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산서원
전북 김제군 공덕면 회룡1리    文鐘培위원장(☎011-9668-2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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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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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개요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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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長根재  무(063-277-4235) 019-674-4235

배향선조

◎3세충숙공 諱 극겸
◎9세 충익공 諱 달한(순평군 파조)
◎12세 충선공 諱 익점(충선공 파조) 
◎12세 명천공 휘 찬(贊)

  ◎전주유씨 별암(鱉岩) 유지강(柳之綱)   행적보기
  ◎전주유씨 정암(靜岩) 유지기(柳之紀)   
행적보기

향사일

2월16일(음) 11시 유림주관 (2004년부터 음력 2월 중정에서  일자 변경함)

교통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21번도로-공덕ic-회룡1리(회룡2,3리 아님)
호남고속도로-전주ic-26번도로-21번도로-공덕ic-회룡1리

서원철폐후 재 건립때 철폐전에 함께 배향되었던 전주유씨 형제분도 배향했는데
전주유씨도 재건립에 동참하였고 2000년의 대수리에도 500만원을 보조하여 저산서원의관리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가는 다른서원의 출입문과 달리 높이를 185cm로 하여
후손들의 출입시 머리를 부딪쳐 선조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신실옆의 160년 된 소나무가 운치 있으며 주변의 경관이 일품입니다
제실 주변 및 건너산 일대가 모두 문씨 산소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고
나이드신 분들께서 수많은 묘소의 관리와 고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위토답 8,000여평에 임야 12만평의 풍부한 재원을 보유하였으나
문중 관리자중 일부가 개인의 욕심이 앞서 토지가 많이 줄었다고 하며
2003년 토지의 일부가 수용된 후에는 운영이 더욱 활기차게 되었습니다

 

별암 유선생 사적

정암 유선생 사적

       형제 분으로 고종5년(1868년)에 발행한 전주부 소재 서원및 향현사 성책 예조 존안에 실림 

별암당 유선생이 돌아가시니 이름은 之綱(지강)이고 는백거이며 시조 장령공 휘 은 완산백에 봉하였으며 자손들이 관향(완산=전주)으로 삼았다.

배는 전주최씨 이시고 다섯 아들과 한 분의 사위를 두었는데 모두들 과거에 급제하여 삼한 국대부인으로 봉호를 받았으며 막내 아들은 생원 문과이신 克渠(극거)이시고 관직은 호조판서 이시니 즉 공의7대조이시다 대대로 벼슬을 이어 세습함은 가정의 가르침이 있음이며

공의 덕기는 순수하고 성품은 강명하여 어릴때 우뚝한 거인의 뜻과 같이 홀연하였다 마치 학이 닭무리중에 있는 것 같고 오동에 난세가 앉은 것 같았다

매양 사마광이 독을깨여 친구를 구한 지혜가 있었고 조금자라서는 율곡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약관의 나이로 사문숙성하여 호남과영남의 이재를 겨루는데 연첩삼장 하였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 입문 사문의 난해를 즐거움과 유익하게 탐구하여 같은 처사중에 학행이 고명한 죽헌을 벗삼는 지기가 되었다 정여립이 허명으로 몰래 조야를 경동하니 공은 한번보고 그가 허식에 의한 역모임을 알고 단교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고 감복하였다 공은 본성이 효우정성 하여 충성과 봉양의 의절은 한결같이 소학을 준수하니 사림의 표준이 되어 방백(관찰사)이 효행청념 으로 천거하였다. 선조조에 북부참봉에 제수하니 세가대신 들이 학문을 사랑하는 공은 장차 크게 쓰이리라 하였다

공은 붕당이 극성 한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독서와 제자를 가르치며 지방에 머무르던 중 정유년 왜구가 창궐하니 백의창의하여 김제 땅에서 적의 무리를 물리쳤다

만력병오 공년 오십사세 오로지 경학에 뜻을 두고도 과거에는 힘쓰지 않았다 어머니 명으로 사마시에 삼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공의친족 춘호공(유영경.영의정이 과거를 보아 청요직에 발탁됨을 권하였으니 공은 공손이 사양하고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와 전원생활 수년에 광해군이 왕이 되니 삼창(유희분.박승종.이이첨)이 전권을 잡았고 칠신이 쫓겨났다

 

이때 감사 이경전이 향인과 체결하여 무뢰한 무리들을 이끌고 장차 간당과 부합하여 소의를 모아 외응계획을 삼아 일향장보를 위협하니 두렵고 실색하여 겁을 내어서 따랐다 공의 형제는 우뚝서서 굴하지 않고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니 고을 동지중 동의자 최석계 김봉곡 유조헌 박매포 (청하서원종향) 유춘포(화로) 김동계 제현도 홀연이 지주가 되어 혹한의 잣나무와 같은 모든 호남의 선비들은 이에 의지 하지 않고 난에 추종하지 않았다 공은 은둔하여 시골에 살면서 송죽을 벗삼아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수석사암에 소요완보하며 청풍명월에 스스로 회포를 풀었다

공명과 부귀는 일장춘몽처럼 여기고 암운계어로 사시의 경치를 보면서 호를 별암으로 짓고 제호로 삼아 편액하였다

대계 석인에게 보여주는 고반(쟁반을 두드리며)을 즐긴다는 뜻이다

만세력 신유년에 어머니가 향년 구십일세에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 육십구세요 늙었어도 어머니를 사모함이 젖을 잃은 어린애처럼 가슴을 치며 주야로 통곡하였고 이에 시묘살이 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효로서 일생을 마쳤다 어찌 일향의 현사라고만 할까 가이 백세의 사표일지어다.                      병건도광 정해(1827년.선조27년)    

정암 유선생 휘 지기는 별암 선생의 아우이시다

공은 신기가 수려하며 재기가 무리 중 에서 뛰어나 연보 십육세에 예능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백석 유사부 즙이 한번 그 위의가 연정함을 보고 연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명세진유라 할 만하다

 당예제 하여 말하기를 정암이라 하였다

 

공의 아버지 병이 있을때 형과 더불어 뫼시면서 병석을 떠나지 않았으니 한 노인의원이 말하기를 꿩의 알이 묘약이라고 하였다 이 겨울에 구할 까닭이 없어 밤낮으로 축천 하니 문득 꿩 한 마리가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또한 부모상의 범절은 한결같이 예절을 따랐으며 시묘 살이 3년 동안 제복을 벗지않고 애통해 하였다

 또 형의 상사에는 모든 장상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복을 벗은 후 병자년에 북쪽 오랑케가

 침범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공은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파천함을 듣고 분함을 여기지못하면서 말하기를 천도가 어찌하여 나라일이 어려움이 많은가 지금 내가 살아서 부모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서 임금에게 보답하지 못함이니 살아서 다시 무엇하리 라고 맹세하고 가동을 거느리고 난에 달려가기 위하여 계룡산에 이르러 강화가 성립됨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십여장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절의로서 생을 마치니 어찌하여 충효가 아울러 형제에서 나왔는가

이는 곧 질풍에  굳센 풀이요 세한에 송백이니 예로부터 절의의 선비는 어찌 공과같이 생을 버리고 의에 나감이 있을까

 비록 죽었다 한들 후회함이 없으리라

            자료제공  : 유정훈님(010-9955-1356)

 

사진첩

저산서원

강당

강당과

내삼문

외삼문인

교지문

내삼문인

앙지문

신실에서

유림이

향사를

모시는

모습

제실의

관리사

서원 전경

 서원 전경(구)

 

선조묘소

서원부근의 선조님들 묘소참배

 

 

주변관광지

김제는 동쪽은 완주 서쪽은 서해에 접하고 남쪽은 동진강 북쪽은 만경강을 경계로 하며 높은산도 겨우100m 정도인 호남평야의 중심지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신라때의 저수지인 벽골제가 있으며 벼고을로 불린다
서쪽으로 차량으로 30여분거리인 부안의 변산반도 국립공원에는 변산온천이 있고 현재 지도를 바꾸게될 방조제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전주-군산간의 도로변에 심은 백리벚꽃길은 전국에서 가장 길고 4월 중순에 만개한다
금산의 금산사는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30여분이면 도착하고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은 1시간 거리이다

돌아오는 길의 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