를 뵙고나니 부럽지가 않았다.

인흥에서 서고 관리를 하시는 태갑님의 안내로 들어간 인수문고는  근간에 건축하여 현대의 인문에 관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며 열람은 맞은편 건물에서 한다고 하시고 겨우 지나다니는 좁은 통로외에는 책들로 가득 채웠는데 나도 읽은 왕비열전등이 앞쪽에 꽂혀있고 영어로된 책들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수봉정사 마루에는 추사의 글씨외에 문진경(송나라의 명필)씨가 적었다는 사백루 현판의 글씨는 날아갈 듯 한데 복사한 글씨로 목판에 세긴 것으로 짐작하지만 만약  진품글라면 가격이 없다는 설명도 하셨다.
2시간이 잠간인 듯 흘렀고 다음 일정이 있어 전송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인 군위로 향했다

인흥 사진첩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본리리 401-2 ☎053-637-5416 인흥세거지 찾아 오시는 길

 대구시 달성구 화원읍 본리리 401-2 ☎053-637-5416 인흥세거지 전경(팜플렛에서 발췌)

 가옥배치도(장손들에게만 상속하고 판매하지 않기로 문중에서 결의)

 2만권의 장서를 보관한 서고의 경내

 인흥세거지 원경

 수봉정사에서 기념촬영

 광거당

 

장암세거지

구분

 

소재지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설명

순평군파 문맹화 후손 가계로 최초의 복식부기를 사용

1454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세조의 패륜에 분개한  문맹화(순평군 후손)祖 께서 벼슬을 떨치고 경기도 파주에서 이거 하신 곳으로   전체 3백50여 가구중 3백여가구가 남평문씨요,
시인묵객들에 의해 ‘용강에 붉게 타는 노을’ ‘월출산의 자욱한 안개’   ‘토끼동산 허리의 보름달’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역사스페셜<다큐·KBS1 밤8·00>
전라남도 영암군 장암리에는 300여년 전부터 유지되어온 장암 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두 계의 총회가 열리고 엄격한 회계 감사를 실시하며 회계장부인 ‘용하기’에는 문중재산과 마을 공동재산의 쓰임이 정확하게 기록된다. 300년 전부터 전해진 ‘용하기’를 통해 ‘신용사회 조선’을 들여다본다.

장암에 대한 게시판의 글들의 내용

문규연

2003년 4월 12일 KBS에서 방영한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대동계를 보고 우리 선조들의 단결과 평등정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300년전 조선시대에 정확하고 투명한 회계로 신용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상업회계상 자랑스런 지혜의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방송에서는 남평문씨가 고려시대 상업을 주로 한 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상업은 평민들이 하는 걸로 아는데...

문병달

저도 방송을 잠시 보다 자리를 떠나야 했기에 내용은 모릅니다만 전남 영암군 남평문씨 장암마을은 순평군 달한선조의 후손들의 세거지로 알고 있습니다
사농공상이란 서열은 조선시대의 산물이고 고려시대는 군벌(지방토호)들이 양반이었다고 봅니다.
고려태조 왕건도 무역선단을 운영하던 상인의 집안이었고 제2부인인 나주오씨는 염전을 운영하던 집안이었습니다.
고려의 양반은 문반과 무반으로 벼슬을 한 사람을 일컬으며
조선의 양반은 우선 집성촌이 있어야 하고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 삼대 이내에 벼슬을 하는 집안이 명문으로 대접받았고, 반상의 구분이 뚜렸하여 신분상승을 제한하고 직업 또한 귀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세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상업에 치중하였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문태훈

장암이라면 순평군파일가분들이 살고 계시며 우리의 전통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오고있는 마을로만 알았는데 이번역사스페셜을보고 새로운것을 알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할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한것인데 고려시대 우리의 선조님은 최고로 위세를 떨쳤던 시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자금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나 장사는 양반이 하는것이 아니라 중인이나 평민이 하되 총괄하는 것은 권력이있는양반일것이구요
고려시대 개성에는 시전이 크게 있었다는데 시전은 권력있는 양반이 운영하는 그런 상가아닙니까
심지어 왕까지도 비단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했다는 말도 있으니 송상하면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의 코리아라는 명칭도 고려의 송상들이 세계각국으로 장사를해 고려를 알려 지어진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선조님들이 그렇게 TV이에 나오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그리고 승권씨 순평군파 24대손이라는데 어느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순평군 달한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아니면 유필선조님을 기준으로 하시는지요
저는 광주에 거주힙니다 장암하고는 가까운 거리지요 예전부터 마음은 있었는데 실천을 못했지만 직접 장암을 체험하려합니다

문승권

저는 순평군파 24대손인 문승권이라 하며, 바로 '장암(일명 '마당바우)이 고향입니다.
저는 아침에 www.kbs.co.kr/history를 통해 회원가입 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대부분 아는 분들이 나오시더군요..
경영학 중 회계학을 전공했던터라 유심히 눈여겨 보았는데 몰랐던 부분도 발견되었습니다.

1. 1668년부터 창립되어 유지되어 온 '장암대동계'와 '남평문씨 문계'가 있는데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있었고, 현재도 거의 중장년층에도 상부상조정신에 따라 동년배들끼리 또다른 '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2. 남평문씨가의 대동계는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을 하는 장부인 용하기(用下記)로 쓰임새를 아래로 기록한다는 의미로, 조선사회의 공동재산 관리에 대한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3. 내(內)를 중심으로, 경주최씨의 경우는 이(以)를 중심으로
예를 들면, '1781년 봄 벼장부'라는 보조부로서, 왼쪽에 차변(항목과 두, 승, 홉), 오른쪽에 대변( 항목과 두, 승, 홉)을 대차평균의 원리에 의해 기록, 집계했다는 사실입니다.

4. 장부기록 용어를 보면,
질(秩, 차례질)이라는 계정(account), 과목, 항목과 유사한 의미로서 순서대로 정리, 기록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봉차질(수입), 급(給)차질(지출)로 현재의 손익계산서의 비용과 수익으로 대응하여 분리, 회계처리함과 같으며
또한 이익질(秩), 소비(秩)로 구분도 했으며, 단위는 계량형에 의한 척도로서 두, 승, 홉, 작까지 명확하게 기록했다.

4. 부기(簿記)에 대한 세계최초는 이탈리아의 베니스상인들로부터 출발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 때 개성상인들이 작성한 '四介松都治簿法' 이 복식부기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5. 대동계의 시초는 역사책에도 나옵니다만 영암 월출산 바로 아랫마을인 '구림'이며, '장암'은 장암대동계를 운영하면서 기록면에서 충실했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전계원들 앞에 공개하고 잘못된 오류 즉 '오록'은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결산보고나 주주총회에서 보고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6. 장암의 동네는 경기도 파주 봉일천 지역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낙남(落南)하여, 나주목사로부터 장암으로 터를 받아 정착하여 3개파(영보, 서계, 율산)로 3형제가 터를 이루고, 4km 떨어져 월출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전형적 농촌지역 입니다.

7. 지역적으로는 상업지역은 아니라고 보며, 장보고를 연상할 수 있는 바닷가인 목포와는 20km 이상 떨어져 있어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불편해서, 사농공상으로 분류함은 착오가 아닌가 합니다.
고려시대 때 선조들께서 영의정 등이 특히, 많이 배출되어 고려시대를 피크로 보며, 조선시대에는 영호남 지역으로 흩어져 특별히 상업에만 의존한다고 봄은 무리라고 봅니다. 장암의 동네는 집성촌으로 사와 농의 중간정도로, 수년전에는 '효의 마을'로 군내에서 지정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 향리에 이렇게 오래 된 장부기록을 보존 해 옴은 처음 알았으며, 어느 정도 종가집에서 족보정도만 보관되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리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전계원 참여하에 300여년동안 빠짐없이 기록, 보고함이 의의가 큰 것 같고, 중년계층에서 이어 받을 세대가 없어서 단절이 될까 우려도 됩니다. 이농현상이 심한데다 회계기록이 요즘은 PC프로그램에 의해 기록, 정리되고 한문에 의한 붓글씨 기록을 부담스러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9. 최근 회계부정으로 미국의 엔론(에너지회사)사태, SK 분식회계처리와 같은 경우가 많음은 회사를 곱게 포장(자산이나 이익이 많게)해서 대출이나, 투자자들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 효, 투명성(유리알), 계, 장부기록, 상부상조, 예절, 조상숭배 등이 느껴지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한국계의 장부기록에 관한 연구"를 논제로 하고픈 맘도 있습니다.
남의 것, 큰 나라것만 좋다고 무조건 찾고, 보고, 관심가지는 것보다 우리 것에 대해 되돌아 보는 지혜도 가져여 한다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10. 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성호 박사 (물가사)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명희 박사 (향토윤리)
- 국립문화재연구소

장암마을 사진첩

 

장암마을 회관과 공동주차장

장암정 안내판

장암정

장암에서본

월출산과

억세

장암마을의 문창집님 가옥

 
가옥전경 문창집가옥 안내판

부산의 일가들과 대담

창집님(흰옷입은분)과 동생분

본체

대문과 정원

 

사랑채인

애송정의

주련과

현판

               

애송정현판과 벽화와 부착물

 

문정동(文井洞)

구분

 

소재지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설명

 

 

병자호란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 이 마을에 사는 문씨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의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는 의류상가인 로데오 거리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 문정골, 혜경머리,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는 두댐이마을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광주군 문정리라 불렀다 
분당 신도시와 인접하여 주택지, 농지, 임야 등이 혼재한 도농(都農) 복합지역이다.
송파대로가 동의 중심을 지나 경기도 성남시로 통하고 문정1동사무소 옆에는
수령 500년, 높이 20m, 둘레 4.7m의 서울시 지정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다.<두산세계대백과>

 

 

 

웅천세거지

구분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설명

 

웅천리는 행정구역으로 중리 미동 석길의 자연부락 3곳을 합한 법정동 이름입니다.
1955년 경에는 200여 가구 중 80% 이상이 남평문씨 동래파종중의 북면파 후손들이 모여 살았으나 현재는 50% 정도의 비율인데 주로 부산으로 많은 이주를 하였으며 타성들이 들어오기도 한 것입니다.

문연정이란 정자는 21세 여욱(장악원정)공이 수계가 기장유림 주관으로 열립니다
문연정 인근의 철마 제1경으로 불리는 홍류동 계곡의 홍류폭포는 상단 5m 중단 20m이며 아래는 100m 정도의 와폭인데 햇살이 비치면 무지개가 보이는 곳입니다. 50여년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주민들이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마을에 전기를 공급했습니다
아래의 못은 1945년 98m의 사력둑을 막아 못으로 만들었는데 유료낚시터로 운영되고 있으며
중리부락에는 남평문씨북면파의 제실인 중산제실은  1992년 신축하여 선조들의 제향을 모십니다.
북면파의 종가인 문용호 고택은 2007년도 발행한 철마면지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동 부락에는 1988 내무부, kbs, 서울신문사 공동주관으로 아름다운 가정 개인대상에 문동길님이 선정되었으며 해마다 식목일이면 나무를 잘 가꾸는 조림가의 집안으로 문백섭님이 소개되곤 합니다
 2001년 아름다운 정원으로 방송에 소개 되기도 한 집도 있는 마을이며 마을의 경로당에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드높은데 마을의 길흉사나 객지에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면 꼭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로당 옆에 있는 당산입구에는 1974년 산수회에서 건립한 수리정이란 비석과 문성운, 문덕수가 건립한 정헌대부 동지중추부사 문공 휘 세명 집승유허비가 있다
수리정(愁離亭)은 숙종때 이조참판을 지났던 이선(李選)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는데 21세 상익(증 통정대부, 공조참의)공의 집에 기거하면서 집승정과 유란헌에서 소일하면서 송강 정철의 일부문집을 재정리하고 별세했는데 집승정은 수리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한우 쇠고기 전문점의 단지가 되어 30여곳 이상의 음식점이 한우만을 취급하는 영업을 하고 있으며 가을에는 철마한우 축제가 열립니다.
홈관리자의 출생지 이기도 하지만 저의 생가는 헐리고 없습니다.

 

                 사적연구 기록

4세 후식과 유식의 곤계연구

나의조상

가학의 난과 강성문씨의 수난

 

                                   문가학의 모반과 강성문씨의 수난      부산종친회 부회장 문신만

1. 역사와 시대적인 배경
 2. 문가학은 누구인가?
 3. 문가학의 모반(謀叛)

 4.江城文氏(강성문씨)의 수난(受難)

 5. 은행(銀杏)나무에 얽힌 전설

 6. 맺는말

                                                     1. 역사와 시대적인 배경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서기918년에 고려왕조를 건국하여  제 34대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475년 동안 숱한 외세의 침략과    안으로는 무신들의 집권에 의한 내홍을 겪었고 공민왕 때에는  요승 辛旽(신돈)의 등장으로 정국은 더욱 혼란해지니 이성계와  그의 아들 방원은 공양왕을 억지로 왕위에 올려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고려찬탈의 꿈을 키워나가다가 1392년 왕을 몰아내고 권좌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왕조의 태조인 이성계이다
이에 반대하던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길재는 향리로 숨어들어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성리학의 맥을 이었다

또한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집단 은거하였던 두문동의 선비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성계가 불을 질렀으나 신규, 신혼, 신순, 조의생, 임선미, 어경, 맹효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는 참극도 일어났으며 이씨왕조의 왕권의 창업 뒤에도 왕권계승을 위한 골육상쟁이 계속되었는데
세자로 책봉된 계비강씨 소생인 방석과  세자 방석을 따르던 왕자 방번(蒡蕃)과 정도전의 무리를 이씨왕조 건국의 일등공신인 이방원이 사병(私兵)들을 이용하여 피로써 소탕한 1차 왕자의 난으로 왕권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고 화가 치민 태조는 급기야 둘째아들 정종에게 양위하고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기에 함흠차사란 말이 나오게 된다

평소 방원의 독주에 불만을 표출하던 셋째 방간(蒡幹)은 정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기화로 지충추부사 박포(朴苞)와 모의하여 사병(私兵)을 일으켜 방원의 군대와 맞붙은 것이 2차 왕자의 난이며 방간이 패퇴하고 방원은 1400년 조선 제 3대 태종에 등극한다

태종은 집권초기부터 背佛崇儒(배불숭유;유교를 배척하고 불교를 숭상함) 정책을 펴면서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고 호패법을 만들어 호구수를 명확히 하고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의 칭호를 받고 안으로 왕권확립에 힘써서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나 동북면의 민심은 아버지인 이성계를 따랐고 계속되는 한발로 백성들의 생활고는 말이 아니었다

2. 문가학은 누구인가?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5대조
득준(得俊)은 고려 원종때 등재하여 탐라에 출몰하는 해적을 토평한 록훈으로 봉익대부판도판서에 배명하시고 출신이 강성이기에 강성백(江城伯)에 봉해지므로 본관을 남평에서 강성으로 이어지는 파조(派祖)가 되시는 어른이시며 고조부 극검(克儉)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개성윤(開城尹)을 지내셨고 증조부 윤각(允恪)은 삼사우사문한학사에 오르셨고 조부 숙선(叔宣)은 공민왕때 한림학사(翰林學士)에서 원종훈에 기록 되시고 벼슬이 동경사록(東京司錄)에 이르시고 성품이 총민하여 충성심이 강하고 학문은 청간하니 그 때 사람들의 별칭이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 하였다부친 익하(益夏)는 족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나 고증(考證)되지 않는다
이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가학은 어릴적 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고려 말에 형제가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형 가용은 학유(學諭)에 이르고 동생 가학은 문과 내한(內翰)의 자리에 올랐다

고려가 망한 후에 낙향하여 고향(경남 산청)에서 소일하던 중 큰 뜻을 품고 입산수도하여 태일산법(太一算法)을 터득하고 도술을 연마하여 세상에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의 비술의 신묘함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러한 소문을 들은 진주출신 예문관직제학 정이오(鄭以吾)가 진양에 사는 문가학은 술법에 능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고 천거하니 내관을 시켜 불러서 역마를 타고 함께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네가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하니 나를 위하여 한번 비를 빌라”하였다
이에 문가학이 “재계하고 사흘이면 반드시 비를 얻을 것이라”했지만 사흘이 지났어도 비는 오지 않았다. 임금이 사람을 시켜 문가학에게 명하기를 “다시 치재 하는것이 어떠하냐? 라 했다<
태종실록5권 3년 4월27일>
문가학이 대궐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역마를 타고 급히 오느라고 정성과 공경이 부족하였으니 다시 송림사(松林寺)에서 치재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고 이튿날 문가학이 “오늘 해시(亥時)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명일에는 큰비가 내릴 것입니다”라 하더니 해시에 이르러 과연 비가 내리고 이튿날 또 비가 내렸기에 문가학에게 상으로 쌀과 옷을 주었다
문가학이 일찍이 광주(廣州)에 있을 때에 봄이 가물어 목사는 가학이 능히 비를 내리게 할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하여 문가학이 비를 내리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를 내리게 한 것이 세 번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매우 혹하여 그 술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공(王公) 대신들이 가뭄을 근심하여 청하면 내가 상제(上帝)께 전할 뿐이라고 말하였고 내가 젊어서부터 항상 신중경(神衆經)을 외어 그 도를 얻었는데 무릇 평생에 원하고 바라는 것은 모두 내 술중(術中)에 있다 하였는데 그 모양이 보통 사람과 달라 얼빠진 사람과 같았다<
태종실록4권 2년7월9일조>

문가학을 순검사에 가두었다. 처음에 문가학이 그의 처자를 진주에 데려다 두고 돌아오겠다고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더니 9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가학이 지금까지 오지 않으니 나를 속인것이 심하다 라고 하고 순금사에 명령하여 진주에 이문(移文)해서 가(枷:칼)를 씌워 잡아 올리어 곧 하옥시켰다가 조금 뒤에 석방시켰다<태종실록7권 4년4월15일조>
종묘사직과 악해독 명산대천 및 소격전에 비를 빌고 원옥을 심리하고 빈궁한 사람을 진휼하고 드러난 백골과 시체를 묻어주고 또 문가학을 시켜 기우하였다<
태종실록7권 4년5월21일조>
종묘 사직과 원단과 명산대천에 비를 빌었다 임금이 오랫동안 가믐으로 인하여 대궐에 나아가 정사를 들지 아니하고 날마다 더욱 두려워하여 수성(修省)하였다
문가학이 아뢰기를 신이 청재(淸齋)에 들어가서 비를 빌면 반드시 비가 내릴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허락하니 과연 조금 비가 내렸으나 먼지만 적실 따름이었다<
태종실록9권 5년5월8일조>
이후에도 태종은 그를 곁에 두어 여러번 비를 내리게 했으나 후에 효험이 별로 없자 내쳐서 개성유후사(留後司)로 가게 하였다.


3. 문가학의 모반(謀叛)
개성유후사(留後司)로 옮긴 후에도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가학은 인품이 호우자인하고 담대하여 많은 인재들이 그를 추종하여 따랐을 때 사찰에 은거하며 중노릇을 하고 있던 고려의 유신들과 뜻을 합하여 나라의 기풍과 도덕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천명하고 고려왕조를 찬탈한 이씨정권을 무너뜨릴 꿈을 키워나간다

이들중 적극 가담자인 김천(金蕆), 조방휘(趙方輝), 조한생(曺漢生), 임빙(任聘), 김양(金亮) 등은 보은사 솔밭에 모여 여러 부처와 천신 지신께 고하고 성사하면  문가학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김천은 좌상이 되고 임빙은 우상이 되며 조방휘는 이상이 되고 조한생은 서북면도순문사가 되는 것을 약속하고 임빙으로 하여금 고서 두통을 짓게 하였으며 연철(鉛鐵)을 구입하여 어인(御印) 의정부인(議政府印) 병조포마인(兵曹鋪馬印) 봉사인(奉使印)의 4개의 도장을 세겼으며 조한생을 시켜 먼저 평양으로 들어가 내통하도록 꾀하였다.

문가학 등이 모두 평양에 가고자 하여 가학은 거짓 도체찰사라 칭하고 김천은 도진무라 사칭하여 1406년 12월21일 도순문사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꾀하기로 했으나 임빙은 의심쩍게 여기고 계책을 조곤에게 물었다.  조곤이 거짓 허락하고 자수하므로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대군을 무장시켜 가학의 거점인 보은사를 기습공격 하므로 가학의 군사들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하여 흐트러지고 가학등 주모자들은 일망타진되고 큰 옥사가 이루어진다.<태종실록 12권 6년 12월15일>

이때 태종실록에 나와있는 국문내용을 살펴 보면
요인 문가학과 그 무리를 체포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었다.
<태종실록 12권 6년11월>
참찬의정부사 최유경(崔有慶)에게 명하여 위관을 삼고 겸 판의용순금사사 이숙번(李叔蕃), 윤지(尹祗) 형조판서 김희선(金希善) 사헌 집의 최부(崔府) 등과 더불어 국문하게 하였다.가학은 진주 사람으로 태일산법(太一算法)을 대충 익혀 스스로 말하기를 비가내리고 볕이 날 낌새를 미리 안다고 하여, 나라 사람들이 점점 이를 믿는 자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불러 시험하고자 하여 서운관(書雲觀)의 벼슬에 임명하였는데, 오랜 날이 지났어도 효험이 없어 그를 내쫓았다. 그가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며, 은밀히 생원 김천(金蕆)에게 말하기를, 이제 불법은 쇠잔하고 천문이 여러 번 변하였소. 내가 신중경을 읽어 신이 들면 귀신을 부릴 수도 있고, 천병(天兵)과 신병(神兵)도 부르기 어렵지 아니하오. 만일 인병(人兵)을 얻는다면 큰일을 일으킬 수도 있소 라고 하니 김천이 그럴듯하게 여기고 곧 전 봉상시 주부 임빙. 생원 조방휘 前부정 조한생 ,前소윤 김량 등과 더불어 모두 그에게 붙어 마침내 난을 꾸미었다.

임빙의 외조부 부사직 조곤趙昆이 그 음모를 고하여, 문가학과 그 무리들을 체포해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 문가학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가 있다고 하니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느냐? 라 하니,
황희가 아뢰기를 한 놈의 문가학은 미친놈이라 하겠으나, 그를 따른 자들이야 어찌 다 그렇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임금이 국옥관에게 말해 지금 문가학 때문에 죄가 없는데 갇힌 자도 많을 것이니 빨리 분변함이 옳겠다 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면 문가학을 요인(妖人)으로 취급하여 애써 사건을 축소하려는 단면이 보이는데 이는 왕의 권위를 위해 반역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사건에 연루된 자 중에는 직예문관 이적과 상당군 이저 등이 순금사에 갇히게 되고 조수 등을 봉졸로 삼아 귀양을 보내는 등으로 미루어 조선건국이래 최초의 모반사건임에 틀림없다
1406(태종6년) 12월15일 문가학, 임빙, 김양, 김천, 조방휘, 조한생 등은 활형( 능지처참 또는 거열형)을 한 후에 효수하였고  문가학의 어린 두 아들과 아내도 처형당하였다.  고변한 조곤에게는 승사부판관(承事府判官)의 벼슬을 내리고 임빙의 처자 형제는 용서를 받았으니 조곤이 자수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실록12권6년12월15일>

  이 사건 후 234년이 지난 1640년에 이시분(李時馩)이 적은 운창지(雲窓誌)에 문가학과 관련된 전설이 자세하게 실려있는데 앞에 언급된 태종실록과 다르게 구성되어있다. 내용은 과장된 부분도 있으나 그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이 조선왕조의 거슬림을 받지 않으려는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고려말기에 신안면 소이리에 문가학이란 분이 살고있었다. 그는 어릴때 부터 형인 가용과 함께 재질이 뛰어나 모두 문과에 등과하여 가용은 학유가 되고 가학은 내한 벼슬을 하였다
가학이 어릴때 둔철산 정취암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정월초하루가 가까워지자 절에 있는 스님들이 모두 절을 비우고 다른곳으로 피신을 하고있었다. 그 이유를 물은 즉 설날밤이 되면 요사한 괴물이 나타나서, 나이어린상좌중에서 얼굴이 예쁜 사람을 골라 잡아간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가학은 그런 요사한 괴물 때문에 장부가 비겁하게 도망갈 수야 있는가?
너희들은 비록 피신을 하되 등에 불을 밝혀놓고 술한동이와 안주를 갖추어 내 책상밑에 두고 가거라 내가 시험해 보리라.하였다 밤이깊어지자 과연 한 젊은 여인이 창밖에서 방안을 엿보다가, 서성거리며 몇 차례 들어오려고 하는 지라 가학은 서슴없이 들어오라고 하였다. 보자 하니 곱게 단장한 미인이 긴 옷자락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학은 반기듯이 손을 끌어 앉히고 여기 술과 안주가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니 즐겁지 않을수 있는가 하며 술잔을 주고 받으면서 환담을 나누다가 이럭저럭 한동이의 술을 다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여인은 술이 취하여 골아 떨어졌는데 살펴보니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한 늙은 여우였다. 가학은 곧 새끼줄로 묶었다. 밤이 새기를 기다려 스님들이 모여들면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여우는 울며 호소하기를 나에게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둔갑하는 비술책이 있으니 그대가 만일 나를 살려주신다면 그 책을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들을 들은 가학은 마음으로 기뻐하였으나 혹시 속임을 당할가 보아 다시 긴 줄로 허리를 단단히 묶고 따라갔다. 그리하여 여우는 석벽에 이르더니, 그 위에 뛰어 올라 푸른책 한 권을 입에물고 내려 오는지라 이것을 받아보니 역시 둔갑술을 적은 책이므로 일단 풀어주고 그 내용을 자세히 살피던 중에 여우는 옆에서 지켜보다가 잠깐 사이에 그 책 끝장을 찢어 입에 물고는 석벽을 타고 올라 종적을 감추었다  
그후 가학이 책의 내용대로 시행하였더니 신통한 비방임을 알게 되었고 둔갑술은 할수 있어도 완전히 몸을 감추는 장신술은 완성하지 못하여 옷고름을 감출수없었는데 장신술의 마지막을 적은 끝장을 여우가 찢어 입에 물고 간 것이다.
가학이 그 후 문과에 등과하여 내한 벼슬을 하고 있던 중에 새가 되어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발각이 되므로서 죽임을 당하고, 나라에서는 소이리에 있는 그의 집을 헐어서 불태웠다고 한다

또 야설에 의하면 가학은 서울에서 새로 둔갑하여 은기둥을 물고 이곳에 날아왔다고 하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참고문헌 : 산청바로알기>

4.江城文氏(강성문씨)의 수난(受難)

가학의 직계는 물론이거니와 외가와 처가의 직계도 참형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의 친족들은 연좌되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767년 황해도 귀진사에서 간행한 초정해보(初丁亥譜)에 중용의 차남 승손(承孫)이 가학종숙과 의란모의(義亂謀議)요술탁란(妖術濁亂)으로 경화신사(京華身死) 박죄형육樸罪刑戮) 화연종족(禍延宗族)하여 가학은 참형을 당하고 승손은 문씨 제족과 귀양살이 하다가 도주하여 강원도 명주로 들어갔다고 적고있다
<세덕록 속 상권36쪽>

또한 이족보에는 문씨제족(文氏諸族) 찬복도생(竄伏逃生) 시근족(時近族) 오형제파(五兄第派) 각산원지(各散遠地)로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강성문씨 전부는 도망쳐 엎드려 숨어 살았으며 가까운 오형제파는 산지사방 먼곳으로 흩어지고 사손(嗣孫)인 승로도 의성현령으로 쫓겨나 부조묘의 왕래가 어려워 그곳 만천동(晩川洞)에서 제를 올리는 신세가 된다.

여기서 오형제파(충선공의 아들이신 중용,중성,중실,중진,중계)의 이동경로를 살피면

태조4년(1395년) 유일(遺逸)로 피징되어 정3품 도승지에 오른 문화(文和)와 종1품 좌찬성에 오른 종형 문래(文萊)는 전남 장흥으로 귀양가서 초막을 짓고 책을 읽으며 두문불출하였고<1827년발행한 신정해보 1권하179>

장남 중용(中庸) 계열은 강원도 명주 경기도 양주,여주, 경남삼가, 멀리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떠났으며,
차남 중성(中誠) 계열은 경기도 양주에서 전남 능주로 이거하고 다시  보성 장흥 순천 화순 순창 영암 경남창원 경남창녕
                                  경북경주 등으로 갔다
3남 중실(中實) 계열은
    가. 장남 래(萊)의 큰아들 천봉은 거짓으로 미치광이 생활을 하다가 함경도 함흥에  그의 자손들은 평안도 정주 의주와
                          경북의성 청도 대구 경남김해 등으로
    나. 차남 영(英)의 후손은 해평에서 경북선산 경남합천 경남김해 등으로
    다. 삼남 종(萗)의 후손은 단성에서 생비량을 거처 하동일원으로
    라. 사남 평(苹)의 후손중 장남 어동계열은 경남사천 창녕 남해로,  차남 우원은 부산 동래로
    마. 5남 자(蔗)의 후손은 경남 진주로
4남 중진(中晉)의 계열은 단성에서 전북옥구, 경북김천으로 또 일부는 제주로
5남 중계(中啓) 계열은 단성에서 경남고성을 거쳐 경북고령 김천 충남 대전    서산 태안 전북군산 등으로
이렇게 숨을 자리만 있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이든 가리지 않고 뿔뿔이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어 상것들이 사는 곳이라고 천대받던 갯가를 전전하고 관가의 통제가 닫지 않는 내륙의 오지를 찾아 본관 강성을 남평으로 속이고 헐벗고 굶주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죽기보다 더 모진 고난의 길에 접어든다  삼우당의 목화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려야 함에도 얼어 죽은 자도 많았다.
당당했던 사대부가의 명성은 하룻밤 사이에 죄인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왕조에서 행한 불이익을 찾아보면
◎태종10년에 문익점의 관향에 사당을 짓고 제전을 주어서 제사 지내어 성조(성조)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소서라고 하였으나, 정부에서 의논하여 사당과 재전을 내리는 것을 정지하였고
<태종실록 19권 10년 4월28일>

◎세종1년에 고천수가 역적 문가학과 함께 사귀어 친하더니 가학이 죽으니 사모하기를 마지않고 난언(亂言)을 하여 의금부에서 국문하니 천수가 복죄하여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여 고변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세종실록 4권 1년 7월18일>

◎세종2년(1420년) 인장을 만들었던 해선(海禪)은 가학이 죽은 뒤 도망을 하였다가 자수하니 의금부에 가두고 호조참판 안순과 삼성이 국문하다<세종실록7권 2월25일>

◎세종9년(1427) 임금이 한재(旱災)를 근심하여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등 여러 대신을 불러 일으기를 이제 예조의 한재를 구원하는 조건을 보니, 모두 이미 시행한 일이로되 이른바 원통한 죄수를 구제해 주는 일과 어질고 착한 이를 올려 쓰는 일이로되 두가지 조목은 의논이 없지 않았거니와 연좌(連坐)된 사람이 어찌 원통하고 억울할 수가 없고 또 내가 덕이 적어서 능히 사람의 어질지 아니함을 밝게 알지 못하나 임명할 때에는 대신들과 의논해서 하였으나 어찌 외람된 무자격자들이 요행으로 임용된 자가 있겠는가 하늘이 비를 주지 아니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게 됨은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경등은 이것을 의논하여 계하라 하니 황희 등이 자나깨나 생각하여 보아도 그 허물된 것을 알수가 없나이다. 연좌된 사람을 방면해 준 일은 기축년에 태종께서 이미 시행하였으나 대간들이 청하여 정지하시었고, 경솔하게 시행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심도 지당하옵니다.

그러하오나 한 사람의 사고로써 아무 것도 모르는 처자들까지 모두 연좌하게 하는 것은 어찌 원통하고 억울함이 없겠나이까. 그 경중을 분별하여 놓아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가하오며 또 대소인원으로서 직첩의 회수를 당한 것은 그 공과 사를 분별하여 도로 내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나이다 하니 바로 분부를 내리어 박포, 문가학, 김천 조방휘 이외에 그 나머지 범죄에 연좌된 사람들을 전부 놓아 보내고 전날에 지방에서 천역에 소속시킨 친속들은 또한 그 지방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서 직첩을 도로 내어 준자가 18인이요, 부처(付處;귀양)하였다가 풀린자는 이하와 권약이었다<세종실록 36권 6월11일>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기를 역적 박포와 문가학과 같은 당류외의 불충한 짓을 범한 사람들의 연좌된 자손을 제외하고는 형제와 숙질등은 직첩을 돌려 주어야 될 것이다. 하여 이은 등 13명의 직첩을 돌려주었다<세종실록 69권 17년 8월16일>

세조 2년(1457)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문익점의 관향인 고을에 사우를 세우고 봄, 가을에 본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죄를 용서함)하고 녹용하게 하소서 전조말엽에 문익점은 면화로 최무선은 화포를 발명한 것으로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니 이 모두가 권장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니 옳다 하였다 그러나 부조모의 사우 건립은 윤허하였으나 끝내 그 자손들의 죄는 용서하지 않았다<세조실록 3권 2년 3월28일>

이상과 같이 문씨 제족의 아픔은 끝이 보이지 않다가 문가학의 사건발생 117년후인 중종18년(1523)에 삼우당선조의 증손인 경동(敬仝)과 현손상겸(尙謙)이 문씨제족과 연서하고 당시 대사헌 양연(梁演)과 더불어 고두쟁지(叩頭爭之)하고 충선공의 목면공리를 설명하고 사죄제문(赦罪諸文)하는 소(疏)를 올리게 되어 마침내 윤허되어 사면을 받은 것은 중중18년(1523년)이었다.

중종이 내린 전교는 전 왕조 시대의 좌사의대부였던 문익점의 덕행과 공훈과 공로가 지금도 우리의 이목에 남아있고 그에 대한 포창의 큰 은총으로 이미 그 은전내림이 자주 있었도다. 그의 자손이 좋은 벼슬길에 나가도록 해 주고 계급의 차례를 밟음이 없이 채용하며 비록 갈려나간 서손이어서 미천하다 할지라도 스스로 나서는 자가 있으면 원하는 바에 따라 관직에 붙여 줄 일이니라. 이조와 병조는 이러한 전교의 뜻을 받들어 각별히 단단하게 경계를 해서 시행토록 할 일이니라<삼우당유사 311쪽>

청원한 양연은 세조때 삼우당의 사당건립을 주청한 양성지(梁誠之)의 손자이다
이렇게 사면은 되었으나 이를 모르는 일가들은 인동초(忍冬草)보다 더 혹독한 생활이 계속되었으며 지방관리의 곱지않은 눈초리로 항상 감시 감독하는 실정이었다.  이무렵 단성에서는 삼우당선조의 사손(嗣孫)인 광서(光瑞)가 다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집에서 선조의 부조묘를 봉사하며 서자(庶子)인 언국(彦國)이 있었으나 당시의 법도는 서자는 대를 이을수 없다하여 매부(妹夫)의 둘째인 이승종(李承宗)을 양남(養男)으로 시양케 하다가 중종34(1539)에 쓸쓸한 생을 마감하게 되니 그 후 단성에는 강성문씨의 성을 쓰는 사람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5. 은행(銀杏)나무에 얽힌 전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게 서있다.
삼우당 선조께서 이 나무를 심으면서 후일 이 나무가 무성해지면 내 자손들이 흥(興)할 것이로되 만일 쇠(衰)하거나 죽게 되면 내 자손은 망하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우연의 일치일까? 문가학의 난으로 강성문씨의 자손들이 박해가 절정인 무렵인 1400년대 중반에 난데없는 벼락을 맞는 등 수난을 겪으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1500년대 말경에는 기어이 말라죽었다.
그 후 100여년의 긴 세월이 흘러 영조 재위 시(1725년 경) 죽었던 나무 밑둥에서 새순이 돋아 여러 갈래로 커서 지금의 형태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삼우당선조의 몇 백년을 내다보는 예언의 신통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삼우당유사 35쪽>
무려 600년의 수령을 가진 은행나무로써는 수난을 겪어 왜소하지만 경상남도 지정 보호수로 보존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나(원둥치의 나무속이 썩어 시멘트로 속을 채웠는데 껍질은 살아 가지가 나고 있으며 옆에서 굵은 가지 세 개가 자란다)
 생가는 없어지고 대밭 속에 파묻쳐 있어 민망하기 짝이없다
 ※강성문씨는 남평문씨의 충선공의 후손인 강성군파를 말하며 현재의  충선공파입니다(본관이 남평이 아님)

6. 맺는말
이상의 논지를 정리하면 문가학의 난은 그리 대단한 규모의 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역성혁명으로 세운 이씨왕조를 역성인 문가학이 다시 뒤엎으려 했던 점을 중시하여 재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옥사를 크게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문가학의 사건을 한갓 요술이나 미친 사람의 장난으로 치부하여 그로 인한 파장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은 앞서 열거한 임금의 친국장면이나 운창지의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요술로서 비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가학은 대단한 도학자(道學者)요 초인간적(超人間的)인 경지에 오른 인물로 보인다 서운관(書雲觀)의 벼슬 직에 있으면서 임금의 곁에서 가믐으로 어려울 때마다 비를 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이 사건으로 강성문씨(江城文氏)의 고난은 말로써는 형언할 수 없으며 몇 백년을 이어온 세거지(世居地)는 하루 아침에 텅텅 비는 고을로 변하였고 선대(先代)의 산소는 모조리 실전하게 된다.
사손(嗣孫)인 광서(光瑞)의 죽음으로 세 차례의 사손을 정하여 삼우당선조의 봉제사를 뫼시게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외손(外孫)인 합천이씨에 의하여 261년(1584~1854)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봉사를 맡기게 된데 대하여는 본손으로 할 말을 잃게 할 뿐이다.
끝으로 숨어사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선대(先代)들은 새로이 뿌리내린 세거지를 전국에 고루 분포하게 하였으며 단일 본으로는 전국 9위에 올라있는 대성(大姓)으로 40만의 자손들은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대로 왕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四世 후식공과 유필공의 곤계연구            -부산종친회 부회장 문신만-

상고위원회의 결정으로 족보의 의계 12대는 넣지 않기로 하였는데도  일부 파에서는 의계를 넣어 세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지만 이는 충분히 연구된 것이기에, 저는 충숙공(3世) 극겸선조의 아들 세분의 昆季(곤계-형제의 순서)를  살폈습니다

 

1. 남평문씨 족보 내력

◎최초족보인 신해(1731)보는 3권으로 고려사에 기초하여 강성군파가 중심이 되어 월천사(현강성서원)에서 우암송시열의 발문으로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 순으로 되어있고


◎을유(1735)보 2권은 동래임란공신 집안과 헌납공파와 여주목사공파가 합작하여 진주 오대사에서 발간한바 역시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 로 되어있고


◎병진(1736)보는 순평군 파보로 외손인 海豊君 李耆(이기)가 외가의 세계 분실을 우려하여 수집한 자료는 임란 때 소실되었으나 유지를 받은 외손인 송암 李魯(이로)가 편찬하고 경암공 文東道(동도)가 완성하였으나 1699년 타계하므로 37년 후인 병진년에 아들인 宇徵(우징)께서 발문하여 제작한바 惟哲(유철) 惟弼(유필), 侯軾(후식)로 하으며 이후 강성파 순평파 감천파에서 여러 편의 족보와 가첩을 발간했으나 특색이 없다.


위의 족보에서는 상계 12대는 의계 처리하고 고려사열전, 충숙공전 원문과 충선공 원문은 공통으로 실었으나

4세 侯軾(후식)과 惟弼(유필), 惟哲(유철)의 昆季(곤계)가 바뀌고 있다


◎정해(1827)보는 강성파와 순평파의 합작으로 판도판서파의 참여가 없는 점이 아쉽긴 하나 창보 이후 100여년의 진통 끝에 양파의 견해가 일치된 명실상부한 대동보로 이때 병진보는 가첩을 중심으로 외손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正史(정사)를 따름이 옳다하여 昆季(곤계)는 侯軾(후식)과 惟弼(유필), 惟哲(유철)로 하였다


◎정유(1957)보는 강성집과 순평집의 합보로 장연서원에서 발행한 바

발문에서 世勳(일명갑주)어른은 곤계 문제를 “구보와 고려사가 크게 차이가 있어 구보를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사기 또한 쫓지 않을 수 없으니 자행 층을 비우고 분파하여 신중하게 한다”고 적었는데 이는 곤계문제의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된 것이다.


◎임술(1982)보는 대종회가 주관하여 전국계파가 총망라되어 대종회가 위촉한 각파와 각지역의 대표를 보계상고위원(譜系詳考委員)으로 위촉하여 심혈을 기우려 만든 합의된 대동보이며 여기서도 충숙공 아들란은 비우고 분파하여 각서하였는데 순서는 후식, 유필 순으로 하였다.


◎을해(1955)보는 누락된 종인들을 등재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순서는 임술보와 같이 侯軾(후식), 惟弼(유필), 惟哲(유철)로 하였다


◎1997년 합천의 문병춘(병춘)씨의 주도하에 순평군파대보가 6권으로 발행되었는데

  1世        2世            3世           4世

 익(翼) ― 子公裕(공유) ― 子克謙(극겸) ― 嗣 惟弼(유필)

                                                        ― 子 侯軾(후식)

                                                        ― 子 惟哲(유철)로하였는데 근거로는 고려중엽 정치가요 문장가인 최자(崔滋)가 저술한 補閑集 중에서 忠肅公之嗣(충숙공지사) 惟弼時亦爲相(유필시역위상)의 글귀를 취했다고 하여 보한집을 살펴 보면


2. 보한집의 설명

고려 고종때 최자가 이인로의 파한집(파한집)을 보충한 저서로 권신 최이의 권유로 거리에 떠도는 이야기 및 흥미있는 사실(史實), 부도, 부녀자들의 이야기 등을 수록 고려시대의 사회사정을 알아보는 자료가 된다고 밝히고 있는데

1976년11월25일 남평문씨 대종회에서 발행된 충숙공 삼우당실기의 충숙공 년보편(p67~p68)에 최자의 보한집이 해설되어 있으며 남평문씨충선공파종회 문영훈회장은 이 책을 자비로 증판하여 배포하였고,

1999년 9월10일 대종회에서 발행된 남평문씨세덕록 상권 p109~110에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라옵고

참고로 2003년 발행한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겸 문학과문학 교육연구소 소장 구인환선생의 보한집 번역문은
경문공 최홍윤이 금방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을 제수받아 중서성에 들어갔는데 숙직하는 방이 네 번째 방에 있었다. 영렬공 금의가 또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당을 제수 받고 곧이어 그 방에 들어가 숙직하였다.

중서성 넷째 번 재상의 방은 몇 번이나 평장과 정당을 갈았는가 오늘밤 부귀가 감히 누가 이 사람과 같을까 금장원이 최장원 대신 하였네 라고 하였다

영렬공이 임금의 명령을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직책을 맏은 데다가 3대부와 쌍학사를 겸임하였고 재상이 되어서는 오랫동안 인재발굴의 임무를 맡았는데 시를 짓기를

궁중을 드나들기 24년이나 지났구나 닭이 울고 시간이 넘어도 다녀야 하니 모래언덕을 지나다가 밤이 금함을 범할까 두렵구나 라고 하고 이 때 부터 병을 구실삼아 집에 돌아와 휴양하였다.

최공과 금공이 다 같이 충숙공 문극겸의 문하생으로 장원이었고 그 뒤 임신년 봄에 같이 예조에서 시관으로 있었는데, 나도 그의 문하출신이었다

두분은 동시에 재상이 되었는데 충숙공의 아들인 유필또한 그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영렬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 휴양할 적에 그 문하생들이 축수하려고 큰 잔치를 베풀고 겸하여 최, 문 두 재상을 초대하여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영렬공이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같은 문하의 두 장원이 종백과 같이 동시에 평장사가 되었다가,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이번 문하생들의 축하연에 참석하였으니 이는 실로 오랜 세월동안 들어보지 못한 일이로다 어찌 실컷 취함으로 성대한 경사에 보답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대보를 만들어 발문에
忠肅公之嗣(충숙공지사) 惟弼時亦爲相(유필시역위상)의 글귀는 병진창보 이후의 속수보의 한을 풀어준 쾌거라고 말하였으나 해석은 재상인 아버지(충숙공)의 뒤를 이어 아들 유철 또한 재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족한 것이요.
이을 “嗣”한자의 의미로 동생이 형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사적으로 본 서차와 곤계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의 충숙공 묘소는 공의 충절을 기린 옛 사당으로 충남도 문화재 51호인 고간원이 있고 입구에 세워진 충숙공 신도비는 문학박사 이가원이 찬하였는데

삼남삼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贈 평장사이고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는 태상경이요 차거수는 태부시사이며 이린은 내시부집주관이시다....


◎묘소 앞의 묘정비의 묘갈명은 숭정대부 예조판서 판의금 홍문관제학 양산趙得林(조득림)의 찬인데  아들 셋을 두었으니 첫째는 후식으로 평장사를 증직받았고 둘째는 유필이니 평장사였으며 셋째는 유철이니 추밀원사였다...로 기록하였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의 경남지방문화재 102호인 송호서원의 충숙공 선조의 사적으로

송호사(松湖祠)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세운 충숙공 사적비문은 1986년 병춘씨의 선고이시며 1990년 1월25일 장연서원의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편집인 겸 발행인도 하신 세훈(일명갑주)어른이 찬하신 비문의 내용에도 자녀 부분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셨으니 侯軾(후식)은 합문지후이고 惟弼(유필)은 판삼사사 순평부원군으로 시호는 효혜(孝惠)이며 惟哲(유철)은 추밀원사다 딸 셋은 태상경 임부와 태복시사 차거수와 내시집주 이린에게 가셨는데 이린의 손자는 이조의 목조대왕이시다 라고 적고 있다.


4. 고려사 세가 및 열전편의 기록

문극겸은 1185년 중서시랑 판예부사(종1품)로 임명하고  1189년 평장사 문극겸이 죽었다.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는데

              아들은 후식과 유필이다. 유필은 벼슬이 지문하성사까지 이르렀다.

문후식은 1198년 동북지병마사(3품)로 임명

문유필은 1220년 안서부사(정5품)로 강직 1221년 수사공좌복야로 임명  1222년 문하성사로 1228년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죽으매 3일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여기서 짚어 볼 것은 후식은 합문지후에서 서기 1198년에 정3품으로 승차되었고,

                             유필은 22년 후인 1220년 정5품으로 임명되었으니 서차의 구별이 가능하며

강성, 순평 양파의 문헌에는 후식은 1137년 출생하여 1199년 별세하시었고

       유필의 생년은 없으나 졸년이 1228년이고 수(壽) 78년이니 이를 역산하면 1151년 생이되니

       후식과의 나이 차이는 14살임을 추정할 수 있다.

 

5. 맺는말

우리 족보에는 시조의 탄강과 12대의 의계 등 여러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씨의 역사는 천년임에도 기록은 겨우 300년이라 앞으로 후손들이 연구하고 밝혀 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그러나, 후식과 유필 두 분의 곤계에 대하여 양 파의 주장이 강경하다고 하여 기록을 덮어 곤계를 밝히지 않고
책을 나누어 각파를 기록한 족보를 만들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으며
앞으로도 이 문제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곤계 문제는 후식, 유필의 순서임이 역사서에 뚜렷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역사서에도 오류와 왜곡이 적지 않음은 익히 아는 바이나,  왜곡할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역사 기록을 외면하고

외손이 만든 파보에 근거하여 분서 각파 한 것은 우리 자신과 나아가 타 성씨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되는 일입니다.
파보도 아닌 남평문씨의 족보를 만드는 분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족보 제작에 참여하실 분들은 문중의 대변자에 머물 것이 아니요,

대동보를 만드는 사람답게 대승적인 견지에서 냉철하게 살피시고 기록할 것이나

선행되어야 할 일은 문중의 의견을 모아 각파 분서한 부분만은

역사의 기록에 따라 1137년 생인 후식은 형이요, 1151년생인 유필은 아우로 바로 잡는 결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의 모자람에 대해서는 일족 여러분의 지도와 편달 있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조상 남평 문씨            -계룡고등학교 문용기(http://krt.hs.kr/~myk1/

남평문씨의 종사

종사라 함은 어느 씨족(氏族)이 모여 조상(祖上)을 위한 사업(事業)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업에는 여러가지가 있다즉, 족보(族譜)를 만들고 또는 조상의 문집(文集)을 간행하는 것, 제실 비각을 건립하는 것 등 선조(先祖)의 사적을 보존(保存)하기 위한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사는 옛날부터 유교정신에 의하여 선대로부터 이어 내려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씨족의 모임이 있는데 첫째로 대소 문중이있다. 문중이란 어느조상의 후손들의 모임을 말한다.

그밖에 종회(宗會)가 있고 화수회(花樹會) 대종회(大宗會)가 있다. 이 모두가 종사를 목적(目的)으로 한 모임이다.

여기에는 모든 자손(子孫)이 자진해서 참여하여야 하며 평등(平等)한 권리(權利)와 의무(義務)가 있어야 하고 이 신성한 모임은 어느 단체나 개인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안되며 총회 본연의 목적을 망각해서도 안된다.

 

우리 남평문씨는 시조(始祖)로부터 1000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단일 본 씨족(氏族)으로서 그간 위대한 조상들이 국가 사회 발전에 공헌하여 왔으므로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아 왔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의 피를 이어 받은 우리 자손들은 긍지와 자부를 가지고 선대들이 땀 흘려 가꾸어온 위적수훈(偉蹟垂訓)을 더욱 빛내야 하는 공통된 책임을 가지고 종사에 지진 참여하여야 한다.

 

남평문씨(南平文氏)는 시조(始祖) 무성공(武成公) 휘 다성(諱 多省)께서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풍림리 장자지(長者池) 못 가에 우뚝솟아있는 문암(文巖)위에 탄강하신이래 유구한 수보(修譜)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시조로부터 연계소목(連系昭穆)이 구구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계속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한 문제는 비단 우리 남평문씨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이 나라 모든 씨족이 같은 실정이라 할 것이다.

옛날에는 족보(族譜)법이 없었다. 족보 법이 시작된 것은 중국 주(周)나라와 한(漢)나라 시대의 세본(世本)과 연표(年表)가 시초이고 북송(北宋)시대의 소보(蘇譜)가 지금에 전하여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서는 고려중기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선원록을 효지로 권문세가에서 4세 까지 만을 수록하는 가승(家乘)이 처음 시작되었으나 체계를 세워 족보를 만들게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인 1476년 선조 성종 7년 성화 12년 안동 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1562년 조선조 명종 17년 가정 41년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최근 다시 1422년 조선조 세종 4년 영락 20년의 문화 류씨 세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조정에서 왕족(王族)이나 사대부(士大夫)만이 혈통을 기록하여 내려왔고 일반서민 들에게는 혈통을 기록하는 가승이 없었다.

 

우리 문씨는 서기 1159년(고려 의종 13년)의 경정공(敬靖公) 휘 공유 (諱 公裕)묘지명에 따르면 조(祖) 증(曾) 고(高)는 가첩(家牒)에 올라 있으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중엽에 이미 가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1464년(조선조 세조 9년) 의 천순갑신 세승(天順甲申 世乘)을 비롯하여 가정말의 문씨일승(文氏逸乘). 만력년간(萬歷年間) 의 모계가첩(茅溪家牒), 파산가승(坡山家乘) 이천가보(利川家譜), 현종년간(顯宗年間)의 희석보(熙碩譜)등이 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전하여진 것이 없고 단지 1731년 신해년에 전라도 장흥 풍암 선조를 모시고 있는 월천서원에서 만력년간에 모계 선조 휘 위가 수서 하여 전한 바 모계가첩을 편신하며 간판 3권으로 간행한 신해보가 유일하게 오늘에 전하여 오고 있다. 따라서 종중에서는 이 신해보를 창간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1736년에 해인사간 병진보가 있다.

 

그러나 시조가 탄강한지 1000여년 후에 시조 이하 대대로 혈통을 잇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시대는 첫째로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였으며 같은 자손간의 왕래도 없어 어디에 어떠한 자손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실정이 있어으며 또한 상고할 문헌도 많치 않은 터여서 어찌 올바른 족보가 될 수 있었으리요. 그러나 당신 나름대로 모계가첩등 모든 참고될 수집 고증하여 시조 무성공 휘 다성을 모시고 아들에 휘 탁 선조까지는 알았으나 그 이하는 상고할 수 없으므로 중조 휘 익 선조를 원대 손으로 모시고 아들에 휘 공인, 휘 공유, 휘 공원, 선조를 모시고 아들에 휘 극겸을 모시고 그 아들은 장자에 휘 후식 이요, 차자에 휘 유필이요, 셋째에 휘 유철을 모시고 충숙공 휘 극겸에서 충선공 휘 익점까지 9대 선조를 모시어서 나름대로 족보가 만들어졌다.

이 신해보가 간행된 5년 후인 1736년 병진에 다시 휘 유필선조 후손들이 주관하여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서 외손 송암 이로가 찬술한 사성강목을 편신족보를 간행하였다.

이 족보를 병진년에 만들었다 해서 병진보라고 한다.

이 족보에는 시조 무성공 휘 다성 다음 2세에 휘 탁이요, 3세에 바로 휘익선조요, 4세에 휘 공유요, 5세에 휘 극겸선조요, 6세에 장자는 휘 유철선조요, 차자는 휘 유필선조요, 3자는 휘 후식 선조로 연계하였다.

이렇게 신해보와 병진보가 시조 이하 계대가 다르고 충숙공 선조 아드님의 서열이 다르다.

이 서열을 각파가 서로 옳다고 주장해 내려오다가 1982년 임술보에서는 양파가 합의해서 충숙공선조 아드님의 서열(즉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을 모르니까 각 파별로 계대를 잇는 것으로 했다, 즉, 분파각서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수치스러운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은 신해보와 고려사열전에 따르면 충열공 휘후식선조가 장자로 되어있고 병진보에 따르면 효혜공 휘 유필 선조계가 장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인 것이다.

이리하여 그간 신해보와 병진보를 근거로 많은 족보를 간행하여 오면서도 소위 곤계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오랜 현안이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 백여년전 까지만 하여도 남평 시조 탕생지가 어디인지, 공주 충속공 선조 묘소가 어딘지, 산청 충선공 선조 묘소가 어떻게 관리 봉사 되어 왔는지 우리 선대 조상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해보 서문에 덕현씨를 영남 단성 충선공 선조 묘소에 보내서 선조 묘소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나 선조 묘소를 누가 봉사 관리하고 있는 지는 확인한 바가 없으며 그 후 백여년 간을 선조 묘소에 후손이 참배했다는 기록은 아무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비로소 산청 충선공선조 묘소를 원 본 손이 찾아 모시고 그 후 수십년후에 남평을 답사하여 문암을 찾아 문암이라는 비각을 하여 세우고 시조 탄강의 유래를 기술하여 유허비를 세웠다.

또 그 후에야 공주 충숙공 선조 묘소를 찾아 모시게 되는 등 이렇게 우리 문씨의 종사가 시작이 되고 진행되어 내려왔다. 우리 문씨의 시조가  탄강하여 1000년간은 종사가 전혀 없었으며 지금으로부터 270년 전에 족보를 하면서 비로소 종사가 시작 되니 뜻있는 일가분 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금 면밀히 상기하면서 종사에 참여하야 주기 바란다.

 

우리 선대 조상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에 처음으로 산청 충선공 선조 묘소를 찾아 모시고, 제각을 건립하고 그 이전에 찾아 모시지 못하였던 12대 조상 님들을 모든 참고 문헌을 상세히 고증하여 모시고 그후로 160여년 간을 광복 후까지 전국 일가들이 이의 없이 만세일계의 혈통임을 자랑해 내려왔다.

그러나 그 역시 연대가 기타 사적에 다소의 오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모든 성씨가 성도 없었고, 각 성씨의 시조도 비과학적인 천강설, 난생설등 신화, 사성 등으로 시작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상계가 옳다. 그르다 하기 전에 우리나라 단군의 신화를 알아야하고 일본이 국민정신을 통일하기 위한 천조대신의 유래를 알아서 잘 이해하고 남평문씨의 자랑스러운 단일 혈통을 내외에 더욱 빛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어느 식자가 무엇을 근거로 옳다 그르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고집하려고 하는 편협한 아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종사와 족보의 유래를 기술하였으나 좀더 상세한 내력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씨족이 각기 조상의 상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선조들의 역사를 기술할 때도 시조로부터 몇대손이라 하게 되고 조상의 제례를 모실 때도 몃대손 감소고우라고 하게 되고 또한 일가간의 계촌때에도 혼돈이 오고 모든 일가의 단합에도 조상의 혈통이 통일 되므로서 정신적인 단합이 되어야 종사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의 상계에 대하여는 확실한 결론이 없다. 1000여년 사를 1000후에 아무런 증거될 문헌도 없이 밝히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리 첫 족보를 만들때는모르니까 상계 12대를 뺀 것이고, 그 후에는 선조들의 유지와 산소를 처음으로 찾아 모시면서 헤어져 살고 있는 거소 불명의 일가들을 찾아 귀합하고, 찾지 못한 12대 조상들을 모든 문헌을 찾아 밝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충숙공에서 충선공까지의 계대이다. 9대냐 7대냐 하는 소위 7, 9대 문제이다. 모르니까 어찌되든 좋다는 식의 이러한 논리는 생각해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선조 묘사나 제사 때에는 몇 대손 감소고우 하게 되고. 일가 까리 계대도 조가 되었다가 손이 되었다 하는 문제다.

 

물론 요즈음 사람들은 그저 저 사람도 문씨이구나 하는 식으로 일가를 대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세일계의 혈통을 이어 받고 서로의 혈관에 같은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일가이다.

일가라면 계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느 계대가 옳다고, 생각하기 전에 냉철한 입장에서 연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첫 족보에 이렇게 되어 있고,우리 문중에서 이렇게 해 왔으니 우리는 주장한다 하는 사고방식은 잘못이다. 국사도 잘못된 사항은 여러 사학자들이 확증을 발표하여 수정하고 있다.

우리가 족보를 한다면 무조건 수단금을 내고 족보가 만들어져서 분질을 하며 이것이 족보로구나 하는 식의 일가들이 있다.

상계는 어떻게 정하였느냐 하면 소위 상고위원을 정하여 결정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고위원중에는 자기의 계보도 잘 모르는 분도 있었기에 무엇을 상고하는 지도 모르는 차이다.

어느 때나 보소를 지배하는 세력들에 의하여 상계가 결정된 것이다. 모르니까 어떻게 해도 좋다고 맹종하는 일가들이 대다수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고찰하여 보자, 충숙공 휘 극겸 선조가 1122년에 태어 나시고 충선공 휘 익점선조가 1331년에 태어나셨으니 그 차이나는 횟수가 209년이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다. 타 성씨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조혼도 있고 만혼도 있겠지만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7대가 옳고, 9대로 계산하면 61년이 부족하다.

또한 충숙공의 사위이신 이인 선생이 태조 이성계의 6대조다, 이성계는 충선공 익점선조와 같은 시대 분이시다.

이리하여 충숙공의 7대손이 충선공이라는 계대가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순평군 휘 유필 선조 아들이신 휘 정 선조와 휘 득준 선조와의 관계는 종증조와 종증손의 관계이다. 이 두 조상이 고려 충렬왕 조정에서 같이 벼슬을 하였다. 이러한 일은 숙질 관계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증조와 증손이 한 시대의 조정에서 같이 출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휘 득준 선조의 위에 휘 중연, 휘 장영 두 조상이 계신데 이 두 조상으로 인하여 9대가 되었다가 7대가 되었다 한다.

이 두 조상이 안 계시면 휘 정과 휘 득준의 관계가 종질 관계로 되어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였다는 것이 수긍이 된다.

또한 다른 조상들은 족보에 분주가 있으나 이 두 선조는 족보에 언제 출생하고 어제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누구고, 벼슬 등이 전혀 분주가 없으니 더욱 의심이 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조상의 상계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만을 고수하려 하지말고 합리적인 이치에 따라서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조선조 500년 간에 우리 조사의 3현조라 하면 풍암공, 옥동공, 모계공 선조를 말하는데 300여년전의 옥동공 선조 실기의 년보에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어 기술되어 있음은 물론 곤계문제도 충열공 휘후식 선조가 장자로 되어있다.

이 서책에 있는 실기는 인흥 인수문고에 보관되어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란다.

10여년전 공주 충숙공 묘사에 참석한 바, 당시 헌관이 충숙공 21세손 감소고우라고 했다. 충숙공이 1122년에 출생하였으니 875년이 된다. 1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29세가 타당하다.

전국 종사에 고명한 분들이 모여서 이분을 조헌관을 추대를 하였다. 그러하여 축문을 쓰도록 하여 축문을 읽고 묘제를 지냈다.

여기에서 의심을 느낀 일가는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일가는 순평군파 일가였다 한다.

지금 충선공 32세가 태어났다. 여기에 9세를 보태면 41세가 된다. 1세를 30년으로 계산하면 1230년이 된다. 충숙공을 기준으로 한 계대는 29세에서 30세이다. 41세라면 355년의 차이가 생긴다. 다소의 차이가 날수 있으나 너무 계대가 높거나 낮은 일가들이 있다. 지금까지 현관에서 계대까지를 기술한 것은 우리일가들의 계대가 각양 각색이기에 여러 일가들의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상계 12대 조상을 모신다 안 모신다 또는, 충숙공에서 충선공 까지를 9대냐 7대냐 하기 전에 우리 남평문씨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 왔는가를 다시 한번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조 탄강후 1000여년을 혈통을 이은 가승 하나 전하여 오지 못하다가 1731년 신해년에 처음으로 체제를 갖추어 문씨 족보를 장흥 월천서원에서 만들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는 일가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조상을 상고할 문헌도 없이 만든 것이다. 상계도 모르니까 원대 손이라 하였고, 휘 공유 휘 극겸 선조는 훌륭한 분으로 고려사에 명기되어 있고, 충선공 휘 익점 선조도 명기되어 있으나 그 사이의 조상 중에는 연대가 미상인 분이 계신다. 당신 족보에 참여한 일가도 근처 일가들이고 책도 단지 3권에 불과 했다.

그 후 5년 후인 1736년에 순평군파 일가들이 합천해인사에 병진보를 강행한 족보들을 근거로 정해보, 임자보, 갑진보, 임술보 등 이곳저곳에서 파보 비슷한 족보를 간행하였으나 1780년경까지는 시조를 위시한 조상들의 산소와 사적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고, 족보만 간행하였으나 1805년 비로소 보성계항씨가 산청 충선공 선조 산소를 본손이 없다고 250여년간을 합천 이씨들이 외손이라 하여 봉사하여온 충선공 선조를 다시 본손이봉사하기 시작하면서 거소불명인 일가들을 찾아 규합하여 지금 까지 누락되어 오던 상계 12대 조상들을 모든 문헌을 상고하여 찾아 모시고, 충숙공에서 충선공까지 계대가 잘못된 9대 조상을 7대 조상으로 바로 모시었다.

이리하여 그 후로는 전국 일가들이 모든 족보를 12대 조상을 모시어 통일된 족보를 하고, 특히 경신 대동보 1920년에는 충선공파, 순평군파, 남제공파의 전국 일가들이 참여하여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어 통일된 대동보를간행하고 그 후 갑자년에는 맹헌, 규석, 기성, 석표, 익호, 태욱, 일모, 봉호, 승헌 일가들이 참여한 갑자대동보를 간행하고 상계 12대 조상을 어떠한 문헌에 근거하여 모셨다는 설명이 되어 있다.

이리하여 광복전 160년 동안을 전국 일가들과 지금 상계 12대를 반대하는 일가들이 이의 없이 같이 참여하여 가승을 하여왔다.

 

광복 이후 서기 1954년에 당시 사손 승헌씨와 백순씨, 정동씨가 족보 발간을 발의하여 전국 많은 일가들이 참여를 하여 상계 문제를 논의한 바, 화순 재휘씨가 상계 12대를 빼자는 제의를 하게 되어 논란이 생겨 선조 묘정에 가서 제비를 뽑아 결정하자는 의견까지 대두되어 결과적으로 결렬되고 화순 일가들만 일부가 탈보하고 기타 전국 일가들은 을미대보를 완성시켰다. 그 후 영빈씨 대종회장이 1957년 진주에서 정유보를 간행하였고, 또 1982년 병선씨와 영암 일가들이 주창하여 남평 장연서원에서 임술보를 간행하다 병선씨가 돌아가시니 병이 씨가 원장이 되어 12대를 뺀족보를 완성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대동계승보 발간을 주장하여 양씨가 간행원장이 되어 7,000여부를 간행하였다.

또한 부산 철환씨가 대동보 속간을 하였다.

이렇게 광복후 수많은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사손승헌씨와 백순씨가 대동보 속간을 하였다.

 

이렇게 광복후 수많은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사손승헌씨와 백순씨가 발간한 을미보와 대구 양씨가 발간한 대동계승보는 상계 12대 선조를 모시고 충숙공 선조의 계대도 7대로 족보를 하였고 영빈씨가 진주에서 발간한 정유보와 병선씨와 병이씨가 발간한 족보는 상계 12대 조상을 빼고 충숙공의 계대를 9대로 하여서 족보를 간행했다.

1987년 부산거별파의 파보도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로 하여 발간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 상계에 의심나는 사항과 족보의 유래를 기술하였으나 나의 40여년간의 연구와 선대일가들로부터 듣고, 보고, 알아본 결론으로는 우리상계는 12대 조상을 안 모시고 9대로 하여도 정확하지 않고,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로 한다 해도 의심이 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느 조상의 상계를 승봉하여야 할 것인가는 현명한 일가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지금은 상계를 모르는 것으로 할수밖에 없어 익 선조를 중시조로모시게 된것이다.

이 불행은 시조 이하 대대로 혈통을 이어온 바 없기에 이렇게 상계에 혼동이 생긴 것이다.

지금 전국 우리일가들의 상계조상의 신봉도를 알아보면
30%는 상계 12대 조상을 모시고 7대를 옳다고 생각하는 일가들이고, 20%는 상계 12대를 빼고 9대가 옳다고 하는 일가들이며, 50%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일가들이다.

어째서 5대에 속하는 일가들이 많으냐 하면 대다수 일가들이 조상의 상계에 대하여 무관심이고 또한 조상의 연대나 유래에 대하여 아는바 없기에 그렇다고 본다.

우리는 타 성씨들이 단일혈통의 씨족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우리는 이 유래에 대한 많은 성철로 서로가 이해하고 혈족간의 유대와 화목을 더욱 굳게 다져나가야 하다고 생각한다.

종말에 상계 12대 문제를 설명한 것은 엄연한 우리 족보의 역사이기에 설명한 것이다.

12대를 반대한다 해도 내력을 알고 반대 해야하고 찬성을 한다 해도 왜 12대 조상을 모시고 되었는가를 알고 찬성을 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 선대조상들은 지금 까지 종사를 해 내려오면서 족보나 비석에 기록하여 내려 왔기에 누가 찬성해라 반대해라 하여도 안되는 일이다.

반대와 찬성은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우리 문씨는 단일 혈통의 자손이기에 상계가 통일되어야 한다. 영특한 우리 후손들의 끊임없는연구에의해 고증을찾아야 하고그때 비로소 상계가 바로 잡아지며 그 이전에는 상계12대가 모르는 의계로 남아야 한다. 

 

     http://www.moon051.com     2004.1.15 작성

 

자료를 구하지 못한 미정리 정려

 

효열각

삼척김씨

강원도 동해 (문제홍의 처)

효열각

제주고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한규의 처)

표열각

수원백씨

경남 합천군 본량면 항곡리 (문택수의 처)

효자각

문찬석

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표열각

파주염씨

충남 서산군 남면 몽산리 (문정호의 처)

효자각

문흥주

전북 옥구군 옥산면

경암별묘

문동도

경남 합천군 용주면

숭의전

문익

경기도 연천

숭의전

문극겸

경기도 연천

고간원

문극겸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경현사

문익점

전남 장성군

구암사

문익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장암리

삼현사

문자수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표충사

문홍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충렬사

문기방

전북 남원

구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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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사

문응규 문기호

평북 의주

광동영당

문익점 문래 문영

광주직할시 서석동

쌍효문

진주강씨

전북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 (문정학의 처)

쌍효문

문장갑 문장박

광주직할시 서석동

효열문

장흥오씨

전남 장흥 (문흥로의 처)

정려문

문덕중

전북 옥구군 회현면

남평문씨 부산종친회 moon051.com 한글주소 남평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