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원서원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文昌萬위원장(☎065-942-2171)

구분

서원

모계공 휘 문위

         
메뉴

개요

건립유래

약력

스승

벗과동지

이기문제

왕도론

선비의길

교육과장

건강관리법 일기 평론 저서

주변관광지

       

 

서원개요

배향선조

 모개공 諱 위

향사일

 음력 3월 하정일
교통안내 88고속도로이용-가조나들목-용산부락 방향
주변관광지 거창은 산이 높고 물이 맑아 등산객이 많고 유명한 사찰도 많습니다.
가조의 백두산온천은 물이 좋아 관광객이 반드시 들리는 곳입니다.

 

건립  유래

1633년에 김치경(金致敬), 정기진(鄭起震), 윤영남(尹英男) 등이 사당건립을 발의하고.
1686년 10월 원학동에 용원서원(龍源書院)을 완공함
1759년  정시좌, 이성창 등이 주도, 변월담(卞月潭)공을 추배했다.
           후손 문석에 의하여 가북 용산으로 이건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2000년 거창에는 일가들의 인구는 적지만 단합된 힘으로 성금을 모금하여
          모현사(신실)과 강당 및 대문을 건립하였습니다

용산마을의 지방도의 왼편에 송림이 우거진 공원이 보이며 다리를 건너 우회전을 하여
수량이 많고 물이 맑은 하천옆의 길을 따라서 100m 정도 가면 도로옆에 있는 서원의 대문을 지나면 자연석으로 꾸민 화단과 자그마한 마당을 가진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뒷편에 실신이 있습니다.

 

인근 관광지

거창은 덕유산으로 전라북도와 경계하고 함양에 이웃하여 1000m가 넘는 산이 20 여개가 모여있는 경상도의 오지여서 물 또한 맑습니다.
경승지인 수승대와 가조온천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거열산성군립공원도 좋습니다
거창박물관에는 거창댐 공사 당시에 채굴된 자연석들을 전시하여 볼거리가 되며
전시실에는 문위선조의 자료들을 전시한 전시실이 있습니다.

법보사찰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합천의 해인사는 북쪽으로 차량으로 30여분 거리이고

남서쪽의 차량으로 30여분 거리인 함양에는 화림1동 화림2동 화림3동으로 이름한 계곡에  농월정 군자정 동호정 거연정의 정자들이 줄지어 있는 물좋고 반석좋고 정자 좋은 곳입니다.

대전-통영고속도로의 서상인터체인지 인근인 서상중학교 앞에는 의병장 문태서 장군의 공원과 공무원연수원(남덕유산 산행기점) 인근에 생가마을이 있습니다.

 

모계 諱문위 약력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으로 1592(선조25) 임진왜란때  왜군과 전투중 의병대장 김면의 병사후 의병대장을 맡았고 김옹(부재학), 류성용(재상)의 천거로 동목교관이 되어 선고감주부 감찰을 역임하시다가
광해군 즉위 후 낙향 인조반정후 고령현감을 사임하고 낙향하다

가.출생과 성장
12세 익겸(益謙:충혜공)으로 응(雄)은 선생의 조부(祖父)로써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함양(咸陽)에서 거창군가북면용산리로 이거(移居)해 왔다. 아버지는 산두(山斗)이고, 호는 학산(學山)으로 학문이 높아 향촌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다.
당시 이석명(李碩明) 거창현감(居昌縣監)은 팔송정(八松亭)을 건조하여 학산공(學山公)에게 지방자제의 교육을 부탁하였고, 영호(瀯湖) 윤경남(尹景男)은 문하생(門下生)이었다. 덕계(德溪) 오건(吳建)선생과도 교우(交友)하였다. 선생은 소년시절의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배웠다. 선생의 어머니는 함양오씨(咸陽吳氏)로써 덕계 선생의 일족이었다.
아들은 성후(誠後), 경후(敬後), 충후(忠後) 등 삼형제였다.

나. 행적(行蹟)
선생은 조선 명종(明宗) 9년(서기 1554) 6월 14일 거창 가조현 용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6세때 독서를 시작하여 9세에는 상서(尙書)의 뜻을 알았다.
13세때 조부공(祖父公)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학산공(學山公)이 시묘(侍墓)하는 데서 영호(營湖) 윤경남과 같이 공부하였다.
○ 19세 : 남명(南冥)선생을 방문하였고, 장례(葬禮)때 참석하여 예(禮)를 배웠다.
○ 21세 : 산청의 덕계선생을 방문하여 역학(易學)을 배웠는데 경의지학(敬義之學)의 근본을 얻었다.
    7월에 덕계를 제사하는 제문(祭文)으로 분명이 진동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께 50년동안 가르침을 받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정선생 또한 여러
    제자중 으뜸으로 생각하였으며 후에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을 지었다.
○ 38세 : 6월에 영남유생을 대표해서 최수우(崔守愚 이름은 최영경)  신원소를 지었다
              9월에는 팔송정(八松亭)에서 현감 이석명의 명으로 생도를 교수함.
○ 39세 : 임진년 창의하여 김면(金沔, 호는 松庵)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지례, 병암, 고령, 성주, 합천
              등지에서 왜적을 방어하여 진양일로(晋陽一路)와 주민을 구제하였다.
○ 46세 : 용산에서 모계리로 이거하다
              호(號)의 계(溪)를 '谿로 바꿈은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함이었다고 한다.
○ 50세 : 의사 이형(李亨), 장응인(張應麟), 효자 최발전(崔潑傳)을 지었다.
○ 51세 : 5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동강(東岡) 김우옹의 추천에 의해 6월에 부임했다.
             당시 문인 모의자(慕義者)는 사우도를 참조할 것. 52세에 계공랑(啓功郞∼종7품)에 승진
○ 52세 : 선무랑(宣務郞), 선교랑(宣敎郞) 종6품에 승진. 선무원종공신 삼등에 봉해지다.
○ 53세 :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12월, 서애 유성룡(柳成龍) 추천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
○ 55세 :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義郞), 봉훈랑(奉訓郞 종5품), 봉직랑(奉職郞)에 승진
○ 56세 : 광해군 1년, 벼슬을 버리고 귀향.
○ 61세 :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제주도 대정에 안치, 윤경남이 운봉 현감(縣監)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 62세 : 문인 조직(趙稷)이 광해의 폐륜행위를 상소(上訴)하여 남해로 유배되고 선생도 무고(誣告)되어
              화(禍)를 당할 뻔 했는데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오사호(吳長)는 정온(鄭蘊)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토산(兎山)으로 유배됨.
○ 63세 : 서계서원(西溪書院) 건립에 전력함.
○ 64세 : 오사호(吳思湖)는 유배지에서 사망, 선생은 삭명사판(削名士版: 모든 벼슬이 삭탈)됨.
○ 65∼66세 : 허목(許穆∼眉), 조경(趙炯∼龍州), 이진철 등과 서신 왕래, 상봉 등이 빈번하였다.
○ 67세 : 한강선생 사망(광해 12년), 위패(位牌)를 모시고, 대곡(大哭)하고 제문(祭文)으로 조의하였다.
○ 69세 : 연평답문절요(延平答問切要)를 초록(抄錄)하였다.
○ 70세 : 인조왕 1년 4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종4품) 고령현감에 임명되었다. 6월 부임 -> 11월 사임.
○ 75세 : 도산서원(道山書院) 창건을 발의함.
○ 78세 : 덕계선생 행장(行狀)을 지었다.    12월 24일 별세하시다
○1644년 공의 행장(行狀)을 허목(許穆)이 찬술함

 

선생의 스승

2. 선생(先生)의 스승
가. 선생은 19세때 남명의 장례(葬禮)에 참석하기까지는 부친에게 배웠다. 부친 산두(號학산)공은 당시 거창현감이 공의 향리에 팔송정을 건립하여 생도를 교수케 했다는 거창군지를 보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선비임을 알 수 있고, 운봉현감을 역임한 윤경남(尹景男)은 문인이었고, 허목이 지은 선생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선생의 아버지 산두(山斗)는 어질고, 예가 있었지만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했으나 고을의 자제들 중에는 예를 알고, 부형(父兄)을 섬기는 자는 모두가 그의 제자였다고 했다.
조경(호∼龍州)이 지은 묘갈명의 학산공에 관한 기록은 이름은 산두요 통정대부, 소년시절부터 순수하고, 문과 예에 깊고, 향리의 종사였다고 서술하고 있다.(考諱山斗通政大夫 自幼樹惇而辯於文  且深於禮家言鄕里宗師

나. 남명(南冥)과 조식(曺植) 선생
선생은 정훈(庭訓∼가정에서 배움)을 하는 한편 큰 뜻을 품고(有求道之志) 덕산(德山)에 가서 19세에 남명(南冥)선생을 배알하였다. 19세에 당시 남명선생의 학덕(學德)은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남명은 철저한 선비정신으로 평생을 산림처사로 일관하였으며, 정몽주, 길재, 정여창 등의 전통적인 영남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영욕, 이달 등으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평소에도 종일 단정히 앉아서 게으른 빛이 없었고, 그 기개는 추상열일(秋霜烈日)하였으며,
수제자 정인홍은 천고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고, 백세를 앞두고도 혹하지 않는다(前千古而無愧 後百世而不惑者)했다
학문은 수기실천(反躬實踐)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일을 허비함은 기세도명(欺世盜名)이라고 갈파하였다. 선조 1년 무진봉사에서는 선조에게 정치의 근본으로서 명선(明善), 성신(誠身), 주경(主敬), 지의(至義)를 상주하였다. 마음속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고, 외부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의(義)라고 하였다.
남명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강조하고, 형식보다는 실질을 숭상하였기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은 대개가 남명 문인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정인홍을 미워한 나머지 남명사상까지 싸잡아 몹쓸 것으로 청소하였기에 우리 민족사는 더욱 얼빠진 격이 되고 말았다.(內明者敬外斷者義)
모계선생은 당시 우리 민중의 위대한 선각자이며, 실천가라고 추앙하는 남명선생의 높은 뜻을 19세 청년의 가슴깊이 간직하였고, 남명 사후에는 그의 수제자 오덕계(吳德溪), 정내암(鄭來菴), 정한강(鄭寒岡) 등을 통하여 스승의 정신을 더욱 깊게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다. 덕계(德溪) 오건(吳建) 선생
21세때 산청에 있는 덕계선생을 배알하고, 주역(周易)을 배웠으며, 거기에서 비로서 경의지학(敬義之學)을 깨달았다고 서술되어 있다.(제덕계오선생문에서) 덕계선생을 제사하는 제문(祭文)을 통해서 사제지간의 관계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다. 선생의 아버지인 학산공은 덕계선생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선생의 외가(外家)가 덕계선생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小生比徒辱居源派 素與家父有相許之分  辛於今年夏始入芝宇而 敷者風 約我以敬勉我以義 諄諄一月 始覺有端
선생이 덕계선생을 배알한 것은 21세 6월(1573)이었는데 덕계가 죽은 것은 7월이었다.(54세)
위 내용으로 보아 선생이 덕계로부터 배운 기간은 불과 한달이 되지못하나 주역(周易)의 휘역(義易)을 통해 경(敬)과 의(義)를 배워 그 끝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선생은 제문(祭文)에서 덕계의 선비로서의 인품을
    出可以砥柱邦國(나가면 국가의 기둥이 되고)  處可以標的後擧(머물면 후진의 표적이 된다.)고 하였다.
백성에게 재앙(災殃)이 있으면 이를 구제하고, 후진의 질의에는 친절을 다하였다. 덕계는 대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근무한 적과 호남어사(湖南御使)로서 민정(民情)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덕계를 스승으로 섬겼지만 덕계의 아들 장(長: 호∼思湖)과는 친형제 이상으로 의기상합(義氣相合)하는 사이였다. 연령은 사호가 10세 아래였지만 임진왜란때 다 같이 송암장군의 참모로써 생사를 같이 하였고, 광해군시절엔 힘을 합쳐 항쟁하다가 사호공(思湖公)은 끝내 토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사호공 또한 대과에 급제하여 광해군정권때 조정에서 정언(正言) 벼슬을 하며, 광해군 정권을 맹렬히 탄핵(彈劾)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과도 생사를 초월한 친우관계이다.
선생은 덕계선생이 사망한 이후 문집의 정리와 서원(서계서원) 건립에 약 20여년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동안 광해정권 15년이 끼어 있으니 더욱 더하였다. 서계서원(西溪書院) 상향문(常享文)에 의하면 선생은 효우하고, 조정에서는 정직, 수절하였으며, 정의지학을 전함이 있어서 실로 참 스승이라고 하였다.

라.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1543~1620) 시호(諡號)는 문목(文穆)
남명, 퇴계의 문인으로 추천에 의하여 대사헌까지 올랐음. 지방수령때는 선정으로 여러 서원에서 제향(祭享)하였다.
선생의 제한강선생문(祭寒岡先生文)에서 身亡而道不亡 跡熄而名不熄(몸은 없어져도 도는 그대로 남아 있고 발자취는 없어져도 이름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 한강(寒岡)이라고 하고 있다.
인륜(人倫)에 모범되고, 난세(難世)에 기둥이라 하였고, 덕계의 지도와 남명을 근원하였으며, 퇴계에 계도되었다고 했다. 선생으로 보면 덕계와의 관계는 동문수학인 동시에 사제사이로 되어 있다. 선생은 한강에게서 약 50년동안을 배웠기에
그 은혜는 보통의 사제지간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弱冠受知往來 咨 將五十年於此矣  誘掖提警之思 固非尋常函丈之比

선생과 한강(寒岡)은 광해정권때 명분과 의리로서 사생일체(死生一體)가 되어 투쟁하면서 진퇴를 같이 하였다.
정동계(鄭桐溪)의 10년 유배, 오사호(吳思湖)의 유배지 사망, 조직의 남해 유배, 한강과 모계의 파직과 제야투쟁 등은 실로 남명사상(南冥思想)의 처절한 발로(發露)이며, 승리였다.
선생 57세때 광해 3년(서기 1610) 한강선생에게 올린 편지를 보면 광해정권을 일시(一時) 폭객(暴客)의 변(變)이라 하였고,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살자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광해군 시절의 그 참흑한 탄압상을 말해주고 있다. 한강선생이 임해군의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니 선생은 이를 위로하기를
   선생께서 광해의 폭정을 탄핵하니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통쾌하겠는가?(聞先生論時事 聞子孰不興起
   그러나 그들은 도마이고  선생은 고기이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但彼方爲机 先生自就爲肉 何如哉) 하였다
선생은 그 많은 한강의 문인중에서 한강선생의 언행록(言行錄)을 찬술(撰述)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그 내용을 보면 한강은 어릴 때도 종이조각에 쓰인 버리는 글자도 밟지 않았고, 경학은 물론 천문, 지리, 의방, 제례, 심학 등 무불통이었다. 나는 남명(南冥)선생 장사때 처음 만났고, 그후 덕계(德溪)문하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마.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
정인홍은 광해군정권때 산림정승(山林政丞)으로써 북인들의 영수(領袖)인 동시에 광해군이 의지하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들이 주장하는 모든 책임을 지고, 형벌을 받았다. 정인홍이 역적이란 누명이 여러 백년 계속되는 사이에 특히 경상우도에 있어서의 그의 행적은 철저하게 삭제되어 지금 공에 대한 재조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암의 증조부 희(喜)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삼가현감을 역임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11세에 경상도사 구졸암 양희(梁喜)의 사위가 되었고,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문하생이 되었다. 15세에는 남명의 문하생이 되어 결국엔 의발전수(衣鉢傳受)의 고제(高弟)가 되어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氣像)과 내경외의(內敬外義)의 학맥(學脈) 및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경륜(徑輪)을 이어 받았다. 24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선비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39세때는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선발되어 6품직을 받았고,(五賢士) 44세때에는 영천군수로 배명되었다.
내암은 합천 가야출신이고, 선생은 가조 용산출신으로 서로의 거리가 8km정도이니 보행으로 2시간 정도로써 하나의 경내(境內)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모계선생은 1554년생이고, 내암은 1536년생이니 내암이 18년 연장이었다,.
내암이 전국 5현사로 선발되었을때(39세) 모계는 21세의 청년이고, 이때 덕계와 한강(22세 때)을 찾았으니 이전에 이미 내암과 모계의 관계는 사제(師弟)의 의로서 맺어진 것으로 보아진다. 내암과 동문관계인 덕계와 한강을 내암이 모계에게 소개한 것은 당연한 이치로 보아진다.
모계일기(茅谿日記)와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跡), 그리고 거기에 부착되어 있는 몇가지 상소문(예 다사헌계사 등)에 의하면 등재된 대사헌 사직상소가 모계의 일기 일부에 등재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보통의 사이가 아니었다. 이름을 삭제한 것은 후인(後人)의 소행으로 보아진다.
모계문집에 서문(序文),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등 곳곳에 내암과 모계의 관계를 구의(舊誼)로 표현하고 있음이 보통의 사이가 아님을 실증케 한다. 모계의 입장으로 보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명문가이며, 갈천(葛川)의 문인으로 24세에 급제한 내암 같은 명망가에게 사사(師事) 아니할 이유가 없고, 내암으로 보아도 장래가 유망한 후진의 간청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도 분명하다.
위와 같은 깊은 인연은 남명학통(南冥學統)과 경상우도의 기질 및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 등에서 더욱 밀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시절을 맞이하여 북인정권의 실리정책(實利政策)과 명분을 지상과제로 삼는 서인(西人) 및 우도(右道)의 전통정신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갈등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내암과 모계, 동계 등의 관계를 갈라 놓게된 연유라고 보아진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모계와 내암의 구체적인 관계 등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재조명의 날이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바.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
원천공은 천천리(泉川里)에 살고, 모계공은 용산에 살았다. 그 거리는 약 1km 정도로 한 마을이라 할것이다.
원천공이 모계공보다 14년 연장이고, 원천집 32세조(연보)에 의하면 문모계(文茅谿) 순보(順甫∼선생의 자)가 원천공에게 와서 학문을 익혔다는 기록이 있고(先生三十二歲 文茅谿順甫 肄業干先生)
원천공 68세 연보조에는 유서애(柳西厓)에게 답하는 서신에서 문순보(茅谿)의 재행(才行)을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모계공이 유서애의 추천으로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는 연도와 부합되고 있다.
원천공은 뛰어난 재행과 학문, 그리고 생활의 여유 등으로 건축한 원천정사에는 오덕계, 정한강, 최수우당, 김동강, 정동계 등 명망있는 선비들이 연달아 내방하여 학문과 우의를 다졌으니 바로 이웃에 있는 모계의 참석은 불문가지이다.
원천공은 임진왜란때 창의(倡義)에 참여하여 김면(金沔)의 거창 의병군을 도와 전공을 세웠기에 명(明)의 황제로부터 첨지(僉知)의 직함과 선조로부터 대사헌(大司憲)의 직함을 받았고 사후에 용천정사에 제향되었다.
모계공은 원천공에게서 학문뿐 아니고, 출처와 행의에 대한 것도 배웠으며, 모계일기에도 여러곳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존경하는 스승이며, 향토내의 선배로써 지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모계사우록(茅谿師友錄三十六賢)에도 원천공이 소개되어 있다.
이상 외에도 의병 삼장사적 부록에 의하면 사우록(師友錄)이 있는데 그곳에는 36현(賢)의 이름과 행략(行略)이 기록되어 있으며, 스승으로는 정한강(鄭寒岡), 동강(東岡) 김우옹, 동강은 부제학으로 종사할 때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여 동몽교관을 임명받게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모헌(募軒) 이경명(李景明),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이다.

 

선생의 과동지

3. 선생(先生)의 벗
오장(吳長∼思湖)  윤경남(尹景男∼瀯湖)  이휘옹(李希雍∼和彦)  정장(鄭樟∼都事)
조응인(曺應仁∼善伯) 형예갑(邢禮甲∼巷叔) 이덕경(李得慶∼治善) 오해(吳解∼鎭安) 이분(李芬∼馨甫)  신여율(愼汝栗) 신정(愼定∼解彦) 이승(李承∼晴暉堂)

4. 선생(先生)과 뜻을 같이 한 분들
전팔급(全八及∼源溪) 김면(金沔∼松庵) 정온(鄭蘊∼桐溪)  장현광(張顯光∼旅軒) 류중룡(柳仲龍∼漁適)
조종도(趙宗道∼大笑軒) 성팽년(成彭年∼石谷) 정경세(鄭經世∼愚伏堂) 강대연(姜大延) 박이장(朴而章∼龍潭)
이경의(李慶義∼子方) 이영(李霙∼汝洽) 이경현(李景賢) 노형운(盧亨運∼時甫) 최현(崔睍) 박성(朴惺∼德凝)

5. 선생(先生)의 학덕(學德)을 존경하여 왕래한 선비
허목(許穆∼眉) 유진(柳袗∼修巖) 임진부(林眞∼林谷)  권수(權壽∼東溪) 강대수(姜大遂∼寒沙) 윤응석(尹應錫∼西潭)
여작(呂 ∼晦仲) 권극경(權克經∼參奉) 노향운(盧享運∼表庵)  박계회(朴啓晦) 이찬

6. 선생(先生)의 문인(門人) :
※모계재 문인(茅谿齋 門人) : 이선립(李善立) 윤사임(尹思任∼聖元) 변창후(卞昌後∼月潭)                                          정시수(鄭時修∼琴川) 이준향(李俊香) 이응백(李應白)  이굉(李宏)
                                           박황(朴黃) 허후(許厚∼觀雪) 유진(柳袗)  조임도(趙任道)
         조경(趙絅∼龍州) 이호민(李好閔∼玉峯)  조정생(曺挺生) 조정립(趙挺立) 박군수(朴君秀∼龍湖)
※경사문인(京師門人) : 조직(趙稷) 이경의(李景義∼晩沙) 이진철(李晋哲) 이시명(李時明∼石溪)

 

선생의 이기문제(理氣問題)

8. 선생(先生)의 이기문제(理氣問題)
선생은 논문(賦)에서 소성약천성(小成若千性) 인성(人性)문제에 언급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충분한 자질이 있어서 힘쓰지 않아도 이(理)는 중(中)을 간직할 수 있고, 도(道)는 생각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며, 마음은 어릴때(赤子) 것을 읽지 않으면 커서도 도(道)는 온전할 수 있다."
위에서 인간은 원래 순선(純善)한 것으로 무오(無惡)하나 박(駁), 탁(濁)에 인연하여 혹은 달리할 수 있으니 뜻은 성색(聲色), 이목(耳目)에 유인되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물(水)이 동서를 가리지 못하고, 길(路)이 남북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있음을 경고하였다. 수기(修己)의 방법으로는 쇄소응대(灑掃應對)와 간특함을 멀리하고, 천리(天理)를 따르면서 인간(人間), 인사(人事)에 소흘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에서 이(理)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실이 사람다운 것은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천(天)이다. 만고에 이(理)는 하나이고, 만물에도 이(理)는 하나이다. 하늘과 사람에 이(理)가 하나일 뿐 아니고, 천지간 형색, 동식물 등이 우리와 더불어 같은 이이다. 이(理)가 이미 하나이니 (相同) 서로 느끼는 도(道) 또한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나의 기(氣)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氣) 또한 순하다. 때문에 천지와 사람은 하나의 이(理)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선생이 이를 강조한 것은 인군(人君)은 하늘을 대신하여 이(理)를 이끌어 나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조지원(趙止源)에게 보낸 답서 가운데서 선생은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주자서절요, 근사록 등을 숙독하면 심목(心目)이 맑아져서 우환(憂患)이나 곤고(困苦)가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성리대전 중에서도 심성졍(心性情)과 주서절요 중에서도 왕장문답(汪張文答)이 가장 요긴하다 하였다.
조지원은 선생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서 서울에서 동몽교관으로 근무할 때의 제자인데 광해군의 폐륜행위를 직간(直諫)하다가 남해도로 유배되어 10년동안 고초를 겪은 분으로 성정이 너무나 곧아 선생도 걱정을 하는 바였다.
여기에서는 유배생활의 고난을 성정을 공부하여 극복하도록 서신으로 교훈을 주는 장면이라고 본다. 광해 14년 신유에 보낸 서신에도 성정(性情)공부는 주야로 읽고, 날로 만언(萬言)을 기록하는 효과보다도 더하니 심지공부(心地工夫)는 오로지 하나에 있으니 사색이나 정의도 일경(一敬)에 있다. 하물며, 일경공부(一敬工夫)는 병중백약(病中百藥)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건강법으로 단전호흡을 전하기도 하였다.

주자학(성리학)의 근원은 연평(延平∼주자의 스승)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문집중 연평답문질의발(延平答問質議跋)에서 주자의 위대함을 밝히자면 그 연원인 연평(延平)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선생의 왕도론

9. 선생(先生)의 왕도론(王道論)
옛날 선비들의 최대의 지향점(指向點)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요약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내 처사(處士)로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남명같은 분도 치인에 대해서는 밤잠을 자지않고 걱정할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향상과 왕도(王道) 및 이도(吏道)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적이 많았다.
모든 선비들은 국가정치에 대해서 상소라는 형식으로 건의, 비판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언론(言路)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왕도 그러한 전통관례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간혹 지나치게 과격한 진언(進言)을 하다가 유배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사자는 이를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국내 여론이 비등(飛騰)하여 결국은 처벌을 거두고 말았다.
선생 또는 대영유신리최수우소와 대인응지소에서 선조왕과 인조왕에게 건의하고 국정을 비판하여 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대영유신리최수우소(代嶺儒伸理崔守愚疏)
위 상소는 선조 22년(서기 1588) 호남에서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반역사건으로 진주에 살고 있었던 남명의 제자이며, 덕망이 높았던 최수우(崔守愚)가 무고로 인해서 구금되어 결국은 옥사하고 말았는데 이때 영남일대의 선비들이 합천에서 회합하고, 수우당의 억울한 것을 풀기 위해서 선생에게 상소문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문은 상달되기 전에 수우당은 옥사로 끝나고 말았다.
첫째는 최영경(崔永慶)의 사람됨을 설파하고 있다. 선비의 가정으로 충효(忠孝)를 실천하고, 충군(忠君), 애국(愛國)의 정성이 지극하며, 간특하고, 그릇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곧은 선비임을 강조되고 있다.
위와 같은 선비가 어찌 역적과 같이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는가? 하며, 진주인(晋州人) 정대성(鄭大成), 판관(判官) 홍정서(洪廷瑞) 등이 사감(私感)으로 정여립난에 억지로 연관시켰기 때문인데 관계기관이 진상(眞相)을 파악치 못하였고, 국왕 또한 진상파악에 소흘했기 때문에 선량한 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통박(痛駁)하고 있다.
둘째는 조사과정에서 일부가 명백한 허위와 무고임이 밝혀졌는데도 왕법을 집행하는 관원들이 적당하게 호도하여 유야무야하게 지나쳤기에 최영경은 희생되고 말았다. 이것은 한사람의 최영경이 죽은 것이 아니라, 만사람의 최영경이 죽은 것이며, 왕법의 최고권자인 국왕은 지금이라도 소상하게 밝히어 왕법 시행에 있어 역사적인 과오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위와 같은 처사가 속출하기 때문에 인심은 전하의 정형(政刑)에 대해서 열복(悅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人心之不悅服於殿不政形者也

전하는 조종(祖宗)으로 생민(生民)의 책임을 지고, 착함을 상주고, 악(惡)을 벌하여 사(私)업이 다스려온지가 25년이나 되었는데 오직 최영경의 사건에 있어서는 간특한 무리들에게 농락되어 선량한 사람으로 하여금 애매하게 희생을 당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넷째로 국왕 가까이에 있는 공경(公卿)들은 전하를 도우는 임무이고, 이목(耳目)인데도 권리나 이익에 도취되어 전하의 눈이나 귀를 가리우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이들의 농간(弄奸)에 빠지어 왕법이 바르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直視)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있다.
다섯째로 우리들이 영경의 처형에 대하여 이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주함은 결국은 종묘사직을 위함이고, 선이 미움받는 사회와 국왕의 형정의 실(失)을 바로 잡고자 함에 있다고 역설했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에 나타난 왕도론(王道論)
  대인응지소는 인조의 하명(下命)에 응하여 선생의 정치적인 식견(識見)과 현안중에 국사(國事)에 대하여 진언한 내용임.

첫째, 왕의 심법(心法)으로서 인(仁), 명(明), 무(武)는 성제(聖帝) 명종(明宗)의 상전(相傳)의 대법으로 명(明)이란 요 순 우를 이르는 바 정(精)이고, 무(武)란 요 순 우의 유일(惟一)이고, 인(人)이란 요 순 우의 이르는 바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 하였다. 인 명 무에 대하여 이를 변별치 못하면 굶주린 사람이 먹을 줄 모르며, 병자가 약을 쓸줄 모르는 것과 같다

둘째, 인성군(仁城君)에 대한 처리인데 국내여론은 인성군이 광해군시절 강제로 끌리어 광해정권에 협조한 것을 가지고 처벌해야 된다고 하고 있는데 대하여 선생의 의견은 은의를 베풀어 구제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인성군은 선조왕의 후궁 소생으로 이름은 공(珙)인데 광해군 폐모사건때 억지로 참여된 것을 가지고, 이귀(李貴) 등 인조반정 주신들은 이를 탄핵하여 결국은 유배(진도)시켰다가 사사시켰는데 후일 인성군의 무고함이 밝혀져 벼슬이 복구되었다.
선생은 여기서 왕의 명(明)과 인(仁)을 발동시켜 일가(一家)를 보전함이 사해(四海)의 백성을 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셋째, 훈척(勳戚)의 신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 과거의 중국이나 우리 나라 통치자가 왕의 측근에 있는 훈척을 잘못 다스렸기 때문에 위란(危亂)을 겪은 일이 비일비재라고 일일이 예를 들어 밝히고, 지금은 이나라 훈척은 사병(私兵)을 가지고 있으며, 혹은 전토(田土)를 강점하여 백성들을 곤궁에 빠지게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이를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넷째, 장만(張晩)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장만은 이팔난때 도원수(都元帥)로써 앞장에 나서지 않고, 적도(賊徒)의 뒤를 따르다가 이괄로 하여금 왕도(王都)를 점령하고, 인조왕을 부득이 피란케한 역적과 비견(比肩)되는 인물인데도 오히려 그에게 중한 상을 주고 있으니 당시 생명을 버리고, 사운 용사들의 비웃음을 받고 있다. 왕께서는 주위에 있는 장만을 도우는 무리들의 말만 듣고, 그를 옹호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충신 장순(張巡)은 적세로 성이 함몰될 것을 알면서도 쥐나 새를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애첩을 죽이면서까지 성을 지키다가 죽었기에 당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는데 도원수 장만은 적의 뒤를 따라 고양이 모양으로 이쪽 저쪽의 눈치만 보다가 나타난 자에게 상까지 주었으니 뒤에 만일 왕에게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누가 전하의 위급을 구할 것인가 하였다. 지금 하나의 장만이 장차 천이나 만의 장만이 나타날 것을 미리 경고하였다.

다섯째, 평안감사 이상길(李尙吉)에 대한 처리였다. 당시는 명(明)청(淸)의 대립기로서 광해정권 때는 양단책(兩端策)으로 양국(兩國)을 조정하여 백성에 미치는 화를 미연에 막았지만 인조반정 후에는 명분책에 의하여 숭명척청책(崇明斥淸策)으로 오히려 명(明)청(淸) 두나라의 미움을 받는 결과였고, 결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초래하여 역사상 유래없는 수모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상길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가도(假島)를 지키는 명의 모문룡(毛文龍)과 합작하여 조정의 인사까지 좌지우지하였다. 이에 선생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국왕의 권위를 세워 이와 같은 사례가 없도록 건의하였다.

여섯째, 군정(軍政)과 재정(財政) 혁신을 역설하였다. 재정의 근본은 세수(稅收)인데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는 경계(經界)가 불명하여 권신(權臣)들은 한없는 토지를 가지면서 세금을 면제받고, 주민들은 한구역에서 권신이나 조정에 이중으로 세금을 빼앗기고, 군정에서도 군적(軍籍)이 없기 때문에 유랑하는 청년은 많은데 군인은 태부족이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군문에 들어오는 자들이기에 하나도 훈련과 사기가 없는 군졸들이니 이들로서 어찌 국토를 방위하겠는가 함이었다. 이러함에도 대신(大臣)들은 유유하게 날짜만 보내고 소신(小臣)들은 사욕에만 정신없으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였다.
    땅이 있는데도 재곡은 모이지 않으며(有士而財不之聚) 사람은 많은데도 병사(兵事)는 일어나지 않으니(有人而兵不興)
   국사가 어긋남은 괴이하지 않다(無在乎國事之日去也)
   신이 생각컨데 이것은 나라에 유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臣以爲此國與人之所致)

일곱째, 관리(官吏)의 선발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관리등용은 국운(國運)을 좌우하는 것으로 해당관리의 책임은 물론이고, 추천한 사람까지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관리등용에 있어서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다면 그로 인한 부정은 많은 시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급관리들의 착취를 막아야 됨도 주장하였고, 상벌의 엄정도 주장하였다.
여덟째, 붕당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광해의 폭정(暴政)은 광해가 아니라 당인들이었고, 임진왜란도 수길(秀吉)이가 아니라 바로 당인들로 발생되었다. 오늘의 당인들의 행폐는 왕이(인조) 익히 아는 바이니 실로 국운(國運)이 달린 것으로 왕께서는 일대결단이 요망된다고 하였다. 지금의 형세(形勢)는 노도(怒濤)치는 망망대해에서 노없는 배와 같아 언제 어디서 거센 파도와 암초에 의하여 산산조각 날지 모르는 형세가 이 나라의 형세라고 지적하였다.
아홉째, 국왕(인조)의 수신(修身)을 강조하였다. 국왕은 만고일리(萬古一理)를 믿고, 천명(天命)에 순응할 것이며, 하늘을 대신한 통치자(統治者)로서 책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왕은 언제나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정령(政令)은 마땅한가? 상벌은 공평한가? 조정의 관리등용(官吏登用)은 적절한가? 궁궐의 출입은 적절한가? 군자(君子)는 향촌(鄕村)에 있고, 소인(小人)은 조정(朝庭)에 있지 않는가? 잘못이 있는데도 그대로 방치함이 없으며, 잘된 일을 중단하는 일은 없는가? 등에 대하여 언제나 살펴야 할 것이다.
열째, 국왕의 통치는 오로지 득인(得人)에 있다. 요임금은 사방의 도적이 일어남을 걱정하지 않고, 순임금을 후계자로 맞이하지 못함과 순임금의 황화(黃河)의 범람(氾濫)을 근심하지 않고, 후계자에 우임금을 초청하지 못할까를 몹씨 근심하였다. 순임금이 자리하니 사방의 도적이 안개사라지듯 없어졌고, 우임금이 재위하니 황하의 범람이 자연적으로 치수(治水)되었다. 이와 같으니 전하의 근심은 마땅히 덕인(得人)에 있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인재의 얻음이야 말로 통치의 근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생의 선비의길

10. 선생(先生)의 출처지도(出處之道 : 벼슬하는 선비들의 처신의 길)
이것은 명분(名分)과도 통하는 것으로 고려말의 정몽주, 길재, 조선초기의 사육신(死六臣) 등과 남명이 평생동안 처사(處士)로 자처한 소의(所以)도 출처지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남명은 이록(利祿)을 탐내는 속유(俗儒)가 아니었다. 명종왕의 척족정치(戚族政治)와 주부(主簿), 판관(判官), 현감(縣監)정도로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음을 알았고, 명종을 대면한 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식견(識見)이 한낮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위와 같은 출처지도를 지키지 않고, 함부로 벼슬길에 출입하는 자를 추시도명(趨時盜名)하는 무리라고 비판하였다.
남명의 출처지도는 남명(南冥)의 창안이 아니고, 특히 경상우도 선비들의 사림정신(士林精神)이었다. 선생은 우도(右道)의 지역적인 환경과 스승 남명 등의 학풍(學風)을 전승한 분이니 출처지도에 있어서는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광해왕이 즉위시 선생은 봉직랑(奉直郞 - 종5품)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해정권은 왕의 이복(異腹)형인 임해군을 제거코져 사단을 일으켰다. 이에 한강선생은 전은설(全恩設 - 無罪)을 주장하다가 배척당하니
선생 또한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때 선생은 말하기를 "떠나지 않으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광해초기에 임해군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을 당하여 동계(桐溪)는 제주도 대정, 무인 조직(趙稷)은 남해, 오장(吳長)은 토산(황해도)으로 유배되는 변란(變亂)이 거듭되었다. 이때 선생은 참기 어려운 신변위헙을 겪으면서도 오직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인심을 맑게 하는데 힘쓰면서 유배중인 지사(志士)들에게 재기를 기약하였다.

삭명사판(削名士版 : 과거의 모든 벼슬을 몰수한다는 것으로 선비에게 내리는 최대의 형벌 ) 되었다(선생 64세)
광해정권에서는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아끼어 북인편으로 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모진 형벌로써 다스리고져 하였다. 광해정권이 내세우는 선생에 대한 죄목을 열거하면, 조정대신을 모욕하고, 적을 찬양한다(동계(桐溪), 사호(思湖), 조직(趙稷) 등)는 것이었다.
이때 북인정권에서는 정인홍과의 옛 관계를 회복하라는 유인도 있었지만 선생은 나는 귀인의 문전(門前)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여 거절하였다. 가혹한 형벌이 예상되었지만 대관(台官)으로 조정에서 근무하는 조정립(曺挺立)의 구원으로 삭명사판에 그치고 말았다. 어떠한 형벌이 닥쳐도 요지부동인 선생은 언제나 태연하게 정주학을 공부하고, 의리사정(義利邪正)을 강론하니 모의지사(慕義之士)가 사방에서 운집했다고 하였다.

고령현감에 임명되었지만 6개월만에 사직했다. 광해정권은 인조반정으로 끝이나, 서인정권에서는 광해정권에 항거한 인사들을 등용하였는데(70세) 6월에 부임하여 11월에 사퇴했다. 허미수와 장현광 등의 격려서신이 왔지만 경상우도에 대한 차별과 조도인의 지니친 득세 등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선생의 교육과정

11. 선생(先生)의 교육과정(敎育課程)
선생의 공부는 수기(修己)에 있었고, 수기의 도달점은 안자(顔子)가 됨에 있었다. 때문에 대과(大科)를 통한 벼슬길 보다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파악코져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문사(文辭)는 학문의 끝이다. 대본인즉 성리(性理)에 있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서 그만 두지 않으면 반드시 마음으로 얻은 바 있을 것이라(文辭古人以爲末技 則所課大本者 不在於性理上乎  自內至外 自始之終 孜孜乾乾  必有得於審 樂於己者矣)하였다

"논어, 맹자를 숙독하고, 성리대전 및 주자서절요를 독파하여 마치면 근사록 심경을 머리에서 끝까지 관통하여 완전한 내것으로 만든다면 자연히 얻는 바 있고, 대(大)를 기약치 않아도 대도(大道)할 것이며, 나가고 싶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나가게 되며, 공부 차제(次第)는 명료하게 눈과 마음에서 밝아져 우환이나 곤고(困苦)가 자신을 침범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리대전 중에 심성정(心性情) 이기(理氣)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중 왕장문답부권(往張問答附卷)은 가장 긴요하다 하였다. 배워서 도를 알고, 공부하여 경(敬)에 이름이 고인(古人)이 말하는 정(精)이라고 말하였다.

경자(敬字)공부는 동정(動靜)을 관통하고, 종시(終始)를 밝힘이니 처음은 장주(張朱)에서 다음은 양정(兩程)으로 나아가야 한다. 잘못하면 선(禪)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경계할 일이다.

공부에서 의심나는 곳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남이 의심나는 것으로서 남에게 정(正)을 구함은 스스로의 공부가 아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면 남이 의심하지 않는 것에 의심이 생기는 법이니 이것을 반복해서 연구하여 밤낮 되풀이하면 끝내는 얼음이 풀리듯 풀릴 것이라 하였다.

도를 구하는 공부는 사서(四書)와 정주(程朱)를 가지고 숙독하고, 반복하여 힘써 행해야 한다. 시, 서, 역학은 모두가 적당하지 않으니 참고하기 바란다(求道工夫四書及程朱之書 孰讀反得尋思一力行可也)

조일장(趙日章 :조경의 字)에게 준 서신은 성정(性情)서에 힘쓰고, 오로지 학문에 힘쓰면 천지의 광대함이나 일월의 밝음 등이 옛날에 비유가 안될 것이니 그칠 수 있는 곳에서 그치고.(可止而止) 벼슬할 수 있는 곳에서 벼슬해야 한다.(可仕而仕)

과거공부를 경계하였다. 선생은 이응백(李應白)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공은 과업(科業 - 과거공부)에 치중치 말 것이다. 오로지 심지(心地)공부에 힘쓰면 문호계제(門戶階梯)가 자연적으로 밝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한강언행록에서 한강의 교육과정을 소개하였다. 한강은 주자관계 학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대전(朱子大典)에 심력을 경주하였고, 서산심경, 심경발휘와 예서(禮書), 천문, 지리, 의학, 관혼의례 등에도 힘쓰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선생의 건강관리법

12. 선생(先生)의 건강관리법(健康管理法)고 취향(趣向)
선생은 일경지공(一敬之功)으로써 병중백약의 근본으로 삼았다(病中百藥之本乎). 경공부는 심지를 편안케 할 뿐 아니라 만병에도 근본이 됨을 강조하였고, 주자의 가르침(朱子亦言)이라 하여 단전호흡법을 말하고 있다. "조용한 방에 단정하게 앉아서(靜坐淨室) 코 끝을 직시하고(直視鼻端) 기운을 아랫배에 주면(下氣腹底 )자연히 화기가 가득하니(則自然和氣) 이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 뿐 아니라( 此不惟養疾之方) 양기양심의 법도되는 것(兼亦養氣養心之法)이니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可試爲之)"이라고 사랑하는 제자 조직에게 서신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의 건강법으로서 "모든 생각은 정(精)하게 하고, 복잡하게 생각지 말것이며, 화평하고, 쾌할하여 근심에 이끌리지도 아니함이니 이렇게 하면 끝내는 나의 강용(剛勇)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형운(盧亨運)에게 주는 건강법
여기서도 역시 단전호흡법을 권장하고 있다. 노형운이 병으로 고생하기에 선생은 "조용한 방에 단정하게 앉아서 외부적인 번잡을 쓸어 버리고, 코끝의 흰점을 익히 보면서 심간(心肝)의 기운으로 하여금 배밑으로 내리는 것으로 이것을 승룡복호(升龍伏虎)의 법이라고 하여 매일 시행하면 약 천첩을 먹는 것보다 좋으니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취향(趣向) : 선생의 문인 조직이 선생에게 올린 답서에는 유자와 동백에 대한 것이 있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유자와 동백에 관한 말씀이 있는데 "이것들은 얻을 수는 있으나 화분에 간직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기록되어 있다.(前敎海柚冬栢 則可以得之 而得益之路 甚難慮慮

선생께서 그 당시 78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물론 건강한 체질의 탓도 있지만 위에서 서술한 단전호흡법을 매일 실시하여 몸과 마음을 단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선비들은 보약으로 모든 건강은 해결된다고들 생각했는데 선생의 생각은 특이한 곳이 있기에 장수했다고 볼 수 있고, 그때 이미 유자(柚子)나 동백(冬栢) 등의 화분을 가꾸었다는 취향을 보아도 선생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여유가 있고, 대단한 선각(先覺)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계선생 일기

일기(日記)는 선생의 개인 일기인데 161쪽 중 98쪽으로 선조 22년에 시작하여 거창, 합천, 고령, 성주, 현풍 등지의 사람들과의 교우관계가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이 지역 역사고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암의 의병활동 및 전란관계가 아주 간단 간단하게 일기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병사적은 의병 三장사적이라 했는데 내용에는 정인홍, 김면, 이향, 장응린, 곽재우, 이대기, 전치원 등의 의병사적과 황석산성사적, 최발사적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인홍관계 사적이 많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특수한 관계였음을 짐작케 한다. 의병 三장사적은 정인홍, 송암, 망우당, 그리고 이형, 장응린, 최발의 사적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정인홍관계 기록은 교유대사헌서(敎諭大司憲書) 등 네편인데 선생과 내암관계를 추측케하는 것으로 뜻이 있다. 의병사적(義兵事蹟)에서 정인홍을 선생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계선생일기(茅谿先生日記) 해제(解題)
모계선생 일기는 선생이 임진왜란 3년전인 기축년 선조 22년(서기 1589) 1월부터 선조 26년 계사년 4월까지 약 4년간 4개월간 기록한 선생자신의 일기와 모계관계 기록이 첨부된 전체 161쪽 분량의 필사기록이다.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으로 가로 18.9cm, 세로 28.2cm 크기로 한면은 대개 14행, 1행은 37∼38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지를 접어서 양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사람의 필체로 보아진다.
선생은 명종 9년(서기 1554) 6월 14일, 가조현 용산에서 아버지 학산(學山) 문산두(文山斗)와 함양오씨 부인의 소생이다. 선세(先世)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단성(丹城)이고, 그후 함양 3세조인 문웅(文雄∼현감)때 거창으로 이거했다. 선생의 벗은 윤경남(尹景男), 오장(吳長) 등이고 스승은 오덕계(吳德溪)와 정구(鄭逑)선생이었다.

 

모계선생의 평론(評論)

행장(行狀)에 나타난 선생
선생의 행장은 미수 허목(許穆)이 찬술했다. 미수는 조선 숙종때의 명신으로 시호는 문정(文正)인데 정한강의 문인이었다. 미수는 벼슬이 우의정에까지 올랐는데 조경 등과 같이 남인(南人)으로 영남일대의 남인들과 교분이 두터웠고 아버지 허교(許喬)가 거창현감으로 재직할 때 거창에 와서 이곳 선비들과는 교우가 많았는데 모계공에게는 스승으로 대하였다.
허교는 정사년에 부임하여 기미년에 갔다고 하니 광해 10년(서기 1617)에서 광해 12년, 약 3년간으로 모계, 용주, 미수 등은 광해정권의 최고조에 달한 탄압을 받으면서 학문을 쌓아 재기를 도모하던 시기였다.
허교(許喬)가 거창현감으로 재직시 세력가의 은폐로 그 시비를 가리지 못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여 곽재우가 탄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알길이 없다. 미수는 모계재에 매일같이 방문하여 학문과 시(詩) 사(詞) 등을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선생의 교화와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6세에 이미 독서하고, 9세에 상서(尙書)에 대통하였다. 남명의 장례에 참석하여 예(禮)가 무엇인가를 보았다. 덕계(德溪)와 한강(寒岡)을 스승으로 공부하고, 임란 때는 의병을 창의했는데 송암대장이 병사 후에는 그 뒷 일을 밭아 잘 처리하였기에 존경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유성룡과 김우옹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광해정권 때는 귀향하여 경상우도의 풍속이 크게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강학 등으로 인심을 맑게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하는데 전력하다가 삭명사판의 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에는 고령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도(道)가 더욱 쇠(衰)함을 보고는 귀향하였다. 선생의 천품은 고매(高邁)하고, 일찍이 구도(求道)의 뜻이 있어 군자의 문에서 수학하여 뜻을 얻었으니 그 광채가 몸에서 빛나고, 화하면서 의젓하고, 곧으면서 관용하며, 공경하면서 예절이 있으며, 은둔하되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궁하되 의를 잃지 않으며, 즐거워 하되 근심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군자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묘지명(墓地銘)에 나타난 선생
묘지명(墓地銘)은 선생의 문인 용주 조경(趙絅)이 찬술했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으로 서울 태생인데 26세에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이이첨의 간청을 물리치고, 거창(居昌)에 내려와서 장팔리에 살면서 선생의 문하에 출입했다. 거창에 살 때 자기의 조부까지 모두가 와서 몇십년 살았다고 전한다. 인조반정 후 벼슬길에 나가지만 학문하여 대과에 급제하여 이조(吏曹), 형조(刑曹) 등 판서와 판중추에까지 올랐다. 선생이 가장 아끼는 문인중의 한사람이었다.
묘지명 첫머리에는 정인홍과의 관계가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는 정인홍과의 관계가 밀접했지만(제자?) 북인들의 실질책과 남서인들의 명분론은 상합이 불가능하여 귀향하였다. 혹은 모르는 사람들은 정인홍과의 관계를 개선토록 권고 했지만 "나는 평생 귀인의 문은 모르는 사람이라 하여 거절하고, 의리사정을 논하니 의를 쫓는 사람들이 문전에 가득했다."고 하였다.

문하에는 곧은 선비 조직(趙稷)이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광해정권에 항소하여 인목대비의 유폐를 강력하게 비판하다가 심한 곤장을 맞고, 남해로 유배되니 선생의 부식강상(扶植綱常)이 더욱 밝아졌다. 선생이 동몽교관으로 재직할 때는 서울의 사대부들이 다투어 자제를 교육케 하였고, 선생은 먼저 제자직(弟子職)을 설치하고, 예로써 움직이니 제자들이 이에 따라하니 그들의 예하는 모양만 보아도 저 소년이 누구의 제자인가를 알았다고 전한다.
저는(조경) 저의 아버님에게 이끌리어 선생의 문하에 들어왔다. 선생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은 백수여일(白首如一)하고, 이기학(理氣學)은 이미 광명(光明)의 경지에 들었다. 선생의 좌우명과 자성록(自省錄) 등은 탁세를 맑게하고, 강상을 부식케 하였다.(좌무여과 자성록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저는(조경) 처음에는 아버님 손에 이끌리어 입문하였지만 사사(師事)하여 지금은 백발이 되었다. 지금까지 선생의 게으른 빛과 근심하는 안색을 보지 못하였고, 후진을 언제나 장려하였으니 선생이야말로 참다운 독실(篤實), 인후(仁厚)한 군자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만사(輓詞) 및 제문(祭文)에 나타난 선생
문인 정시수(鄭時修)는 만사에서 이르기를 "우리 고을의 문운(文運)이 오랫동안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선생으로 인해서 비로소 문풍(文風)이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조경(趙絅)은 제문에서 이르기를 "맡은 바 반드시 주정(朱程)이고, 강(講)에는 반드시 시(詩) 서(書)이다. 이단은 반드시 거절되었고, 오리(奧理)는 꼭 해부되었으며, 노장(老莊)이 손 가까이 미칠까 두려워 하였고, 공리(功利)가 내 입을 더럽힐까 근심하였으니 참으로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장 아끼는 제자 조직(趙稷)은 제문에서 이르기를 "선생은 강물과 태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추월(秋月)의 정기로서 중화(中和) 되었다. 일찍이 사문에 올라 정학(正學)에 종사하니 천리가 독실하고, 체용이 구비하였다"고 찬술했다. 어릴 때부터 어언 40년동안 때로는 유배되어 천리를 격하여 있어도 바다와 산천을 사이에 두고, 선생을 그리워하고, 가르침을 주고 받음이 저 차가운 달(月)은 알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만사(輓詞)가 문집(文集)에 전하는 사람으로는 조임도, 조정립, 임진부, 정오, 변창후, 정시수, 조경, 유진, 조직, 서계서원 유생(儒生), 윤사임, 박황, 이응백, 이준향, 서숙, 이찬, 정필달 등이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상의 선생
선생의 자(字), 호, 관향, 생년, 스승, 창의, 효행, 모계(茅谿)에 서재를 짓고, 호를 계(溪)를 계(谿)로 고침, 김우옹, 유성룡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감.
광해정권때 귀향, 삭명사판(削名士版) 당하였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리와 사정(邪正)을 강론, 반정후 고령현감으로 임명, 몇 달후 사직, 78세로 사망, 임종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부인을 멀리하였다.

이정휘사우록(李晴暉師友錄), 예조원사록(禮曺院詞錄), 용원서원상량문(龍源書院上樑文), 봉안문(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강당중수상량문(講堂重修上樑文), 한강선생답서(寒岡先生答書), 장려헌답서(張顯光答書), 정우복답서(鄭遇伏答書), 유심춘(柳尋春)의 문집 서문 등이 있으나 모두가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자료 :거창군청제공

 

모계선생 저서

선생의 문집(文集)이 이루어진 것을 몰세(沒世 ;1631년) 후 약 200년 후인 기축년(己丑年)이라고 하니
순조29년(1828)인 듯하다.(柳尋春의 문집 서문에 의함) 그동안 많은 세월과 혼란, 그리고 후손들의 영락(零落) 등으로 원래의 많은 양에서 줄어든 것 같다. 그 대요(大要)를 보면 아래와 같다.
시(詩)∼3수, 만사(輓詞)∼16수(한강, 원천, 영호, 삭주 등), 부(賦) 2, 소(疎)∼2, 서간(書簡)∼52(상 한강, 여 오익승, 여 조지원 등), 잡저(雜著) 5(황석산성사적, 김송암사적 등), 발(跋) 1, 제문(祭文) 4, 묘지(墓誌) 1. 행록(行錄) 3, (한강어행록 등), 모계일지(茅谿日誌),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跡) 및 사우록(師友錄)

시(詩)에 있어서 금한(昑旱)의 일절을 소개한다.
농사철은 비가 없어서 모두들 단비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비 오지 않는 저 푸른 하늘을 원망하기 보다는 권세부리는 관원(官員)을 더 원망한다고 서술하고 있다(不怨彼蒼者 惟怨居 軸)

만(輓) : 윤여술(尹汝述), 경남(景男) 갑인(甲寅, 광해 7년, 서기 1614) 만사 16수 중
영호 윤경남을 조의하는 시는  
    少而壯而同遊 同學(소년 장년시절 같이 놀고 배웠다)
    知志慕芳 噫之之薔 基 基慽 白頭芳噫(뜻을 알고 사모하니 동고동락이 새삼스럽다.)
    一死一生 庵忽今朝 天曷故芳(슬프도다! 하나는 죽고 삶이 문득 오늘에 이르니 하늘은 무슨 까닭인고,)
    噫老友茅谿順甫 情不能成文芳噫(늙은 벗이 능히 글을 이루지 못하니 슬프다.)
선생은 14세때 영호(營湖;당시12세)를 만나 아버지인 학산공(學山公)에게서 수학한 이래 영호가 죽을 때까지 한번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때는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김면(金沔)과 같이
선무원종공신록권(宣務原從功臣錄券)을 받기도 하였다.
영호(營湖)는 운봉현감 재직시 사망했기에 선생은 영호의 운구(運柩)를 도중에서 맞이하여 대성 통곡하였다. 선생의 만사(輓詞)는 스승인 정한강, 전원천, 변삭주 등으로 이어지는데 한강(寒岡)선생과 박이장(朴而章)에 대한 만사는 문장형태로 장문(長文)으로 진술되고 있다.

부(賦)에는 사자언지(四者言志)와 소성약천성(少成若天性)이 있는데 사자언지는 선생의 철학이 담겨진 내용으로 선비로서 정치를 걱정하고, 예(禮)와 종묘(宗廟)에 뜻을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간상행(日間常行)과 자연에 순종하는 생활이 성인(聖人)의 뜻이라고 갈파하였고, 소성약천성에서는 선생 성리학(性理學)의 대강을 피력한 것으로 인간의 심성(心性)은 순선(純善)한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박탁(駁濁)의 차이가 있으니 수양과 교육의 필요성이 있고, 특히 어릴 때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하였다.

소(疏)에는 대영유신리최수우소(代嶺儒伸理崔守愚疏)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최영경(崔永慶)은 원래 서울의 사족(士族)으로 학문과 선비로써의 덕이 높아 6품직에 벼슬을 받은 사람으로 진주에 와서 살면서도 충군(忠君), 애민(愛民)하였는데 방자한 무리의 무고(誣告)를 받아(정여립 역모사건 때)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선조왕께서는 무고한 간신(奸臣)들을 벌주고, 선량한 선비를 구하여서 선비나 백성으로서 억울함이 없는 대명천지(大命天地)가 되도록 요청한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최영경은 이 상소문이 올라가기 전에 이미 옥사(獄死)하고 말았기에 한자리에 모여 최영경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상소문을 선생에게 의뢰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학문(學問)과 명망(名望)을 짐작할 수 있다.

대인응지소(代人應旨疏)
이 상소문은 을축 12월 선생 72세(인조 3)서기 1625년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서는 선생이 고령현감에 임명되고 난 후에 상소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을 보면 인조왕은 훈신(勳臣)의 발호(跋扈)와 평안감사 이상길의 부당한 처리 및 군정(軍政)과 이도(吏道)의 확립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붕당의 폐단 및 국왕으로서의 수기(修己)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서간(書簡∼편지)이 제일 많은 편이다. 그 당시에는 우편제도가 없었기에 편지는 모두가 인편(人便)으로 전하는 사정으로 원거리에서 소식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경우를 보면 가조(加祚) 용산(龍山)이나 월천(月川) 모곡에 앉아서 서울이나 남해(문인조직이 남해에 유배당하고 있었다.) 황해도 토산(오사호 유배지) 등지까지 사람을 보내어 서신을 여러 차례 내왕케 하였다.
하인(下人)이나 인편을 이용하는데 모두가 몇백리 길을 보행으로 왕래하였다. 말(馬)을 이용한다는 것은 특수한 사람 이외는 불가능하였다. 지금 전하는 52건의 서간중에는 조경, 허목, 장현랑, 정경세, 오장, 정구, 사위(羅子中), 아들(忠俊) 등 50여건이 보이는데 서신을 통해서 사상이나 포부, 스승에 대한 가르침, 제자에 대한 교육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직(趙稷∼문인)에 대한 편지 속에는 독서의 방법, 공부하는 책의 선택, 수양하는 덕목(德目), 건강법(단전호흡)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잡저(雜著)
이곳에는 향토에 관한 기중한 사료(史料)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중의 사적(史蹟), 황석산성사적, 산제동입원창규(山祭洞立院創規) 등으로 임진왜란 중엔 선생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들이니 귀중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선비들은 향토에 대한 사적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데 비하여 선생은 향토사(鄕土史)에 무게를 두고, 후세에 남겼다는 것은 남다른 식견(識見)이 없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발(跋)
발(跋)에는 연평답문질의발(延平答問質疑跋)이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의 연원에 대한 내용으로 성리학은 연평 이선생(주자의 스승)에 의하여 그 뿌리가 확립되었다는 것으로 오덕계선생이 퇴계선생을 찾아서 약 한달동안 머물며, 상호 토론한 요지를 문장화시킨 것이다.

제문(祭文) : 제문(祭文)에는 정한강, 오익승(오장), 윤영호 등을 조문하는 내용이다.
묘지(墓誌) : 묘지(墓誌)에는 변벽(성균새원 구산 변공묘지)의 것이 있다.

한강선생언행록(寒岡先生言行錄)
한강은 퇴계와 남명의 수제자로서 학문이나 도덕이 특출한 선비이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 생사당(生祠堂∼살아있을 때 사당에 뫼시었다)을 주민들이 정성으로 지을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극진한 추앙을 받은 분으로 그 제자는 수백명이었다. 한강은 선생을 가장 신임했고, 선생은 스승으로 한강을 가장 존경했다.

행록(行錄)
선생은 타인의 행장이나 행록, 묘갈명 등에는 극히 신중한 편으로 자신이 직접 상면한 분이 아니면 저술치 않는 것 같기도 느껴진다. 구산선생의 묘지(墓誌)는 극히 간략하고, 두건의 행록 또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수식(修飾)이나 과장(誇張)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계일기(茅谿日記)와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蹟)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부터 시작으로 임진 이듬해 즉 송암(松庵) 김면장군이 사망하여 임진 의병활동(義兵活動)이 사실상 마감될 때까지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문헌으로 국가적인 사료(史料)이다.
의병삼장사적, 사우록 등이 있는데 후인들의 가필(加筆)과 삭제 등이 있는 듯하고, 내암문집 등 내용과 중복되는 부분도 눈에 띄인다. 모계일기 등도 선생의 친필이 아닌 듯하다. 그 해제(解題)는 별지와 같다.
임진왜란 때는 송암의 참모로써 헌신하였기에 선무원종공신록권(三등)을 받았다. 선생은 동몽교관, 사헌부감찰, 고령현감을 역임했는데 78세로 졸했다. 용원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송암실기에는 모계수기(手記), 영호실기에는 모계수기략(略), 학암집(鶴巖集)에는 문모계위수기라고 인용되고 있다.
이 자료는 내용으로 보아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기, 의병사적, 정인홍관계 기록, 만사, 서(書), 기타 사우록(師友錄)이다.
만사와 사우록은 문집 간행상 필요하여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할 때 일기, 정인홍관계 기록, 의병기록 등은 선생이 직접 쓴 것이고 만사, 사우록 등은 후손이 첨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컨데 이 모계일기(茅谿日記)는 우리 향토사(鄕土史)를 연구하는데 가장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향토사료는 본 일기와 영호실기 및 함양 출신의 정경운이 저술한 고대일기 삭주문집, 석곡문집 등이 있지만 거창의병군(居昌義兵軍)을 인솔한 책임자가 직접 기록했다는 것과 선생을 중심한 당시 문인들의 내왕과 생각들까지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라 아니할 수 없다. 가조의 용원서원(정현제교수 논문참조)에 보관되어 있다.