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서원

서원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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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문

기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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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사기

대비제기

대비제중수기

사진첩

이건전

이건후

 

 

소재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산 365-8(면사무소 윗쪽)

문화재

전남문화재 제70호(지정일 1984년 2월 29일)    조선때 사액서원

향사일

  9월9일(음) 12:00  유림주관

배향선조

◎12세 충선공諱 익점  ◎ 21세 풍암공諱 위세

연락처

   문수정 061-863-6255  011-253-6669

구조

신실(숭덕사) 강당 내삼문, 외삼문

 

강성서원 유래

1644년(인조22)

임란 때 창의(倡義)한 장흥출신 사림 풍암 文緯世(위세)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고
향사(享祀)하기 위해 월천사(月川祠)를 세움

1702년(숙종28)

태학 장보(章甫)의 상소로 국가에서 공인 사당의 건립절차와 규모 마련하고
이때 심은 암수 한쌍의 은행나무의 수확으로 제수비용이 되었다고 한다

1729년(정조5)

풍암의 신도비(神道碑) 세움

1734년(영조10)

월천사에 문익점을 合享해 主壁으로 하고 풍암을 배향함

1785년(정조9)

전라도 유생 600여명이 사액을 청해 강성서원의 액호 내림

1812년(순조12)

풍암의 신도비를 서원의 사당과 강당 사이로 이전.

1894년(고종31)

후손 貞源· 郁浩 등이 전답 일부(7두락)를 환속시켜 享祀 재개

1905년

장흥군수 이장용(李章鎔)이 향교 유생들의 협조로 가지산(迦智山)의 소나무와 
수인산(修仁山)의 잣나무로  중건한 강당은앞면 5칸 옆면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1929년

신실 崇德祠(숭덕사)중건 앞면3칸 옆면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이며 겹처마로 건립

1975년

중수함

2002년

탐진댐공사로 인한 수몰로 이건작업을 진행하여 신실을 준공하고

2003년

강당을 기공하여 완공을 앞두고있다.

 

강성서원 자료

강성군(12세)선조의 9세손인 풍암선조의 4세손인 필서선조의 10대후손 문윤배(순질공파) 자료제공

                풍암공의 대표적인 유적은 강성서원·신도비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는 1534년 중종 29년 부산면 부춘리에서 태어나 유치면 늑룡리에서 1600년 선조 33년에 67세의 일기로 별세했던, 조선 후기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의 큰 선비였다.
생전에 그가 제수받은 관직은 용담현령과 그가 별세하던 해에 제수받은 파주목사가 전부였으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란 앞에 과감히 창의(倡義), 흰옷을 입은 '백의(白衣)의 의병장'으로 더 위명을 떨친 충신이요, 비록 관직에 나아가기 보다 많은 세월을 은둔생활로 자족했지만 그의 학덕(學德)에 대한 명성만큼은 중앙 유림사회에서도 공히 인정받을 정도로 학문·인품 등에서 출중했던 호남의 대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공훈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백여년만인 1798년 정조 22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는 영예를 입기도 했다.
풍암공의 유적으로는 그가 배향되어 있는 강성서원을 비롯, 신도비(神道碑), 그의 생전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군대 터·백운대 터, 그리고 공의 생가와 제각, 공의 학문수행장소였던 서당골과 공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늑룡리 마을 앞 노거수 등이다.
풍안공의 유적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것은 전남도 지정문화재 71호(문화재 자료. 1984 2월 29일 지정)인 강성서원과 서원 안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흥군 3대 사액서원 중 하나로 역사적 의의·보존가치 높아
강성서원은 유치면 월천마을(행정명 늑룡리 65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하고 고색창연한 서원으로 장흥군에서는 장흥읍 원도리의 연곡서원(淵谷書院. 1772년 사액), 용산면 계산리의 충렬사(忠烈祠. 1798년 사액)와 함께 국가 공인의 3대 서원 중의 하나이다.
서원 전면으로는 탐진강의 상류인 유치천이 유유히 흐르며, 뒷편으로는 높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이며, 좌측(아래)로는 장흥읍으로 이어지는 들을, 전면으로는 화순으로 우측으로는 보림사로 이어지는 곡지평야와 탐진강 지류들을 바라보는 지세여서 입지환경이 양호하다. 수령 4백년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서원 내의 현존 건물로는 강당(18.3평), 사당(7.8평)이 있고, 이외에 외삼문(3.9평)·내삼문(2.5평), 관리사 등이 있으며, 관리사 부분을 제외하고 막돌흙담장으로 둘러진 경내의 대지면적은 약 465평으로 그리 큰 규모의 서원은 아니다.
현재 남평문씨 종중의 성역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 서원은 비록 훼철되었다가(1868년) 다시 1905년, 1929년 두 번에 걸쳐 복원된 서원이지만, 역사성이나 배향된 인물의 성격 등으로 보아 보존가치가 높고,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 또한 자못 크다 할 것이다.
강성서원은 당초 늑룡리 월천에 세워졌던 월천사(月川祠)에서 연원한다. 그러니까, 공이 별세한 지 40여년이 지난 뒤인 1644년(인조 22년)에 그의 후손들이 공이 생전에 학문에 정진하며 여생을 보냈던 유치면 늑룡리 월천(月川) 마을에 월천사(月川詞)를 짓고 공의 신주를 모셔오다, 사후 1백여 년만인 1702년(숙종 28년)에 이르러 공의 생전의 공훈과 학덕, 그 절의를 기리기 위해 태학(성균관)의 상소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사우(祠宇)로서의 건립 절차와 규모를 새롭게 마련하여, 공을 배향(獨享) 하기에 이른다.
1734년(영조 10년)에는, 역시 성균관의 선비들이 풍암공의 9대조인 삼우당 문익점(三憂堂文益漸)의 학덕을 함께 추모하고자 상소하여 문익점과 문위세 조손(祖孫)을 합향(合享:문익점을 주벽으로 하고 풍암을 배향)하게 되었고, 이어 1785년 정조 9년에는 전라도 유생 6백여 명이 문익점의 공덕을 추앙하여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조정에서는 삼우당의 출생지인 강성(江城:오늘날의 경남 산청)의 이름을 빌어 와 '강성서원(江城書院)'이라 는 사액을 지어 내리고, 이와함께 정계충(鄭啓忠)을 예관으로 보내 치제(致祭)케 했다. 이에 따라 강성서원은 국가 공인 서원으로 위상과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장흥도호부에 연곡서원 다음의 두번째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강성서원이 생기게 된다(淵谷書院은 1698년에 사액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란 뜻으로, 1543년(중종 38) 경상도 풍기(豊基) 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50년(명종 5) 명종이 이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림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던 것이다.
사액서원으로 일신한 강성서원은 이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다른 서원들과 함께 훼철(毁撤)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다가, 1894년 후손인 정원(貞源)·욱호(郁浩) 등이 소속 전답의 일부인 7두락(斗落)을 환속시키면서 제단을 설하여 향사(享祀)를 재개하였으며, 1905년 강당의 1차 중건, 1933년 사당인 숭덕사(崇德詞) 등 2차 중건, 1975년의 3차 중건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05년 중건 때는 당시 장흥군수 이장용(李章鎔)의 주선과 향교 유생들의 협조로 강당을 보수하였는데, 가지산의 소나무와 수인산의 동백나무를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당시 중수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목조건물 양식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대문으로 구성된 강성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은 3칸 모두에 쌍여닫이 판장문(板長門)을 달았으며 중앙칸 위로는 홍살을 꽂았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다 방주(方柱)를 세우고 납도리를 결구한 3량 구조이다.
이 외삼문을 양쪽으로 울바로 안으로 1982년 12월 3일자에 군보호수(고유번호 10-16-34)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올해도 잔가지가 늘어지듯 은행이 많이 달렸으며, 우측(북측) 은행나무 밑둥아리에는 토종벌이 집을 일구어놓았고, 줄기줄기가 휘늘어지고, 4백년의 세월을 담아오기라도 한양(수령 약 350∼400년), 몇 아름도 넘는 중심줄기는 상채기 투성이어서 유치의 풍화의 역사를 읽게 하고 있다. 이 두 그루의 나무는 문익점의 13대손인 문천무가 관의 뜻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예문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나무 역시 강성서원과 함께 이사를 가야 하지만, 이전 비용이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둥글게 조성한 정원 뒤로 정면 5칸, 측면 2칸, 팔짝지붕의 강당(講堂)건물이 있다. 건립 이후 수차 개보수한 상태여서 현존상태가 양호한 편인 이 강당의 중안 정면 3칸, 측면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들여놓았으며, 양측 협간(夾間)으로는 강학하는 이들의 유숙을 위해 온돌방으로 평면을 만들었다. 전체 구조는 40㎝ 높이의 원형 초석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를 창방(昌枋)으로 결구한 소로수장집이며, 가구(架構)는 큰 대들보(大樑) 위에 동자주(童子珠)를 세워 송량(宋樑)을 얹힌 5량 형식이다.
외부 중앙 처마 밑에는 '강성서원(江城書院)'이라는 현판이 내걸리고, 내부에는 '강성원찬시(江城院讚詩-李晩熹擇,1785년)' '강성원지단소사적(江城院址壇所事蹟-文株泰擇,1916)' '강성서원강당중건상량문(江城書院講堂重建上樑文-文株泰擇,1906)' '강당중건유사록(講堂重建有司錄-1905)' '사당중건유사록(祠堂重建有司錄-1929)'등 10매의 현판이 걸려 있어, 이들 현판 기록들만으로 강성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을 잇는 내삼문 역시 정문(외삼문)처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 대문이다. 3칸 모두에 판장문을 달았고, 양 협간(夾間)에 설치한 굵직한 문지방이 특색을 띤다. 구조 역시 막돌 초석 위에다 두리기둥을 세우고 모접은 납도리로 결구한 3량구조이다.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당(祠堂)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 형식으로 쌓았으며, 그 상면은 시멘트로 마감하였는데, 이는 중건과정에서 개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전면에는 중앙칸 까지 3곳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초석은 막돌 주초를 사용하였으나 나머지는 방주(方柱)이고 기둥머리는 포구성(包構成) 없이 창방으로만 결구한 형태인다. 가구(架構)는 1 고주(高柱) 5 량가(梁架)로 자연스럽게 흰 비교적 큰 대들보가 특이하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처리하였다.
외부 처마 밑에는 숭덕사(崇德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정면으로는 삼우당, 우측면으로 풍암공의 제단과 위패, 영정이 모셔져 있다.

대문장가 이현일·황경원이 擇한 풍암 문위세 신도비
신도비(神道碑)란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로,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고 문종대에서는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금하고, 공신이나 석학(碩學) 등에 대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 그러므로 아무나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풍암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됨으로써 큰 공훈을 세워 네 아들(원개·영개·형개·홍개)과 함께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책록되는 공신이 된다. 이 선무원종훈에 책록된 공신들에게는, 관직을 한 계급씩 올려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父나 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일종의 관직세습제도)을 주게 하였고, 그 부모에게는 봉작(奉爵)하고, 죽은 자에게는 추증하고, 기왕의 범죄는 탕감하고 노비들은 면천(免賤)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다.
풍암공은 또한 임진왜란 때의 공훈 등이 고려되어 1798년에는 병조참판에 추증된다. 참판(參判)은 조선시대 육조(六曹)에 속해 있던 종2품의 관직이었다. 따라서 풍암공은 공신으로서, 또는 종 2품직 이상의 관료로서 신도비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풍암공의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1729년(정조 5년)이었다. 이 신도비는 늑룡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이현일(李玄逸/1627∼1704) 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묘갈명은 「풍암선생 실기」에 전하고 있거니와, 이 신도비는 남인들의 정치적 파란과 연관되어 매몰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현일의 묘갈명의 내용에는 그가 ?암공의 묘갈명을 1700년(숙종 26년)에 지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현일은 당대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을 정도의 학문적인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이조참의·성균관제주(祭主)·이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 이 시기 산림·유현이 거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면서 당시 조정의 정책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던 남인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다. 그의 생전에 당쟁으로 인해 유배당하기도 했고 그의 사후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1871년,고종 8)가 다시 환수되고,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될 정도로 정치적인 파란을 겪었던 만큼, 그가 택한 풍암공의 신도비 매몰(풍암공도 따지고 보면 남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황선생의 문인으로 남인계열에 속한다 할 수 있었다)도 그의 정치적 파란과 연관이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풍암공의 유적

경절공 35세 문윤배님(충선공파- 순질공파-풍암공 후손) 자료제공

풍암공 본가, 1854년 축조(무성한 대나무, 폐허 된 못(池)들… 옛 영화 증언하며 보존 가치 커)
풍암공의 신도비는 강성서원이 사액을 받은 후 얼마 지난 1812년(순조 12년)에 지금의 위치인 강성서원 강당과 사당 사이에 다시 세워졌다. 이 신도비는 지금까지 현존해 오고 있는데, 이 신도비는 당시 대문장가요 대학자였던 한강유로(江漢遺老)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이 짓고, 유운제(柳運濟)가 글을 썼다. 황경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1727년 (영조 3) 생원이 되고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후,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던 인물이었다. 그 후 병조좌랑·홍문관 응교(應敎)·대사성·대사간·대사헌·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에 이어 각 조의 판서를 역임한 후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중추부판사로 죽었던 대학자였다. 특히 황경원은 삼례(三禮)와 고문(古文)에 밝고 서도에도 능하였으며, 장정옥(張廷玉)의 〈명사(明史)〉를 읽고 홍광제(弘光帝) 이하 3제(帝)가 누락되어 있음을 보고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한 일은 유명한 일화였는데, 조선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을 들어 지은〈명조배신고(明朝陪臣考)〉라는 저서 외에 〈강한집(江漢集)〉을 남긴 대문장가였다.

이때 황강원이 지은 신도비명이 바로 지금 강성서원 신도비에 새겨진 비명이다. 이 신도비는 비신(碑身)의 높이 210㎝, 가로폭 84㎝, 세로폭 22㎝, 총높이 260㎝이며, 글씨의 크기는 2.5㎝이며 총 21행으로 행마다 72자가 새겨져 있는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이 신도비 역시 강성서원과 함께 이전될 것이다.

이 비문에는 공의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공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파주목사 풍암문선생 신도비(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行坡州牧使 楓菴文先生 神道碑"로 시작하는 이 비문은 특히 임진왜란 당시 공의 혁혁한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584년 늑룡리로 이사, 지금의 본가 짓고 주위엔 매화·대나무 가득 심어…
풍암공이 본가를 부산면 부춘리에서 유치면 늑룡리로 옮긴 것은 1584년, 공의 나이 51세 때였다. 〈풍암 문선생 실기〉등에 의하면, 이때 공은 마을(부춘리)의 북쪽에 있는 유치의 가지산 속에 골짜기가 깊숙하고 시내와 바위가 청결한 곳(지금의 늑룡리)에 노년을 보낼 만한 집을 마련한 것으로 돼 있다. 늑룡리에 새집을 마련하면서 공은 집 주위로 매화와 대나무를 가득 심었으며, 공은 방안에서는 항상 왼쪽에는 거문고, 오른쪽에는 서적을 쌓아두고 그 가운데 돌부처럼 조용히 앉아 공자·맹자·주자의 저서들을 읽으며 학문을 연마했다고 한다. 늑룡동 집 주위에 심은 대나무와 매화를 보고, 한 선비가 말하길 "공의 지조와 절의(絶義), 청빈한 학풍과 인품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416년 전이며, 416년 전에 공이 지었다던 그 본가는 지금도 늑룡리 후미진 산기슭(늑룡 1구 73번지)에 현존해오고 있다.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마을 중심부에서 좌측면 산자락으로, 한적한 곳이다. 본가 안채 마당에 서면 전면, 우전면으로 산이 보인, 다소 답답해보인 지세여서, 세상일을 잊고 도학에 전념했던 공의 삶의 자리를 이해할 법도 하다. 집 뒤로, 그리고 산계곡으로 이어지는 주위로는 지금도 대밭이 무성하고, 안채에서 15도쯤의 경사지는 10여터 집 앞에는 20여평 남짓되는 연못이 겨우 못의 흔적만을 남긴 채 무성한 잡초들로 둘러싸여 있고, 못 주위로는 몇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어 당시 공의 삶터의 영화를 짐작케 한다.

공의 본가는 문씨의 사후에 유치 문씨들의 종가집이 되면서, 14대째에 이르러 문삼숙씨가 지켜오고 있다. 지금 현존해 오고 있는 안채와 연못 사이로 아래채도 있었으나, 6·25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탐진댐 건설로 유치일대가 수몰되면서 이 본가도 머지않아 철거될 운명에 놓였지만, 공의 본가가 1600년대에 지어진 가옥이라는 점은, 곧 이 가옥이 건축학적으로 조선 중기무렵의 건축을 실증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채는 전후로 퇴를 두고 정면 6칸으로 전형적인 일자형 팔작집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실구성은 좌측으로부터 정재, 큰방, 마루, 작은방, 갓방 순으로 꾸며지고, 여기에 부속으로 뒷툇간에 정재방과 고방, 골방 등이 적절히 배치돼 있어, 조선 중·후기의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집 가옥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비교적 높게 막돌로 축조되어 있다. 초석은 막돌 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대략 18㎝×18㎝ 각의 방주를 세웠다. 가구는 2고주 5량형식으로 납도리를 걸었으며, 지붕기와는 본래 한식토기와였으나 약 25년 전에 시멘트 기와로 번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몇년 전에 지붕하중을 도리가 지탱하기 어려워 전면의 퇴기둥 상부에 활처럼 굽은 부재를 덧댔는데, 이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문씨 종친회에서는 이 집이 공의 본가로서 가치를 인정 이 집을 그대로 이전 복원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풍암공 제각 영모재 1914년 축조
              -당초엔 精舍로 지어졌음이 밝혀져-
풍암공 제각인 영모제(永慕齋)는 늑룡 1구 마을 위쪽에 약 13여평의 규모의 대지 위에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자리해 있다.
이 제각은 "계축 11월…정초 갑인 2월 상량(癸丑 十一月…定礎 甲寅 二月 上樑)"이라고 쓰여진 상량문이 있어 1914년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창건 당시의 영모제는 순수한 제각이 아닌,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려 지은 정사(精舍)로 지어졌음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러므로 당초 정사였던 것이 1974년(갑인년)에 개보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제각으로 변모한 것이다. 목포대박물관측이 밝힌 자료(〈탐진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244면)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건축의 도면은 넓은 대청마루와 방을 중심으로 실 구성이 되어 있어, 당시 장흥지역의 장사 건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현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전면으로 반칸 퇴를 두어 마루를 놓고 그 안쪽으로 중앙으로 대청을 드리고, 그 양측으로는 방을 드렸다. 가구는 2고주 5량 구조이고, 도리는 모두 8각으로 다듬은 납도리를 썼고, 마룻대공은 양방쪽으로 판대공, 중앙 대청마루 상부에는 동자주를 놓았으며, 전면 기둥(원주) 상부에는 소로가 놓인 첨차를 도리 방향으로 보내어 기둥 상부를 장식하였다. 기단은 낮게 막돌로 축조되었고, 초석도 막돌로 썼으며, 홑처마인지붕에는 전통 한식 골기와를 얹혔다.

풍암공은 늑룡리로 이사를 한 지 3년이 지났을 때인 1587년, 공은 집 뒷산 산정에 조그마한 암자 하나를 지어 백운암(白雲庵)이라 이름을 짓고 아들과 조카들에게 활쏘기와 말타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무공훈련이 그로부터 5년 후인 1592년 임진란 때 공이 그의 아들·조카들과 함께 창의, 혁혁한 전공을 올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백운대터라고 전해지고 있는 곳에 주춧돌과 기왓장이 나딩굴고 있어 암자의 이전복원이 시급한 실정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풍암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늑룡리 마을 앞 노거수도 공의 유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충 수령 4백여년으로 추산되고, 군나무로 지정되어 있는 마을 입구 공터에 위치한 느티나무(군나무 10-16-32), 역시 군나무(10-16-33)로 강서서원에 위치한 팽나무가 바로 공이 심은 것이거나 최소한 공과 깊은 관련이 있는 노거수로 알려지고 있다.

공의 충의·절의정신 사군대·백운대 터에 전해져 와
임금을 사모하는 바위터라는 사군대(思君臺) 터는 강성서원에서는 동북쪽으로, 늑룡리에서는 마을 초입부의 좌측산기슭 냇가의 푸른 비자나무 밑에 위치해 있다.
<風菴先生實記>에 의하면, 공은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며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의 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명한 시 한 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 시가 유명한 '思君臺'라는 시이다.

앞시내 가을 달 비칠 때 한가한 걸음 옮겨( 前川秋月引閑步)
밤에 암대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노라 (夜上巖臺望紫徽)
북녘 궁궐 멀고멀어 소식 끊겼는데 (北闕消息斷)
남산과 한강은 꿈속에서도 그립구나 (終南渭水夢依依)

이 시는 그 후 많은 시인묵객들로 하여금 차운(次韻)하게 했다.
지금은 그 주변부가 잡나무와 잡초 등으로 가려지고 있어 선명한 자태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사군대(장흥유치면)

 

월천사 제사에 파견된 국가관리의 고유문

이조참판 김유경(吏暫恭判 金有慶) 지음  

아, 충선공(忠宣公)이 여,    천성이 순수하셨도다.
본(本)과 말(末)을 행하셨음에,    오직 어질고 의로을 뿐이였네.
우리 나라에 학문을 제창함에,    비로소 바른 길 달리게 되었고,
아름다운 운(運)을 열어,    그 공로 나라를 안정시킴과 같았도다.
나라 명령 받들어 되놈 나라 원(元)으로 가셨다가,    만리 밖에 외국 죄수 되시었다.
절개를 지키고 돌아오심에,    중화(中華)와 오랑캐가 다 우러러보았네 
목화 씨 우리 나라로 옮겨 오셔,    우리의 가죽옷을 바꾸어 입게 했도다.
선비는 높은 명 예를 우러러보고,    백성들은 큰 덕을 찬송하네.
근본이 단단히 확립되었기에,     행하는 것이 다 온전하였어라.
옛날 공(公)이 묘소를 지킴 에,      바다의 도둑들이 졸지에 쳐들어왔다.
공은 슬픈 얼굴로 울어 서러워하고,     제물을 예식(禮式)대로 드리 었었다.
되놈들도 감복을 하고      칼을 거두고 감탄하였네.
위태로움이 다달아 바람에 촛불이 꺼질 듯 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산림에 살으시고,
만년의 절개를 조용히 지킴에,    곧은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셨다.
이름과 실적이 찬란도 하여,     오래 될수록 더욱 빛나는도다.
국조(國朝)는 달라졌건만, 특별한 대우를 하여,
역대의 어진 임금 은혜 베푸시어 포창하셨도다.
명랑(明朗)한 사당 장엄하거늘,   도천(道川)의 남쪽에 서 있네.
사시던 옛터의 비석은 지금껏 결 부서짐 없이 성성도 하고,
두 현인(賢人)이 써 놓은 글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 나는구나.
백세(百世)에 믿음을 끼치시어 의심됨이 없도다.
바라다보이는 남쪽 바위는 문씨 시조(文琉始祖) 나신 곳이라.
나라 사람들 그리워하며 우러러보니, 다른 것과는 구별되어짐이라.
이에 다 공의 후손에,         풍암(楓菴 익점공 후손)이 나 ,공덕 이루었다.
은거하되 옳은 일을 하여,     높은 산의 골짜기에서 지냈었도다.
스승을 따라 도학(道學) 닦고,    대중(大衆)과 약속하여 국난을 위해 나섰다.
가문의 명성이 다시 일어나고,    세상의 덕은 거듭 빛나는도다.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잊게 할손가?    월천사(月川祠) 높고 크며 단단하게 서,
여러 해 공경을 드리어 왔네     천추(千秋)에 같이 그 이름 아름다우니,
유명한 할아버지와 어진 후손이로다.    한 사당에 함께 모심에,
진실로 정다운 글 있어 합당하도다.
좋은 날을 가려, 이에 절차 밟아 제례(祭禮) 올리니,    멀고 가까운 사람들 다 모여들어,
옷깃에 패옥(編玉)을 찬 선비들 많기도 많으이!   
붉은 빛의 음색이 더 빛나고,   사당집은 새로 지은 것 같네.
좌우에 성대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   다들 기리는 정신이야 한 가지로세.
못나고 둔하지 않는 사람들 우러러보거니와    이들은 서로 감싸줌에 의지하는도다.
두 분께 합께 받으시어 나라에서 제사 지내주셔    도움을 드려 길이 제사 지내게 하옵니다.

 

강성사(江城祠)의 제사 축문

올바른 학문(學問)을 처음으로 제창하시고,
큰 절개를 끝내 굳게 가지셨도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히셔,
그 공로는 후직 (看種)의 공로와 같았네.

 

강성사기 (江城祠記)

1787년  월    일 판윤(判尹) 강세황(姜世黑 1712-1791) 지음

장흥부(長興府)의 관청이 있는 곳 북녘에 풍암서원(楓蓄書院)이 있다. 호가 풍암(楓菴)인 문공(文公)은 이름이 위세(緯世)였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고제자(高弟子)가 되었는데, 공의 학문과 하는 일의 수단과 방법의 옳음이 그 당시에 존경받는 바였다. 선조25 1592년에 난리를 만나자, 공은 의병(義兵)을 일으키어 거느리고 호남지방 네 고을의 왜적(侵賊)을 크게 쳐부수었다. 그래서, 특별히 용담현령과 파주목사를 제수받았는데, 왜적들이 물러가자 병이라는 이유로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애를 마치었다.
인조 22 1584에, 전 도내 선비들의 사모하고 우러러봄이 오래였는데다 갈수록 더욱 간절함에 월천(月川)에다 사원(祠院)을 창건했다. 풍암(楓菴)의 9대조인 충선공(忠宣公) 삼우당선생은, 이름이 익점(益漸)이고 고려조의 끝 시기에 태어나셨다 공민왕 때에,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사신을 모시고 원(元)나라에 들어가시었는데, 충성스러운 말이 원나라 황제(皇帝)의 뜻에 거슬리어, 남방(南方) 되놈 땅으로 귀양을 가 3년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돌아오시는 길에 선생은 들녁의 밭에 눈과 같이 횐 꽃이 있는 것을 보시고, 아주 이상하게 여기시되, 그것을 물어 면화(綿花)임을 아시었다. 그 목화송이 몇을 따 가만히 붓대 속에다 넣어 가지고 돌아오셔서 뜰에 심으셨던 것이 드디어는 크게 번성해서 나라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즉 그것은 중국이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것을 금지한 것인데, 우리 나라에 면(綿)이 있게 된 것은, 선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곧게 말씀한 것이 당시에 용납되어지지 않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방장산(方丈山) 밑으로 들어가셨다.  모친상을 당하시어 묘를 지키고 계셨을 때, 왜(侵)놈들의 난동(亂動)을 만나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었으나, 공만은 흘로 큰 소리로 우시며 그 곳을 떠나지 않으시니, 도적들이 감복하여 해치지 않았으므로 조정은 고향에다 비를 세우게 명(命)해서 그 효도를 포창했었다.

우리 이씨조선에 넘어들어 태종대왕께서는 공의 지난 날의 공훈(功勳)을 미루어 생각하사 특별히 의정부참지사를 증(贈)하시고 강성군에 봉(封)하시며, 충선공의 시호를 내리시고 사당을 지어 영원히 제사 지내도록 명하셨다 그 후, 역대 어진 임금님들이 연달아 은전(恩典)의 명을 내리시고 드디어는 단성(丹城)에 사원을 짓게 되었다. 영조대왕 임자년(1732)에는, 선비들이 공에게는 이미 사원이 설립되어 있고, 충효와 큰 절개 그리고 면화를 재배한 기특한 공훈을 비록 집집마다 제사 드리고 호호(戶戶)마다 제사 모신다 하더라도 그 공덕에 보답하기 어렵다 하여, 드디어 풍암서원에 함께 모시기로 하고 을묘년(1785)에는 관원(官員)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시고 강성사(江城祠)의 현판을 하사(下賜)하셨다.

아, 두 선생의 도학(道學)은 순수하고 올바르며 층과 효가 누구보다도 훨씬 뛰어났으니, 마땅히 후세 사람들이 존경하여 높이 받들 바가 되는도다. 그리고 강성군이 목면을 전해 심으신 공을 말할 것 같으면, 그 혜택이 만민(萬民)에게 끼쳐지고 이름이 천년에 드리어져 곧 천지와 더불어 함께 무궁할 것이니, 사원이성(盛)하고 쇠(衰)하고 흥(輿)하고 폐(廢)해지는 것이야 논함에 족하지 못함이 있도다.

 

대비재(大庇齋:강성서원의 재실)기(記)

1638 8월 일 전 사간원(前司諫院) 정언(正言) 윤규범(尹奎範) 지음

크게 감싼다는 뜻의 대비(大鹿)라는 말은, 소릉(少陵)의 시(誇)에서부터 쓰인말이다 
소증의 뜻은 진실로 착해서, 특별히 공연한 말을 하여 글 지음이 없었으나 그가 말한 뜻이 어찌 문 충선공이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목면(木綿)을 심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옷을 입힌 그 공이 무궁무진하게 드리어져 있음을 천지를 뒤덮는 공에 비해 같을손가? 공(公)의 공은 후직의 공보다 못하지 않아 수천 리 360고을에 가득하게 있음이, 그 어찌 천만간(千萬間)의 넓고 큰 집에만 해당될 따름이리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충선총(忠宣公)이 공민왕을 섬겨 절개를 다하시고, 원나라 조정의 명령에 항거하셨다가, 교지땅인 만리 밖으로 귀양을 가시었다. 국가에 혁명이 있었던 마당에는 우리 이씨조선의 어진 태조(太祖)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셨으며, 도적들이 쳐 들어왔어도 계시던 곳에서 떠나지 않으시니 그 되놈들이 차마 범(犯)하지 못하고서 서로 경계하고 감탄하고 갔소이다. 그리고 공(公)은 일찍 가정 (稼亭)을 좇아 배우고 목은(牧隱)과 교제했고, 올바른 학문이 전해 졌다가 쇠(衰)해져 가는 생명의 실마리를 들어 제창하시고 이단(異端)이 함부로 유행되어 지고 있는 폐해를 배척하셨소이다. 그리고 또 일찍이 종국(宗國)이 떨쳐지지 못함과 성인(聖人)의 학문이 잘 전해지지 못함과 자신의 도(道)가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호를 삼우(三憂)라 하셨소이다. 그 충효(忠孝)와 큰 절개는,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져 있음에 이 어찌 우리 나라의 순정(純正)한 유학자(儒學者)이시고 일세(一世)에 뛰어난 어진 인재(人材)가 아니었단 말이오니까? 
그런데도 돌이켜보면,다만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한 가지 일만으로 포장하고 나타내어 사원을 두었는데, 공의 평생의 일에서 근본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이 잘 구분되어짐이 막히어 제대로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데 어쩐 일이오니까?" 라고 하였다. 나는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이다 대비(大庇)의 뜻이 어찌 다만 그런 뜻만이겠소이까? 따습게 옷을 입고도 가르침이 없음은, 성인(聖人)이 적정한 바였소이다 공은 손수 작은 붓대에 면의 씨를 가져다가 백성이 추워 덜덜 떠는 것을 크게 비호(庇護)하셨고, 몸소 큰 절개를 지키시어 민속(民俗)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크게 덮어주셔서 백세토록 전해지는 명성을 수립하셨고,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기강(紀綱)을 떨치게 하심이 진실로 크고도 원대(遠大)했소이다. 내 듣건대, 남쪽 땅에는 군자가 많다 하니, 이 대비재(大庇齋)가 되었음에는, 선비들의 이 재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장차 몇천 몇만이나 될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누가 충선공의 풍도(風度)를 듣지 않고 있을 것이오니까? 거개가 다 군주(君主)에게 충(忠)하고 어버이에게 효(孝)하며, 인륜(人倫)의 명분을 가르침을 즐기고 간사하고 음(淫)한 것을 멀리할 것을 알 것임에, 어찌 가가호호에 딸해 주어서 알기를 기다릴 것이오니까?" 라고 했다

아, 충선공이 후세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감싸준 바는 과연 크기도 했다. 그 대공(大功)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지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미쳐진 것이 어찌 천간 만간의 넓이와 크기에만 해당할 것이리오. 문씨(文氏)는 대대로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 이에 글을 지어 달라고 청(請)하는 이 또한 고래(古來)의 법도(法度)를 지니고 있는 분이니, 충선공이 그 후손을 감싸주심 또한 아주 크도다.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큰 혜택, 이것을 감싸줌이 라고 일러 감싸줌은 오로지 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역시 고집이 아니랴? 그 어느 분도 내 말에 대해서 나무람이 없기에, 드디어 문답(問答)한 말을 가지고 대비재기(大廳齋記)로 삼는다.

 

대비재 중수기 (大鹿齋重修記)

1818년 8월 일 참봉(泰奉) 안재묵(安在默) 지음

장흥부(長興府) 관청이 있는 데서 북으로 30리의 월천(月川) 위에는, 고려의 제학(提學) 벼슬에 계셨던 문 충선공(文忠宣公)을 제사 지내는 곳이 있는데, 정조 을묘년에 임금께서 강성사(江城祠)라는 현판을 하사(下賜)하셨다. 여기에는 선비를 교육하여 기르는 집채가 있어 그 이름을 대비재(大廳齋)라 하는데, 그것은 즉 두(杜 두보) 자미(子美: 두보의 호)니 시에 쓰인 말에서 취해진 것이다. 공의 후손인 달조(達祖)가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청(請)하였다. 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은 상제(喪制)의 기강이 크게 무너진 전후의 때에 상을 당해서 묘 지킴을 3년씩 다하고 울며 슬퍼 함으로 심지어 왜놈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감복케 하여 한 고을안이 온전했으니 정성껏 효도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되놈의 나라인 원(元)이 고려(高麗)의 왕을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의논할 때는, 반대하는 말로 힘것 다투어 두려워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았다가 마침내는 만리(萬里) 밖의 땅으로 귀양을 갔다. 그래서 왕이 폐위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공의 진정한 충성에 있었다. 신씨(辛氏)가 작란을 치자, 기미를 알아채고 미리 물러 나셨는데, 우리 왕조가 천명(天命)을 받고, 여러 번 불렀어도 몸을 일으키지 않고서, 생애를 마치셨으니 높은 절개였다. 선생은 경서(經書)를 강(講)하고 익히셨는데 그 중에서도 역경(易經)과 중용(中庸)에 대해서 깊으셨고, 도가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셔서 호로 내걸어 자신이 면려(勉勵)하셨으니, 선생의 학문은 올바른 학문이었다. 위에 든 것들 중에서 한 가지만 차지하더라도 역시 백세에 사표(師表)가 될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다 겸비한 분인 바에야 다시 말할 것이 있으리오? 그런데도, 후세의 공을 논한 사람들이 다만 목면을 심은 공만을 취해 들어낸 것은 어인 일인가? 어찌 공의 전체의 덕은 숨겨져서 알기 어렵게 되고 일단(一端)의 공은 세상에 나타나 알아보기 쉽게 되었단 말인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법은 백성에게 시행을 하고 제사를 지내되 사원(祠院)을 지어 한다. " 라고 하였으니, 왕가(王家)가 벼슬을 주고 관작(官爵)을 봉(封)하며 후손을 등용하고, 이런 일에 제사를 올리게 한 것은 마땅한 일이다. 사대부들의 논이 부당했다고 말할 양이면, 그것은 공의 덕에 뿌리를 두어 논(論)하지 않고서 다만 공의 공만을 칭송한 점인 것이다.

나의 선조 회헌(唯軒: 안유의 호) 문성공(文成公: 안유의 시호)은 전해졌다가도 쇠퇴해진 옳은 학문을 처음으로 제창하셔서 먼저 주자(朱子)를 존중하고 이단을 배격하시며 학교를 일으키셨다. 
이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주자(朱子)를 학문의 종(宗)으로 삼고 도학을 존중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내 선조께서 그 학문을 전하여 권국재(權菊齋1261~1346) 우 문희(禹文僖 : 유학자 우탁 1263~1343)가 나왔고, 
그 분들이 다시 전해서 이 가정(李稼亭) ·한 유항(韓柳巷: 유학자 1333~1384)이 나오게 되었다. 목은은 학문을 가정에서 배웠고, 포은(園騷) 반남(潘南 : 박상춘의 관향)은 다 같이 교제하며 학문을 성취했는데, 공도 또한 가정(稼亭)과 목은(牧隱)의 부자를 스승삼고 벗삼았다. 때는 회헌(晦軒)이 세상을 떠나서 60년쯤 되었는데, 이교(異敎)가 다시 왕성해서 윤리는 점점 쇠망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은 포은 ·반남 등의 여러 어진 분들과 정자 ·주자의 학설을 강(講)해서 밝히시고, 예의(禮義)의 행위를 익히고 행하셔서, 유도(儒道)를 밝히고 사람들의 기강을 바르게 붙들어, 우리 이씨조선의 아주 밝은 운수의 기반이 되게하셨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남겨주신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어늘 그 공정이 어찌 면을 심은 일과 비등한 것이 될 것이랴? 백성은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나니, 우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먹음을 버리면 예부터 다 죽음이 있었거니와, 백성들이 믿어 줌이 없다면 윗사람은 서 있지 못하느니라.(논어 안연편) 라고 했다. 옷 입는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은 같은 것이로되 예가 없고 의가 없음은 또한 믿음이 없는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고 옛날에 공(公)과 여러 어진분들이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 전역(全域)은 미개(未開)한 사람 노릇을 면(免)하지 못했을 것이니, 비록 면이 있다 할지라도 옷을 지어 입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즉 공을 논함에 다만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공만을 칭송한다는 것은 역시 그 작은 것으로 그 큰 것을 가린 것이 된다. 어느 분이 공을 말하기를, "공(公)의 공이 후직(后稷)의 공에 못지 않도다. " 라고 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이 후직을 칭송함에 일찍이 그 덕을 말한 일이 없었거늘, 이 또한 살피지 못해서일 따름이다.

시 경 (詩經)의 생민편(生民篇 후직을 찬양한 부분)에, "곡식 심을 뜻이 왕성하고, 그에 대한 식별(識別)이 왕성하셨다.라 하였음은, 그 천성(天性)의 성질을 찬미한 것이다. 그리고, 주송(周頌 : 시경의 송시)의 "학문과 교양의 덕이 있던 후직을 생각함이여" 라고 한 것은, 후직의 학문과 교양의 덕을 찬미한 것이다. 이는 어찌 그 공만을 말한 것이리오? 오곡을 심어서 천하 사람들이 비로소 다 같이 배가 부르게 되었고, 명주 삼 모시옷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춥지 않게 지냈던 것이니, 오로지 이 일을 가지고 공을 찬미함은 마땅치 않다. 나는 공을 논하는 이들이 공의 덕에 기본을 두지 않고, 다만 면을 심은 공만을 들어 칭송함을 애석(愛惜)히 여.긴다 이에 그 어른의 충 효 덕 학문이 완전했음을 말해서, 재(齋)의 벽에 걸게 하여 공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크게 감싸주신 바가 이에 있고, 저 면을 심은 공에 있지 않았음을 밝히노라.

 

강성사(江城祠)의  제문과 고유문

정조9년 1785년 현판을 내리시고 제를 모실때 지제교(知製敎) 강(姜)인이 지음

제문

진실했던 충선공(忠宣公)은,   고려(高麗)의 유명한 큰 인물이었네.
올바른 학문을 부르짖어 밝히고,   자신의 본분을 지키어 즐기되,
성질이 굳세고 확실했도다.
파도치고 사나운 바람 불어옴에 굳굳함을 보겠고 
추운 계절의 송백(松栢)의 바탕 알게 되는 격이었도다 
바다의 것들이 쳐들어옴에 울며 효도를 지극히 지키고,
한(漢)의 소무(蘇武) 되놈 땅에서 양치며 충절 지키듯 충성했도다.
외지로 가는 사절(使節) 실은 배 탄 신세 되어선,
붓대 속에 목화의 씨앗 숨겨 가져왔네.
우리의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어,
그 공적은 곡식을 먹게 한 후직(房覆)의 공과 같네.
백세(百世)토록 길이 그 혜택을 입으리니    거룩도 하다 그 공적이여,
아, 역대의 어진 임금이 공로에 보답하고 덕을 가상히 여기시었네.
묘를 지킴에 예를 다하게 하고,
부민후(富民候)의 작호(爵號)를 주시었다.
남쪽 고을 바라보면, 묘(廟) 서 있어 장엄도 하다.
많은 선비와 부르짖되, 거는 현판 내기를 청했도다.
공명한 의론 있음을 볼 수가 있어,   내 생각에 깊이 감격했도다.
빛나는 세 글자는 천억년까지 남으리라.
좋은 제기 (祭器)에 향기로운 제물 담아 제사 지내노니,
공의 영혼이시여 흠 향하소서.
고유문 대제학 황경원(大提學 黃景源) 지음
옛날 전조 고려(高麗) 때에, 사신 모시고 원(元)나라로 들어가셨다.
그 때 원의 순제(順帝)는, 공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이고,
공민왕을 폐하겠다고 선생에게 묻는 것이었네.
선생 정색하시고 죽음으로써 안 된다고 항거하시기를 
"군신은 천지와 같이 분명히 나누어집니다.
신(臣)은 명을 받들 수 없으니 형벌을 내리십시오‥‥     라고 말했네.
그래서 남방의 먼 땅으로 귀양을 가,    거의 죽을 극형을 당하셨네 
3년 고생을 이겨내고, 나라의 고향 강성(江城)으로      귀환하셨다.
좋은 목면꽃 있자, 길가에서 입수하시고,
붓대 속에 감추어서 결국 우리 나라에 심어 퍼뜨렸도다.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시니, 그건 만세에 유익되었네.
벼슬에서 물러나 방장산하(方丈山下)에 살으시며,     도의를 부르짖어 밝히시었다.
어버이 섬김에 효도가 지극하여 묘를 3년 지키시니,
그 모습 본 섬의 되놈 감복을 하였기에,
고을이 다 온전히 보전되었도다.
도천(道川)에 사당 지으니, 세조 임금의 은택(恩澤)이로세.
이 사당에 풍암(楓蓄)1)을 같이 모시고, 강성사(江城祠)의 현판을 내리시었다.
아, 아름다운 일이로다.    이 에 삼가 고하오니 이다.

 

강성사(江城祠)에 현판 내림 청원소(疏)

상소 일의 첫머리의 사람은 김상추(金相權)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덕(德)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것은 제왕(帝王)이 근본 을 살피어 뛰어나게 다스리는 떳떳한 일이옵고, 현인을 사모하고 도를 존중하는 것은 또한 유학을 닦는 선비들이 표준으로 삼음이고 유도(儒道)의 근원인 것이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대 어진 임금님의 학문을 존중하는 교화(敎化)는, 반드시 이에 먼저 마음을 쓰셨나이다. 그러므로 비록 한 가지 좋은 행실이나 한 가지의 절개 지키는 일을 했던 선비라 할지라도, 그 덕을 포창하고 그 공을 장려하시지 않음이 없었사옵니다. 그러하온데,하물며 충효 절의 도덕 훈공이 다 함께 갖추어져 모두 세상에 뚜렷하게 나타난 사람이야 다시 말할 것이 있겠사옵니까?
옛날 유학의 현인인 충선공 문익점은, 충효 절의가 다 갖추어졌고 도덕과 훈공이 같이 세상에 뚜렷하게 나타났던 분이어서 그것은 국사(國史)에 명백히 기재되었고,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남기신 문집(文集) 속에 끼여져 기술되어 있사옵니다. 그리고, 이미 역대 어진 임금님들의 포창하고 장려하시는 은전을 입었고, 심지어는 사원(祠院)을 세워 제사 지내게 하는 일과 관원(官員)을 보내시어 제사 지내게 하신 일도 있었사옵니다 
어질고 밝으신 주상(主上)께서 등극하심에 이르러서는, 조종(祖宗)의 정치를 잘 계승하시기에 마음을 쓰시었는데, 사당을 수리케 하시는 일이 있었으니 왕가(王家)가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은전에 결여됨이 없었으므로, 선비들이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는 일이나 유도상(儒道上)에 유감되는 바가 없나이다.
그러나, 이에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두 자(字)로 된 하사의 현판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사온즉, 이 어찌 왕가(王家)의 은전의 결여가 아니고, 선비들이 한탄스러워하고 애석히 여기는 것이 아니오리이까?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은 고려  종말기의 사람이었나이다. 그 분은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사신을 모시고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원나라에서 공민왕이 사리에 어둡고 성질이 거칠다하여 임금자리에서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문익점은 언쟁(言爭)을 하여 원의 황제의 조서(諸書)를 받들지 않음에, 원의 황제는 노하여, 남방 땅으로 귀양을 보내었사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죽음을 맹세하여 두 마음을 갖지 않고 
한결같이 절개를 지키어, 더욱 그 층의심을 굳게 했사온 바, 그 분의 늠름하기가 이와 같았나이다. 3년이 되자 풀려 돌아옴에 중국의 선비가 시를 주었는데, 그 시 에는 "중국의 서울에 가 비록 벼슬을 한다 하더라도, 단지 고려(高麗)나라 일만 마음에 걸리겠구료.
구천(九天)을 나르는 붕(鵬)새의 날개쪽지가 어찌 부러을 건가? 천리(千里)를 달리는 말 말굽 멈추어지긴 쉽지 않을 것."이라 했으니, 그 분이 타국 사람한테 공경 받음이 이와 같았나이다.
문익점이 남방으로부터 돌아을 때, 남몰래 목면의 씨앗을 따서 그것을 붓대  속에다 감추고 나라로 돌아와서는, 꽃들에 심은 것이 드디어는 크게 번지었사옵니다. 그리하여, 만세(萬世)에 그 힘을 입게 되었는데, 그 백성들에게 이익하게  했음이 이와 같사옵니다. 당시 고려의 운수가 다 되려하자, 그 분은 병이라 하여 물러나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삼우거사라 호(號)하였사온데, 그 뜻은 즉, 왕국이 떨쳐지지 못함을 근심하고,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음을  근심하며, 자신의 도가 확립되어지지 못했음을 근심한다는 것이었나이다.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침에 올바른 도를 부르짖어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천리 (天理)가 다시 밝아졌으며,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떨치게 되었으니, 실로 
우리 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종(宗)이라 할 수가 있사옵니다. 1398년에 왜놈의 도적들이 왕성하여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숨었지만, 문익점은 당시 모친상 중에 있어서 묘를 지키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영전 (靈前)에서 울며 제례(祭禮) 드림을 평소와 다름없이 하자 도적들도 해치지 못하고 나무를 깎아 써 놓기를,
"효자(孝子)를 해치지 말지어다. " 라고 했사온 바 그 왜놈들에게 감복케 했음이 이와 같았나이다.
문익점(文益漸)이 세상을 뜨자, 우리의 정종대왕께서는 그 올바른 행위를 가상 히 여기시어 단성(丹城)에다 예장(禮葬)케 하시고, 전토(團土)와 묘지기를 내리었 사옵니다. 태종대왕께서는 벼슬을 주고 작(爵)을 봉(封)하셨으며, 시호(證號)를  내리시고 살던 마을에다 포창하셨으며 사당을 세우고 전토(田土)를 하사하셨나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다시 부민후(富民候)에 봉(封)하시고 벼슬을 높이시었으며, 이어 재상인 신하에게 명하사 그 묘 앞에 제사 지내게 했사옵너다. 세종대왕께서는 친히 글을 지어 묘 앞에 제사 지내게 하시고, 제전(祭酪)을 불려 주셨나이다 숙종 임금님 때에, 영남(嶺南)의 유학(儒學) 선비들이 상소하여 청원(請願) 드림으로 말미암아 임금님께서는 결정지어 말씀하시옵기를, "선비들의 씩씩한 기운이 떨쳐지지 못했기로 지금토록 현판을 드리지 못해서  내 어진 임금들의 두터운 은전(恩典)에 어김이 되었으니, 애석하고 한탄스럽기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 라 하시고는, 곧 예조에 명해서 상의하고 아뢰어 처사토록 했나이다. 
영 조대왕께서 말씀 내리 시기를, "우리 나라가 300년 전 이래 의관문물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강성군(江城君)이 목면(木綿)을 가져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공이 강성군(江城君)보다 큼이 없다. " 라 하시고는, 제사 모시고 있는 사원(祠院)에서 제사 지내게 명하셨나이다. 역 대 어진 임금님들의 은공 갚는 바의 은전이 이와 같이 지 극했나이다. 그리고, 전 의 이색(李帶) 김종직(金宗直)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奈漏) 김안국(金安國) 김 정국(金正國) 조식(曺植) 이지함(李之恣) 이이(李瑞) 황신(黃愼) 김장생(金長生) 이수광(李雌光) 김응조(金應祖) 등과 같은 어진 분들이 다 글을 지은 것이 있어서, 그 분의 대공(大功)을 크게 넓혀 말했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混)이 지은 효자비각기 (孝子碑閣記)에 이르기를, "공(公)에게는 올바른 행위가 있고, 또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 라 하였고, 또 
"공(公)의 효성(孝誠)은 죽는가 사는가의 마당에 다달아 나타났고, 박탈할 수 없는 절개는 곧 국조(國朝)의 혁명(革命)으로 모든 것이 바꾸어진 때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 라 했사오며, 
또  "공(公)이 만년(晩年)에 병이라 하여 벼슬하지 않은 것은, 생각건대, 또한 일찍  앞을 내다보고 닥쳐오는 운명을 기다렸던 것이니, 즉 공(公)의 큰 절개는 이에  더 나타났건만, 세상에서는 혹 이것을 알지 못할까 한다" 라고 말했사옵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말하기를,
"문익점(文益漸)의 덕행 공로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막대한 것은 다만 목면 (木綿)의 이익을 가져온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유가(儒家)의 학문에도 공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우리의 유도(儒道)를 서로 계승해서, 찬연히 다시 세상에 밝아졌으니,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그 학문을 체득하여 우리 나라에 전해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안(安) 문(文)의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도 추장한 되놈의 행실을 면(免)하지 못했을 것이다. " 라고 했사옵니다.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찬양하여 사모심(思慕心)을 일으킨  바가 또한 이와 같이 지극하옵고, 이것들은 다 전의 여러 어진 분들이 남겨 놓은 문집(文集)에서 찾아 상고할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그 분의 서원(書院)이 장흥(長興)의 월천(月川)에 있사온데, 문익점(文益漸)의  자손들이 작년 봄에 말씀을 올려 현판 내리 시기를 청원하였던 바 일을 담당하는  부처(部處)가 각별히 주상(主上)의 은택 내리 시기를 바랐으나 비록 아직 현판 하사를 받지는 못했을망정 어질고 밝으신 주상(主上)께서는 특별히 도감사(道監司) 에게 명하셔서 서원(書院)을 수리케 하심에, 은공을 갚는 은전은 사람들의 이목 (耳目)에 비치었사옵니다. 그래서 먼 땅에 있는 이 서원이 배(倍)로 빛을 더 내옵고, 한쪽 땅의 선비들과 부녀(婦女)가 어진 덕을 칭송하여 노래 부르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文益漸)의 곧은 충성 두터운 효도 깊은 
학문 큰 공(功)은, 진실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 이를 수 있고 만세(萬世)에 영원히 힘입을 것이옵니다. 이것들 중에서 한 가지만 지니어 차지하더라도 모시 어 제사 올릴 수 있고, 현판으로 빛나게 하여 은총을 내릴 수 있음에 족한 것이거늘 하물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절개는 소무(蘇武)나 이약수(李若水))와 같고, 출천(出天)의 효도는 증자(曾子) 민손(閱損)과도 같았사옵니다. 또 바르고 큰학문은 송(宋)의 성리학(性理學)을 이어받고 근원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표준(標準)이 되는 자질이 있었고, 백성들에게 옷을 입혀 준 큰 공은, 후직(房種)의 공과 맞먹는 바에야 다시 말할 것 있사옵니까?
그 분이 쌓아올린 바가 이와 같이 탁월 하온데, 두 자(字)로 된 현판(懇板)이  아직껏 내려지지 않고 있나이다. 왕가(王家)의 은덕 갚는 은전에 있어서, 비록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이라 하더라도 선비들이 서로 바라는 입장에 있어서는, 스스로를 억울히 여기는 마음이 간절하와 이에 널리 의논한 바로 연명(聯名) 하여 임금님의 앞에 우러러 부르짖사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온 백성들의 어버이신 주상전하께옵서는, 위로 역대 어진 임금님들이 충성을 포창하시고 공(功)을  장려하신 은전(恩典)을 체득하사 문익점(文益漸)이 충효 절의 도덕 훈공을 다 갖추었던 실상을 굽어 생각하셔서, 특별히 두 자(字)의 현판을 하사하소서. 그러면  문익점(文益漸)의 어둡지 않은 영혼이, 세상에서 뛰어나게 융성한 은혜를 입는데 이를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덕(德)을 숭상하고 공(功)을 갚는 일에 있어서 더욱 빠지는 바가 없게 되옵고, 그리고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마당에 또한 황송히  여기어 감동함이 일어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옵니다.

임금께서,  "일을 맡은 부처(部處)에 내려 상의해서 처리하라 하셨다
예조판서 김이소(金履素)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전라도(全羅道) 김상추(金相樞) 등이 올린 글을보니, 충선공  문익점의 서원(書院)을 위하여 서원의 이름을 쓴 현판 내리시 기를 청원한 일이온데, 일을 맡고 있는 부(部)로 하여금 상의해서 아뢰어 처사하 게 하셨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문익점은 고려의 종말기 사람이었나이다. 우리 의 태종대왕께서는 그의 충효(忠孝)와 백성들에게 옷을 입혀 준 공을 가상히 여 기사 강성군에 봉하시고 충선공의 시호를 하사하셨으며, 살던 마을에 포창하시 고 사당을 건립하셨사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벼슬을 높이시고 부민후(富 民候)에 봉(封)하셨고 세조 성종 중종 선조 경종 그리고 영조대왕에 이르기까지 포창의 은전이 있었고, 전의 어진 분들인 김굉필, 정여창 , 김안국. 이황, 조식, 송시열 등이, 모두 다  그의 덕행과 공로와 절의를 칭송하여 기술(記述)함이 있어 그 근거가 명백하옵 니다.
그의 서원(書院)은 장흥(長興) 땅에 있사온데, 이번의 이 두 자(字) 이름을 쓴 서원(書院)의 현판을 내리시라는 청원한 바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만, 일이 중대한 것이이서 신(臣)들이 멋대로 처리할 바가 아니오니, 주상(主上)께서 재가하시옴이  어떠 하옵니까?"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특별히 허락해서 시행토록 하노니, 관원(官員)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라."라고 하셨다. 
11월 1일, 예(禮)가 이루어졌고, 보낸 예관(禮官)은 정계충(鄭繼忠)이었다.  

 

강성서원 이전에 대한 신문기사

강성서원 조사특위 구성방침

전남도의회 조사권 발동 등 강력 대처방침(2004년 06월 26일  김상찬 기자) 

이건 과정에서 신실과 외삼문 등 일부 문화재를 이건이 아닌 신축해 문제가 된 강성서원에 대해 전라남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위원장 김창남)가 강성성원 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라남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전반기 회기 만료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강성서원이 정당한 절차와 이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종손 ㅁ모씨의 민원 건에 대해 충분한 조사가 이루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오는 29일 정기회에서 조사특위을 구성을 위한 안건을 상정하기로 하고 조사특위를 구성하여 보다 구체적인 조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지난 25일 행자위에서 이건에 관한 모든 관련자의 출석과 자료제출을 요구했으나 문화재위원, 공사 관계자 등 대부분의 관련자가 출석하지 않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강성서원 문제는 민원을 제기한 종손과 공사를 추진했던 추진위원회 측의 이견으로 촉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댐건설로 인하여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70호 강성서원을 유치면 조양리로 이건(또는 이축)하면서 이건이 아닌 거의 대부분을 신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은 형편이다.


이에 대해 문화계의 한 인사는 “군민이 공유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을 문중이나 후손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다뤄서는 안 될 일이며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손상되면 장흥군의 손실이다.”고 말하고 “문제가 있다면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진 다음 관련자를 문책한 것은 당연하며 문화재적인 가치 복원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4년 06월 22일  김상찬 기자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장먼저 가지고 들어온 문익점선생과 임진왜란때 동생, 아들 등과 창의하여 공을 세운 풍암공 문위세선생을 모신 강성서원이 이건과정에서 원형을 크게 훼손, 문화재(도지정 문화재자료 70호) 지정이 취소 위기에 있어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남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위원장 김창남)는 21일 장흥군 유치면 소재 강성서원에 대한 현장 점검결과, 원형이 크게 훼손돼 이전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점검결과, 서원의 부속건물인 강당의 일부만이 원형대로 보존됐고 나머지 외삼문과 내삼문, 사당은 기존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현장에 그대로 두고 신자재를 이용해 건립, 사실상 신축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전라남도 문화재 보호조례 2조 2항을 위반한 것으로 행정당국의 허술한 관리감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행자위는 지적했다.

행자위는 오는 25일 설계와 시공회사, 문화재위원을 출석시켜 이건 승인과 현상변경 허가 과정에서 허술한 점이 있었는지 여부 등을 집중 추궁할 계획이다.

행자위 한 관계자는 “원형이 훼손됨으로써 강성서원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면서 “복원원칙을 위반한 이런 사례는 문화재 보존관리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강성서원 이건은 외삼문과 내삼문, 강당과 신실 등을 신축이 아닌 이건하도록 되어있으나 신실은 전라남도의 허가를 받아 규모를 키워서 건축하는 과정에서 ‘원상보존을 원칙으로 한다’라는 문화재 보호조례를 위반했으며 외삼문과 내삼문도 그대로 옮겨 짓도록 되어 있으나 이를 무시하고 신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공사완료 보고가 끝난 시점에서 유치면 늑용리 구 강성서원 터에는 외삼문은 헐린상태였으며, 내삼문과 신실 등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풍암공 문위세의 종손 문모씨가 전라남도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토목공사, 이건공사, 조경공사 등이 문화재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다’라며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원을 접수한 전라남도 행정자치위원회(위원장 김창남)는 전라남도와 장흥군에 자료를 요청하고 21일 도의회 행자위 소속의원들과 함께 조양리 소재 강성서원 공사현장을 찾아 현지 확인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민원을 제기한 종손 문모씨는 기존 신실의 사진을 보이며 “신실의 기둥이 느티나무여서 천년이가도 썩지 않은 나무인데 신실을 확장하면서 육송을 써서 문화재의 본래 목적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서원 이건을 추진했던 강서원이건 추진위원회 측이 전라남도로부터 2003년 1월 ‘형상변경허가’를 받으면서 승인조건에 기재된 ▲전사청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변경시행하고, ▲당초 외삼문 대신 건립하기로 한 누각은 제외하고 원래 있는 외삼문을 이전하도록 하며, 또한 수정한 도면은 도의 심사필을 받은후 시행하기 바랍니다. ▲또한 이전에 소요되는 비용은 보상비 및 자부담으로 충당하기 바랍니다. ▲원가계산 및 설계내역은 귀군 책임하에 검토 시행하고 기술직 공무원을 공사감독으로 임명하여 공사추진에 철저를 기하기 바랍니다. 라는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에 행정자치위원회 소속의원들은 오는 25일 행자위를 열고 모든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관련 공무원의 감독소홀 여부와 설계자(유성종합건축사 사무소, 화순소재)와 시공자(기룡건설, 나주소재)의 설계와 공사시행 소홀여부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관련부처의 통보하여 징계를 요구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문제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에 대해 유치면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강성서원의 문화재지정이 취소되면 장흥군은 많은 손실과 좋은 관광자원을 잃어 버린 셈이된다."며 "문중은 말할것도 없고 장흥군민 전체가 합심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할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강성서원은 삼우당 문익점과 풍암 문위세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원래는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공을 세운 문위세를 향사하기 위하여 인조 22년 1644년 월천사를 세운 것에서 비롯되어 숙종 28년 1702년 사우를 건립하고 영조 10년 1734년 문익점을 추배하면서 그를 주벽으로 하고 문위세를 배향했다.


정조9년 1785년 전라도 유생 600여명이 이들의 공덕을 흠모하여 사액을 청하는 소를 올려 ‘강성’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전라남도는 지난 1984년 2월 서원 전체를 아우르는 강성서원 1곽에 대하여 문화재 자료 70호 지정 관리하고 있었으며 탐진댐 수몰예정지로 고시됨에 따라 남평문씨 문중이 한국수자원공사로부터 보상받은 8억여원을 11억2,900만원을 들여 2003년 1월부터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에서 지난 4월30일 유치면 조양리 산 677-2번지로 이건했다.    

 

강성서원 오시는 길

☜ 남해안 고속도로(6번)이용 순천톨게이트에서 나옴
☜ 남해안 고속화 도로(2번)를 이용 순천20km→벌교20km→보성11km→장흥
☜ 장흥에서 유치면도로(23번도로) 이용 9km→유치면사무소
※보성에서 장흥으로 8km정도 가다 839 도로를 이용→봉림리→용문리→유치면 사무소도 가능함

 

 

이건전 사진첩

서원의

거목

은행나무

재물운반

헌관입장

수몰전 강성서원 강당

탐진댐공사전의 강성서원 숭덕사(신실)

강성서원 비석

문위세공 영정

 

이건중인 서원 사진첩

유치면으로 이건후 강성서원 사진첩(07년 3월 촬영)

서원전경
 
 
숙연문

1997년 3월 도은회(퇴계선생 후학의 후손모임) 방문

숙연문

서원 정면

서원원경(문일성모니터 촬영)

서원근경(문일성 모니터 촬영)

강성서원 준건 상량문

신실의 신위

서원현판
상량문
   

 
   
 

주련(글을 적어서 기둥에 붇인것)

 

서원옆의 효자비

쌍효비각(장흥 유치면 덕산리)

효자 문치광(文就光) 정려 -유치면 조양리

서원에서본 탐진강(문일성 모니터 촬영)

비문
비각 안내문 쌍효비각

서실입구의 비석들(문일성 모니터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